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씨가 희망입니다/사 6:13
출 처| 백구영목사
얼마 전, 비 오는 날 택시를 탄일이 있었습니다.
차가 밀려 서대문 네거리까지 가는데 15분이 걸렸습니다. 차안에 무료함을 메꾸려고 기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아저씨, 요즈음은 교통체증 때문에 힘드시지요? 손님들도 별별 사람 다 있을테고요"
기사는 힐긋 거울로 뒤를 보고 나서는 "사장님, 그렇지 않습니다. 좀 교통체증이 있기는 해도 차는 굴러가고요, 별별 손님들을 대하는 일도 즐겁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 흔히 "말해 뭐 합니까? 웬놈의 차가 이리도 많은지… 또 별별 사람 다 있지요" 하는 것이 보통인데 뜻밖에 이런 대꾸가 저를 놀라게 했습니다.
저는 뜻밖에 대답에 "아, 그러세요" 하니 기사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제가 사람들을 겪어 보니 90%는 좋은 사람들입니다. 30%는 원래 좋은 사람들이고, 60%는 제가 잘해주면 좋아지는 사람들이고, 나머지 10%는 잘해줘도 안되는 사람도 있습니다. 종자가 나쁘면 어쩔 도리가 없나봅니다."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철학자가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저씨 이제 보니 철학자시네요" 하니까 "허허, 그렇습니까?" 하면서 너털웃음을 웃는 것입니다.
저는 택시에서 내려서도 내내 그의 말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도 씨입니다.
이사야 6:13절의 말씀은 선지자 이사야의 묵시입니다.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을 지라도…" 하신 말씀은 북쪽의 10지파인 북 왕국 이스라엘이 침략자들에게 멸망할 것을 예언하고 남은 두 지파 중 베냐민은 유명 무실한 잔악한 지파였으므로 유다 지파 하나가 1/10의 구실을 하지만 그 유다 왕국 마저 멸망할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라는 말씀은 남북 왕국이 하나님을 떠나 멸망 받게 되는 것은 불가피 하고 남아 있을 지파는 없을지라도 "그 그루터기" 즉 최후까지 믿음을 지켜 남은 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요한복음 12:20-26절의 말씀은 주님께서 고난의 때가 되었음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헬라인 몇이 주님을 뵈옵고자 한다는 말을 들으시고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 고 하셨습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진군의 나팔소리가 하늘에서 들리는 듯 가슴이 뛰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생각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영광"을 인자의 세계 군림으로 생각했으나 주님은 "영광"을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심으로써 십자가의 구속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살리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거룩한 씨의 비밀이 있습니다. 본문에는 세상을 이길 세 가지 비밀이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은 이 거룩한 씨가 될 수 있는 원리를 생각해 보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생명은 죽음에서 온다는 원리입니다.
요한 12:24절에 보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이 거룩한 씨가 되어 죽으셔야 인류가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 사회에서도 통용 될 수 있는 생명을 얻는 원리가 됩니다.
밀알은 안전하게 보전되어 있는 한 10년이 지나도, 100년이 지나도, 1000년이 지나도 한알 그대로입니다.
씨는 땅에 들어가 썩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도 아무런 효력도 나타낼 수 없습니다.
씨는 썩어야만 새 생명을 돋아나게 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평범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창조하는 유일의 원리입니다.
무슨 일이든지 죽을 각오로 하면 안될 일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자신의 고집과 주장을 묻어 버려야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장자의 글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목수의 명인이 제자를 데리고 재목을 구하러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얼마쯤 가다가 거대한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를 보자 제자는 "저기 훌륭한 재목이 있습니다." 하고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목수는 힐끗 한번 바라보고는 그냥 지나갔습니다. 제자는 "왜 저렇게 좋은 재목을 그냥 모른 채 하십니까?" 이때 목수는 "바보 같은 소리 말아라. 그 나무는 재목이 아니라 쓸모 없는 산목이다. 재목은 일찍 눈에 띄어 다 베어가고 쓸모 없는 산목은 저 자라고 싶은 대로 자라 쓸모가 없기에 베어 가는 사람이 없어 저렇게 큰 것이란다." 했다는 것입니다.
재목은 일찍 베어져 임금님의 옥좌도 되고, 공주의 침상도 되고, 규중의 자개장도 되는 것입니다.
재목은 일찍 베어져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나 산목은 거대하게 자라기만 해 마침내는 속이 썩고 흉한 고목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적당히 하고, 공부를 해도 적당히 하고, 운동을 해도 적당히 해 가지고는 안전한 산목이 될지 몰라도 생명의 변화를 가져 올 재목은 될 수 없습니다.
죽도록 신앙 생활을 해야 큰복을 받고, 죽도록 공부를 해야 대성하고, 죽도록 운동을 해야 4강의 신화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둘째, 생명의 보존은 버리는 것이라는 원리입니다.
요한복음 12:25절에 보면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하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기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란 이기심과 자기 안전에만 집착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의 행동의 동기는 자기 이익, 자기 안전, 자기 성취입니다.
그러나 생명 보전의 원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공공의 이익, 공공의 안전, 공공의 성취가 행동의 동기가 됩니다.
어느 교육자는 요즈음 부모들은 자녀들의 개성을 키워준다는 구실로 자녀들에게 자기 만족, 자기 보존, 자기 발전, 자기 향락과 자기 존대의 사상만 키워주고 있다고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인격을 존중하는 것은 좋으나 자칫 잘못하면 독선적이고 자기 과대 망상에 사로잡혀 세상은 나를 위해 있고, 바람도 나를 위해 불고, 지구도 나를 위해 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나 자신, 내 가족, 내 소유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공적 손실, 공적 소모에 대한 무관심이 만연해 있습니다.
독일 빌헬름 하벤 군항엔 한 수병의 동상이 먼 북해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에는 "한알의 밀이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썩지 않으면 한알 그대로 있느니라" 프란츠 에카르트 수병,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동상은 독일이 패전하고 수많은 부상병들과 패잔병들과 흩어져 살던 독일인들을 싣고 귀향하던 수송선이 안개 짙은 해안에서 거대한 화물선과 충돌 직전에 자신의 몸을 날려 충돌을 완충시키므로 많은 생명을 구한 한 수병의 애국심을 기려 세운 동상입니다.
긴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이제는 노인이 된 그때 그 병사들이 자녀 손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꽃다발을 들고 이 동상을 찾고 있으며 그 가운데는 독일 수상을 지낸 브란트도 끼어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증거는 세계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셋째, 존귀는 섬김에서 온다는 원리입니다.
요한복음 12:26절에 보면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존귀는 부와 권세와 지위와 지배에서 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오래 오래 사랑과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지배가 아니라 섬김에서 오는 것입니다.
지배력이 세상에서 하나의 능력인 것 같이 섬김은 주안에서 하나의 영적 능력입니다.
요즈음 나라에 국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무급 봉사자인 도우미가 몇대일의 높은 경쟁률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매우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벽시계 같은 봉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벽시계는 벽에 반듯이 걸려 있을 때만 시간을 맞추는 시계입니다. 팔목시계 같은 봉사가 되어야 합니다. 팔목시계는 언제 어디서나 어떤 위치에서도 시간을 맞추는 시계이기 때문입니다.
옛글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랫자리에 있으면서 윗사람의 신임을 받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리지 못한다. 그러므로 윗사람의 신임을 받는데 길이 있다.
친구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윗사람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친구의 신임을 얻는데 길이 있다.
부모를 섬겨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하면 친구의 신임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모를 섬겨 기쁘시게 하는데 길이 있다.
스스로 반성하여 성실하지 못하면 부모를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성실하게 하는데 길이 있다.
무엇이 옳은가를 구별할 줄 모르면 성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실은 하늘의 도이고 성실 하려는 노력은 사람의 도이다." (공자)
주님께서도 일찍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기 위해 새로운 가치관을 주셨습니다.
세상은, 영광을 정복, 권세, 통치로 해석했으나, 주님은, 영광을 십자가, 희생, 대속, 부활로 보셨습니다.
세상은, 생명을 사랑하는데서 보존된다고 믿으나
주님은, 생명을 버리는데서 보존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은, 존귀를 지배에 있다고 생각하나
주님은, 존귀는 남을 섬김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말씀들이 새로운 말씀이 아니라 자연과 인간 사회 속에 지극히 기초적인 상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원리를 기본적인 상식으로 받아 드리기에는 인간들은 너무나도 기본에서 멀리 벗어나 이기심의 화신이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기초적인 원리를 믿고 행하는 사람이 거룩한 씨입니다.
그리고, 이 거룩한 씨가 내일의 희망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세상에서, 이 거룩한 씨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