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근의 성철 스님 평전 2. 세상이 가야산 속으로
"성철의 빈자리는 깊었다.
빈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벌써 성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위선과 아만과 허무가 넘실대는 세기말에 최선을 다해 살다간 한 선승의 삶은
아쉬움 너머의 희망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었다.
가시는 님은 이승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권부의 이력도 이재의 축적도 없이
수저와 그릇, 누더기 옷을 남긴 것이 고작이었다."
가난해서 행복했던, 그래서 거침이 없었던 선승이 떠나갔다. 선승은 산문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지만 세상이 가야산 속으로 들어왔다. 지상에서의 최후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성철이 남긴 누더기 옷과 죽비를 보며 사람들은 비로소 우리 시대가 오염되었음을, 어른이 없음을 실감했다. 자기 이름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불을 켜고 더 큰 밥그릇만 찾고 있었다. 그런 중생에게 이제 누가 죽비를 내려칠 것인가. 성철은 생전에 자기 집의 무진장 보화를 버리고 거지 노릇을 하고 있는 절집과 사람들을 꾸짖었다. 성철의 유산을 더듬던 사람들은 문득 성철의 소리를 들었다.
“그대들 본래면목은 무엇인가? 그대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성철의 빈자리는 깊었다. 빈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벌써 성철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지난날 지구라는 별에서 성철과 함께 또 다른 진리의 별을 바라보았음을 알게 됐다. 지나서 생각하니 새삼 그것이 축복이고 행운이었음을 알게 됐다. 위선과 아만과 허무가 넘실대는 세기말에 최선을 다해 살다간 한 선승의 삶은 아쉬움 너머의 희망이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었다.
선객, 묵객들은 붓을 들어 성철을 기렸다. 시인 고은은 소금 없는 식단으로 한 평생을 살아온 것은 성철 자신이 스스로 소금이었기 때문이라며 치열했던 용맹정진과 시퍼런 결기를 찬했다.
‘성철 큰스님은 자애롭다, 천진이다 하고 누가 말하지만 그 분의 특징은 엄혹 거기에 있다. 사람 하나 다루는 데도 금강산 1만 2천 봉을 다 써버리며 시자나 상좌 하나 길러내는 데도 향수해(香水海) 바닷물을 다 써서 그 파도에 실려 보내는 것이다. 실로 자비 문중의 무자비(無慈悲)였다. 그런 뼈 으스러지는 공부를 통한 뒤에라야 겨우 가야산 겨울 홍시 두어 개를 따먹으리라 하는 것이다.’
언론은 열반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신문사와 방송사는 특별취재반을 내려보냈다. 가야산의 늦가을 정취를 배경으로 일생 동안 중생의 불성을 깨우쳤던 성철의 삶을 조명했다. 한때 엄중한 우리네 현실을 외면하고 산속에서 선문답만 하고 있다고 비판했던 언론도 영전에 향을 살랐다. 선(禪)은 사상과 논리의 저 편에 있으니, 문자로는 결코 선승의 경지를 제대로 그릴 수 없었지만 언론에 보도된 성철의 일생은 향기로웠다.
‘청산도 묵언이었다. 법체가 옮겨진 연화대 다비장이 거화되자 영결식 때부터 청산을 적시던 빗물도 그었다. 수만 불자들의 흐느낌과 독경이 가득한 가운데 거행된 성철 큰스님의 가시는 길은 무지 중생이 짐작할 길 없는 무량무애였다. 그 무량 앞에서 장엄하다, 위대하다 등의 수식어는 오히려 훼가 될 뿐이다. 가시는 님은 이승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권부의 이력도 이재의 축적도 없이 수저와 그릇, 누더기 옷을 남긴 것이 고작이었다. 그리 말을 아끼던 생전에 병든 속세를 향해 내뱉던 돈오(頓悟)의 법어들.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고도 추대식장에는 물론 끝내 속세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내보내곤 했던 큰스님의 그 법어들은, 삼보정재를 세속의 밥그릇 싸움으로 전락하게 만든 한국 불교계를 향한 질타였으며, 사바세계 대중에게는 바른 삶으로 인도하는 계문이었다.
그러나 그조차도 “일생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라며 버리고, 버리고 갔다.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한다는 인로왕번을 앞세우고 동방 약사유리광불, 서방 아미타불 등 오방번을 모신 채 한 가닥 남은 육신의 옷조차 벗고 갔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릴 길 없는 사부대중들이 영결식장에서 다비장까지 십여 리 산길을 가득 메우고 절로 부복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병든 세상을 기운 누더기 한 벌로 닦아 온 이승의 삶을 기리기 때문은 아닐까. 그 뜻을 원로회의 의장 서암 스님은 이날 추도사에서 “돈만 집어넣으면 흰 것도 검어지고 권력으로 밀어붙이면 둥근 것도 모가 난다고 하는 세상인심들! 얽히고설킨 한 맺힌 그물 속에 허우적거리는 사바의 절규 속에 찌든 인생들이라.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가시는 님의 큰 뜻을 새겼다.’ (경향신문 양권모기자 ‘해인사의 흐느낌’)
다비식 법요를 마쳤지만 사람들은 다비장을 떠나지 않았다.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든 성철을 향해 경배하고 있었다. 연화대 불길은 11월 11일 새벽 4시에 사그라들었다. 그럼에도 밤을 꼬박 새우며 재로 변한 법구를 염불로 지켰다.
11월 12일 오후 습골이 시작됐다. 의현 장의위원장, 일타 장의집행위원장, 혜암 해인총림부방장, 법전 법제자, 천제 맏상좌가 재를 뒤적였다. 성철은 생전에 사리를 거두어 법력을 과시하는 풍토를 경계했다.
“사리만 나오면 뭐하나. 살아서 부처님 가르침에 맞게 살았는지가 중요하지.”
그럼에도 세속의 관심은 온통 사리에 집중되었다. 남은 사람들은 성철의 사리를 찾았다. 1000여 명의 사부대중이 습골을 지켜봤다. 이윽고 누군가 외쳤다.
“사리다, 사리가 나왔다.”
순간 이를 지켜보던 대중 사이에 환성이 터졌다. 밝은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성철은 능히 고무신 한 켤레로도 도인이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사리가 당연히 그 증표가 되어야 했다. 모두 110과의 사리를 수습했다. 스님들이 성철의 유골을 항아리에 담아 다비장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다비장 옆에 서 있던 키 큰 떡갈나무가 제 몸을 떨어 잎을 우수수 떨구었다. 일행이 갈 길을 멈추고 나무를 쳐다봤다. 떡갈나무는 사람들의 눈앞에서 순식간에 나목이 되어버렸다. 가장 가까이서 다비의식의 처음과 끝을 지켜봤던 나무였다. 사람들은 기이하다며 나무를 만져보거나 올려다보았다.
다비식을 마친 다음 날 아침 공양이 막 끝났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소리쳤다.
“방광이다, 백련암 쪽이다.”
그러자 절 식구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백련암 쪽을 바라봤다. 정말 오렌지색 빛 무더기가 백련암 뒷산을 휘감고 있었다. 구름인 듯 안개인 듯 빛을 품고 산등성이 위로 피어올랐다가 사라지고 다시 피어올랐다. 20여 분간 백련암을 장엄했다. 백련암에서 성철을 시봉했던 제자들이 보기에도 그 빛은 아침노을보다 훨씬 붉고 밝았다. 방광을 목격한 것은 그날만이 아니었다. 열반한 날 밤과 영결식 전날 밤에도 붉은 빛이 숲과 산등성이를 물들였다. 사하촌 사람들과 산 아래 가야면 주민들은 믿기지 않는다며 눈을 비볐다. 일부에선 허무맹랑한 얘기라고 일축하지만 봤다는 사람들은 침을 튀기며 목격담을 전했다. 일타 스님은 ‘성철 대종사 사리탑 비명’에 이렇게 썼다.
‘7일 장중(葬中)에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모두 슬퍼하였고, 그 기간 동안 퇴설당과 백련암 뒷산에 걸쳐서 일곱 차례나 방광을 하시니, 그 이적에 사부대중은 모두 놀라워하고 감격했다.’
성철의 사리가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이를 친견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길고도 길었다. 날마다 1만 명이 넘게 몰려들었고 몇 시간을 기다려야 사리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성철이 이 광경을 보았다면 혀를 찼을 것이다. 아마 문도들과 몰려든 대중들에게 이렇게 일갈했을 것이다.
“미련한 곰들아, 살아 수행이 중요하지 죽어 사리가 무슨 소용인가. 아직도 사리 장사하고 있으니 참으로 딱하다. 왜 당신네 본 모습은 보지 않고 남의 사리를 구경하러 그 고생을 하는가.”
성철이 뭐라 하든 남은 사람들은 사리탑을 세우기로 했다. 그리고 ‘조각을 하지 말자, 높게 짓지 말자, 우리 시대 조형 언어로 짓자’는데 뜻을 모았다. 무턱대고 전통양식을 모방, 모사하는 불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마침내 불생불멸, 부증 불감인 우주의 결정체를 형상화한 원(圓) 형태의 독특한 조형물이 완성되었다. 사리탑이 결코 크거나 우뚝하지 않아 탑 전에 선(禪)의 공간이 생겼다. 1998년 11월 열반 5주기에 사리탑 회향식을 가졌다. 그 후 사리탑은 자연스레 성철의 정신세계를 기리는 참배공간이 되었다. 실제로 열반 20주기에는 1000여 명이 모여 탑을 둘러싸고 삼천 배를 올렸다. 제자들과 딸 불필 스님, 그리고 성철을 따르던 대중은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의 고향 생가터에 겁외사를 세우고 성철을 다시 모셨다. 겁외(劫外)란 ‘세속의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진리와 함께 머문다’는 뜻으로 성철이 말년 자신의 처소에 붙여놓은 것이었다. 겁외사에 법당과 심검당, 요사채를 짓고, 성철 동상도 세웠다. 고향 떠난 후 속가에는 한 번도 들리지 않았는데,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이 생가로 모셔온 셈이었다.
물론 이렇듯 구도의 조각들을 모으고 기리는 것을 성철이 보고 크게 꾸짖을지 모른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꾸짖음조차도 그립다. 그래서 스승을 모셔 놓고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어느 날 불쑥 이곳 겁외사에 눈 푸른 납자가 찾아올 것으로 믿고 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277호 / 2015년 1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