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夏至 )에 관한 시모음 4)
하지 무렵 /안영준
동산을 오른 태양
진종일 하늘에 매달려
하루가 고된가
더위를 던지며 심통 부린다
간간이 들리는
매미 노랫가락에 맞춰
기다렸다는 듯이
밤꽃은 미묘한 춤사위 한다
보리타작 끝난 논배미에
농부 써레질하고
아래 논 터 잡은 어린 쌀나무
혈색 제대로 돈다
뜸부기 모 논에서
비장한 난타 놀이하고
비 떨어지기를 갈구하는
개구리 소리 청은 높아진다
하지 /문정영
내가 붉은 화장을 하기 전에 잎들은 오목렌즈를 꺼내었다
이제 새들은 입을 다물어야 할 때
그리고 나무들은 도수가 높은 안경을 맞추어야 할 때
드디어 햇살에 눈이 마주치고 내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는 것들은 너무 가까워 묽기가 덜하고
멀리 있는 것들은 초점이 멀어 덜 붉었다
공원에서 여름 나무들이 돋보기를 쓰고 있을 때
새들이 지난 계절 혼자 울던 일을 반성할 때
너를 놓고 나니 다른 네가 더듬거리며 다가왔다
더듬거리면서 닿은 것들의 얼굴이 붉은색이었다
하지의 정오 /김중
세계는 열매 하나 맺고 싶어서
가랑이를 한껏 벌리고 햇빛을 쪼인다
어쩌면 좋으랴 하지의 정오
하지의 정오 어쩌면 좋으랴
빛 한 줄기 등허리에 손톱 쑤셔박으며
사랑에 미친 세계가
웃다, 흐느끼다, 까무러친다
하지의 밤 /강성은
아이들은 신이 났다 축제는 해가 떠 있는 동안
사방에서 모여든 서커스와 놀이 기구들 그리고 구경꾼들
툰드라의 태양은 불면 중이다
불면의 밤이 환하다
녹색 이끼들은 사람들의 발목까지 자라나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어둠은 턱 밑까지 차오르는
축제의 밤
이 환한 밤이 끝나면 다시 어두운 밤이 시작되리
밤을 여행하던 사람들이
계절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한여름 밤의 노벨레
하지(夏至) /김언희
딸꾹질만이
백만 번의 따귀로도 멈출 수 없는
멈춘 적 없는
딸꾹질만이
모가지가 사라지고도
멈추어지지 않는
딸꾹질만이
다만 허덕임일 뿐인
이 허덕임만이
참을 수 없는
기갈만이
심문과도 같은
이 기갈만이
끝없는 하지夏至만이
말라붙는
천변의 기포들만이
잡아먹을 듯 탐닉하던 눈알들만이
너무나 많은 것을 집어 삼켜
더는 아무것도 삼키지
못 하는 눈알들
망막이
벗겨져 나간 눈알들만이
익어버린, 익었지만
꺼지지 않는
질긴
기포들만이
하지(夏至) /김영산
밤꽃 냄새가 확 풍긴다
솜털 보송보송한, 긴 꽃줄기
샛노란 벌레같이 땅을 긴다
뼛속은 오그라들어 타들어갔지만
다시 보니 점점이 눈부신 등 같다
도토리나무 잎사귀에 내린 그것을 나는 줍는다
긴 하루는 어디서 오는 것이냐,
이제 모두 가버린다 믿었지만
사리울산 에돌아 어린 딸 손 잡고 왔다
소래 가는 샛길 얽히고설킨 그늘 밑에
새끼 사슴이 자꾸 숨는다
사슴목장, 사슴뿔이 어느새 나뭇가지 모양 자랐다
땅가시덩굴이 철조망 덮고
산딸기 붉은 등에 먼지가 끼다
하지1 /김주완
개의 혀가 붉은 능소화처럼 늘어졌어
술을 헐떡이는 소의 눈동자가 풀어졌어
해가 지지 않는 오늘 같은 날은 싫어
도대체 밤이 오긴 오는 거야
설레는 한 주를 보내도 푸른 행운을 번번이 빗나가고
이제 기다리는데 이력이 났어
설레지도 않아
그럼, 내게 왔을 때만 너는 내 여자야
문을 나서고, 꽃잎처럼 날려 가는
지구 끝에서 온
너를 붙들고 있으면 안 되지
새는 날아야 새가 되는 거야
정말, 왜 이리 긴 거야 오늘은
옛날
싫은 과목의 끝나지 않은 수업시간 같아
여름 이야기 /정끝별
아이스커피 잔에 맺힌 물방울이 미끄러지자
하지의 저녁 창에 소나기가 들이쳤다
급히 닫힌 창 안은 꽃 속인 듯 깊고
창에 맺힌 빗방울이 폐포처럼 벌떡이다
물 끓는 소리를 내며 가쁘게 흘러내렸다
찬물에 해동되는 굴비가 비릿하고
한소끔 끓어오른 아욱국이 자욱하고
식탁엔 숟가락과 젓가락이 기다랗고
세찬 비는 흠뻑 젖은 귀갓길 신발들을
서, 서, 서, 창 안으로 다급히 쓸어 담고
하지(夏至) /임보
창밖 담장 위에
비둘기 한 마리 앉아 있다
미동도 하지 않고
몇 십 분을 그러고 있다
잠을 자는 걸까?
아니, 눈을 깜박이고 있다
명상을 하고 있는 걸까?
좌선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방안에 갇혀 있는 사람이
궁금해서 엿보고 있는 걸까?
하지일 오후 네 시쯤
달이 해를 가리는
일식(日蝕)에 들고 있는데…
* 2020년 6월 21일은 하지(夏至)이며 부분 일식(日蝕)이 진행됨.
하지(夏至) /장석주
하지예요 서둘러 바다로 달려왔지요 바다는 여전히 자비로워요 아아 노을 번지듯 내 가슴은 그대 그리움으로 에이는 듯 하지요 내가 그대를 독점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그것은 나쁜 욕심이었을까요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가장 가까이에서 그대를 느끼려고 했던 것은 너무나 큰 꿈이었을까요 말해줘요 내 안에 있는 단 한사람 그대여 그렇게 입 꽉 다물고 있지 말고 말해줘요 오늘은 하지 특별한 날이예요 그대의 침묵이 가장 길게 느껴지는 날 내가 그대를 태양의 빛 속에서 가장 오래 볼 수 있는 날이라구요 그러나 그대는 너무 눈부셔서 바라볼수록 눈물이 나요 그대를 사랑했던 것은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의 진보였어요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이었어요 처음 그대를 보았던 순간 내 가슴은 아름다운 낙원이었지요 그 낙원은 곧 상처였어요 바람이 불면 온봄이 아프고 비가 오면 덧나는 상처예요 봅시 힘들었어요 하지만 나 지금 사랑은 온몸을 던져 얻는 상처라는 걸 알았어요! 첫눈이 온 날 미친 듯이 거리를 헤매다녔지요 한 해 중 가장 긴 날이 저물고 있군요 어둠이 저 바다의 일렁이는 이마를 가만히 짚고 있군요 그만 자라고 타이르듯이 오늘은 하지 낮이 가장 긴 날 그래서 당신의 밤잠이 짧을 수밖에 없는 날이에요 어둠 속에서 파도는 상냥한 애인처럼 저 혼자 왔다가 물거품만 남기고 서둘러 물러나지요 나 아직 어두운 바닷가에 혼자 있어요
하지 무렵 /이해리
한 마장이나 남은 햇볕이
상추 파는 할머닐 불러냈다
뽀얀 노을을 켜 놓은 할머니 얼굴, 앞니가 세 개
빠져 있다
광명부동산 문을 빠끔 열었다가 떠밀려 나오는 함지박엔
땡볕에 그을려 싱싱한 상추들이
푸른 눈을 뜨고 파닥거린다
딘장에 비비묵으마 을매나 꼬시다고 색시, 마
다 사 가소 사 가소
빠진 치아로 흘러나오는 구름이 화안하다
할머니 연세가 얼마세요? 나? 구십 둘
부시럭부시럭 꺼낸다 꽃 피는 비닐봉지
고맙니더 색시 고맙니더 색시
이천 원어치 흐뭇한 태양이 봉지 안에서
오물오물 상추밭을 키운다
하지 /구본옥
연락 좀 하지
대낮 땡볕에
감자 캐려면
어지러워 하늘 땅이 춤을 추고
땀으로 뒤 범벅이 되어 힘이 들 텐데
(하짓날 감자 첫 수확 하는 시기)
하 지 (夏至) /은석 김영제
태양이 그림자를
먹었다
내것도 모자라
빌딩도 아파트도
모두 먹었다
태양은 아직도
배고픈가
계속 먹으려한다
그만 먹으러했더니
모두 뱉는다
태양과 나
저녁 8시까지 싸웠다
그러다보니
오늘 하지
오래 같이 있고 싶었던건데
夏至(하지) /김남식
벙어리 입 벌린 양
말 못 할 무더위에
흐느적 무내 인심
저마다 각양각색
후끈한 불쾌지수에
시름 앓는 인생사
하지(夏至) /신성호
쬐악볕이 작열하는 계절
여름이 응큼하게 다가왔다
땀은 절로 베어나고
온몸은 열기로 가득하다
봄을 맞나 싶더니
여름이 멋모르고 달려왔다
그 속에 하지란 절기가
버티고 여름을 알리고 서있다
겨울의 긴긴 밤이
여름의 짧은 밤이
서로를 의식하고
주야를 밀고 당기는 것이
세상 이치에 다 이르니
사계의 돌아감이 자연의 순리로다
하지 무렵 /석민재
울면서 밥을 아직도 먹고
숨 꼭 참고 저승을 아직 가고 있고
여름 쪽으로 건너오는 너와
오후의 볕을 오려 붙이는 내가 보이면
개가 하나도 남김없이 다 먹어치운 것은 개다
뿌리내린 꽃은 조화다
덕이 없어,
우리는 충분히 불행했으니까
죽은 줄 모르고 돌아다니기에는 낮이 정말 지루하지 않은가
무사하길 바라며 썼던 백 장의 기원문은 진짜 식상하지 않은가
장갑도 없이
마늘 묶으면서, 감자에 묻은 흙을 툭 툭 털면서
나쁜 일이 생기지 않기를
과거로 서로를 맵게 묶어 두지 말기를
좋은 뜻에서 말이야,
좋게 생각하면 말이야,
이제야 말이야
하지 무렵 /유홍준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는
정지문 앞에 서서
수건을 벗어 펑펑 자신을 때리며 먼지를 털었다
그 소리가 좋았다
나는 밭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먼지를 털고 끓여주시는 국밥이 좋았다
점심때는 늘 뒷산 멧비둘기가 구구 구구 목을 놓아 울었다
마당 가득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텃밭 가득 감자꽃이 피고 지고 있었다
바닥이 서늘한 마룻바닥에 앉아
나는 아무 말도 안 하고 그 서럽고 가난하고 뜨거운 국밥을 퍼먹었다
검불 냄새가 나는 수건이었다
펑펑 자신을 때리며 먼지를 털던 수건이었다
구구 구구 목을 놓아 울던 수건이었다
깨끗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은 수건이었다
어머니가 벗어 놓으면 꼼짝도 않고 어머니를 기다리던 수건이었다
하지 /조수옥
서당골 코빼기산 닭 벼슬바위가 거뭇하다
툇마루에 앉아 책을 보는데 객지에 산다는
동창 부음을 받고 가슴께에 조등을 내건다
감나무 아래 늙은 개가 땅바닥에 졸음을 내려놓았는데
한 평 그늘이 묘혈 같다
마늘단이 까실히 말라가고
처마 밑 제비 살던 오막살이 한 채
적막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