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미국으로의 이주는 간호사 취업이민이었다.
서류상으로는 인디애나 주의, 한 주립병원에 이미 취업이 허가되어 수속이 진행되었고
뉴저지의 언니 집에는 미국 영주권이 나보다 한 달이나 먼저 도착하여 날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라는 직업은 내가 원했던 꿈의 직업은 아니었다.
어릴 적부터 신문이건 만화책이건 무엇이나 읽는 걸 좋아했다.
근데 교과서 읽는 건 왜 그리 재미가 없었을까?
아니 교과서도 국어나 문과 종류의 책은 좋아했던 것도 같다
새 학년에 올라 새 교과서를 받아 들면 국어나 영어, 역사 같은 과목들은
책의 목차들을 훑어보며 흥미가 가는 챕터들은 열심히 읽은 기억이 난다.
생물이며 물리 화학 등의 과목은 왜 그리도 싫었던지..
몇 학년이었던가..?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에 대해 리포트를 작성하는 숙제가 있었다.
도서관에 가서 지난 신문들과 책들을 뒤적여가며 리포트를 작성하고 발표하는데
너무나 재미있고 흥미롭고 신바람이 나는 거였다.
분명 숫기도 없고 수줍음도 잘 타는 아이였음에도
초등학교 때는 웅변대회에 대표로 나가서 상을 탔던 기억도 있다.
노래를 곧잘 불러 군 소재지였던 소도시에 경축 행사라도 있을 때면
공회당 같은 넓은 강당의 많은 대중들 앞에서도
노천극장의 많은 관객들 앞에서도 독창을 부르는데 별로 떨림이 없었고
목소리가 낭랑하고 맑다며 성우나 아나운서의 길을 권유받기도..
내 적성을 찾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추구했다면
아마 난 신문사나 방송계에서 일하는 직업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수학은 재미있었다.
대학시절에 국/영/수 알바를 좀 했는데,
내가 가르키는 아이들의 성적이 오르고 아이들하고 캐미가 맞으면서 교사의 길은 어땠을까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노래를 조금 하고 음악을 많이 좋아했지만, 나에게 조금 더 소질이 있었으면 성악을 전공하고 싶은 간절함도 있었다.
변호사가 될 수 있다면?
만화책부터 신문의 구석구석, 도서관의 많은 소설책들을 섭렵하여 읽으면서
작가가 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꿈꾸어 본 적도 있다.
그렇지만, 간호사라는 직업은…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But life doesn’t seem to go your way!
나는 여차저차 생각지 않았던 간호대학을 들어가서 간호사가 되었고
여차저차 미국까지 오게 된 것이다.
미국에 왔으니
나의 다음 할 일은 하루속히 미국의 RN (Registered Nurse) 라이센스를 따는 것이었다.
각 주마다 RN에 관한 규정이 조금씩 다르다.
뉴저지에서는 RN 시험에 응시를 하려면 TOEFL(Test of 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시험 준비도 해야 했다.
언니도, 형부도 나의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꽤 큰 규모의 가발 가게와 Boutique 가게를 종업원들 하고만 운영해오다가
내가 미국 도착한 다음 날부터 가게에 나가서 이런저런 도움이 되다보니
매일 함께 출근 저녁 늦게야 돌아오는 것이 일상처럼 되어가고 있었다.
아침이면 으레 함께 출근할 것을 기대하는 언니/형부의 시선을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후, 6개월 가량을 두 가게를 오가며 언니와 형부 일을 도왔다.
엄청난 두께의 간호학 textbook( Medical/Surgical, Pediatric, OB/GYN, Psychiatric)과 토플 준비교재도 구입했다.
한국에서 우리말로 공부했던 모든 교재를 이젠 영어로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하는, 참으로 버거운 대장정이 앞에 놓여 있었다.
틈틈이 시간을 내어, TOFEL 이며 영문의 텍스트북들과 씨름해 보았지만 별로, 진도는 나가지 않았다.
City of Newark,
언니와 형부 가게는 여러 하이라이즈 오피스 빌딩들이 있는 뉴악 중심가에 있었고
낮에는,
오피스 빌딩에서 쏟아져 나오는 화이트칼라 무리와
의복과 구두에는 세일즈 텍스가 없는 뉴저지주여선지
이웃 뉴요커들이나,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이곳까지 쇼핑을 오는 사람들도 제법 있어,
낮 동안에는 거리가 제법 대도시다운 활기를 띄워 안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그들이 퇴근하고 백화점들도 문을 닫은 후,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도시는 금세 범죄가 도사리는 위험하고 으스스한 장소로 변해버린다.
난 그 도시, Newark에서 미국을 배워가고 있었다.
나의 본래 성격은 별로 낙천적이지도, 별로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수줍음을 잘 타 얼굴이 쉽게 빨개지고,
모르는 사람들에게 쉽게 말을 걸거나 친화력도 별로였다.
시골에서 나서 자라면서,
초등학교 몇학년이었는지 학급 반장도 해보고
전교 학생 조회 시에 구령을 외치는 대대장이라는 것도 해보았지만
자주, 나의 수줍음이 불편했다.
활달한 성격의 친구들이 보기 좋았다.
어느 때부터인가,
이를 극복해 보려 나름 노력했던 거 같다.
사춘기 시절엔 주위의 모든 것이 '회색빛'이었다.
초등 졸업 후, 서울로 유학을 가서 잠시 학교를 다녔지만
집안 사정으로 졸업을 못하고 중간에 다시 시골로 내려왔다.
신익희 선생의 동지로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으신 후,
뜬 구름 잡 듯 하신 아버지의 희박하신 경제능력 덕분에
우리 집 살림살이는 늘 옹색했다.
일 년의 많은 달 수를 서울에 계시다가 겨우 몇 차례 집에 오시는 아버지의 주머니는 늘 가벼웠다.
아이들 교육비며 생활비에 쪼들리며 늘 마음 조였던 엄마는 그런 아버지가 원망스러웠고..
그런 엄마의 불행해 보이는 삶이, 나에겐 늘 숙제였고 가장 큰 그림자였다.
아버지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성실, 근면하신 분이었고,
아내 사랑/자식 사랑이 유별나신 분이었다.
고생하는 아내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편지를 읽은 적이 있다.
구구절절 담겨있는 아버지의 진심 어린 미안함, 필체와 문장력에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시골로 전학온 후,
차츰 학교에도 선생님들의 가르침에도 흥미를 잃어가고 도전도 없고..
닥치는 대로 소설책들을 읽었던 것 같다.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왜 그리도 좋아했던지..
데미안은 왜 읽고 또 읽었는지…
더욱 내향적으로, 염세주의 허무주의로 변해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한 친구가 그랬다.
'어느 날 문득, 네 모습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운 마음이 들곤 해'
난,
한번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도
내가 언젠가는 ‘극단적인’ 일을 저지를 것 같다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
신기하게도, 정말 신기하게도
나의 안에 있던 의문들이 하나씩 서서히 걷히어져 갔다.
허무주의도, 염세주의도..
회색빛이었던 것들이, 희미해 보이던 것들이, 어두움에 가려있던 것들이
차츰,
환한 색으로, 투명한 것들로, 빛의 색깔로 다가왔다.
기적이었다.
나에겐...
.
.
.
Newark 에서 낮시간의 거의를 보내며 미국을 만나고 배워갔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계획 없이 살아가는 빈민가 흑인들을 보면서
뉴앜의 거리, 골목마다에서 어메리칸 드림을 향해
오늘이 없는 것처럼 죽을힘을 다해 살아가는 이민자들을 보면서...
첫날,
으시시한 모습으로 다가왔던 뉴앜 시내마저 차츰 친근해졌고 좋아지게 되었다.
옷가게 건너에 있던 이태리 피자집-
의자 하나 놓을 공간도 없을 만큼 비좁은 공간에
그저 문가 한쪽에 서서 피자 도우를 만들던 셰프의 손놀림을 신기하게 바라보다가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건네받던 따끈한 피자가 들은 노란 봉지..
정말, 정말 맛있었다.
그 후, 아무 데서도 그처럼 맛있는 피자를 만날 수가 없다.
가발가게의 손님들도, 옷가게의 손님들도
모두가 나의 영어선생이 되어 주었다.
영어!
미국땅을 밟기까지는 제법 자신 있다고 생각했던 영어였는데
완전히 나의 오해였고 착각이었다.
한국에서 그 몰몬교 청년은 내가 알아듣기 쉽도록 천천히 제한된 단어들을 구사해 주었지만
정작 미국은 그런 친절한 곳이 아니었다.
티브이 속의 영어도, 내가 마주치는 미국인들의 영어도,
오직 나를 주눅 들기 위한 영어들이었고
드디어 영어공포가 나를 attack 하기 시작했다.
허지만 이 모든 상황들 속에서도 참 다행스러운 것은
주위의 사물들에 낙천적이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다가갔고
앞으로 모든 게 다 잘될 거야 라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있었다.
Newark , 해리슨에서 본 스카이 라인 (구글에서)
첫댓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는 분들은 그 시절 힘든 일 피하지않고 정정당당 열심히 노력한 댓가를 지금 누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많이 쓰시면서 힘들었던 세월이 힐링되고 성취한 자부심 느끼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큰 박수 보냅니다.
부족하지만 my story 를 쓰다보니, 한가지 저에게 도움되는게 있네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다던가..
그래..이건 그 때 잘 한 거 였네..라던가,
이건, 좀 아닌 거 였네..라던가, 라구요.
격려 감사드려요.
@annie1885 조금 생각해 보면 우리회원분들 모두에게 아주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다.
우선 hp00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Filtering 확실히 되어 카페품격이 오르고 분위기도 훈훈해지고..
여태 눈팅만 하던 분들에게도 뭔가 쓰볼 동기를 부여..
물건너 살면서 서로 공감하고 감사하는 댓글로 오랫만에 필력점검하는 기회를 제공...
아직 이르다고 할지라도 회고록/자서전을 미리 시작하면 그만큼 더 여유롭게 잘 다듬어서..
후세에게는 족보만큼 큰 의미/복을 내리는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 많은 분들이 우선 댓글쓰기로라도 감사/동참/힐링하는 촉매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실 저도 은사님들이 보내주시는 회고록을 읽으며 생각을 더 다듬게 되었답니다.
감사합니다
글 흥미롭게 잘읽었습니다
전 해리슨 옆 동네 커어니(keany) 에서
16년 정도 살았습니다
사진보니 정겹네요
아이들 교육이 문제가 되었는데요
흑인 들과 스패니쉬만 사는 동네라
와이프가 사립학교 보내자고 우기는
바람에도 아랑곳 하질 않고
인종차별을 어릴때 부터 겪고 이겨내야
미국에 살아 남을수 있다는 변명으로
대처할수 있었네요 ㅎㅎ
남자 아이들이라 가능했던 같아요
지금 에서야 생각 해보면
자녀 교육에서 제일 잘한일 같아요
아쿠, 반가워요.
저도 아들만 둘이거든요.
미국의 공립학교 시스템에
높은 점수를 주는 1인 이기도 하지요.
응원, 감사드려요.
annie 님의 글을읽으며 비슷한게 보이는 올해43인 딸을 생각해봤습니다.
중고등학교다닐때 자기는 숙제하는게 제일좋다고 하는 별란 아이에, 책읽기를 좋아해서 언제나 지금도 쉬는날엔 침대에서 딩글딩글 둘어누워서 책만읽는 아이,글쓰는걸 좋아하여 문학지에 글을보내 당첨되었다고 말하여 행여나 그길로 나갈까봐 맘조림한적도 있었는대
고교졸업후 변호사가 되겠다고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여, 졸업후 변호사 사무실에 나가서 일해보더니 사람들과 싸워야하는게 싫다고
포기하고,고교시절 양로병원에서 2년정도 봉사하던게 생각났는지
간호원이 되겠다하여,간호대학원 까지 공부했는대 낮에는 학교가고 밤 10시까지 아이들 영어를 가르키며 학비와 생활비를
벌면서 공부하여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하더니 코로나때 너무 견디기 힘들었다고 1년을 쉬고 난후 다시 일을하지만
의사나 간호사나 직업의식으로 환자를 보아야하는대 감정으로 대하다보니 슬프고 죽어가는 사람들보는게 정말 힘들다고
이따금 간호원이 된걸 후회하는걸 본적도있지만,
이제 나이를 먹고나니 현실에 충실히 살고있는것 같아보였습니다.
딸이 간호원이라 같은 일을 하셨던분들에게 반가움이 있어서 몇자 회상해봤습니다.
간호원 따님을 두셨군요?
반갑습니다.
처음에 제가 꿈의 직업으로 택한 간호사는 아니었지만,
간호사로 근무하는 동안 얼마나 제가 하는 일에 긍지를 느끼며, 만족하고, 감사하며 지냈는지 몰라요.
근무를 마치고 퇴근길의 차 안에서,
이처럼 보람된 job 의 기회를 감사하며 노래하며 집으로 향하곤 했었지요.
저는 91년에 한국에서 CGFNS 시험을 합격하고 H1 비자로 뉴저지에 있는 병원 간호사로 취업한 상태로 미국에 들어왔어요. 혼자 미국에서 RN 시험 공부 하기도 합격하기도 많이 힘들다고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가게일도 하셨으니 고충이 느껴집니다. 그래도 사람 사는일 이걸 얻으면 저걸 놓치지요. 30여년 병원에서 빡세게 일하고 병든몸이 여기 있습니다만^^ 지난 세월을 뒤돌아보게 하신글 잘 읽었습니다.
저보다 10년 쯤 후배이시군요?
반가워요.
간호사 직업이,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긴 하지요.
30년~
지난 세월 돌아보는 여정길에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시길요.~
애니님의 자서전 잘 읽고 있습니다. 작가의 길을 갔어도 크게 성공 하셨을것 같아요.
이제 지난날 들을 회상 하면서 즐거운 나날 보내시기 바랍니다.
구름님의 격려의 말씀에,
너무 너무 기분이 좋아졌답니다.
이러다가 정말 '자서전' 까지 욕심내지 않을까
심히 염려가 되옵니다.ㅎㅎ
혹시 미리 자서전 준비를....
글 한줄 헌쥴마다 삶에 애환이 .
늦게 미국땅에 발을 내린 저로서는 감히..
.잘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올리마님까지 '자서전 ' 이야기를 하시면
아니되옵니다요.
그나저나,
언제 돌아오시는지, 야생화님도 8월에 한국에 가신다 하고 그저 부럽군요.
글을 잘 쓰신다 생각 했지만 역시 뒷 배경, training, 또는 습작기간, 이 있군요, 감사히 잘 읽었읍니다. 처음 글에서 미국 생활이 순탄했다 하셨지만 아무리 쉬워도 이민자라면 누구나 기본 분량의 고생이 있구나 생각 했읍니다..
기본 분량의 고생~
그렇겠지요?
그런데 그 당시에도, 지금도 별로 고생으로 생각되지가 않았으니
제가 좀 둔한 편인 까닭인가 봅니다. ㅎㅎ
나도 간호원이 되고 싶었는데 병원에 근무해보니까 아픈사람들보니까 집에오면 조금 스트레스가 생겨서 어칸운팅으로 전공을 바꿨습니다.
내딸이 RN 되었다가 NP 지금은 DNP 내대신 꿈을 이루어 졌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Newark Airport in New Jersey,
어둡고 음침한 뉴욕의 뒷골목.. 너무나 맛있던 처음본 망고와 켄탈럽의 달고 향기로운 맛.. 지긋지긋한 영어.. 미국살이를 되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