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비슷한 레파토리네"
'하우스'의 뚜껑을 닫고 돌아서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갓 잡아온 분충이나 버려진 원 사육들
이후 인간은 물론 모든 생물이 배제된 환경 속에서 대를 거치며 본능이 변화한 놈들이 보여온 반응은 맛있었지만
그것도 슬슬 약발이 다한걸까, 같은 환경에서 대를 너무 거쳤기에 그런걸까 요즘은 다들 반응이 비슷하다
"슬슬 이 짓도 그만둘 때가 됐긴 하지.."
어느덧 후끈해진 초여름 밤의 옥상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며 혼잣말을 뱉고 있자니 그동안의 추억들이 아른아른 스쳐간다
그럼 이번 대를 끝으로 이 방식의 학대는 끝내도록 할까...
.
.
그렇게 며칠 후,
흥이 식어서 그런지 관리를 잊고 있던 '하우스'를 열자 뜻밖의 모습이 펼쳐졌다
카미사마, 오신 데스
"어.. 어, 그래"
언제부턴가 익숙해진 오체투지지만 어딘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의 모습에 멈칫했던 나는 일단 손에 들린 녀석의 밥을 던져주었다
항상 감사한 데스- 맛있게 먹는 데스-
"와 씨, 왜이래?"
와타시 깨달은 데스- 와타시가 태어난 것도, 자라온 것도, 자를 가진 것도, 자를 잃은 것도 모두 카미사마의 뜻대로 데스. 와타시에게 남은건 카미사마에의 경외심 뿐인 데스
아니 뭔 그냥 친 드립인데 진짜 신 취급을 하고있냐
그야 제 어미 분대에서 떼 내고 점막을 벗기기는 했다만 진짜 조물주 대하듯 하니까 당황스럽네 이거
"뭐 그래... 알면 됐다...... 밥 더 줄까?"
감사한 데스, 하지만 충분한 데스. 카미사마의 뜻대로 하시는 데스
"어.. 그래"
싱숭생숭해진 나는 적당히 멀쩡한 푸드 한 알을 부숴 놈의 밥에 뿌려둔 후 황급히 뚜껑을 닫았다
리얼 뭔데 진짜? 찐으로 당황스럽네
뒤이어 '옆집'의 뚜껑을 열고 확인한 놈은 여러번 봐온 레파토리대로 발작하며 으르렁대는 모습을 보여준 덕분에 평정심을 되찾은 나는 적당히 밥을 던져주고선 후다닥 컴퓨터로 달려가 언젠가부터 잊고 지냈던 하우스의 감시카메라 로그를 열어보았다
'먹이의 정체'를 알게 된 다음날,
나와의 대화 이후 하루종일 엎드린 자세 그대로 울고만 있던 녀석은 정신을 추스르자 먹이더미에서 육편만을 정성스레 골라모아 방 한켠에 쌓아둔 뒤 다시금 그 앞에서 눈물만을 흘려댔다
아니 근데 사실 거기에 니 새끼들만 있는건 아닌데..
아무튼,
이튿날에는 식욕이 떨어져가는(자를 가지려는 욕망을 보이기 시작하는) 벽 너머의 자충을 보며 안된다고 소리치거나 고개를 저어댄다
사흘 째 되자 식사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저 고깃더미 옆에 앉아 이런저런 말을 지껄이거나 쓰다듬거나 하다가도 다시금 울어재끼는 일을 반복하더니
나흘 쯤 됐을 땐 고깃더미와 멍하니 마주앉아 링갈에도 잡히지 않는 말을 무어라 중얼거릴 뿐이었다
꼬박 이틀을 그렇게 지새운 녀석은 마침내 닷새째 되자 유의미한 말과 행동을 보였다
다시 하나가 되는 데스-
그 말과 함께 고기를 움켜쥔 녀석은 헐레벌떡 달려들던 예전과 달리 있는대로 경건한 모습으로 고기들을 꼭꼭 씹어삼키기 시작했다
마침내 마지막 한 덩이를 삼키고나자 뚜껑을 열었을 때 봤던 모습 그대로 엎드린 채 꼼짝도 않고 있었던거다
"허..."
중간에 잡히지 않았던 중얼거림을 제외한 나머지 말들의 로그까지 다 읽고나자 내 입에선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간 이 짓을 해오며 복종하는 척 뻔히 보이는 가식을 떨어온 놈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진심으로 숭배하는 녀석이 생기다니
마지막이라 생각했던 상황에 새로운 반응이 튀어나오자 얼떨떨 하면서도 한편으론 실소가 흘러나왔다
뭐 그렇다고 질려버린 학대 방식을 굳이 이어갈 생각까진 들지않지만
적어도 새로운 자극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어준 이 녀석을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
그로부터 이틀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갔다
녀석의 엔딩을 생각하면서 방치하는 바람에 더러워진 나머지 셋의 방들을 정리하고 있자니 나머지 녀석들은 몰라도 녀석의 마지막 만큼은 얼추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미사마, 강녕하신데스-
"어, 어.. 그래.."
정보를 얻을 수단도 없는데 강녕이란 말은 어디서 주워들은걸까..
아무튼 지난 이틀간 기도인지 혼잣말인지 모를 헛소리들을 살펴보니 대략적으로 녀석의 심리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행복했던 자충시절의 모든 것을 잃고 지옥으로 굴러떨어진 현실과 그 모든 상황을 만들어낸 나에 대한 공포를 바탕으로 생겨난 경외감을 토양삼아
유산된 줄 알았던 자를 자신이 먹었다는 충격속에 작동한 행복회로가 유일한 소통상대였던 나를 향해 생겨난 집착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합쳐지며 신앙이라는 답으로 개화한 모양이다
뎃승-
그 결과 녀석은 극소량의 식사와 짧은 배변시간을 제외하면 모든 시간을 티벳 오지의 고행승마냥 이상한 기도문을 중얼거리며 오체투지한 채 보내고 있다
처음에야 신선했던 그 모습이 보다보면 질리기도 하거니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꼴보기 싫어졌기에 그나마 남아있던 일말의 호의는 무시하고 원래의 계획을 진행하기로 마음먹었다
.
.
2주 후,
'이상한 데스'
고행승처럼 가만히 엎드려있던 실장이 처음으로 식사와 배변 이외의 이유로 몸을 일으켰다
'카미사마께서 강림하시지 않는 데스'
한참동안 '카미사마'가 나타나지 않는다
분명 지난번에도 이런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다르다
가뜩이나 셈에 약한 실장석이 태어나기도 전에 인위적으로 어미의 분대에서 떨어져나와 아무런 위협이 없는 환경에서 먹고,자고,싸고,놀기만을 반복하는 생활을 여러 세대동안 거쳐왔다
회화가 가능한 것 조차 기적이나 다름없는 실장에게 옆 방이 밝아진 횟수를 세는 것 따위 가능할 리 없지만 짧은 경험에서 탄생한 감은 분명 이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확신하고 있다
덜컹-
그리고 들려온 익숙하고도 반가운 소리
천장이 열린 소리에 만면에 화색을 띄운 실장은 조속히 엎드리며 하늘을 우러러본다
데?
하지만 반가움이 담긴 시야에는 언제나 보이던 칙칙한 검회색의 천장만이 비칠 뿐
생각해보면 방금 들린 소리는 어딘가 작았다
마치 벽 너머의 아이가 싸지른 운치나 어질러둔 방 안을 치우기 위해 들려왔던 소리처럼...
뎃?!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돌아본 벽 너머의 상황은 그야말로 낯설고, 이질적이며 너무나...
어째서.. 어째서 또 뺏어가는 데스우---!!!!
화가 나는 모습
벽 너머의 아이...작았던 것은 방긋방긋 웃으며 '카미사마'와 대화하고 있다
비록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 커다란, 저쪽을 청소할 때 벽 너머로밖에 보지 못했던 카미사마의 손에 뺨을 부비며 행복한 표정을 띄우고있다
자신에게는 한번도 내려오지 않은 손
그저 밖에서 먹이... 운치만을 던질 뿐 한번도 직접 마주한 적 없는 손
행복회로 속에 덮어 씌워졌던 포장지들이 한올한올 벗겨지며 평온의 뚜껑을 부식시킨다
데기이이이--
마침내 숨겨뒀던 증오와 질투가 자신들을 억누르던 거짓된 평온을 집어삼키며 다시금 거칠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데끅, 데켁, 데게복---
너무나도 벅차오르는 분노와 증오로 인해 머리속이 뜨겁고 새하얗게 아파온다
한계까지 수축하는 분대에서는 얼마 들어있지 않은 내용물이 목을 타고 역류한다
온 몸이 뜨겁고 뻣뻣하게 굳어 손발을 움직이긴 커녕 호흡조차 힘겨워지기 시작한다
터질듯이 핏발 선 두 눈에서는 더 이상 흐르지 않을거라 여겼던 피눈물이 그 어느때보다 진하고 끈적하게 흘러내리지만 오히려 시야는 점점 더 선명해지며 저 증오스럽고 부럽고 역겹고 부럽고 더럽고 부러운 모습을 계속해서 뇌리에 꽂아넣는다
데끅- 켁- 덱-
제멋대로 움직이며 단어가 되지 못한 단말마만을 뱉어내는 주둥이를 무시하고 오직 팔다리에만 의식을 집중해 어떻게든 벽을 향해 천천히, 천천히 기어가는 실장,
마침내 그 벽에 다다랐을 때 그 눈에 비친 것은 작았던 것에게 무언가를 내미는 '카미사마'의 손
그저 새로운 장난감을 던져주듯 너무나도 무심하게 내밀어진 그것은-
덱- 데헥- 텍-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목숨 그 자체
한번도 몸 안에서 느껴보지 못했던 나의 소중한 돌
여기저기 금이 간 채로 검고 탁하게 흐려졌지만 세상의 그 어떤 보석보다 아름답게 보이는 나의 반쪽
생사여탈을 위시한 모든 주권의 결정체인 위석이었다
텍- 켁- 테헥-
어떻게든 단어를 뱉으려 애를 써봐도 굳어버린 혀와 목구멍에선 바람빠진 소리만이 새어나올 뿐
막혀있는 유리면에 한계까지 들러붙은 그 몸은 건너편의 작았던 것이 실망한 듯 짜증내며 부실해진 위석을 내팽개친 순간,
깨어진 위석만큼이나 허무하게 그 자리에서 무너져내렸다
---
"흠-"
모니터를 통해 녀석의 최후를 보고있지만 어딘가 아쉬움이 느껴지는건 어째서일까
최고의 환경으로 올려졌다 최악의 환경으로 떨어지고, 가까스로 붙잡아 버티던 신앙의 밧줄 또한 잘라버린 채 질투와 원망의 대상이었던 자충쪽을 들어올리는 모습을 눈 앞에 보여줬건만
카메라에 기록된 녀석의 최후는 어쩐지 허무하고 아쉬운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그저 이런 장면마저 익숙해져버린 내가 문제일지 아니면 내가 선택한 피날레에 부족함이 있었던 건일지는 천천히 복기해봐야 알 수 있을 문제겠지만
우선은 고생해준, 그리고 잠시나마 내게 모든 신앙을 바쳐준 녀석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는 최소한의 답례가 먼저일까
데피- 데피-
그 일을 마치고 나면 아무것도 모르고 춤 춰준 광대
한때나마 작은 것으로 불렸던 이 놈 에게도 새로운 세상을 보여줘야겠지
대충 생각이 정리되자 의자에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가벼운 아우터를 걸쳤다
곤히 자고있는 다음 희생자에게 다시한번 네무리를 뿌려둔 나는 '녀석'의 시체를 담은 작은 종이곽을 들고 집을 나섰다
-end-
아래는 존나 tmi
작중에서 배경이나 설정을 길게 설명하는걸 싫어해서 대충 넘어가거나 아예 묘사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므로 궁금한 사람만 드래그해볼 것
-작중 화자 시점이 남자, 실장, 전지적 시점으로 계속 바뀜
가독성이 떨어졌다면 병신같은 필력 때문임
-녀석과 작은것이 들어있는 방음 상자는 매직미러가 3:1 비율로 방을 나누고있음
-녀석과 작은것이 들어있는 상자 옆에는 완전히 동일한 환경이 갖춰진 다른 상자가 하나 더 놓여있음
-녀석이 어릴 때나 작은것이 들어있던 방에는 시간에 따라 광량이 조절되는 조명이 들어있으며 12시간을 기준으로 작동함 (작 중 묘사된 날짜는 인간 기준, 상자 속의 실장석들은 두배의 시간을 체감했다고 보면 됨)
-녀석이 성장 후 떨어진 방에는 아주 어두운 조명이 상시 작동하고 있어 시간의 흐름은 오직 옆 방이 밝아지는 것 만으로 파악할 수 있음
-어린 시절을 행복한 방에서 자란 실장들은 '자를 갖고싶다'는 의사를 내비치는 순간 꽃을 공급받고 출산이 임박하면 네무리로 재워진 후, 자를 적출당한 뒤 불행한 방으로 떨어짐
-적출된 자충들은 오로지 남자의 기분과 선택에 의해 당장의 생사가 나뉨
살게 된 자는 점막제거 후 위석적출, 행복한 방으로
죽게 된 자들은 믹서기와 냉동실을 거쳐 운치밥 행
-친충이 자충을 딸이라고 인식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각 방음상자의 친충이 낳은 자는 옆 방음상자로 이동함
-작 중 시점은 남자의 관찰 및 장난질이 한참동안 진행되고 종점에 다달은 시점으로 최초에 투입된 세대보다 한참이나 뒷 세대의 이야기임
-남자 스스로도 중간부터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먹이와 물에 성장촉진제를 투입하고 조명 작동시간에 장난질을 쳐서 세대교체가 빨라짐
-여러 세대동안 행복한 자충 쪽과 접촉하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학대파인 남자는 올리기 과정에 개입하는걸 꺼려했으므로 행복한 방에는 자충을 네무리로 재운 후 청소하는것 이외에 아무런 접촉이 없었음
즉, 거의 모든 개체는 성장과정에서 다른 누구와도 접촉하는 일 없이 성장하고 학대방에 떨어진 뒤에야 남자의 존재를 알게 됨
-언어능력이 그나마 남을 수 있었던건 태아시절 듣고, 성체가 되어 읊어댄 태교와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계속해서 떠들어댄 혼잣말 덕분
-아니 같은 먹이, 같은 장난감만 먹는데 어떻게 올리기가 됨?
기본먹이 3종이 3일간격으로 배급됨
4 이상 못 세는 놈들이라는 설정을 적극 활용함
그래도 위화감 느끼면 히든먹이 1종을 3일 지급.
외부의 정보가 일절 공급되지 않으니 일정 세대가 흐른 순간부터 스시니 스테이크같은건 아예 태교단계에서 맛있는 밥씨로 대체되고 유전자에서 사라짐
장난감은
사람을 가장 빡치게 하는건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첫댓글 굳이 밀하자면 미쳤다가 죽기 직전에 제정신으로 돌아온 것 같은카시라
제정신으로 돌아왔다기보단 신앙으로 되찾았던 온화함이 사라지면서까지도 남자에 대한 호칭은 신으로 고정된걸 노렸는데 필력부족이었나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