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인간 모차르트
모차르트(W.A.Mozart, 1756-1791)는 서양음악사에 등장하는 무수한 천재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천재, 즉 신동(神童)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그를 따라다니는 믿기 힘든 일화들도 많다. 한 예로 바로크시대의 작곡가 알레그리가 쓴 ‘미제레레’라는 작품은 악보가 교회 밖으로 유출되는 것은 물론, 가수가 그 선율을 교회 밖에서 정확하게 부르는 것조차 금지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 모차르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던 중 우연히 이 교회에 들러 ‘미제레레’를 단 두 번 듣고 9성부나 되는 악보를 정확하게 암기하여 완성시켰다고 전해진다. 사실이지 이러한 청음력과 암기력은 보통사람으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대단한 능력이다. 모차르트는 본의 아니게 그의 천재성으로 인해 합법적인 악보도둑이 된 것이다.
역사상 당대의 모든 음악장르에 한결같이 최고의 작품을 남긴 작곡가를 찾는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J.S.바하와 J.브람스는 오페라를 한 작품도 남기지 않았고, L.v.베토벤은 오직 한 개의 시원찮은 오페라를 남겼을 뿐이다. 반면 G.베르디와 R.바그너, G.풋치니는 평생을 극음악에만 몰두하느라 기악 작품에 손댈 틈도 없었다. 최고의 기악작품들을 남긴 작곡가가 또한 최고의 오페라 작품들을 남긴다는 것은 거의 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역사상 오직 한 사람, W.A.모차르트만이 이 일을 할 수가 있었다. 모차르트는 4살 때 작곡을 시작했으며, 8살 때는 교향곡을, 12살 때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연주가로서의 모차르트 역시 신동의 명성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6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연주여행을 하며 그의 이름을 전 유럽에 알렸다. 7살인 1763년 7월 하이델베르크 하일리거 가이스트 교회에서 놀라운 솜씨로 오르간을 연주하여 그것을 기념하는 기념패가 붙여졌으나 아쉽게도 지금까지 남아 있지는 않다. 1789년 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합창 지휘자는 모차르트의 즉흥 연주를 듣자 그의 스승이자 선임자였던 요한 세바스찬 바하가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머리 속에서 작곡을 끝내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대개의 작곡가들은 피아노 앞에 앉아 오랜 시간 고민하며 선율을 만들어내고, 또 악보에 옮겨 적는 과정에서도 여러 번 수정을 하게 마련이다. 글쓰는 사람이 원고지에 글을 적으며 여러 차례 지우고 다시 쓰거나 아예 한 장을 구겨 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대개의 원본 악보들은 그리 깨끗하지 않다. 고친 자국 하나 없는 깨끗한 악보는 당연히 사본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모차르트의 원본 악보들은 마치 사본처럼 깨끗하다. 이러한 점은 영화 아마데우스에도 잘 묘사되어 있지만, 모차르트는 마치 컴퓨터 모니터 상에서 작업을 마친 후 프린터로 깨끗하게 인쇄해 내듯 악보를 적어 냈다. 역사상의 어느 작곡가도 해낼 수 없었던 초인적 기억력과 끊임없이 샘솟는 듯한 영감이 한데 어울려 있었던 작곡가, 그가 바로 모차르트였다.
2. 역사의 라이벌,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전기 작가들은 대개 다소간 인물을 과대포장 하게 마련이다. 이러한 현상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해져서 수백 년이 지난 다음에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허위인지 알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당시 빈 궁정악장이라는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모차르트보다 6살 위였던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역사의 라이벌로 등장했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살리에리 역시 대단한 작곡가였다. 그는 1750년 8월 18일 이태리의 베니스 근처에 있는 레냐고에서 태어났다. 운이 따랐던지 1766년 16세의 살리에리는 당시 비인 궁정악장이었던 레오폴트 가스만을 만나 그를 따라 비인으로 가게 된다. 살리에리는 가스만이 죽자 그의 후임으로 불과 24세의 나이에 궁정작곡가가 되어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그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 중에는 베토벤과 슈베르트, 그리고 리스트와 같은 거장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모차르트와 같은 천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 천재와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서 살아야 했던 점은 행운일까, 불행일까. 어느 쪽이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의 찬란한 빛에 가렸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록 후세사람들이 근거도 없이 모차르트 독살자라는 악역(?)을 배정해 준 덕분에 이름이 더 알려지게 된 것도 사실이다.
지난 ’86년 개봉되었던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를 상기해 보자. 아카데미상 8개 부문을 휩쓴 명화 중의 명화이며, 배우 머레이 에이브러햄이 살리에리 역을 맡아 남우주연상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아마데우스>는 역사적 사실을 상당부분 왜곡한 영화였지만 흥행에는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이 되고 있는 비인에서는 개봉 이후 80주 이상 연속 상연되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이 영화 중에서 나오는, 모차르트가 죽던 해 레퀴엠 작곡을 부탁한 가면 속의 인물이 누구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설들이 있다. 모차르트가 분명 신원불명의 사람으로부터 레퀴엠 작곡을 부탁 받았고, 건강 악화로 약속한 기간 내에 완성하지 못해 제자인 쥐스마이어를 비롯한 다른 음악가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분명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이 음모가 명백히 당시 비인 궁정악장을 지내고 있던 살리에리에 의해 꾸며진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적어도 이 대목은 근거 없는 속설로 이미 밝혀졌다.
모차르트보다 더 오래도록 화려한 인생을 누렸던 살리에리 역시 말년에는 정신병원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모차르트의 독살자라는 오해를 받으며,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평범한 사람들을 대변하면서.
3. 레퀴엠(진혼곡)을 부탁한 가면 속의 인물은 누구?
앞서 언급했듯이 아마데우스라는 영화 속에서는 모차르트의 라이벌 살리에리의 짓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영화는 피터 쉐퍼(P.Shaeffer)의 원작을 영화화한 것인데, 영화란 어디까지나 흥행을 위해 극적 효과를 고려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레퀴엠>의 탄생 과정에 대해서는 사실 살리에리와 관련시키는 추측보다도 더 설득력 있는 견해가 있다.
비인에 살고 있던 바르젝 백작은 돈이 많은 음악광이었는데, 그는 종종 하인에게 심부름을 시켜 유명한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위촉하고, 그것을 다시 자기가 직접 사보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인쇄하여 연주하도록 했다. 1791년 2월 그의 부인이 죽자 백작은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전부터 존경하고 있었으며, 마침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모차르트에게 레퀴엠 작곡을 의뢰하기로 작정하고, 하인인 라이트괴프를 모차르트에게 보냈다. 고액의 작곡료를 지불했고 그 유일한 조건은 위촉자를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전말은 이 심부름을 했던 하인 라이트괴프가 20년 후 죽기 전에 이 사실을 털어놓음으로써 밝혀졌다.
모차르트가 죽은 후 하인은 모차르트 미망인을 찾아가 완성된 <레퀴엠>을 약속대로 받아갔다. 백작은 전과 마찬가지로 이 악보를 새로 사보하여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연주시키려 했다. 그러나 모차르트 미망인 콘스탄체는 남편과 백작 사이에 있었던 약속을 공공연히 파기하고 원 작곡자의 이름으로 <레퀴엠>을 공연할 것을 요구했다. 백작은 미망인을 상대로 재판까지 벌였으나 이 사건은 아무런 심리도 없이 기각되고 말았고 백작은 화가 났지만 결국 이 사건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경위야 어쨌건 백작은 이 위대한 걸작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한 계기를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4. 모차르트의 시신은 어디에...
데카르트의 말대로 결국 역사는 죽은 자 위에서 놀아나는 속임수인가. 음악의 위대한 천재들 가운데 아마도 모차르트에 관해서만큼 죽음에 관련된 글들이 많이 쏟아져 나온 경우도 없을 것이다. 세상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죽음을 소재로 많은 추측들을 만들어냈다. 오페라 <요술피리>에서 <프리메이슨>이라는 비밀결사조직의 이념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그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 뇌수술 봉합이 잘못되어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설, 단순한 요독증(尿毒症) 때문이었다는 설, 관절염 염증성 열병에 의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설, 그리고 앞서 말한 라이벌 살리에리의 음모설에 이르기까지 온갖 추측이 나돌고 있지만, 그가 죽은 지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사인은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근에도 지난 1991년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프랑소와 푸시 교수는 모차르트의 사망 원인을 머리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의 결과라는 설을 발표했다. 그는 모차르트의 것으로 여겨지는 두개골을 조사한 결과 왼쪽 관자놀이의 골절이 낙상으로 인한 것이며, 이 골절이 만성 출혈을 유발해서 두통과 허약, 실신을 가져왔고, 끝내는 혼수 상태에서 죽음까지 몰고 갔다는 것이다. 모차르트가 죽기 1년 전인 1790년 봄에 극심한 두통을 앓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끝 대목을 다시 상기해 보자. 이 영화의 장면 장면들은 역사적 사실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들 중의 몇몇은 거의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다. 바로 모차르트의 시체 처리와 관련된 부분이 그러하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선율이 고조되고, 간단한 장례 절차를 마친 후 운구 마차가 모차르트의 시체를 싣고 흩뿌리는 빗속을 달린다. 관도 없이 자루에 넣어진 그의 시체는 허름한 공동묘지에 다른 시체들과 뒤섞여 버려진다. 이 영화가 묘사하는 것처럼 모차르트의 유골은 실제로 위치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허름한 공동 묘지에 방치되었고, 지금도 빈 중앙묘지에 있는 그의 무덤은 빈 채로 있다. 모차르트의 전기 작가들은 그의 이러한 비참한 죽음에 대해, 위대한 천재를 쓰레기처럼 버린 당시의 비인 사람들에 대해, 그리고 남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에 대해 한결같이 비난의 목소리를 높여 왔다.
행려병자나 거지가 아닌 이상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반드시 관에 누워 묻히는 오늘날 관행으로 본다면 모차르트의 매장은 확실히 충격적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당시의 비인 사정을 살펴보면 그의 이러한 죽음이 특별히 이상할 것도, 비참할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당시 공동묘지에서는 보통 한 무덤에 넷 내지 여섯 구의 시체를 같이 묻었으며, 대개는 아무런 표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묘비 같은 것을 세우려고 한다면, 무덤 위가 아니라 묘지 벽을 따라 허용된 공간에만 가능했다. 또한 기껏해야 8년이 지나면 무덤은 다른 시체를 위해 다시 사용되는 것이 관례였다. 이것은 당시 오스트리아에서 시행하고 있던 ‘매장법령’에 따른 것일 뿐이다.
영화 아마데우스에도 등장하는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1784년 8월 23일 새로운 ‘매장법령’을 공포한다. 이 법령의 목적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장례 절차를 간소화하여 재정적 부담을 덜어주자는 데 있었다. 주된 내용을 보면, 첫째, 교회에서 간단한 장례 의식을 마친 후 시신은 의식 없이 사제에 의해 매장을위한 한적한 묘지로 이송된다. 둘째, 모든 시신은 발가벗긴 채 아마포 포대에 넣어 꿰맨 후 관에 넣어져 묘지로 운반된다. 묘지에 도착한 모든 사체는 관에서 들어내어 무덤에 넣고 생석회를 뿌린 후 곧장 흙으로 덮는다. 만약 한 번에 여러 구의 시체가 도착할 때는 이들 모두를 같은 무덤 속에 넣는다. 누구든 사자를 위한 고유의 관을 사용할 수 있지만 시체는 절대로 관 속에 든 채 매장될 수 없으며 모든 관은 다른 매장을 위해 재사용되어야 한다. 끝으로 묘비나 기념물은 공단을 절약하기 위해 반드시 묘지 안이 아니라 벽을 따라 세워야 한다. 그러나 이 법령은 귀족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귀족이 아니었으니 당연히 이 법령이 따라야 했던 것이다.
5. 모차르트 최후의 오페라, 최초의 위대한 독일어 오페라 마술피리
모차르트는 12세 때 최초의 징슈필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를 쓴 후 평생동안 모두 16편의 완성된 오페라와 여러 편의 미완성된 오페라들을 남겼다. 최초의 오페라를 작곡한 것이 1768년, 마지막 오페라를 완성한 것이 1791년이니 오페라에 대한 모차르트의 흥미는 35년이란 짧은 생애동안 변함없이 지속했음을 알 수 있다. 620편이 넘는 그의 작품들 가운데 대종을 이루는 것은 역시 절대음악이며, 양적인 면에서 본다면 오페라 작품들은 큰 비율을 차지하지 못한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기악작품을 단 한 곡도 남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가 쓴 다섯 편의 오페라만으로도 모차르트는 음악의 역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겼다 할 수 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목록에는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거의 모든 오페라 유형들이 포함되어 있다. 오페라 세리아로는 미트리다테, 이도메네오, 티토 황제의 자비, 오페라 부파로는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 드라마 지오코소는 돈 지오반니, 그리고 징슈필은 극장 지배인,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마술피리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도 모차르트의 천재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곳은 오페라 부파와 징슈필 등 자연스런 코믹 오페라 쪽이었다. 당시에는 오페라 세리아가 소멸해 가는 상황에 있었고, 더구나 모차르트와 같은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유자에게는 이 낡은 형식이 어울리지 않았다. 이도메네오는 뮌헨 시 당국의 의뢰에 의해 쓰게 된 것이고, 티토 황제의 자비는 심혈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초연 당시에는 실패를 면치 못했다. 천재도 죽어 가는 형식을 소생시키지는 못했다.
모차르트(W.A.Mozart 1756-1791) 최후의 징슈필 마술피리는 1791년 9월 30일 초연 되었다. 빈의 교외에 있는 <Theater im Freihaus auf der Wieden>에서 작곡가 자신의 지휘로 초연된 이 작품은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이 오페라의 대본을 썼던 쉬카네더(J.E.Schkaneder 1751-1812)는 1780년 잘츠부르크에서 모차르트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데, 한 마디로 만능예술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음악 인생을 시작한 그는 1773년 극단원이 되고, 다음에는 가수와 무대감독, 시인으로서 활동했고, 작곡에 안무까지 했다. 그는 특히 세익스피어의 작품에 능했으며, 사실 햄릿 역은 그의 가장 유명한 배역이었다. 이 작품의 흥행주로서, 대본 작가로서, 그리고 파파게노 역을 맡았던 바리톤 가수로서의 쉬카네더와 계몽시대가 낳은 천재 모차르트가 만나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마술피리는 한 사람에게는 부와 명성을, 다른 한 사람에게는 죽음과 영광을 남기고 지금도 그 자신의 생애를 살고 있다.
마술피리에는 놀랄 정도로 다양한 음악 양식들이 집합되어 있다. 단순하고 민요같은 유절 노래에서부터 엄청난 장식을 가진 눈부신 콜로라투라 아리아까지 공존하고, 앙상블, 합창, 행진곡에 프로테스탄트의 코랄까지 포함되어 있다. 이는 대본이 제공하는 등장 인물들의 다양한 성격과 다양한 장면 변화에 부응하는 음악적 측면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음악적 요소들이 하나로 녹아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동질성은 기본이 되고 있는 극적 아이디어에서 기인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음악 요소 그 자체에 기인하고 있는 바도 크다. 밤의 여왕이 부르는 아리아 두 곡은 이태리 오페라 세리아 양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만일 마술피리에서 이 두 아리아가 없다면 음악은 이태리보다 독일 쪽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모차르트는 대본이 가지고 있는 세세한 묘사적, 회화적 부분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고 감각적 호소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표현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모차르트는 또한 이 작품을 통해 징슈필이 지금까지 회피해 왔던 레치타티보 문제를 해결했다. 즉, 독일어로 된 대화를 위한 적절한 음악적 낭송법을 찾아낸 것이다. 첫 피날레에서 타미노와 제사장 사이의 긴 장면을 잘 들어보면 - 때로는 낭송적이고 때로는 아리오소적 프레이즈를 가지고 있는 - 선율선이 언어의 액센트와 리듬에 얼마나 적합하게 만들어졌는지, 또 대화하는 두 사람의 대조적 심정을 얼마나 극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는지 느낄 수 있다. 단 한 음표도 필요 없이 낭비하지 않으며, 의미 없는 형식은 하나도 없다. 모든 프레이즈들은 대화의 극적 구조 속에서 나름대로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거기에 화성 진행이 또한 중요한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레치타티보는 바하 시대 이래로 독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모차르트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18세기 후반에도 이태리어를 제외한 언어로 된 오페라를 찾아보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각각의 언어에 적합한 레치타티보를 개발하는 것은 평범한 작곡가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특별한 일이었다. 독일어 대본으로 오페라를 만든다는 생각은 그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 점은 영화 아마데우스에도 잘 묘사되어 있다.) 독일어로 된 음악극들이 예전에도 있었지만 독일어에 적합한 오페라가 탄생하는 데는 한 사람의 천재가 필요했다. 프랑스어 오페라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J.B.륄리가 필요했고, 독일어 오페라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모차르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음악과 언어 양쪽에 대한 완벽한 이해가 없이는 이러한 작업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는 독일어를 대본으로 사용하는 최초의 위대한 음악극이라는 점에 대해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미 후궁으로부터의 유괴에서 예견된 일이었지만, 모차르트로 인해 독일어도 소위 ‘노래 불려질 수 있는 언어’로 새롭게 태어나게 된 것이다. 베토벤의 피델리오와 베버의 마탄의 사수는 모차르트의 알을 깨는 고통이 없이는 필 수 없었던 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베토벤과 베버의 다리를 거친 후 F.슈베르트에 이르러 독일어는 마침내 ‘예술’ 경지에 이른다. 가장 노래부르기 힘든 언어, 어쩌면 노래하기가 불가능한 언어로 여겨졌던 독일어가 성악의 중요한 한 부분 - 어쩌면 1/2이라고 할 수도 있는 - 을 차지하게 되기까지는 이들 몇몇 천재들의 노력, 특히 모차르트의 힘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마술피리는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성악의 판도를 바꾸어놓는 계기가 된 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피가로의 결혼과 돈 지오반니에 이어 코지 판 투테를 통해 이태리 오페라 부파의 최고 경지를 체험하고, 생애의 끝에서 마침내 ‘최초의 위대한 독일 오페라’ 마술피리를 통해 오페라 극작술의 극점에 이르게 된다.
6. 귀족과 시민 사이에서 방황한 천재(시대적 배경)
모차르트가 활동하던 18세기 후반은 시민 계급이 급속하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17세기 후반부터 성장하기 시작한 시민계급, 즉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르조아 계급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이들은 사회의 실질적인 주도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세습적으로 권력을 유지해 오던 귀족들에 대한 이들의 불만은 날로 커지게 되었고, 마침내 18세기말 피비린내 나는 혁명을 일으키고야 말았다.
모차르트는 이러한 과도기적 사회의 희생양이었다. 그가 작곡한 많은 작품들은 아직도 권력의 끄트머리를 쥐고 있던 귀족들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고향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의 하인 신분으로 직장을 얻게 되지만 주인과의 불화로 1781년부터 비인으로 이주하여 활동하게 된다. 모차르트는 장미빛 희망을 안고 자유인으로서 비인 생활을 시작하지만 생각만큼 생활이 순탄하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귀족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음악가들은 그들의 보호 아래에 있어야만 평탄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모차르트보다 24년 먼저 태어난 J.하이든은 60세 이후 자유인으로서의 생활을 누렸고 거의 평생을 하인 신분으로 지냈다. 하이든보다 24년 늦게 태어났지만 18년이나 먼저 세상을 하직한 모차르트는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고 시대를 너무 앞서 갔던 것이다. 대혁명 이후인 베토벤 시대에나 가능했던 자유로운 프리랜서의 생활을 앞서 누리려 했던 모차르트는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모차르트가 남긴 많은 오페라들은 궁정 오페라 극장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급변하는 사회 상황 속에서 그는 귀족들의 입맛도 무시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떠오르는 시민들의 취향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술피리가 초연된 1791년은 대혁명이 일어난 지 2년 후의 일이다. 교양 수준이 귀족들에 비해 형편없는 보통 시민들이 즐길 수 있는 오페라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대본이 자국어로 만들어져야 했고, 음악이 자연스러워야 했다. 타고난 흥행 감각을 가진 쉬카네더가 만든 대본은 - 물론 모차르트도 관여했지만 - 바로 이 점에서 시민 오페라의 요건을 충족시켜 주었다. 무시무시한 뱀과 마술피리, 이국적 느낌의 승려들, 새 깃털 옷을 입은 사람이 등장하는 동화 같은 이야기는 소박한 시민들의 오락거리가 되기에 충분했고, 거기에 붙여진 모차르트의 천변만화하는 음악은 재미와 예술성을 한 자리에서 느낄 수 있는 야누스적 황홀경을 제공해 주었다.
마술피리는 모차르트 생전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작품이었다. 대중적 인기뿐만 아니라 당대의 주요한 리뷰들도 한결같이 이 작품의 예술성을 찬탄했다. 모차르트가 그 영광을 다 누리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 애석할 뿐이다.(모차르트는 초연을 지휘한 지 두 달만에 타계했다.) 기록에 의하면 마술피리가 공연되는 첫 2주 동안 관객들은 7시에 시작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 5시부터 극장 앞에서 기다렸으며, 표를 사지 못해 되돌아가는 사람도 수백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쉬카네더가 프라이하우스 테아터를 관리하던 10년 동안 마술피리는 이 극장에서 총 223회의 공연을 기록했다. 한 해 평균 20회 이상이 공연된 셈이다. 빈의 공연 통계에 의하면 1879년 이전의 90년 동안 코지 판 투테는 75회, 피가로의 결혼은 331회, 돈 지오반니는 호프테아터에서 476회, 교외극장에서 180회의 공연을 기록한데 비해 마술피리는 호프테아터에서 354회 교외극장에서 376회를 기록했다. 유럽의 다른 도시에도 급속하게 전파되어 1800년 무렵에는 독일의 거의 65개 지방에서 공연을 볼 수 있었고, 1801년에는 모스크바, 1811년에는 런던, 1816년에는 밀라노, 그리고 1833년에는 마침내 뉴욕에서도 선보이게 된다.
당시의 관객들은 이 오페라를 단순히 진기하고 즐거운 ‘여흥물’로 즐겼으며, 표면적인 가벼움 속에 내포된 심오한 내용과 음악적 진가에 대해서 진정으로 이해하고 있는 관객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프라이하우스 테아터를 비롯한 빈 교외극장의 관객은 모차르트 이전의 오페라들이 공연된 호프테아터의 관객과는 현저히 다른 취향을 갖고 있었다. 귀족 후원자들이 주된 관객이었던 호프테아터의 경우와는 달리 프리아하우스 테아터의 관객들은 대부분 부르조아 계급들로서 무대 장치에 현혹되고 볼거리를 즐기는 정도의 취향을 갖고 있었다. 마술피리 공연이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7. 모차르트의 역사적 의미
18세기와 19세기 음악은 모차르트 안에서 만나고 있다. 그는 자신이 물려받은 전통과 형식, 음악 언어를 새로운 개념으로 탈바꿈시켰다. 어떠한 작곡가도 인간의 사랑을 이처럼 다양한 측면에서 그리고 그토록 깊은 심리적 통찰로써 노래부르지는 못했다. 모차르트에게 있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그 사랑의 주체는 구체적 인간이지 추상적 감정이 아니었다. 바로 이 점이 중요하다. 객관적․보편적인 정서의 표현으로부터 구체적․주관적 인간 감정의 표현으로의 변화는 카스트라토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사실, 다시 말해 비인격적인 악기가 자연스런 인성으로 대체되었다는 것으로 대변되고 있다. 모차르트와 다른 18세기 초기의 다른 작곡가들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가 남다른 신동이었다는 사실보다도, 그의 관심이 예전과 같은 ‘전형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으로 옮아갔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에서 모차르트는 19세기 낭만주의자들과 닮고 있다. 마술피리에서와 같이 성적 사랑이 신비한 이상에 종속되고 또 개인이 한 인간일 뿐만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 될 때 이는 이미 바그너의 음악극에 대한 전조가 되고 있다.
8. 모차르트 연보
1756년 :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탄생. 음악가인 레오폴트 모차르트와 안나 마 리아 부부의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남.
1761년 : 최초의 작품 「미뉴에트(KV.1) 작곡.
1762년 : 5년 손위의 누나 난넬과 뮌헨, 빈 연주 여행.
1763년 : 뮌헨, 아우크스부르크, 하이델베르크, 마인츠,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이 곳에서 열 네 살이던 괴테가 모차르트의 연주를 들음), 쾰른, 브뤼셀, 파 리 등에 연주 여행.
1765년 : 최초의 교향곡 3곡 작곡.
1766년 : 암스테르담, 리용, 취리히, 뮌헨 등 유럽 여러 도시를 순회 연주.
1767년 : 오페라 「가짜 아가씨」 작곡.(프란츠 1세의 위촉)
1768년 : 최초의 징슈필 「바스티앙과 바스티엔」 작곡.
1770년 : 이탈리아 연주 여행 중 교황 클레멘스 14세로부터 황금박차 훈장 받음. 삼마르티니, 마르티니, 파이지엘로 등 이탈리아 작곡가들 만남. 오페라 세리아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 작곡.
1772년 : 잘츠부르크 대주교 궁정악장으로 임명됨.
1773년 : 최초의 피아노협주곡 작곡. 디베르티멘토, 세레나데 등 작곡.
1777년 : 잘츠부르크 궁정악장 사임. 어머니와 함께 독일의 여러 도시 여행. 알로 이지아 베버와 사랑에 빠지며, 후에 아내가 된 알로이지아의 동생 콘스 탄체와 처음 만남.
1779년 : 잘츠부르크 궁정악장 직을 다시 맡고 궁정 오르가니스트도 겸함.
1781년 : 오페라 세리아 「이도메네오」 완성. 추기경과 사이가 벌어져 빈으로 이 주. 무치오 클레멘티와 페아노 경연.
1782년 : 징슈핑 「후궁으로부터의 유괴」 작곡. 콘스탄체 베버와 결혼(8월4일)
1783년 : 「린츠」 교향곡 작곡. 아들 라이문트 레오폴트 탄생과 죽음.
1784년 : 아들 칼 토마스 탄생.
1785년 :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 빈으로 옴.
1786년 : 오페라 부파 「피가로의 결혼」 작곡. 「프라하」교향곡 작곡. 아들 요한 레 오폴트 탄생과 죽음.
1787년 : 실내악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 무직」 작곡. 아버지의 죽음(5월28일). 궁정 작곡가로 임며됨. 딸 테레지아 탄생. 오페라 「돈 지오반니」 작곡.
1788년 : 딸 테레지아 사망. 마지막 세 교향곡 작곡.(최후의 교향곡 「주피터」)
1789년 : 오페라 부파 「코지 판 투테」(여자는 다 그래) 작곡. 클라리넷 5중주 작 곡. 딸 안나의 탄생과 사망.
1791년 : 아들 요한 볼프강 크사버 탄생. 징슈필 「마술피리」, 「클라리넷 협주곡」, 「레퀴엠」(미완성) 작곡. 12월 5일 빈에서 사망.
9. 모차르트에 관한 증언들
R. 바그너
모차르트는 .... 위대한 독일 오페라를.... 최초로 작곡하였다. 그것은 바로 「마술피리」이다. 독일은 이 작품의 출현을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니 않다. 「마술피리」 이전까지의 독일 오페라는 없는 것이나 진배없다. 독일 오페라는 이 작품과 함께 태어난다.
G.롯시니
예로부터 독일인은 화성에 위대함을 보였고, 반면에 우리 이탈리아인은 선율에서 위대함을 보여왔다. 그러나 모차르트가 출현한 이후 우리 남방인들의 고유 영역은 타격을 받게 되었다. 모차르트가 두 나라 영역 모두에 걸쳐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 칸타빌레와 독일의 깊은 정서를 마치 마법과도 같이 결합하고 있다.
버나드 쇼
나는 모차르트를 올바로 판단할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그의 작품을 기억하는 것뿐이다. 그 앞에서 다른 작곡가는 센티멘탈하고 히스테리컬한 사이비처럼 보일 뿐이다.
F.부조니
모차르트는 지금까지 음악가 가운데 가장 완벽한 재능을 가진 인물로 생각된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은 그를 최고의 인물로 위치시키기에 충분하다. 결코 흐려지는 법이 없는 그의 아름다움은 자극적이다. 형식감은 거의 초인적인 것이다.
F.모틀
모차르트는 지금까지의 어떤 이보다도 대담한 개혁가이다. 아울러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음악가였다. 그는 음악 예술에 완전히 새롭고 전례 없던 것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그는 오케스트라의 악기 하나하나가 말을 하는 법을 가르쳐주었고 그들에게 혼을 불어 넣었다. 한마디로 음악은 어떤 의미에서 모차르트를 통해 비로소 발견된 것이다.
R.슈트라우스
바흐에 이어 출현한 모차르트의 기적은 인간 목소리의 기적을 완성시켰으며, 그 선율을 절대적으로 이상화시켰다.... 모차르트의 선율은 온갖 세속적인 형태로부터 벗어나 있으며, 그 자체로 플라톤적 에로스와 같이 천상과 현세, 죽음과 영원 사이를 떠다니고 있다.
E.볼프-페라리
모차르트의 음악은 가장 어려운 장의 하나이다. 그것은 완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배우면서 거기에 다가가는 것뿐이다. 그의 음악을 배우는 데는 끝이 없다. 음악은 음윽 통해 나타나지만 그 자체가 음악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음악은 절대적으로 순수할 때 불멸의 울림이 된다.
첫댓글 듣기 쉽다고 연주하기도 쉬울 거라는 오해를 깨부수는 작곡가? 밤을 새워 '마술피리' 연주실황을 보면서 소름이 끼쳐 잠을 못잔 날 있었지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모짜르트의 악보를 보며 " 음표 하나라도 빠지면 전체가 무너질 만큼 완벽하다." 며 절망하던 살리에리, 그런 살리에리가 작곡한 곡을 악보도 안보고 연주에 변주까지 하며 낄낄대던 모짜르트의 웃음소리... '아마데우스'를 보며 살리에리에 공감되어 울었던 분 많았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