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7대 불가사의, 로도스 거상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Hic Rhodos, hic salta!"
옛날부터 잘 알려진 문구다.
"이곳이 로도스다,여기서 뛰어라." 그러나 이 말은 로도스의 아폴로 상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허풍쟁이'를 말하고 있다.
허풍쟁이는 외국을 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여행지에서 있었던 갖가지 일들을 거짓말을 섞어가며 자랑했는데
그 중, 로도스 섬에 갔을 때 올림피아의 우승자도 따르지 못하는
멀리뛰기의 신기록을 자신이 세웠다고 자랑을 했다.
"만약 자네들이 그곳에 가게 된다면 내 소문을 들을 수 있을 걸세.
암,대단한 인기였으니까."
그러자 옆에 있던 한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이봐, 친구. 그것이 사실이라면 굳이 증인도 필요 없지 않게나?
이곳이 로도스라 생각하고 어디 한 번 뛰어 보게."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여기가 로도스다. 다시 뛰어 보아라." 하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으며 이 문구는 오늘날까지도 "말만 하지 말고 증거(실천)를
제시해 보라."는 우화적인 비유법으로 잘 쓰인다.
한편, 우리가 알아보고자 하는 로도스 섬의 아폴로 상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조각가 리지포스의 제자 중 한 명인 로도스 섬의 샤레스는 거대한 청동 입상에
몰두했다.
그는 그 일에 기원전 299년부터 280년까지 정확히 20년을 투자했다.
그러나 명확한 증명을 해낼 수는 없다.
거기엔 풀리지 않는 의문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전설에 따르면 로도스 섬의 주민들이 태양신 헬리오스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 거상을 세웠다고 한다.
처음엔 20m 높이의 입상을 계획했다.
샤레스는 주문자들이 싸게 느끼도록 비용견적을 내야 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그들이 그에게 다음 주문을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싸게만 할 수는 없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여러분, 태양신 헬리오스의 명예에 걸맞게 작품을 더 크게 만들어야
할 겁니다."
오늘날, 학자들은 아폴로 상이 과연 어느 정도의 규모였는가에 대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아마도 32m 아니면 36m였을 것이다,라고 맞서고 있는데 이렇게 일치하지 않는
의견들이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측정 방식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논쟁점은, 아폴로 상의 외관이 어떠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예술가들에 의해 연출된 아폴로 상의 묘사는 모두 지나치게 환상적이거나,
혹은 그 반대이다.
로도스의 아폴로 상은 다리를 벌린 채 항구 입구에 세워져 있어서 입항하는
모든 선적들이 그 아래를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라고 되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해석에는 그 거대한 입상이 언덕이나 산 위에서 한 손을 높이 올리고
봉화처럼 불타고 있는 거대한 그릇을 들고 있도록 세워졌다고
설명되어 있다.
그 불은 올림픽 성화 같은 일종의 의례적인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었을까?
이 모든 것들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로도스는 이미 기원전 3세기 이전부터 한창 번영하는 중심지였다.
많은 선박들이 이곳에 정박했는데 새로운 식량을 공급받고 배를 고치기
위함이었다.
로도스는 활발하게 다른 나라들과 교섭을 했는데, 예를 들어 이집트가 그러하다.
이집트의 거대한 피라미드는 로도스인으로부터 건너온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증명할 수 있는 길은 없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에 속한 여러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통치와 압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했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490년 그리스의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로도스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섬도시 로도스의 주민들은 곧 과감한 항쟁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로도스도 무릎을 꿇었고 페르시아 인들은 포위공격을 감행했다.
페르시아의 완강함은 모든 것은 쇠약하게 만들었고 그 손실은 굉장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가뭄은 로도스 사람들이 해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때 예기치 못한 시커먼 구름이 로도스 전체를 뒤덮고, 강력한 돌풍이
갑작스럽게 몰아닥쳤다.
하늘은 잔뜩 흐려졌고 억수 같은 비가 쏟아졌다.
이것으로 로도스는 구조되었다.
로도스는 여신 아테나 린디아의 조작에 의해 구출된 것이었다.
페르시아의 최고 지휘관은 이와 같은 여신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가 보기에 상대편 그리스에는 강력한 여신이 존재하여 외부 공격을
막아 주는 것 같았다.
다티스는 여신 아테나에게 필요한 제물을 바치고 그 다음 포위망을 풀었다.
결국, 페르시아와 로도스는 조약을 맺기로 했다.
로도스는 그리스와의 연합을 취소하고 강력한 국가 페르시아와 연맹하는
책략을 보였다.
그것은 순수한 관계가 아닌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이었다.
70년이 흘러 기원전 408년에 로도스 시가 건설되었다.
섬의 북쪽 끝에는 민주제도가 자리잡았다. 국민회의가 있었고, 반 년마다
변경회의가 있었다.
로도스의 국무는 매우 진취적이었지만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큰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기원전 307년, 이집트와 대립하던 마케도니아의 지휘관 아티고노스 -그는
애꾸눈이라고 불렸다- 를 원조하기로 했는데 그건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집트는 유명하고 또 그만큼 중요한 교역 상대국이 아닌가!
로도스는 거절해 버렸고 애꾸눈의 아들인 데미트리오스의 공격을 받음으로써
그 대가를 치렀다.
로도스는 완전히 포위되었으나 도시만은 완강하게 지켰다.
그런데 성문 앞에 정말 엄청난 기계가 출현했다.
그것은 밑변이 22m에 높이가 30m쯤 되는 이동 가능한 첨탑처럼 보였다.
내부는 9층으로 되어 있고 사방에 투석기를 갖춘 포문이 열려 있었다.
그 괴물과도 같은 것이 로도스 시의 성문과 성벽을 밀고 들어왔다.
로도스 인들은 해안에 방화함으로써 화전(火戰)으로 번졌다.
성 안에서는 공격에 대비한 준비를 했다.
그 기계의 외피는 젖은 짐승의 가죽을 부착시켜 만들어졌고 그 위에 물을 뿌려
고정시켰다.
탑의 한 층은 완전히 물을 저장해 두기 위한 탱크로서의 역할만 했다.
그리고 아래층에는 성벽 파괴기가 장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데미트리오스는 절대 돌이킬 수 없는 불운한 과실을 행하고야 말았다.
즉, 성벽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해 성을 함락시킬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했으나
도시의 정복을 다음 날로 미루고 철수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 로도스의 방어자들은 구멍을 파서 돌격포를 장치하는 등
함정을 만들었다.
그 괴물 기계는 돌진하다가 성벽의 중간에 멈춰서 버렸다.
교활한 함정에 스스로가 빠져버린 것이다.
이로써 데미트리오스는 사실상 패배했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수교 협상을 제안 할 수조차 없게 되었다.
로도스는 냉정하고 분별 있는 판단을 내려야 했다.
첫 번째 공격은 막아냈지만, 일개 병력은 쇠약해졌고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머지않아 적들은 또다시 공격해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로도스 인들은 성벽을 수리하고 도시를 재정립하기 위해 쉴 틈없이 노력했다.
그 결과로 도시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미트리오스는 평화협정을 제안했는데 지나치게
호의적이었다.
그는 충분히 낙담해 있거나 전쟁에 지쳐 있었던게 분명했다.
로도스 전체에서는 그 모든 행운이 태양신의 도움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로도스 인들에게 있어서 태양신 헬리오스는 수호성도였다.
태양신은 그 무렵에 갈증으로 죽어가는 도시에 비를 뿌려 보호해 주었다.
그러한 신을 찬양하기 위해서 거대한 청동상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자, 그럼 누가 그에 대한 값을 지불하는가?
데미트리오스와의 전투에서 보인 신의 위대함을 높이 찬양하기 위해서 동상의
높이는 40m로 결정되었다.
시민들은 터무니없이 비용이 많이 든다고 생각했다.
그때 그야말로 천재적인 착상을 가진 상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데미트리오스의 그 괴물기계를 팔았다.
기계에 대한 값으로 7,800kg의 은을 지불했고 아폴로 상은 제작에 들어갔다.
이 일은 저명한 리지포스의 제자로 널리 알려진 최고의 조각가 사레스에게
위임되었다.
샤레스는 대부분의 예술가가 그렇듯이 계산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돈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20m 높이의 입상에 대한 처음의 비용견적은 매우 낮게 산출 되었다.
샤레스는 대단히 빠르게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높이가 2배면 비용도 2배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의
당초 계산은 틀려졌고 비용이 8배가 높게 나왔다.
그 결과 이 대규모의 동상 제작 주문은 샤레스에게 엄청난 능력을 주었지만
그는 완전히 파산하게 되었다.
사람들이 막대한 비용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아폴로 거상은 완전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하는데 전설에 따르면,
폭풍과 같은 재해를 막기 위해서 거상 다리 부분의 커다란 바윗덩어리를
잘라냈다고 한다.
하지만 제작에 있어서 기술적인 부분이 발전하여 특수한 주조방법이 생겼고
입상 주변에 흙으로 담을 쌓기도 하고 조금식 형체를 다시 만들어 갔다.
그 뒤 흙담을 허물기도 해서 입상은 그리 튼튼하지 못했지만 기원전 280년엔
어쨌든 완성이 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뒤 기원전 227년부터 224년 사이에 지진이 발생해서
결국 아폴로 상은 붕괴되고 말았다.
아폴로상의 무릎 윗부분부터 절단되었고 따라서, 몸체가 함몰될 수밖에 없었다.
이 재난이 있고 난 후 아폴로 상을 재건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 분열이 있었다.
그 이유는 역시 비용 문제가 주를 이루었다.
만약 외화 도입을 해야 했다면...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우스 3세는
그 돈을 빌려 주었을까?
아마 그였다면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그 돈을 빌려 주었을지도 모르지만
로도스의 상인들은 그런 제왕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유명한 델피의 신탁에 익숙해져 있었고 거기에 충실했다.
"마음이 동하는 제안은 즉석에서 따라서는 안 된다."
그래서 추측컨대 사람들은 900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 쓰러진 입상을 그대로
놔 두게 되었다.
서기 653년에 로도스 섬을 정복한 군주 오트만은 한 유대인에게 방치되어 있는
고철덩어리를 팔아치웠다.
그 훌륭했던 거인의 잔여물을 시리아로 운송시키는 데에는 900마리의
낙타가 필요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로도스의 아폴로 상'은 무역의 중심지 에데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죽림의 향기 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