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치악산 龜龍寺(구룡사)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있는 龜龍寺(구룡사)는 666년(문무왕 6년) 또는 668년(문무왕 8)에 의상(義湘)에 의해 창건됐다. 그리고 보니 전국적으로 특히 의상과 원효에 의해 창건한 절이 수없이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옛날에는 치악산을 아름다운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赤岳山)이라 불렸으나 옛날 경상도 의성 땅의 한 선비가 이곳 적악산의 오솔길을 지나다 꿩을 잡아먹는 구렁이를 발견하고 꿩을 구해 주었고 이 꿩도 구렁이가 나그네를 해치려는 것을 구해주었다는 전설에 생긴 후부터 치악산으로 불려지게 되었다(아래 전설)고 한다.
치악산의 주봉은 비로봉이다. 그 모양이 시루를 엎어놓은 것 같다 해 '시루봉'으로 불리기도 한다. 비로봉의 높이는 해발 1288m. 정상에 오르면 원주의 한 주민이 치악산 산신령의 계시를 받아 쌓았다는 신선탑·용왕탑·칠성탑 등 3개의 미륵불탑이 지친 몸을 반긴다.
경상도 의성에 사는 한 선비가 과거를 보러 가는 길에 적악산(치악산의 옛 명칭) 기슭을 지나게 되었다. 그때 선비는 길을 가다가 꿩이 뱀에게 잡아먹히려는 것을 보고 뱀을 죽이고 꿩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선비는 날이 저물어 산 속의 어느 집에 묵게 되었다. 마침 그 집은 청상 과부집이었다. 선비는 그날 밤 그만 과부의 꾀임에 빠져 동침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밤중에 뭔가 이상한 낌새에 자다가 깨어 일어나 보니 과부가 커다란 뱀이 되어 자신의 몸을 칭칭 감고는 죽이려 하지 않는가. 그 뱀은 낮에 선비가 죽인 남편 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청상과부로 변한 아내 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여왔다. 종소리에 뱀은 놀라서 도망을 치고 마침내 선비는 위기에서 벗어났다. 날이 새자 선비는 종소리가 난 곳을 찾아가 보았다. 스님도 없는 낡은 절터에 종이 있었고, 어제 선비가 살려준 꿩이 범종에 머리를 부딪고 죽어있었다. 선비는 나중에 급제하여 꿩에 대한 보은으로 그 자리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또 다른 치악산 전설
원주 치악산에 한 절이 있어 하루는 불존(佛尊) 수좌(首座)가 법당(法堂) 뒤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꿩을 감싸고 있었고, 구렁이와 꿩이 서로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아, 이렇듯 서로 물고 버티며 놓지 않는 다툼이 있었는데, 둘이 서로 싸움하는 사이에 어부지리(漁父之利)가 가까이에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불존 수좌가 지팡이로 구렁이를 풀어 꿩을 구하니, 이날 이경(二更 밤10시경)에 하얀 형상을 한 노인이 와서 전등(剪燈)의 왼쪽에 앉아 쇠붙이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말하기를, "나는 이내 이 절의 종을 주조하는 화주승(化主僧)이다. 사방에서 시주를 모아 자선(慈善)을 베풀고자 이 큰 종을 주조하였으나 종소리가 맑지 못하여 도리어 죄업(罪業)에 대한 응보(應報)를 받았다.
살리고 죽이는 것은 구렁이의 뜻이었고, 지금에는 재앙과 액운이 헤아릴 수 없다. 오늘 다행히 꿩 한 마리를 얻어 점심으로 먹으려 하였다. 그대의 자비로 이와 같이 한번 굶주렸으니 반드시 그대를 대신으로 먹어야겠다.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나를 위해 종을 쳐서 소리를 내면 이러한 추한 응보를 면할 것이니, 이것 또한 자비이다." 하고 말이 끝나자 홀연히 떠나갔다.
의심스러워 괴상하게 여기는 사이에 앞에 있는 울리지 않던 종이 천천히 하늘 밖으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두운 속에서 한 쌍의 꿩을 보니 부리를 사용하여 종을 울렸다. 한 번은 소리가 크고 한 번은 소리가 작아 큰 소리와 작은 소리가 마디가 있었고 한 번은 암컷의 소리였고 한 번은 수컷의 소리여서 암컷과 수컷의 차례가 있었다. 일종(一宗)이 죽고 일종(一宗)이 살았으니 죽고 사는 것에는 표지(標識)가 있으며 이것이 불문(佛門)에서 예악(禮樂)을 짓는 법이다.
동틀 무렵에 노인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 "나는 종이 울리는 힘을 입어 얽어맸던 몸에서 벗어나 승천한다."고 하였다. 해가 솟아 밝아올 무렵에 가서 보니 금 구렁이 한 마리가 남쪽 처마 아래에 죽어 있으므로 승(僧)이 죽었을 때의 예와 같이 장사지냈다. 아, 꿩은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목숨을 구해준 승(僧)의 은혜를 보답했고 승(僧)은 꿩의 목숨을 구해 준 것으로 인하여 목숨을 구하는 보답을 받았다. 구렁이는 승(僧)으로 인하여 생명을 아껴 꿩을 살려 주었고, 꿩으로 인하여 쌓였던 억겁(億劫)의 고통을 벗었으니 이것이 일거삼득(一擧三得)이다. 사물은 비록 같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뛰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치악(雉樂)으로써 그 산의 이름으로 하고 종을 쳤던 소리로써 온 나라의 사찰에 퍼졌다고 한다. (자웅종기에는 雉岳이 雉樂으로 되어 있음.) - 해남 대흥사에서 1921년 발간한 「범해선사 문집」중의 '자웅종기(雌雄鐘記)'중에서
이처럼 내용이 조금씩은 다르게 전해지고 있지만, 이 보은의 꿩 전설은 강원도 치악산에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설화이다. 지금 상원사에 은혜를 갚은 報恩의 종이 복원되어 있다고 한다. 치악산의 "雉"자가 그래서 꿩을 의미하는 꿩"雉"자로 되어있다고 한다.
원주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지역이었다가 백제가 합병을 하였고, 이어 북쪽에서 장수왕이 밀고 내려와 고구려 땅 평원이 되었다. 그러다가 신라 진흥왕이 고구려를 북쪽으로 내쫓고 북원소경이라는 새 이름으로 불려졌다. 조선 태조 때인 1395년 원주로 이름을 고치면서 강원 관찰사가 있는 감영이 되었다. 당시 춘천은 강원좌영으로, 원주는 강원 우영이 되었다.
<택리지>에 ‘원주는 영월 서쪽에 있다. 강원도 감사가 있는 곳으로, 거기서 한양은 서쪽으로 250리 이다. 동쪽은 영과 두메에 가깝고, 서쪽은 산골짜기 사이사이에 들판이 섞여있어서 명랑하고 수려하다. 경기도와 영남 사이에 끼어서 동해로 수운(輸運)하는 생선․소금․인삼 등과 궁중에 쓰는 재목 따위가 모여들어서 하나의 도회를 이룬 곳이 원주다. 두메와 가까워서 난리가 일어나면 숨어 피하기가 쉽고, 서울과 가까워서 세상이 평안하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까닭에 많은 한양 사대부들이 여기 와서 살기 좋아한다.’라고 했다.
또 국향사는 치악산 비로봉 서쪽 산자락에 있다. 원주시내라고 해도 좋을 그런 평지에 자리해 있다. 이 절은 신라 경순왕 때 무착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무착대사라면 꿩 전설을 소재로 한 무학대사의 시에 나오는 바로 그 주인공이다. 치악산은 원주의 진산이다. 옛 이름은 적악(赤岳)이었다고 한다. <택리지>에도 ‘원주 동쪽에 적악(赤岳)이 있다’고 하였다. 꿩 전설이 생기고부터 치악이라는 새 이름표가 붙었으나, 조선 초기 무학대사가 이미 ‘치악’이라는 지명을 사용했고, 선조 때 인물인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치악’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는 걸로 미루어 치악이라는 지명은 이미 고려 이전부터, 어쩌면 적악이라는 이름과 함께 불려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치악산은 고려 왕조를 마무리 지은 산으로 기억된다. 이성계 일파에 의해 재위 4년 만에 왕위에서 쫒겨난 공양왕이 나이 50에 두 아들 왕석(王奭)․ 왕우(王瑀)를 데리고 처음 유배 들어온 산이 바로 치악이기 때문이다. 그 후 공양왕은 강원도 고성으로 이배되었다가 다시 스님으로 이배된 뒤에 후환이 두려웠던 이성계 일파에 의해 1394년 살해되었다.
치악은 조선에 들어와 오악(五岳) 가운데 하나로 숭상되었다. 북악 묘향․중악 계룡․남악 지리․서악 구월과 함께 치악은 동악이 되었다. 그 후 조정은 치악에 동악단(東岳壇)을 세우고 매년 춘추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구룡사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왼쪽 나무그늘에 황장금표(黃腸禁標)라고 새긴 작은 바위 하나가 땅에 박혀있다. 옛날 치악산에는 ‘황장목’이라고 불렸던 질 좋은 소나무 숲이 울창했다. 황장이라는 말은 나무의 속질이 황금빛을 띠고 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이 나무는 조정에서 베어다가 왕족들의 관(棺)을 만들 때 썼다. 황장목은 나무껍질조차 붉은 빛을 띠고 있어 더욱 매혹적인 우리 소나무이다. 물론 우리 소나무라고 모두가 황장목은 아니다. 태백산맥 일부지역에 나타나는 금강송만을 가리킨다. 하늘로 곧게 솟은 황장목의 줄기는 등천하는 용과도 같은 모양이다. 그래서 때로 ‘적룡(赤龍)’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그 붉은 나무껍질을 적룡피(赤龍皮)라도 하였다.
그리고, 금표란 무단벌채를 막기 위해 세워둔 일종의 경고판이다. 또한. ‘금(禁)’이라는 말에는 ‘왕’이라는 뜻도 함께 들어있다. 영월 금몽암(禁夢庵)은 단종이 왕으로 있을 때 꿈에서 본 절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황장금표는 물론 이곳에만 세워진 것은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나라 안에 60군데에 금표비가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울진 소광리를 비롯하여 현재 몇 곳에 당시의 금표가 남아있다. 금표를 지나면 구룡교가 나온다. 구룡이라는 말은 신라 의상대사가 문무왕 8년에 구룡사를 창건하는 과정에서 생긴 전설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다음은 치악산 구룡사 전설
아득한 옛날 천 삼백년 전의 일이다. 메마른 품이 학 같은 늙은 스님 한 분이 원주 지방에 찾아와 절 자리를 두루 고르고 있다가 치악산을 향해 떠났다.
이 스님의 이름은 무착대사라고도 하고 의상조사(즉, 창건한 의상대사)라고도 하나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원주서 치악산을 향해 육십여리 길을 가던 대사는 그 곳에서 다시 15리를 더 가서 지금의 구룡골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창건설화를 보면, 지금의 구룡사 터는 원래 깊은 소(못沼)가 있었고, 그 안에 아홉 마리 용이 살고 있었다. 의상대사가 그 소를 메우고 큰절을 세우고자 명산인 치악산에 찾아들었다. 지금의 구룡골에 접어들었는데 동편에는 시루봉을 쳐다보며 아늑한 협곡으로 되어있는 이곳 풍치의 아름다움은 가히 절경이었다. 그러나 명당을 골라 절을 세우려고 주변을 살펴본즉 대웅전을 앉혀야 할 자리가 꼭 연못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그 연못을 메우려고 했다. 이때 이 연못 속에서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용들로서는 매우 큰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살 곳을 메우다니 그런 무자비한 일을 스님이 어떻게 할 수 있소?" 하고 하소연 했다. 그러나 스님은 "존엄하신 부처님을 모시려면 너희들이 사는 연못이어야 하는데 어떻 하겠나?" 하고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스님과 용들은 메우겠다 못 메운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 용쪽에서의 제의로 내기를 하여 이긴 쪽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용들은 우선 먹구름을 불러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으니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 같은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삽시간에 계곡이 넘쳐 스님이 서 있는데 까지 물에 잠겨버렸다. 이와 같은 용의 재주를 미리 짐작하고 시루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건너 매어 놓고 태연히 기다리고 있던 스님은 배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용 쪽에서 볼 때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한수 부려볼까?"
그러더니, 스님은 부적을 한 장 그려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 속에 집어넣었다. 그러자 얼마 안 있어 연못(沼)에서는 더운 김이 무럭무럭 오르며 큰 연못의 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물속에서 뜨거움을 참다못한 용들은 뛰쳐나와 한달음에 동해바다로 달아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아홉 마리의 용 가운데 한 마리의 용이 눈이 멀어서 미쳐 달아나지를 못하고 근처에 있는 조그만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고 하는데, 그곳이 바로 구룡폭포(선녀탕)다.
구룡사 자리에 살던 9마리의 용 가운데 마지막용이 머물렀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치악산 구룡폭포. 일명 선녀탕이라고도 한다.
용들이 달아나자 대사는 못을 메우고 지금의 구룡사 대웅전을 지었다. 한편 뜨거운 물에 쫓겨 달아나던 용들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구룡사 앞산을 여덟 개의 골이 치어있으며, 이때 미쳐 도망하지 못한 눈먼 한 마리의 용은 구룡사 옆에 있는 용소에서 비로소 일제치하 때까지 살다가 그해 여름 장마 때 하늘로 올라갔다고 전해진다(참고로 뱀에 저주에 얽힌 전설로 유명한 곳으로 제주 김령사굴이 있다).
구룡사에서 보면 동해를 향한 여덟 개의 골이 된 산봉우리를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그때 여덟마리의 용이 급히 도망치느라 골이 생긴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절을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 곳이라 하여 절 이름을 "구룡사"라 했다 한다. 지금은 아홉구(九)대신 거북구(龜) 자를 쓰는데 이자를 바꾸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구룡사 앞 거북바위
본래 구룡사는 스님들의 수양도장으로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흥망성쇠에 따른 곡절이 많았다. 이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 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받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 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럴 즈음 한 스님 이 찾아와 몰락한 이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에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 것이라고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도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럴 때 어느 날 도승 한분이 이곳에 찾아왔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고 물었다.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두 동강으로 잘라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지 스님은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도승은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에서 거북구(龜)자를 쓰라고 해서 龜(구)자를 쓴 龜龍寺(구룡사)로 쓰기로 했다 한다. -以上 내용출처 : http://www.wonju.go.kr/
절에 얽힌 내용을 찾아보면 이와 유사한 내용의 사찰 창건설화들이 많다. 구룡지가 있는 양산 통도사가 그렇고, 영주 부석사 전설도 이야기 구조에서는 이와 비슷하다.
그렇다면 원주 구룡사나 양산 통도사 전설에 등장하는 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양한 견해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우선 유추해볼 수 있는 것으로는, 신라의 삼국통일에서 나라를 잃고 숨어든 유민집단, 또는 통일과정에서 피해를 본 지방의 호족세력이나 불교를 반대하는 무속신앙 등 종교집단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서 나중의 것은 설득력이 가장 약하고, 전자의 것이 그런대로 설득력을 많이 갖고 있다. 그 까닭은, 구룡사를 비롯하여 의상이 세운 화엄 10찰의 위치가 대개 백제 땅이거나 한때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곳, 아니면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곳 치악산 지역도 고구려 남하정책을 추진한 장수왕 이후 한참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던 땅이다. 이렇게 유추해볼 때, 구룡사를 비롯한 의상의 화엄10찰 개창은 정치적인 성격을 다분히 띠고 있다 하겠다.
구룡사(龜龍寺)는 신라 문무왕 6년(666)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9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을 메우고 사찰을 창건하여 구룡사(九龍寺)라 하였으나, 조선 중기에 거북바위 설화와 관련하여 현재의 명칭인 구룡사(龜龍寺)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아홉 마리 용 전설과 관련하여 불려진 원래 구룡사(九龍寺)라는 이름이 또 다시 거북을 뜻하는 구룡사(龜龍寺)로 바뀌었다. 아마 시기적으로는, 절터에서 ‘康熙四十五年’이라는 명문이 찍힌 기와조각이 발견된 것을 보아 아무래도 조선 숙종조 이후가 아니겠는가 싶다.
한편 <치악산구룡사사적(雉岳山龜龍寺事蹟)>에 의하면 신라 말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창건되었다고도 하는데, 사중기록에 의하면 ‘강희(康熙) 45년’ 명(銘)의 와당이 출토되어 1706년(숙종32)에 구룡사가 중건되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르면 구룡사의 모든 건물은 숙종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고 절 입구에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부도군과 구룡사의 전설을 말해주는 거북바위와 용폭(龍瀑), 용소(龍沼)가 있으며 치악산 일대의 소나무에 대한 무단 벌채를 금하는 ‘황장금표(黃腸禁標)’가 있다. 상원사(上院寺)는 신라 문무왕때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신라 말 경순왕의 왕사였던 무착선사(無着禪師)가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오대산 상원사에서 수도하던 중 문수보살에게 기도하여 관법으로 창건하였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다. 창건 이후로 고려 말에 나옹화상이 중창하였고, 월봉, 위학, 정암, 해봉, 삼공, 축념 등의 선사들이 이곳에서 수도하였으며 조선시대의 여러 왕들은 이 절에서 국태민안을 기도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 구룡사 입구에는 여느 사찰과는 달리 일주문이라 안하고 위에처럼 圓通門(원통문)이라고 현판이 걸려있다. 圓通門(원통문)이란 圓(원無極무극)과 通(통)하는 門(문)이란 뜻인데 이 무극신은 미륵을 일컫는 것이다. 이 門(문)으로 들어서면 미륵신과 통할 수 있는 진리가 있으니 그것을 깨닫고 가라는 뜻일 게다.
또 보광루는 치악산 중턱에 위치한 구룡사의 불이문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 구룡사의 진입은 사천왕문을 통과하여 보광루 밑을 지나 대웅전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앞면 5칸, 옆면 2칸의 익공집으로 맞배지붕의 형태를 하고 있다. 기단은 자연석이며 배흘림이 있는 둥근기둥을 세운 뒤에 그 위로 누각형 건물을 올렸다.
누각층은 대웅전 앞의 마당을 향해 개방시킨 형태이며, 기둥은 1층보다 빈약한 배흘림이 없는 원형기둥을 사용하였다. 천장은 우물반자이며, 누마루는 우물마루인데, 한때 마루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멍석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보광루(普光樓)는 구룡사(龜龍寺) 경내로 들어가는 정문이 다. 입구의 추녀 밑에 '치산룡악구사(雉山龍岳龜寺)'라는 현 판이 걸려 있다. 정면 5간(間), 측면 2간(間)의 맛배집으로 2층루(層樓)의 마 루집인데, 2층 마루에 깔린 멍석은 인부 3인이 3개월에 걸쳐 만들었다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전한다. 윗층은 마루가 깔려 있고, 밑은 통로가 개설되어 중앙에 출입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좌우의 2간(間)은 사방 판벽(板璧)으로 막아 창고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지붕은 맛배형으로 골기와가 얹혀 있으며 화려하지 않게 단청(丹靑)을 하였다. 좌우에는 방풍판이 달려 있다. 비록 조선후기의 건물이나 이곳 일대에서는 가장 장 대한 건물이며, 5간의 기둥이 큼직하고 누(樓)마루가 장중한 모양을 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6·25전쟁 때에도 소실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다. 참고로 구룡사(龜龍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아래는 龜龍寺(구룡사) 삼성각내에 모셔진 나반존자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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