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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휴게실 스크랩 대구골목길 투어(13.3.10)
숲길(吉) 추천 0 조회 61 13.03.15 13:27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대구골목길 투어(13.3.10)

 

오래간만에 당일여행을 가기로 했다.

지난 겨울은 너무 길고 건강도 그리 좋지 않아 나들이를 하지 않았는데 삶에 활기가 떨어진 것같다.

 

사람은 역시 활동을 해야 살아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것같다.

몇 년전부터 대구 골목길 투어라는 여행투어가 있었는데 대구 시내에 가서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이 있어 가기를 주저했는데 이번에 여행스케치에서 가격도 착한 여행을 주선하게 되어 가보기로 했다.

 

여행스케치가 여행 주관을 잘 하는 것은 익히 아는 바로 봄을 맞아 만족할 만한 여행이 될 것같았는데 역시나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꼭 한번 권해줄만한 여행이었다.

 

우리 가이드는 김수복가이드라고 상냥함이 돋보이고 진행도 매끄럽게 하는 가이드였다.

 

시청앞에서 출발하여 교대역을 거쳐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대구시립미술관이었다.

 

대구미술관은 2011년 5월 26일에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 대덕산 기슭에 개관하였고 지하1층 지상 3층의 건물에 전시공간과 활동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1층, 2층, 3층 전시실을 둘러보았는데 이 미술관에는 주로 조형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나름대로 볼만했다.

 

다음 행선지는 서문시장이었고 주차는 서문시장 옆의 계성중고등학교에 했다.

 

계성중학교 건물도 역사가 오래된 듯했고 학교내 정원에는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계성중학교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있는 사립중학교이다. 1906년 10월 15일 안의와 선교사가 사택을 임시 교사로 학교를 창설하였다. 1933년 8월 15일 설립자 명의를 안의와에서 현거선으로 변경하였다. 1945년 2월 13일 일제의 강압으로 교명을 대구공산중학교로 변경하였다.

 

1949년 6월 22일 교명을 계성중학교로 변경 인가 받았다. 1950년 4월 28일 법인 명칭을 재단법인 계성고등학교 유지재단으로 변경 인가받고, 계성중학교를 고등학교로 개편하기 위하여 계성중학교를 폐교 인가받고, 계성고등학교 설립이 전국에서 최초로 인가되었다. 1950년 5월 9일 재단법인 계성 2중학교 유지재단 설립을 인가받아 계성 제2중학교가 설립 인가 되었다.

 

1951년 8월 13일 계성 제 2중학교 명칭을 계성중학교로 변경 하였다. 2006년 10월 13일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니라'이며, 교목은 느릅나무, 교화는 개나리다. 방과후 학교로 만화 애니메이션, 포크 기타반, 논술 및 독서반, 축구반, 한자능력 검증대비반, 수채화반, 일본어반, 중국어반, 비젼스쿨, 풍물반, 이야기로 푸는 한국사 등을 운영하고 있다. 클럽활동으로 볼링반, 요리반, 한문서당반 등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학교운동부로는 유도부, 농구부가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277에 있다.

 

 

서문시장은 동산의료원 앞에 있었는데 한바퀴를 돌고 식사하기로 하고 쭉 돌아 보았다.

길가에 장사하는 분도 많았는데 각종 과일, 뻔데기, 야채류, 건어물, 그릇 등이 먼저 보였다.

 

옷들도 팔았고 호떡 등도 팔고 있었으며 한곳에 가니 칼제비라고 해서 칼국수와 수제비를 같이 파는 곳도 있었다.

 

이 서문시장에는 갈비찜도 유명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는데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명성식당이라는 곳에서 된장찌개와 오징이두루치기를 먹었는데 먹을만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부산 남포동에서 유명하던 이승기 씨앗호떡이 여기 서문시장에도 있기에 줄서서 1개 천원에 사먹었다.

 

다음일정은 대구 골목길투어인데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남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부터는 대구시 문화관광해설사인 조영수선생님이 해설을 맡으셨다.

 

먼저 만난 집은 1910년에 지은 미국 선교사 블레어주택인데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선교사 블레어주택을 지나 오면 낮으막한 언덕에 청라언덕이란 글이 새긴 돌이 있는데 어디선가 들어보았다고 했더니 박태준작곡, 이은상 작사의 동무생각이란 노래에 나오는 청라언덕이다.

 

1989년 6월 15일 대구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1910년 무렵 미국인 선교사들이 블레어 선교사를 위하여 지은 집이다. 동산 위의 여러 주택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붉은 벽돌의 2층 집이다. 남쪽은 경사지로 반지하실이 딸려 있다.

 

내부의 구조는 남북으로 약간 긴 직사각형이며, 1층에 있는 베란다는 서쪽에 있으며 현관으로 이어져 있다. 현관 홀을 통하여 응접실, 거실, 계단실을 직접 연결하였으며, 거실을 중심으로 침실, 식당, 부엌 등이 있다. 2층에는 구자형(口字形)의 계단 홀을 중심으로 침실과 욕실이 3개 있으며, 현관 위의 베란다에는 선룸(sun room)이 있다.

 

외관은 콘크리트로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만들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미식쌓기(3단길이, 1단마구리)하였다. 층간에는 벽돌로 톱니모양의 코니스를 만들었다. 창은 결원 아치형에 목재 오르내리창을 달고 밑인방을 벽돌 3단내쌓기로 하였다.

 

지붕은 박공면이 남북으로 향하는 것과 서쪽으로 향하는 것을 ‘ㄱ’자형으로 만나게 만들었으며, 동쪽과 서쪽으로 경사진 지붕면에는 쉐드(shed)형 지붕을 만들었다. 건물의 남쪽과 서쪽에는 목조 베란다를 두었고, 지붕 위에는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굴뚝을 돌출시켰다. 건물 내부는 바닥이 장마루판이고 천장은 널판재를 대고 목재 반자돌림띠를 돌렸다. 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여 벽지를 붙였다.

 

건축이 끝난 뒤 블레어, 라이스 등이 거주해오던 것을 1981년 동산의료재단에서 인수하여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동산병원 의사인 강진성이 거주하면서 내부 마감재를 바꾸었으나, 건물의 형태와 구조는 당시 그대로이다.

 

 

조영수해설사님은 우리 모두에게 동무생각의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다음에 간 곳은 의료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선교사 챔니스 주택이었다.

이 선교사 챔니스 주택의 주춧돌과 계단에는 예전 대구읍성에서 사용되었던 돌을 이용하였는데 우리나라 매국노가 대구읍성을 허물었다고 한다.

 

대구의 중심지를 감싸 안은 4개의 읍성로를 만나면 골목 기행이 시작된다. 기행의 첫 단추는 4성로인 북성로,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다. ‘읍성로’라 해도 성을 볼 수는 없다. 대구 도심지 한가운데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에 서서 그 이유를 찾기로 한다. 경상감영은 경상도의 행정, 산업, 군무를 통괄하는 기구였다. 조선 선조 34년인 1601년 대구 포정동에 경상감영이 자리를 잡은 뒤 대구는 줄곧 영남지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대구 읍성은 영조 12년(1736년) 석성으로 다시 축조됐다.

 

대구 읍성이 헐린 것은 1906년의 일이다. 당시 관찰사 서리로 있던 박중양이 일본 거류민단의 철거 건의를 받아들여 조정의 허락도 없이 성을 허물어버렸다. 1906년 11월 12일 <대한매일신보>에는 ‘읍성을 허물고 나온 성돌 하나에 엽전 한 냥씩을 받고 일본인에게 팔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제는 허망하게 헐린 성곽 자리에 길을 놓았다. 지금의 4성로가 생긴 연유다.

 

 

여기에는 피아노도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로서 당시에는 도로사정이 안좋아서 부산, 낙동강, 그리고 가마로 여기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층에는 침대가 있는데 아직도 의료선교활동을 하시던 분이 90세가 넘는 분인데 대구에 오시면 이용하신다고 한다.

 

챔니스 주택 앞에는 은혜정원이 있는데 선교사 가족들이 이곳에 와서 생활하다가 묻힌 곳이라고 한다.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다.”

 

동산병원 뒤쪽 언덕은 대구지역 기독교의 역사와 희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 흔적들 중 많이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 12명의 묘비가 새겨진 묘지 정원이다. 옛 청라언덕인 이곳은 최근 들어 대구 근대골목 투어로 각광받으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대구지역 복음 전파를 위해 희생된 선교사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은혜정원’. 선교사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이 정원에는 ‘그녀는 죽은 것이….’라는 묘비명이 적혀있는 제일교회 설립자 아담스 목사의 부인 넬리 딕 아담스(Nellie Dick Adams`대구의 첫 순교자)의 묘비를 비롯해 12개의 묘석이 있다. 구한말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가족들이 이곳에 고이 잠들어 있다.

 

한 세기를 넘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893년 미국 베어드 목사가 대구지역에 뿌린 복음의 씨앗은 동산병원 언덕 위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미국 약방’이란 이름으로 진료소를 내고 의료선교를 펼치던 존슨 선교사(의사)는 1899년 제일교회 구내에 ‘제중원’(濟衆院)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진료활동을 시작했다. 이 약방과 제중원이 동산병원의 전신이다.

 

이 당시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름답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 병원이나 학교`교회를 세웠고, 그를 통해 지역사회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동산언덕에는 동산의료원과 선교사 사택, 신명학교, 제일교회 등이 건립되었다.

 

‘은혜정원’이 자리한 이 언덕은 대구의 기독교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려 정착하고, 계명대 동산의료원이 사회에 봉사하면서 성장한 중심지이다.

 

이 정원에는 20대 젊은 나이에 순교한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태어난 지 10일 만에 죽은 선교사의 갓난 아기도 있다. 장로교 선교사뿐 아니라 침례교, 구세군 등의 선교사도 있다. 동산의료원의 외국인 묘지는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와 같은 순교성지로서 대구경북지방 기독교 선교관광에 빠뜨릴 수 없는 명소이기도 하다.

 

어느 묘는 어머니가 묻혔는데 딸이 어머니곁에 묻히고 싶다고 해서 묻힌 묘도 있다고 조영수해설사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구름다리 밑으로 갔는데 여기에는 3.1운동을 하는 벽화와 맞은 편에는 독립유공자 명단이 적혀 있었는데 그 중 김용해선생님은 1919.3.29일날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3.1운동후 일제의 가혹행위로 돌아가셨다고 조영수해설사님이 말씀하셨다.

 

벽화있는 곳에서 제일교회 신관쪽으로 보니 선교박물관이 있었다.

 

선교 박물관으로 이용되는 스윗즈 주택은 계명대학교 초대 학장인 캠벨 등 선교사들의 주거 공간이었다. 한옥과 양옥의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주택의 아름다움 때문에 두 채 모두 대구 지역의 관광 명소로 각광을 받는다.

 

선교 박물관에는 각종 성경과 기타 선교 유물, 기독교 전래과정 등의 사진자료, 성막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특히 중국어 주석을 번역한 최초의 한글 주석 성경(1911년)과 1927년 제작된 성경 사전 등이 보관돼 있다.

 

선교박물관 오른쪽에는 대구 사과나무 100년을 기념하는 기념석과 사과나무가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이 있었는데 그 종탑사이에는 신혼부부가 야외촬영을 하고 있었다.

 

조영수 해설사님이 벌써 제비꽃이 피었다고 해서 보니 정말 제비꽃이 피어 있었다.

 

종탑구경후 3.1운동 90계단을 내려갔는데 원래 현재 있는 제일교회 신관에는 제일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를 허물고 신관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오른쪽에도 아파트가 있었는데 1984 교황방문시에 도시 정비를 위해 세웠다고 한다.

 

계단 좌, 우에는 대구 3.1운동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을 알려주는 사진이 전시되어 그 때 상황을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왼쪽을 바라보니 드라마 사랑비 세트장으로 활용되었던 음악다방 쎄라비가 보였다.

 

계산성당을 가기위해 길을 건너기 전에 계수나무 한그루가 있었고 바닥에는 1920년대 연표가 있어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건너편 건물에는 태극기와 함께 이상화, 서상돈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횡단보도 근처에는 진한 갈색의 조형물이 서있었는데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계산성당은 횡단보도 바로 앞에 있었는데 이 계산성당에서 박정희, 육영수 부부가 6.25중에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계산성당은 대구·경북지역 신앙의 요람

 

조선시대 대구는 수도인 한양과 제법 떨어져 있는 데다 박해를 피해 충청도 내륙 산중이나 대구 인근의 오지로 모여든 천주교 신자들이 모이면서 일찍이 큰 교세를 형성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중심이 바로 계산성당으로,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곳은 현재 주교좌성당으로 대구와 경북지역 가톨릭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전주의 전동성당과 함께 우뚝 솟은 쌍탑이 아름다운 성당으로 유명한데, 원래는 1899년에 지금의 강화도 성공회성당과 유사하게 십자가 형태의 2층 구조에 기와를 올린 한식 건물로 지었으나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이 나서 무너지고 그 자리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이곳 성당의 주임이자 대구대교구의 주교로 임명된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로베르 신부가 설계하고 공사를 지휘하였다. 고딕형식의 건물로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로 쌓아올린 성당 외벽은 100년의 시간을 담은 듯 느낌이 장중하다. 안으로 들어서면 양옆으로 기둥이 줄지어 서 있으며, 기둥 곳곳에는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로베르 신부가 성당을 지을 때 함께 만들어 붙인 것이라 한다.

 

성당 밖 등나무 벤치 옆으로 이인성나무라 이름 붙은 감나무가 있어 사람들을 궁금하게 한다. 일제 때 활동했던 화가로 자신의 작업실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계산성당과 함께 그림 안에 나무를 크게 그려 놓았는데, 바로 이인성나무다.

 

계산성당에 들어가 보니 스테인드글라스가 아주 멋졌다.

 

성당을 나와 천주교 계산문화관 앞 벤치에 앉았는데 근처에 이인성화백이 그린 계산동성당과 이인성나무 안내판이 있었다.

 

조영수 해설사님께서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에 갓쓴 성인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계산성당을 나와 왼쪽으로 도로를 따라 걸었는데 좌측 벽에 근대로의 여행이라는 안내판이 있었고 길에는 이상화선생님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글이 새져져 있었다.

 

가다보니 작은 골목이 있었는데 이 골목이 이상화, 서상돈 선생님 고택으로 가는 길이었다.

조영수해설사님이 이 시에 깝치지 마라라는 글이 있는데 이 글은 대구 사투리라고 하였다.

 

고택 구경을 하고 대구 골목투어는 끝났는데 조영수 해설사님의 해설이 있어 더욱 감동이 있었다.

 

계산동 2가 84번지에 위치한 고택은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이다. 2001년 오래된 고택이 도로로 변할 위기에 처하자 고택보존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대구 시민의 힘으로 이상화 시인의 고택은 빼앗긴 들의 봄을 염원했던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이상화 시인 고택 바로 옆에는 대구 출신 민족자산가이자 국채보상운동 주창자인 서상돈 선생 고택이 있다.

 

 

다음 행선지는 대구수목원 구경을 가는 것이다.

대구수목원은 규모가 상당히 큰 것같았는데 시간 관계상 선인장 온실과 비닐하우스로 된 분재원만 구경하고 왔다.

 

대구수목원 구경을 전부할려면 며칠 걸릴 것았다.

그리고 야외에서 복수초와 노루귀 정도 구경을 했는데 봄, 여름, 가을이 기대되는 곳이었다.

 

대구수목원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곡동에 있는 수목원이고, 전국 최초로 쓰레기 매립장을 수목원으로 조성하여 2002년 5월 개원하였으며, 1750종 35만 본의 식물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수목원의 연면적은 24만 4630㎡이며, 화목원·약초원·야생초화원·침활엽수원·습지원·수생식물원·약용식물원·무궁화원·유실수원·염료식물원·철쭉원·방향식물원·괴석원·죽림원·생태천이관찰원·잔디광장 등 21개의 주제로 꾸며진 전문 수목원이다.

 

보유 식물은 초본류 1300종 27만 포기, 목본류 450종 8만 그루 등 총 1750종 35만 본의 식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밖에 시민들의 자연학습장인 산림문화전시관이 있다.

 

지상 2층 연면적 1650㎡인 전시관의 1층은 비지터센터·제1전시실·체험학습실, 2층은 제2전시실·기획전시실이 있어 아이들과 자연학습공간으로도 훌륭한 곳이다.

 

대구수목원 구경을 마치고 5시경에 대구수목원에서 출발하였는데 기사님이 워낙 운전을 잘 하셔서 9시 10분경에 시청앞에 도착하였다.

 

여행스케치도 알차고 좋은 상품을 기획하여 운영하여 여행객을 즐겁게 하였고 김수복가이드도 훌륭한 가이드를 하였으며 기사님도 안전 운행을 하여 주셔서 행복한 여행이 된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여행스케치가 더욱 발전하여 우리에게 더 다양하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 주시기를 기원해 봅니다.

 

 

오래간만에 당일여행을 가기로 했다.

지난 겨울은 너무 길고 건강도 그리 좋지 않아 나들이를 하지 않았는데 삶에 활기가 떨어진 것같다.

 

사람은 역시 활동을 해야 살아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것같다.

몇 년전부터 대구 골목길 투어라는 여행투어가 있었는데 대구 시내에 가서 무엇을 할까? 하는 생각이 있어 가기를 주저했는데 이번에 여행스케치에서 가격도 착한 여행을 주선하게 되어 가보기로 했다.

 

여행스케치가 여행 주관을 잘 하는 것은 익히 아는 바로 봄을 맞아 만족할 만한 여행이 될 것같았는데 역시나 결과적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꼭 한번 권해줄만한 여행이었다.

 

우리 가이드는 김수복가이드라고 상냥함이 돋보이고 진행도 매끄럽게 하는 가이드였다.

 

시청앞에서 출발하여 교대역을 거쳐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대구시립미술관이었다.

 

대구미술관은 2011년 5월 26일에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 대덕산 기슭에 개관하였고 지하1층 지상 3층의 건물에 전시공간과 활동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1층, 2층, 3층 전시실을 둘러보았는데 이 미술관에는 주로 조형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나름대로 볼만했다.

 

다음 행선지는 서문시장이었고 주차는 서문시장 옆의 계성중고등학교에 했다.

 

계성중학교 건물도 역사가 오래된 듯했고 학교내 정원에는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계성중학교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있는 사립중학교이다. 1906년 10월 15일 안의와 선교사가 사택을 임시 교사로 학교를 창설하였다. 1933년 8월 15일 설립자 명의를 안의와에서 현거선으로 변경하였다. 1945년 2월 13일 일제의 강압으로 교명을 대구공산중학교로 변경하였다.

 

1949년 6월 22일 교명을 계성중학교로 변경 인가 받았다. 1950년 4월 28일 법인 명칭을 재단법인 계성고등학교 유지재단으로 변경 인가받고, 계성중학교를 고등학교로 개편하기 위하여 계성중학교를 폐교 인가받고, 계성고등학교 설립이 전국에서 최초로 인가되었다. 1950년 5월 9일 재단법인 계성 2중학교 유지재단 설립을 인가받아 계성 제2중학교가 설립 인가 되었다.

 

1951년 8월 13일 계성 제 2중학교 명칭을 계성중학교로 변경 하였다. 2006년 10월 13일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니라'이며, 교목은 느릅나무, 교화는 개나리다. 방과후 학교로 만화 애니메이션, 포크 기타반, 논술 및 독서반, 축구반, 한자능력 검증대비반, 수채화반, 일본어반, 중국어반, 비젼스쿨, 풍물반, 이야기로 푸는 한국사 등을 운영하고 있다. 클럽활동으로 볼링반, 요리반, 한문서당반 등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학교운동부로는 유도부, 농구부가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277에 있다.

 

 

서문시장은 동산의료원 앞에 있었는데 한바퀴를 돌고 식사하기로 하고 쭉 돌아 보았다.

길가에 장사하는 분도 많았는데 각종 과일, 뻔데기, 야채류, 건어물, 그릇 등이 먼저 보였다.

 

옷들도 팔았고 호떡 등도 팔고 있었으며 한곳에 가니 칼제비라고 해서 칼국수와 수제비를 같이 파는 곳도 있었다.

 

이 서문시장에는 갈비찜도 유명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는데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명성식당이라는 곳에서 된장찌개와 오징이두루치기를 먹었는데 먹을만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부산 남포동에서 유명하던 이승기 씨앗호떡이 여기 서문시장에도 있기에 줄서서 1개 천원에 사먹었다.

 

다음일정은 대구 골목길투어인데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남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부터는 대구시 문화관광해설사인 조영수선생님이 해설을 맡으셨다.

 

먼저 만난 집은 1910년에 지은 미국 선교사 블레어주택인데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선교사 블레어주택을 지나 오면 낮으막한 언덕에 청라언덕이란 글이 새긴 돌이 있는데 어디선가 들어보았다고 했더니 박태준작곡, 이은상 작사의 동무생각이란 노래에 나오는 청라언덕이다.

 

1989년 6월 15일 대구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1910년 무렵 미국인 선교사들이 블레어 선교사를 위하여 지은 집이다. 동산 위의 여러 주택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붉은 벽돌의 2층 집이다. 남쪽은 경사지로 반지하실이 딸려 있다.

 

내부의 구조는 남북으로 약간 긴 직사각형이며, 1층에 있는 베란다는 서쪽에 있으며 현관으로 이어져 있다. 현관 홀을 통하여 응접실, 거실, 계단실을 직접 연결하였으며, 거실을 중심으로 침실, 식당, 부엌 등이 있다. 2층에는 구자형(口字形)의 계단 홀을 중심으로 침실과 욕실이 3개 있으며, 현관 위의 베란다에는 선룸(sun room)이 있다.

 

외관은 콘크리트로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만들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미식쌓기(3단길이, 1단마구리)하였다. 층간에는 벽돌로 톱니모양의 코니스를 만들었다. 창은 결원 아치형에 목재 오르내리창을 달고 밑인방을 벽돌 3단내쌓기로 하였다.

 

지붕은 박공면이 남북으로 향하는 것과 서쪽으로 향하는 것을 ‘ㄱ’자형으로 만나게 만들었으며, 동쪽과 서쪽으로 경사진 지붕면에는 쉐드(shed)형 지붕을 만들었다. 건물의 남쪽과 서쪽에는 목조 베란다를 두었고, 지붕 위에는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굴뚝을 돌출시켰다. 건물 내부는 바닥이 장마루판이고 천장은 널판재를 대고 목재 반자돌림띠를 돌렸다. 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여 벽지를 붙였다.

 

건축이 끝난 뒤 블레어, 라이스 등이 거주해오던 것을 1981년 동산의료재단에서 인수하여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동산병원 의사인 강진성이 거주하면서 내부 마감재를 바꾸었으나, 건물의 형태와 구조는 당시 그대로이다.

 

 

조영수해설사님은 우리 모두에게 동무생각의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다음에 간 곳은 의료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선교사 챔니스 주택이었다.

이 선교사 챔니스 주택의 주춧돌과 계단에는 예전 대구읍성에서 사용되었던 돌을 이용하였는데 우리나라 매국노가 대구읍성을 허물었다고 한다.

 

대구의 중심지를 감싸 안은 4개의 읍성로를 만나면 골목 기행이 시작된다. 기행의 첫 단추는 4성로인 북성로,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다. ‘읍성로’라 해도 성을 볼 수는 없다. 대구 도심지 한가운데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에 서서 그 이유를 찾기로 한다. 경상감영은 경상도의 행정, 산업, 군무를 통괄하는 기구였다. 조선 선조 34년인 1601년 대구 포정동에 경상감영이 자리를 잡은 뒤 대구는 줄곧 영남지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대구 읍성은 영조 12년(1736년) 석성으로 다시 축조됐다.

 

대구 읍성이 헐린 것은 1906년의 일이다. 당시 관찰사 서리로 있던 박중양이 일본 거류민단의 철거 건의를 받아들여 조정의 허락도 없이 성을 허물어버렸다. 1906년 11월 12일 <대한매일신보>에는 ‘읍성을 허물고 나온 성돌 하나에 엽전 한 냥씩을 받고 일본인에게 팔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제는 허망하게 헐린 성곽 자리에 길을 놓았다. 지금의 4성로가 생긴 연유다.

 

 

여기에는 피아노도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로서 당시에는 도로사정이 안좋아서 부산, 낙동강, 그리고 가마로 여기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층에는 침대가 있는데 아직도 의료선교활동을 하시던 분이 90세가 넘는 분인데 대구에 오시면 이용하신다고 한다.

 

챔니스 주택 앞에는 은혜정원이 있는데 선교사 가족들이 이곳에 와서 생활하다가 묻힌 곳이라고 한다.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다.”

 

동산병원 뒤쪽 언덕은 대구지역 기독교의 역사와 희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 흔적들 중 많이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 12명의 묘비가 새겨진 묘지 정원이다. 옛 청라언덕인 이곳은 최근 들어 대구 근대골목 투어로 각광받으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대구지역 복음 전파를 위해 희생된 선교사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은혜정원’. 선교사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이 정원에는 ‘그녀는 죽은 것이….’라는 묘비명이 적혀있는 제일교회 설립자 아담스 목사의 부인 넬리 딕 아담스(Nellie Dick Adams`대구의 첫 순교자)의 묘비를 비롯해 12개의 묘석이 있다. 구한말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가족들이 이곳에 고이 잠들어 있다.

 

한 세기를 넘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893년 미국 베어드 목사가 대구지역에 뿌린 복음의 씨앗은 동산병원 언덕 위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미국 약방’이란 이름으로 진료소를 내고 의료선교를 펼치던 존슨 선교사(의사)는 1899년 제일교회 구내에 ‘제중원’(濟衆院)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진료활동을 시작했다. 이 약방과 제중원이 동산병원의 전신이다.

 

이 당시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름답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 병원이나 학교`교회를 세웠고, 그를 통해 지역사회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동산언덕에는 동산의료원과 선교사 사택, 신명학교, 제일교회 등이 건립되었다.

 

‘은혜정원’이 자리한 이 언덕은 대구의 기독교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려 정착하고, 계명대 동산의료원이 사회에 봉사하면서 성장한 중심지이다.

 

이 정원에는 20대 젊은 나이에 순교한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태어난 지 10일 만에 죽은 선교사의 갓난 아기도 있다. 장로교 선교사뿐 아니라 침례교, 구세군 등의 선교사도 있다. 동산의료원의 외국인 묘지는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와 같은 순교성지로서 대구경북지방 기독교 선교관광에 빠뜨릴 수 없는 명소이기도 하다.

 

어느 묘는 어머니가 묻혔는데 딸이 어머니곁에 묻히고 싶다고 해서 묻힌 묘도 있다고 조영수해설사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구름다리 밑으로 갔는데 여기에는 3.1운동을 하는 벽화와 맞은 편에는 독립유공자 명단이 적혀 있었는데 그 중 김용해선생님은 1919.3.29일날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3.1운동후 일제의 가혹행위로 돌아가셨다고 조영수해설사님이 말씀하셨다.

 

벽화있는 곳에서 제일교회 신관쪽으로 보니 선교박물관이 있었다.

 

선교 박물관으로 이용되는 스윗즈 주택은 계명대학교 초대 학장인 캠벨 등 선교사들의 주거 공간이었다. 한옥과 양옥의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주택의 아름다움 때문에 두 채 모두 대구 지역의 관광 명소로 각광을 받는다.

 

선교 박물관에는 각종 성경과 기타 선교 유물, 기독교 전래과정 등의 사진자료, 성막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특히 중국어 주석을 번역한 최초의 한글 주석 성경(1911년)과 1927년 제작된 성경 사전 등이 보관돼 있다.

 

선교박물관 오른쪽에는 대구 사과나무 100년을 기념하는 기념석과 사과나무가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이 있었는데 그 종탑사이에는 신혼부부가 야외촬영을 하고 있었다.

 

조영수 해설사님이 벌써 제비꽃이 피었다고 해서 보니 정말 제비꽃이 피어 있었다.

 

종탑구경후 3.1운동 90계단을 내려갔는데 원래 현재 있는 제일교회 신관에는 제일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를 허물고 신관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오른쪽에도 아파트가 있었는데 1984 교황방문시에 도시 정비를 위해 세웠다고 한다.

 

계단 좌, 우에는 대구 3.1운동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을 알려주는 사진이 전시되어 그 때 상황을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왼쪽을 바라보니 드라마 사랑비 세트장으로 활용되었던 음악다방 쎄라비가 보였다.

 

계산성당을 가기위해 길을 건너기 전에 계수나무 한그루가 있었고 바닥에는 1920년대 연표가 있어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건너편 건물에는 태극기와 함께 이상화, 서상돈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횡단보도 근처에는 진한 갈색의 조형물이 서있었는데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계산성당은 횡단보도 바로 앞에 있었는데 이 계산성당에서 박정희, 육영수 부부가 6.25중에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계산성당은 대구·경북지역 신앙의 요람

 

조선시대 대구는 수도인 한양과 제법 떨어져 있는 데다 박해를 피해 충청도 내륙 산중이나 대구 인근의 오지로 모여든 천주교 신자들이 모이면서 일찍이 큰 교세를 형성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중심이 바로 계산성당으로,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곳은 현재 주교좌성당으로 대구와 경북지역 가톨릭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전주의 전동성당과 함께 우뚝 솟은 쌍탑이 아름다운 성당으로 유명한데, 원래는 1899년에 지금의 강화도 성공회성당과 유사하게 십자가 형태의 2층 구조에 기와를 올린 한식 건물로 지었으나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이 나서 무너지고 그 자리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이곳 성당의 주임이자 대구대교구의 주교로 임명된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로베르 신부가 설계하고 공사를 지휘하였다. 고딕형식의 건물로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로 쌓아올린 성당 외벽은 100년의 시간을 담은 듯 느낌이 장중하다. 안으로 들어서면 양옆으로 기둥이 줄지어 서 있으며, 기둥 곳곳에는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로베르 신부가 성당을 지을 때 함께 만들어 붙인 것이라 한다.

 

성당 밖 등나무 벤치 옆으로 이인성나무라 이름 붙은 감나무가 있어 사람들을 궁금하게 한다. 일제 때 활동했던 화가로 자신의 작업실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계산성당과 함께 그림 안에 나무를 크게 그려 놓았는데, 바로 이인성나무다.

 

계산성당에 들어가 보니 스테인드글라스가 아주 멋졌다.

 

성당을 나와 천주교 계산문화관 앞 벤치에 앉았는데 근처에 이인성화백이 그린 계산동성당과 이인성나무 안내판이 있었다.

 

조영수 해설사님께서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에 갓쓴 성인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계산성당을 나와 왼쪽으로 도로를 따라 걸었는데 좌측 벽에 근대로의 여행이라는 안내판이 있었고 길에는 이상화선생님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글이 새져져 있었다.

 

가다보니 작은 골목이 있었는데 이 골목이 이상화, 서상돈 선생님 고택으로 가는 길이었다.

조영수해설사님이 이 시에 깝치지 마라라는 글이 있는데 이 글은 대구 사투리라고 하였다.

 

고택 구경을 하고 대구 골목투어는 끝났는데 조영수 해설사님의 해설이 있어 더욱 감동이 있었다.

 

계산동 2가 84번지에 위치한 고택은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이다. 2001년 오래된 고택이 도로로 변할 위기에 처하자 고택보존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대구 시민의 힘으로 이상화 시인의 고택은 빼앗긴 들의 봄을 염원했던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이상화 시인 고택 바로 옆에는 대구 출신 민족자산가이자 국채보상운동 주창자인 서상돈 선생 고택이 있다.

 

 

다음 행선지는 대구수목원 구경을 가는 것이다.

대구수목원은 규모가 상당히 큰 것같았는데 시간 관계상 선인장 온실과 비닐하우스로 된 분재원만 구경하고 왔다.

 

대구수목원 구경을 전부할려면 며칠 걸릴 것았다.

그리고 야외에서 복수초와 노루귀 정도 구경을 했는데 봄, 여름, 가을이 기대되는 곳이었다.

 

대구수목원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곡동에 있는 수목원이고, 전국 최초로 쓰레기 매립장을 수목원으로 조성하여 2002년 5월 개원하였으며, 1750종 35만 본의 식물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수목원의 연면적은 24만 4630㎡이며, 화목원·약초원·야생초화원·침활엽수원·습지원·수생식물원·약용식물원·무궁화원·유실수원·염료식물원·철쭉원·방향식물원·괴석원·죽림원·생태천이관찰원·잔디광장 등 21개의 주제로 꾸며진 전문 수목원이다.

 

보유 식물은 초본류 1300종 27만 포기, 목본류 450종 8만 그루 등 총 1750종 35만 본의 식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밖에 시민들의 자연학습장인 산림문화전시관이 있다.

 

지상 2층 연면적 1650㎡인 전시관의 1층은 비지터센터·제1전시실·체험학습실, 2층은 제2전시실·기획전시실이 있어 아이들과 자연학습공간으로도 훌륭한 곳이다.

 

대구수목원 구경을 마치고 5시경에 대구수목원에서 출발하였는데 기사님이 워낙 운전을 잘 하셔서 9시 10분경에 시청앞에 도착하였다.

 

여행스케치도 알차고 좋은 상품을 기획하여 운영하여 여행객을 즐겁게 하였고 김수복가이드도 훌륭한 가이드를 하였으며 기사님도 안전 운행을 하여 주셔서 행복한 여행이 된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여행스케치가 더욱 발전하여 우리에게 더 다양하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 주시기를 기원해 봅니다.

 

시청앞에서 출발하여 교대역을 거쳐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대구시립미술관이었다.

 

 

 

 

 

대구미술관은 2011년 5월 26일에 대구시 수성구 삼덕동 대덕산 기슭에 개관하였고 지하1층 지상 3층의 건물에 전시공간과 활동공간을 제공하고 있었다.

 

 

 

1층, 2층, 3층 전시실을 둘러보았는데 이 미술관에는 주로 조형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는데 나름대로 볼만했다.

 

 

 

 

 

 

 

 

 

 

 

 

 

 

 

 

 

 

 

 

 

 

 

 

 

다음 행선지는 서문시장이었고 주차는 서문시장 옆의 계성중고등학교에 했다.

 

 

 

계성중학교 건물도 역사가 오래된 듯했고 학교내 정원에는 산수유가 노랗게 피어 있었다.

 

 

 

 

 

 

 

계성중학교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에 있는 사립중학교이다. 1906년 10월 15일 안의와 선교사가 사택을 임시 교사로 학교를 창설하였다. 1933년 8월 15일 설립자 명의를 안의와에서 현거선으로 변경하였다. 1945년 2월 13일 일제의 강압으로 교명을 대구공산중학교로 변경하였다.

 

1949년 6월 22일 교명을 계성중학교로 변경 인가 받았다. 1950년 4월 28일 법인 명칭을 재단법인 계성고등학교 유지재단으로 변경 인가받고, 계성중학교를 고등학교로 개편하기 위하여 계성중학교를 폐교 인가받고, 계성고등학교 설립이 전국에서 최초로 인가되었다. 1950년 5월 9일 재단법인 계성 2중학교 유지재단 설립을 인가받아 계성 제2중학교가 설립 인가 되었다.

 

1951년 8월 13일 계성 제 2중학교 명칭을 계성중학교로 변경 하였다. 2006년 10월 13일 개교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교훈은 '하나님을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니라'이며, 교목은 느릅나무, 교화는 개나리다. 방과후 학교로 만화 애니메이션, 포크 기타반, 논술 및 독서반, 축구반, 한자능력 검증대비반, 수채화반, 일본어반, 중국어반, 비젼스쿨, 풍물반, 이야기로 푸는 한국사 등을 운영하고 있다. 클럽활동으로 볼링반, 요리반, 한문서당반 등의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학교운동부로는 유도부, 농구부가 있다. 대구광역시 중구 대신동 277에 있다.

 

 

서문시장은 동산의료원 앞에 있었는데 한바퀴를 돌고 식사하기로 하고 쭉 돌아 보았다.

 

 

 

 

 

길가에 장사하는 분도 많았는데 각종 과일, 뻔데기, 야채류, 건어물, 그릇 등이 먼저 보였다.

 

 

 

 

 

 

 

 

 

 

옷들도 팔았고 호떡 등도 팔고 있었으며 한곳에 가니 칼제비라고 해서 칼국수와 수제비를 같이 파는 곳도 있었다.

 

 

 

 

 

이 서문시장에는 갈비찜도 유명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었는데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명성식당이라는 곳에서 된장찌개와 오징이두루치기를 먹었는데 먹을만 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부산 남포동에서 유명하던 이승기 씨앗호떡이 여기 서문시장에도 있기에 줄서서 1개 천원에 사먹었다.

 

 

 

다음일정은 대구 골목길투어인데 계명대학교 동산의료원 남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서 부터는 대구시 문화관광해설사인 조영수선생님이 해설을 맡으셨다.

 

먼저 만난 집은 1910년에 지은 미국 선교사 블레어주택인데 지금은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1989년 6월 15일 대구유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 1910년 무렵 미국인 선교사들이 블레어 선교사를 위하여 지은 집이다. 동산 위의 여러 주택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자리잡은 붉은 벽돌의 2층 집이다. 남쪽은 경사지로 반지하실이 딸려 있다.

 

내부의 구조는 남북으로 약간 긴 직사각형이며, 1층에 있는 베란다는 서쪽에 있으며 현관으로 이어져 있다. 현관 홀을 통하여 응접실, 거실, 계단실을 직접 연결하였으며, 거실을 중심으로 침실, 식당, 부엌 등이 있다. 2층에는 구자형(口字形)의 계단 홀을 중심으로 침실과 욕실이 3개 있으며, 현관 위의 베란다에는 선룸(sun room)이 있다.

 

외관은 콘크리트로 기초와 지하실 부분을 만들고, 그 위에 붉은 벽돌을 미식쌓기(3단길이, 1단마구리)하였다. 층간에는 벽돌로 톱니모양의 코니스를 만들었다. 창은 결원 아치형에 목재 오르내리창을 달고 밑인방을 벽돌 3단내쌓기로 하였다.

 

지붕은 박공면이 남북으로 향하는 것과 서쪽으로 향하는 것을 ‘ㄱ’자형으로 만나게 만들었으며, 동쪽과 서쪽으로 경사진 지붕면에는 쉐드(shed)형 지붕을 만들었다. 건물의 남쪽과 서쪽에는 목조 베란다를 두었고, 지붕 위에는 붉은 벽돌을 쌓아 만든 굴뚝을 돌출시켰다. 건물 내부는 바닥이 장마루판이고 천장은 널판재를 대고 목재 반자돌림띠를 돌렸다. 벽은 회반죽으로 마감하여 벽지를 붙였다.

 

건축이 끝난 뒤 블레어, 라이스 등이 거주해오던 것을 1981년 동산의료재단에서 인수하여 사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금은 동산병원 의사인 강진성이 거주하면서 내부 마감재를 바꾸었으나, 건물의 형태와 구조는 당시 그대로이다.

 

 

선교사 블레어주택을 지나 오면 낮으막한 언덕에 청라언덕이란 글이 새긴 돌이 있는데 어디선가 들어보았다고 했더니 박태준작곡, 이은상 작사의 동무생각이란 노래에 나오는 청라언덕이다.

 

 

 

 

 

 

조영수해설사님은 우리 모두에게 동무생각의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다음에 간 곳은 의료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선교사 챔니스 주택이었다.

 

 

 

 

 

 

 

이 선교사 챔니스 주택의 주춧돌과 계단에는 예전 대구읍성에서 사용되었던 돌을 이용하였는데 우리나라 매국노가 대구읍성을 허물었다고 한다.

 

 

 

대구의 중심지를 감싸 안은 4개의 읍성로를 만나면 골목 기행이 시작된다. 기행의 첫 단추는 4성로인 북성로, 동성로, 남성로, 서성로다. ‘읍성로’라 해도 성을 볼 수는 없다. 대구 도심지 한가운데 위치한 경상감영공원에 서서 그 이유를 찾기로 한다. 경상감영은 경상도의 행정, 산업, 군무를 통괄하는 기구였다. 조선 선조 34년인 1601년 대구 포정동에 경상감영이 자리를 잡은 뒤 대구는 줄곧 영남지역의 중심 역할을 담당했다. 임진왜란 때 무너진 대구 읍성은 영조 12년(1736년) 석성으로 다시 축조됐다.

 

대구 읍성이 헐린 것은 1906년의 일이다. 당시 관찰사 서리로 있던 박중양이 일본 거류민단의 철거 건의를 받아들여 조정의 허락도 없이 성을 허물어버렸다. 1906년 11월 12일 <대한매일신보>에는 ‘읍성을 허물고 나온 성돌 하나에 엽전 한 냥씩을 받고 일본인에게 팔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제는 허망하게 헐린 성곽 자리에 길을 놓았다. 지금의 4성로가 생긴 연유다.

 

 

여기에는 피아노도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로서 당시에는 도로사정이 안좋아서 부산, 낙동강, 그리고 가마로 여기까지 운반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2층에는 침대가 있는데 아직도 의료선교활동을 하시던 분이 90세가 넘는 분인데 대구에 오시면 이용하신다고 한다.

 

챔니스 주택 앞에는 은혜정원이 있는데 선교사 가족들이 이곳에 와서 생활하다가 묻힌 곳이라고 한다.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을 뿐이다.”

 

동산병원 뒤쪽 언덕은 대구지역 기독교의 역사와 희생의 흔적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는 곳이다. 그 흔적들 중 많이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이 12명의 묘비가 새겨진 묘지 정원이다. 옛 청라언덕인 이곳은 최근 들어 대구 근대골목 투어로 각광받으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잦아지고 있다.

 

대구지역 복음 전파를 위해 희생된 선교사들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은혜정원’. 선교사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이 정원에는 ‘그녀는 죽은 것이….’라는 묘비명이 적혀있는 제일교회 설립자 아담스 목사의 부인 넬리 딕 아담스(Nellie Dick Adams`대구의 첫 순교자)의 묘비를 비롯해 12개의 묘석이 있다. 구한말 머나먼 이국땅에 와서 배척과 박해를 무릅쓰고 혼신을 다해 복음을 전파하고 인술을 베풀다가 삶을 마감한 선교사와 가족들이 이곳에 고이 잠들어 있다.

 

한 세기를 넘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893년 미국 베어드 목사가 대구지역에 뿌린 복음의 씨앗은 동산병원 언덕 위에서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미국 약방’이란 이름으로 진료소를 내고 의료선교를 펼치던 존슨 선교사(의사)는 1899년 제일교회 구내에 ‘제중원’(濟衆院)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인 진료활동을 시작했다. 이 약방과 제중원이 동산병원의 전신이다.

 

이 당시 선교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름답게 드러내 보이기 위해 병원이나 학교`교회를 세웠고, 그를 통해 지역사회의 발전에도 큰 역할을 했다. 동산언덕에는 동산의료원과 선교사 사택, 신명학교, 제일교회 등이 건립되었다.

 

‘은혜정원’이 자리한 이 언덕은 대구의 기독교가 지역사회에 뿌리내려 정착하고, 계명대 동산의료원이 사회에 봉사하면서 성장한 중심지이다.

 

이 정원에는 20대 젊은 나이에 순교한 선교사가 있는가 하면 태어난 지 10일 만에 죽은 선교사의 갓난 아기도 있다. 장로교 선교사뿐 아니라 침례교, 구세군 등의 선교사도 있다. 동산의료원의 외국인 묘지는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와 같은 순교성지로서 대구경북지방 기독교 선교관광에 빠뜨릴 수 없는 명소이기도 하다.

 

어느 묘는 어머니가 묻혔는데 딸이 어머니곁에 묻히고 싶다고 해서 묻힌 묘도 있다고 조영수해설사님이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구름다리 밑으로 갔는데 여기에는 3.1운동을 하는 벽화와 맞은 편에는 독립유공자 명단이 적혀 있었는데 그 중 김용해선생님은 1919.3.29일날 돌아가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3.1운동후 일제의 가혹행위로 돌아가셨다고 조영수해설사님이 말씀하셨다.

 

 

 

 

 

 

 

벽화있는 곳에서 제일교회 신관쪽으로 보니 선교박물관이 있었다.

 

 

 

 

 

 

 

선교 박물관으로 이용되는 스윗즈 주택은 계명대학교 초대 학장인 캠벨 등 선교사들의 주거 공간이었다. 한옥과 양옥의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주택의 아름다움 때문에 두 채 모두 대구 지역의 관광 명소로 각광을 받는다.

 

선교 박물관에는 각종 성경과 기타 선교 유물, 기독교 전래과정 등의 사진자료, 성막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특히 중국어 주석을 번역한 최초의 한글 주석 성경(1911년)과 1927년 제작된 성경 사전 등이 보관돼 있다.

 

선교박물관 오른쪽에는 대구 사과나무 100년을 기념하는 기념석과 사과나무가 있었고 그 오른쪽에는 개원 100주년 기념 종탑이 있었는데 그 종탑사이에는 신혼부부가 야외촬영을 하고 있었다.

 

 

 

 

 

 

조영수 해설사님이 벌써 제비꽃이 피었다고 해서 보니 정말 제비꽃이 피어 있었다.

 

 

 

종탑구경후 3.1운동 90계단을 내려갔는데 원래 현재 있는 제일교회 신관에는 제일교회가 있었는데 그 교회를 허물고 신관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오른쪽에도 아파트가 있었는데 1984 교황방문시에 도시 정비를 위해 세웠다고 한다.

 

 

 

계단 좌, 우에는 대구 3.1운동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을 알려주는 사진이 전시되어 그 때 상황을 이야기 해주고 있었다.

 

 

 

 

 

 

 

왼쪽을 바라보니 드라마 사랑비 세트장으로 활용되었던 음악다방 쎄라비가 보였다.

 

 

 

 

 

계산성당을 가기위해 길을 건너기 전에 계수나무 한그루가 있었고 바닥에는 1920년대 연표가 있어 과거를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건너편 건물에는 태극기와 함께 이상화, 서상돈 선생님의 얼굴이 보였다.

 

 

 

횡단보도 근처에는 진한 갈색의 조형물이 서있었는데 나름대로 운치가 있었다.

 

 

 

계산성당은 횡단보도 바로 앞에 있었는데 이 계산성당에서 박정희, 육영수 부부가 6.25중에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계산성당은 대구·경북지역 신앙의 요람

 

조선시대 대구는 수도인 한양과 제법 떨어져 있는 데다 박해를 피해 충청도 내륙 산중이나 대구 인근의 오지로 모여든 천주교 신자들이 모이면서 일찍이 큰 교세를 형성한 곳이다. 그중에서도 중심이 바로 계산성당으로, 100년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곳은 현재 주교좌성당으로 대구와 경북지역 가톨릭의 중심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전주의 전동성당과 함께 우뚝 솟은 쌍탑이 아름다운 성당으로 유명한데, 원래는 1899년에 지금의 강화도 성공회성당과 유사하게 십자가 형태의 2층 구조에 기와를 올린 한식 건물로 지었으나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불이 나서 무너지고 그 자리에 지금의 모습으로 새로 지었다고 한다.

 

이곳 성당의 주임이자 대구대교구의 주교로 임명된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로베르 신부가 설계하고 공사를 지휘하였다. 고딕형식의 건물로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로 쌓아올린 성당 외벽은 100년의 시간을 담은 듯 느낌이 장중하다. 안으로 들어서면 양옆으로 기둥이 줄지어 서 있으며, 기둥 곳곳에는 십자가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로베르 신부가 성당을 지을 때 함께 만들어 붙인 것이라 한다.

 

 

 

성당 밖 등나무 벤치 옆으로 이인성나무라 이름 붙은 감나무가 있어 사람들을 궁금하게 한다. 일제 때 활동했던 화가로 자신의 작업실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을 그렸다. 계산성당과 함께 그림 안에 나무를 크게 그려 놓았는데, 바로 이인성나무다.

 

 

 

 

 

계산성당에 들어가 보니 스테인드글라스가 아주 멋졌다.

 

 

 

 

 

 

 

성당을 나와 천주교 계산문화관 앞 벤치에 앉았는데 근처에 이인성화백이 그린 계산동성당과 이인성나무 안내판이 있었다.

 

 

 

조영수 해설사님께서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에 갓쓴 성인이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계산성당을 나와 왼쪽으로 도로를 따라 걸었는데 좌측 벽에 근대로의 여행이라는 안내판이 있었고 길에는 이상화선생님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글이 새져져 있었다.

 

 

 

 

 

가다보니 작은 골목이 있었는데 이 골목이 이상화, 서상돈 선생님 고택으로 가는 길이었다.

 

 

 

 

 

조영수해설사님이 이 시에 깝치지 마라라는 글이 있는데 이 글은 대구 사투리라고 하였다.

 

 

 

고택 구경을 하고 대구 골목투어는 끝났는데 조영수 해설사님의 해설이 있어 더욱 감동이 있었다.

 

 

 

 

 

 

 

 

 

 

계산동 2가 84번지에 위치한 고택은 항일문학가로 잘 알려진 이상화 시인이 1939년부터 작고하던 1943년까지 거하던 곳이다. 2001년 오래된 고택이 도로로 변할 위기에 처하자 고택보존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이 일어났다. 대구 시민의 힘으로 이상화 시인의 고택은 빼앗긴 들의 봄을 염원했던 모습 그대로 복원됐다.

 

이상화 시인 고택 바로 옆에는 대구 출신 민족자산가이자 국채보상운동 주창자인 서상돈 선생 고택이 있다.

 

 

 

 

 

다음 행선지는 대구수목원 구경을 가는 것이다.

 

 

 

대구수목원은 규모가 상당히 큰 것같았는데 시간 관계상 선인장 온실과 비닐하우스로 된 분재원만 구경하고 왔다.

 

 

 

 

 

 

대구수목원 구경을 전부할려면 며칠 걸릴 것았다.

진달래도 보고

 

 

명자나무 꽃도 보며

 

 

히어리도 꽃이 피었고

 

 

흰진달래도 피어 있었으며

 

 

서향나무도 꽃이 피어 있었다.

 

 

그리고 야외에서 복수초와 노루귀 정도 구경을 했는데 봄, 여름, 가을이 기대되는 곳이었다.

 

 

 

 

대구수목원은 대구광역시 달서구 대곡동에 있는 수목원이고, 전국 최초로 쓰레기 매립장을 수목원으로 조성하여 2002년 5월 개원하였으며, 1750종 35만 본의 식물이 전시되어 있다.

 

대구수목원의 연면적은 24만 4630㎡이며, 화목원·약초원·야생초화원·침활엽수원·습지원·수생식물원·약용식물원·무궁화원·유실수원·염료식물원·철쭉원·방향식물원·괴석원·죽림원·생태천이관찰원·잔디광장 등 21개의 주제로 꾸며진 전문 수목원이다.

 

보유 식물은 초본류 1300종 27만 포기, 목본류 450종 8만 그루 등 총 1750종 35만 본의 식물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밖에 시민들의 자연학습장인 산림문화전시관이 있다.

 

지상 2층 연면적 1650㎡인 전시관의 1층은 비지터센터·제1전시실·체험학습실, 2층은 제2전시실·기획전시실이 있어 아이들과 자연학습공간으로도 훌륭한 곳이다.

 

대구수목원 구경을 마치고 5시경에 대구수목원에서 출발하였는데 기사님이 워낙 운전을 잘 하셔서 9시 10분경에 시청앞에 도착하였다.

 

 

여행스케치도 알차고 좋은 상품을 기획하여 운영하여 여행객을 즐겁게 하였고 김수복가이드도 훌륭한 가이드를 하였으며 기사님도 안전 운행을 하여 주셔서 행복한 여행이 된 것에 대하여 감사드립니다.

 

여행스케치가 더욱 발전하여 우리에게 더 다양하고 좋은 서비스를 제공해 주시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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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3.15 18:55

    첫댓글 잘 보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13.03.18 09:40

    고맙습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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