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권
- 차 례 -
제 1 장 벽력천검(霹靂天劍)을 만나다
제 2 장 망혼살색분(亡魂殺色粉)
제 3 장 정무맹(正武盟)
제 4 장 혈마서(血魔書)에 얽힌 사연
제 5 장 뜻밖의 방문객
제 6 장 섬전신투(閃電神偸)
제 7 장 귀저곡(鬼底谷)
제 8 장 요악화(姚岳華)를 만나다
제 9 장 사대호법(四大護法)
제 10 장 사악불의 기지(機智)
제 11 장 흑풍회(黑風會)
제1장 벽력천검(霹靂天劍)을 만나다
1
어둠.
칠흑같은 어둠 속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잘려진 머리들이 허공을 떠돌았다. 그 머리들의 눈에서는 피가 마구 쏟아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머리, 그리고 자신이 기주활을 통해 공력을 전달받는 중에 숨져 간 송풍 단원들의 머리.
그리고 사부 기주활의 머리.
그들은 한결같이 사악불을 향해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저승에 가더라도 잊지 못할 처절한 모습을 한 채, 그를 향해 애원하듯, 호소하듯 부르짖고 있었다.
"악불아……."
"단주님……."
"잊지 마라. 혈마서의 행방을 찾아서 이 애비의 한을 풀어 다오."
"단주님, 우리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시면 안됩니다."
"부디 우리 송풍단을 일으켜 주소서."
"잊어서는 안된다. 이 기주활이 한 말을……."
그 머리들은 그렇게 사악불의 주위를 빙빙 돌면서 한이 맺힌 눈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애절한 목소리로 간구하듯 말했다.
사악불은 듣지 않고 보지 않으려고 두 눈을 감고 두 귀를 막았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들의 모습은 눈에서 사라지지 않았고 그들의 아우성은 더 크게 자신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악불아!"
"악불아!"
"단주님!"
도저히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된 사악불은 악을 쓰듯, 그들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고함을 질렀다.
"듣기 싫어! 듣기 싫다구! 내가 무슨 얼어죽을 책임을 졌다고 당신들한테 그런 소릴 들어야 하오! 책임이고 의무고 다 듣기 싫소. 난 사악불이오. 술에 절고 계집들 치마 속을 더듬는 게 유일한 세상 사는 목적인 사악불이라고! 나 같은 하잘 것 없는 인간쓰레기에게 왜 이리도 무거운 책임을 떠맡기려는 거요! 사라져 버려! 다 사라져 버리란 말이요!"
그러나 그 목들은 오히려 더 세차게 두 눈을 부릅뜨고 사악불을 향해 호소하듯 소리쳐 댔다.
"악불아, 잊지 말거라! 혈마서의 행방을……."
"단주님, 우리들의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잊지 말고 사부의 한을 갚아 다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된 사악불은 두 손을 마구 휘저어 대면서 마주 소리쳐 댔다.
"집어치워! 다 집어치우란 말요!"
"헉!"
정신을 차린 사악불은 넋이 나간 듯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어둠은 간데 없었다.
아담한 모옥(茅屋)의 안이었다.
자신은 따뜻한 온돌 바닥에 뉘어져 있었다.
'꿈이었단 말인가…….'
사악불은 이마의 식은 땀을 닦았다.
그러고 보니 누군지 알 도리가 없는 처녀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악불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이게 도대체……."
처녀는 그런 사악불을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더니 몸을 일으켜 부엌을 사이에 두고 접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와 함께 백발의 수염이 무성한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나왔다.
흰옷을 걸친 청수한 인상의 노인, 마른 몸매였으나 바닥을 밟지 않고 걷는 것 같은 걸음걸이였으며, 몸 전체에 예리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무림인임에 틀림 없겠구나.'
사악불은 그렇게 짐작을 했다.
"몸이 좀 회복된 것 같으니 다행이네. 자네는 이곳에 온 지 엿새 동안이나 죽은 듯 누워 있었다네."
"노인장께서는……."
노인장의 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찌된 상황인지 파악되지 않는다는 듯 사악불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부 기주활로부터 모든 공력을 모두 전달받은 뒤, 그가 자신의 생명을 쥐어 짜내며 폭포를 향해 사악불을 집어던지는 바람에 만 장 같은 폭포 밑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그 웅장한 폭포에서 떨어져서 목숨을 부지하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다.
더군다나 공력을 전달받은 뒤에는 상당한 기간 동안 운기조식을 해야만 했다.
그 자신은 폭포에 던져지면서 이것으로 끝이구나 하는 어렴풋한 생각이 들었고 끝내는 의식을 잃었던 것이다.
노인은 가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우리 청아가 자네를 바닷가에서 발견했네. 벌써 이레 전이지. 그래서 이곳으로 데려온 걸세. 옷 여러 군데가 병기에 잘려져 있는 걸 발견했네만 자네의 몸에는 별다른 외상은 없었네."
노인의 말에 사악불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폭포에서 떨어져 그 물줄기를 타고 바닷가로 흘러 왔던 거로구나. 그야말로 천운이다. 그대로 익사할 확률이 백에 구십 구는 되었을 텐데도…….'
비로소 사태가 파악된 사악불은 몸을 일으켜 노인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구명지은인(九命之恩人)에게 감사 드립니다."
"이러지 마시게. 사람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 뿐. 무어 그리 절 받을 일을 했단 말인가? 정 절을 하고 싶거든 우리 청아에게나 하게나. 이 아이가 자네를 발견을 했으니 말이지."
"아 그러시군요. 소저께도 당연히 절을 올려야죠. 제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어머, 말도 안돼요! 저는 공자께 그런 인사를 받을 수가 없어요!"
처녀는 당황한 듯 얼굴을 붉히며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
"허허허. 자네가 이해를 하게. 저 아이는 자네 같은 헌헌미장부(軒軒美丈夫)는 처음 대하니 말일세. 이런 어촌(漁村) 구석에 어디 사내다운 사내가 있어야 말이지."
노인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사악불은 쓴 웃음을 지었다.
'노인도 그렇지만 정말 순박하기 짝이 없는 처녀로구나…….'
그렇게 꼬박 하루를 누워서 요양한 그 다음날, 사악불은 하반신을 덮고 있는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켜서 밖으로 나왔다.
바닷가 특유의 비린내와 함께 시원한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쳐 갔다.
그는 산책하듯 바닷가를 걸었다.
저 멀리 수평선이 아련히 보였다.
'육철주와 독고비연, 그리고 화만정과 도소향 등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악불은 그들이 걱정되었다.
흑풍회인들이 기주활과 자신을 목표로 추적을 하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온전히 흑풍회의 추격에서 벗어 났을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철주는 그렇다 치고 독고비연이 그 놈들 손에 잡혔다면 꽤나 고초를 겪을텐데…….'
사악불은 적지 않이 걱정이 되었다.
나는 당신의 여자예요라고 천진한 눈망울로 이야기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때는 그런 그녀를 귀찮게 생각했었지만 사악불의 마음 한 구석에서도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또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곽규에게 필사적으로 대항하던 송풍 단원들의 모습도 눈에 어른거렸다.
자신의 눈앞에서 죽어간 단원들.
그 처절한 모습들이 생각나자 진정으로 가슴이 아팠다.
평소에 인간 말종으로 비쳐졌을 자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송풍 단원들의 행동은 사악불로서는 너무도 뜻밖이었던 것이다.
'양 부단주가 그곳에 갑자기 나타난 거 하며 필시 무슨 곡절이 있음에 틀림없다.'
사악불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공교로웠던 것이다.
그러나 양 부단주가 자신의 단독 판단으로 사악불 등이 그곳에 있을 줄 알고 부하들을 끌고 왔을 가능성은 없었다.
'학면 대사나 구자충일까?'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사악불이 그곳에 있을 줄 알았으며 또 사악불을 구한 의도는 무엇일지, 그야말로 모든 게 오리무중 속이었다.
"젠장, 일단은 다 잊자. 골이 터지게 생각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지금은 나 사악불답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다!"
그렇게 다짐한 사악불의 눈에, 바위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처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악불은 슬쩍 그녀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무엇을 보고 있는 거요?"
"어머, 공자님!"
사악불의 존재를 확인한 처녀는 얼굴을 붉히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것참 귀엽구만…….'
사악불은 그런 그녀를 마치 고양이가 생선 바라보듯, 옆눈으로 바라보면서 몇 번 헛기침을 했다.
"흠흠… 내 생명의 은인이시니 어떻게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아니에요. 생명의 은인은 무슨……."
"험, 험… 그런데 한 가지 물어 볼 게 있는데……."
"제가 아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말씀드리겠어요."
처녀는 정말 부끄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몸을 반쯤 돌리며 말했다.
"험… 뭐 다른 게 아니고 일어나 보니 내 옷이 온통 갈아 입혀져 있던데… 속옷까지 말이요. 저 그게… 소저의 조부(祖父)께서 하신 거요, 아니면… 소저께서……."
사악불이 점잔을 빼며 질문을 하자 처녀의 얼굴은 더욱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매우 힘들게 말문을 열었다.
"그건, 그건……."
"험, 말씀하기 힘들어하시는 걸 보니 소저께서 하신 거군요. 목숨을 구원 받은 데다가 옷을 갈아 입히는 수고까지 끼쳤으니 뭐라고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몰라요!"
처녀는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져서 몸을 일으켜 모옥을 향해 뛰어갔다.
"거 참 순진한 처녀로군."
사악불은 탄식인지 감탄인지 혼자 중얼거렸다.
2
그녀의 이름이 백리청청(百里靑淸)이라는 건 저녁 식사를 하면서였다.
그녀의 조부인 백리궁소(百里宮宵)는 불룩 솟은 태양혈에다가 정기를 발하는 안광이 필시 정순한 내공의 소유자임이 분명했다.
정갈한 반찬하며 맛깔 나게 요리된 생선 구이에 사악불은 걸신들린 듯 수저를 움직였다.
그런 사악불을 바라보는 두 조손의 얼굴에도 만족스런 미소가 피어올랐다.
사악불은 그런 두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곤 겸연쩍은 듯 씨익 웃었다.
"하하, 이거 너무 체신없군요. 밥맛이 하도 좋아서… 너무 게걸스럽게 보이지 않았나 모르겠네요."
"얼마든지 먹어도 좋네. 밥과 생선은 얼마든지 있으니."
"정말이지. 소저의 요리 솜씨는 일품입니다. 누굴지는 몰라도 소저를 부인으로 맞는 사람은 천하에 둘도 없는 행운아일겁니다. 얼굴 이쁘지, 그 죽이는 몸매하며 거기다가 이렇게 훌륭한 요리 솜씨까지… 이크,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군요."
사악불은 그렇게 둘러댔으나 순간 백리청청의 두 볼은 붉게 물들었다.
말없이 사악불을 바라보는 두 눈에는 달뜬 기색이 역력했다.
백리궁소는 가벼운 미소를 입가에 그리면서 사악불을 향해 물었다.
"젊은이의 이름을 물어 봐도 되겠나?"
"아무렴요, 사악불이라고 합니다."
"사악불이라, 사악불이라… 사씨로군, 그래 그러면 부친의 함자는?"
"천자, 용자를 쓰십니다."
사악불이 스스럼없이 그렇게 대답한 순간 백리궁소의 낯빛은 새파랗게 변했다.
그는 수저를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시간이 야심하니 난 잠자리에 들어야겠네."
백리궁소가 차갑게 말한 뒤 자신의 침실로 사라지자 사악불은 고개를 갸우뚱하며 백리청청을 향해 물었다.
"제가 무슨 말 실수라도 한 겁니까? 어째 어르신의 표정이 불편해 보이시니 말이죠?"
"아녜요. 공자께서 실수를 하시다뇨? 아마 할아버님이 피곤하셔서 그런가 봐요. 저… 그런데 공자님은 여기서 얼마 동안이나 머무실 건가요?"
기대한 부푼 얼굴로 백리청청이 질문을 하자 사악불은 짐짓 한숨을 쉬었다.
"휴… 글쎄, 염치없는 소리지만 얼마나 머물게 될지 모르겠군요. 일주일이 될지, 한 달이 될지… 글쎄 어쩌면 일 년이 될까? 어쨌건 두 분만 좋다면 오래도록 머물고 싶소이다."
"정말 잘 됐네요. 부디 마음쓰지 마시고 오래도록 머무르세요. 저는 공자께서 이곳에 오랫동안 계셨으면 좋겠어요."
백리청청이 호의를 가득 담은 표정으로 말하자 사악불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너도 내 그물에 거의 다 들어왔구나. 완전히 내 손아귀에 들어오는 날에 내 식성대로 말끔히 요리해 먹으리라. 흐흐흐… 저 늙은이가 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거야 어떻게 되겠지 뭐.'
그는 슬그머니 손을 내밀어 백리청청의 섬섬옥수(纖纖玉手)를 움켜잡았다.
"소저가 그렇게 이 몸을 배려해 주시는데 내가 어떻게 냉정하게 뿌리칠 수가 있겠소. 정말이지 소저의 고운 마음씨에 감복하지 않는 자는 이 세상에 없을 것이요. 만약 있다 하더라도 그런 놈은 여자가 아니라 남자에게 관심이 있는 변태이거나 아니면 고자가 틀림없을 것이요."
"아이 몰라요… 저 그런데 고자가 뭐예요?"
백리청청은 부끄럽다는 듯 몸을 비틀다가 다소곳이 물었다. 사악불은 당황한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엉? 아 그 고자란 건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렇지. 고자란 바로 없이 지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요."
"없이 지낸다면 가난한 사람들 말씀이죠?"
"이, 이야기가 그렇게 되나?"
"하지만 가난하다고 여자에게 관심이 없을까요? 정말 고자가 가난한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엉? 저, 내가 없이 지낸다고 한 건 돈이 없다고 한 게 아니라… 아 어쨌든 그런 게 있소. 그런 말은 소저처럼 순진무구한 아가씨는 몰라도 됩니다."
"?"
"그리고 고자가 뭐냐고 행여 조부께 물어 보지도 마시구려. 만약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하면 소저의 할아버지께서 날 절단(切斷)을 내려고 하실 지도 모르니 말이요."
"네?"
"아, 아니요. 어쨌거나 나도 이만 잠자리에 들어야겠구려."
사악불은 말을 마치고 식탁에서 일어섰다.
사악불이 침상에 누운 지 한 시진쯤 지났을 때였다.
똑, 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웃! 혹시 백리소저가?"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문밖에 서 있는 사람은 백리궁소였다. 백리궁소는 굳은 표정을 지은 채 마치 목숨을 건 비무에라도 임하는 사람 같은 자세로 서 있었다.
"헉! 어르신, 어쩐 일로 이 야심한 시각에……."
"할 말이 있으니 잠시 밖으로 나가세."
'헉 내가 손녀에게 흑심을 품은 걸 눈치 챈 거 아냐? 내가 그렇게 말하지 말랬는데도 기어이 고자가 무슨 말이냐고 지 할애비한테 물어본 건가. 팔푼이 같은 기집애 같으니!'
사악불은 침을 꿀꺽 삼키고 뒤를 따랐다.
출렁이는 바다 물결에 밝은 달이 온통 은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모옥의 밖으로 나온 백리궁소는 뒷짐을 진 채 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에 그의 옷깃이 가볍게 펄럭였다.
바다를 묵묵히 바라보는 백리궁소의 얼굴은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사악불은 쭈빗거리며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섰다.
"저, 어르신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
한동안 석상처럼 미동도 않은 채 바다를 바라보던 백리궁소가 서서히 사악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네는 내가 누군지 아는가?"
"글쎄요. 여기서 처음 뵈었습니다만……."
"그렇다면 벽력천검(霹靂天劍)이라는 명호는 들어보았을 테지?"
"……."
사악불이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을 하자 엄숙한 표정을 짓던 백리궁소는 입맛을 다셨다.
"삼십 년 동안 중원을 위진하던 검의 최고수 삼검제(三劍帝) 중 하나인 벽력천검을 모른단 말인가?"
삼검제는 수십 년 동안 검에 관한 한 최고의 실력을 자부하던 전설적인 세 고수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들의 명호는 벽력천검, 참마검(斬魔劍), 탈혼검(脫魂劍)이었다.
그 누구도 검에 관한 한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검의 절대강자 삼검제, 그 중 하나가 사악불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힌 것이다.
그러나 사악불은 고개를 갸우뚱하더니만 별 관심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르신께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는 원체 무공에 관심이 없어서 무림 고인들의 명호 같은 건 잘 모른답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삼검제니, 벽력천검이니 생전 처음 들어봅니다. 또 관심도 별로 없구요."
사악불이 짐짓 어리숙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대꾸했으나 백리궁소는 날카로운 눈으로 사악불을 쏘아본 후에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말해 주지. 무림인이라면 설사 강호초출(江湖初出)이라 할지라도 기억하는 검에 관한 절대강자 세 사람이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나 벽력천검이네. 이십 년 전 나 벽력천검 백리궁소는 검에 관한 한 무림 최고수를 자부했다. 삼검제 중 나를 제외한 두 명도 나보다는 한 수 아래라는 광오한 자신감을 가질 정도였으니까 말이지."
"……."
"그러나 그런 내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강호초출에 백초를 넘기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지. 너무도 어이가 없는 일이어서 나는 설사 저승에서도 그 억울함을 잊을 수가 없을 것이네. 자네는 나 벽력천검을 제압한 그 강호초출이 누군지 알겠는가?"
"참 딱하십니다, 어르신. 삼대 검제가 누군지 벽력천검 백리궁소라는 높은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제가 그 강호초출이 누군지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으래?"
사악불이 잡아떼듯 부인하자 백리궁소는 입가에 냉소를 날리며 말했다.
"집어들게."
"네, 집어들라뇨?"
"자네 발 밑에 있는 것을!"
사악불은 자신의 발 밑을 바라보았다.
날이 시퍼렇게 선 청강검 한 자루가 그의 발 밑에 놓여 있다. 그것은 필시 백리궁소가 미리 준비해 놓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사악불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이게 웬 검입니까?"
"두 번 말하지 않겠다. 그 검을 들어 나를 찌르라, 어서!"
"헉! 어르신 그 무슨 끔찍한 말씀을? 제가 어찌 감히 어르신을 찌를 수 있겠습니까?"
"두 번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
백리궁소는 결연한 표정으로 옷깃에 감추어 두고 있었던 듯 한 자루의 온통 은빛으로 빛나는 검을 빼 들었다.
달빛에 검신이 눈부시게 번쩍였다.
백리궁소는 자신의 얼굴 앞에다가 그 검을 일자로 세우더니 벼락같이 사악불을 향해 내찔렀다.
"헉! 아이고 어르신, 제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어르신의 손녀를 넘본 것은 제 불찰입니다. 다시는 흑심 품지 않을 테니 제발 살려주십쇼!"
사악불은 비명을 지르며 다급하게 보법을 펼쳐 백리궁소의 맹렬한 공격을 급급히 피해 갔다.
그러나 백리궁소는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바닷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성과 함께 백리궁소의 검이 사악불을 향해 맹렬한 기세로 베어 왔다.
"이놈! 그래도 노부를 기만하려 들어? 나를 패퇴(敗退)시킨 초출은 바로 네 아비 사천룡이다. 그것은 나 백리궁소에게는 죽어도 잊지 못할 치욕적인 것이었다. 그는 나를 이긴 뒤, 나에게 철석 같이 약속했다. 반드시 나와 한번 더 비무를 할 것이며 만약 자신이 죽어서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되면 자신의 무공을 전수 받은 아들로 하여금 그 약속을 지키게 할 것이라고! 어서 너의 무공을 펼쳐 보아라, 이놈!"
"아이고 어르신! 살려주십쇼! 저의 부친과 어르신께서 무슨 약조를 하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무공이라고는 보법과 경공술 빼고는 아무것도 배운 게 없습니다!"
"집어치워라 이놈! 나하고 그렇게 철석 같이 약속을 했는데 네 아비 사천룡이 너한테 아무런 무공도 안 가르쳤다는 게 말이 되느냐!"
말과 함께 백리궁소의 검이 사악불의 머리께로 빗살처럼 휘둘러졌다.
사악불은 급급히 몸을 숙였으나 그 서슬에 그의 머리 한 움큼이 잘려져 나갔다.
"정말입니다, 정말이라니까요!"
"이놈, 어디서 그런 씨도 안 먹힐 거짓말을 하느냐!"
눈 깜짝할 사이에 백리궁소의 검이 사악불의 상단과 하단을 찔러 댔다.
사악불은 기겁을 하며 피했으나 결국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아이고 어르신, 그건 제가 워낙 주색잡기에 열중해 아버님이 제게 무공 가르치기를 완전히 포기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님이 완전히 내다 버린 자식이나 다름없는 놈이라니깐요. 제발, 제발 목숨만 살려주십쇼!"
사악불의 전신요혈을 사정없이 찔러 가던 백리궁소의 검이 동작을 멈췄다.
백리궁소는 검을 땅을 향해 늘어뜨린 채 망연한 표정으로 땅바닥에 주저앉은 사악불을 바라보았다.
사악불은 가쁜 숨을 내쉬며 자신의 온몸을 훑어보았다.
옷이 온통 베이고 잘려져 나가 엉망이었다.
치명상을 입지 않은 것은 그나마 백리궁소가 사악불이 마주 상대해 올 때까지 손에 사정을 봐 준 때문임이 분명했다.
사악불은 숨을 헐떡이며 짐짓 겁먹은 표정으로 백리궁소를 바라보았다.
백리궁소는 반쯤 넋이 나간 상태로 물었다.
"정녕… 정녕 그 말이 사실이란 말이냐?"
"제가 왜 어르신께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저 같은 놈을 아들로 둔 것 때문에 선친(先親)께서는 숱하게 마음고생을 하셨습니다. 우리 송풍단 주변의 사람들 아무나 붙들고 물어 보십쇼. 나 사악불이 어떤 인간인가를. 백이면 백 이구동성으로 대답할 겁니다. 그런 망나니를 자식으로 가지느니 불구 대천지 원수를 가지는 게 낫겠다고요."
"……."
사악불이 필사적으로 애원하듯 변명하자 비로소 납득한 듯, 백리궁소의 표정은 처참하게 변했다.
마치 시체처럼 생기가 빠져 버린 얼굴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순식간에 백 살쯤은 더 먹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는 필시 사천룡과의 재대결에 생의 모든 목적을 걸고 살아온 것이 틀림없었다.
자신의 말처럼 천하 제일검을 자부하던 그에게 사천룡에 당한 패배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사천룡이 혹여 누군가에게 패하거나 사고로 죽는다 하더라도 그 아들이 진전을 이어받을 테니 그 아들과 싸우면 사천룡과 못 다한 승부를 끝낼 수 있다고 생각했음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 아들인 사악불은 무공이라고는 제대로 모르는 자였던 것이다.
결국 백리궁소가 사천룡과의 대결 이후 필생의 목표였던 삶의 지표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백리궁소는 등을 돌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모옥을 향했다.
"저 어르신……."
사악불은 그런 백리궁소를 조심스레 불렀으나 백리궁소는 들은 척 만 척 모옥을 향해 걸어갔다.
백리궁소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악불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거 충격이 꽤나 심한 것 같군그래. 그냥 미친 척하고 맞상대 해줄걸 그랬나… 하지만 저 영감탱이의 칼 솜씨가 이만저만해야지… 몰래 배운 무공에 기주활 사부가 물려준 내공과 무공까지 지니고 있지만 그래도 승부를 장담하기 어려우니 어쩐단 말인가? 그냥 난 무공을 모르오 하고 나가 떨어지는 게 낫지."
사악불은 그렇게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스스로를 자위했다
첫댓글 이놈... 악불이... 니 그러다가 되게 한통 맞는다. ㅎㅎㅎ
즐감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