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종이와 먹을 떠난 ‘글자가 없는 경’
"영주가 읽은 책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영원한 삶’ 같은 낙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히 사는 길, 즉 구원에 목말라 있었음을 암시하는 방황의 흔적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용운 스님이 해설을 붙인 ‘채근담강의(菜根談講義)’를 읽었다. 그리고 한 군데에 눈이 딱 멈췄다. 글자가 한 자도 없는 경이 과연 무엇일까. 이때 영주는 이미 불교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 성철 스님은 21세에 당시 관혼상제에 대한 의식을 모아놓은 책 ‘간례휘찬(簡禮彙纂)’ 사이에 메모 형태의 ‘이영주 서적기(書籍記)’를 남겨놓았다. 이를 통해 스님의 엄청난 독서량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백련불교문화재단 제공
성철은 청소년기에 “엉뚱한 생각을 많이 했다”고 회고했다. 그 엉뚱한 생각이란 다름 아닌 존재에 대한 물음이었을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최후가 있었다. 생명붙이는 물론이요 길도 끊기고, 지나가는 바람도 홀연 멈췄다. 인간도 한 번 상여를 타고 떠나면 돌아오지 못했다. 영주의 젊은 날은 그래서 아프고 허망했다. 당시 심경의 일단을 훗날 딸(불필 스님)에게 준 법문 노트의 머리말을 통해서 엿볼 수 있다.
‘초로인생(草露人生), 풀잎의 이슬 같은 인생! 들판의 저 화초는 겨울에 죽었다가 봄이 오면 다시 꽃이 피건마는, 오직 이 인간은 한 번 죽으면 아주 가서 몇 천 년의 세월이 바뀌어도 다시 돌아오는 이 없으니, 우주는 인생의 분묘라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라. 참으로 영원한 비극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영주는 책에 빠져 들었다. 책이 인생의 해답을 줄 것으로 믿었다. 누구나 인생의 목표는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 하는 일이 다르고, 생김새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르지만 인간은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인간에게 찾아온 행복에는 끝이 있었다. 영주는 끝이 없는 행복, 즉 영원한 행복을 찾으려 했다. 하지만 책 속 영웅과 위인들의 삶도 영원한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성철은 훗날 세속에서 성공했다는 세 사람의 삶을 들어 그들의 부귀영화가 덧없음을 대중에게 일깨워준 바 있다. 법문을 통해 몇 번이나 설했으니 바로 록펠러와 맹상군, 진시황이다.
록펠러(1839~1937)는 자수성가해서 세계적인 갑부가 되어 아흔 아홉까지 살았다. 그만하면 누가 봐도 행복하게 산 사람이었다. 돈 많고 장수했으니 부러울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런데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지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말년에 암에 걸리자 자신에게 닥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을 일 년만 연장시키면 재산의 반을 주겠다는 광고를 냈다. 거금을 들여 광고를 냈지만 소용없었다. 별 별 사람이 각양각색의 방법을 동원하여 그를 살려보려 했지만 록펠러는 죽었다. 부귀와 영화는 이렇듯 한 순간에 끝이 나고 말았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맹상군 또한 세상의 부귀를 모두 누렸다. 왕자로 태어나 정승을 지내며 역사에서 가장 호화롭게 살다간 사람이었다. 하지만 백년도 못살고 일흔 가까운 나이에 죽고 말았다. 장례를 거창하게 치러 죽어서도 호강을 했다. 그러나 세월은 모든 영화를 앗아갔다. 누군가 시를 지어 세속 영화의 덧없음을 노래했다.
호화코 부귀코야 맹상군만 하련마는/ 백년이 못 다하여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요.
무덤이 산처럼 거창했지만 세월이 흐른 후에는 누군가 무덤 위로 밭을 냈으며, 무심한 농부는 그 밭을 갈 뿐이었다. 맹상군도 그럴진대 보통 사람들은 어쩌겠는가.
진시황(秦始皇 기원전 259~210)도 진나라 대제국을 건설한 영웅이었다. 천하를 얻고 보니 모든 것이 자기 것으로 보였다. 음식과 옷 등 세상의 좋은 것들을 독차지했고 수많은 미인을 끼고 살았다. 아방궁이란 궁궐을 지었는데 그 길이가 칠 백 리에 뻗쳤다. 그러다 문득 돌아보니 자신이 늙고 있었다. 곧 죽고 말 것이라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황제는 불사초(不死草)를 구해 오라 군사들을 동쪽으로 보냈다. 하지만 기다리던 ‘불사초 원정대’는 오지 않았고 진시황은 죽고 말았다. 그 후 유방과 항우가 들고 일어나 진나라는 망했다. 항우가 아방궁에 들어가 불을 질렀는데 밤낮없이 석 달 동안 화염을 뿜었다.
저들은 영원한 행복을 찾으려 몸부림쳤지만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죽음을 막아보겠다는 것은 버마재비가 수레를 멈춰보겠다며 바퀴 앞을 가로막는 것과 다름없었다. 저들은 세속적인 행복을 누렸지만 지나보니 행복이라는 것이 거지가 밥 한 끼 잘 얻어먹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사람이 죽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영원에서 영원으로 통하는 진리는 없을까?’
영주는 온통 영원한 삶이란 무엇인가를 붙들고 해답을 찾아 책 속을 헤매었다. 고전,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동서고금의 책들을 읽었다. 영주는 21세(1932년 12월2일)에 당시 관혼상제에 대한 의식을 모아놓은 책 ‘간례휘찬(簡禮彙纂)’ 사이에 메모 형태의 ‘이영주 서적기(書籍記)’를 남겨놓았다. 이를 통해 영주의 엄청난 독서량을 가늠해 볼 수 있다. ‘행복론’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역사철학’ ‘장자남화경’ ‘소학’ ‘대학’ ‘하이네시집’ ‘신구약성서’ ‘자본론’ ‘유물론’ 같은 70여권의 책이름이 나온다. 종교, 철학, 문학서적을 두루 읽었음을 알 수 있다. 다독은 물론이고 책에 대한 욕심도 대단했다고 한다. 칸트가 지은 ‘실천이성비판’은 일본 유학생으로부터 쌀 한가마니를 주고서 손에 넣었다고 전해진다.
영주는 의학서적 또한 열심히 읽었다. 자신의 몸이 아팠기도 했지만 인체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의서를 탐독하다보니 자연 인체에 우주의 신비가 들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맏상좌 천제 스님은 이렇게 들었다고 한다.
“성철 스님은 약에 대한 지식이 전문가 못지않았다고 들었다. 출가하기 전부터 ‘동의보감’ ‘본초강목’ 등을 읽으셨고 웬만한 병은 처방전을 내려줄 정도였다고 한다. 먼 길 떠나는 도반이나 몸이 약한 제자들의 약도 손수 지어주셨다. 아마 속가에 계셨으면 용한 한의사가 됐을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유학생과 학자들을 만나고 도서관을 전전하며 책을 실컷 읽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집안이 윤택하여 돈 걱정이 없었고, 한문과 일어에 능통했기에 영주의 ‘독서여행’은 막힘이 없었다고 여겨진다.
삶에 대한 근원적인 해답을 얻고 싶었지만 동서고금의 책들은 읽을수록 혼란스러웠다. 영주가 읽은 책을 살펴보면 군데군데 ‘영원한 삶’ 같은 낙서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영원히 사는 길, 즉 구원에 목말라 있었음을 암시하는 방황의 흔적들이었다.
천제 스님의 증언에 따르면 청년기의 성철은 영원한 행복과 자유를 찾기 위해 몸에 비상(砒霜)을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인간에게 현세를 떠난 또 다른 세계가 없다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는 생각으로 진리를 찾아 헤맸다는 것이다. 영주는 대숲에서 생각에 잠겼다. 또 집 앞 바위에 앉아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흰 얼굴에 눈이 큰 영주는 그림 속에서 나온 사람 같았다. 마을 사람들은 수근거렸다.
“참말로 이곳 사람은 아니구먼.”
그러던 어느 날 한용운 스님이 해설을 붙인 ‘채근담강의(菜根談講義)’를 읽었다. 그리고 한 군데에 눈이 딱 멈췄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으니
종이와 먹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펼쳐 여니 글자 한 자 없으나
항상 큰 광명을 비친다
아유일권경 (我有一卷經)
불인지묵성 (不因紙墨成)
전개무일자 (展開無一字)
상방대광명 (常放大光明)
글자가 한 자도 없는 경이 과연 무엇일까. 영주의 마음이 움직였다. 그것은 여느 지적 호기심과는 달랐다. 성철은 그때의 감동을 이렇게 말했다.
“이 글귀를 읽으니 참 호기심이 많이 났습니다. ‘아마 그럴 것이다. 종이에다 먹으로 설명해 놓은 것 가지고는 안 될 것이다. 종이와 먹을 떠난 참 내 마음 가운데 항상 큰 광명을 비치는 경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글자 한 자 없는 경을 읽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 영주는 이미 불교에 물들어 가고 있었다. ‘채근담’의 경구들은 이미 불법에서 많은 것을 따왔기 때문이다. 아마 다음과 같은 글을 보고도 영주는 깊은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고요한 밤 종소리를 듣고
꿈 속의 꿈을 불러 깨우며
맑은 못의 달그림자를 보고
몸 밖의 몸을 엿보는도다.
청정야지종성 (聽靜夜之鐘聲)
환성몽중지몽 (喚醒夢中之夢)
관징담지월영 (觀澄潭之月影)
궁견신외지신 (窺見身外之身)
그럼에도 ‘글자 없는 경’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영주는 공맹의 ‘가르침’에서 노장의 ‘은유와 성찰’로 눈을 돌렸다. 성철이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배움을 위해서는 날마다 더하고, 도(道)를 위해서는 날마다 덜어내라(爲學日益 爲道日損)’는 글귀를 법문에서 자주 인용한 것을 보면 젊은 날 의식의 흐름을 유추해 따라가 볼 수 있다. 도는 학문 속이 아닌 학문 저 편에 있었다.
영주는 특히 ‘장자’를 읽으며 무위자연의 세계를 거닐었다. ‘도(道)는 들을 수도, 볼 수도, 말할 수도 없다. 듣고, 보고, 말 한다면 도가 아니다’는 ‘지북유편(知北遊篇)’을 곱씹었다. 그리고 장주(莊周)의 ‘소요유(逍遙遊)’를 흉내 냈다. 장주는 세상의 명리를 버리고 자연 속에서 구름을 타고 바람을 부르며 유유자적했다. 상상력을 확장시켜 상식을 희롱했다. 장주는 또 세상의 아름다움과 추함, 귀함과 천함,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을 지우고 자유를 획득했다. 그럼에도 장주의 자유에는 ‘영원함’이 빠져 있었다. 영원한 자유를 찾으려는 영주에게는 무언가가 아쉬웠다.
그러던 어느 날 묵곡리에 노승이 찾아들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279호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