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로 보는 민족의 기원
29. 가야
가야는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 실체를 파악하기 힘든 나라(연맹)입니다. 신라가 삼한을 통일하고 그들의 역사를 남겼기에 그들과 관계되었던 (또 가야연맹 중 가장 강력했던) 철과 금의 나라, 금관가야에 대한 기록이 좀 많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금관가야의 건국자인 김수로의 설화를 보면, 일단 재위기간이 42년에서 199년으로 비현실적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귀지봉龜旨峰에서 떨어진 6개의 금란 (金卵)이 모두 변하여 6가야 왕이 되었다고 하는데, 금수로도 그중의 하나였고 후에 왕으로 추대되었다고 나옵니다. 용성국의 석탈해가 가야에 진입했다가 김수로에게 패하여 신라로 들어갔다고 나옵니다만, 신라김씨와 김수로의 김씨는 서로 뿌리가 같다는 기록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수로는 후에 아유타국의 허왕옥 공주와 혼인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금가야나 히미꼬에서 등장하는 거북龜은 쿠샨출신을 의미하는 암시 일수도 있고, 龜의 옛 발음이 kwrǝ 이므로 가라를 의미하는 또 다른 암시일 수 있겠습니다. 거북배를 탔다는 히미꼬의 출신도 龜의 발음을 통해 알 수 있겠습니다. 먼저 이들의 이름에서 천축국의 월지세력과 사카세력(세레스)등의 흔적을 볼 수 있습니다. 김/수로 라는 이들은 사카족의 김씨를 쓰고 있지만, 역시 수로 라는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역시 秦의 후예 seres/seraki 를 연상시킵니다. 이들이 가야, 혹은 가라 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韓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며, 韓은 夏에서 비롯되어 모두 "가라" 라는 발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夏인들은 앙소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되어있는데, 채도토기나 물고기 숭배 토템의 앙소의 영향을 받은 韓의 가라국들도 물고기 숭배영향을 받은 것은 당연하게 보입니다. 또한 이들 쌍어의 뒤엉킴이 태극문양을 형성한다고 말씀드렸으며 (복희와 여와의 연합을 의미)가야의 흔적에 태극과 쌍어가 많이 나오는 이유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夏족을 이야기 하면 복희와 여와의 결합을 뺄 수 없는데, 복희란 인물의 묘사와 발음에서 서방세력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씀을 드려왔습니다. 즉, 복희와 여와의 결합은 서방과 동방의 만남을 뜻하는 게 아닐까라는 추측을 했었습니다. 천축국 시절에는 박트리아를 韓이 점령하게 되면서 박트리아가 바로 大夏/大韓 이라고 불리우게 된 계기가 아닌가 라는 추측을 했습니다. 천축국의 韓은 말씀 드린데로 조선준왕의 조선세력, 원래의 夏/韓세력, 秦세력이 혼합되어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그런이유로 후에 변한지역 연맹이 가라/가야라고 불리우며, 금가야의 사카세력과 그 외세력이 혼합되어있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춘추시절의 韓 이 6부족으로 나뉘어있었다고 하니, 변한/가야의 6국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秦에서 내려온 사카세력 신라와, 韓에 포함되어 있던 사카세력인 금가야는 원래 秦출신의 사카세력이니, 둘다 뿌리가 같다는 말도 이해가 될 수 있겠습니다. 야마토편에서 설명이 되겠으나 한반도의 금가야/사카세력은 6세기 신라에 병합되면서, 잔여세력이 열도로 밀려나게 됩니다. 이들이 소가씨라 불리우며 아스카 문화를 꽃피우는것으로 보입니다., 아스카 ( 飛烏) 는 烏 를 카로 읽는 발음만 으로도 사카족의 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야는 포상8국과의 전쟁을 빼놓을 수 없는데, 이 시기가 209년, 212년, 215년으로 신라, 가야가 함께 공격받은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신라편에서 이미 자세히 설명드렸으나 이 시기가 바로 마한에서 밀린 마한이 금가야를 공격했던 시기로 보이며, 이 후에 이들은 서로 합병을 하며 강력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삼국사기 등에서 보면 이후로 가야가 신라 의존적 상태가 되는 것으로 나오나 그 외에 중국, 일본사서와 유물(광개토왕비)를 통해 보면 이들이 임라가라를 형성하여 강력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浦上이란 발음도 pho-zang 으로써 월지/마한의 귀상세력이 아니였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가야는 이들 사카/금가야 세력외에도 여러 소국들이 존재하는데, 아라가야, 대가야 등이 있습니다. 가야란 나라 자체가 기본적으로 韓세력을 중심으로 그 외의 천축국 출신의 진,변한 유민들 중심으로 생겨난 연맹체가 아닐까 합니다. 박트리아를 토카라 라는 이름을 계승하는 대가야가 존재하며, 또 魏 를 계승하는 아라가야가 존재합니다. 금가야는 이름에서도 들어나듯, 철과 금을 잘 다루던 사카족에서 비롯되었을 거라 예상 할 수 있습니다. 아스카시대를 거쳐 하쿠오시절까지 지겨운 전쟁을 벌이던 왜와 신라는 갑자기 별다른 갈등을 보이지 않는데, 이것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열도가 신라계열 천황으로 잠시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30. 한반도의 삼한 (범월지/사카)
전 글에서 오르도스, 섬서, 하남에서 시작한 우리민족의 원류가 어떻게 이동하여 한반도로 들어왔으며, 또 한반도와 요령에 이미 정착하고 있던 세력들이 이들과 어떤 과정을 통해 통합되었는지 설명드렸습니다. 이미 한반도, 요령, 산동, 열도에 자리 잡았던 숙신세력에 , 황하주변의 앙소, 알타이, 사카세력들이 한국인들을 형성하는 주요 구성원이 되게 됩니다. 이로부터 나오는 국가들이 夏殷周,아사달, 朝鮮, 숙신(예맥), 晉, 秦, 낙랑, 삼한, 사국, 왜, 야마토 등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이중에서도 가장 기록이 많이 남아있고 한민족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 삼한이라 할 수 있는데, 삼한의 형성 과정은 전 글에서 설명드렸듯이
아사달 -->기자조선 --> 晉과秦 --->월지국 + 박트리아 + 사카 --> 쿠샨왕조 + 월지殘國 ---> 삼한
의 과정을 거쳐서 요령/만주/한반도/열도로 진입하게 됩니다. (한반도에는 부여/숙신/낙랑의 세력이 남아있었을 거로 봅니다.)
삼한을 아우르는 세력으로 마한을 꼽는데, 마한의 대표국이 월지국으로 되어있습니다만, 월지를 영어권에서는 Yue-zhi라고 읽습니다. 月 의 엣 발음은 ŋwat , 馬의 옛발음은 mrā́ 입니다. 이것은 월지국 중심의 마한이란 연맹구성원들이 月을 ŋwat 보다는 mrā́ 에 가깝게 발음을 하므로써 생긴 스스로에대한 통칭이 아니였을까 하는 추측입니다. 이들의 형성과 한반도 진입과정을 다시 한 번 간단히 살펴보면..
a. 월지국은 초반 기자조선의 준왕세력에 의해 韓이라 불리우다가, 韓原에서 魏씨들의 漢에게 밀려서 서진하게 됩니다. 국명은 辰 (三晉 세력을 통합하는의미로) 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역시 辰도 魏씨 세력에게 권력을 빼았기면서 월지국으로 통합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 서진하면서 같은 오르도스세력인 月氏 등을 통합하면서 말이죠.) 또한 漢書의 기록에서도 보듯, 월지국은 한동안 중앙아시아를 장악하다가 오손, 흉노 등에 밀려 인도 북부로 남진하게 되는데, 박트리아, 사카(塞)족을 마치 쫓아가듯, 이들과 전쟁을 치루며 결국 월지5국으로 통합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이 천축국으로 알려져 있다가 쿠샨왕조에 의해 통일됩니다. (신독,박트리아,간다라,사카등이 모두 이세력에 속하게 됩니다.) 쿠샨과 기자조선, 晉 과의 관계는 한서에서도 기록했듯 "쿠샨인은 오르도스 代족에서 나왔다"라는 구절이나, 아유타국의 허황후의 비문에 아유타의 선조는 魏/晉 이라는 문구나, 결정적으로도 이들이 편두를 했었던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b. 이들이 쿠샨(貴霜)에 의해 권력다툼이 일어나는 기원전후 즈음, 이들에게서 밀려난 세력이 Mra gara / 마한를 형성하게 됩니다. 실제로 인도 북서부에는 메르가르 (Mehra garh)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인더스 최초의 신석기 청동기 문명 (BC 7000)으로써 유명한 곳입니다. 오래된 문명이지만, 그곳의 지명은 그 후에 지어졌을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추측해봅니다.
c. 어쨌든, 이들 마르가르/마칸 세력은 감숙에 남아있는 소월지나, 타림분지로 들어가 정착합니다. 이곳은 AD300년까지 물줄기가 바뀌기 전까지는 사막의 상태는 아니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 누란의 역사를 보면 확인할수있습니다.) 이곳은 카르라쉬, 쿠차, 투르판등 유명한 실크로드의 중심지로써 이들이 월지국으로써 초기에 인도북부로 내려갈 때 거쳐 갔던 길일 가능성이 큽니다. (漢書에 이곳에서 塞족과 월지의 민족이동중의 접촉/전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곳 타림분지의 이름이 타클라마칸 인데, 매우 많은 소국들이 실크로드 길을 점유하고 있었고, 이전 글에서 증명했듯 월지인들(후엔 쿠샨인들)이 ad 2-3 세기에 다시 장악하게 되는 정황을 말씀드렸었습니다. 타클라 란 뜻은 버려진 이란 뜻이라는데. 어쨌든 마칸이란 지명은 어디서 온 것인지 아무도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타클라 마칸지방은 AD 1 세기경, 한무제에 의해 점령되는데, 이에 의해 마한세력이 요령까지 이동한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곳은 바로 북방의 초원의 실크로드라고 알려진 길로써, 아주 오래전부터 동서양의 고속도로로 알려져 있는 길입니다. 불교의 전파도 이길을 통해 하게되고 후에 혜초도 천축국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은 이 길을 택해서 오게 됩니다. 이시기엔 아직 선비도 커지기 전이며, 흉노도 오르도스지방에서 커지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시베리아 남부 / 몽골 초원지방은 생각보다 이동에 어려움이 없었을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마르가르가 북동진을 하면서 일부는 서진을 하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헝가리의 Maygar가 되는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Maygar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누구인지, 또는 훈족의 후손이라는 뜻으로 Hungary 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곳, 인도북서부에 자리 잡은 마르가르 세력은 후에 파르티아와 굽타의 성장 등으로 이동이 시작되면서 서진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들이 당시 멸망한 오손세력 ( 오손도 魏金의 의미로 이들과 비슷한 유목계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만,) 과 세력을 합치며 세력이 커지면서 동유럽을 강타하게 됩니다. 그들의 이름을 마르가르를 위시하여 나머지 포함된 다르가르를 포함해 Han/Hun 이란 명치을 사용합니다. ( 월지국의 전신인 준왕의 韓 과 같습니다.)
이들 역시 기자조선, 귀방, 쿠샨인들과 마찬가지로 편두를 하는 지배층을 가지고 있으며, 진한인들의 모습 그대로 청동복을 말에 얹고 다닙니다. 이들이 "아틸라 더 한 " 이며 이들 韓겨레란 명칭이 Hungary 로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종족명은 Margyar로 알려지게 됩니다.
d. 한편, 요령,만주에 들어온 월지국의 마한은 前漢이 망하고 新 ( ad 8-23) 이서는 무렵, 요령으로 진출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倭의 경우 三晉이 월지국으로 이동하는 시기에 남하했던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월지국과는 다르게 절강성부근으로 이동해 그곳에 정착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倭는 晉/魏에서 같은 상나라 계열로 있었으나 鬼方이 월지국을 세우고 서진하면서 倭는 다시 본향인 절강성으로 돌아간 것이 아닌가 합니다. 요동의 마한의 주변에, 三晉시절, 韓의 후예들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이들은 기자조선의 후예로써 辰국을 세웠던 세력들입니다. 원래 秦나라 시절부터, 韓原에 秦人들이 이주해간다고 기록되 있으므로 韓原에는 周의 후손, 秦인, 오르도스인들이 살았을테고 여기에 준왕세력이 후에 합세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f. 진한은 대문구 문명을 이어받은 은나라 출신의 鬼方, 혹은 箕씨등이 편두를 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런 이유로 진한은 편두의 풍습이 기록됩니다.
특히 夏나라나, 박트리아등과 섞인 월지나 사카인들은 외모상으로 매우 혼혈이 진행 되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後漢書 등의 기록을 확인해봐도 혼혈인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변진은 진한과 더불어 살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다, 그러나 사람의 모습은 모두 키가 크고 몸집이 우람하며 머리칼이 아름답다..>즉, 대월지로써 중앙아시아를 이동하고 후에 박트리아, 사카등을 점령하면서 혼혈이 많이 진행된 이들이라 생각됩니다. 진한과 같은 문화권이나 외모가 다른 이들을 변한이라 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弁이란 글자에서 부터 벌써 박트리아/사카인들의 꼬깔모자와 연결이 되어있고, 삼한의 초기세력인 魏란 글자자체가 鬼 + 倭 로써 사카인 + 오월인의 조합인것이 드러납니다.
절강성에는 신라관련 명칭들이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초반에 倭인들의 주거지였고 열도의 왜를 신라가 장악했었던 것과 관계있거나, 삼한 통일직후 야마토를 장악했던 것과 관계가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신라방이 그쪽에 생긴 것도 다 그런 이유와 무관치 않다고 봅니다.
g. 당시는 漢나라에 점령당한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요동에 있었고 이에 한반도지역으로 이주한 낙랑국이 평양에 주둔해 있던게 아닌가 합니다. 이들 낙랑군과 낙랑국이 고구려 등에 멸망하면서 신라에 흡수가 되면서 (낙랑국이 기자조선의 후예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신라/진한으로 투항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한반도로 삼한이 들어섰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남조의 기록을 보면 대륙백제의 기록이 나오는데, 그들은 바로 4세기에 마한에게 점령당한 백제로써 야마토와 왜, 백제, 임라, 신라를 통합하는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마한은 절강성에 위치한 왜의 영토를 점령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들의 영향력은 아마도 신라의 삼한 통일까지 계속되어 통일후 백제의 옛땅이 신라의 땅이 되었다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절강성 부근이 신라의 영역이 되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h. 한반도에 들어선 삼한은 이합집산을 통해 백제, 고구려, 신라, 가야연맹으로 발전하였고 왜는 절강성으로부터 열도까지 퍼져있던게 아닌가 합니다. 왜는 신라에 의해 기원전후에 이미 정복당하고, 그후로 마한, 가야 로 그 주도권이 넘어가다가 삼한통일 직후는 신라로 주도권이 넘어가고 남부여세력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일본 천황가는 신라와 인연을 끊게 됩니다. (소가씨의 멸절, 텐무, 지토 천황이 사라지고 白鳳 하쿠호, 백제-부여계통 문화로 전환됨)
위에서 살펴보시고 아셨겠지만, 삼한과 삼국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는 세력이라하면 월지세력, 사카세력, 부여세력입니다. 말씀 드린데로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듯이 부여세력과 흉노세력 등으로 한국사를 나눌 것이아니라, 삼한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세력은 바로 월지/사카가 아닐까 합니다. 고구려의 高씨(사카), 爲씨라든지, 그들과 함께했던 마한/마갈이라든지..백제의 월지/마한 세력이라든지..신라의 박씨/석씨/귀씨/김씨/알지 (후에 이들 월지세력을 모두 김씨로 통칭하고 있습니다.)등의 세력도 모두 범월지 세력입니다. 열도의 역사 왜/임라/야마토 또한 범월지의 역사입니다. (부여계통의 천황전까지) 후에 설명될 가야연맹도 말할필요 없이 범 월지세력입니다. 夏/韓의 영향을 받은 월지국은 물론이요, 숙신/스키타이의 영향을 받은 사카족도 물고기/쌍어 숭배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초기 주구묘에서 마한의 월지국은 전방후원분으로 발전하였고, 신라의 월지/사카족은 적석목곽분으로 발전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적석목곽분과 주구묘의 초기모양이 바로 중앙아시아에서 흑해연안의 쿠르간 묘에서 발견되는데 천산지역에서 알타이지역에는 적석목곽분의 쿠르간이 보이며 흑해북쪽의 쿠르간은 둘레에 호가 파여져서 마치 영산강 유역의 주구묘와 같은 형태의 묘제를 보인다고 합니다. 즉, 이들 쿠르간 무덤에도 부족 간의 차이가 보이고 있으며 월지/쿠샨/사카족들이 천산/타클라마칸 지역 등에서 이들의 영향을 받거나 또 많은 토착세력들이 병합되면서 이들의 묘제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이들 모두 물고기 숭배의 초기 공통점을 보이며, 신라의 황금보검이나, 왕의 허리띠에 매달린 물고기 문양, 곡옥, 삼태극 등의 모양에서 보듯, 물고기 숭배의 풍습은 지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신라왕의 금관의 出자모양을 스키토시베리아의 사슴 혹은 나뭇가지로 많이들 해석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스키타이와 천축국을 거친 독특한 신라 사카/월지인들은 물고기 문양과 이들 스키토시베리안의 문양을 조합한 것이 아닐까 라는 추측도 해보았습니다.
신라나 가야의 경우도 스키타이계통에서는 금이나 태양을 숭배하기도 하지만, 夏/韓족이나 辰족의 영향으로 나타나는 물고기 숭배 유물은 많은 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스키타이의 원류를 사카와 다르 (辰/예맥족)의 연합, 즉 숙신으로 해석하였고 그 원류를 한반도에서 찾았습니다.) 특히 금가야의 쌍어 문양은 매우 유명합니다. 신라 금관의 出자는 스키타이계통에서 보이는 나무 가지 문양등과 관계가 깊어 보이는 것으로 해석됩니다만, 이들의 모습과 유사한 물고기 문양을 비교하여 보면 유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금관에는 항상 줄기에 6가지가 곁들여진 모양에서 나뭇가지 문양외의 물고기문양의 뜻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몽골의 국기를 보면 태극모양을 물고기 두 마리로 해석하고 있으며, 해달을 몽골 민족을 뜻한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물고기를 숭배했던 앙소문명의 적자인 夏나라, 또 그들의 적자를 자처하는 韓, 그들의 후손이라 여겨지는 가야의 태극문양과 쌍어숭배 사상...모두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위의 몽골국기의 해달불의 형상은 산동반도에서 발견된 팽이형 토기의 아사달 문양과 똑같은데, 토기가 발굴되기도 전부터 이들 몽골족이 이 문양을 써왔으며, 이 문양의 대표 부족이 바로 13세기의 황금 겨레족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들과 월지/사카와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만주, 한반도와 열도 의 국가들은 이 범월지세력 ( 월지 + 사카 + 韓 + 조선 ) 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오랜시간을 거치면서 함께 혹은 떨어져서, 또 각 지역의 토착인들과도 융합하면서 정체성을 확립해오고, 각각의 국가를 이루어 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상황들이 어느 정도 팩트라면, 이들을 범 월지라는 큰 틀에서 파악하는 것이 한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핵심이라 할수 있겠습니다.
31. 황룡사 9층 목탑
황룡사 9층 목탑은 선덕여왕 643년에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법사가 요청하여, 645 년에 인국항복 隣國降伏’ ‘구한내공 九韓來貢’ 을 목적으로 세운 탑이라 합니다. 한층, 9 韓중 한 나라씩 이름을 붙여 구층목탑을 만들었다하며, 지금 계산하여도 80 m 에 이르는 높이니까 대단한 목탑기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을 짓기 위해 백제의 기술자를 불렀다 하는데 당시의 백제는 의자왕시절로써 남부여란 국명을 가지고 있던 시절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국이나 다름없는 백제의 기술자를 어떻게 불렀느냐라는 부분도 의문시 되어왔는데, 바로 645년도가 열도에 금가야 세력인 아스카/소카세력이 멸망하고 친 신라계 고토쿠 천황이 즉위하던 시절입니다. 즉, 백제/남부여에 열도가 영향력을 넣을수 있었던 시절이란 뜻입니다. 韓이라 하면, 周나라 시절, 황제헌원의 후손을 자처하던 姬씨/韓씨의 세력을 말하며, 그후로 준왕이 韓을 점령하여 왕을 자처하며 세운 나라이기도 합니다. 9 韓으로 거론되는 나라들의 면면으로 봐서는 周나라의 韓의 영역보다는, 준왕이 세운 韓에 속해있었던 범 민족/부족을 거론한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준왕이 세운 韓에는 魏, 代, 鬼, 倭, 조선, 秦, 韓 (夏)등이 속해있었다고 봐야할 것입니다. 준왕의 韓이후로 이들은 삼한을 비롯하여 여러 부족과 국가로 나눠지게 되는데, 목탑에서 지칭하는 이름들은 예맥, 말갈, 여적 등에서 보듯, 國名 이라기 보단 부족명 중심으로 쓴것이 아닌가 합니다. 당시 중원은 당나라와 돌궐, 위구르 등이 등장하던 시기로, 이들을 韓에서 비롯된 부족명으로 해석해보았습니다. 이들 간엔 적대적 관계도 있고 호혜적인 관계도 있을수 있겠으나, 결론적으로는 韓에서 나온 갈래들이라는 인식이 있었음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삼국사기 등에서 거론한 이들의 부족명을 나열해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1.일본, 2.중화, 3.오월(吳越), 4.탁라(托羅), 5.응유(鷹游), 6.말갈, 7.단국(丹國), 8.여적(女狄), 9.예맥
1.日本-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지을 당시 열도에 존재하던 국가명은 일본이므로 그렇게 썼겠지만, 일본이란 나라는 왜로 시작하여 삼한/삼국이 차례로 권력을 차지하면서 형성된 나라입니다. 이들을 韓의 후예로 보는 것은 당연합니다.
2.中華 - 夏/韓 세력을 말하는듯합니다. (夏華). 韓의 땅에 원래 살던 이들로써 夏의 후손입니다. 기타다른 종족보다 혼혈의 모습이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3.오월 - 이들은 倭편에서 설명이 있었지만, (鬼方 + 淮夷 ) => 魏 => ( 鬼 + 倭) 의 관계에서 보듯 淮夷는 오월과 왜의 공통조상임을 알수 있습니다.
또 회이의 지배층은 치우/묘족이라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이들이 바로 倭를 뜻하는 세력으로 일본과 구분해서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열도의 倭는 이미 정복의 대상이였을 뿐이며, 절강성에 남아있는 倭도 韓의 후예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4.탁라 - 추정입니다만, 代족 이거나 돌궐(진한) 있지 않을까라는 추측입니다.
북위를 세운 탁발씨의 발음이나 관련성을 보아도 代족과의 관계를 알 수 있지만, 당시 강력했던 돌궐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빠지기 힘든 韓계열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응유 - 應遊 의 옛발음은 "엉루"에 가까운데, 즉 위/오르/ 세력이 아닐까 합니다. 바로 흉노의 옛발음도 아마도 "엉라" 에 가까운것으로 보아 비록 흉노는 이시기에 지리멸렬해졌지만, 이들이 몽골지역에서 여전히 유목생활을 하며 후에 몽골족으로 다시 응집하게 될것을 생각해볼때 그지역 부족의 총칭이 아니였을까 추측해봅니다. 읍루같은 국명도 관계가 있는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6. 말갈 -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삼한의 마한세력으로써 고구려의 사카족과 결합한 부족입니다. 韓의 후예입니다.
7. 丹國 - 이것도 추정입니다만, 단국이 선비족의 국가를 뜻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鮮/單 은 여러번 "단"이란 발음과 통하고 있음을 설명드렸습니다. 즉, 당시 唐나라를 뜻하는게 아닐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혹은 거란 契丹 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거란은 916년 야율보기에 의해서 흥하지만, 이미 5세기부터 보이기 시작한 부족입니다. ki-tan 이라고 알려진 거란국은 후에 설명 드리겠지만, 貴霜족과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키탄-귀상 으로 통하며 이들이 조선과 통하는 과정은 후에 설명 드립니다.
8. 여적 - 여적 혹은 여진은 말갈과 혼용 되서 사용되기도 하나, 후에 勿吉의 선조로 여겨지는 종족입니다. 물길의 발음이 "워지"로 발음되기도 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여진을 여적으로 실제로 발음하고 있었다면, (옛발음은 "여덕"에 가까움) 물길의 여진이 여덕, 혹은 언덕, 오르도스(스키토시베리아) 와 관계가 있는 종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말갈과 언어가 안 통한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므로 가능한 추리입니다.
9. 예맥은 역시 사카과 더불어 숙신을 만들었던 기본 세력입니다. 辰이라 불리웠던 세력이라 풀이하였습니다. 이들은 최초에 한반도로 해양을 통해 들어왔던 거석문화의 주인공들이며 수메르, 히마르족과 마찬가지로 서방에선 킴메르 혹은 크메르로 불려왔던 종족으로 보았고, 한반도/만주에서는 he-mrac/he-mac 이라 발음되며, 하백, 오월의 태백등으로 발음되었던 주인공들이 아닌가 합니다. 부여의 금와 왕도 이들 히마르/키마르 를 상징하던 이름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역시 韓의 주요 세력입니다. 역시 조선세력과도 관계가 있는 韓의 후예입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당시 신라인들이 韓의 후예로써 어떤 부족들을 꼽고 있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황룡사 9층 목탑이라 생각됩니다. 비록 위의 대부분은 추측입니다만, 일본, 오월, 중화, 예맥, 말갈 등은 확실히 韓계열임을 말할 수 있는 부분이라 봅니다. 이들을 가감 없이 받아들일 수있 을때 우리 거대한 韓민족의 범위를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32. 倭의 시초...淮夷
倭는 우리역사와 뗄레야 뗄 수 없을 만큼 우리 역사서에 나타나는 종족입니다. 倭일 일반적으로 일본을 가리키는 국명으로 사용되어왔고 옛 기록을 찾아보면, 산해경에 倭는 燕에 속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일본의 倭를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반고의 漢書 지리지에는 倭는 낙랑의 해중 (海中)에 왜인이 산다고 나옵니다. 晉書, 梁書를 보면 왜인은 스스로 오나라 太伯의 후예라고 한다고 하는데, 월/오나라는 춘추전국시절의 나라입니다. 吳는 BC 473년에 멸망했는데, 越은 吳를 뒤쫓아 수도를 산동반도로 이주했다고 나옵니다. 越도 초국에 BC 334년에 망합니다. 진시황제의 기록을 보면 <초국, 월국을 멸망시킨다, 越에는 외월과 내월이 있다 라고하고 내월은 대륙에, 외월은 회계의 東海너어 있는 越로써 교류를 끊으라>고 명합니다. 이들 절강성, 산동지역의 왜인들과 일본의 倭인들과도 비슷한 풍습이 보이는데, 몸에 특수한 문신을 하는 등의 풍습과 유전적인 공통점도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위의 기록을 볼 때, 倭의 오래된 기원은 중원의 남쪽 오월 지역이였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또 이들 해양세력들은 해안을 따라 이미 열도에까지 퍼져 있었던게 아닌가 합니다. (내월/외월) 이러한 오월지역은 주나라 이전 상나라시절에는 淮夷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상나라를 구성하는 몇 부족 중에 동쪽의 위를 鬼方이, 남쪽을 淮夷가 양분하고 있었죠. 바로 이 회이는 동이족과 관련이 깊은데, 바로 탁록 대전의 치우가 헌원과의 전투에서 지고 남쪽으로 내려가 자리를 잡은 것이 淮夷라는 전설입니다. 또 이들이 남만의 묘족의 선조라고 합니다. 즉, 이들은 산동북쪽에 살던 귀방 족이 남쪽으로 내려가 그곳 토착민을 점령한 점령 세력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지역이 吳越이 되는 것이고 이들이 倭인으로 불리는 것이라 봅니다. 倭라는 글자구성 자체가 米와 女자로 구성되어 있어 남쪽 왜인집단의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후에 열도 倭가 낙랑 등에 수백 명 씩의 노비를 공급하는 것으로 보아 섬지방의 토착민들을 피지배층, 혹은 노비로 만들어 파는 독특한 시스템을 유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倭 혹은 倭奴國이 그들의 국명이나 부족명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렇듯, 산동, 절강성 지방에 倭인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후에 왜를 장악한 백제/마한이 이곳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 그 후로 삼한을 통일한 신라가 절강성 부근에 신라방을 설치하고 청해진을(?)설치가 가능했던 이유도 그것이라 봅니다. 신라방은 보통 중원에서 부족단의의 지역을 크게 나눌 때 方 혹은 邦 을 쓰듯 (예를 들어, 朔方, 鬼方, 劉邦...) 생각보다 큰 영토 혹은 자치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남은 신라의 지명도 이와 관련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淮夷에서 시작한 倭는 하북 모든 지역에 퍼져 살 던 상나라의 鬼족 (복희와 관계 있어 보이며, 역시 꼬깔모자를 상징하는 글자이고, 기씨 이씨, 귀상, 월지, 진한, 변한, 마한 등으로 퍼져나간 한민족의 주요 선조)과 淮는 周의 시대에 들어서 함께 합해져 商나라 세력을 이루면서 제후국이 됩니다. 바로 魏나라이죠. 倭 + 鬼 = 魏 족이 되어 주나라에 편입되나, 그 후 秦나라가 통일후 망하면서 기자조선에 의해 점령당합니다. 韓과 魏에 이들 기자조선이 진입하기 쉬웠던 것은 바로 상나라 세력인 鬼方과 淮夷였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월지국을 이루어 魏,爲,貴,箕,倭,阿 등등의 부족 혹은 성씨로 한민족의 역사를 만들어 나갑니다. < 상나라시절 하북 요령지방이 鬼方 이였으며 남중국 절강성 부근이 淮夷 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주부근은 귀방과 숙신이 혼합된 세력이였을 것이며, 한반도는 숙신세력이 주로 있었을 거란 추측입니다.
역시 기자조선의 위치는 하북 요령이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이들은 천축/월지국으로 포함되어 야마토/금가야에 의한 열도정복신화와 매우 유사한 전설을 인도지역에 남기는데 이것은 이 시절에 이미 사카세력/금가야가 倭를 정복하여 倭의 지배층으로써 여전히 토착민들을 노비화하는 業을 계속했던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동을 거쳐 이들이 한반도를 거쳐 열도에 진입하여 왜를 개척했으리라 생각하는데. 이들을 또 다른 세력들이 점령하면서, 貴國 (마립간의 貴씨들에 의해 정복)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임라, 금가야, 부여 등이 차례로 왜를 점령하면서도 대외적으로는 열도의 나라는 통칭 倭라고 부릴웠던 것 같습니다. (월지, 굽타 모두 천축국으로 불리우는 것이나, 기자나 위만 때 모두 조선이라 불리우듯...) 즉, 倭라는 나라는 지배층이 여러번 바뀌었으나, 열도의 倭인 (越인, 토착민, 아이누...)등을 점령하는 倭국으로 오랫동안 대외적으로 불리워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삼국사기 등에 지속적으로 보이는 倭寇들은 열도신라, 야마토, 귀국 등이 열도에서 전쟁을 수행했던 경우도 매우 많았을듯하고, 그 이후로도 그 지역의 약탈세력이나, 중국남부의 倭人처럼 생긴 집단은 모두 倭로 통칭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貴國, 야마토 등은 倭를 정복한 세력인 셈인데, 히미(꼬)란 이름도 금가야(임라 가라)의 김씨에 가까운 발음이고, 그 뒤로 기미가요 같은 일본인은 해석하지 못하는 제목의 천황 찬양 노래도 이어져 내려온 듯합니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 등의 기록들에서 지배세력과 관계없이 초반부터 통칭 倭 로 적어내려 간 것도 일본서기를 완성시킨 일본천황의 부여세력의 정치적 목적을 위했던 것으로 보이며, 초반의 진무천황시절 (초기 열도 신라)은 거의 내용이 없는 기록으로 남겨두고, 후에 임라/야마토/마한세력부터 편의에 맞게 기록하는데, 당시에 倭라는 기록의 주체는 바로 야마토/임라/마한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뒤로 가야인, 신라인, 백제인으로 바뀌지만, 지속적으로 倭라는 대외명칭을 사용하였고 삼국사기도 마찬가지로 기록하였습니다.한국어와 일본어는 대체적으로 매우 비슷한데, 한국어는 알타이어(조선) + 韓語 (夏어, 수메르) + 예맥/숙신어 + 사카어(秦, 商, 조선) + 부여어 등이 합해졌고 민족 형성기에 인도북부에서 지내는 시간으로 인해 그 지역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 이유로 알타이어라고만 말하기도 힘들고, 우리말에 대한 메소포타미아나 타밀(수메르영향)지역의 영향도 확인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물론 한국어는 한반도 토착세력인 예맥/숙신/아이누 등의 영향까지 받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즉, 왜는 淮夷에서 비롯되었으며,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달랐을 것이라 예상합니다. 이들이 晉나라 시절 鬼方과 합쳐지며 魏세력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곳에서 월지국이 탄생하여 중앙아시아로 이동할 때, 倭세력은 다시 남중국과 절강성으로 분리되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며, 요령에 삼한이 자리 잡았을 때 산동,海中에 있었다고 나오는 倭人들은 절강성과 대만 일본열도에 퍼져서 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33. 倭와 신라 ( 大阪 이 Japan 이고 日本이다..)
일본 건국 설화입니다.....일본의 첫 임금인 진무(神武) 천황은 우가야후끼아헤즈의 넷째아들로써 새로운 나라를 세우러 동쪽으로 갔다.(東征) 그 과정에서 큰형 이쓰세는 적의 화살에 죽고, 둘째형 이나히와 셋째형 미께이리누는 떠나 가버렸다. 혼자서 계속 전진하다가 아마떼라스를 꿈에 나타나 까마귀를 보내 주어 길을 안내하겠다고 말해준다. 그 까마귀를 따라 행군하여 소호고호리(添郡, 層富縣)에 도착하여 기시하라에 서울을 세우고 왕이 되었다. 일본기 에는 1대 진무를 하쓰구니시라스(始馭天下)라고 하고, 10대 스진도 하쓰구니시라스(御肇國)라 하였다. 두 하쓰구니시라스는 한자로는 다르게 쓰여 있으나 모두 처음 나라를 세운 왕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1대와 10대 사이의 여덟 천황에 관한 일본기의 내용은 계보를 말한 것뿐이고 실제 사건이 없다. 그 뿐만 아니라 1대와 10대에 관한 일본기의 기사에는 같은 내용도 있다. 그러므로 처음 나라를 세웠다는 왕이 일본기 에 둘이 있게 된 것은 원래 하나만 있던 초대 임금에 관한 기록 앞에 또 하나의 초대 임금을 나중에 추가한 것이다. 일본기 가 나오기까지 일본에서는 몇 번 역사를 개편하였다. 임신란(壬申亂, 672년)이라는 혁명전쟁을 일으키고, 새로 천왕이 된 덴무(天武)의 명령에 따라 일본서기 편찬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712년 고사기 가 편찬되고 8년 후에 같은 줄거리를 가진 보다 충실한 내용의 일본기가 되었다. 덴무는 그때까지 가라를 지지하여 온 일본의 황실을 신라계의 힘을 빌어서 일으킨 임신란으로 정벌하고 새로 천황이 되어 일본사를 개편시켰다. 그 결과 완성된 것이 고사기 와 일본사기 이다.
1. 신라 연오랑 (延烏郞), 세오녀(細烏女), 아달라 이사금 4년 (157년) 倭 정벌. (삼국유사)신라에도 일본의 건국설화가 내려옵니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입니다. 연오랑이 먼저 열도로 떠나고 그곳의 왕이 되었고, 곧이어 세오녀도 열도로 가게되어 귀비(貴妃) 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라는 잠시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가 세오녀가 짠 세초를 받고 다시 빛을 찾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만약 이것을 신뢰한다는 가정아래 추측을 해본다면...일단 이들이 까마귀 烏를 쓴 것부터 대문구 문명의 영향을 받은 소호금천게열의 사카/월지족 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옛 발음은 烏 = kaw, 延 = lan/yun(?), 細 = sēh 입니다. 즉, 연커, 세커, 정도의 발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시 신라도 초기세력으로써 석탈해, 김알지 신화 기록으로 보면 이들이 월지/사카 세력임을 암시합니다. 月支의 발음도 전에 말씀드렸듯이 (음)워케 에 가까운 발음입니다. 즉, 연오 = 워케, 세오 = 사카를 뜻하며 신라를 장악하던 이들이 열도에 진입하여 이미 먼저 들어가 있던 倭국을 정복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삼한과 함께 요동을 거쳐 한반도 로 진입하는데, 倭도 기원전부터 삼한과 항상 매우 가까운 위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月支 와 昔 세력이 倭를 정복하였는데 신라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는 표현은 두 세력의 글자에서도 보듯이, 月세력과 日세력임을 알 수 있습니다. 昔은 해를 상징으로 삼는 세력이 아니 였나 합니다.삼국사기의 아달라 이사금 때의 기록을 보면...아달라 4년 <처음으로 감물甘勿 마산馬山 의 두 현을 설치하였다. 3월에 장령진長嶺鎭6)을 순행하여 그곳을 지키는 군졸들을 위로하고 각각 정벌에 필요한 도포)를 하사하였다. >즉, 새로운 현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아달라 5년<죽령竹嶺 을 열자 왜인倭人들이 예방하여 왔다.> 죽령은 감숙지역에 있던 지역명으로 晉인들과 秦인들이 쟁패를 다퉜던 곳이고 그곳에 남산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韓原에 가깝습니다. 바로 사카/월지/秦 인들의 지역입니다. 열도에 죽령을 만들고 그곳에서 倭인들과 접촉했음을 의미합니다.
아달라 11년 <용龍이 경도京都에 나타났다. >열도 정복군이 다시 신라로 돌아왔음을 의미합니다.이들이 침투했던 지역은 오사카 지역으로써 옛 이름은 난파 難波 입니다.(진무천황의 동죤征신화를 근거로) 항구로 알려져 있는데, 배가 난파되어 도착한곳에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가 추측하게 합니다. 이들이 처음 오사카란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건지, 후에 아스카 세력이 오사카란 지명을 사용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역시 사카세력답게 오-사카( 大坂, 큰 언덕)을 뜻합니다. 사카가 大丘 와 같은 의미로써 큰 언덕을 뜻한다고 말씀드렸었습니다만, 오-사카는 크다는 의미가 두 번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말로도 언덕 (위독, 오로도스) 이미 큰 땅이란 의미이므로 큰 언덕이라고 하면, 크다는 의미가 두 번 들어가는 중의 글자가 되겠습니다. 오-사카를 예전엔 오자카 라고도 발음했었는데 이는 大의 옛 발음으 "tha(t)"에 가까우므로 "사"/"자"로 혼용해서 발음 되었을 거라 봅니다. 네팔지역에 남아있는 Dacca 는 다카의 발음으로 남아있음을 의미합니다.大坂은 옛 발음이 tha(t) Pan 이며, 지금도 th 발음을 일본에서는 "Z/J" 로 발음하기 때문에 大阪을 "자팬" 이라고 읽었던 것이 이해가 갑니다. 바로 이 대판이라는 명칭이 일본의 대외명칭이 되어 이에 비슷한 발음을 가진 글자인 日本으로 국명을 정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그것이 신라계 덴무천황이였기 때문이라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열도의 월지/마한의 가장 특징적인 물고기 숭배와 月 자였음을 생각해볼 때, 日本이란 국호에서부터 해를 상징하는 사카족에 의한 국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의 초기 이름이 서라벌이라는 명칭도 보이는데 이것 또한 seres란 명칭에 변한/박트리아 계통의 ㅍ/ㅂ 의 "벌"자로 이루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재밌는사실은, 월지/사카족의 도읍과 터전에 항상 나타나던 大丘 (사카)의 지명인 오사카에 위치한 오사카 성 ( 大坂城 )의 또다른 이름이 바로 금성(킨조金城)라는 것입니다. 묘하게도 신라의 수도로 알려진 금성이란 지명은 한반도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감숙에도 금성이 있습니다만,) 대구, 경주, 상주, 서울(사라)등 다른 지명은 남아있어도 초중기 신라의 제일 중요한 금성이란 명칭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같은 사실을 정리해서 살펴보면,a. 오사카는 사카족의 도읍지이다.b. 월지/변한(박트리아)등의 발음에 따라 대판으로 발음하기도 한다. (예=페르시아, 벤골, 변한) c. 신라의 도읍지는 金城이다.d. 오사카 성은 金城 이라 불리운다.e. 연오랑 세오녀에서 보듯, 신라는 이미 신라 초기에 열도를 정복한 것으로 나온다. 열도에서 머무르며 한동안 안 돌아옴을 알 수 있다. 즉, 열도에 도읍을 정했다는 뜻...f. 왜국과 신라 (금성)간의 전투기록을 보면, 수전이 아니라 육전이다. 193년 (벌휴) 굶주린 왜인 1000여명이 신라로 넘어왔다고 써있으며, (굶주린 자들이 배를 타고 대규모로 넘어오는 것은 불가능), 232년 갑자기 왜인들이 금성을 포위하여 조분왕이 직접 기병을 이끌고 1000명을 사로잡았다는 기록, 393년(나물)때는 기병이 돌아가는길을 박고, 보병을 보내 승리를 거둔다는 내용등등등..금성과 왜인들은 육전을 치러왔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g. 덴무에서 몬무 천황 등...신라의 삼한통일 후 일본이 신라/사카계열로 잠시 회귀하였음을 알수있음.
(오사카/대판 을 국명으로 사용. 재팬,니폰 모두, 오사카/대판에서 유래)이런 상황을 정리해 보건데, 야마토정권이 열도신라를 정복하기 전까지 금성은 바로 오사카에 위치하고 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2. 신라의 연오랑 신화와 일본의 건국신화의 비교
일본의 건국신화는 우가야 후기야헤즈 의 아들인 진무천황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들과 연오랑 세오녀 신화를 연결해서 생각해본다면..우선 "우가야 후기야헤즈" 란 이름에서 연관성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요동에서 삼한이 한반도로 내려왔지만, 그 흔적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마르가라/말갈이란 부족명도 馬韓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갈과 마한은 동음이라는 표현이 요사 에 나옵니다.) 커가라 (고구려 )도 역시 사카계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산조페르시아와 굽타왕조로 인해 감숙에 남아 7세기 독립한 쿠샨/월지 세력은 위가라/위구르로 남아있습니다. 신라의 초기 세력은 월지/사카 세력이고 뒤에서 설명 나오겠지만, 마립간이 위가라 세력임은 신라편에서 설명드렸습니다. 일본에서 발견되는 고문서에 우가야가 일본을 오랫동안 지배했다는 기록이 보이기도 한다는 걸로 보아 신라의 열도 지배는 신빙성이 있어 보입니다. 후기-야-헤즈는 석탈해 와도 얼핏 비슷하다는 생각입니다. 이들의 자손이 진무천황인 하쓰구니 시라스 인데 1대 천황과 10대 스진천황모두 하쓰구니 시라스 라고 하며, 계보 외엔 별다른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왜곡의 흔적이 보이는 미스테리의 천황시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쓰구니 시라스 란 이름도 추측을 해보자면, 하-쓰구니 시라스, 즉 "하(큰) 사카의 시라스"입니다. "하"는 일본에서도 야, 오 등과 함께 크다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韓의 뿌리, 夏도 크다라는 뜻이죠.오-사카 지역이 바로 진무가 점령했던 지역입니다. 하쓰쿠와 오사카의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시라스는 옛 부터 秦/월지/천축 국을 부르던 대외적 명칭인 신라(seres) 입니다. 즉, 오사카의 시라스를 말합니다. 이들을 인도한 아마테라스도 月/魏/馬 의 발음인 mra를 연상시킵니다. 아마-테라-스, 역시 (음)라-타르-스를 연상시킵니다. 이것은 이들 월지/위세력의 가장 조상격인 아사달, 오르도스, 알타이를 떠올리게 합니다. 즉, 아마테라스 (월지/알지/연오랑)의 안내로 하쓰구니 시라스 (사카/세오녀)가 동정을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까마귀 (커/사카)는 태양을 숭배하고 새를 숭배하는 대문구문명/殷나라의 후손들로써 현조를 시조로 하는 秦/신라로 계승되어온 새숭배 토템입니다. 즉, 삼족오를 숭배하는 것은 이들 사카/월지세력임임을 생각해보면, 고구려, 신라가 동질세력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오녀가 貴妃가 되었다고 기록되는데, 어느 순간부터 倭國이 貴國으로 부르는 기록을 보게 되는데 이 부분은 사실 마립간세력에 의한 오사카정복이후로 그리된다고 봅니다만, 세오녀가 귀비가 되는 이유는 초기 열도 정복세력이 연오랑, 즉 알지세력이 먼저 갔기때문에 월지의 貴씨성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혹은 연오랑이 초기 열도정복 세력, 세오랑이 마립간 정복세력을 뜻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 즉, 알지/월지는 쿠샨족의 貴씨족이였기에 정복된 倭를 貴國이라 부른 것이라 봅니다. 신라정복설은 일본학자들도 가끔 주장하는 바인데.. 일본학자 호시노 하사시는 1890년 고지키와 니혼쇼키를 연구하여 완성한 논문을 통해 천황가의 선조가 한반도로부터 일본을 발견하여 도래하여 온 신라왕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들 황조는 시마네지방에 정착했다가 킨키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이를 진무동정, 이라 하여 아마테라스를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는 것입니다. 스사노요는 신라왕으로 열도 정복 후 한반도와 열도를 오아래하였고 후에 신라가 배반하여 신공황후가 정벌하여 진압하였고 그 후, 신라와 당이 연합하여 배신하자 천지천황이 백제를 거느리고 맞섰으나 패배하였고 한반도와의 인연이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빌미로 임진란이 일어났고 천황가는 한반도의 지배자이므로 다시 일본의 영토로 편입하자는 주장입니다. 물론 결론은 철저히 일본입장에서 주장을 한 것이나 초기에 신라인의 일본정복을 인정한 주장이라 볼 수 있습니다.神武(진무)라는 천황명 자체가 월지/사카의 김/진씨와 관계가 깊어 보입니다.
崇神천황의 이름도 역시 김/진씨와 관계가 깊어 보이는 이름입니다. 당시 끊임없는 왜와의 전투기록을 보면 바다를 건너왔다면 그리 자주 그리 많이 싸울 수 없는 기록들입니다. 다시 말해 육전이 아니고선 설명하기 힘들다는 뜻입니다. 지금 현대 기술로도 해협을 건너 상륙전쟁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진데, 당시 상황에서 시도 때도 없는 벌이는 전투는 해협을 두고 일어나는 전투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즉, 열도내의 신라영토 (금성)에서 벌어지는 왜와의 전투가 아닌가 싶습니다.
478 년 임라가라가 열도를 평정하고 6국왕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끊임없이 금성에서 벌어지는 왜와의 전투장면이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나옵니다만, 478년 후로는 금성에서의 전투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로 열도의 금성을 빼았겼기 때문입니다.
3. 마립간 세력의 열도 신라 정벌
또한 일본에는 신라에 의한 열도 정복신화가 내려오는데, 일본서기에 보면 응신천황 22년에 신라군이 西島 내해에 침공하여 오사카로 부터 10리에 이르러 항복했다고 나옵니다. 천황은 이때 古費 6국을 떼어줬다고 나옵니다. 응신천황은 신라에 항복하는 것을 맹세하는 표시로 白馬의 목을 쳐서 묻었는데 이를 "백마총"이라 해서 아직도 전해 내려옵니다. 이것은 응신 157년에 이미 신라영토가 된 오사카지방을 다시 마립간의 신라가 정복합니다. 유례왕 11년의 일로 (292년) 이것은 246년 마립간세력이 신라에 침투한 이후의 일입니다. 즉, 292년 즈음에 신라의 지배계층이 바뀌었음을 의미합니다. 백마의 무덤이라고는 하나 이곳에서 유물도 나오며, 6국을 정복했다는 사실로 보아, 이들이 정복하고 관리자로 남았을 것입니다. 백마총에서 나오는 유물들이 중앙아시아적이고, 유리 그릇 등, 신라의 적석목곽분의 유물과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당시 유례왕의 삼국사기 기록에는 별다른 기록이 나오지 않고 倭의 침입만을 기록하고 있는데 신라와 신라간의 전투는 후에 정확하게 기록하지 않는듯합니다. 내려오는 왕들 간에 혈통을 이어지도록 기록하고 있음을 생각할때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오-사카라는 지명이 신라초기세력의 지명인지 아니면 이들 마립간세력의 지명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이들이 사카세력에 의해 오사카란 지명이 생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백마란 상징성은 이들이 중앙아시아적인 용모를 하고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이미, 설명을 드린바 있지만, 비문에는 이런 문구가 들어있습니다. <丸山에 功을 紀한 장수가 있어....곧바로 9주를 일광一匡 하고 동정서벌東征西伐 하여....>문무왕은 681년 돌아가신 것으로 나오는데, 당시의 신라는 아직 9주란 개념이 없을 무렵입니다.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이 통일신라를 9주 5경으로 개편했음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문무왕에서 말하는 9주란 무엇일까요..다름 아닌 九州를 뜻합니다. 한반도에서 북쪽으로 고구려와, 서쪽으로 백제와, 남쪽으로 왜, 동쪽으로 바다로 알려져 있는 신라는 동정서벌할 수 있는 동서로 긴 나라가 아닙니다. 이들이 九州 를 동서로 정벌했다는 것은 일본열도 외에는 산정하기 힘든 지역입니다. 그렇다면 丸山은 어디일까요. 丸山은 큐슈의 나가사키지역 마루야마丸山 란 이름의 번화가로 아직도 명칭이 남아있습니다.
큐슈의 나가사키지역이나 혼슈의 오사카지역은 비교적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이들 신라인들은 구주로부터 오사카지역까지 열도를 개척하였으며 개척으로 머물지 않고 도읍을 정할 만큼 일본의 고대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일본의 초기 건국세력과 천황가는 신라인이 아니였을 까 생각합니다.
34. 야마토, 금가야, 백제
1. 야마토국과 임라가라
일본에는 또 다른 건국신화가 있습니다. 바로 야마토/사마토국의 히미꼬 신화입니다. 히미꼬의 건국신화는 금가야와 매우 닮아있어서 김수로의 딸과 왕자들이 야마토국을 건국한 것이 아닌가 라는 추측도 합니다만, 일본에서는 신라를 정벌했다는 진구(신공)황후와 연결해서 생각하기도 합니다. 히미꼬의 존재는 중국의 삼국지에서 확인이 되는데 진구황후의 통치기간은 313-389 (321-389)로 나타남으로 서로 같은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신공황후의 존재 자체에 대해서도 견해가 갈림)히미꼬는 239년 중원의 魏나라로부터 친위왜왕이란 작위를 받고 248년, 266년에도 사신을 보내어 내부에 전쟁이 있음을 암시합니다.
야마토와 열도신라 등의 전쟁이 지속되는 기간이 지나고 야마토가 열도를 장악해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남조 宋에 의해 438년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마한의 육국 왕을 요구하나 왜국왕으로 만 봉해집니다. ( 아직 전쟁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464년에 이 이를 순서별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478년에 이르러서야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마한>의 육국왕으로서 왜왕으로 봉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남조와 지속적인 연결은 倭라는 세력이 오월의 본거지와 연결되어있기 때문) 이를 연도별로 정리해보면,a. 열도에 초기신라가 영토를 확보하고 오사카에 금성을 세웁니다.b.175년 마한/임라/야마토의 히미꼬가 열도에 나라를 엽니다. 이들과 열도신라, 왜가 열도에 관한 패권경쟁을 합니다.c,야마토는 239년에 위나라로 부터 親魏세력임을 서로간 확인합니다. (인도 쿠샨왕조때도 친위장군이란 명칭을 받았었습니다. 야마토는 월지세력이기 때문에 魏와 뿌리가 같습니다.) d. 246년 신라는 마립간 세력이 진입합니다. 이들은 오사카에 292년 침투해 기존 세력과 교체합니다.야마토국은 그 후로 위나라에 사신을 두 번 보내면서 내부 전쟁을 했다하는데, 바로 이시기가 야마토와 신라가 열도에서 전투를 수행하던 시기입니다. 당시 열도 신라를 貴國으로 호칭하고 있습니다. 즉, 야마토의 내부전쟁은 바로 열도 신라와의 전쟁을 의미합니다.
e. 진구황후(313-389 ?)가 열도 신라를 복속시킨것은 5세기 후반일 것입니다. 후에 등장하는 왜5왕이 宋나라로 부터 받은 6국 왜왕작위는 478년도의 일로써 열도 신라정벌이 있음 후에 받은 것입니다. 즉, 히미꼬는 3세기에 魏나라와 접촉하여 친위왜왕이란 작위를 받고, 이들 야마토는 5세기 중반이후 열도신라를 정복하고 나서 5왜왕이 등장하여 6국왕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신라/마한/백제/왜/임라/진한/가라)의 칠국을 요청하여 백제를 제외한 6국왕에 봉해지는데, 이것은 당시 倭를 정복한 주체 세력이 마한/월지/임라/가라 세력이였고 이들이 倭, 진한, 신라, 백제를 복속한 것인데, 마한과 백제를 동일시하여 7국왕에 봉하지 않고 6국왕이 되었던 게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혹은 부마국 형태의 담로국인 백제는 남조와 또 다른 외교채널을 가지고 있을수도 있습니다. 백제의 무덤양식이 임라/마한과 틀린 것도 마치 고려왕이 몽골왕과 다른 풍습을 보여주듯, 완벽한 동일 세력은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한편 열도신라만을 정복했을 뿐인데. (광개토왕비문을 봐도 한반도 신라는 정복당하지 않았습니다.) 왜 신라를 정복하였다하고 이것을 중원의 남조는 인정했을까요.
이것은 아마도 신라의 수도, 금성이 당시에는 오사카에 위치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한반도에서 중요한 무기 등을 들여와서 열도에서 정복활동을 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당시엔 신라왕족의 무덤도 열도에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있으나 열도신라가 패퇴하면서 무덤을 경주로 모두 이장했을수도 있다고 봅니다. 아니면 왕릉급 무덤은 좀더 안전한 지역에 모아놓았을 수도 있구요. 여하튼 경주란 도시자체가 살면서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라 기획도시라는 점 (후세에 계획을 하고 이전한듯한..) 또한 그들의 묘도 매우 계획적으로 배치되어있다는 점 (묘의 위치가 별자리와 같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등이 매우 미스테리했는데, 이들의 원래 도성이 오사카의 금성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야마토세력은 신라의 수도를 점령하고 신라를 정복했다고 남조에 천명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2세기에 백제에게 통합된 마한세력중 잔존세력이 가라(금가라)와 병합되면서 임라가라가 태어나고 이들이 도로 진입하여 야마토/임라토를 세웠을 것이라는 추측입니다. 이들은 곧 백제를 부마국으로 만들며 영향권아래 두게 됩니다. 5 세기 초에 광개토대왕의 남벌로 임라가라 연맹에 큰 타격을 입지만, 전열을 가다듬어 6국을 복속하기에 이릅니다. (478년) 그러나 6세기 초, 법흥왕 세력이 들어서면서 신라의 국력이 다시 강력해지면서, 임라가야의 금가야를 병합하게 되며(532, 법흥왕), 결국 이들, 금가야 잔존 세력은 열도로 피신하게 됩니다. 이들 금가야 세력이 임라/월지세력을 밀어내고 아스카시대를 엽니다(6세기초). 이들이 바로 금가야의 사카세력(소가씨)입니다.
한반도에서 쇠퇴해진 임라세력덕분에 백제는 다시 부여세력의 집권으로 국명이 남부여로 바뀝니다. 후에 신라에게 패퇴하여 한반도에서 국세가 기울면서 열도로 넘어온 부여세력이 결국 소가씨를 멸절시키고 하쿠호(白鳳)문화를 엽니다. (650년) 白자와 鳳자 (까마귀가 아닌 봉황)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미꼬의 신화는 금가야와 닮아있다고 하는데, 특히 龜指峰 거북배등등 거북이가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龜의 옛 발음은 kwrǝ 로써 가라와 닮아있기도 합니다. 또한 "히미"라는 발음자체가 김金과 닮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즉, 3세기 초에 금가야를 필두로 한 임라가라 세력들이 야마토란 이름으로 열도 정복활동을 시작했을 듯합니다. 이들이 열도에서 세력을 넓히다가 드디어 열도를 통합한 왜5왕이 6국왕 칭호를 요구하였다. 당시 宋나라는 북위와 서로 중원의 쟁패를 다툴 때였으므로 북위출신의 신라 마립간들보다는 기존의 마한/월지의 魏세력과 동맹을 맺어야할 필요성을 느꼈던 건지도 모릅니다. 전에도 설명 드렸지만, 이들이 마한/임라세력이고 야마토세력임에도 외부에 倭왕으로 알려지는 것은 열도와 절강성지역은 예로부터 왜인들의 지역으로 알려져 있기에 이곳에 들어와 지배세력이 되어도 그전의 국명을 그대로 사용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위만이 들어와도 그대로 조선을 사용하는 것과도 같은 경우라 보겠습니다. 백제도 임라마한의 담로국으로 백제란 이름을 가지고 반독립적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히미꼬의 야마토세력이 금가야와 연합한 임라세력임을 밝혀낼 결정적 유물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일본고유의 무늬라 자랑하던 "파형동기" 입니다. 규슈에서 열도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열도에서 발견되는 조개와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고유의 유물이라고만 여겼던 파형동기가 한반도 김해 대성동등, 한반도에서도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유물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일본인들이 말하듯 금가야/임라의 유물들이 왜계인 것이냐, 아니면 신라/금가야/임라세력이 야마토를 세운 것 이냐의 차이가 있겠으나, 역시 이것의 비밀을 밝힐만한 강력한 유물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바로 秦나라시절의 와당 무늬입니다.
---> 사진자료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http://blog.naver.com/eujin2010/30091675661
(4세기 즈음의 파형동기가 발견되는 한반도에 비해 열도에는 이미 야요이 시대의 파형동기가 나오므로 한반도에 왜계 세력이 있었다고 일본이 주장할만합니다만..사실은 이들이 秦과 같은 사카족의 후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천산을 거친 쿠샨의 마립간시절에 파형동기가 발견되기 힘든 점도 일면 이해가 갑니다.) 秦나라에서만 유행하던 와당 무늬가 바로 해바라기 무늬입니다만, 가야, 야마토의 파형동기와 흡사합니다. 즉, 진나라의 해바라기라 무늬는 아마도 태양을 나타낸 문양이 아닐까합니다. 조개의 문양에 비교한 일본의 해석은 허무맹랑한 비교가 아닐까 합니다.秦의 후손이라 알려진 세력은 한반도에는 금가야와 신라의 사카/大丘 세력 밖에 없습니다. 秦인들이 인도 북부에서 seres/사카 로 존재하다가, 전진,북위등의 세력을 거쳐 진한, 신라, 금가야를 형성하며, 그중에서도 마한과 가야가 합쳐지며 임라가 탄생하여, 야마토란 이름으로 열도를 정복해나갔음을 알 수 있는 강력한 유물이 아닐까 합니다.
전 글에서도 설명을 했지만, 복식으로도 이들 세력의 연관성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본 글에서 前秦 과 동일세력으로 해석한 北魏 의 복식과 신라/가야복식, 야마토국의 복식과 닮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블러그의 사진 확인)참고로 포상팔국에 대해선 아직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는 미스테리 국가입니다만, 신라편에서 설명했던 법흥왕 선조 前秦 부건의 아버지 이름이 蒲洪 이였다고 합니다. 당시 군벌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三秦왕을 자처하며 蒲씨를 苻씨로 바꿨다 합니다. 부홍의 아들이 부건이며 前秦을 세우며 북조를 통일하게 됩니다. (신라편에서 설명되어 있습니다.) 혹시 이들 浦씨들의 존재가 마한/월지 안에도 존재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浦上은 말씀드린 데로 옛발음이 pho-zang 입니다. 푸장/후잔의 발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발음은 쿠샨/귀상과 닮아있습니다. 전진의 浦씨나 월지마한의 浦上 이 貴씨와 貴霜과 연결되어있는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한편, 이들 여타 세력을 통합한 야마토 세력의 묘제를 보면, 응신천황에 들어와서 대규모의 전방 후원분이란 것이 구성되는데, 이것이 바로 기존 마한/월지세력의 주구묘(묘 둘레에 수로를 판다)에서 발전해온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 월지세력은 앙소문명 혹은 스키타이 시절부터 물고기 숭배를 해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허황후의 묘비를 보면, 아유타는 魏의 후손이라고 나옵니다. 월지의 후손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변에 호를 파서 물을 채운다던지, 그 묘제의 형태가 물고기를 닮아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열도의 정복활동이 활발해지고 풍부한 인력 (죠몬인)을 확보하게 되면서 대규모의 묘건설이 가능하게 되었던것이 아닌가 합니다.
2. 아스카시대와 금가야
일본은 야마토시대를 지나 아스카시대로 넘어옵니다. 아스카는 그 전의 모습과는 확연히 틀려지는데 기존세력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가씨가 영향력을 키우며 불교를 받아드리면서 불교미술의 꽃을 피웁니다. 아스카로 들어가기 직전 천황인 센카천황은 소가씨 권력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536- 539 동안 재위한 것으로 나옵니다. 그 후로 등극한 킨메이 천황부터 아스카문화로 들어섭니다. 아스카는 중앙아시아적인 모습과 헬레니즘/간다라 풍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을 쇼토쿠태자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당시의 백제는 (나중에 다시 설명합니다만, 백제는 월지/임라 세력에서 부여세력으로 주도권이 다시 바뀝니다. 538년 백제성왕이 남부여로 국호를 변경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부여세력으로써 물론 남조와의 적극적인 교류로 많은 중원문화가 흡수됩니다. 하지만 대륙/간다라 적인 요소가 강해지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한반도는 532년 금가야가 신라에게 멸망당하는 시기입니다. 센카천황이 등극한 것이 536년으로써 금가야의 멸망시기와 매우 비슷합니다. 아스카 (飛烏), 즉 다시 까마귀가 등장하는것은 사카/은 세력임을 의미합니다. 아스카란 명칭이나 지명도 오사카처럼 사카와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센카황제의 이름도 사카와 관계가 깊어 보입니다. 소가씨와 석/사카 와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시 이시기에 남조의 문화를 대폭수용한 부여 백제의 영향도 컷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부여백제는 임라에 속해 있다가 광개토대왕의 남벌과 지속적인 신라와의 전투로 임라의 한반도 세력이 점점 약해지면서, 결정적으로 금가야가 532년 신라에 흡수되면서 임라의 백제에 대한 지배권도 약해집니다. 백제는 남부여국으로 다시 탄생하나 여전히 임라와 백제는 매우 가까운 사이임에는 틀림 없었을 것입니다. 센카 천황 다음 아스카를 연 킨메이 천황의 이름도 김/사카씨와 관계있어 보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즉, 이들 금관가야 일부 세력이 열도로 밀려나면서 이들 사카/소가씨의 선조들은인도북부에서 간다라의 현장에 있었던 경험이 있으며 동족인 前秦등과의 원활한 접촉으로 열도에 불교를 전파하고 간다라풍의 문화가 꽃피워지게 됩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이 시기 (6세기)가 한반도 남부에 갑자기 다수의 전방후원분이 나타나는 시기입니다. 또 일본에서는 전방후원분이 사라지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열도의 지배층이 임라/마한에서 소가/금가야 세력으로 바뀌었음을 안다면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금가야세력에 의해 밀려난 임라/마한세력이 영산강등 한반도 남부로 피신하여 다수의 전방후원분을 남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 800기에 다란다는 말도있습니다만..)620년 쇼토쿠대자와 소가씨가 사망하자 소가씨의 실정으로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는데 645년 내란으로 소가씨 일파는 살해되었다합니다. 바로 뒤에 즉위한 고토쿠 천황이 바로 일본 최초의 大和 (다이카) 연호를 쓰게 되는데 역시 사카와 같은 개념의 大和를 택하게 됩니다. (대구/사커와 비슷한 발음의 연호) 이들에 의해 650년 남부여세력의 하쿠호 (白鳳) 문화가 생겨나기 전까지 아스카문화는 지속됩니다.그 뒤로 한반도는 660년 백제가 멸망하게 되는데 이때 열도의 남부여세력인 고교쿠(사이메이) 천황은 신라를 치고자 병력을 준비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고 죽게되기도 합니다. 그의 아들 덴지천황이 다시 원군을 보냈다가 백강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한반도에서 세력을 잃게 된다고 서기엔 기록되기도 합니다.
덴지는 소가씨를 암살을 수행한 천황입니다. 덴지 다음의 고분천황은 수개월간 치세했다가(672) 덴무와의 전투에서 죽고 황위를 빼앗긴다고 나오는데 바로 이때가 고구려를 신라가 멸망시킨 바로 직후입니다.(668) 또, 전투를 통해 즉위한 이 덴무천황은 갑자기 매우 친 신라적인 정책을 쓰기 시작합니다. 덴무가 천황은 일본이라는 국호를 쓰기 시작한 천황으로도 유명한데, 위에서 설명 드린데로 ni-pon이라 일본인들이 발음하는 日本은 大阪/오사카의 다판/자판에서 비롯된 국호입니다. 즉, 덴무는 친신라적인 정책만 쓴 것이 아니라 일본의 국호마저도 신라인들이 개척한 大阪과 가장 가까운 발음인 日本 이란 글자를 선택한 것 입니다. 뒤에 등장하는 몬무(문무)천황은 당시 신라의 신문왕과 마치 가족 같은 편지를 주고받은 것으로도 미스테리한 천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 신문왕 직적의 신라왕이 문무왕이였으며 일본 몬무천황은 재위기간이 683-707 이고 신라문무왕은 661-681 입니다. 또한 신라의 문무왕은 바다에 릉을 만들어 능을 찾을 수 없는 왕으로도 유명하지요. 일본서기 등의 기록에도 몬무천황은 처음 천황이 되었을 때가 20대였다는 기록과 70대였다는 기록이 섞여있어 혹시 이들 두 왕이 동일인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덴무가 명령하여 일본서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나라시대를 처음 연 겐쇼천황 (720)년이 되어서야 일본서기는 완성되는데 사카세력의 아스카문화에서 나라문화로 바뀐 것은 그 지배세력에 변화가 생겼음을 의미하며 이때가 바로 부여백제세력이 열도에서 세력을 잡기시작한 것을 의미하며 그 때문에 열도 신라와 임라 마한의 역사를 축소하고 왜곡하여 기록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일본인들의 억양을 들어보면, 한국의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경상도 억양을 닮아있습니다. 특히 오사카(금성)지방의 억양은 더욱 유사성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들의 초기 문화적 뿌리를 형성했던 이들이 신라/가야 지역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한의 월지세력도 역시 같은 뿌리였기에 야마토/임라시대에도 지속되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남부여의 멸망으로 부여세력이 일본의 천황가에 영향력이 강해지며 그 구도가 바뀌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부록-왜와 四國 연대표
사국시대와 왜의 관계를 시대별로 기록된 사건을 정리해보면 <삼국사기 >, <일본 서기 >, <광개토왕비문 >기록 입니다. 원래 연표는 "쓸쓸한 나"라는 아이디를 가지신 분이 작성하신 것으로 매우 정리가 잘되어있어 편집하여 올립니다.
BC 50년 (혁거세): 신라, 왜인이 침범하려다 물러남BC 20년 (혁거세): 신라, 왜 귀화인 호공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냄14년 (남해): 신라, 왜인이 병선 100여 척을 보내 해변의 민호를 약탈하자 이를 막음59년 (탈해): 신라, 왜국과 우호를 맺음
73년 (탈해): 신라, 왜인들이 木出島에 쳐들어옴. 왕이 각간 羽烏를 보내 막게 했는데, 이기지 못하고 羽烏는 전사함 초기 기록의 신라와 왜의 관계는 정의하지 못하였습니다.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나 모두 모호하게 기록한 것으로 이해합니다. (혹은 1BC1세기 경은 아직 인도천축국/간다라 시절인데, 나중에 열도를 정복하는 야마토/임라/가야 세력과의 관계에서 이들을 "왜"라고 기록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봅니다.)
87년~92년? (숭신): 가라, 蘇那曷叱知(해석하면 뿔 관을 쓴 사람. 질지는 관직명)를 사신으로 보내어 왜와 통교. 사신이 5년을 머물다 돌아갔는데 왜왕이 많은 물건과 함께 붉은 비단 100필을 바침. 이 때 신라인이 길을 막고 이를 빼앗아 원한이 시작됨
93년 (숭신): 신라 왕자 天日槍이 왜에 귀화. 왜는 천일창이 가져 온 물건을 단마국에 보관하여 항상 신물로 삼음위의 기록은 꼬깔모를 쓴 박트리아세력과의 접촉을 간다라(사카)세력이 방해하면서 둘 간의 마찰이 생겼음을 나타냅니다.
123년 (지마): 신라, 왜국과 강화를 맺음 열도의 왜와 신라간 이 시기에 전투가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160년대?~175년: 왜에서 큰 난리가 일어나 편을 가르고 싸우니 임금이 여러해 동안 없었음 (수서)열도에 신라가 영토를 확장하면서 전쟁이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연오랑/세오녀나 진무천황의 시기를 볼 때 157년 신라 아달라왕때 이미 열도에 신라를 건국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의 신라의 수도가 열도가 아니였을까 하는생각도 해봅니다. 금성은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고 오직 오사카에만 존재합니다.
158년 (아달라): 죽령을 열고, 왜인이 예방하다.
죽령은 감숙의 韓原 지역 (晉과秦이 싸우던곳)으로 진한이 초기 태동했던 곳입니다. 열도에 신라가 영토를 가졌음을 선포하고 전쟁끝에 왜인도 이것을 인정하였던 게 아닐까 합니다. 竹의 옛 발음은 teuk 입니다. 덕/代/타르/투후 에서도 보이는 신라의 상징적인 지명입니다.
173년: 야마대국 여왕 히미코(왕위 175~248년)가 신라에 사신을 보냄마한이 한반도의 가야연맹과 합치면서 임라를 만들고 이들이 열도에 야마라는 이름으로 점령을 시작함을 의미합니다.
193년 (벌휴): 왜인이 크게 굶주려 먹을 것을 구하러 온 사람이 1천이 넘음굶주린 사람들이 대거 이동하는 관계라면 바다가 아니라 육지로 이어져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8년 (나해): 왜인이 경계를 범하자 이벌찬 이음을 보내 막음232년 (조분): 왜인이 갑자기 와서 금성을 포위. 왕이 몸소 나가 싸워 적이 흩어져 도망가니 날쌘 기병을 보내어 추격하게 해서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음.
233년 (조분): 왜병이 동쪽 변경을 노략질, 이찬 우로가 사도에서 싸워 화공으로 전부 침몰시킴249년 (첨해): 왜인이 우로를 살해287년 (유례): 왜인이 일례부를 습격하여 불을 놓고 1000명을 사로잡아감293년 (유례): 왜병이 사도성을 함락시킴. 일길찬 대곡에게 구원병을 주어 보냄294년 (유례): 왜병이 장봉성을 공격해 왔지만 이기지 못함倭인과 수전 외에도 육전을 전개함을 알 수 있습니다.신라의 조분왕시절, 마립간 세력이 신라로 진입합니다. 신라 내에 아마도 내분이 일어나고 열도 신라도 이들 마립간세력에게 영토를 일정부분 빼앗긴 듯합니다. 이것이 오사카지역을 신라가 점령하고 倭인이 백마의 맹세를 했다는 기록으로 나오며, 이시기에 천황이 신라에게 6국을 떼어줬다고 나옵니다. (292년 즈음의 일).
이 때의 천황은 사실상, 신라의 초기열도 세력을 이야기하며, 이들이 마립간세력에게 영토를 나눠줬음을 의미합니다. 열도의 백마고분에서는 실제로 유리잔과 같은 마립간의 유목민적 유물이 출토됩니다. 이후로 마립간(귀씨)이 지배하면서 열도에 貴國이 등장하게 됩니다.
295년 (유례): 왕이 “왜인이 자주 우리의 성읍을 침범하여 백성들이 편안하게 살 수가 없다. 나는 백제와 함께 도모해서 일시에 바다를 건너 그 나라에 들어가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물었으나 신하의 만류로 그만둠(“우리나라 사람은 물에서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멀리까지 가서 정벌한다면 뜻하지 않은 위험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300년 (유례): 왜국과 강화312년 (흘해): 왜국왕이 사신을 보내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을 청하여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냄.
해양세력 倭人은 지속적으로 신라를 괴롭혔으며, 이들의 본거지를 치기위해선 수전을 행해야함을 알수 있 습니다.
300년의 왜국과의 강화는 백마의 고분으로 열도신라국과 마립간의 강화를 의미하는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320년 (신공): 일본서기에 최초 신라 정벌 시점으로 기술되어 있음. 특히 신라왕 이름이 파사매금으로 되어 있으나 파사이사금은 80~112년 재위했으므로 시대가 맞지않음...야마도/임라가 열도 신라 (마립간)와 전쟁을 시작한 시기가 이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파사라는 표현은 파사 이사금을 뜻 한다기 보다는, 마립간의 외모가 혼혈에 가까우므로 파사 라는 표현을 쓴게 아닐까 합니다. (백마의 맹세에서도 말을 묻었다기 보다는 상징적으로 백마란 표현을 쓴듯 한데, 희다는 부분을 강조)
344년 (흘해): 왜국에서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했으나 거절345년 (흘해): 왜왕이 문서를 보내 국교를 끊음 346년 (흘해): 왜병이 금성을 포위 공격. 농성 후 식량 부족으로 돌아가는 왜병을 기병으로 추격364년 (나물): 왜병이 대거 쳐들어와 기습하여 패퇴시킴야마토/임라인들에 의해 열도신라가 정복되어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병과 보병전임을 볼때 역시 전쟁이 육지에서 수행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성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오사카지역으로 보입니다.
366년? (근초고왕, 신공): 일본서기는 가라연맹 탁순국(대구로 비정)에 나가 있는 왜인 斯摩宿禰를 통해 왜와 백제가 접촉을 시작했다고 기술
367년 (근초고왕, 신공): 일본서기는 백제가 최초로 일본에 사신을 보내 통교한 시점으로 기술 369년 (근초고왕, 신공): 근초고왕, 한반도 남부에서 대규모 군사작전. 왜병을 끌어들여 탁순국에 집결, 比自㶱•南加羅•㖨國•安羅•多羅•卓淳•加羅의 7국 평정, 군대를 서쪽으로 돌려 남만 忱彌多禮(전라도 지역)를 무찔러 경락(일본서기는 왜가 격파하여 백제에 하사한 것처럼 기술). 백제와 왜의 맹세. 왜병은 그 이듬해 귀국
372년 (근초고왕, 신공): 백제왕, 왜왕에게 칠지도와 칠자경 보냄. 일본서기에는 조공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정작 칠지도 판독 결과 “후왕(侯王)”에게 주기에 마땅하다라고 기재되어 있음(宜(復)供侯王). 단 해석 방식과 관련한 논란은 있음
382년 (신공): 왜, 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치게 했으나, 신라로부터 미인계를 당해서 오히려 가라를 쳤다 함. 그래서 다시 다른 장수를 보내 신라를 쳤다 함. 야마토/임라 세력이 백제의 왕위세력을 교체한 시기. 백제와 일본이 최초로 통교했다고 하는데, 그 전에 이미 마한-백제 전쟁을 치룬 사이이나 왜곡기록.
이 지역에서 임라의 세력이 커지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전라도 지역을 백제에게 하사한 것으로 서기에 기록되어있습니다. 칠지도는 이런 배경에서 마한계열 왕세자의 탄생을 알리면서 왜왕(임라가라왕)의 지시로 백제왕에게 하사된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391년 (광개토대왕): 왜인들이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깨뜨리고 신속했다고 기술. 백제는 근초고왕때 이미 친 임라세력이 되었고, 신묘년, 임라/마한인들이 한반도의 신라도 공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92년 (진사왕/아신왕, 응신): 백제 진사왕이 살해당하고 조카인 아신왕이 즉위 (삼국사기엔 살해 사실은 안나와 있음) 일본서기엔 진사왕이 왜에 무례하게 굴자 신하들이 죽여 사죄했다고 기술. 393년 (나물): 왜, 신라 금성을 5일 동안 포위. 왜가 물러날 때 추격하여 크게 깨뜨림(“왕이 용맹한 기병 2백 명을 먼저 보내 그 돌아가는 길을 막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獨山)까지 추격하여 합동으로 공격하니 그들을 크게 물리쳐서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고구려에 항복하고 나서 친고구려 성향을 보이려는 진사왕을 임라/마한인들이 제거하고 아신왕을 즉위시켰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때 진사왕 제거작전에 큰 역활을 하는 이들이 소아/소가씨 (蘇我)인데, 이들이 백제역사에 나타나서 백제계라 하지만, 사실 백제안에 세력을 잡던 임라인으로써, 사카/금가야 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나중에 일본의 아스카문화를 꽃피우는 소가씨입니다. 역시 오사카 지역의 금성신라와 왜의 전투의 기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96년 (광개토대왕, 아신왕): 고구려의 첫 군사 작전. 6월에 광개토대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백제 토벌. 백제 국경 남쪽에서 일발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등등 빼앗고, 한강을 건너 도성으로 진격. 아신왕은 항복하고 남녀 1천명,
세포 1천필을 바치고 충성 맹세 고구려의 백제/왜/임라의 토벌을 의미합니다.
397년 (아신왕): 백제, 태자 전지(일본서기는 “직지”)를 왜에 볼모로 보냄. 일본서기는 “백제기”를 인용하면서 왜가 백제가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항복 이후 친고구려 정책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정됨)는 이유로 枕彌多禮 및 峴南•支侵•谷那•東韓의 땅(전남북 지역)을 빼앗자 백제가 태자를 보냈다고 기술함.
이후 아신왕은 계속 고구려 공격 시도하나 성과 없었음. 고구려에 충성을 맹세했던 아신왕은 임라/마한의 견제로 (땅을 다시 빼앗음) 인질을 보내고 다시 친 임라세력으로 돌아서서 고구려를 공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99년 (광개토대왕, 아신왕): 9월, 백제가 고구려와의 맹세를 위반하고 왜와 화통. 신라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그 나라에 왜인이 가득하여 성을 모두 파괴하고 왕을 천민으로 삼았으니 고구려에 의탁한다고 함
400년 (광개토대왕) 보병 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 남거성~신라성까지 왜인이 가득. 왜적을 추격하여 아라가야의 종발성에 이르자 항복. 비로소 신라의 조공이 시작 광개토대왕의 5만의 기병/보병의 대대적인 임라/왜/백제 정벌을 이야기합니다.
402년 (실성): 신라, 태자 미사흔을 왜에 볼모로 보냄백제와 왜/ 임라가 다시 공격을 시도했음을 보여줍니다. 뒤이어 대방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404년 (광개토대왕): 왜, 백제군과 연합하여 대방 침략. 광개토대왕이 친히 토벌하여 크게 궤멸시킴. 다시 한 번 고구려에 의해 임라군이 궤멸되었음을 보여줍니다.
405년 (전지왕, 실성, 응신): 백제 아신왕 사후 첩례(삼국사기엔 전지의 막내동생으로 되어 있으나 숙부로 봄)가 쿠데타를 일으키자 태자 전지가 왜국에서 부고를 듣고 귀국을 요청, 왜왕이 100명의 군사로 호위. 첩례를 죽이고 왕위 탈환. 일본서기에는 397년 빼앗았다는 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고 기술. 왜, 신라 금성 포위 공격. 왜, 명활성(明活城)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감. 왕이 기병을 이끌고 독산(獨山)의 남쪽 길목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번 싸워 그들을 격파하여 3백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음. 백제 왕인 박사가 왜 태자의 스승이 됨
406, 407년 (실성): 왜인이 신라 변경을 침입408년 (실성): 신라, 대마도의 왜 군영을 선제공격하려다 그만 둠415년 (실성): 신라, 왜인과 풍도에서 싸워 이김백제가 진씨 황후계열의 백제계대신 마한/임라계를 직접 왕으로 보낸것이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아직 아스카 금성에서 신라계와 임라계가 전쟁을 벌이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421년: 왜왕 讚, 송에 조공해 安東將軍 칭호를 얻음 (진서) 倭人의 본거지인 오월지역 남조와 마한/임라의 교류를 보여줍니다.
438년: 왜왕 珍, 송에 자신을 ‘왜, 백제, 신라, 임나, 진한, 마한’ 등 여섯 나라의 통치자로 소개했지만 단순히 ‘왜국왕’ 만으로 봉해짐 (송서) 규슈지방에 있던 야마토/임라가 열도를 장악해가면서 육국왕을 요구하나 백제 신라가 아직 건재하므로 倭국왕으로만 봉해집니다.
440년 (눌지): 왜, 남쪽/동쪽 변경 침입444년 (눌지): 왜병이 금성을 10일 동안 포위하다 돌아감. 왕이 추격하려다 많은 병력을 잃고 적에게 둘러싸였다가 겨우 벗어남.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사신이 와서 극진히 접대했다고 기술금성은 아직 유지하고 있으나, 신라는 열도에서의 전쟁은 간신히 넘기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451년: 송, 왜왕 濟에게 원하는 대로의 6국 통치자로 봉하기 시작 (송서)열도의 신라가 야마토/임라에게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459년 (자비): 왜, 병선 100척으로 신라 동쪽 변경을 습격, 월성 포위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이 비 오는 것과 같았다). 이후 추격하여 반을 수장시킴월성은 한반도의 월성이 아닌가 합니다. 수전을 치룹니다.
461년 (개로왕, 웅략) 개로왕이 왜에 아우 곤지를 보냈으며, 곤지가 왜로 가는 도중 왜의 섬에서 무령왕을 낳았다고 기술
464년 (웅략): 신라가 당시 일본과 8년 동안 단교하고 고구려의 보호를 받던 중, 오해가 생겨 신라 안에 있던 고구려 사람을 몰살시켰는데 이 때문에 고구려가 신라에 쳐들어가자 임나가 신라를 구원했고, 고구려-신라 간의 원한이 이로부터 생겼다고 기술.
465년 (웅략): 일본서기에 신라를 친 내용이 나옴. 사마왕 무령은 열도 마한/임라에서 보내진 듯한데, 사마왕은 섬이란 뜻보다는 사마=魏 = 월지 등의 의미의 사마왕이 아닌가 합니다. 고구려와 신라간의 전쟁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장수왕의 남진정책도 한 몫 합니다. 임라/백제와 신라가 연합합니다.
462년 (자비): 왜인이 활개성을 습격해 깨뜨리고 1000명을 잡아감463년 (자비): 왜인이 삽량성(양산시)에 침입했으나 패퇴됨. 왜에 대비해 성 2개를 쌓음475년 (장수왕, 개로왕/문주왕): 고구려, 백제를 쳐서 위례성 함락, 개로왕 피살(일본서기에서 인용된 백제기에는 국왕,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죽었다고 기술), 신라에 원군 요청을 나가 있던 문주왕이 고마나리(웅진)에서 백제를 다시 세움(일본서기에는 일왕이 임나령이었던 고마나리를 떼어서 재건국을 하게 해 주었다고 기술)
476년 (자비): 왜인이 동쪽 변경에 침입하여 장군 덕지가 물리침477년 (자비): 왜인이 침입했다가 돌아감장수왕의 남진으로 백제/마한/임라와 신라가 연합하며, 대항합니다.
478년: 왜왕 武,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마한’ 여섯 나라의 都督이자 ‘왜왕’으로 봉해짐 (송서)열도의 신라가 마침내 마한/임라로 복속되었음을 의미합니다.
512년 (무령왕, 계체): 백제가 왜병을 끌어들여 임나 4현(上哆唎•下多唎•娑陀•牟婁)을 점령 513년 (계체): 무령왕, 왜에 중국계 귀화인으로 추정되는 오경박사 段楊爾를 파견하여 유교 전수, 이를 대가로 대가라로부터 기문의 땅(남원•임실 등 섬진강변)을 빼앗기 위한 원병 요청
514년 (계체): 대가라가 병영을 쌓아 왜에 대비. 신라를 잔인하게 노략질했다고 기술.515년 (계체): 왜국의 物部連라는 귀족이 500명을 이끌고 대사(하동 일대)에 원병왔다가 대가라 군대에 옷까지 벌거벗겨져 내동댕이쳐지는 완패를 당하고 백제로 도망감. (일본서기에는 “伴跛人이 한을 품고 독을 머금었으며 강성함을 믿고 사납기 이를 데 없음” 운운하며 변명) 이후 대체로 510년대 말까지 백제가 자력으로 섬진강 영역을 빼앗은 듯함. 무령왕의 백제와 임라, 야마토는 서로 문화적인 자극을 하던 관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에 내부적 변화가 있었으며, 前秦세력의 법흥왕이 신라로 들어오면서, 신라는 국력을 일신하고, 상대적 우위를 갖기 시작합니다.
516년 (계체): 고구려의 사신이 일본에 감. 백제가 오경박사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 522년: (법흥왕, 대가라 異腦王왕) 왜와의 단절과 백제의 공격으로 위기에 몰린 대가라는 신라왕실에 청혼해 진골귀족의 딸을 왕비로 얻음
527년 (계체): 왜장 近江毛野臣이 군사 6만을 이끌고 아라가라의 신라에 멸망당한 남가라, 㖨己呑 탈환 작전을 지원하고자 하였으나 신라의 사주를 받은 이와이(磐井)의 반란으로 지체
529년 (법흥왕, 계체): 백제가 대가라의 다사진(多沙津)을 빼앗음. 近江毛野臣이 아라가라에 사신으로 가서 남가라, 㖨己呑 탈환 작전 협의. 신라 귀족의 딸이 대가라 왕비가 됐을 때 100여 명의 신라 관료•궁녀들이 새로 채택한 당식 관복을 입고 가라의 여러 소국에 파견됨으로써 신흥 율령 국가로서 위세를 과시했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阿利斯等이라는 칭호의 탁순국 군주가 신라 관인을 본국으로 강제 송환시키자, 신라는 이를 핑계로 결혼 동맹을 파기하고 탁기탄 등 탁순의 북쪽 국경에 있는 여러 고을들을 공략. 가라는 왜에 구원 요청. 임라/백제/가라 간의 내부갈등이 생기며, 신라가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병합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임라에서는 임라인들을 구조하기 위한 노력을 펼치나 여의치 않습니다. 백제는 이시기가 성왕의 시기로 국명이 남부여로 바뀌며, 임라/마한 세력과는 동일하지 않은 부여계임을 보여줍니다.
532년 (법흥왕, 계체): 법흥왕 금관국(가락국) 정벌, 금관군 설치.
일본서기에는 530년으로 되어 있는데, 신라 이사부 3000명 군사를 이끌고 가락국 침공. 탁순국 아라사등인 己能末多는 近江毛野臣에게 구원을 요청, 신라와 왜국이 多多羅(다대포)에서 대치하나 왜군은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약탈만 일삼은 후 패퇴. 백제, 신라 연합군은 한 달을 포위하다가 久禮牟羅城을 쌓고 돌아가는 길에 騰利枳牟羅•布那牟羅•牟雌枳牟羅•阿夫羅•久知波多枳의 다섯 성을 쳐부수었음. 결국 近江毛野臣은 왜국에 소환 당했으나 대마도에서 병에 걸려 죽음.
37년: 신라의 아라가라 침략 개시. 왜가 구원병을 보냄540년 (흠명): 왜, 신라 정벌 모의하나 뾰족한 수가 없었음540~550년: 아라가라(안라국, 임나 (현 함안)), 왜국 호족(吉備臣 등)을 영입해 외교전. 일본서기는 이를 임나일본부 설치로 왜곡
541년 (흠명): 백제가 신라에 붙으려는 아라가라를 힐난함.541~545년 (흠명): 백제-가라-왜의 신라의 아라가라 침략에 대한 대책 십수차례 모여 논의. 547년 (흠명): 백제의 왜에 대한 구원병 지원 요청548년 (흠명): 아라가라, 고려에 몰래 사신을 보냈다가 백제에 들켰으며 이를 왜에 알림551년 (성왕, 흠명): 백제 성왕, 신라와 아라가야 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서 한성을 회복, 평양을 토벌 (그러나 곧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김)
552년 (성왕, 흠명): 신라가 다시 고려에 붙음, 성왕이 왜에 불경을 전함신라의 공세를 보여줍니다. 이시기의 倭는 아스카 (금가야)세력입니다. 이시기에 열도에서는 중앙아시아풍 (사카) 불교문화 (간다라풍) 이 꽃핍니다. 신라에 병합된 금가야세력과 열도의 금가야세력 간의 조정력 때문인지 신라와 倭사이의 전쟁이 잠잠해집니다.이 시기에 한반도 남부에서 보여주는 전방후원분은 532년 금가야 (소가씨)세력이 열도의 정권을 잡으면서 월지세력이 한반도로 밀려났음을 보여줍니다.
562년 (진흥왕): 신라 이사부, 가라 침공. 가라 10국 완전 멸망. 백제, 왜병을 끌어들여 신라 공격(대패), 고려 공격(성공)571년 (흠명): 흠명이 죽으며 유언으로 신라를 치고 임나를 되살릴 것을 남김572년 (민달): 고려가 왜에 사신 보냄. 보낸 표문을 사흘 동안 아무도 제대로 못 읽다가 겨우 王辰爾가 혼자 읽어내어 격찬을 받음대가야와 금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어 한반도의 임라는 사라진 상태입니다. 수서 열전 중 왜국전 (대략 6세기말~7세기초 기준): 신라와 백제는 공히 왜를 대국으로 여겼고 진귀한 물건이 많이 나 이를 우러러 보았다. 늘 사신이 오갔다. 이때의 倭는 임라/마한을 의미합니다.
600년 (추고): 난데없이 신라와 임나 간의 전쟁 기술. 왜, 지원병 파견하였으나 실패601년 (추고): 왜 백제, 고려에 임나 방어 지원 요청 602, 603년 (추고): 왜, 신라를 수차례 공격하나 실패610년 (추고): 고려승 담징과 법정이 왜로 감623년 (추고): 신라, 임나를 공격하여 다시 복속630년 (사명): “삼한관”(삼한 사신 접대소) 수리640년 (사명): 사명이 백제궁으로 궁을 옮겨 그곳에서 이듬해 죽음642년: 연개소문, 정권을 잡음646년 (효덕): 임나가 완전히 사라짐647년 (효덕): 김춘추가 왜로 와서 인질로 잡았다고 기술되어 있음 (인질은 구라고 당에 가기 전에 먼저 와서 외교활동을 벌인 듯)
649년 (효덕): 신라가 김다수를 인질로 보냈다고 기술 660년 (의자왕): 복신이 부흥운동을 일으켜 왜에 군사 지원 및 의자왕 아들 부여풍의 귀환을 요구. 왜는 이를 받아들여 3년 동안 백강전투를 준비
661년 (부여풍, 제명/천지): 탐라가 처음으로 왜에 왕자를 보내 통교했다 함. 왜가 661~662년 당, 신라 연합군에 맞서 고려에 군을 보낸 것처럼 기술하고 있으나 믿기 어려움. 부여풍 5천명 친위대를 이끌고 백제로 귀환.
663년 (부여풍, 문무왕): 백강전투(왜의 구원선 1000척이 당군 170척의 화공에 말려 그 중 400척 침몰하고 패퇴), 부여풍 고려로 도주. 백제 왕족, 귀족들 대거 왜로 이주이당시 열도 정권을 계속 임라/야마토로 불렸음을 의미합니다.
668년: 고려 멸망670년: 왜, 국호를 일본으로 바꾸고 신라에 알림(백제와의 단절 선언) 덴무는 삼한을 통일한 후 열도에 신라계 천황이 득세했음을 보여줍니다. 특히 신라의 문무왕과 열도의 몬무천황이 동일인이 아닌가 추측해보기도 합니다. 신라계 천황에 의해 (사카계, 태양족) 日本 이라는 이름이 지어지고 백제계와 단절을 표합니다.
720년 (천무): 일본서기 완성백제 멸망후 부여계의 열도 득세로 일본서기는 다시 부여계입장에서의 완성됩니다.
36. 옛 발음에서 유추해보는 우리의 역사
동아시아의 문명의 시원으로부터 四國시대와 日本건국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풀어감에 있어서 보셨다시피 본 글에서는 한자의 옛 발음을 중요한 해결사로써 이용해왔습니다. 소리글자가 아니라 뜻글자가 중원에서 널리 쓰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많은 부족들 간에 서로 소리언어로는 소통할 수 없으니 뜻을 의미하는 글자로 서로 대화를 하는 것이 훨씬 편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개념에 대한 뜻글자들 ( 日, 月, 火, 土 등등)이 생겨나고 나서는 그 뜻글자들을 응용하여, 각 부족마다 존재했을 다른 세세한 명칭이나 단어들의 발음을 음차하기 시작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중원에는 물론 뜻이 우선되어 생겨난 글자도 존재하지만, 발음을 본뜬 후에 적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글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본글에서 대표적으로 지적했던 예를 들자면
a. 오르= 魏 =月(枝) =阿(낙랑인) =馬(韓) =말(갈) =任(羅) =勿(吉) =알(지)=위上 =훼鷄 =麻立(干) =위(구르) =오烏 = 유劉
b. 이진伊金 = 慕秦 = 愛新 = 女眞,
c. 大丘 = 塞 = 朔 = 昔(탈해) = 肅 = 사카 = (오)사카 = Dacca (인도)
d. 오르도스 = 알타이 = 언덕 = 신독 = 천독 = 연독 = 龍城 = 융적 = 흉노
e. 夏 = 韓 = 가라 =가야 = (토)가라 = 훈(족)
f. 魏 = 貴(霜) = 爲 = 규 = 아르 = 알 = 李,
g. 代 = 덕 = 닭鷄 = 다르 =타이 = 辰 = (肅)愼 = 蜀 = 單(干) = 丹 = 檀(군) = 鮮 = 돌(궐) = 大(氏) = (구)다라 = (간)다라?
h. 丘 = 箕 = 鬼 = 貴 = 龜 = 크(다) = 高(句麗) = 까烏 = 駕 (朱夢)
i. 倭 = 魏 =淮 = (大)和
j. 朴 = 박(트리아) = 弁(韓) = 벵골 = 페(르시아) = (大)阪 = Tapan(인도) = 百(濟) = 邊(氏)
k. 新羅 = seres = 斯羅 = 수로 = 시림
l. 그리스 = 가림(다) = 鷄林 등등 다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은 발음비교를 하였고 여기서 역사의 비밀을 풀어나가는 열쇠를 찾았습니다.
뜻글자 일때의 발음이 한글자당 복수발음인 경우도 많다보니 한글자로 나타내던 복수발음의 글자를 여러 자로 나누어 표기하는 경우도 등장합니다.
또한 비슷한 발음을 가진 다른 글자 표기하기도 하면서 개념과 글자간에 큰 혼란을 겪습니다.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같은 개념을 칭하던 음차형단어들을 후세에 들어 뜻글자로 풀이하려다보니, 완전히 서로 다른 개념으로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듯합니다. 즉, 뜻글자이던 한문을 음성글자로도 혼용해서 사용되면서 나타나는 혼란이라고 해석합니다. 마치 신라의 이두식 시스템을 공식적으로 정하지 못하면서도 혼용한 셈입니다.(한글자를 여러글자로 표현하는 예를들자면...
夏 = gara = 韓 = 加羅, 馬 = mra = 任羅 ) 혹은 ( 같은 개념을 다른글자로 표현....魏金 = 伊金 = 慕秦 = 愛新 = Altyn?)
"진시황은 몽골어를 하는 여진인이다"라는 책을 썼던 중국학자 주학연씨도 중국의 근간을 이루던 夏殷周 가 회홀족, 퉁구스계 등 인종자체가 틀린 것 아니 였나라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물론 기록과 유물을 근거로 설명합니다.)
이것이 중원에서 뜻글자 한문이 통용될수밖에 없는 이유가 아니였을까 합니다. 주학연씨는 單干의 발음을 여러 사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daghu, dau, dagar 로 발음해야 옳다고 주장했고, 제가 제시했던, 單干 = 탱그리 = daghu = 단군 모두 같은 개념을 뜻한다는 주장과 일치하고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주학연씨는 본 블러그에서 주장했던 오르도스의 아사달 (오르 + 도스 + 사카) 족으로부터 분할되는 당시 흉노, 중원인들을 서로 다른 종족이 아니라 같은 종족이였으며 그들의 당시 구분은 문명과 문화의 차이이지, 유전자의 차이가 아니 였다는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주장을 합니다. (漢족과 융족은 동일민족) 하지만, 당시 이들의 공통적인 언어 풍습 유전자가 알타이 + 사카 + 夏 족임을 생각할때, 시노-티벳계열의 언어를 쓰며 유전적 균일성을 가지지 못하는 漢人 (종족이라 칭하기 힘듭니다)에 비해서 한국인이 적통을 가진 후손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조선朝鮮 이라는 단어도 옛 발음을 보면 drwa - shar 혹은 drwa - shan 등으로 발음 될 수 있겠는데, 이것은 이 지역에서 훗날에도 계속 일어나는 Tar-tar 족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반적인 역사상식으로 고조선이 원래 존재했고 그곳에 기자나 위만이 들어와 조선왕을 자처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본 글에서는 조선이란 국명은 기자가 들어오면서 생긴 것으로 해석합니다. 周나라가 생기면서 商의 후손들에게 영지를 나눠주는데, 상황의 형제였던 기자를 조선에 봉하고 상의 왕자를 宋에 봉한다 합니다. 역시 송은 商의 후손국답게 국명의 발음도 비슷하며 도읍지가 商丘 입니다. 공자의 이름도 丘였고 상의 후손이라 칭했으며, 丘는 상의 후손이란 말을 남긴 것처럼, 丘에 관련된 종족과 나라들은 상나라의 후손임에는 틀립없는 것 같습니다.즉, 원래 있던 국명에 왕을 봉하는 것이 아니라 왕이 봉하여지면서 국명이 생겨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이란 국명도 아사달의 지역에 새로 조선이란 국명을 정하면서 생겨난 국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다면 송나라도 상의 발음과 비슷한 국명으로 지었으며, 商丘라는 정체성을 확실히 하는 도읍지를 정하는데, 조선은 商나라와 어떤 점을 공유하고 있을까요.
조선이 세워진 곳을 하북/유주/요령 지역으로 본 글에선 산정하고 있기때문에 이들지역에 단/덕/대 계열이 존재하고 있음을 고려해본다면, 조선의 鮮을 다르/단으로 발음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사카 +예맥을 辰 으로 보고있기에 이들을 "다르"로 발음하며 이지역에 존재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봅니다. 鮮 의 글자조합도 북방 사카족의 羊과 해양 예맥족의 漁를 상징적으로 조합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朝는 무엇일까요, 사카/夏 계열의 日과 오르/月氏의 月이 합해져있습니다. 夏와 사카의 조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기자세력 자제가 사카세력이기에, 朝라는 단어자체가 사카에 가까운 정체성을 나타내지않을 까 생각합니다. 만약 朝가 사카세력에 가까운 정체성이라면 이들을 나타내는 ㅋ/ㄱ 등의 발음이 나와야하지 않을까라는 추측을 해봅니다.
예를 들어 韓/magyar의 헝가리의 경우를 보면, Gyurgyi, Gyurka,Gyurki 등의 유명한 가문성씨가 나오는데, 쥬르지, 쥬르카, 쥬르키 등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을 보면, J 가 아니고 G를 쓰고 있는데, G를 사용한다는것은 이들이 혹은 "ㅈ"발음 말고 "ㄱ"의 발음으로도 불리는 가능성이 있었던 게 아닐까란 상상을 해봅니다.즉, 朝를 아르족이나 다르족 발음으로는 Jou, 혹은 drwa 로 발음하기도 했지만, 사카족의 발음으로는 gyo 혹은 gyu 라는 발음도 가능했지 않을까란 생각을 해봅니다. 크다라는 개념을 "ㄷ" 발음으로 발음하던 다르족과 "ㅋ"로 발음하던 사카족의 차이가 있었지 않을까란 추측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朝鮮의 발음은 "규선" 혹은 "규던" 으로 발음된 게 아닐까 합니다. 이 발음을 나중에 인도 북부의 월지5국을 통합했던 귀상貴霜씨를 떠올리게 하며, 朝鮮의 옛 땅에서 발원했다고 본인들의 기록을 남긴 요나라의 명칭인, ki-tan 을 떠올리게 합니다.1920년대 독일의 언어학자 Eakardt 는 인도-유럽어와 알타이어와의 친연성에 관해 연구하던 학자입니다. 이 학자는 한국어를 연구하여, 한국어가 언어적으로 교착어가 아니라 인도-유럽어 계통의 굴절어라는 점을 주목했습니다.
한국어 동사에서 어간은 본질적으로 접미 된 어미를 통해 활용된다는 것을 그 증거로 삼았으며 당시 비교언어학을 하던 유럽의 많은 학자들에게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언어학자인Kopplemann은 1928년에 인도-유럽어와 우랄-알타이어와의 친연관계를 설정하는 연결고리고 바로 한국어”라를 지목하면서 Eakardt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역시 언어학자인 Arntz도 1939년 “한 언어의 모습이 완전히 변하는 데는 2000년이면 충분하다”라고 주장하며 “원래 한국어가 인도-유럽어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비교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한국어가 아시아 몽골로이드가 주로 사용한 언어인 알타이어에로만 볼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현대에도 적용되는 말로써 한국어와 일본어를 알타이어와 매우 비슷하지만, 완전히 같지 않은 고립어로 구분하려는 주장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즉, 몽골, 퉁구스, 투르크가 속한 알타이어에는 주격이 없지만 한국어에는 주격(-이,-가)이 있으며 더구나 한국어의 인칭대명사는 알타이어의 인칭대명사와 전혀 연결 고리가 없다는 점을 예로 듭니다.
한국어의 형용사는 첨가어로 쓰일 때와 서술어로 쓰일 때 형태가 다른데 이것은 인도-유럽어와 같고 알타이어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어로는 ‘날이 좋다’와 ‘좋은 날’이 되지만, 퉁구스어족에 속하는 만주족 언어로는 같은 말이 ‘sain inenggi’, ‘inenggi sain’가 되어 형용사의 형태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게르만어를 비롯한 인도-유럽어족의 언어는 모두 ‘주어+술어+목적어’의 어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어는 ‘주어+목적어+술어’ 어순을 가진 언어인데 어떻게 인도-유럽어에 속할 수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만, 서기 400년대에 만들어진 룬문자 비문을 보면 당시 게르만어는 주어+목적어+술어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인도-유럽어 특히 고대 게르만어의 어순도 원래는 주어+목적어+술어였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순은 한국어가 인도-유럽어 임을 증명하는데 어떠한 장애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비교언어학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로 생각하는 기초수사에서도 이러한 친연성의 강한 증거가 발견됩니다. 비록 15세기 이전 한국어 1차 자료가 부족해, 개별 단어의 비교는 쉽지 않지만 굳이 고대 문헌을 들출 필요 없이 현대 한국어 수사조차도 인도-유럽어적인 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을 흥미롭게 지적합니다. 이를테면 현대 한국어 하나(애)/둘(두)/셋(세)은 그리스어 에나/디오/트리아와의 대응관계도 고려해볼만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상 인도-유럽어와 한국어의 비교언어 부분은 네이버 지식 in 의 boolingoo 님의 글을 편집하였습니다.)이렇듯, 한국어가 인도-유럽어와 비슷한 부분이 존재하고 수메르어와의 친연성도 거론되며, 일반 알타이어와 완전히 매칭이 되지않는 부분은 바로 한반도가 북방 사카족( 빗살무늬토기)과 수메르/킴메르(거석문화)와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중요한 한민족의 구성원으로써 夏/韓/弁韓의 존재가 있고 또 민족형성기에 인도 북부에서 인도-유럽인종과의 긴밀한 접촉이 그 원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옛 발음의 비교에 의해 우리의 정체성을 밝히는 사례 중엔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를 밝히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타클라마칸과 삼한의 설명 중에 잠시 나옵니다만, 천산지역의 누란과 동북아지역의 누란의 비교이지요.타클라마칸, 천산지역의 누란은 영어권에서는 Loulan이라 발음하며 3세기 까지 천산근처에 존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漢과 흉노의 접전 지역이기도 했지만, 2세기 들어서 인도북부에서 사산조페르시아에 밀려올라온 貴霜/쿠샨족의 지배를 받은 정황이 역력합니다. (쿠샨의 카로슈티 글자를 사용하는등) 그런데 이곳의 江域이 바뀌고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이곳에서의 누란은 사라지게 됩니다. 하지만 4세기 들어서 갑자기 동북아에 다시 누란이 등장합니다. Rouran 이라 발음되는, 우리가 흔히 유연(柔然,연연 ) 으로 알고 있는 종족입니다. 또한 이들 유연의 첫 번째 왕(가한)의 이름이 丘豆伐 (402년)으로써 구/귀씨에 가까운 발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연은 그 지역 선비족에 복속해있다가 4-5세기에 발흥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아마도 천산에서 4세기 즈음에 이동해와 선비족 지역에서 청착해 살았던 게 아닌가 합니다. 또한 본 글에서 辰韓으로 지칭하고 있는 돌궐이 유연에 복속해있다가 6세기경 발흥하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같은 정황은 월지/쿠샨족이 천산에서 초원실크로드를 따라 동북아에 삼한을 세운다는 이동경로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 지역에서 돌궐이 발흥했다는 점도 삼한과의 친밀성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제 글과 일면 통하는 자료를 인터넷에 올려주신 사례가 있어서 그에 관한 언급도 해볼까 합니다.新羅人들이 스스로 신라를 지칭할때 사용하던 여러 가지 명칭과 발음에 관한 내용입니다만, 냉수리신라비나 봉평 신라비를 보면 신라인들이 직접 기록한 新羅六部에 대한 명칭의 일부가 기록되어 있는데, 냉수리비에는 喙, 沙喙, 本彼, 斯彼가 기록되어 있고, 봉평비에는 喙部, 沙喙部, 部, 本波部가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13c의 기록인 삼국사기에는 유리이사금 9년 조에 梁部, 沙梁部, 漸梁部[一云牟梁], 本彼部, 漢祇部, 習比部로 기록되어 있으나 신라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부명으로 기록한 것들은 喙, 沙喙, 岑喙, 本彼, 斯彼이라는 설명입니다. 여기서 의문을 갖는 부분은 바로 喙 자인데 이것은 부리 "훼"자로 "훼"의 발음을 가자고 있는데 탁啄 자로도 읽는다는 부분입니다.喙에 대한 기록은 계림유사에서 찾아진다고 하는데...
(계림유사의 사본은 현존하 것이 약 20개 정도로 알려져 있답니다)그 곳에 “雞曰/口+遂-辶/音達” 또는 “雞曰啄/口+豕/音達” “雞曰喙音達”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계鷄 의 발음이 달達, 혹은 탁啄, 이라고 발음된다는 발음상의 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여휘方輿彙 가 엮은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변예전(邊裔典) 제25권 조선부(朝鮮部) 휘고(彙考) 13 (청 옹정(擁正) 3년(1725) 판본을 중화민국 23년(1934)에 다시 영인한 것) 雞曰□의 기록에서 사본마다 □부분의 글자 형태가 조금씩 다른 이유는 “啄査字典無此字乃朝鮮土語”라 한 것처럼 중국인들이 인지하지 못하는 □부분의 글자의 고려인의 소리 값에 그 원인이 있어 보인다 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계, 닭, 달, 탁, 훼 등에는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발음과 개념상의 공통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본 글에서 제시했던 한민족의 구성과 형성과정을 살펴보면 그 연관성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즉, 魏나라/月枝/알지에서 비롯된 貴霜족의 후예인 貴씨세력이 마립간(워러간), 이들 월지의 조상의 지역을 代족(옛 발음 teuk)에서 찾고 있으며, 감숙에 남은 貴씨족들은 위가라(위구르)로 남아있다는 논리를 제시한 본 블러그 내용과 잘 맞아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즉, 신라인들은 위/훼 라고 불리울 수 있으며 계/귀 라고 불리 울 수도 있으며 닭/달/탁/덕 으로 불리 울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신라의 慕秦세력과 동일하다고 본 北魏의 경우, 이들이 페르시아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신라와 특별한 접촉을 지속적으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사실은 이들이 페르시아의 영향을 그냥 받은 것이 아니라 페르시아지역 천축세력과 뿌리가 같으며 이곳에서 이동한 세력이 다시 북위로 합쳐졌음을 의미합니다.
이들 페르시아세력과 월지와의 관계에 대해서 북략이나 신당서에서도 波斯국은 월지의 후손이라고 기록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신라도 북위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북위를 세운 세력이 감숙에서 발흥하고 선비족이 된 탁발씨였고 북위의 원래 국명이 代國이였음을 감안한다면 신라와 이들의 친 연성을 생각해볼 때 훼/위/탁/덕/달/닭/계/귀 의 발음은 모두 연관성이 깊음을 알 수 있습니다.삼국유사 歸竺諸師에서 이런 기록이 나온다 합니다.天竺人呼海東云矩矩吒䃜說羅. 矩矩吒言雞也. 䃜說羅言貴也.(天竺人은 海東을 "矩矩吒/䃜說羅"라 부르는데, 이 구구탁이란 닭[계]를 말함이요, 䃜說羅는 귀貴를 말한다.)이 글귀에서 천축인들이 신라인들을 두 가지로 부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구구탁矩矩吒 이요, 하나는 䃜說羅 입니다.
구구탁의 바로 계鷄라고 표현하고 있으며, 예설라가 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두 세력이 신라를 형성하고 있다는 글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신라는 국명의 변화를 여러 번 겪습니다. 이것은 지배층에 따라 조금씩 바뀐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본 글에서는 박트리아의 간다라 영토로 들어간 시절을 박혁거세 시절로 봅니다. 이때의 사카나 秦인의 국명은 seres/사로/사라 였습니다. 석탈해(사카족)에 의해 이곳이 점령되면서 계림 (간다라,혹은 그리스)로 명칭을 바꿉니다. 이때 함께 들어간 월지세력을 알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바로 알지세력은 貴霜족으로써 마립간(워러간)을 세우고 열도에 貴國을 세운 세력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탁" 이 계림을 세운 세력으로 간다라를 점령한 세력이며 이들이 다르/辰세력과 통하는 세력이 아닐까 합니다. 이곳에 함께 들어간 월지세력이 후에 한반도에서 관구검과 함께 들어온 천축/월지세력과 함께 마립간을 세웁니다.
그들의 국명이 新羅가 됩니다. (지증 마립간시절) 이들은 貴씨족으로써 예설라가 貴라고 설명하는 것이 논리에 맞습니다. 즉, 위의 천축인들이 해동국은 탁(계림/사카)이라 하기도하고 설라(신라/월지/귀씨)라고도 부른다는 말이 되는 것으로 추측합니다.(coo2.net에는 초립동이 님이 올려주셨고 원글은 livemiri님의 글을 토대로 설명하였습니다.)
37. 중앙아시아에 남은 월지/천축의 흔적들..
아사달족 (월지, 사카, 알타이, 숙신 )등의 종족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한민족의 역사에대하여 훑어보았습니다. 동북아에서 발원하여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거쳐 다시 요령, 만주, 한반도로 들어온 길고 장대한 역사였습니다. 이들이 동북아로 다시 돌아간 세력이 있는 반면에 西進을 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는 역사를 만든 아사달(월지/천축) 족도 있었습니다. 돌궐(진한)의 터키역사는 잘 알려져 있고, 훈족의 역사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본 글에서는 훈족(한족)의 경우 편두에서 그 비밀을 풀어 보려했으며 이들이 바로 쿠샨과 범월지, 오손세력을 묶어 다시 韓 (조선준왕)의 이름으로 유럽을 공격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중 마한/말갈족은 헝가리의 민족인 magyar 족으로 남게 됨을 알 수 있습니다. 훈족의 말 뒤에 얹고 다니는 동복(청동솥)과 편두의 모습이 바로 신라/진한의 모습과 닯아 있기에 독일, 미국 등의 훈족 다큐멘터리에서 훈족의 선조로 신라를 꼽고 있는데, 이들이 바로 조선의 편두의 전통이 이들 훈족(韓족)에 까지 이르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진한도 역시 조선유민과 사카족에 의해 이어진 편두전통이 남아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훈족의 아틸라 대왕의 이름도 역시 신라의 아달라 왕과도 닮아있음을 볼때 강한 연관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또한 박트리아가 태동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 원정이 있고 나서 동서양 문명이 인도 북서부, 카스피해 남부지역의 박트리아에서 융화됨을 알수있습니다. 간다라는 바로 이들의 동쪽에 맞닿아있습니다. 이곳에 1-2세기 경 쿠샨왕자로 알려진 유명한 두상조각이 발견되었는데, 바로 꼬깔모자를 쓴 쿠샨왕자입니다. 이 모습에서 우리의 변한, 월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중앙아시아, 감숙, 천산, 타림분지에 남아있던 소월지와 2-3세기에 페르시아/굽타에게 밀려올라간 쿠샨족은 7세기까지 그곳에 존재하다가, 결국 당나라에게 점령당했음을 알 수 있는데, 바로 이시기에 형성된 중앙아시아 문명중 하나가 사-마르칸트의 아프라시압입니다.(현재 우즈베키스탄 지역). 이들이 바로 밀려난 월지-쿠샨인들이 서진하여 이곳에 정착했던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프라시압이 벽화는 당나라에 의해 서역이 정복당하는 7세기 시절에 그려진 것으로 밝혀졌는데, 바로 이 지역에 거주하던 월지/쿠샨족들이 사마르칸트지역으로 진출한 게 아닌가 합니다. 타클라마칸이란 이름 자체도 "버려진 마칸" 이란 뜻으로 마한과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하며, "사-마르칸트" 도 마치 새-마한과 같은 뉘앙스의 이름을 가지고 있어서 흥미롭습니다.더군다나 이들의 벽화에는 귀족이나 지배층들이 돌궐인, 혹은 중국인처럼 보이는 이들의 모습이 많이 발견되어 아프랍시아의 지배층에 대한 정체성에 대해 아직도 확실히 파악하고 있지 못한 실정입니다. 물론 당시 서돌궐의 진출이 있기도 하지만 이시기 이곳에 월지/천축, 사카, 韓 인들도 존재했음을 이해한다면 그들의 지배층 구성에 대한 의문도 풀어지지 않을까 합니다.이곳 아프라시압 벽화에 조우관을 쓴 고구려인이 보이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것을 당나라를 압박하기 위한 고구려의 사신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로마 문화왕국 신라"의 저자 요시미즈 츠네요씨 같은 경우는 신라인으로 상정하고 있습니다. 이 벽화를 7세기로 산정하는 이유로써 벽화내용 중에 사신이 사마르칸트의 바르후만 왕을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이 바르흐만 왕은 중국 사서에 불호만拂呼慢 이라 언급되는 인물로 658년 당 고종에 의해 강거도독부의 도독으로 임명된다.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7세기 후반들어 나당연합에 힘들어하던 고구려가 당나라와 사이가 나쁘지 않은 사마르칸트의 왕에게 사신을 보낸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또 6세기에서 8세기사이에 당나라 서쪽과 맞닿은 세력은 서돌궐이기에 이들을 뛰어넘고 사마르칸트까지 군사동맹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한 설명이 아닌가 합니다.
반면에 돌궐계나 월지쿠샨계에 신라는 혈연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직접적인 관련이 있기에 사신을 파견할 수 있는 연관성이 더 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들의 벽화를 보면, 좀 더 페르시아, 박트리아 느낌이 나는 세력 (쿠샨계통)과 돌궐(진한)의 느낌이 나는 두 계통이 크게 세력을 양분하는 듯한 그림들이 남아있습니다. 이곳 벽화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모습으로는 마치 고구려 벽화에 사냥하는 모습과 유사한 모습을 묘사한 벽화가 남아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쿠샨인 혹은 돌궐인이며 이들과 오르도스/하남/감숙에서 시작된 월지/사카인들이라는 관계성을 모르기에 혹시 아프라시압의 지배층이 중국인들일수도 있다는 심증만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 돌궐인이라해도 서양에선 중국인이라 통칭하기 쉽지않을까 합니다.
38. 오르도스,섬서,하남과 한반도 지명비교
이제까지의 글에서 우리민족의 시작은 오르도스, 황하강이 휘어지는 섬서, 산서, 하남 지방을 비롯하여 산동, 요령, 만주, 한반도 지역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지역에서 발원한 부족들이 기원후 무렵 한반도와 만주/요령에 모이면서 이들의 원래 지역 명칭을 많이 가지고 온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유럽인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그들이 살던 유럽의 지역명을 미국에 그대로 적용시킨 경우와 같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경우 각 주마다, 비슷한 곳에서 온 이민자들에 의해 같은 명칭을 가진 동네나 거리가 존재하기까지 합니다.위의 섬서, 산서, 하남, 오르도스 지방에는 韓의 도읍이요, 馬韓의 도읍이요, 낙랑과 연관이 깊은 곳으로 알려진 평양이 위치합니다. 평양 밑으로 양양, 양양 밑으로 강릉이 존재합니다. 전한 초기에 이미, 이 지역을 하남, 하동, 남양주 등으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평양 우측으로는 상주라는 곳도 존재하고 좌쪽으로는 진주와 경주도 존재합니다. (경+상 도)바로 서울 한강 근교의 하남, 양주, 남양주, 위로 평양 우로 강릉 양양 등 너무 익숙한 이름들입니다. 또 이 부근이 바로 마한의 하남 위례성등이 위치하던 곳입니다.
낙양은 이미 낙랑편에서 소개해드렸듯, 朔方 (사카)과 낙랑과 漢 이 최초로 일어난 곳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즉, 낙양을 漢이 발생한 漢陽으로 부르며 漢江을 낙랑인을 가리키는 阿水 (아리수/오르수) 라고 불렀던 게 아닐까합니다. 한반도에 중원의 지명과 동일한 지명이 많이 보이고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중화사상과 연결시켜 해석합니다. 하지만, 삶의 터전인 땅의 명칭을 정하는 데는 중화사상과는 다른 이야기라고 봅니다. 나의 정체성을 정할 때에는 막연한 동경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들의 이름과도 같은 정체성을 나타내는 작업일거라 봅니다.
즉, 자신들 혹은 선조들이 살던 지명이 아니라면 다시 사용하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바로 하남, 섬서, 산서, 오르도스 지방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살던 바로 그곳입니다.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그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주요이유는 우리민족의 주된 발원지가 바로 오르도스/섬서/하남 에서 요령/만주가 바로 아사달과 조선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오르도스에 흩어져있는 알타이/사카계열의 청동기유물이 아사달의 유물입니다. 그 지역으로부터, 기자조선, 위만조선, 삼한, 낙랑이 나왔고, 만주 한반도의 숙신 (예맥+사카)세력과 합쳐지며 韓민족의 형성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선입견 없이 받아드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39. 끝마치며..
길고 긴 역사의 여정만큼이나, 제 글이 길어졌음에 저도 놀랐습니다. 저를 비롯해 많은 한국인들이 느끼고 있는 역사의 단편과 단편의 흐릿한 연관성을 좀 더 명확히 이어보려는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글입니다만, 부족한 지식탓에 많은 부분이 억지스럽기도 하고 부정확하기도하며, 이해하기 힘든 횡설수설스런 글이 되기도 했었습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제시하고 싶은 길은 우리의 역사는 한반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가능성에대한 시각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느끼신다면, 믿고 방향을 정하고, 연구하고 호응하며, 또 그것이 논리적이라면 받아드릴 수 있는 우리의 자세를 간절히 원해봅니다. 학계가 바라보는 역사는 물론이요, 학계가 바라보지 못하는 비밀을 밝혀내보고자 열정으로 뭉친 여러 아마추어 역사학자님들까지도, 우리가 자꾸 우리역사를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몇 가지 선입견이 있습니다.한 가지로는 바로 고조선의 영역입니다.
제 글에서 제시한 바로는 朝鮮이란 국명은 기자조선 때부터 생겨난 국명으로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중국인에 의해 생겨난 국가란 뜻이 아니고 바로 이들 중원의 국가가 바로 우리의 직계조상이며, 漢족은 오히려 유전적으로나 언어풍습적으로 더 멀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던 檀軍의 고조선은 바로 오르도스지방에서 비롯된 오르도스형/알타이/스키타이형 문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융적이 되고 흉노가 되는데 바로 단간/단구르/單干이란 이름을 옛부터 써오는 부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단군의 고조선은 바로 오르도스/언덕/알타이의 아사달민족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바로 이들의 문명을 숙신과 합해지는 商에서 이어받았고 또 기자조선을 통해 내려옵니다. 조선의 모습을 간직했다는 낙랑의 유물을 보면 바로 오르도스 유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 숙신과 아사달부족들이 산동/요령/한반도에서 지속적인 민족형성 과정을 가져왔고, 특히 낙랑의 영역이 조선의 영역이며, 한사군의 영역이 바로 조선의 영역이므로 이들의 위치, 즉 하북, 요령의 위치가 바로 조선의 위치라할 수 있겠습니다. 한반도의 숙신은 후에 한사군/낙랑인들이 밀려들어오고 秦과 夏/晉, 또 조선인들로 이루어진 삼한이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명실상부한 韓민족을 형성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우리의 조상들은 유라시아에 실로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살아왔습니다.
중원에서 태동하여 문명의 시작을 열며 중원의 거대한 나라들의 지배층으로 역사를 개척했습니다. 한반도는 바로 숙신/스키타이의 발원지가 되며 夏/殷/周 에서 조선과 삼한은 굵직한 중원의 나라를 세워가며 대륙을 지배합니다. 어느 순간 피지배층의 인구가 많아지고 소수의 지배층이 그들에게 흡수 되버리는 현상이 일어나지만, 唐나라 까지도 형제국으로써 그 정체성이 있지않았나 합니다. 우리의 직접적인 선조들은 秦으로 대륙을 제패하며, 월지로 중앙아시아를 제패합니다. 또 인도를 제패하고, 훈족으로 유럽을 제패합니다. 만주/한반도의 사국과 열도세력 또한 막강한 세력을 자랑했으며 돌궐족으로 중앙아시아를 제패하고 유럽에 후손을 남깁니다. 그 후로도 몽골의 황금 겨레족은 세계를 제패하며, 만주족으로 아시아대륙을 다시 정복합니다. 일본은 한국인에게 숙적으로 남아 있긴 합니다만, 그들 또한 현대에 들어와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오랬 동안 자리매김해왔습니다. 한국은 현재도 세계의 강국으로 발돋음 했지만, 앞으로 더욱 웅비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이들 모두가 한국인이라 할 수 없지만, 한국인이 이들의 후손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정통성으로 보아서 한국만한 역사적 혈연적 정통성을 가진 나라가 현재 존재하고 있지 않는 듯합니다. 물론 일본을 비롯해 역사적 갈등이 없어지기 힘든 나라도 존재합니다만, 역시 범 아사달 민족군으로 봐서는 앞으로 형제국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이끌고 만들어나가야 할 우리의 목표도 있겠습니다. 이들에게서 비롯된 형제국들은 한국인의 후손이란 시각보다는 같은 조상과 역사를 공유한 이들이란 시각으로 서로 공감대와 유대감을 가질 수 있길 기대합니다.그러므로써 우리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더 발전시켜서 우리의 조상들이 해냈던 역사적 역활을 앞으로도 계속 해낼 수 있는 한국인이 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민족형성에 관한 역사여정은 여기서 정리하려합니다.그동안 긴 글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글을 쓰면서 많은 참조가 되었던 솔본님, 정형진님, 율곤선생님의 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