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초법우 조 숙 제
거친 세상, 먹고 살기 위해서 한평생 몸뚱이를 자갈처럼 굴리면서 살았다.
그런데도 노년의 끝자락에 찾아오는 것은,
빈곤과 질병에 허덕이니 왠지 서글퍼진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찾아오는 불청객,
허리통증이 끝을 알 수 없는 인내심을 오늘도 요구한다.
차 한 잔을 타 놓고 평소의 습관처럼,
비구니 원정 스님의 천수경을 들으면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오늘은 유독, 스님의 독경 소리가 서글프다.
오늘이라는 하루는, 어제 죽은 사람이 그리도 갈망하던 하루이건만,
삐걱 거리는 몸뚱이에 찾아오는 마찰음과
나날이 늘어나는 약봉지만이 태산처럼 쌓여만 가는 하루다.
방황하던 열아홉, 아픈 청춘보다 나을 게 없다.
음풍영월의 시인 이태백 시성은 ‘산중문답’에서
“왜? 산중에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빙그레 웃고 말지요.”
라고 하셨다. 나도 그렇다.
요즘 같은 세상에 무슨 재미로 살아가냐고 물으신다면 말이다.
어머님의 지극한 교육열에 힘입어 성인의 반열에 오른
맹자는 ‘군자삼락’을 주창하셨다. 그 요지는 너무도 화려하다.
부모가 구존하시며 형제가 무고함이 첫 번째의 즐거움이요.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굽어 사람들에게 당당할 수 있음이
그 둘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서 이를 교육함이 세 번째의 즐거움이란다.
시대를 초월한 절창이요, 명언이다. 나는 이 절창 앞에 절복하고 만다.
읽으면 읽을수록 가슴이 쓰리고 저리다. 어찌하여 내게는 이토록 박복하단 말이다.
부모는 조실부모요. 형제들은 질병과 초근목피로 짐승처럼 헐벗고
굶주림에 오늘도 허덕이고 있다. 하늘을 우러르면 부끄럼뿐이요,
사람을 대하기가 겸연쩍기 한이 없다.
거기다 나 자신마저 전생의 업보로 병이 깊고 무식하지 않은가?
오호, 통제라! 아련하고 비통하다.
그러나 절대 슬퍼하진 않으련다.
고향을 잃은 자가 앓는, 마음의 질병인
‘향수병의 원조’인 목가적 시성
도연명 선생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하여 부른 노래가 있다.
‘음주’가 바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가락이다.
끝 구절을 여기에 옮겨본다.
採菊東籬下 / 悠然見南山 / 山氣日夕佳
飛鳥相與還 / 此間有眞意 / 欲辨已忘言
도연명선생이 지방 수령인 현령 벼슬을 버리고
‘귀거래사’하시어, 고향 땅에서 흙을 일구면서 안분지족한 삶 속에서,
천명을 읽어 가면서 무위자연을 즐기시던 노랫가락이다.
우리는 지금 죽을 각오로 무한경쟁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 경쟁에서 생존할 자, 만족하는 자, 과연 몇이나 될까?
그러나 실패한 자여, 서러워 마라.
실패한 자에게도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는 법을 선생은 지금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그 비법은 다름 아닌, 우리가 밖으로 돌린 시선을 안으로 방향을 틀라고 하신다.
내 안에서 만족을 구가하는 것이다.
인간과 어울리고 부딪치는 세계와 대조되는 또 하나의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자연과 어울려 자연의 품속에 안기는 세계 말이다.
첩첩산중에 홀로 있으면서도 미소 지을 수 있는 모습.
그 미소를 닮고자 나는 도연명 선생의 ‘음주’를
아픈 허리에 보조기를 차고서 몇 달을 갈고 다듬어 ‘예서’ 체로
써서 대청에 걸어놓고 매일 경처럼 외우고 있다.
‘군자삼락 ‘을 스스로 위무시켜줄 나의 대안이다.
인간은 나약한 갈대다. 늙는 다는 것도 서러운데,
병마저 깊이 들면 누군들 방황하기 마련이다.
생의 후반기에 고독과 외로움을 먹으면서
홀로 가는 길에 행복이란 단어는 선택된 사람만이 누리는 호사다.
그 긴 시간을 무엇으로 스스로를 위무한단 말인가?
참 많이도 방황과 번민의 나날로 소일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하늘이 계시를 주셨다. 거친 세상을 원망치 말고 스스로에게 주워진
여건 속에서 삶의 보람을 찾아가라고.
그 방도가 나 자신의 위안인 나의 ‘취미삼락’을 즐기는 것이다.
나의 ‘취미삼락’은 이렇다.
그 첫째 낙은, 옛 성현들의 숨결을 따라가 고전 속에서
내 나름 삶의 길을 찾는 것이다.
고전은 『사서오경』『노자』, 『장자』다.
거기에 『불경』과 『성경』을 가미하면 최고의 성찬을 이룬다.
짧은 혀로 간단하게 토설을 하자면,
『사서삼경』은 ‘인의예지’로 얽힌 계박의 굴레에 숨을 쉴 틈이 없다.
읽을수록 머리가 아프다.
부처님은 왕좌의 권위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평생을 길에서 사셨다.
의복은 분소의를 입으시고 걸식을 하면서도
당대의 왕보다 더 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과 추앙을 받으셨다.
아니, 시공을 초월한 말씀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진리로 빛을 발하신다.
『노자와 장자』는 하늘을 훨훨 나는 기분이 든다.
읽으면 읽을수록 빠져드는 재미가 가히 점입가경이다.
권세와 명예와 금전이 없어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세상을 노닐 수 있는 경계가 여기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두 번째 취미 낙은 고전을 통해서 얻은 눈곱만한 지식을 하나,
하나 점검 체득하면서, 소가 여물을 먹고서 되새김하듯이 중얼중얼 읊조리면서
산길과 들길을 홀로 걷는 것이다. 이 낙도 짭조름하다.
나의 걸음은 느리다. 바보처럼 비틀거린다.
그래도 나는 좋다. 이렇게 절뚝거리면서라도 걸을 수 있다는 것에
매일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걷다가 보면 작은 마음의 울림이 나를 충만케 한다.
청산과 흰 구름은 나의 둘도 없는 친구다.
물과 바람과 새소리가 들려주는 리듬은 잊을 수 없는 자양이다.
그 조화로운 향연에 절로 고개를 수긍하다 보면 삶의 희로애락은 사치요 낭비가 된다.
모든 것이 고마울 따름이고 감사하는 마음뿐이다.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풍미도
나름, 알 것 같기도 하다. 청산은 말이 없어도 좋다.
그냥 그대로 만고의 병풍이다.
세 번째의 취미 낙은 글쓰기와 일상 속의 기도다.
나의 글쓰기는 나를 향한 자존의 외침이다.
허구와 가식의 틀을 벗기 위한 자정 운동이다.
어느 평론가는 글을 쓴다는 것은, 산다는 것의 볼품없음과 꾀죄죄함에서
벗어나 보려는 우아한 몸짓이라고 했지만,
그 말은 나에게는 분에 넘치는 수사다.
처절한 반성과 통렬한 자각을 통한 처연한 참회록이다.
그를 통한 새로운 나침반을 구가하는 부활 일지다.
그곳에 진정한 삶을 갈구하기 위한 기도가 병행되기를 매일매일 정진으로 지속한다.
나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다. 기도를 통한 세상과의 소통의 작은 창구다.
이 육신은 영원할 것 같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배신할 것이다.
나는 그때가 반드시 온다는 것을 투병생활을 통해서 절절히 실감했다.
새벽이슬이 영롱함을 순식간에 잃듯,
인연이라는 덧이 나를 휘몰아치는 순간 모든 것은 번개처럼
소멸할 것임을 체감했기에 진솔하게 내려놓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주워진 환경에 절대복종하고 감사할 줄 아는 방법을 터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소통방식이다.
기도는 영혼을 정화하는 작업이다. 나는 그 힘을 믿는다.
그러하기에 그에 수반되는 외로움과 괴로움을 사랑한다.
물 한 잔 속에 담긴 우주의 깊은 뜻을 스스로 감지하면서
홀로 청산과 백운을 벗하며,
가는 나의 길에 외로움과 고독을 토설하는 것은 성스러운 사치다.
이 또한 어이 작은 복이랴.
감사합니다.
땡초법우 조 숙제 배상.
첫댓글 진솔한 글귀에 감동입니다.
미륵불이며 부처이십니다.
감사 감사하는 삶이 아름다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