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2 대구동산교회 주일오전예배
“열두 제자 이야기 8, 바돌로매”
(요한복음 1: 43-51)
할렐루야!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제자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열두 제자 이야기, 바돌로매’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지금 제자의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니면 무리의 길을 가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지난 2015년 통계청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오늘날 우리나라 성씨들 가운데 가장 많은 성씨는 21.5%를 차지하는 김 씨입니다. 두 번째로 많은 성씨는 14.7%를 차지하는 이 씨입니다. 세 번째로 많은 성씨는 8.4%를 차지하는, 저와 같은 박가입니다.
그런데 우리들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신지 얼마 되지 않는 분들은 신약성경을 보면서 유대인들 중에는 바 씨가 가장 많다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보면, 바 자로 시작하는 이름들이 자주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여리고성에 사는 맹인 거지 한 사람이 예수님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고서.’라고 소리쳤습니다. 그의 이름이 바디매오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사도바울이 구브로라는 섬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유대인 마술사가 방해를 하였습니다. 그 마술사의 이름이 ‘바예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12제자 명단에도 바자로 시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돌로매’입니다.
이처럼 성경에 바자로 시작하는 이름이 많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람어로 바는 누구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성경의 위대한 인물을 따라서 유다나 예수아라고 짓기도 하였고, 역사적인 인물을 따라서 빌립이라고 짓기도 했지만, 단순하게 아버지의 이름을 넣어서 누구의 아들이라고 지은 것입니다. 즉 바디매오는 디오매의 아들이라는 뜻이고, 바예수는 예수아의 아들, 바돌로매는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바돌로매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 성경을 살펴보면, 열 두 제자의 명단 외에는 그 어떤 곳에서도 기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많은 성경학자들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나다나엘이라는 사람이 바돌로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열두 제자들의 명단을 자세히 보면 단순하게 12명의 이름을 가나다 순이나 아니면 생년월일 순으로 쭉 나열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서로 상관이 있는 두 제자를 짝을 지어서 6개 조로 편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형제인 안드레와 같은 조이고, 야고보도 형제인 요한과 같은 조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바돌로매와 같은 조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빌립에게 전도를 받고서 예수님을 만났던 나다나엘을 바돌로매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나다나엘을 통하여 우리는 바돌로매가 어떤 제자였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첫 번째로 그는 편견에 사로잡혔던 사람입니다(첫째: 편견의 사람). 영국의 소설가인 제인 오스틴이 쓴 소설 가운데 ‘오만과 편견’이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이 소설에 보면, 여자 주인공인 엘리자베스는 편견에 사로잡혀서 오랫동안 남자 주인공을 형편없는 사람으로 평가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들 가운데 색안경을 끼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특정한 사람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기도 하고, 반대로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기도 합니다.
저의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제가 미국에 유학을 갔을 때에 아파트를 얻어서 이사를 했는데요, 이사하는 날 바로 옆집에서 흑인남자가 불쑥 나오더니 ‘하이’하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순간 소름이 돋으면서 ‘아차 이사를 잘못 왔구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 문단속을 철저히 하였습니다. 만약에 흑인이 아니라 백인이 ‘하이’라고 했다면 이사를 잘 왔다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흑인은 마음씨가 너무나 착한 구세군교회 목사였습니다.
이러한 편견을 나다나엘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4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나다나엘에게 빌립이 찾아왔습니다. 이 빌립은 성격이 완벽주의자에 가까울 정도로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찾아와서 충격적인 소식을 전하여 주었습니다. 모세와 더불어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메시아를 만났는데, 그분이 바로 나사렛 예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할렐루야’가 아니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사실 당시에 정치 경제 종교 등 모든 면의 중심은 수도인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따라서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유대 땅에 도착하였을 때에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반면에 북쪽에 위치한 갈릴리 지역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소외받던 곳이었습니다. 특히 그 중에서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갈릴리 지역 중에서도 구석진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메시아와 같이 존귀한 분이 그런 촌 골짜기에서 그것도 가난한 목수인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다나엘이 가지고 있었던 편견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그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둘째: 참 이스라엘 사람). 4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빌립의 전도로 예수님께 나아오는 나다나엘을 보자마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나다나엘은 창세기에 나오는 한 사람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는 야곱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야곱은 태어날 때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야곱으로 지었은데요, 그 뜻은 ‘간사한’ 또는 ‘속이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야곱은 그 이름대로 형 에서를 속이고,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그래서 외삼촌 라반의 집까지 도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에 형 에서가 군대를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어떻게 하였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길이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얍복강에서 하나님께 매어 달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축복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비록 평생을 간사하게 살았지만, 하나님만 바라보는 야곱을 하나님은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어떻습니까? 그들은 혈통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후손이었지만, 영적으로 이스라엘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천사와 씨름하던 야곱과 같이 살았던 것이 아니라 우상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보실 때에 그는 야곱처럼 하나님의 도우심만 바라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48절에 보면,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시골에 가면 큰 느티나무 그늘 밑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더위를 피하거나 휴식을 취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에는 높이가 약 7미터나 되는 무화과나무 아래가 쉼터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경건한 유대인들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구약의 말씀을 읽거나 묵상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말씀을 읽는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얼마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사모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메시아의 오심을 갈망하는지를 그 마음까지 들여다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제자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제자로 부르실 때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시는 자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살수 없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특히 메시아의 은혜가 없으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놀라운 일을 보게 될 사람이었습니다(셋째: 놀라운 일을 보게 될 사람). 50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앞으로 나다나엘이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더 큰 일이란 51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같이.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은 돌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사닥다리가 하늘에 닿았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모습을 꿈에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죄악으로 말미암아 굳게 닫혔던 하늘의 문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열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모습을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장례식장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날마다 볼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결론>이제 저는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들도 나다나엘처럼 편견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귀히 보시고 제자로 불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모습을 보게 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영광을 보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