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령 : 은 옛날에는 소동라령과 오색령(五色嶺)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1530년 조선 중종 25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표기돼 있고 조선 후기에 간행된 지리지에
오색령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오색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여지도서(1757년)'에서 찾을 수 있다.
`관동지(1870년 전후)', `대동지지(1866)', `현산지(1910년대 초반)'에는 소동라령과 오색령이
함께 표기돼 있다. 1800년대 만들어진 `해동지도'등 대부분의 고지도에도 오색령으로 표기돼 있다.
서면 오색리 주전골에 고즈넉이 자리한 보물 제497호 `양양 오색리삼층석탑'이 남아 있는 성국사의
원래의 이름 또한 오색석사(五色石寺)이니 `오색'은 `양양'이란 지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1416년보다도 훨씬 이전에 불린 양양의 역사를 간직한 우리의 소중한 지명이다.
-강원일보 4월 26일자 내용 중에서-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yangyang.go.kr%2Fupload%2Fimage_attach%2F2010%2F04%2F26%2Fimage_20100426.jpg)
(서북주능에서 바라 본 오색령)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한계령의 원이름은 오색령으로 표기해야 할 일이다라는 논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였습니다.
그러나 최근 양양의 오색령 찾기 범군민 운동이 벌어지는 현상에 대해 박수를 보냅니다.
이는 역사적인 문헌(이 부분은 첨부 자료로 대신)에 의해 거부할수 없는 명약관하한 사실입니다.
관광 요소인 구비구비 비경 오색령(정상에서 양양쪽 오색리)은 노래를 불러도 드라마를
만들어도 듣고 볼거리가 되는데 한계령(정상에서 인제 쪽 한계리)는 좀 부족하다는게 문제입니다.
저는 오색령 이름 찾기와 관련하여 이런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 오색령을 이야기할 때마다 독도와 다께시마 생각이 납니다.
역사 교육을 해야 할 이유와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잃어버린 역사 오색령은 한계령의 군사도로와 역사성을 무시한 그 당시 막강한 군사정권 아래
지명 변경에 대한 토를 달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게 또 대수로운 문제도 아니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역을 사랑하는 토호 식자들이 침묵하였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흘림골 등선대 정상에서 바라본 한계령 휴게소)
한계령이 고착화된데에는 노래 '한계령'을 빼 놓을 수 없는게 또 아픈 역사입니다.
가수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은 하덕규가 작시한 것으로 되어있지만 실제는 어려운 어린 시절
우리 오색마을의 정덕수 시인이 작시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는 1981년 10월에 작시를 하였고 1984년에 한계령 노래가 히트가 되었고 24년이 지난
2007년에야 작시의 원작자로 정정하여 인정받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문도 모른체 '저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바람처럼 살다 가고파'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서북주능(오색령 정상~대청봉 가는 능선))에서 내려오며 젖은 담배 피우던
이 노랫말에도 한과 잃어 버린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는 오색 초등학교를 졸업하였고 고생이 싫어 무작정 서울로 향했다고 밝히고 있는데 그의
소년 시절(1960년대)에라도 오색령의 역사 교육이 전달되었고 오색령 노래가 히트를 쳤다면 어땠을까?
분명 그는 오색령 정상에서 동해와 남쪽 오색을 향한 고개마루를 내려다보며 단숨에 시어를 뱉었다니
왜 그는 오색령이 아니라 한계령이었냐는 겁니다.
2002년 4월 19일 '오색령 그 옛길을 따라서' 행사를 시작하였습니다.
(양양 장터에서 잔치국수를 먹고 북평리 복사꽃 황토길을 오색령 50리를 걸었습니다.)
그때 오색 학교와 상평학교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였고 당시 내 딸들이 고등학교,
중학교 였으므로 그들도 비스켓 하나로 꼬여서 양양 장터에서 북평 복사꽃 길을 따라 걷게 하였습니다.
당시 저는 오색 학교 운영위원장으로 이 행사의 취지를 설명하자 오색학교 교장과 상평학교
교장 선생님이 적극 협조하였고 양양여중과 여고 일부 학생은 체험 학습으로 대체하여 참여시켰습니다.
지나간 이야기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문제를 바라보는 양양문화원의 인식에 깊이 실망하였습니다.
이 오색령의 역사를 들려달라는 부탁에 문화원 측은 몇명이나 모이는 행사냐는 것이었습니다.
범골과 빨딱고개를 넘고 오색령을 넘던 주막을 재현하고 쑥감자부침과 막걸이와 옹심이를 먹던 생각도 납니다.
(1960년대 오색령 옆 옛 주막 모습)
이 '오색령 옛길 행사'는 매스컴(MBC, KBS, 지역 언론)에도 집중 취재하였습니다.
그후 오색초등학교에서는 '오색령'이라는 제호로 문집을 만들었고,
한계령 해맞이 축제가 열리던 2005년 1월 1일, 표지석 제막식도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2005년 1월 1일, 한계령 해맞이 축제에서)
범군민 운동으로 오색령 이름을 찾자는 취지와 의지에 깊이 공감하며 국민, 관광객들의
인식을 바꾸는 길은 제도적인 것 함께 자라는 세대에게 가르치는 역사 교육과 함께 문화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색령을 오르는 중턱에 덩그렇게 방치되 있다 시피한 부대 준공 표지석을 눈여겨 봅니다.
(1970년 11월 28일, 공병(工兵) 125대대,이 기념비를 세우며 동서를 잇는
우리의 개척정신은 훗날까지 영원하리라 라고 적혀 있다.)
정상 도로를 잇는 마무리 공사를 마치고 세운 기념비라고 적혀 있습니다.
결국, 이 오색령이냐, 한계령이냐의 시작은 인제군 한계리에서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마무리는 양양군 서면 오색리에서 그쳤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억해야 됩니다.
(최고의 포토존은 오색 백암리 물레방아 앞에서 바라 본 풍경)
첫댓글 양희은의 한계령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저산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 마라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