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곳으로 경관이 빼어나다. 뒤로는 산세가 수려한 금련산이 있고 앞으로는 광안리해수욕장이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해의 명승지이다.
조선시대에는 경상좌도 수군절도사영이 있어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수영이란 지명도 수군절도사영의 준말이었는데 현재의 지명으로 굳어졌다.
수영공원 비림.늘 이야기하는 말이지만 우리민족의 과시욕은 다른 나라의 추종을 불허한다. 고을마다 넘쳐나는 선정비, 탐관오리는 어디로 갔는가?
수영성은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낙동강 동쪽에서 경주(慶州)까지의 우리나라 동남해안을 방비했던 해군(海軍)의 본영(本營)인 경상좌도(慶尙左道) 수군절도사영(水軍節度使營)이 있던 곳이다. 이 성문은 지금의 자리에서 200m쯤 떨어진 수영동(水營洞) 286번지(옛 수영국민학교자리)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으로 지금은 다 허물어진 채 홍예석(虹 石)만 남아 있다.
좌수영지(左水營誌)』에 의하면, 수영성은 동서남북 네 곳에 성문이 있어 동문(東門)을 영일문(迎日門), 서문(西門)을 호소문(虎嘯門), 남문(南門)을 주작문(朱雀門), 북문(北門)을 공진문(拱辰門)이라 하였는데, 남문이 6칸으로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나타난다.
남문 문루 위에는 큰 북을 달아두고 쳐서 시각을 알리며, 이에 맞춰 성문을 여닫았었다는데, 문바깥 양쪽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박견을 배치한 것이 특이하다. 박견(拍犬)은 조선개를 말하는데 도둑을 지키는 개를 성문 앞에 둔 것은 왜구의 동태를 감시하던 이 성의 임무를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성문의 건립연대는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동래(東萊) 감만이포(戡蠻夷浦)(남구(南區) 감만동(戡蠻洞))에 있었던 좌수영이 울산(蔚山) 개운포(開雲浦)로 옮아갔다가 임진왜란 전에 이곳에 옮겨지고, 인조(仁祖) 13년(1635)에 다시 감만이포로 옮겨졌다가 그곳이 왜관(倭館)과 가까워 효종(孝宗) 3년(1652)에 다시 이곳으로 옮겨진 것으로 나타나 1652년경으로 짐작된다.
수영고당.
이 당산은 ‘고당(姑堂)수영할매당’, ‘산정(山亭)머리할매당’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수영성 아래 마을의 마을 수호신격으로 존재해왔다. 이곳에는 옛날부터 이곳을 지키는 서낭당이 있었는데 그 역사는 400여년 전으로 추측된다. 전에 있던 당집은 오래되어 허물어져 김을배 씨에 의해 건립되었다.
당집의 처마 밑에는 성주신당(城主神堂)이라는 팻말이 붙어있고 안쪽의 제단에는 용을 그린 오래된 대장기가 제단에 세워져 있다. 대장기를 모신 왼쪽 제당에는 독신묘(纛神廟)라 써붙였다.
당제를 지내기 위해 마을 사람들 중에 부정을 타지않은 사람들 3 ~4인을 골라 유사를 시키고 이들이 제수를 마련하여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제사를 지내는데 성주신당→독신묘→곰솔나무 즉 송씨할매제→독신제→당산나무의 순으로 제가 치뤄지나, 1960년대 이전에는 송씨할매제→돇니제→먼물샘제→거릿대제의 순으로 치루어졌다.
송씨할매당의 신격에 대한 설화로는 일제 때 수영동에 살고 있던 송씨 할매가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일본 군인의 희롱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 송씨 할매가 일본 군인을 대적하여 과감하게 싸워 그를 물리치고 나무를 하여 집에 무사히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 뒤 송씨 할매가 죽자 그녀의 그 장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당을 세워 송씨 할매를 모시게 되었다고 하는 전설과 또 한편에서는 조선시대에 수사(水使)가 있을 때부터 산신제를 지내오던 것이라는 설이 있다.
수영곰솔(천연기념물 270호).곰솔은 소나무과로 잎이 소나무 잎보다 억세기 때문에 곰솔이라고 부르며, 소나무의 겨울눈은 붉은 색인데 반해 곰솔은 회백색인 것이 특징이다. 바닷가를 따라 자라기 때문에 해송으로도 부르며, 또 줄기 껍질의 색이 소나무보다 검다고 해서 흑송이라고도 한다. 바람과 염분에 강하여 바닷가의 바람을 막아주는 방풍림이나 방조림으로 많이 심는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좌수영(左水營)이 있었는데 그 당시 군사들은 이 나무를 군사를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신성스런 나무로 여겨 나무에게 자신이 무사하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옆에는 신을 모셔 놓은 당집과 장승이 서 있고, 앞쪽에는 곰솔 한 그루가 더 있다.
부산 수영동의 곰솔은 나이가 4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23.6m, 둘레 4.50m로 현재 수영공원 안에 있다. 땅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지는 부분까지의 길이가 7.0m에 이르며 껍질은 거북의 등처럼 갈라져 있다.
수영 푸조나무(천연기념물 311호)는 따뜻한 지방에만 자란다. 곰솔, 팽나무와 함께 소금기가 섞인 바닷바람을 잘 견디기 때문에 해안에 심어 바닷바람을 막아 주는 방풍림에 적당하다. 팽나무와 비슷해서 곳에 따라서는 개팽나무 또는 검팽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전체적으로 옆으로 기울어져 자라는데, 줄기에는 상처의 흔적이 있고 혹이 발달해 있다. 줄기의 끝은 죽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위엄있는 모습이다. 이 나무의 유래는 알려져 있지 않고, 마을을 보호해 주는 신으로 여겨지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나무에 할머니의 넋이 깃들어 있어 나무에서 떨어져도 다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안용복 사당
안용복은 독도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일본에 확인시켰다.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수군에 들어가 능로군(能櫓軍)으로 복무했으며, 왜관(倭館)에 자주 드나들며 일본말을 익혔다. 1693년(숙종 19)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일본어민이 울릉도에 침입하자 이를 막다가 부하 박어둔(朴於屯)과 함께 일본으로 끌려갔다. 이때 에도 바쿠후[江戶幕府]에게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주장하여 바쿠후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영토임을 확인하는 서계(書啓)를 받았으나 귀국 도중 나가사키[長崎]에서 쓰시마도주[對馬島主]에게 서계를 빼앗겼다.
같은 해 9월 쓰시마도주는 예조(禮曹)에 서계를 보내 울릉도(일본명은 다케시마[竹島])에서 조선어민의 고기잡이를 금지시킬 것을 요청했다. 이에 조선정부는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분명히 밝히고 외딴 섬에 왕래를 금지하는 공도정책(空島政策)에 일본도 협조할 것을 요청한 예조복서(禮曹覆書)를 보냈다.
1696년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중 다시 일본어선을 발견하고 마쓰시마[松島]까지 추격하여 영토 침입을 꾸짖었으며 스스로 울릉우산양도감세관(鬱陵于山兩島監稅官)이라 칭하고 하쿠슈[伯州] 태수로부터 영토침입에 대한 사과를 받고 귀국했다.
귀국 후 사사로이 국제문제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사형을 당할 위험에 처했으나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의 도움으로 귀양을 가는 데 그쳤다. 1697년 대마도주가 울릉도가 조선땅임을 확인하는 서계를 보냄으로써 조선과 일본 간의 울릉도를 둘러싼 분쟁은 일단락되었다.
우리의 성은 박견.수군, 할미가 수호한다. 그런 나라가 조선 우리나라였다.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미신으로 치부하는 분들은 어디서 오셨는가? 민속신앙도 문화재 문화유산으로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해안지방, 평야 지대, 산골의 민속신앙을 두루 섭렵하여 작은 자료집 한 권 발행 하고픈데 꿈으로 그칠른지...
2008.07.27
출처:다음 백과사전.문화재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