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학교 시절에도, 그 후 언제까지도
봄이라는 계절에 대해서 그리 호감이 가지 않았다.
아마,
겨울을 많이 좋아해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는 시기..
겨우내 잠 자던 논두렁에, 밭고랑에 파릇파릇 새 생명이 꿈틀댈 때면
난,
봄의 전령사를 환영하는 마음보다는
멀어지는 나의 계절, 겨울을 아쉬워하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전에는 별로 였던 씁쓰름한 나물 종류가 더 구미가 당기고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가 귓가에 감미롭게 들려오듯이
'봄'이라는 계절이 아름다움으로, 찬란한 계절로 다가왔다.
애틀란타의 봄은 참 아름답다.
도미 후 캘리포니아에서 36년을 지내는 동안, 계절의 변화를 별로 느끼지 못하며 지내는 게 아쉬웠는데
조지아로 이사 온 후,
이곳의 아름다운 봄, 가을의 풍경에 감탄하곤 한다.
찬란했던 5월도 벌써 중순을 넘어가고 있다.
세월이 참 빠르다.
역이민 카페..
작년 12월 이전엔 그야말로 몇 달에 한 번씩 들러 눈팅만 하는 'bystander' 에 불과했다.
그리고,
엄청난 전쟁을 치루었고...
그 후론 카페의 역동성을 위해 나름,
글쓰기에도 댓글달기에도 열심을 내려고 노력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도무지 글소재가 떠오르지 않을 때도 있고
때론, 무심코 쓴 글이 누구에겐 의도치 않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조심스럽기도 하고, 다음 날엔 글을 내리고 싶을 때도 있음이 솔직한 심정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참 맛을 모른다' 라고 했다.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이야기하지 마라"
'눈물 젖은 빵' 까지는 아닐지 몰라도, 경/중의 차이는 조금씩 있겠지만
이민의 삶을 경험한 우리 모두는, 위의 말에 격하게 동감하시리라 생각한다.
나의 옆지기는 일찍이 70년에 정부에서 허락한 $200을 포켓에 넣은 채 호놀룰루에 도착했다고.
비행기 연결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버스로 와이키키 해변을 찾았다고.
너무나 좋았다고..
그러다가 공항에 돌아갈 버스시간을 놓쳐 별 수 없이 택시를 잡아 $100 인가를 택시비로 지불해야 했다고..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불굴의 미국 생존기'~
결혼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남편에게서, 그의 미국 생존기를 들은 후,
그를 향한 존경심과 신뢰가 한층 두터워졌음은 물론이고
그의 생존기를 자랑스레 두 아들에게도 들려주곤 했다.
그에 비해 나의 미국 생존기는 비교적 너무 수월했다고 할 수 있겠다.
미국행 비행기에 오를 때, 비록 동전 한 닢도 수중에 없었지만,
뉴저지의 언니집에는 이미 미영주권이 도착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고,
사랑하는 엄마가, 언니 가족이 뉴저지의 Newark airport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RN 시험만 합격하는 대로 안정된 보수로 전문직 간호사 근무를 시작할 수 있고
그 무엇보다도 나는 24살의,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듯, 무엇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와 자신감을 가진
겁이라곤 없어 보이는 꽃다운 나이의 아가씨였다...
첫댓글 Annie 1885 님
첫 댓글을 달아봅니다
잔잔하게 써 내려가시는 글들
미국 정착이야기
신선하고 기대됩니다
화이팅!!!
계속될 이민사가 기대됩니다.
카페가 한산했던 시기에 아침님의 마중물이 펌프물을 끌어 올렸으니
이제 애니님부터 큰 시냇물되어 흐르기를 기대합니다.
LA신디님, 별떵이님..번호표는 뽑지마시고 오늘 바로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작년 여름에 복귀하셨다가 현재 잠수중이신 은수님도
카페회원분들의 [뒤돌아보는 추억여행]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부푼 꿈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왔다가 젊은시절을 미국 정부를 일하다가 정년퇴직을 하고 역이민을 하여 다시 고국에 살면서 지나온 과거사를 새삼 돌아보게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계속되는 글 기대합니다. 감사합니다.
저희도 안정된 공직에서 국비로 보내 준다는데 못 기다리고... 81년 유학을 떠나는 남편을 겁없이 따라 나섰던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그때는 젊음이 있어 두려움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면 43년이 지난 요즘 느끼는 고국 생활은 편안함과 동시에 다시 적응해야 하는 것들로 쉽지 않아요.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카페를 위해서 글을 써주신다는 말에 더더욱 마음이 찡하네요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남아있고 또 새로운 사람들은 입장해서 이렇게 또 역사는 이어나가게 됩니다
무엇하나 끈기없이 제대로 해내는 것이 없는 저에게는 꾸준히 글을 쓰시는 분들꼐 많은 점을 배우고 갑니다
예전에 그랬었지요
70년대 초기와 그 이전에요
미국정착을 일찌기 하신 가까운 친척분들도 그 당시는 최고액수로 가져올 수 잇었던 달러가 삼백불이였다고 합니다
한국에 외화보유고 자체가 너무나 부족했기 떄문에 규율이 엄격할 수 밖에 없었고 더구나 한국을 떠나는 이민자들에게 그 부족한 외화를 함부로 내줄 수 없었던 배고프고 가난한 나라였지요
그 시대를 살아온 세대였지만 꿈과 희망으로 개척한 이민 1세대였지 않나 싶습니다
그 분들의 이민오신 생활을 이렇게 들으면서 다시 또 어려워지는 시기에 값진 삶의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나도 개처럼 고생했읍니다.
그 덕에 지금은 안정적 입니다
건강이 안좋은 상황에서
치료 받으려고 귀국 했다가 여기가 좋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사신 경험담 재미있게 읽겠습니다
LA신디님의 첫 댓글. 감사해요. 별떵이님, 메이플님, 오를오님, 레비탐님, 베인님, 메아리님;
응원 감사드려요.
계획했던 건 아니었는데 어찌하다보니 이렇게 my story 가 시작되었네요.
제가 A 형에 의외로 소심한 면이 있어서, 이렇게 저의 내밀한 면을 노출해도 되는 건가 깜짝 놀라 움추러 들기도 합니다.
회원님들의 따스한 응원과 격려는 늘 힘이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