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돼요! 절대로 안돼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거리 한복판, 금발벽안의 신관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를 지르자 모두들 그 광경으로부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큰 소리에 분수대에서 목욕하고 놀던 새하얀 비둘기까지 일제히 하늘 높이 날아가 푸른 하늘에 파도가 치는 것 같은 장관을 만들었지만, 소란은 끝나지 않았다.
“피리아, 이 카페에서 끼니를 해결한다니까? 이 카페가 무려 반값 할인을 하잖아? 네 주머니 사정 생각해 준거라고.”
“이 카페가 이 마을의 명소래요. 음료와 음식 다 맛도 좋고, 가이드북에 따르면 3대가 운영하고 있다잖아요. 거짓 소문이 아니에요. 장사가 얼마나 잘되면 3층 카페를 운영하겠어요?”
“그 카페는 안 된다고요!”
오늘도 리나 일행이 다크스타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여정을 계속하던 중, 어느 마을에서 쉬어가게 되었다. 마침 그 마을의 유명 카페에서 할인 이벤트를 열었고 피리아를 제외하고 다들 그 카페로 가자고 의견이 통일 되었다.
“야, 피리아! 너 우리를 멋대로 세계를 구하는 예언이니, 뭐니 끌고 왔으면 밥은 굶기지 말아야지! 난 지금 배가 고파! 그렇지 가우리?!”
“리나 말이 맞아! 나 아까부터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어서 분수의 물이라도 들이킬 뻔했다고…….”
“보세요, 피리아님! 저 가련하고 굶주린 영혼들을요! 이 상황은 정의가 아니에요!”
리나와 아멜리아는 사람들을 피해 피리아를 마을 구석으로 끌고 가 협박과 설득을 번갈아 시도했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저는 입장을 못하잖아요!”
피리아가 허리에 손을 얹고 째려보자 그들은 주춤거렸다. 다행히 이 말에 반박할 정도로 양심이 바닥난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 기세를 몰아 말을 이어갔다.
“유명 카페에 식사? 좋아요! 반값 할인? 환영이에요! 그런데, 입장 조건이 2인 커플이면 전 어쩌라는 거예요?!”
피리아가 카페를 향해 삿대질을 했다. 커플 할인 이벤트를 하는 카페답게 안팎으로 남녀노소 구분 없이 커플들이 환하게 웃으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카페 주인은 사랑이 분홍색이라는 신념을 세상에 전파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하여 분홍색 벽지, 흰 지붕, 분홍빛 음료와 디저트, 흰 메뉴판, 분홍빛 간판, 흰색과 분홍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 카페에 자라는 잔디까지 분홍색이었다. 저 카페 근방은 다른 차원인 것처럼 핑크빛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여러분의 사랑을 응원하는 것과 별개로 이 여정에 끌어들였으니, 여러분에게 위험이 닥치지 않게 지켜볼 책임이 있다고요.”
“우리가 애냐? 식사 시간에 목숨 간수 못하게? 네가 먹을 거 포장해서 사올게.”
“맞아요. 리나 언니와 가우리 오빠는 밥 먹을 때는 마왕조차 건드릴 수 없다고요.”
“싫어요! 저만 빼놓고 사랑을 할 거면 그 사랑을 지켜볼 수 있게라도 해달라고요! 저 혼자 밖에서 먹으면 심심하다고요!”
“결국 본심은 스토커 짓이군. 그거 네가 그렇게 싫어하는 제로스가 즐겨하는 짓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
“뭐라고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제로스와 자신을 동급으로 보는 제르가디스에게 피리아는 화로 얼굴을 시뻘겋게 붉어졌다. 그녀는 단숨에 제르가디스에게 다가가 이빨을 드러내며 화를 냈다. 거의 입밖으로 불을 뿜을 뻔했다.
“우리 드래곤과 마족의 관계, 그리고 제가 그 음식물 쓰레기를 싫어하는걸 잘 알면서도 잘도 그런 말을 하세요?!”
“미안하군.”
여기서 무슨 말을 덧붙여도 제로스와 관련 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피리아가 물고 늘어질 것이 뻔했기에 제르가디스는 순순히 사과했다. 정말로 미안해서라기보다는 귀찮은 말다툼을 피하고 싶은 뚱한 얼굴이지만 피리아는 받아 들였다. 그가 악의를 가지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걸 알기에 골드 드래곤다운 자비로운 얼굴로 미소 지었다.
“앞으로 조심해요. 전 이 세상에 좁쌀만큼도 이바지하지 않고, 이 신성한 여정에 꼽사리 낀 주제에 자기 할 일만 하고 훌쩍 사라지는 것도 모자라, 있을 때는 그저 치매에 걸린 게 분명하면서 비밀주의로 자신을 포장하여 중요한 정보는 말도 안 하고, 돈도 보태주지 않으며 그야말로 쓸모라고 하나도 없는 어떤 뺀질이 얌체 마족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선하고 유능하며 고귀한 골드 드래곤이니까요.”
“피리아님도 참, 매일매일 제로스님을 비난해도 그 소재가 떨어지지 않는 것도 어떻게 보면 대단한 의지네요.”
“우리 할머니가 그런 건 바가지 긁는 아내라고…….”
“가우리님!”
가우리의 말실수에 다시 날뛰는 피리아를 지켜보며, 모두들 이 자리에 제로스가 없어서 그녀 하나만 이러는 게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안도했다. 여기에 제로스까지 있었으면 말다툼은 반나절 내내 이어지고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피리아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들은 다시 카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럼 카페로 가자!”
제르가디스가 손안에 피리아의 분홍색 지갑을 들고 외쳤다. 당황한 피리아가 자신이 지갑을 넣어놨던 주머니를 확인하는 동안 그들이 재빨리 뛰어갔다. 리나는 가우리의 손을 잡고 달렸고, 잠시 이래도 되나 고민하는 아멜리아는 제르가디스가 팔짱을 끼고 달리기 시작했다.
“어, 언제 제 지갑을……!”
“아까 널 그 녀석과 엮을 때 슬쩍했어. 저 카페가 3대에 걸쳐 운영했는데 소문에 따르면 고서가 있다고 하거든, 꼭 가야해.”
“피리아님, 죄송해요. 이번 한 번만 정의보다 제 사랑을 따를게요!”
“너도 들어오고 싶으면 아무 남자나 여자 붙잡아서 일일 커플이 되어 달라고 의뢰를 넣던가!”
“드디어 밥이다, 밥!”
피리아는 멀어지는 동료들을 붙잡지도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너무해! 다들 너무해!”
화룡왕을 모시는 신관복을 입은 어른이 대낮에 눈물콧물을 훌쩍여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를 흘끗거리며 시선을 주면서도 각자 볼일을 보러 갔다. 피리아도 한참 울다가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르자 훌쩍거리며 분수 앞 벤치에 앉았다.
“남자가 없는 게 제 잘못도 아닌데, 저도 근사한 남자랑 커플 동반으로 가고 싶은데 없는걸 어떻게요. 그리고 절 빼놓고 먹는 밥이 맛있을 것 같아요?”
맛있을 것이다. 산처럼 쌓은 접시에 부스러기 하나 남기지 않고 잘 먹을 것이다. 먹는 순간만큼은 홀로 눈물을 찔끔거리는 자신을 까맣게 잊는걸 넘어, 당장 다크스타가 강림해도 맛있는 건 끝까지 다 먹고 싸울 것이다. 동료들은 능히 그러고도 남을 이들이니까.
외로이 울던 피리아는 다른 간단한 요깃거리라도 사먹을 돈은 되지 않을까 주머니 속 여분의 동전을 세어보았다. 지갑이 도난 당할 때를 대비해 동전을 옷 여기저기에 감춰 놓은 덕분에 어디 고급 식당에서 우아하게 식사를 하고 여관을 잡을만큼 돈이 나왔다. 피리아는 다시 돈을 갈무리하며 화룡왕이 조각된 대리석 분수를 바라보았다.
피리아가 이 마을에 오기로 결정한 이유가 하늘 높이 시원한 물을 뿜고 있는 분수 때문이었다. 이 마을은 화룡왕을 믿는 마을이고 화룡왕을 위해 이 아름다운 분수를 만들었다. 이 분수 자체가 화룡왕의 불꽃같은 위엄을 잘 살린 예술 조각인데, 이름난 조각가가 만들어 더 유명세를 타 이 마을의 명물 중 하나가 되었다. 분수에 동전을 던져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도 있고, 관광객이나 마을 사람들이 분수에 넣은 동전은 해마다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부했다.
마침 화룡왕님에게 기도드릴 시간이고, 관광지에서 동전 하나를 바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피리아는 동전 중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것을 골라 양손을 모아 경건하게 기도했다. 먼저 세계의 안위와, 골드 드래곤으로서 수호의 의무를 다할 수 있고, 동료들이 다치거나 아프지 않게 빈 후 사적인 소원을 덧붙였다.
“화룡왕님, 제발 신전이 돈을 넉넉하게 지원하게 해주세요. 제가 일행들이 먹는 식비 영수증을 제출해도 쥐꼬리 같은 지원금이 더 늘지 않아요. 세계를 구하기 위한 여정인데 이렇게 적은 돈이라니, 화룡왕님이 좀 장로님들에게 계시를 내려주세요.”
평소라면 지원금을 더 달라고 기도하며 푸념하는 걸로 끝냈을 텐데 오늘은 다른 소원도 빌고 싶었다.
“……그리고 화룡왕님, 저에게 가우리님의 미모와 제르가디스님 같은 성격을 갖춘 골드 드래곤을 눈앞에 뚝 떨어트려주세요. 저도 리나님과 아멜리아님 같은 사랑을 하고 싶어요.”
유독 소녀 같은 제 목소리에 피리아는 살짝 웃음이 났다. 예쁜 사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나쁜게 아니잖아요, 이 정도는 언젠가 이뤄줄 수 있죠. 피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화룡왕의 대답을 기다리며 혹시라도 괜찮은 골드 드래곤이 운명처럼 나타나지 않을까 주위를 슬쩍 둘러봤다.
“꿈 깨세요.”
그러나 피리아의 눈앞에 떨어진 건 마법으로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제로스였다. 예의바르다기 보다 능글맞게 웃으며 그녀를 내려다보는 제로스의 등장에 피리아는 너무 놀라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튀어나온 제 꼬리를 밟고 펄쩍 뛰어 손에 든 동전을 놓쳤다.
“화룡왕님께 바칠 동전이……!”
동전은 하수구 안으로 굴러 떨어졌고,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하수구 앞으로 달려갔다. 그 다음 제로스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강철로 된 격자판 덮개를 뜯어내 동전을 건져냈다.
“새삼스럽지만, 천둥벌거숭이 피리아씨가 골드 드래곤이긴 했죠?”
도끼눈을 뜬 피리아는 허공에서 머리를 긁적이던 제로스의 망토를 잡아 그를 지상에 내려오게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제로스의 망토를 낚아채 그를 땅에 내팽개치듯 끌어당겨 엉덩방아를 찍게 만든 것이었다. 완전히 방심하고 있던 제로스는 땅바닥에 억지로 떨어졌고, 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드래곤 슬레이어인 자신을 겁 없이 건드리고도 반성 없이 하수구에 떨어진 동전에 더 집중하는 피리아의 행동에 평정을 잃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보자보자하니까 감히 드래곤 슬레이어를 패대기쳐요?!”
“시끄러워요!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난 몰라, 내 소원 부정 타면 어떻게!”
고작 동전 하나에 밀려났다는 것에 어마무시한 정신적 타격을 입은 제로스가 두 눈을 뜨고 그녀를 노려보든, 말든 피리아는 그의 망토에 동전을 닦기 여념이 없었다. 망토에 뽀독뽀독 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닦고 나서야 만족한 피리아는 분수 앞으로 걸어가 물속에 동전을 던졌다. 퐁당, 소리를 내며 물속에 가라앉는 제 동전을 보며 다시 기도했다.
“화룡왕님, 부디 하수구와 썩은 쓰레기에게 더럽혀진 동전을 바친 것을 너그러이 용서해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다른 동전을 꺼내고 싶지만, 지금 제 금전 사정이 간당간당하거든요. 제 소원 잊지 마세요.”
“세상에, 지금 피리아씨는 세계보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이 난리를 피웠군요.”
몸을 털고 일어난 제로스는 좀 전에 받은 모욕을 만회하려는 듯 피리아를 비웃으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맨날 세계를 위한다고 잘난 체를 하면서 보는 이가 없다고 생각하자마자 기도로 개인의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꼴이라니.”
“감히 마족이 사리사욕을 논해요?! 당신 같은 마족이야말로 세계를 혼돈으로 물들며 온갖 사악한 짓거리를 하잖아요!”
그녀에게 웃긴 표정을 지으며 약 올리는 제로스의 얼굴에 분노가 되살아난 피리아는 지지 않고 반격을 하기 시작했다.
“제가 정말 세계를 위한 기도를 화룡왕님에게 바칠 때 당신이 없던 이유를 모를 줄 알아요? 썩어가는 음식물 쓰레기보다 더 고약한 마음으로 들이찬 당신이 제가 선한 기도를 할때 피해 있었던 것이겠죠!”
“그야 전 기도나 하는 당신과 달리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실질적으로 세계를 멸하기 위해 발로 뛰고 있으니까요.”
“말만 번드르르하기는! 이제 막 세상에 나온 풋내기 신관의 기도 한 방에 맥을 못 추는 고위 순마족이라니, 세상을 멸하기 전에 당신이 먼저 멸하겠네요.”
“제 힘에 관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이라도 도마뱀들은 제 손짓 한 번에 가을날 낙엽처럼 쓸릴 테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잘난 기도는 우습기 그지없어요. 가우리씨 같은 얼굴에 제르가디스씨 같은 성격의 골드 드래곤? 제가 보증하는데 고집불통에 이기적이고 위선적이며 돈만 밝히는 당신을 누가 좋아하겠어요?”
“마족에게 미움 받다니, 그것이야말로 골드 드래곤으로서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반려 보증 수표네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소리 질렀지만, 사랑을 꿈꾼 자신의 마음을 조롱당하자 모멸감이 들었다. 그녀를 깎아내리기 위한 목적으로 한 말이 가치 없다는 걸 알아도 눈가가 뜨끈해졌다. 눈물을 그렁거리지 않아도 감정 에너지로 그녀가 상처 받았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제로스는 만족스레 낄낄거렸다.
“그깟 사랑받지 못할 거라는 말에 애처럼 울긴요. 이런 나약한 정신머리로 세계를 어떻게 구하려고요?”
“사랑은 약하지 않아요!”
말다툼은 동점으로 끝났다. 사랑을 믿는 피리아의 외침에 마족인 제로스는 낯빛이 어두워지며 토악질을 했고, 피리아의 뱃속이 배고프다고 꼬르륵 요동쳤다. 둘은 일단 휴전하고 다른 대화를 했다.
“사랑 때문에 단식기도 중이세요? 다른 분들은요?”
“아뇨, 다른 분들이 절 버리고 2인 동반 커플만 입장 가능한 카페로 갔어요.”
“끔찍하네요. 그럼 가죠.”
제로스의 말에 피리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그가 미쳤냐고 드래곤인 본모습으로 돌아가려다가 생각해보니 제로스가 동료들이 있는 카페로 가기 위해 자신과 연인 관계로 위장할리가 없었다. 그냥 이쯤에서 서로 갈 길을 가자는 일상적인 작별인사일 것이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놀랄 뻔했다. 말을 배배 꼬는 못된 마족이라고 속으로 온갖 종류의 쓰레기를 제로스에게 갖다 붙이는데 그가 다시 말을 걸었다.
“안 따라오고 뭐하세요?”
고개를 드니 제로스는 그 분홍빛 가득한 카페로 향하고 있었고, 왜 그녀가 자신을 따라오지 않는지 의아해하고 있었다.
“어딜 가요?”
“당연히 저 카페로요. 다른 분들이 식사하고 있다면서요?”
“차라리 날 죽여! 드래곤 슬레이어인 당신과 커플이 되느니 이대로 죽을 거야! 난 아직 연애도, 첫 키스도 못했는데 음식물 쓰레기 같은 마족과 커플이 되지 않을 거야!”
제로스가 자신과 저 카페로 가는 것이 착각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은 피리아는 존대체도 집어 던지고 마구잡이로 분노했다. 입에서 말 대신 광선을 쏘는 것과 같은 기세였다.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일에 감정을 끌어들이는 피리아의 행태에 제로스는 제 이마를 짚으며 신경질적으로 대꾸했다.
“미치겠네요. 도대체 왜 이쪽 세계의 드래곤들은 사고 회로가 그딴 식으로 흐릅니까?”
“저 카페는 2인 커플만 입장 가능하다고요! 연인이거나 그런 사랑이 암묵적으로 있어야만 한다고요!”
“수왕님이여 맙소사, 이 앞뒤가 꽉꽉 막힌……! 상식적으로 임무를 위해 연기를 감수한다고 생각하지, 어떻게 골드 드래곤이 되어 가지고 정말 마족에게 호감을 품고 사귄다고 생각합니까?!”
그는 두 눈을 뜨고 진심으로 싫다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안색까지 토할 것처럼 초록빛이 되었다.
“요즘 세대 드래곤의 사고방식, 아니 세상을 책과 경전으로만 배운 어린 것들이란.”
“어쨌든 전 절대로 안 가요. 그냥 지나가는 사람이 당신이랑 절 연인으로 여기는 것 자체를 용납할 수 없어요! 제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어도, 설령 화룡왕님이 명령해도……!”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서도요?”
“뭐, 뭐라고요?”
화를 내던 피리아는 제로스의 말에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계속 화를 내고 싶어도 혀를 차는 제로스의 말투에서 장로들이 꾸짖던 느낌이 나서 일단 입을 다물게 된다.
“잠깐 마족과 함께하는 불편을 감수하기보다, 당신 신념대로 한 눈 판 사이에 저 카페 안의 가우리씨, 리나씨, 제르가디스씨, 아멜리아씨에게 뭔 일이 나도 상관없죠?”
“그……! 그럴 확률은……! 이 마을에 바르가브의 수하가 없다는 걸 확인했다고요!”
“아, 저들은 죽어도 세계를 구할 여정에서 고귀한 희생을 했으니 영광되니까 그렇죠? 당신은 눈물 몇 방울과 장례 기도만 올리고 다른 인간에게 세계를 구해달라고 부탁하면 그만이니까요.”
순박한 얼굴로 해맑게 웃으며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무자비했다. 마족다운 기세에 피리아는 말문이 막혀 그를 바라만 보았다. 그런 잔인한 생각을 한 적 없다고 대꾸해야 하는데, 그것과 별개로 제로스의 말에 불안해졌다. 정말로 자신이 잠깐 카페에 있지 않았다가 동료들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걱정 되었다. 피리아의 머뭇거리는 기색을 읽자 제로스는 그녀가 얼추 넘어왔다고 판단했는지 가자고 손짓했다.
“자, 그럼 신과 마의 양측에 놀아나는 저 인간들을 어서 지켜보러 가죠.”
“그런 식으로 저들을 부르지 마요! 아무리 당신이 마족이라고……!”
“조언하는데 장기알 하나하나에 정 붙이지 마요. 저나 당신이나 그 다크스타의 강림 때문에 일어나는 일을 감시해야 하는 처지잖아요. 융통성 좀 발휘해요.”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고요!”
“네, 네, 신과 마의 토론은 이쯤에서 끝내고 목적은 달라도 중간 관리직끼리 해야 하는 일이 곂치니 이해하자고요. 의무를 받드는 과정이 아집과 이상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다는 사실이 당신의 도마뱀 뇌가 인식하기엔 너무 어려운 일이지만요.”
제로스는 마족에게 설교하는 피리아의 말이 지겹다고 표현하려고 일부러 한쪽 귀를 후벼 파며 걸었다. 피리아는 그의 뒤를 따라갔지만 주먹을 쥐고 그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누구에게나 예의를 지키면서 자신에게는 무례하게 구는 밥맛의 마족. 물론 자신이 그를 먼저 도발하는 건 알지만 세계를 멸하는 마족을 참고 넘어가라는 것은 세계를 수호하는 골드 드래곤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발밑에 돌멩이 있어요.”
제로스가 말하기 무섭게 돌부리에 발이 걸린 피리아는 비틀거렸다. 그가 말해준 덕분에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를 노려보느라 바닥을 살피지 못했으니 넘어질 뻔한 건 제로스 탓이라고 이를 가는 피리아였다.
“마족 덕분에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는 추태를 면했는데 고맙다는 말 한 마디도 없나요?”
“고작 그런 걸로 생색은!”
“천만해요.”
손을 휘휘 젓는 제로스를 노려보며 속으로 한 번 더 되뇌었다. 모든 마족이 다 그렇겠지만, 모든 마족 중에서도 제로스가 제일 최악이었다.
***
밖에서부터 느끼고 보았지만, 카페는 모든 것이 분홍색이었다. 마족이라면 사람의 감정 에너지가 보인다는데 그런 능력이 없어도 사랑의 에너지는 분홍색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 카페였다. 모두들 사랑하는 사람과 마주 앉아 웃고 떠들며 맛있게 먹는다. 피리아도 그 분홍빛 감정의 일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가 제로스만 아니었다면.
“우거지상으로도 밥은 잘도 넘어가는 모양이죠?”
피리아는 제로스가 핀잔을 주든 말든 쳐다보지도 않고 양손으로 수저를 쓰며 식사를 했다. 고개를 들어봤자 하얀 식탁보 위에 하트 모양으로 타오르는 양초와 붉은 장미 한 송이가 둘 사이에 놓여 있는 혐오스러운 광경만이 보였다. 그녀는 본인이 시킨 3단 트레이드 샌드위치와 프렌치토스트를 먹는 것에 집중했다. 칼로는 빵과 계란 프라이를 찍어 먹고 포크로는 샐러드랑 소시지를 열심히 먹었다.
“저기요, 피리아씨. 마족이 예의 바르게 말을 걸때 좀 어울려주면 안될까요?”
제로스는 초콜릿을 최대 추가한 핫초코에 거대한 아이스크림에 온갖 과일과 와플을 장식한 빙수를 퍼먹으며 말했다. 본인 먹을 거나 얌전히 먹지 않고 자꾸 자신에게 시비조로 말을 걸어 그를 노려보았다. 사실 계속 무시하려고 했는데, 마침 목이 말라 홍차를 마셔야 해 어쩔 수가 없었다.
“왜 자꾸 밥 먹는데 귀찮게 해요?”
“오호, 밥 먹을 때 이빨을 드러내는 꼴을 보아하니 피리아씨는 도마뱀이 아니라 개였군요.”
“이 음식물 쓰레기가……!”
화가 난 피리아는 큰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났다. 하하호호 웃는 분위기에서 화낸 것만으로도 충분히 소란을 일으켰는데, 꼬리까지 튀어나와 뒤에 있던 다른 손님까지 실수로 쳐서 이 층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집중 되었다.
“저 손님, 무슨 일이신지……?”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이 카페 사장이 직접 와서 둘을 바라보았다. 커플 이벤트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연인 역할을 해줄 사람이랑 와서 먹고 가기도 했다. 실제 연인이 아니라는 게 밝혀져도 별다른 제지는 없지만, 이곳 사장이 운다. 통통하고 작은 체구에 분홍색 정장을 입고 하트 모양 분홍색 선글라스를 쓰고, 수염까지 하트 모양이 되도록 파마할 정도로 이 커플 이벤트에 진심인 할아버지가 운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양심의 가책이 느껴진다. 그녀가 곤란에 빠지도록 유도한 이 얄미운 마족은 여유롭게 핫초코를 홀짝거리며 알아서 잘 대처하라고 웃고만 있었다.
“우리 이이가, 나, 나올때……으, 음식물 쓰레기를 안 버리고 나왔지 뭐예요?”
그래서 최대한 복수를 했다. 피리아는 이 말을 하다가 차라리 제 혀를 깨물고 싶었지만, 웃음을 지우고 딱딱하게 굳는 제로스의 표정을 보자 이 고통의 가치를 느꼈다. 그를 연인도 아닌 남편이라 사기를 치는 행태에 제로스가 눈을 뜨고 뭐라 말하려 했지만, 피리아가 먼저 과장되게 웃으며 제로스의 양볼을 마구마구 꼬집었다. 그의 볼은 그의 유들거리는 뻔뻔스러움만큼 잘도 늘어졌다.
“저 벌레 중에서도 등딱지가 번들거리는 바퀴벌레가 제일 짜증나고 싫고 무서운 데, 책임질 거예요?”
한술 더 떠 혀가 짧은 애교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제로스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축, 늘어졌다. 정신적인 충격이 너무 심해 헛구역질할 기력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 잘난 말솜씨도, 어떤 상황이든 평정을 잃지 않고 짓는 미소도 없이 맥을 추리지 못하는 제로스를 손안에서 주무르고 있잖니 여정 내내 제로스 때문에 받은 설움이 눈 녹듯이 내려간다. 너무 통쾌해서 그를 밟고 깔깔거리며 웃고 싶지만, 이 승리는 나중에 만끽하기로 했다.
“정말 감동이군요.”
본인까지 희생하여, 제로스를 정신적 충격으로 무력화 시켰다는 기쁨도 잠시 사장이 말을 시작했다.
“신과 마를 섬기는 신관이 각자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고 맺어진 사랑의 결실이라니. 제 생애 이렇게 극적인 부부는 또 오랜만에 보는군요.”
닭똥 같은 눈물을 똑똑 흘리며 분홍색 손수건을 꺼내 감격하는 사장의 말에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아니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모습이 시체와 다르지 않은 제로스를 보고 겨우 웃음을 유지하며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두 분의 모습을 캐리커처로 그려 기념해도 될까요? 선물도 주겠습니다.”
“네?”
사장이 카페의 어느 벽면을 가리키자 벽 빼곡하게 이 카페를 들른 커플들의 캐리커처 그림이 붙어 있었다.
“전부 제가 그렸습니다.”
“세상에 정말 멋지네요.”
피리아는 자신이 제로스와 부부로 오인 받는다는 것도 잊고 연인과 부부가 행복한 순간을 담은 그림들을 보며 감탄했다. 카페 사장이 아니라 화가가 아닐까 싶을 수준급의 실력이었다.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런대로 쓸 만한 실력이 되었더라고요. 자식과 손주에게 카페를 물려주고 나니까 남아도는 게 시간과 돈이니까요.”
새삼 조물주와 건물주는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피리아는 제로스랑 캐리커처를 그릴 생각이 없었고, 거절하려던 찰나 사장이 말했다.
“선물로 제가 두 분을 그린 캐리커처랑, 카페에서 드신 식사 값을 무료로 계산하겠습니다.”
오늘 카페에서 먹은 식사를 무료로 준다는 말에 잠깐 혹했지만, 피리아는 신실하게 화룡왕을 섬기는 신관이자 세계를 수호하는 골드 드래곤의 명예를 상기하며 거절의 뜻을 밝히려 했다.
“원래는 캐리커처 액자에 담는 선물만 드리는데, 오늘 온 커플 손님 중에 3대째가 운영한 이래 최고 매출을 올려준 커플이 있어서 무료로 주는 것까지 덤으로 얹었습니다. 어디 가서 제가 이런 파격 제안을 했다고 말하지 마세요?”
기분 좋게 웃음을 터트리는 사장을 보자 머리가 하얗게 되었다. 그 최고 매출을 올렸다는 커플, 틀림없이 리나와 가우리다. 그리고 그 돈은 자기 지갑에서 나갔을 것이다. 돈을 아껴야 한다. 당장 끼니와 잠자리를 해결할 금전 사정 앞에서 긍지와 명예가 뒷전으로 밀려났다. 오늘 화룡왕님을 비롯하여 다른 용왕님들에게 기나긴 속죄의 기도를 드리면 되고, 이건 다 세계를 구하기 위해서라고 정당화를 하자 결심이 섰다.
“감사해요, 잘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늙은이 취미에 어울려줘서 감사하죠. 금방 완성해 드리겠습니다.”
간단한 그림 도구를 챙겨온 사장이 준비하는 동안, 피리아도 할일을 했다. 제로스를 껴안는 척, 사장이 잠시 안 보는 틈을 타 그의 멱살을 잡고 작게 으름장을 놨다.
“제로스,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요. 입 뻥긋하면 당신 모가지를 비틀고 물어 뜯어버릴 테니까요.”
제로스는 그녀더러 미쳤냐고 항의하고픈 눈빛이었다. 다른 때라면 돈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팔아먹느냐고 빈정거리며 피리아를 놀릴 텐데 이 카페에 가득한 사랑의 에너지, 그리고 연이은 정신적 타격으로 힘이 없었다. 제로스는 될 대로 되라는 듯 팔짱을 낀 채로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몇 분이면 다 끝나니까 편하게 있어요. 평소에 지내던 대로 자연스럽게 할 일 하시고요.”
그러면 철퇴와 지팡이, 말다툼, 그리고 온갖 신성마법과 흑마법이 맞붙는 폭력적인 광경만이 펼쳐질 것이라고 속으로만 생각하며 사장에게 웃었다. 피리아는 제로스가 저 늙은이가 노망이 나도 단단하게 났다는 말을 내뱉기 전에 그의 목구멍에 와플을 하나 꽂아 넣었다.
몇 분이면 끝난다고 했지만, 제로스와 거리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일초가 하루 같이 느껴졌다. 마족의 불길한 기운이 옷 너머로 피부 위를 따끔거리는 것만 같았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계속 불안에 시달리고, 거짓말을 들키지 않게 괜히 일을 더 벌인다. 피리아가 지금 그랬다. 선을 그을 때마다 연필이 사각거리고, 그 위에 색연필을 칠하는 소리에 심장이 깜짝깜짝 놀랐다. 자신과 제로스가 절대 연인도, 부부도 아니고 동료애 비슷한 것도 없는 철천지원수라 당장이라도 이 사기극이 들킬 것만 같았다.
피리아는 곁눈질로 카페 안 사람들을 살피며 좋아하는 사람끼리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했다. 상대와 대화하며 실없이 웃고, 맛있는걸 입안에 넣어주고, 어깨를 기대고, 손을 잡고, 볼 뽀뽀를 하는 광경을 봤다. 다른 건 몰라도 제로스와 조금 더 가까이 앉고, 손을 잡는 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땡전 몇 푼이라도 남아 있으면 다행인 본인 지갑을 생각하며 화룡왕님에게 마족을 견딜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움직였다.
의자를 살짝 제로스 옆으로 끌고 가 그를 비장하게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처럼 그와 손을 잡자 제로스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피리아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건드리니 뭔 일인가 싶어 움직인 거지만, 피리아와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을지는 몰랐다.
피리아가 책에서 읽어온 첫 입맞춤이란 건 마법이었다. 온 세상이 단 두 사람만의 찰나를 위해 움직였다. 여명도 황혼도 가장 밝은 해가 세상을 붉게 물들고, 밤하늘에 별들이 쏟아지고, 꽃잎이 눈처럼 흐트러지는 꽃밭이 펼쳐져 있거나, 사악한 모든 종류의 저주를 풀고, 전쟁 한복판에서도 피와 죽음의 순간의 공포를 압도한다.
마족과의 입맞춤은, 그것도 제 첫 입맞춤은 피리아가 막연하게 꿈꾸고 상상하던 것과 달랐다. 우선 마족과 입맞춤을 했다고 자신의 몸이 소멸 되지도 않았고, 심장이 멎지도 않았고, 세상이 멸망하지는 않았다. 첫 입맞춤은 사랑의 속삭임도, 수줍은 동의도, 근사한 배경 무엇 하나 없었다. 피리아가 제로스와 한 첫 입맞춤은 차가웠다. 차갑지만 여느 인간처럼 말랑한 입술, 말을 하려고 살짝 벌어진 입술 틈새로 그가 숨을 삼킨다.
골드 드래곤과 마족이 입맞춤을 하고 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 제로스의 보랏빛 눈동자도 그 답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 누구도 그런 걸 가르쳐 준 적도 없었고, 그런 게 가능한 세계가 아니었다. 누구에게 무엇을 물어봐야 하는지조차 모르겠는 피리아는 제로스의 품속에서 그대로 기절했다.
***
카페 밖 분수대 앞의 벤치에 비둘기들이 앉아 있었다. 난데없이 허공에서 두 남녀가 나타나 벤치에 주저앉기 전까지. 놀라서 일제히 날아가는 비둘기 사이로 제로스가 정신을 잃은 피리아를 끌어안고 엉거주춤 벤치에 걸터앉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두 눈을 뜬 채로 숨도 안 쉬며 가만히 있다가 피리아가 몸을 뒤척이자 움직였다. 다시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그러쥐었다.
“아무래도 이 기억은 지워야겠네요.”
깨어났을 때 피리아가 그를 죽여 버리겠다고 드래곤이 되어 이 마을을 부수는 건 사양이었다. 마족으로서 혼돈을 창조하고 즐기지만, 오늘은 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
제로스는 피리아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녀를 본 순간, 좀 전의 입맞춤이 떠올라 괜히 제 손으로 입가를 마구 문질렀다. 묘하게 달콤하던 순간. 그는 마족이라 산 존재처럼 누군가와 입맞춤 한다고 심장이 두근거리고, 혈관의 피가 돌거나, 감정이 일렁이지 않았다. 입맞춤은 마족에게 있어 산 존재들이 하는 비위생적이고 치명적인 긍정 에너지를 생산하는 행위였다. 그런데 그의 품안에서 느껴지던 따스한 그녀의 온기, 저와 입술이 닿았다고 여리게 몸을 떨며 반응하던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력이 요동쳤다.
“화룡왕님……쥐꼬리 지원금……더 올려주세요…….”
피리아는 그의 어깨에 기댄 채 뒤척거리며 잠꼬대를 하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그깟 식사 한 끼 공짜로 먹으려고 드래곤 슬레이어와 입맞춤을 해놓고, 그걸 화룡왕에게 속죄하기는커녕 태평하게 쥐꼬리 지원금을 한탄하고 있었다. 이대로 피리아의 기억을 지우지 말고 그대로 내버려두어 눈을 뜨자마자 자신과 입맞춤을 한 것 때문에 울부짖고 수치심에 고개도 들지 못하게 할까 고민되었다.
골드 드래곤이 날뛰면 그의 입장에서 반가운 것이었다. 피리아가 폭주해서 마을을 부수면 이곳 사람들의 부정적인 에너지를 섭취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드래곤에 대한 불신을 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와 입맞춤을 한 것 가지고 놀리고 괴롭히며 피리아를 움츠러들게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울며불며 그에게 입맞춤을 들먹이는 상황을 생각하자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이 사고뭉치 도마뱀 같으니라고.”
“……이 음식물……바퀴벌레가…….”
제로스는 잇새로 피리아를 비난하는 말을 몇 마디 더 얹었다. 어떤 속박 마법도 없었는데 피리아가 입맞출 때 그는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만약 누군가 왜 피리아를 떼어내지 않고, 지금도 곁을 내어주고 있냐고 이유를 묻는다면 그는 아무 답을 줄 수 없었다. 신마전쟁 때 창조된 이래로 그에게 고뇌를 안겨준 존재는 없는데 피리아는 예외였다. 그녀의 말 한 마디에 그는 맞받아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면서도 계속 말을 걸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얼굴을 찌푸리게 되면서도 그녀에게 시선을 뗄 수 없고, 신과 마의 굴레에 묘하게 겉도는 그녀를 어리석다고 여기면서도 그도 모르게 질문하게 된다.
“당신에 대한 답을 찾기 전까지 잠시 오늘의 입맞춤은 잊으세요.”
기억이야 언제든 돌려드릴 수 있으니까. 고위 순마족이자, 수신관인 그에게 불필요하지만, 피리아의 기억을 지우는 방법으로 지팡이를 휘두르거나 손짓을 하는 대신 그는 피리아를 다시 한 번 입맞춤을 했다.
역시 달다. 적어도 카페에서부터 그를 따라오던 단맛에 대한 답을 찾은 것으로 제로스는 만족하기로 했다.
+++)
내 현생 대신 제로피리 너네라도 분홍빛이고 달콤해라. 기말과제 직전으로 이번 달 마지막 일탈을 합니다. 제로피리 오늘도 사랑해. 제 글 읽어주고, 제로피리 파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첫댓글 키야 달달하네요ㅎㅎㅎ 역시 혐관관계 존맛ㅠㅠㅠ 이래서 제로피리가 너무좋아요 왠지 제로스 그후로 틈날때마다 몰래 입맞춤할꺼같은 느낌이ㅋㅋㅋ
댓글 정말 감사합니다ㅠㅠ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해주신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ㅠㅠ제로피리는 같은 혐관이어도 달달하게 적으면 하하호호 웃으며 즐길 수 있고, 제로스의 마족다운 면모에 중점을 두어 피폐하게 가면 짜릿하고 쫄깃한 스릴이 있죠. 그리고 제로스가 그후로 틈날때마다 몰래 입맞추는거 당연하죠ㅋㅋㅋㅋ왜 피리아 때문에 이런지 연구하겠다고 입맞춤을 하는 자기 합리화하고요ㅋㅋㅋㅋ이 카페에서 제가 적은 제로피리 글을 재미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오랜만이라 더 신났습니다! 내일이 월요일이니 힘내세요!
@우주의상어 우상님 포타랑 평소에 엄청 복습하고 또봅니다ㅠㅠ문체가 정말 제스타일에요 잘쓰심...👍 제로피리 특유의 피폐로맨스를 잘살리세요 계속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