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보라!(사도행전 3:1~10)
“성령 충만 하십시오! 신앙의 길을 잘 달리시길 바랍니다. 결코 물러서지 말고, 이번 한 주간도 하늘의 큰 면류관을 받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두 한 번 따라해 보시기 바랍니다.‘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십니다. / 믿으시면 아멘하시기 바랍니다. 할렐루야!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번 대통령 선거의 초미의 관심 중에 하나는 과연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가 단일화를 할 것인가 하는 것과 어떻게 단일화가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 안철수 씨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였을 때는 안철수 후보가 후발 주자로 문재인 후보의 길에 동참하려는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안철수 후보가 마치 교수같이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출제하고 문재인 후보는 학생같이 이에 대답하는 형식이 되고 있습니다. 안철수 후보가 문재인 후보에게 내는 문제는 다름 아닌 개혁과제입니다. 이 사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개혁은 여야 할 것 없이 가장 큰 이슈입니다. 개혁의 궁극적인 목표는 변화하는 시대에 어떻게 적응하느냐가 아니라 시대정신을 어떻게 선점하여 국민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개혁은 바로 시대정신을 선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특별히 한국교계는 시대정신에 따르지 못함으로 혼란과 갈등을 겪었습니다.
오늘은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종교개혁을 선포한지 495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하는 종교개혁기념주일입니다. 루터는 전통적이고 추상적인 하나님,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 속에 갇혀버린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가까이 계신 하나님, 생활 속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1517년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단순히 외적인 제도나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드러내는 의식 개혁으로부터 출발한 운동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개혁의 정신 위에 개신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명심할 것은 개혁이라는 것이 단일회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개혁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계속되어져야 하고 또 계속되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개혁의 과제를 풀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나는 정직한가, 사람들 앞에 나는 떳떳한가?”라는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그리고 물음에 대한 답은 한 마디로 말해 <변화>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순절 성령으로 인하여 변화된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러 가는 길에 생긴 일입니다. 그들은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만났습니다. 베드로는 구걸하는 앉은뱅이를 향하여 ‘우리를 보라’ 고 외쳤습니다. 계집 종 앞에서 예수를 모른다고 맹세하며 저주까지 하며 부인했던 베드로,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오히려 의심하였던 베드로, 주님이 나타난 것을 알면서도 갈릴리 바다로 내려와 먹고 살기 위해 예전에 잡던 그물을 다시 펴 고기를 낚던 베드로, 나약한 베드로 그 베드로가 ‘우리를 보라’고 공개적으로 외친 것입니다. ‘무엇을 보라는 것입니까?’ 한 마디로 말해 <변화>된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라보는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변화한 베드로가 변화를 일으킨 것입니다. 오늘 이 시대의 화두는 <변화>라고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거룩함과 권위를 상실했습니다.
최근 시사주간지 <시사인> 창립 5주년 조사에 따르면 종교에 대한 신뢰도가 천주교(61.8%) 불교(55.1%), 개신교(28.1%), 원불교(6.9%) 순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불교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져가고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가 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심화되기 시작한 개신교 편향 논란을 비롯해 최근 들어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목회자들의 비도덕적 행태가 주요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보여 진다고 진단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변화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그 지체 중 하나인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디서부터 변화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입니다. “제 구시 기도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베드로는 요한과 더불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갔습니다. 하루에 세 번을 정해 두고 성전에 기도하러 갔습니다. 우리 시간으로 9시, 12시, 3시에 올라간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가 제 구시 기도시간에, 즉 오늘로 치면 오후 3시에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역사하십니다. 베드로는 기도가 회복된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이 들었던 베드로가 성령을 받고나니 기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한국교회에 기도의 불이 꺼지고 있습니다. 새벽제단을 쌓은 것이 한국교회이고 금요철야 기도회의 불을 붙인 것이 한국교회이고, 수요기도회로 모이는 것이 한국교회입니다. 그것도 부족하여 산천 방방곡곡에 기도원을 세워 금식으로 철야로 하나님께 메어 달린 것이 한국교회인데 지금은 교회에 기도의 불이 꺼지고 있습니다. 기도의 불이 꺼지자 교회부흥의 불도 꺼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기도를 회복해야 합니다. 기도가 회복되어야 영이 회복되고 영이 회복되어야 교회가 회복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를 회복할 수 있습니까?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 병사가 총에 맞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그 병사를 구해낼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 동료 병사가 시계를 쳐다보더니 부상당한 병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갑니다. 그 모습을 본 지휘관이 놀랍니다. 총알이 빗발 쏟아지듯이 쏟아지는 전쟁터로 달려드는 병사를 보며 지휘관은 두 명의 병사를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를 동료병사가 구출해 낸 겁니다. 두 병사가 모두 살았습니다. 전투가 끝나고 지휘관이 총에 맞은 병사를 구출해 온 병사를 불러 물었습니다. “자네는 전투 중에 왜 시계를 보고서 병사에게 달려갔는가?” 그러자 병사는 대답합니다. “예, 제가 전쟁터에 나가려고 할 때에 어머니께서 내가 너를 위하여 매일 12시가 되면 정기적으로 기도를 할 테니까 안심하고 다녀오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시계를 보았을 때가 바로 12시였습니다.” 병사는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어머니의 기도를 믿고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도 동료를 구하러 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시간을 정해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기에 초대교회의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도 외에는 어떤 능력도 오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기도시간을 지켜 성전을 향해 올라가듯 우리도 시간을 정해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그 시간에 역사합니다.
백부장 고넬료도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행10:3) 고넬료는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고 백성들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시간을 정해 두고 기도했습니다. 고넬료는 제 구시에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천사가 말하기를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하나님이 기억하신 바가 되었다는 응답을 받았습니다. 다니엘도 시간을 정해 두고 기도했습니다. 다니엘은 자신의 생명의 위험을 무릎 쓰면서까지 하루에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했습니다.(단6:10) 다윗도 시편에서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55:17)고 노래하며 시간을 정해 두고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했습니다.(막1:35) 그렇습니다. 시간을 정해 두고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은 기도를 통하여 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도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적의 주인공입니다. 바로 한국교회의 개혁은 이 기도의 회복을 통하여 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영혼 살리는 일을 회복해야 합니다.
본문 4절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던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를 주목했습니다. 여기의 ‘주목했다’ 는 말은 무심하게 쳐다보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원어로 '아테니사스' 인데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보았다' 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지나쳤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영혼의 소리를 듣고 걸음을 멈춰 주목해 보았습니다. 사도의 마음속에는 불쌍한 앉은뱅이를 향한 자비심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을 살리고자 하면 주목해서 영혼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주목해야 할 대상은 죽어가는 영혼들입니다. 미용사는 머리를 보고 제화공은 신발만 바라보듯이 교회는 불신자의 영혼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5절 말씀입니다.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와 요한은 앉은뱅이의 영혼을 긍휼히 여겨 “우리를 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을까’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라보는 것에 차이가 있습니다. 앉은뱅이가 받고 싶은 것과 베드로와 요한이 주고 싶은 것은 전혀 달랐습니다. 앉은뱅이는 물질을 얻고 싶었고, 사도들은 회복과 구원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앉은뱅이는 손에 돈을 받고 싶어 했지만 제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싶었습니다. 앉은뱅이는 빌어먹기를 원했지만 제자들은 빌어먹는 사람을 벌어먹는 사람으로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앉은뱅이는 임시방편을 원했지만 제자들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의 교회의 모습, 오늘 우리 성도들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는 것과 우리가 얻고 싶은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썩어져 갈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편히 쉴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 땅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땅의 썩어질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을 주신다고 하십니다. 사과를 달라는 아들에게 사과 따는 법을 가르치시는 아버지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많은 교인들이 돈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돈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한 번 물어 보겠습니다. 돈이 여러분의 주인입니까, 주님이 여러분의 주인입니까? 사람이 돈을 얼마나 사랑하면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마태복음 6장 24절에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입니까? 진정한 주인은 돈이 아닙니까? “주여, 주여(Lord)” 하면서, 돈이 여러분의 주인이고, 말로만 예수님을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에머슨(Emerson)은 “내가 땅을 소유하면 땅도 너를 소유한다. 천국을 소유하면 천국도 너를 소유한다”라고 했습니다. 돈을 맘대로 부릴 수 있어야 좋은 종(Good servant)이 되고 돈이 상전이 되면 폭군(dictator)이 되는 것입니다.
배와 물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물이 없으면 배가 뜨지도 못하고 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물이 이렇게 귀한 존재이지만, 물이 배에 가득차면 침몰 하고 맙니다. 비행기는 땅에 붙어서 굴러가는 동안은 비행기 구실을 못합니다. 땅을 박차고 하늘로 올라가야 비로소 창공을 마음껏 비행할 수가 있습니다. 영에 속한 사람은 물질에 집착해서 사는 동안 영성이 발달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주목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 아니라 죽어가는 영혼입니다.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당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지존파, 막가파. 라는 살인강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저주하고 좋은 차타고 다니는 사람들을 증오한 나머지 무고한 사람을 여러 명 죽이고 그 시체를 암매장하기도 하고 집안에 화장 시설을 하고 태워 버리기도 하였던 무시무시한 집단이었습니다. 그들은 잡혀서 재판을 받아도 조금도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사형 확정을 받고 수감 중에 한 기독교인의 끈질긴 전도와 설득으로 서서히 그들의 마음이 녹기 시작하였으며 드디어 그들도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언제 사형 집행이 될지 모르는 시한부 인생이었지만 감방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열심히 전도를 하였고 다른 죄수들 보다 모범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형 집행이 될 때 마지막으로 그가 한 말은 참으로 우리들의 심금을 울려주는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예수를 조금만 더 일찍 믿었으면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예수를 믿으라. 고 조금만 더 일찍 전도를 해 주었으면 나는 살인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무고한 사람들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라는 말을 하고 형장의 이슬로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혼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두고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회복되고 사회가 변화됩니다.
셋째로 담대히 예수의 이름을 선포해야 합니다.
본문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전 제자들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그들은 바로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가지는 치유 능력을 신뢰했습니다.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요 14:14) 이 말씀을 믿었습니다. 사도행전 3장 16절을 보십시오. 앉은뱅이가 일어난 것을 보고 놀라워하는 사람에게 사도 베드로가 분명히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죄와 죽음에서 건짐을 받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권능을 의지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하지 않고는 어떠한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 이름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문제이든 예수 이름을 선포할 때 해결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능력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예수 이름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물질적으로 풍부해졌습니다. 부해졌습니다. 교회가 하지 못할 일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학교도 세우고, 고아원도 세우고, 기도원도 세우고 묘지까지 만듭니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일어나 걸으라고 자신 있게 예수의 이름을 선포할 수 있는 교회인가 하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능력을 간구하기보다 다른 곳에 관심을 두었기에 과연 세상을 향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할 자신이 과연 있습니까?. 그러한 능력이 현대 교회와 교인들에게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세상에 선포할 수 있습니까? 교회는 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길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절망에 빠져 좌절하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어 희망의 삶을 살아가도록 일으켜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에 기도 응답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예배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예수 이름의 능력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성령께서 도무지 역사하지 않습니다.
성 프란시스코(Saint Francis)는 무소유로 얻어먹으면서 전도하고 다니는 걸식성단을 만들었습니다. 교황청의 허락을 받기 위해서 교황을 찾아갔습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를 만난 교황은 그가 하는 일이 아주 우습게 보였습니다. 그래서 보화가 가득한 창고로 그를 데리고 갔습니다. 다 보여준 후에 프란시스코에게 말합니다. “이제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는 말은 더 이상 할 필요가 없게 되었소.” 그러자 프란시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외칠 능력도 잃어버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은과 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예수의 이름이 훨씬 더 아름답고 소중합니다.
사도들은 “우리를 보라!” 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은 사람들로 변했습니다. 자기 개혁을 일으키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정한 시간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패션모델은 새로 유행하는 옷을 입고 나처럼 옷을 입으라고 보여주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패션의 모델이 되어야 합니다. 개혁되어야 합니다. 부디 지속적으로 기도하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주목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고 선포하여 영혼들을 일으켜 세우는 성도들로 다 변화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벧엘교회 / 모리아교회 윤요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