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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1월18일(목요일) 강화 나들길 제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탐방기
탐방지 : 강화 나들길 제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강화 나들길 제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오색 깃발 휘날리며 자신을 모시러 온 영의정을 보고 땅에 엎드려 사또님 살려달라고 울먹인 천애 고아 강화도령 원범이 강화도 처녀 봉이와 뛰어놀며 사랑을 나눈 사연이 굽이굽이 묻어나는 길이다. 짧은 학문과 얕은 경륜에 대한 자격지심, 세도 정치가들 때문에 왕 노릇도 제대로 못한 비운의 왕, 짧은 재위기간 내내 강화도의 산천과 정인(情人) 봉이 생각으로 가슴앓이 하다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병사한 원범이 봉이와 나란히 거닐며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구중궁궐에 머문들 마음이 지옥인데, 농사 짓고 나무나 하면서 무지렁이 총각 원범으로 살았다면 그렇게 단명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내내 떨쳐 버릴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의 길이다.
강화 도령 원범이 5년간 살았던 용흥궁을 보고 강화도 처녀 봉이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 청하동 약수터를 지나 강화산성 남쪽 정상부에 있는 남장대를 거쳐 솔숲 우거진 노적봉 입구까지 고즈넉한 숲길이 이어지는 사랑의 길이다.
남장대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 쉽게 내려가고 싶지 않은 정경이 발 아래로 펼쳐진다. 눈이나 비가 오면 남장대 오르는 길이 다소 미끄러울 수 있어 스틱 등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탐방코스 :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1.4km)~대한성공회 강화성당~(0.1km)~용흥궁~(1.1km)~용해사~(1.0m)~청하동 약수터~(0.2km)~거북바위~(0.3km)~강화산성 남장대~(1.6km)~국화저수지~(3.9km)~충렬사~(1.3km)~찬우물 약수터~(0.4km)~‘개성만두전문점 강화점’ 식당~(2.2km)~철종 외가~(1.2km)~ 백운곡 버스 정류장] (14.7km)
탐방일 : 2024년01월18일(목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강화군 강화읍 : 최저기온 0도C, 최고기온 8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4시간33분 소요)
09:26~09:46 구산역에서 6호선 지하철을 타고 합정역으로 가서 합정역 6번 출구로 나옴 [20분 소요]
09:46~09:55 합정역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 버스정류장으로 가는 3000번 버스 승차 대기
09:55~11:30 3000번 버스를 타고 합정역 버스 정류장에서 강화터미널 버스정류장으로 이동 [1시간 35분, 37개 정류장 이동]
11:30~11:51 인천 강화군 강화읍 중앙로 43 번지에 있는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에서 탐방출발하여 가톨릭 성당인 강화성당과 진무영순교성지를 경유해서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27번길 10 번지에 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으로 이동
[강화와 천주교의 인연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인데, 철종의 할머니인 송 마리아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강화에서 순교했다.
현재 강화성당이 위치한 자리는 조선시대 강화부의 진무영(경기연안을 수비하기 위해 강화읍내에 두었던 진영) 터로서, 탄압과 박해가 있을 때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지금 이곳은 성당과 함께 진무영 천주교 성지가 들어서 있어서 근처를 지나는 순례객들과 여행객들의 발길을 끌고 있다. 여행객의 예상치 못한 관심을 끄는 곳이 순교성지 구석에 자리한 '가톨릭 노동사목의 시작'을 알리는 비석이다. 강화와 노동자라고 하니 현재의 강화와 잘 연관이 되지 않는 단어이긴 하지만, 사실 이 고장은 1930년대에서 70년대까지 100% 목화솜으로 만든 천연 면직물인 소창(기저귀)으로 유명해 직물산업이 번성했다고 한다. 80년대까지 강화의 소창 공장은 약 80군데에 이르면서 전국 각지에서 강화로 이주한 노동자의 숫자는 점점 증가했다.
1967년 가장 큰 규모의 1,200명의 노동자가 근무하던 삼도 직물에서 노동조합이 결성되었고 900명이 가입하면서 사측에서는 노동조합에 적극 가담했던 노동자를 해고하고, 와해시키려는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당시 노동자들의 회합 장소를 제공하는 등, 노조활동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던 강화성당의 전 미카엘 강화 본당 주임신부에게도 여러 위협이 가해지면서 가톨릭 주교단을 비롯해 정치권에서도 큰 관심을 보이기에 이른다.
결국 여기 강화성당에서 주교단이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공동 성명서'를 발표한다. 곧이어 정부에서 대책을 발표했고 해고되었던 노동자 전원이 복직하면서 사태는 마무리되었다. 강화는 고려, 조선의 역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매 순간마다 역사의 층을 계속 쌓고 있었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大韓聖公會 江華聖堂)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에 있는 대한제국기에 건립된 한옥 형태의 대한성공회 성당. 성공회성당. 사적.
1981년 7월 15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2001년 1월 4일 사적으로 번경되었다. 대한성공회의 초대 주교인 코프(Corfe, C. J.)에 의하여 1900년(광무 4)에 건립되었다.
대한성공회의 역사는 1889년 코프가 초대 한국 주교로 영국에서 서품을 받음으로써 시작되는데,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한 사람의 신자도 없었고, 한국인에게 처음 세례를 베푼 것은 주교 축성이 있은 지 7년 뒤인 1896년 6월 13일 강화에서였다.
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인연으로 강화에 제일 먼저 성당을 건립한 것인데, 대한성공회에서는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니게 되었고, 현존하는 한옥 교회건물로서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서유럽의 바실리카(Basilica)양식과 동양의 불교사찰양식을 과감하게 조합시켜 건립하였다.
교회의 내부공간은 바실리카양식을 따랐고, 외관 및 외부공간은 불교사찰의 형태를 따랐다. 목재는 압록강에서 운반하여 사용하였으며, 경복궁 공사에 참여했던 대궐 목수가 건축을 맡았다.
경사지의 대지를 축성하여 입구 계단, 외삼문ㆍ내삼문ㆍ성당ㆍ사제관을 동남향 종축으로 배치한 외부공간의 구성이 불교사찰의 구릉지가람(丘陵地伽藍)과 비슷하며, 성당 앞마당에는 큰 보리수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외삼문 솟을대문은 팔작지붕으로 담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 칸에는 초대 사제(司祭)의 묘비가 서 있다. 내삼문은 평대문에 역시 팔작지붕이고, 서쪽 칸은 종각으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은 정면 4칸, 측면 10칸의 바실리카식 평면구성이다.
성당 내외부에는 서양식 장식이 거의 없는 순수한 한식 목조건축이면서도 교회기능에 충실한 내부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초기 성공회 선교사들의 토착화 의지가 나타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국기독교 역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성당건물이다.]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한옥성당
강화성당은 고요한(Charies Jone Corfe) 초대 주교가 1900년에 축성한 건물로 성베드로와 바우로 성당으로 명명되었다. 당시 건축공사는 궁궐 도편수가 주도하였고 이후 몇차례 보수가 있었으나 처음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성당터는 세상을 구원하는 방주로서의 의미를 분명히 하기 위해 배의 형상을 따랐다. 성당 건물은 장방형(넓이 4칸, 길이 10칸) 중층구조로 전체적인 건축양식은 한국전통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배치와 내부구조는 서양식 바실리카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조화의 아름다움과 토착정신을 드러나게 하였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1981년 경기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처음 지정된 이래 강화군이 인천광역시로 편입되면서 인천지방유형 문화재로 변경되었다가 2001년 1월에 국가사적으로 변경 지정되었다.]
11:51~11:57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을 탐방
11:57~11:58 인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 번지에 있는 용흥궁으로 이동
[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았던 집.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동문안길21번길 16-1 (강화읍, 용흥궁)
크기 : 1동 1,554㎡
조선시대 왕의 장자인 왕세자와 같이 정상적인 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인해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역에서 유래된 말이다. 용흥궁(龍興宮)은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조선의 25대 왕 철종(哲宗)이 강화도에 은거하며 살았던 집을 후일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에 보수하여 단장하고 그 이름을 궁이라고 고쳐 부른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과 어의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대개 잠저는 왕위에 오른 뒤에 다시 짓는다. 용흥궁도 원래는 보잘 것 없는 초가였으나, 1853년 철종이 보위에 오른지 4년 만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뒤 1903년(광무 7)에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
좁은 고샅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둔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비바람에 헐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잠저구기비각 1동, 내전 l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집이다. 내전은 앞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90㎡이다. 별전은 앞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으로 건평이 95㎡이다. 비각은 정사각형으로 앞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내전의 오른쪽과 별전의 왼쪽에 각각 우물이 1개씩 있으나 사용할 수 없다. 별전에는 마루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고, 별전 오른쪽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있었으나 잘 가꾸지 않아 화초가 전혀 없다. 별전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으나, 거의 베어져 밑둥만 남아 있다.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용흥궁의 위치는 강화경찰서 왼쪽 담 옆길을 따라 70m 정도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와집이다.]
[철종(哲宗)
왕은 무력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다
출생 1831년(순조 31)
사망 1863년(철종 14) 12월 8일
본명 이변(李昪), 이원범(李元範)
본관 전주(全州)
가족사
철종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3남으로 1831년(순조 31년), 조선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사저에서 출생했다. 숙종의 서자인 영조의 서자인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자인 전계군의 서자이다. 즉 고조부인 영조까지 직계 조상 4대가 모두 서자 출신이다. 게다가 선왕 헌종보다 항렬이 한 단계 높아서 원래는 종법상 왕위에 오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적자는 커녕 남자 왕족 자체가 거의 씨가 말라 없던 때라 서자고 항렬이고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조선 초기라면 왕위는 고사하고 평생 대궐 구경이나 한 번 할까 말까 했을 그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철종마저 또 아들을 보지 못하면서 결국 다음 왕위는 철종과 혈통상 무려 17촌이나 되는 고종이 잇게 된다.
철종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몇 안 남은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는 적자인 정조 말고도 서자가 몇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은언군으로 이원범의 할아버지다. 은언군은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서6남이 이원범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이광이다.
정조 재위기인 1786년(정조 10년), 이원범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권신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철종의 친부인 이광을 비롯해 식구들이 강화 교동도로 유배를 갔다. 거기서 은언군은 순조 때 신유박해 등을 이유로 사사당하지만, 이광은 살아남아 교동도에서 무려 40년 넘게 살다가 순조 30년인 1830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부로 돌아온다. 그리고 1831년(순조 31년) 전계대원군의 3남 이원범이 태어난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후궁의 아들인 은언군과 첩(전산군부인 이씨)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의 서자인 것이다.
상계군 사건 이후 역적 취급을 받는 은언군을 조상으로 둔 탓에 봉군되지도 못했으나 즉위 전날 순조의 아들로 입적이 되면서 덕완군으로 봉해졌다. 이는 즉위 이전에 예법상 평민에서 바로 왕이 될 수 없으므로 봉군(封君)해서 사대부를 만든 연후 즉위한 것이다. 절차상의 문제이고 고종도 동일한 절차를 거쳤다. 아버지나 큰형은 아예 자기가 왕이 된 후 추봉하였다.
그래도 이원범은 어린 시절에는 그의 형들과 함께 몰락한 종친 신분일지언정 조선 왕가의 몇 안되는 남자 왕족으로 대우 받으며 그럭저럭 살았다. 두 형들과 달리 아버지 이광이 귀양에서 풀린 뒤, 조선 한성부 향교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10살 때 죽은 일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 때인 1844년(헌종 10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형 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계획하면서 다시 기구한 운명이 된다. 이명은 처형되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형 이경응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못가 강화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작은형과 함께 19살 때까지 강화도에서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이원범은 왕족이 아닌 일개 평범한 백성으로 살고 있었다.
이원범이 19살이던 1849년(헌종 15년)에 순조의 손자이자 24대 왕인 헌종이 23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작스레 승하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헌종의 7촌 재종숙이자 순조의 5촌 조카인 이원범을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렬이 왔을 때, 철종은 자신의 할아버지나 큰형(이원경)이 역모에 몰려 죽은 전례가 있어서 이번엔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속으로 도망쳤다. 이때 철종의 형 이욱은 도망가다가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이후 영의정 정원용과 주민들의 설득과 이해로 결국 임금이 타는 가마에 오른다. 그리고 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왕의 잠저로서 '용흥궁(龍興宮)'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다. 은언군은 사도세자가 후궁인 숙빈임씨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부친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은 은언군의 서자다. 철종은 1831년(순조 31)에 전계대원군의 서자로 태어났다.
전계군의 일가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와 사면을 반복했다. 전계군의 이복형인 상계군(常溪君)은 정조 때 홍국영의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유배된 후 죽었고, 아버지 은언군은 신유박해(순조 1) 당시에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상계군의 부인)와 함께 사사되었다. 전계군 본인도 큰아들 회평군(懷平君)이 역모에 연루되어 옥사하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전계군은 세 명의 부인으로부터 각각 아들 한 명씩을 낳았으며,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셋째 아들이 철종이다. 이름은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종사의 부탁이 시급한데 영묘조(英廟朝)의 핏줄은 금상(今上)과 강화에 사는 이원범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광(㼅)의 셋째 아들이다." - 《헌종실록》 권 16, 헌종 15년 6월 6일
당시 이원범은 학문과는 거리가 멀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채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철종은 헌종이 죽은 지 이틀 만인 6월 8일에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그다음 날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당시 철종의 나이 19세였지만 친정을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순원왕후가 처음부터 철종을 왕위 계승자로 점찍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덕흥대원군의 종손인 이하전(李夏銓)으로 후사를 이을 생각이었다. 항렬상 이하전은 헌종의 조카뻘이었다. 그러나 이하전 주위에 벽파 세력이 많은 것을 염려한 안동 김씨 세력이 순원왕후를 설득해 후계자를 바꾸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만한 왕을 앉혀 놓고 풍양 조씨에게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으려고 했다. 철종은 학식도 덕망도 부족한 왕이었다. 덕분에 궁정은 안동 김씨의 손에 좌지우지되었다.
철종은 1851년(철종 2)에 순원왕후의 친척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그가 철인왕후(哲仁王后)다. 이로써 안동 김씨는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며 세도정치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철종에게는 이 밖에 7명의 후궁이 있었다. 철인왕후와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궁인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철종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아저씨가 조카를 잇는다?
철종은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항렬로만 따지면 헌종의 아저씨뻘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통상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은 철종을 순조의 아들로 삼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예조에서도 철종이 종묘에 읽을 축문에 순조를 훌륭하신 아버지라는 뜻의 '황고(皇考)'라 칭하고, 철종을 '효자(孝子)'라고 칭하게 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한 헌종의 생부인 익종(효명세자)에 대해서는, 영조가 경종에 대해서 훌륭하신 형님이란 뜻으로 '황형(皇兄)'이라고 하고 영조 자신을 '효사(孝嗣)라 칭한 것에 의거해 쓰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정하고 보니 철종이 헌종과 헌종비에 대한 축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또 생겼다. 이는 전대 왕을 잇는 왕통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어서 이를 둘러싼 논쟁이 펼쳐졌다. 이른바 기유예론(己酉禮論)이다.
먼저 풍양 조씨인 영의정부사 조인영(趙寅永)은 순조와 익종에 대해서는 예조의 의견대로 하되 헌종과 헌종비에 대해서는 "계승한 왕 신 아무는 아무에게 아룁니다(嗣王臣某昭告于)."라고 쓰자고 주장했다. 반면에 안동 김씨의 편에 있던 홍직필(洪直弼)이라는 학자는 제왕가는 대통을 잇는 것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아저씨가 조카를 잇고 형이 동생을 잇더라도 모두 부자의 도가 있는 것이 만고의 진리라고 하면서도, 친속(親屬)의 호칭에서는 마땅히 형제와 숙질의 호칭을 쓴다고 했다. 따라서 철종은 헌종에 대해서 훌륭하신 조카라는 뜻으로 '황질(皇姪)'이라 하고, 헌종비에 대해서는 '황질비(皇姪妃)'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인영의 주장은 국가의 왕통을 중시한 것이고, 홍직필의 주장은 가문의 혈통상 서열을 중시한 것이었다. 결국 수렴청정 중이던 순원왕후는 두 가지 의견을 절충해 '사왕신(嗣王臣)'의 칭호와 '황질', '황질비'의 칭호를 모두 쓰도록 했다.
그러나 예론 문제는 그리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1851년(철종 2) 6월에 헌종의 삼년상이 끝나갈 때 헌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대신 친(親)이 다한 진종의 신주를 영녕전으로 옮겨야 했다. 이때 안동 김씨 측의 좌의정 김흥근(金興根)과 학자 홍직필은 당연히 진종의 신주를 내와야 한다고 했다. 철종과 헌종이 친속으로는 숙질로 부르고는 있지만 왕통상으로는 철종이 헌종의 대통을 이었기 때문에 부자의 도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철종과 헌종 사이에 부자의 도리를 인정한다면 진종은 4대 제향 범위에서 벗어나므로 신주를 내오는 것이 맞았다. 이러한 의견은 대부분의 대신과 유학자 들의 의견과 일치했다.
그런데 영의정 권돈인(權敦仁)만은 의견이 달랐다. 그는 친속으로 볼 때 진종이 철종의 증조부이므로 4대 제향 범위에 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종의 신주를 내가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익종과 헌종을 대통에서 제외시키게 되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권돈인의 이러한 주장을 종통을 교란시키는 주장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풍양 조씨 세력 중 한 명이었던 권돈인과 이러한 주장을 뒤에서 조정한 김정희(金正喜)가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철종 대의 왕통과 관련한 예론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또한 이 예론의 승자인 안동 김씨 세력은 조정에 남아 있던 풍양 조씨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마음껏 세도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절정에 달한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확산
철종은 1852년(철종 3)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독자적인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항상 안동 김씨 세력의 눈치를 보면서 크고 작은 정사를 모두 그들의 뜻에 따라 처리했다. 일설에 의하면 철종이 점차 학식을 쌓고 정치적인 역량을 키우려고 하자 안동 김씨 세력이 일부러 철종에게 후궁을 계속 들여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철종은 주색에 빠진 채 점점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었고, 안동 김씨 세력의 학정은 더욱 극에 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가운데 더욱 문란해진 삼정과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거기에 자연재해로 인해 농사까지 망치게 되면서 백성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철종과 안동 김씨 세력은 선혜청을 통해 기근이 심한 지방에 돈을 풀어 구제를 시도하고 탐관오리들에 대한 징계를 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는 못했다.
1862년(철종 13), 마침내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전국적인 규모의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민란은 2월 18일에 일어난 진주민란이었다.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경상도 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탐학이었다. 백낙신은 부임하자마자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농민들을 수탈했다.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백성들에게 그가 수탈해 간 액수는 약 4~5만 냥에 이르렀다. 여기에 진주목에서 그동안 관리들이 불법으로 횡령한 세금을 일시에 거둬들이려고 하자 관리들은 이것을 또다시 농가에 부담시키려고 했다. 이에 농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몰락한 양반인 유계춘(柳繼春) 등이 중심이 되어 거사를 도모하고 한글 격문을 내붙여 민란에 가담할 농민들을 모았다. 이들 봉기군은 스스로를 초군(樵軍)이라고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고 향리들을 잡아다 죽였다. 또한 부호를 공격해 재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조정에서는 박규수(朴珪壽)를 진주안핵사로 파견해 민란을 조기에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주민란은 3개월이 지난 후에나 겨우 진정되었다. 한편 진주민란으로 충격을 받은 철종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토로했다.
내가 이번 진주의 일에 대해 실로 개연(慨然)하고도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대령(大嶺) 이남은 옛날에 이른바 추로(鄒魯)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군현(群賢)들이 배출되었고, 풍속도 순후(淳厚)해 비록 집집마다 봉(封)할 만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탄식과 원망과 수심이 깊어 백성들이 잘 살아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지금의 이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본심(本心)으로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첫째는 내가 부덕(否德)한 탓으로 도솔(導率)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지 못한 것이고, 둘째로는 백성을 다스리고 적을 막는 신하가 조가(朝家)에서 백성을 어린아이 보살피듯 하는 뜻을 잘 대양(對揚)하지 못한 탓이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얼굴이 붉어져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 《철종실록》 권 14, 철종 13년 3월 10일
그리고 이 사태를 수습하면서 억울하게 벌을 받는 백성이 없도록 할 것을 특별히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철종의 이러한 마음도 성난 민심을 달래지 못했고, 민란은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계속 번져나갔다.
한편 조정에서는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 41개조를 제정해 반포했다. 나름의 개혁 정책안이었다. 그러나 임시변통에 불과한 이 정책으로는 썩을 대로 썩은 삼정의 폐단을 시정할 수 없었다.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다
철종에게는 부인이 8명이나 있었지만 후사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안동 김씨 세력은 자신들의 세도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만한 종실은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한때 헌종의 후사로 거론되었던 이하전을 끝내 역모로 몰아 사사한 것에서도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이하전은 평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인가? 아니면 김씨의 나라인가?"라고 하며 안동 김씨 세력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그것이 그의 명을 재촉했다.
이렇듯 500년을 이어 온 이씨 왕실의 씨가 말라 가는 가운데 철종은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갑자기 왕위에 올라 결국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지도 못하고 후사도 잇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이다. 이미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니 조선의 국운도 그렇게 서서히 기울어 갔다. 철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예릉(睿陵)이다.]
11:58~12:01 사진촬영
12:01~12:20 인천 강화군 강화읍 청하동길36번길 29-23 번지에 있는 용해사로 이동
12:20~12:37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청하동 약수터로 이동 [약사사 위쪽에 위치]
[강화도령 철종과 강화도 처녀 봉이는 강화도 남산에 있는 청하동 약수터에서 만나 선원면의 찬우물 약수터까지 거닐면서 데이트를 했다고 전해진다.]
12:37~12:40 청하동 약수를 음수
12:40~12:45 거북바위로 이동
12:45~12:51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439-73 번지에 있는 강화산성 남장대로 이동
[남산(222.5m) 정상에 공작새처럼 솟은 화려한 2층 한옥이 남장대南將臺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인 천혜의 전망대이자 장군의 지휘소다. 조망도 장군급이다. 376m의 김포 문수산이 저렇게 높았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장벽을 이루고, 북쪽으로는 개성 땅이 드러난다. 북한이 이토록 가깝다는 것에 놀란다. 날씨만 좋으면 바다 뒤로 북한의 송악산도 한 눈에 들어온다. 읍내 최고봉 남산 아래로는 강화읍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강화읍 뒤편으론 바다가 보인다. 저수지 한쪽에는 낚시꾼들을 위한 방갈로도 설치되어 있다.]
[강화산성(江華山城)
강화도의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 이래의 성곽으로 강화읍과 내가면·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으며, 성문 4개와 첨화루(瞻華樓)·안파루(晏波樓)·진송루(鎭松樓)의 문루, 암문(暗門)·수문(水門)·장대(將臺) 등의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
고려말 몽고군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유린되자 1232년(고려(高麗) 고종(高宗)19) 6월 대몽항쟁을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왕궁과 도성시설이 완비된 것은 아니고, 1234년 1월부터 도성과 궁궐 및 백사 공해(百司公해)를 송도(松都)의 것과 방불하게 만든 것이다. 이때의 성은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이 있었는데, 내성은 주위 3,478척의 규모로 토축이었고, 중성은 1250년에 축성된 것으로 둘레가 2,960여간(間)으로 8개의 성문이 모두 개경(開京)의 도성(都城) 성문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 즉, 동쪽에 선인문(宣仁門)·서쪽에 선기문(宣祺門)·남쪽에 태안문(泰安門)·북쪽에 북창문(北昌門)을 두고, 그사이 방향인 동남에 장패문(長覇門)·서남에 광덕문(光德門)·서북에 선의문(宣義門)·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을 둔 것이 그것이다. 외성은 중성을 보다 외곽에서 수비하기 위하여 해안의 배가 건너는 곳들을 차단하기 위한 대규모의 것으로,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 12월에 각 주현(州縣)의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강화의 동쪽 해협을 따라 3만 7,070척에 이르는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실시하였다. 이 외성도 토성으로 지었으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방어 시설이자 고려의 강도(江都)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보급 물자를 안전하게 지원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270(원종(元宗)11)년 몽고와의 강화조건으로 내성과 외성까지도 모두 헐게 하였다. 조선왕조의 초기에 읍성을 다시 축성하면서 고려의 도성이던 강화성은 변형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군(淸軍)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고, 1677년(숙종(肅宗)3) 강화유수(江華留守) 허질(許秩)이 대폭 개축하여 고려 시대의 규모로 넓혀 석축하였다. 1709년(숙종(肅宗)35)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중수하였고,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이때 체성(體城)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여장(女墻)도 설치하였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성내에는 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서장대(西將臺)가 있었고 수문이 두 개 있었다.
남문은 안파루(晏波樓)·북문은 진송루(鎭松樓)·서문은 첨화루(瞻華樓)·동문은 망한루(望漢樓)라 하였으나, 동쪽 성벽은 시가지화되었고, 성벽은 남북쪽의 산자락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강화산성 복원사
북문 진송루 누각은 병화로 헐리고 석축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에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서문 첨화루는 숙종 38년(1711)에 당시 유수 민진원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1955년 5월 많은 비로 인해 붕괴 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와 성곽의 일부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문 안파루는 서문과 같은 시기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동문 망한루는 2004년에야 복원을 시작하여 2004년 8월에야 마쳤다.]
12:51~12:55 사진촬영
12:55~13:27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에 있는 국화저수지로 이동
13:27~14:15 인천 강화군 선원면 충렬사로 232 번지에 있는 충렬사로 이동
[강화도 충렬사 앞에 선 안내판 전문은 아래와 같다.
“병자·정축호란(1636~1637) 당시 종묘의 위패를 받들고 세자빈과 원손을 수행하여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강화가 함락되었을 때 순절한 김상용을 비롯하여 공조판서 이상길, 장령 이시직, 돈녕도정 심현, 천총 구원일 등을 배향하기 위하여 인조 19년(1642)에 건립된 사당이다. 효종 9년(1658)에 사액되었다.
1657년 훈련정 황선신, 훈련첨정 강흥업을, 1658년에는 금부도사 권순장, 생원 김익겸, 필선 윤전을, 영조 4년(1728)에 좌승지 홍명형을, 1787년에 광흥수 이돈오, 홍익한과 병자호란 때 근왕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가려다 순절한 윤계를 함께 추향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현충사(顯忠祠)라 하였으나 효종 9년(1658)에 효종이 유수 허휘에게 현판과 전답을 내리면서 충렬사로 개칭하였다. 당초에는 유생들이 수련하던 명륜당과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동재·서재가 있었으나 없어졌다. 현재는 사당·외삼문·대문의 양측에 설치된 수직방, 제사 때 제수 용품을 준비하던 전사청, 비각 등이 남아 있다.”
요약하면 병자호란 때 순절한 김상용 등을 모신 ‘사당’이며, 오랜 기간에 걸쳐 배향 인물이 늘어났다, 원래 이름은 현충사였는데, 사액 받으면서 충렬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지금은 없으나 옛날에는 동재·서재도 있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병자호란을 ‘병자·정축호란(1636~1637)’이라고 쓴 이유는 병자년에 시작된 전쟁이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이다. 전쟁 기간이 2년인 것 같지만, 사실은 짧다. 1636년(인조 14) 병자년 12월부터 다음 해인 1637년(인조 15) 정축년 1월까지의 전쟁이니, 두 달 정도이다. 강화가 함락된 것은 1637년 정축년 1월 22일이다.
안내판 내용이 상세하지만, 일부 부적절한 내용이 들어있기도 하다. 우선 눈에 띄는 오류부터 바로 잡는다. ‘인조 19년(1642)’은 ‘인조 20년(1642)’으로 고쳐야 한다. 또 충렬사가 사액 받을 당시 강화유수는 허휘가 아니다. 허휘는 충렬사를 처음 세울 때의 유수이고 임금에게 사액을 요청했던 유수는 민응협이다. 학생들이 공부하던 공간을 ‘명륜당’이라고 했는지도 의문이다. 명륜당은 향교의 강당(講堂) 이름이다. 충렬사에서는 성취당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사당’보다는 ‘사우(祠宇)’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충렬사 안내판에 의하면, 인조 20년(1642)에 세웠고 효종 9년(1658)에 사액되었으며 원래 이름이 현충사였다고 한다. 이게 정설이다.]
14:15~14:17 사진촬영
14:17~14:35 인천 강화군 선원면 중앙로 320 번지에 있는 찬우물 약수터로 이동
[철종이 어린 시절 강화도 용흥궁에서 지낼 때 냉정리에 있던 외갓집을 오가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잠시 쉬어서 물을 마셨던 곳이 바로 찬우물 약수터이다. 또한 철종과 같은 마을에 살던 강화도 처녀인 봉이(鳳伊, 일명 양순이)를 처음 만난 곳도 찬우물 약수터라고 전한다. 철종과 강화도 처녀 봉이는 강화도 남산에 있는 청하동 약수터에서 만나 찬우물 약수터까지 거닐었다. 시간이 지나 임금이 된 철종이 한양 궁궐에서 생활할 때도 강화도에서 만났던 봉이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시켜 찬우물 약수터에서 떠가지고 온 물로 막걸리를 담그게 했다고도 한다. 찬우물 약수터는 강화도 사람들에게 소문난 약수터 가운데 한 곳이다. 언제나 시원한 물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강화도 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찬우물 약수터 앞에는 인근에 사시는 분들이 밭에서 기른 호박, 옥수수, 양파, 땅콩 등 제철 농산물들을 판매하기 위해 좌판을 벌여 놓는다.
찬우물 약수터는 ‘냉정약천’, ‘냉정약수’ 등으로도 불렸다. 강화군 선원면은 고려시대 고종 때 전국 2대 사찰 가운데 한 곳이었던 ‘선원사(禪源寺)’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 선원면에 ‘냉정(冷井)’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는데, 찬우물약수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차고 맛있었기 때문에 마을 지명까지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선원면에는 ‘옥곡물’이라는 우물이 한 개 더 있어서 강화도에서는 찬물이 나는 마을로 유명하다. 현재 찬우물 약수터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선원면 창리에 포함되어 있다.]
14:35~14:38 찬우물 약수를 음수
14:38~14:43 인천 강화군 선원면 강화동로 1004 번지에 있는 ‘개성만두전문점 강화점’ 식당으로 이동
14:43~15:20 ‘개성만두전문점 강화점’ 식당에서 만두전골로 식사 [식사비용 : 11,000원]
15:20~15:45 인천 강화군 선원면 철종외가길 46-1 번지에 있는 철종 외가로 이동
[철종 외가(哲宗 外家)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관리단체 : 파주염씨 대종회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철종외가길 46-1 (냉정리)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853년(철종 4)에 조선 제25대 철종이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에게 명하여 지은 기와집으로, 철종의 외척인 염보길(廉輔吉)이 살았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둔 H자형 구조의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행랑채 일부가 헐려 몸체만 남아 있다. 집 뒤에는 염씨 집안의 묘가 있다.
일반 사대부 집의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법도에 맞도록 고졸(古拙)하게 지은 건물이어서 양반가옥에서 볼 수 있는 기품과 화려함은 없으나 단아하고 고풍스럽다. 평면 구성은 경기 지역의 사대부 가옥 형태를 따랐으나 안채와 사랑채를 一자로 연결시켜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화장담으로 간단하게 나눈 점이 특이하다.]
15:45~15:51 사진촬영
15:51~16:03 인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에 있는 백운곡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6:03~16:11 인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에 있는 백운곡 버스 정류장에서 구래역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70번 버스 승차 대기
16:11~16:55 70번 버스를 타고 백운곡 버스 정류장에서 구래역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 [44분 소요]
16:55~17:02 구래역에서 김포공항역으로 가는 김포골드라인 전철 승차 대기
17:02~18:05 구래역에서 김포골드라인을 타고 김포공항역으로 가서 공항철도로 1차 환승하여 디지털미디어시티역으로 간 후 6호선으로 2차 환승하여 역촌역으로 이동 [1시간3분 소요]
강화 나들길 제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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