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관한 시모음 82)
여름이 깊으면 /정심 김덕성
장맛비가 내린다
유월의 이별의 눈물인 듯이
지난 날 상춘객을 기다리던 벚꽃
꽃비 되어 곁을 떠나가고
계절의 여왕이 군림
화려함을 자랑하던 붉은 장미도
아카시아도 달콤한 사랑을
꿀벌에게 주고 떠난 빈 거리
신록의향연이 열리고
희망을 심은 활기 찬 내일을 향해
초록을 물들이며 덮은 산야
무겁게 오는 칠월
여름이 깊어지면
타는 듯 태양의 불같은 폭염으로
시상(詩想)도 떠오르지 않으니
여름휴가를 떠나고 싶다
한 여름에 /오보영
멈춰 서있다
바람도 나무도
까치도
그늘마저도 잠들어 있는
산책길에서
혼자
몰려드는 생각
쏟아붇는 햇살 붙잡고
씨름을 한다
여름을 잘 지내려면 /차영섭
여름을 잘 지내려면,
봄을 무사히 잘 보내야 해
봄은 어린 시절이고,
여름은 뙤약볕에 땀처럼
한창 성인시절이거든,
성인시절인 여름에 땀을 흘리며
은근과 끈기로 열심히 이겨내면서
열매를 부지런히 키우고 잘 관리해야
가을과 겨울의 풍요를 즐기거든,
덥다고 그늘 속에서 게으르면,
가을 겨울이 배고프고
봄이 허약해서 삶이 고달픈 거야
긴 장마와 가뭄, 태풍과 무더위를
슬기롭게 이겨내야 하는 거야.
여름의 일 /나태주
안녕!
기분이 좋아진 나는
하늘에게 구름에게
지나는 바람에게 울타리 꽃에게
인사를 한다
안녕!
문간 밖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있는
순한 얼굴의 개에게도
인사를 한다
너도 안녕 !
여름 정원 /김이강
그의 허리에 묶여 있던 리본이
잎사귀 그림자들과 함께 흔들리고 있다
벤치에 앉아 그런 걸 보고 있으면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장마 같고
우린 산더미처럼 쌓인 이야기들을 향해 걷는데
그런 것들은 항상 비가 온 후의 물방울들 같고
가까운 미래들이 반음계씩 내려가면
다시 이 숲에 이르게 된다
그가 돌아서서 벤치로 왔을 때
작고 꿈틀거리는 달팽이 같은 걸 상상하며 손 내밀었을 때
내게 올려줄 것이
그저 맨손인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다시 온 여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손을 맞잡은 숲의 계단은
기하학적으로 겹치었다가 분열하는 것이었는데
반도네온처럼 사뿐히 늘어나고 나면
다른 세계의 무릎 위로 옮기어질 일만 남은 것 같고
여름은 오고
잎사귀는 검고
벤치에 앉아 이런 걸 생각하고 있으면
아직 이르지 못한 이야기 같고
옮기어진 달팽이를 오래 구경한다
그가 내게 손을 뻗을 것이다
칠팔월 /문태준
여름은 흐르는 물가가 좋아 그곳서 살아라
우는 천둥을, 줄렁줄렁 하는 천둥을 그득그득 지고 가는 구름
누운 수풀더미 위를 축축한 배를 밀며 가는 물뱀
몸에 물을 가득 담고 있는, 불은 계곡물
새는 안개 자욱한 보슬비 속을 날아 물버들 가지 위엘 앉는다
물안개 더미같이, 물렁물렁한 어떤 것이 지나가느니
상중에 있는 내게도 오늘 지나가느니
여름은 목 뒤에 크고 묵직한 물주머니를 차고 살아라
여름(夏) 단상(斷想) /태안 임석순
한여름
찌다가 덥다가
부채로 더위를 식히려
부채질하는 게 아니라
겉 폼 잡으려 한다.
여름이 무섭다.
기후변화, 인간의 욕심이 불러오는
장마, 태풍, 폭염 두려워 무서워
겉 폼 잡으려 한다
여름이 무섭다.
한여름
여름냉면이 좋다
하늘이 흐려 시원한 비가 와서 좋다
맑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 더욱 좋다
겉 멋을 잡으려 한다.
여름이 무섭다.
여름 햇살 /남대희
개울물
아랫마을
마실가는데
여름 햇살
아장아장
따라나서다
징검다리
폴짝
건너뛰려다
개울물에
퐁당
빠져 버렸어
꼬르륵
거품 내며
잠수하다가
소금쟁이
발목 잡고
기어 나와요
보글보글
물거품 터질 때마다
톡톡톡톡
튀어나온
싱싱한 햇살.
송사리 떼 화들짝
산그늘 숨고
개울물 갸울갸울
터진 웃음보.
비 오는 날 여름이면 /박희자
아버지께서
넝쿨마다 열린 애호박 몇 덩이 따오면
부엌에는 금세 손과 마음이 즐거운
어머니 뒷모습이 있었다
기름 두른 무쇠솥뚜껑에서
보드라운 애호박 익는 냄새가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 담을 넘을 때
아홉 식구 한자리서 웃음 마주 보며
어머니 사랑을 안으로 또 안으로 밀어 넣었다
술 한 잔 못하는 어머니는
보름달 닮은 애호박전을 접시에 올려놓고
보름달처럼 둥근 지어미 사랑을
빈 술잔에 둥글둥글 채웠다
나는 비 오는 여름날이면
막걸리와 애호박 사는 버릇이 있다
어머니처럼 둥근 지어미의 마음을
아직도 닮고 싶은지
여름 열정 좋아 /노정혜
봄은 가고 여름 왔다
봄 좋아 돌아가려니
길 없네
하늘 부르심 받고 가신 우리 부모
자식 보고 싶어
그리워도 그리워도
돌아올 길 없네
지금지금
내가 그리고 있는 길
내 아이들 길
나는 나는
산 들 계곡 물 아픔 기쁨 괴로움
어우러 진 그림 그린다
봄 가고 여름 왔네
생기로운 초록길
참 좋아
열정 떠거운 여름 좋아
여름아 떠거워라
가을 풍성하게
산 새 들 새 산 짐승
배 불러 노래하는
열정 떠거운 여름 좋아
열정이 가을 곳간 배 부르다
그해 여름 /곽재구
그해 여름 산수동 오거리에 새 교회가 서고부터
사람들은 잃었던 빛과 희망을 꿈꾸었다
다섯 갈래 여섯 갈래 찢겨진 마음들도 다시 돌아와
조용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당신의 그날이 올 것을 꿈꾸었다
장중하게 쌓아올린 높은 벽과 은빛 십자가에
지나간 시절의 어둠과 고통을 함께 묻었다
땀과 먼지로 뒤범벅된 행상에서 돌아와 바라보면
몇 층인지도 모를 은빛의 교회는 우뚝 서 있고
사람들은 이 거리에 번져나갈 녹슬지 않은
절대의 푸른 종소리를 생각했다
그 여름내 희망을 간직한 사람들은 행복하였고
은빛의 십자가는 더욱 은빛으로 높이 치솟았다
구름과 새와 치솟는 햇살이 사람들의 가슴속
깊은 꿈과 하늘 높은 곳에서 만났다
그러나 끝내 사람들은 불안하였다
그 긴 여름 고단한 저녁상에 놓인
한 그릇의 밥과 열무김치 앞에서 사람들은
당신의 옛 주인이 산상과 호수와 초원에서 자유롭게
희망을 나누어주던 옛 추억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해 여름 산수동 오거리에 육중하고 튼튼한 교회가 서고부터
오거리의 양떼들은 울 안의 양떼와 울 밖의 양떼로 갈라서게 되었다
아무도 울 밖의 양떼를 양떼라 부르지 않았다.
저무는 여름 /이원문
저문다 해서
여름만 저물겠나
보내야 하는 한계절
방초잎부터 다르고
어느 것은 씨앗 맺어
이 더위에 영글린다
절기를 따르는가
아니면 세월인가
녹두 씨 알차게 들어서니
벼 패기에 참깨꽃
며칠 있어 씨 맺을까
하루가 다르게 느끼는 마음
말복에 보름이면
아침 저녁이 다르고
그 다음 옷 갈아 입으니
손은 그만두더라도
발 담근 물 차갑지 않겠나
얕은 구름 높아라
높아진 하늘 높이
구름 흩어질 것이고
매미 울음에 숨은 가을
그 매미 울음 멎게 할까
커가는 감나무의 감
절기의 밤송이도 하루가 다르다
막바지 여름 /황다연
바다는 하늘의 거울
하늘은 바다를 품는다
코끼리 바위 용왕님
하얀 물거품 밀어 올리면
아~탄성의 소리
바닷가에 줄지어 섰어
태양 바라기 하던 해바라기
갈매기 멋진 날갯짓이 부러운 듯
일제히 바다로 향한 시선
막바지 여름
건져 올리는 계절의 시간을 잊고
어이 둥둥
여기가 극락일세
여기가 극락일세
노래 부르네
여름이 간다 /최병무
常夏의 나라에서
당신,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고
안부를 받았는데
돌아와 보니
이 나라의 폭염이
더 폭군이다
한겨울에 나는
그대를 그리워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는 안다, 한줄금 소나기가
당신을 몰아낼 것을
당신은 벌써 退位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여름 여자 /김금아
여인의 하얀 이마 위로
붉은 지붕이 점점이 박혀 있다
눈꺼풀이 달린 문을 열면
까만 현무암이 박힌 눈동자에
수레국화들이 활짝 피어난다
해안에 반쯤 잠긴 젖가슴,
파도가 밀려와 때릴 때마다
해발 칠백 미터 봉우리가 솟았다 사라진다.
여자의 등을 내리꽂은
칼바위들,
머릿결이 파도에 문살무늬를 그으며 일렁인다.
몸뚱이가 걸쳐진 암녹색협곡에
파도가 짐승울음을 끊임없이 토해내며
바닷물을 끊이고 있다.
여인의 갈라진 둔부 사이에
검은 섬 두 개가 마주보고 서 있다
은둔자를 실은 목선 한 척이
둔부 사이로 들어와
뜨거운 포말을 일구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