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관한 시모음 81)
이런 여름 /鞍山백원기
지금 바라보고 있는 세상
예전엔 생각도 못 해봤지 정말
비 오다 그치면 서쪽 하늘에 무지개 뜨고
밤이면 영롱한 별빛 아래
풀벌레 울음소리 정답게 들려오면
모기 짚불 연기는 호박넝쿨 지붕 위로
곱게 피어올랐다
울먹울먹 구름 하늘
언제 비가 쏟아질까 알 수 없는데
지난 비에 무너진 둑과 잠긴 농경지가 안타깝다
밟고 다니는 땅과 보이는 산천이 불안하고
난데없는 바이러스 지뢰 무서워
조심조심 살피며 걷는 세상
가다가 무얼 내밀는지 알 수 없는
이런 여름은 처음이야
여름 장터 /이원문
내일은 장날
사람 구경이나 할까
혼잣말에 할머니
텃밭에 가시더니
비름나물 뜯고
밭두덩의 호박잎
풋고추에 대파
들깻잎 몇묶음
그 다음에 오이 노각
이 노각을 누가 집을까
씻어놓는 할머니
담배쌈지 찾더니
아침 일찍 나서며
보따리 가득 들고 이고
늙은 친정 생각에
장터 길 멀어진다
여름 볕과 한 판 /돌샘 이길옥
한여름
뙤약볕으로 잘 구워진 구릿빛 얼굴
쭈글쭈글 구겨진 주름 깊숙이 고여 넘치는 땀을
기름때 범벅이 된 목장갑으로 연방 훔쳐낸다.
특별한 재주나 기술이 없는 나이에 걸맞은 일이
실내나 그늘 속에 없는 터라
늘 밖에서 흙먼지 뒤집어쓰는 잡일로 뼈가 굵은 몸은
목을 타고 넘치는 가쁜 숨과 뜨거운 입김에 녹아든 피곤으로
신열을 앓는다.
잠깐 쉬는 틈을 작업장 귀퉁이 한 뼘 그늘에 내려놓고
이마에 남은 땀을 닦아낸 목장갑을 툴툴 터는 손목이 시리다.
아직 남은 하루치의 일감이 천근 무거운 몸을 짓누른다.
중천에 걸린 해의 느린 걸음을 원망하며 뻐근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허술한 집안 가득 고여있을 가난을 걷어차리라는 오기로
이글거리는 여름 볕의 멱살을 잡고 한 판 붙는다.
물 좋아 여름 좋아 /노정혜
물 좋아 여름 좋아
물 너무 좋아
물 좋아 여름 좋아
개울 물 깨끗해
개울 물소리 청아해
수초들 시원하게 물마시고
바람에 산들 산들
물 좋아 여름 좋아
물 좋아 물 시원해
물 너무 좋아
물 물 너무 좋아
물 있어 여름 좋아
물 찾아 계곡으로 바다로
휴가길 이어진다
물 좋아 여름 좋아
사랑받아 좋아좋아
꽐꽐 시원하게 노래노래
물 좋아 여름 좋아
성하 /꽃뫼 최영호
한 소식 들은 모기가
뾰족한 불탑을 세우고
밤낮없이 소 우는 소리에
어리고 순한 언덕을 탐했다
귓불을 깨물고
마른하늘이 응응 울었다
여름은 짧기만 하다
거웃 없는 언덕 아래
붉은 등불을 달아놓고
가로와 세로를 탐했다
속살 깊은 기슭에 닿아
이리저리 밤새워 서성이다
여명이 밝아오면
한 떨기 꽃이 핀다
나는 울먹이며 걸었다
진흙탕의 연꽃처럼
화사한 얼굴이 땀으로 저문다
고인돌 아래 흙으로
돌아갈 때 바람의 노래 들으며
낮은 곳으로 물이 흐르고
소처럼 비빌 언덕을 찾아
밤새워 면벽의 참선을 한다.
여름 아이 /최보윤
그 여름 언니는 툭하면 부러졌다
갈 곳 잃은 개들이 마당을 파헤치고
새들이 쪼아먹은 자두가 뒹구는 현관 앞
왜 이리 현기증 나나 했지 언니는
여름에 태어난 바람에 자주 지쳤다
스스로 바람이 되어 흔들리는 나무처럼
언니의 얼굴은 자두를 닮았나
훔쳐본 얼굴이 왜 이리 서글플까
가까워 머나먼 표정 들녘에 엎드린 채
언니 언니, 부르면 돌아보는 그림자
개들이 언니를 파헤치면 어떡해
새들이 언니 얼굴을 삼키면 어떡해
언니는 고요하고 쓸쓸히 말한다
"하늘에선 수평이 중요하지 않단다
그러니 답 없는 슬픔일랑 접어둬도 괜찮단다"
청포도 익는 여름의 첫사랑 /김진문
청포도 익어가는
따가운 여름햇살에
파란 두 마음이 하나되어
그윽한 포도향기에 파묻혀
손에 손잡고 무르익던 첫사랑
청포도 익어가는
고향들녘에 내리는 소낙비
일곱색깔 무지개 동산에 걸리는 날
가슴이 하얗게 떨려옴을 삭히지 못한 채
소매자락 붙잡고 사랑을 고백했었지
청포도 익는 여름
그대가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어도
설레이는 가슴은 하냥 텅빈 것 같아
수시로 일어나는 그리움 접어 두었다가
한량없이 쏟아부은 사랑가슴 잘게 부수었더니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여울목이었네
청포도 익는 여름
붉은 노을 산그늘 지기 전에 만나자던 그 동산엔
먼저 와 있는 내 긴 그림자뿐
여름이 다할 때쯤이면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임영준
여름이 다할 때쯤이면
반드시 되짚게 된다
사유의 뜨락에
가장 소중했던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숨결을 나누며
앞날을 다듬고
머리카락 올올까지도
참견하고 트집 잡던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사랑이었는지
허상이었는지
열정을 다 했는지
상처만 남았는지
흐릿한 기억과 함께
가슴 한켠이 허물어졌던
그런 날들이 있었다는 것을
어느 여름 /김태백
초록빛 물결
출렁이는 바닷가
백사장 모래밭
조개껍질 은빛 햇살 토하고
여름 좋아하는
갈매기 날개춤 솜씨
하늘 조각구름도
시원한 여름 바닷가 내려앉았다
첫사랑 여인처럼
투명한 아침 이슬
풀잎 스쳐 지나가고
사랑이 너무 그리워
참매미 지저귀는 숲속
시원한 옹달샘 샘솟는
어느 여름날
바닷가 파도 소리 바다 냄새
해녀의 숨비 소리에
초록 물결 일렁인다
여름 소식 /남원자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에
조용히 귀 기울여 들어보니
여름이 온다는 소식을 알리네
개구리가 개굴개굴 엄마 찾는 소리
서로 짝짓기 하려고 짝 찾아 큰 잎 벌려
아름답게 노래를 하네
까치도 참새들도 날아와서 깍깍 짹짹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하고
꽃들도 아름다움을 뽐내듯 더욱 빛나네
학교에서는 기말고사 시험을 치르고
방학이 빨리 오기만을 기다리는 아이들
이제는 방학이 너무 길다고 푸념한다
코로나19로 서로 친구를 그리워 하므로!
여름 다저녁 때의 냇둑 걷기 /고재종
이윽고 바람결 푸르게 일자
냇둑의 패랭이꽃 메꽃 부푼다
멀대 같은 쑥대며 개망촛대 흔들린다
진종일 백열의 혼몽 속에서 시달린
들과 마을과 산과 하늘이여
이윽고 바람결 푸르게 일자
냇둑의 미루나무 잎새 살랑거린다
억세게는 무성한 억새잎 스적인다
나 같은 건 마음 뿌리까지 설렌다
그때마다 내 넋을 수시로 들고 나는
저 흔하고 순수하고 질긴 것들이여
어느 순간 냇둑에 우뚝 서서
노을 부서져 반짝이는 냇물을 본다
냇물의 유유한 흐름을 본다
거기 늦게까지 물장구치는 아이들과
미루나무 끝에 걸리는 함성을 듣는다
나 같은 건 휘파람까지 불어댄다
그리움, 그리움, 그리움이여
이때쯤 황혼 속으로 새떼는 날아가고
때마침 뙈기밭에서 첫물 고추를 딴
여인은 냇물에 뜨건 발을 담근다
그 옆에서 옴쏙옴쏙 풀을 뜯던
흑염소들은 또 문득 목을 빼고 운다
그러면 어느 새 놀빛도 사라지고
온통 새하얘져버린 하늘 복판에
봉우리를 깊숙이 치받고 있는 서산,
그 우뚝함을 씻어내는 바람이여
그 우뚝함을 우러르는 여인이여
나 같은 건, 나 같은 건 시방
이렇게는 서럽고 높고 싱그러워서
주막집 들러 소주 한 잔 기울인다
벌써 앞들엔 달빛도 휘영한 것이다.
사 랑 /안도현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어느 여름 일기 /임보
절름발이 검둥이가 수캉아지 다섯 마리를 낳고
백목련이 푸른 잎들 사이에 시절도 모르고
둬 송이 꽃을 뽑아 올리다 말았다
누가 낮술을 하자고 불러내지나 않을가
기다리다
왕유(王維)의 시를 둬 편 더듬거리며 읽었다
구름은 떼로들 몰려 북한산 골짜기를
부지런히 넘어가고
아이들은 종일 시시덕거리며 수영장을
오르내리고 있다
금방 터질 것 같은 예감의 세상은
아직 그대로 있다.
그대는 올 여름에 무엇을 했는가 /정영자
산자락 겹으로 누워
하늘과 땅기운이 모이는
해인(海印)의 아침,
솔숲 위에 내린 햇살,
부드러운 음영(陰影)을 가르며
고찰(古刹)의 파장(波長)은
쌓아 온 업장(業障),끝모를 고뇌도
씻은 듯 날리고 말았네
지치고
넘어질 때
우리가 이곳을 찾아드는 것은
어머니의 편안한 품이었네
“그대는 올 여름에 무엇을 했는가”
법전스님 법어집의 화두가
아침을 깨운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세상은 화산을 지고
이리도 시끄러운데
두려움도
시냇물에 씻겨나는
해인(海印)의 골짜기에
조금씩 잎은 붉어지고 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