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하고 싶은 것
생선 아저씨가 출근했다. 그의 가게는 종로 약국 거리의 버스정류장 옆자리 노점. 몇 개의 좌판을 잇댄 이동식 생선 가게 사장인 그는 열 시경 출근하고 하루도 결근하는 법이 없다. 그와 같이 퇴근하고 출근하는 리어카는 밤새 어디에 있었을까. 풍찬노숙한 더께가 앉아 추레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치 1960년대 어디쯤 기록사진 한 컷에 나올 것 같은 모습으로 늘 그 자리를 지켰다.
좌판 위에서 생선들은 비릿한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펑퍼짐하게 앉거나 엎드려 곁눈질로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사람들은 버스에서 내리다가 생뚱맞은 위치에 누워 있는 생선과 시선이 마주치면 당황했다. 서울 종로 대로변에 생선 좌판이라니. 게다가 덩치 큰 생선은 위압감마저 주었다.
그중 압권은 상어였다. 비록 작은 상어지만 스티로폼 박스를 독차지하고 허연 배를 드러내며 입까지 떠억 벌리고 누운 자세는 거만하기까지 했다. 버스에서 내리던 사람은 물론 지나가던 사람도, 지켜보는 우리도 톱니 같은 이빨에 놀라 흠칫했다. 때로 홍어가 나타나면 넓적한 몸집이 박스에 차고도 넘쳐 길바닥에 철퍼덕 널브러졌다. 사람들은 행여 밟아 봉변당할까 그를 피하며 멀리 돌아갔다. 국적을 알 수 없는 냉동 생선들도 오만하기는 마찬가지여서 부릅뜬 눈동자를 꿈쩍거리지도 않고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풍문에 의하면 생선 아저씨는 젊어서는 큰 키에 외모가 준수했다는데 큰 키 말고는 옛 모습이 전혀 그려지지 않았다. 그래도 마치 종로 거리가 자기 땅인 양 늘 당당했다. 비린내에 찌든 꾀죄죄한 모습으로 손님에 둘러싸여 생선 자르는 소리 요란할 때, 단골 할머니들의 웃음소리와 수다가 어우러지면 아저씨는 오만방자한 생선들의 보스답게 자부심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 거리에서 땅 한 평 없어도 자존감 넘치는 토박이의 포스는 인정할 만했다.
사람들은 찡그리면서도 아저씨에게 불만을 표시하거나 항의하지 못했다. 오히려 말을 걸어올까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실체 없는 자신감도 한몫했지만 타협하기 어려운 냄새가 행여 몸에 묻을까 서둘러 총총 지나갔다는 것이 사실에 더 가까워 보였다.
생선 비린내가 악취로 변하는 여름은 문을 열어놓기도 어려웠다. 사실 최대 피해자는 바로 약국이었다. 냄새에 지친 우리는 차치하고라도 들어오는 손님마다 킁킁거렸고 어떤 손님은 생선 아저씨와 싸우기도 했다. 냄새 풍기지 말라면 생선 장사를 하지 말라는 얘기인데 우리에겐 그럴 권리도 없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대놓고 불평하지 않는 건 그의 성실함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버스정류장이 옮겨졌을 때 생선 아저씨도 함께 떠났다. 번잡하던 장소도 조용해지고 한편으로는 악취로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았다. 자동차 매연과 소음은 피할 수 없었지만 조금은 쾌적한(?) 환경이 되었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아저씨가 어느 날 약국 앞자리에 다시 생선 좌판을 펼쳤다. 버스정류장이 이사한 자리는 예전보다 한가했다. 행인들의 발걸음이 뜸해지고 생선을 사려는 사람도 적었다. 그래도 생선 아저씨는 일정 시간을 반드시 있다가 옮겨갔다. 장맛비가 쏟아지는 때는 비닐을 뒤집어쓰고, 태풍이 불면 꼭꼭 비닐로 생선 좌판과 의자를 붙들어 매며 버티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엔 좌판 위에도 아저씨의 머리와 어깨에도 눈이 하얗게 쌓였다. 그는 눈사람이 된 성자처럼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켜냈다.
그래도 장사는 전혀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신 아저씨의 노래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예전에는 잠시 쉬는 시간에 노래를 가볍게 흥얼거렸다면 이제는 장사보다 노래에 더 집중하는 것처럼 보였다. 거리가 한산해져 행인이 뜸해지면 큰소리로 핸드폰 반주에 불협화음을 내뱉었다. 얼굴을 붉히며 목청에 바짝 힘이 들어가 고음은 비명이 되어 우리 귀를 괴롭혔다.
트로트 오디션 프로가 성행하면서 아저씨의 노래는 더 열정을 보였다. 우리가 감탄하는 것은 어떤 노래도 아저씨가 부르면 음정과 박자가 갈 길을 잃고 헤매다가 새롭게 편곡된다는 점이었다. 최선을 다할수록 음계의 질서가 무너지면서 기본이 뒤집힌 노래는 원곡을 잊게 만들었다.
그래도 아저씨는 생선을 다듬는 손길이 분주할 때보다 더 행복해 보였다. 생선 손님이 줄어도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노래가 소음 수준의 높은 데시벨로 치달아도 어느덧 나도 그 소리에 개의치 않게 되었다. 그 끈기와 열의에 찬 모습에 가끔씩 감동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몇 년이 지나도 끈질긴 노력에 비례해 도무지 개선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우리는 물론 주변 상가 청중들도 탄식하곤 했다.
그러다 아주 드물게 음정이 맞으면 귀를 쫑긋 세웠다. 하지만 어쩌다 노래 한 소절이 실수로 걸려든 것뿐이었다. 순간 화들짝 놀랬던 우리는 음치는 치료약도 없으니 더 악화만 안 되면 다행이라며 웃었다. 좋든 싫든 약국 사람들은 생선 아저씨의 어쩔 수 없는 고정 팬이었다. 아저씨의 열창이 시작되면 순전히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 강제소환되기 때문이었다.
때로 그런 아저씨의 노래가 애잔하게 들리는 날도 있었다 아저씨의 고달픈 삶을 슬쩍 들여다본 것 같아 슬픔이 느껴졌다. 안착하지 못하고 거리를 떠도는 노점상이란 얼마나 고단하고 막막할까. 그럼에도 늘 열심인 아저씨를 붙들고 있는 건 무얼까 궁금하기도 했다.
문득 생선 아저씨의 꿈은 가수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수가 되고 싶으시냐고 장난스레 물었을 때 아저씨는 쑥스러워했다.
“나는 생선 장수지요. 그렇지만 그냥 노래를 잘하고 싶어요.”
‘생선 장수’라는 말이 단호했다면 ‘그냥’이라는 말은 여운을 남겼다. ‘그냥’이라는 말에 멈칫했다. 아무 뜻도 조건도 없이 ‘그냥’ 하고 싶은 것. 내게 그런 것이 언제 있었던가. 늘 쫓기듯 무언가를 인정받거나, 무언가가 되거나, 해내야 할 무언가에 동동거리며 살아온 나에게 ‘그냥’이라는 말이 불현듯 다가왔다. 내게 그것이 무엇일까, 아니 있다고 한들 아저씨처럼 오랜 세월 그냥 전심을 다 할 수가 있을는지…. 척박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한결같이 생선 장사도 노래에도 진심인 아저씨. 그의 영혼이 귀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