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편 강도의 회개와 구원
누가복음 23:39~43
우리가 알다시피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셨을 때에 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좌우편에 세워진 두 개의 십자가 위에도 두 명의 행악자들이 매달렸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유명한 죄수인 바라바와 함께 민란을 일으키기도 하며 살인과 강도를 저지른 흉악범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두 명 사이 중간에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것은 이사야 53장 12절 말씀에, 그가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는 예언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 좌우편 십자가에 매달린 두 명의 강도는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그 십자가 위에서 함께 예수님을 비난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누가복음 본문 말씀에서는 한 편 강도가 놀라운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었고 예수님께로부터 구원의 은총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시간 동안 뜻밖에 일어난 크나큰 구원 사건으로서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모든 세월을 관통하면서 낙심한 영혼들을 돌이키며 살리는 영혼의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 곁에 있던 이 회개한 강도 안에서 역사했던 하나님의 은혜의 위대한 손길을 살펴보고, 그 동일한 은혜의 손길이 우리 안에 힘있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먼저, 회개한 이 강도의 말에 담긴 신앙과 은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회개한 강도가 입을 열게 된 것은 다른 동료 사형수였던 다른 편 강도의 말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3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당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에 대한 조롱은 골고다 언덕에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의 태도였습니다. 대제사장들과 관리들, 로마 군인들, 그리고 그 날 우연히 그 길목을 지나가는 자들까지 연달아 예수님을 비난하며 조롱의 말을 던졌습니다.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이렇게 예수님을 향하여 비꼬는 말, 무시하는 말, 놀리고 짓밟는 조롱의 말들이 여기 저기서 쏟아지는 중인데 이런 분위기에 휩쓸려서 그 한 강도도 예수님을 향하여 함께 여러 욕설과 조롱과 독설의 말을 퍼부었던 것입니다. 그 중 한 마디가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 있던 한 편 강도가 동료의 이러한 욕설과 조롱의 말을 한참 듣더니 마침내 엄숙하게 동료 강도를 꾸짖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40절과 4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놀랍게도 이 강도는 앞서 예수님을 향하여 욕설들과 조롱들을 퍼붓는 동료 강도를 강하게 꾸짖었습니다. 그가 말한 뜻은 “네가 지금 이렇게 땅에서 저지른 죄악에 대하여 그에 상응하는 십자가의 사형 심판을 받고 있는데, 장차 죽은 다음에 사람들의 모든 행위에 대하여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느냐”라는 말입니다. 이 강도는 이 세상에서도 행한 일에 대하여 공정한 심판이 있는 것처럼 장차 죽은 뒤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터이니 그렇게 뻔뻔하고 교만함을 버리고 지금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한 심령 속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있습니다. 장차 자기가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을 알며 그 날에 받을 영원한 심판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의의 심판대에 설 그 날을 마음에 두고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두려움으로 떨며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마음으로 항상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이 강도의 고백은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은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 강도가 현재 당하고 있는 이 십자가의 모질고 악한 형벌마저 자기가 그 동안 행한 모든 죄악에 대한 당연한 보응이라고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회개한 심령은 남을 탓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심령은 자기가 잘못된 것이 부모를 잘 못 만난 탓이거나, 형제를 잘 못 만난 탓이거나, 친구를 잘 못 만난 탓이거나, 시대를 잘 못 만난 것 때문이라고 원망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다 자기의 욕심, 자기의 미련함, 자기의 교만함, 자기의 게으름, 자기의 사악함, 자기의 무정함 때문에 이렇게 죄를 범하게 되었고 이렇게 실패하게 되었고 그 결과 하나님께 이렇게 모진 징계의 매를 맞게 되었고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고 있노라고 자기 잘못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과거에 매여서 자꾸만 누군가를 탓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자기 인생의 고난과 실패를 인하여 누군가에 대한 원망과 미움으로 자기 마음을 계속 괴롭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의 모든 상처와 아픔을 낱낱이 다 아시는 주님께 우리의 아픈 마음을 다 쏟아놓으시고, 지금 우리가 겪는 모든 일도 ‘다 내 탓입니다’라고 인정하고 주님의 긍휼과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원망과 불평과 미움을 십자가 밑에 다 파묻어버리고 주님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나를 도와주옵소서. 나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나의 잘못을 용서해주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할 때 과거의 결박에서 벗어나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이 강도는 예수님의 무죄성을 확신한다고 말합니다.
41절 후반절에 보면 이 강도는 담대히 고백하기를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놀랍게도 이 강도는 예수님께서 지금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이 시간에, “예수님은 무죄다”라고 당당히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상황은 이미 산헤드린 공회에서 신성모독죄로 사형 판결을 내렸고 빌라도 총독 역시 예수님을 십자가 사형에 처한다고 판결을 내린 때입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데 동의하고 앞장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조롱하며 거짓 선지자요 신성 모독한 종교 사기꾼이라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또 십자가에 매달린 동료 강도마저 예수님을 향하여 욕설하며 조롱하는 때입니다. 오직 예외적으로 35절에 기록된 대로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라고 한 대로, 일부 백성들만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동정하며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공개적으로 사람들이 다 듣는 앞에서 예수님을 위하여 담대하게 그의 무죄함을 변호하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요 용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위하여 이렇게 적극적으로 “예수님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라고 변호한 자는 이 강도 외에는 어디에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강도의 이 놀라운 믿음의 고백은 당시 십자가에서 육체의 괴로움과 영혼의 외로움을 견디고 계시던 예수님께 가뭄의 단비처럼 크나큰 위로를 안겨주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이 강도는 동료 강도에게 말을 다 마친 후에 고개를 돌려 가운데 매달려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한 마디의 기도를 올려 드립니다. 4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이 강도는 놀랍게 이 기도를 통하여 의미심장한 신앙적 고백을 예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강도는 “당신의 나라” 곧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수많은 유대인들과 유다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선지자, 종교 사깃꾼으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다니면서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면서도 그토록 증거했던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할 것이라는 예수의 설교가 가짜라고 온 세상이 다 소리치고 있는 판국인데, 이 강도는 놀랍게 예수께서 그의 나라의 임금이라고 여기서 굳게 믿고 한치의 의심도 없이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이 고백이 지금 예수님께서 자유롭게 다니시며 수많은 제자들에게 에워싸여서 존경을 받는 마당에 드려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정죄받고 거짓 선지자로 매도를 당하며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못박혀 수치와 멸시 속에서 지금 거의 죽어가고 있는 마당에 드려진 공개적인 고백이라는 점에서 놀라운 것입니다. 이 믿음은 그 당시 그 누구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위대한 믿음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믿음의 고백을 이 강도가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는 그 때에, 그의 열한 제자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들은 지금 다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그들의 행동 속에 예수님께서 여전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금이라는 믿음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 강도는 한번도 제대로 예수님의 설교 말씀을 깊이 들어본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 강도가 이렇게 위대한 믿음을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예수님과의 만남은 지극히 짧은 시간만이 주어져 있었을 뿐입니다.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갔으며, 함께 골고다에서 뼈에 박히는 대못의 아픔을 당하였고, 함께 벌거벗겨져서 군중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수치와 조롱을 겪으면서 숨도 제대로 못 쉬면서 손과 발에 찢어지는 고통을 함께 견디는 그 짧은 경험의 공유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초자연적으로 부어주신 성령의 깨닫게 하심의 은혜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모든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렇게 구원으로 이끄시는 은혜의 놀라운 신비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아무리 오래 교회를 다니고 종교적 행사에 참석한다 해도 진실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영원히 쇠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믿고 또 그를 자기의 구주로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영적인 명석함 때문이 아니요 우리의 종교적 성실함 때문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역사인 것입니다. 장차 우리가 주님 나라에 들어가면 우리는 우리를 영원 전부터 택하시고 이 땅에 태어난 후에도 자라는 과정에서도 조건없이 사랑하시고, 많은 혼돈과 방황과 완고함 속에 헤매던 우리를 오래 참고 기다려주시고, 우리를 끝까지 품어서 살려내 주신 주님의 그 말로 다 할 수 없는 은혜를 인하여 한없이 울며 그 은혜를 영원히 찬양하고 또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강도는 예수께서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왕국의 영원한 임금이라는 고백을 함과 동시에 예수님께 간절히 소원을 담은 기도를 드립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그는 주님의 나라가 도래하고 주님께서 그의 영원한 나라의 임금으로 서실 그 때에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간절히 부탁합니다. 그는 육체의 죽음 뒤에 남게 될 자기의 영혼이 곧 닥치게 될 내세의 세계에서 주님께서 자기 영혼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자기 영혼을 기억하여 은혜를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간구 속에서 이 강도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의 영혼의 영원한 화와 복을 결정하실 분이시라고 고백하며, 예수님께 자기 영혼을 온전히 위탁하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얼마나 기이한 광경입니까? 지금 저처럼 많은 피를 흘리며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자에게 자기 영혼의 영원한 행복과 불행을 맡기는 이 강도의 믿음은 얼마나 위대합니까? 주님께서 그의 육체의 처절한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고 모든 이들을 살리는 생명의 구주로 높여지신다는 영적 진리를 그 강도가 어떻게 깨닫게 되었는지 우리는 전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 강도가 이렇게 예수님께 자기 영혼의 구원을 온전히 의탁하는 것은 주님께서 설교하실 때에 여러번 하신 이 말씀 곧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요한복음 12:32)고 하신 말씀이 성취된 그 분명한 실제 예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사람들이 뱀에게 물려 죽어갈 때에 모세가 놋뱀을 장대에 매달아 그것을 바라보는 자마다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을 보는 자는 그로 인하여 그 영혼이 치유받고 영생의 확실한 소망을 갖고 죽은 뒤에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그로 인하여 영혼의 구원을 얻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정녕 사람들을 사망에서 영생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한 이 강도의 기도를 들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그 강도를 향하여 대답해주십니다.
43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이 회개한 강도의 간구를 들으시고 대답해주시되 그가 그 날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죽을지라도 그 영혼은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실한 약속을 해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영광스럽고 복된 말씀입니다. 누가 이 강도가 받은 것처럼 구원의 확실한 보장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이 강도처럼 생사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께서 친히 “네가 구원받았느니라”고 확실하게 구원이 보장받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이 강도처럼 구원이 확실한 사람이 또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참으로 이 강도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이 강도에게 해주신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되는 영적 진리는 사람이 죽으면 곧장 천국에 들어가거나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죽으면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소멸된 상태를 유지한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곧장 지옥에 떨어지거나 곧장 천사들에게 이끌려서 낙원 곧 천국으로 올라가서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강도에게 낙원의 은혜가 주어진 주님의 약속은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연옥설에 대한 확실한 반대 증거입니다. 연옥이 있다고 주장하는 천주교의 주장은 사람이 죽으면 극히 예외적으로 거룩한 삶을 산 성자 외에는 신앙을 가졌다 해도 죄가 묻어 있기에 연옥 불이 있는 곳에 떨어져서 몇천년 동안 수련을 받아서 온전해져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이 강도야말로 온갖 악행으로 평생 살아온 사람인데 이 사람이 연옥에 들어간다면 수만 년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후에 아무런 선행을 쌓을 기회가 없이 그 날 저녁에 죽었으나 그의 영혼을 낙원 곧 천국으로 데리고 들어가셨으니, 연옥이란 장소는 허무맹랑한 인간의 꾸민 장소일 따름임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죽으면 오직 천국과 지옥 두 곳으로 갈라져 들어갈 뿐이지 제 삼의 장소, 성화의 기회를 죽은 다음에 또 주어지는 그러한 훈련 장소인 연옥은 없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이 강도의 구원에 대하여 주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사람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강도는 한평생 사람을 해치고 빼앗고 죽이는 악한 일을 해왔던 사람입니다. 그 강도가 종교적 수행을 행하거나 덕을 쌓았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구원받은 것은 오직 그가 진심으로 자기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구주로 믿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은 결코 아님을 이 강도의 구원 사건이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자기의 죄를 진심으로 회개하고 자기 자신 안에 어떠한 선함도 없음을 인정하고 오직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자기 영혼을 그에게 맡길 때 얻는다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믿어야 하겠습니다.
참으로 오늘 이 한 편 강도의 회개와 구원의 놀라운 사건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영적 교훈을 줍니다. 이 강도의 회개와 구원 사건은 생명이 있는 한 구원의 기회가 있다는 희망을 안겨줍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서는 절대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운 능력을 보십시오. 저 강도가 그 마지막 죽어가는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게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가 구원받으리라고 누가 감히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처럼 아무리 흉악한 자라고 해도 우리가 포기하지 맙시다. 아무리 불신앙으로 뼈속까지 스며든 자라도, 아무리 점치는 무당이라고 해도 회개하지 못한다고 포기하지 맙시다. 생명이 있는 한 돌아올 기회가 있습니다. 끝까지 희망을 갖고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그리고 아무리 악한 죄를 지은 자라도, 아무리 흉악한 죄를 범한 자라도 진심으로 회개할진대 주님은 얼마든지 받아주시고 그에게 구원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에라도 혹시 지난날의 자기의 죄 중에서 스스로 자기를 용서치 아니하며 자기의 죄를 주님 앞에 털어놓지 못하며 용서해주실 것을 믿지 못한 채 지내는 사람이 있다면, 이 강도를 기억하시고 주님께서 그에게 베푸신 이 구원의 은혜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신 이 말씀을 붙들고 그 흉악한 살인 강도마저 다 용서해주셨고 구원해주셨으니 나의 모든 죄도 용서해주시고 천국 문에서 나를 영접해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 강도의 용기 있는 믿음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전부 다 일어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비난하고 조롱하고 많은 신자들이 침묵 속에서 뒤로 물러갈 때라도 피 흘리시며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던 주님의 편에 홀로 서서 주님의 무죄와 의로움을 변호하던 그 회개한 강도처럼 우리도 이 세상 살면서 언제나 주님 편에 굳게 서야 하겠다는 각오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릴르 붙드셔서 십자가의 그 고통 속에서 죽어가시는 주님에 대한 그 굳건한 믿음 가졌던 그 강도처럼 굳건한 믿음을 우리에게도 주실 줄 믿습니다.
또한 우리 주님께서 그 십자가의 모진 고난 중에서도 묵묵히 아버지 하나님을 바라보며 원수를 향한 용서의 기도를 드리면서 인내하실 때에 그 곁에 있던 한 편 강도의 마음이 감동 감화를 받아서 결국 회개하고 구원받는 길로 나선 것처럼, 우리도 주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고난 중에도 주님의 향기를 발함으로써 우리를 지켜보던 이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고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는 구원의 놀라운 역사가 우리를 통하여 일어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