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十 章. 바한령의 패거리
쑤종 부락의 족장 타센은 그의 말 한 마디에 식은땀을 주르르 흘렸다. 자기 부락을 찾아든 손님이 '하타'를 서로 교환하지 않겠다면 그건 적대행위를 하겠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는 라마승의 시체를 흘낏 쳐다보고 다시 한번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관습을 무시하는 이들 불청객의 손에 라마승처럼 꼭 맞아 죽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중국 손님, 아까 말씀은 우호적으로 오셨다더니....]
시철은 정색을 하고 그 말을 잘랐다.
[두 번 말하지 않겠소. 우리는 그저 당신네 땅을 지나가는 나그네일뿐이오. 하릇밤 눈보라를 피해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해줄 것을 부탁드리는 거지 딴 뜻은 전혀 없소.]
[그럼, 당신네는.... 어째서....]
[일은 우리측이 저지른 게 아니오. 이 라마 샤푸룬이 먼저 살의를 품었기 때문에 부득불 자위방어를 한 것뿐이외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샤푸룬은 당신네 좌가승이 절대 아닐 거라고 난 믿소. 이 자는 남조기 측에서 당신네를 감시하러 보냈을 거요. 우리가 죽인 이상, 그 책임도 분명히 우리가 지겠소. 여기 있는 하부르 공주가 증인이 될테니까, 당신네는 걱정할 것 하나도 없소.]
시철은 운수대통을 안심시키고 죽은 라마승의 몸을 뒤져 해약을 찾아냈다. 그리고 기절해 쓰러진 고령과 단목장풍을 깨워 일으켰다. 족장 타센은 더이상 발뺌할 여지가 없어졌다. 주인으로서 내키지않는 손님을 환영해야 할 입장이 된 것이다.
[좋소이다. 여기서 묵도록 하십시오.]
손님은 염치좋게 당연한 말씀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하지만 우리 일행은 여러 군데 흩어져서 쉴 수는 없으니까, 천막을 두 군데로 나누어 지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탁을 마치자 그는 일부러 보라는 듯 라마승의 목에 박힌 철령전을 쓰윽 뽑아 거두어넣은 다음, 손에 들고 있던 장검도 칼집에 넣었다. 타센은 쇠화살촉에 묻어나온 살점과 핏기를 닦아내는 시철의 솜씨에 기가 질려, 손님의 잠자리를 습격해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마저 얼른 지워버렸다.
[아아...., 손님 좋으실 대로 잠자리를 고르시지요.]
[나는 동료 두 분과 하부르 공주와 함께 여기 당신 천막에 머물겠소. 다른 동료 세 분과 남조기 용사 세 분은 이웃 천막을 쓰도록 주선해주시오.]
불한당 같은 손님은 추호도 사양하는 빛이 없이 제 마음대로 주인에게 분부를 내린다. 잠자리 부탁을 끝낸 시철은 고령에게 다시 묘족어로 지시를 했다.
[영감님과 두진랑 그리고 저는 이 왈가닥 몽고처녀를 데리고 이 족장 천막에서 쉬어야겠습니다.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대처하기가 쉬울테니까요. 백영안, 문천패 두 아저씨는 소장주님과 함께 남조기 용사 셋을 데리고 오른쪽 천막에 머물도록 하십쇼. 모두 주의하실 것은, 투르판 부족의 겨우살이 막사는 짓기가 매우 힘이 들기 때문에 한 막사에 보통 한 가족의 남녀노소가 한데 들어 삽니다.
심지어는 두 집 살림이 들어 사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밤 잠자리가 몹시 비좁고 불편하겠지만, 그렇다고 천막을 통째로 우리한테 내어줄 여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밤중에 자그만 소동이 좀 있더라도, 어차피 우리는 손님이니까 이 사람들 풍속을 따라주시면서 쉬도록 하십시오.]
[무슨 풍속에 어떤 소동이 일어난단 말인가?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걸?]
단목장풍이 쓰디쓴 웃음을 지으면서 물었다.
[투르판 사람들은 외부 손님이 찾아들더라도, 한 천막 안에서 식구들과 함께 잠을 잡니다. 그러니까 남녀 구별 없이 어울려 자는 것이지요. 주인은 늦게까지 안 잡니다. 깨는 시각도 누구보다 이르지요. 손님 잠자리 곁에는 통나무 몽둥이를 한 개 놓아둡니다. 관습이지요. 아침에는 손님이 주인보다 먼저 일어나면 실례가 됩니다. 단단히 기억해 두실 것은, 잠자리 곁에 가로놓인 몽둥이를 치우거나 옮겨놓아선 절대로 안됩니다.]
[그건 또 무슨 도깨비 방망인가? 무슨 손님 대접이 그래?]
단목장풍으로선 전혀 이해가 안되는 관습이었다. 시철은 슬그머니 고개를 떨구면서 멋적은 웃음을 지었다.
[만일 손님이 한 천막 안에서 투르판 계집한테 눈독을 들이고, 그 계집 또한 손님에게 정감을 품었을 경우, 손님은 그 몽둥이를 타고 넘어가기만 하면 됩니다. 어둠 속에서 몽등이를 옮겨놓지만 않으면 주인은 낌새를 채더라도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몽둥이를 치우거나 잘못 건드려 놓았다가는 주인의 체면을 건드린 격이 되어, 노발대발하지요. 아마 그렇게 되는 날엔, 잠이고 식사 대접이고 다틀린 일입니다. 전 부락 사람들이 몽땅 칼을 들고 쫓아나와서 닥달하는 소동이 벌어질톄니까요. 그 결과는 아마 상상도 못할 겁니다.]
그 말에 단목장풍은 저도 모르게 픽하고 쓴웃음이 새어나왔다.
[맙소사, 이 투르판족들은 사내나 계집이나 일 년 열두 달 목욕 한번 안해서 노린내 비린내가 역겨울 정도로 나는데, 어떤 미친 놈이 이런 계집들한테 입맛을 다신단 말야?]
고령도 어처구니가 없는지 낄낄대면서 두진랑을 돌아보고 말했다.
[두소저는 하부르하고 자니까 그런 봉변을 당할 염려는 없겠군 그래. 밤중에 잘 봐주시오. 하하!]
[어디 기어넘어오지 못하도록 혈도를 찍어놓겠습니다. 아마 밤새도록 암퇘지모양 쿨쿨 잠만 잘 겁니다.]
대답하는 두진랑의 얼굴에도 웃음꽃이 발갛게 피어올랐다. 시철은 잠자리 안배가 끝나자, 다시 타센에게 질문을 던졌다.
[족장님, 여기 이 쑤쫑 쌍카란 분과는 어떤 사이십니까?]
[내 아우뻘 되는 사람이오.]
[저분을 오늘 밤 여기서 자게 해주십시오. 그래야만 마음 놓고 쉴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타센은 선선히 응락했다. 그는 천막 안의 나머지 식구들을 즉각 몰아낸 다음, 사람을 시켜 단목장풍 일행과 남조기 용사 셋을 이웃 오른편 장막으로 데려가서 쉴 자리를 마련해주게 했다.
족장의 천막 안은 또 한바탕 소란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살벌한 싸움판이 아니었다. 족장의 천막 안은 등잔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잔치자리가 마련되었다. 주인온 새삼 엄숙하게 격식을 차려 손님들을 맞이해서 자리에 앉혔다. 주인과 손님들은 모두 천막 한가운데 둥글게 자리잡고 앉았다. 족장 바로 곁에는 그의 아내가 아들 딸인 듯싶은 처녀와 청년을 데리고 앉았다. 그 다음 좌석은 왁살스런 쑤쫑 쌍카가 차지했다. 손님측 주빈은 고령이다. 두진랑은 하부르를 자기 곁에 단단히 붙여 앉혔다. 시철은 족장 따님, 묘령의 처녀 옆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그 왼편이 바로 하부르였다.
이젠 모두들 목도리와 두건을 벗어내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늙은 족장 부부의 옷차림새는 남녀 구분이 없이 똑같았다. 그들의 딸은 오관이 또렷한 게 상당한 태깔을 지니고 있었다. 두 눈망울이 언제보아도 촉촉하게 젖은 것이 웃음기를 철철 흘리고 있다. 머리칼은 열여덟 가닥으로 댕기를 땋았다. 이것은 18세 성년식을 거쳤다는 표시이다. 등뒤로 늘어뜨린 댕기머리는 붉은 헝겊 주머니에 담겼는데, 주머니 겉면에는 알록달록 오색 꽃무늬가 수놓였고, 구슬로 엮은 영락(纓絡)을 아래쪽에 늘어뜨렸는가하면, 테두리를 금은 고리로 꾸며서, 걸을 때마다 짤랑짤랑 듣기 상쾌한 소리를 낸다. 목에는 보석 목걸이를 네 겹이나 둘렀고 산호귀걸이 한 쌍을 어깨까지 늘어뜨렸는데, 귀밥을 뚫어서 건 것이 아니라 정수리에 고정시켜 흘러내린 것이어서, 두 뺨 근처에 와서는 표정이 바뀌거나 웃을 때마다 빙글빙글 돌면서 반짝거린다. 이런 장식만 보더라도 그녀의 신분이 남다르다는 것을 이내 알 수 있는 것이다.
족장 타센은 손님들이 자리잡고 앉자, 우선 자기 가족을 소개하였다. 늙은 여인은 그의 아내, 청년은 둘째 아들 쑤쫑 모(梭宗默), 불이란 뜻의 이름이다. 처녀는 세째 딸 쑤쫑 챰푸(梭宗藏布),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는 2남 3녀를 두었는데, 맏아들 쑤쫑 엘링친(梭宗額林沁)은 집을 나간 지 3년이 되었으나 소식이 전혀 없어 생사조차 모른다고 했다. 또 둘째 며느리는 지난 해 말을 타다가 잘못해서 마츄하 강물에 빠져 실종되었노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철은 고령 일행의 신분을 밝힐 처지가 아니므로, 자기 이름만 사실대로 말했을 뿐, 나머지는 대강 얼버무려 넘겼다.
이윽고 청년 두 사람이 음식 쟁반을 받쳐들고 들어왔다. 좌중 한가운데에 큼지막한 솥이 하나 놓이고, 그 안에는 길이 1척에, 무게만도 두세 근이나 됨직한 양의 넓적다리 고기가 집어들기 좋게 뼈다귀를 언저리에 드러낸 채 수북이 들어 있었다.
손님 앞에는 또 커다란 나무갑이 하나씩 놓였다. 몇 칸으로 나뉘어진 갑 속에는 쌀보리와 설탕, 발효유(醱酵乳), 말린 과일 따위가 담겨있었다. 그밖에 술을 따라 마실 나무 그릇이 한 개씩 배당되었다. 행동거지가 워낙 세심한 시철은, 술이며 음식이 들어오기 직전에 묘족어로 고령과 두진랑에게 투르판의 식사관습을 귀띔해주었다.
[좀 있으면 고기를 먹게 됩니다만, 그때 제 손놀림을 잘 보아두십시오. 그래야만 실례를 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지금 고기를 씰어 먹을 칼이 없습니다. 아마 주인이 곧 준비해 줄 텐데, 고기를 자를 때 칼끝을 절대로 바깥쪽으로 향하게 해선 안됩니다. 또 식사 후 칼을 돌려줄 때도 칼끝이 바깥으로 향하지 않게, 그리고 칼을 고기 덩어리나 땅바닥에 꽂지 않도록 조심하십쇼. 양고기는 푹 삶은 게 아니라 절반쯤 설었을 겁니다. 잡수실 때 제일 작은 놈을 골라잡으시고, 뼈다귀는 무릎 앞쪽에 주인이 볼 수 있도록 놓으십시오. 뼈에 살점이 남아 있지 않게 깨끗이 먹어줄수록 주인이 좋아할 겁니다. 고기를 다 먹고 나면, 주인이 직접 손님의 손을 자기 옷자락으로 닦아주는데, 이때 뿌리치거나 반항해선 안됩니다. 고기를 먹고나서야 보리밥을 먹는 차례가 됩니다. 얼마를 자시든 상관없으나, 나무갑 속의 음식을 드실 때는 반드시 손가락으로 집으셔야 합니다.]
시중드는 청년이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물정 모르고 한 모금 벌컥 들이킨 두진랑은 머리통이 아찔한 느낌을 받았다. 술에서 풍기는 이상야릇한 냄새 때문에 그녀는 구역질을 할 뻔했다. 이래뵈도 술고래라고 자부하던 그녀였지만 이런 술은 처음 먹어보는지라, 그녀는 첫잔부터 사양하고 말았다. 주인 타센은 진작부터 고령과 두진랑이 투르판어에 맹물이란 것을알고 있었으므로, 주빈은 자연 시철이 되어버렸다. 그는 말이 통하는 시철에게 연신 웃어가며 술을 권했다. 주인은 시철과 더불어 그 지독한 술을 세 사발씩이나 건배한 다음, 다시 하부르 소저에게 바치는 존경의 의미로 몇 잔을 연거푸 나누었다. 시철은 본래 산서분주(山西汾酒)로 유명한 술고장 태생이라, 어려서부터 독한 빼갈 몇 사발쯤은 냉수 마시듯 단번에 들이켜 온 몸이다. 덕분에 그는 사양않고 주인과 맞대거리를 하고도 끄덕없이 버티는 것이다. 고작 표시가 나봤자, 술기운으로 두뺨에 불그스레하니 홍조가 피어올랐을 뿐이다.
건배가 끝난 뒤에야 주인은 고기를 권했다. 그는 허리춤에서 작은 칼을 빼들고 고기를 베려다가, 손님 자리에 칼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발견한 듯 호들갑스레 시중드는 청년을 시켜 칼 넉 자루를 가져오게하더니, 손수 한 자루씩 나누어 주었다. 그것도 투르판의 손님접대 예식이었다. 고령과 두진랑은 애당초 들은 말이 있는 터라, 시철의 동작만 쳐다볼도리밖에 없다. 시철은 솥에서 큼지막한 양고기 한 덩어리를 꺼내다가 왼쪽 소매 위에 턱 올려놓더니, 왼손으로 뼈다귀를 거꾸로 잡고 오른손에 쥔 칼날을 조심스럽게 바깥쪽에서부터 안쪽으로 향해 살을 베어내기 시작하였다. 두진랑도 원숭이처럼 시철의 흉내를 냈으나, 첫 칼질에 시뻘건 피가 울컥 솟구치는 바람에 그만 질색을 하고 말았다. 시철이라고 익은 놈을 베어 먹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두진랑이 해쓱하니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선지피가 줄줄 흘러내는 고깃덩어리를 입에 넣고 천연덕스럽게 씹어먹는 것이었다.
손에도 칼날에도 입언저리에서 턱 밑까지 흥건하게 피를 묻혀가며 아주 맛있게 먹는 표정을 바라보면서, 두진랑은 그만 넋이 빠지고 솜털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그녀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것만은 흉내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시철 아우님, 난 이런 것 못 먹겠는걸. 이것야말로 흡혈귀나 식인종아니겠어?]
두진랑은 참다 못해 중국어로 하소연을 했다. 시철은 술 한모금 벌컥 들이키더니 껄껄 웃었다.
[안심하고 드십쇼. 주인한테 부탁해서 당신 앞에는 푹 익힌 것으로 갖다놓게 했으니까요. 내가 보장할테니 한번 잡쉬보세요. 하하!]
[이거, 사람 죽을 노릇이로구먼. 지저분한 옷소매에다 어떻게 고기를 올려놓는담?]
두진랑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쓴웃음만 짓는다. 시철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는지, 피투성이 입을 쩍 벌리고 웃음보를 터뜨렸다.
[아니, 뭐가 무서워서 그래요? 티베트 사람이나 투르판 사람이나 모두들 소맷자락에 기름기가 배어서 번들거릴수록 자랑거리로 삼는다니까요. 옆사람 좀 보십쇼! 하부르나 챰푸 같이 아리따운 공주님들도 소맷자락이 번들번들하지 않습니까? 그 나무 사발에 젓술 좀 따라 들어보십쇼. 시큼하니 맛도 없고 냄새는 나지만, 취하는 데는 기막힌 술입니다. 하하하!]
고령 역시 남자이면서도 비욋장만큼은 두진랑 못지 않게 약한 모양이다.
뱃속에서는 '부처님! 옥황상제님!'을 찾을 정도로 비명이 터져나왔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못하고 그저 허투루 입맛만 다셔가며 시철의 말을 되받아 넘기는 허세를 보였다.
[시철 아우님, 이거 정말 기막힌 맛이로군! 또 달리 먹을 만한 게 없을까? 맛있는 음식이 더 있을 듯한데....]
시철이라고 능구렁이 같은 영감 뱃속을 모를 리가 없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두르면서 고소를 머금었다.
[없을 겁니다, 영감님. 제 힘 가지곤 그저 고깃덩어리를 좀 더 익혀달라는 부탁밖에 할 수가 없군요. 이 사람들은 태어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이런 음식을 먹고 삽니다. 이렇게 먹어야 될 환경에 처해 있기 때문이지요. 저 혼자만 맛있게 먹는다고 노여워 마십쇼. 실은 저도 마지못해 먹습니다. 공자님 뱃속에서 쪼르륵 소리가 나는 데도 거문고 줄만퉁기는 격으로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지겹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자셔 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하튼 간에 우리는 지금 배가 고프니까요.]
[이 고기를 좀 구워 달랠 수 없을까?]
[몽고 사람 부락에 가면 얼마든지 양고기를 구워 자실 수 있습니다. 허나, 투르판 부락에서는 불에 구워 먹는 법이 없습니다.]
식사하는 중에 챰푸 아가씨의 이글이글 불붙은 눈초리가 두진랑에게 못박혀 떠날 줄을 모른다. 비록 남장은 했어도 두진랑의 몸매는 남정네의 그것처럼 우람하고 기걸찬 모습이 아니라 빼어나게 날렵한 것이 아무리 보아도 남자처럼 보이지 않았으나, 그런 모습이 도리어 이 챰푸아가씨의 욕정을 충동했는지 모른다. 아마도 이 잔치 자리가 연회석상이 아니었더라면, 이 순진한 투르판 처녀는 진작에 두진랑한테 착 감겨서 유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시철은 벌써 오래 전부터 투르판족이나 몽고족 여인들에게 정조관념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하릇밤 묵어가는 자리에서 부질없이 옥신각신 다툼이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는 일행들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묘족어로 귀띔을 해 주었다.
[두소저, 오늘밤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저 투르판 처녀가 당신한테 연정을 품은 모양입니다. 오늘 밤을 지내려면 아마 귀찮은 일 좀 당하실 듯싶군요.]
바야흐로 먹을 것을 놓고도 목에 넘어가지 않아 불이 나던 두진랑은 발작 직전의 상태에 있다. 그녀는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울화를 어디다 쏜아낼 데가 없을까 하던 참에 그 말을 들었으니, 쌍심지가 돋을 수밖에. 두진랑의 얼굴에는 당장 시퍼런 서슬이 맺혔다.
[흥, 어디 두고보라구! 좀있다가, 저년 골치 좀 아프게 될거야!]
[화풀이를 하시면 안됩니다!]
[귀찮게 굴면 마혈(麻穴)을 찍어버리지, 뭐!]
하부르 아가씨가 두 사람의 대화를 아무리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자, 고개를 외로 꼬면서 시철에게 물었다.
[챠이제, 당신 둘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몽고 사람들의 이름 부르는 법을 간단하다. 이들한테는 아무리 '장작 시'(柴), '지혜로울 철'(哲)하고 가르쳐봤자, 의미 따위는 상관 않는다. 오로지 자기네 몽고식 발음으로 성명을 붙여 읽어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할 판이다.
그 정도로 불러주는 것도 외국 사람에게 여간 대우해주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시철은 너털웃음으로 거북한 얘기를 얼버무리려 들었다.
[내 동료 말이, 당신네 두 아가씨가 정말 아름답다는 거요.]
[당신 보기에도 그래요?]
하부르 아가씨의 입이 함박처럼 벌어졌다.
[정말 아름답소.]
시철은 되는 대로 주워섬길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 허나 이 단순한 몽고처녀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투르판 땅에 쫓겨들어온 중국인은 대다수 이런 부락에 숨어 살아요. 그러다가 투르판 부족의 사위가 되고 말죠. 어때요, 생각이 있으면 내가 중매를 서 드릴까?]
[아하, 암만해도 당신이 우리 동료한테 마음이 쏠린 모양이로군! 안 그렇소? 안됐소만, 우리 동료는 폐백드릴 양도 소도 없는 빈털털이요. 허나, 당신네 남조기 부족에서 가난뱅이 사위라도 괜찮다면, 내가 당신하고 이 동료분 사이에 중신을 서리다. 어떻소?]
그러자 하부르의 주둥이가 뾰족하니 내밀어진다.
[우리 남조기 여자들은 저렇게 약골로 생긴 남정네는 싫어해요. 꼭 여자처럼 생겼다니까!]
샐쭉해진 하부르의 모습을 보자니, 시철은 더 한번 놀려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빙글빙글 웃어가며 이번에는 문천패를 가리켰다.
[어떻소, 저 사람은? '이케카라'처럼 멋지게 생기지 않았소?]
[흥! 저런 '이크볼라'같은 사람은 우리 부족에도 많아요!]
'이케카라'(伊克哈喇) 몽고어로 검정 숫말, '이크볼라'(伊克保喇)는 숫낙타를 뜻한다. 시철은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장난기가 더욱 발동했다. 그는 다시 단목장풍을 가리켰다.
[저 분은 우리 일행 여섯 가운데 무공이 제일 뛰어난 인물이오. 게다가 생김새도 말끔한 게 영웅처럼 으젓하지 않소? 어때요, 당신 마음에 들지요?]
뜻밖에도 하부르는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으면서 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당장 대답했다.
[눈빛이 너무 매서워요. 입술도 얄팍한 것이 음흉스럽고 각박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에요. 저런 사람 좋지 않아요.]
시철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런 궁벽진 황무지 땅에 사는 일개 몽고 처녀가 이토록 예리한 안목을 지니고 관상에 정통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이 수준의 경지에 들려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하부르는 실로 천성적인 상술(相術)을 지녔다고 밖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시철은 장난기가 싹 가셨다. 내색은 안했으나, 그 놀라움을 덤덤한 웃음 속에 억지로 감추느라 일순 당혹스럽기조차 했다.
[소저는 아무래도 우리 중원의 관상술을 익힌 모양이로군요. 허나,수박 겉핥기로 정확히 짚어내는 솜씨는 못되는 듯싶소이다. 중원 땅에 가보신 적이 있소?]
하부르는 시철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난 서녕위에도, 난주(蘭州)에도, 조주(汎州)에도 다 가봤어요.]
[그럼, 당신네 가족을 따라서 그곳에 약탈을 하러 갔었다는 말이오?]
[서녕위에는 털러 갔어요. 하지만 다른 데는 그냥 놀러간 거예요.]
[놀러갔다고? 잡히면 죽을텐데 무섭지 않았소?]
[무섭기는요, 뭘.... 우리 부족에는 당신네 같은 중국인이 여덟이나 있는데, 그 사람들은 모두 당신네 조정에서 범법자를 추적해나온 관원이래요. 무예도 뛰어나고 해서, 그 사람들만 데리고가면 아무도 우리가 몽고족인 줄 몰라봐요.]
시철은 가슴이 뜨끔해서 얼른 받아넘겼다.
[아마, 그 여덟 명은 중국 망명자들일 게요. 우리말로 한간(漢奸)이라고 부르지. 그 친구들이 당신네들을 데리고 동족을 약탈하러 갔다는거요?]
[그건 확실히 모르겠지만, 우리를 데리고 당신네 같은 사람을 약탈하진 않았어요.]
[그렇다면, 뭣하러 왔을까....?]
[우리가 필요로 하는 물건들을 팔러 왔어요.]
[그 일행 가운데 심씨라는 분은 없던가요?]
[심씨라구요? 아니, 없었어요.]
[아마도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감줬을 게요. 그중의 한 사람은 당신네 혈통을 절반 지녔을텐데? 이롬이 바얀루(巴顔魯)라는 뭉고계 티베트 사람이지! 투르판식으로 코시타이치(和碩丹津)라고도 부르는데, 모르겠소?]
[바얀루라? 그런 사람 몰라요.]
하부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잠시 무슨 생각을 하더니 되묻었다.
[당신네, 그 사람들 찾으러 온 거죠?]
[우리는 사천(四川)에서 사람을 죽이고 이리로 쫓겨들어온 거요. 작년에 먼저 들어온 친구들을 만나서 잠시 피신할 데를 찾으려고 마음먹었는데 도무지 찾아낼 방법이 있어야지, 원!]
그러자 하부르는 그의 얼굴을 빼꼼히 쳐다보고 기색을 살피다가, 이내 방글 웃고 만다.
[당신은 살인하고 쫓겨다닐 분이 아녜요. 난 확신해요.]
[정말이오. 난쫓기고 있소. 살인범이란 말이오. 체포하려는 관원한테 저항도 했고 파견관을 죽였을 뿐 아니라, 추격해오는 관군도 죽였소.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국경을 벗어난 거요.]
[정말?]
[당신한테 속일 이유가 없지!]
[그럼 이렇게 해요. 우선 우리 부족 있는 데로 가서 얼마 동안 숨어 계시도록 하세요. 우리 아버님은 손님을 아주 반겨 주시거든요. 또 당신네들은 우리와 원수를 맺은 중국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을 거예요.]
[허튼 수작 마시오! 몽고사람 치고 우리 중국인을 불구대천지 원수로 여기지 않는 자가 어디 있소? 우리 명나라 때문에 당신들은 이 사막으로 쫓겨온 거 아니오?]
하부르가 꺄르르 읏더니 이내 웃옴기를 지우고 정색을 하며 말했다.
[챠이제, 당신 잘못 아셨어요. 우리는 원래부터 대막(大漠)에서 살아온 민족이에요. 우리 선조께선 당신네 중국 땅에서 황제 노릇 좀 하셨고, 또 당신네는 우리를 원래 살던 이 사막으로 쫓아냈고.... 피차 손해볼 것 없이 본전 찾은 거 아녜요?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는데 영원히 원수맺고 살 수는 없어요. 조상들이 저지른 일 가지고 우리대에 와서까지 들춰내어 고리타분하게 원수니 뭐니 따질 게 뭐 있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당신네 몽고인은 아직도 중원으로 되돌아갈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소. 그러니까,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중국 변방을 침입해서 불태우고 죽이고 빼앗아가고 있는 게 아니오?]
하부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녀는 고소를 머금은 채 그 말을 받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편안하게 살고 싶은 욕심이 있지 않겠어요? 당신은 사막에서 살아가는 우리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운지 전혀 모르실 거예요.
조상님들은 우리한테 과거 중원 땅에서 누려본 꿈처럼 아름다운 삶의 맛을 남겨주셨죠. 신화 속에서나 듣고 보는 그 찬란한 이야기들, 이 낡아빠진 전설 때문에 우리 몽고족은 어떤 희생,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시 한번 그 전설 속의 행복을 뒤쫓아 보려는 거예요.... 당신도 겪어 보았지요? 이 황폐한 땅, 모래와 자갈 투성이, 눈과 얼음 천지, 지긋지긋한 추위, 무더위, 굶주림.... 이것들은 우리 곁에서 단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어요.... 아아! 더 말해 뭣하겠어요? 우리는 그 꿈이 다신 이뤄지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요. 또 이제 우리는 엣날 조상님들이 싸우고 또 싸워가며 천하를 제패하셨던 그 웅대한 기풍, 그 드높은 정신력마저 잃어버린 지 오래 되었어요. 다시는 조상님들의 그 명성과 위엄을 되찾아 떨칠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네 족속들은 여전히 그 조상의 사나운 기풍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서부 투르판까지 쳐들어왔으니까 말이오.]
[꿈 같은 생활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겠어요? 차선책이라도 강구해야죠. 우린 살아남기 위해서 싸우고 빼앗지 않으면 안돼요. 이곳 투르판 사람들은 목초지를 많이 가지고 있죠. 우리는 그중의 한조각만 차지하겠다는 거예요. 양떼와 말떼를 풀어 먹일 수 있을 만큼, 아주 조금만....]
[흠, 말씀이야 그럴 듯하군. 허나, 당신네는 이 투르판 사람들을 노예로 부려먹으려 하고 있소. 자아, 이젠 그만둡시다! 기분 좋지않은 얘길 자꾸 해서 뭘 하겠소? 한 가지만 묻겠는데, 그 여덟 사람 이름하고 생김새를 말해줄 수 있겠소?]
[도대체 어떤 사람을 찾고 있는 거지요?]
하부르는 눈치빠르게 되물어왔다. 실마리를 찾으려면, 시철도 솔직해질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은 사씨(謝氏), 또 한 사람은 김씨, 또 무예를 못하는 심씨가 있고.... 나머지 가운데 세 사람은 고씨, 춘씨(春氏), 은씨(雲氏)성을 가졌소. 모두 3,40대로 무공이 뛰어난 분들이지. 작년에 이 투르판 지역으로 들어왔을텐데, 모르겠소?]
하부르는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묻는다.
[친구예요, 적이에요?]
[적이라면 어떡하겠소?]
[난, 당신이 거짓말을 하는지 안하는지 알아야겠어요.]
하부르의 표정이나 말투가 한결 차분해졌다. 시철은 대답 대신에 다그쳐 물었다.
이 처녀는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들 자취를 알고 있지요?]
[지난 초가을에 몇 사람이 우리 지역을 거쳐갔어요. 우리측 서너사람을 살상하면서요. 마츄하를 따라서 우리 추격을 벗어났죠. 중국사람이었어요. 아마 지금쯤 저 울란망나이산에 가서 의탁하고 있는지도 모르죠.]
[모두 몇 명이었소?]
[여섯이었어요.]
[생김새나 옷차림 같은 것은?]
[너무 급하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바람에 자세히는 몰라요. 기마술이 대단하더군요. 그 사람들, 만약 당신네 친구분이라면 가서 말 좀 전해줘요. 훗날 우리 땅을 지나치지 않근 못 배길테니까, 그때 피값을 톡톡히 치뤄야 할 거라고 말이에요.]
[그 여섯이 우리 친구라면 분명히 가서 전하리다.]
[찾아낼 수 있겠어요?]
[물론이요.]
하부르는 그 부리부리한 눈망울을 뎅그러니 굴리면서 웃었다.
[울린망나이산은 이 투르판 지역에서 중국인 도주범과 망명객들을 전문적으로 받아들이는 소굴이죠. 사람 수도 2백 명은 넘을 거예요. 거길 가도 그네들을 찾기는 어려울 거예요. 되려 다치고 쫓겨날 가능성이 많죠.]
[우리가 싸우러 간단 말이오?]
[난 다 알아요. 아마 그 사람들, 목숨 내놓고 당신네와 싸우러 들겠죠. 당신이 원수 갚으러 찾아 다닌다는 걸 내가 눈치 못 챌 듯싶어요?]
[머리가 아주 잘 돌아가는 아가씨로군! 내가 졌소. 하하!]
시철은 이 앙큼스런 몽고 처녀에게 무릎꿇고 말았다. 하부르는 그말을 듣더니, 이마까지 활짝 펴면서 아양스럽게 마주 웃었다.
[저한데 잘 대해주시면, 나도 당신을 도와드릴 수 있어요.]
두 남녀의 대화는 여기서 끝나고 말았다. 고령이 야릇한 기색으로 덥석 끼어들었던 것이다.
[시철 아우, 뭘 그리 재미있게 소근거리는 게야?]
[제가 이 아가씨한테 심양 일당에 대해 좀 알아봤습니다.]
그래, 무슨 실마리라도 잡히든가?]
시철은 방금 알아낸 사실을 알려준 다음,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현재 우리는 두 가닥의 실마리를 잡고 있는 셈입니다. 그 하나는, 여기 이 하부르 소저를 이용해서 남조기 부락에 있다는 그 여덟 명의 중국인이 우리가 찾는 인물인지 아닌지, 알아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서쪽 울란망나이산으로 직접 찾아가 보는 일입니다. 그곳에는 투르판에 온 중국망명객의 수용소가 있다고 했는데, 인원수도 세력도 만만치않아 투르판 지역에서 자체 방어도 할 수 있을 뿐더러 충분한 생활터전도 마련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심양 일당도 거기서 보호받고 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하부르의 말을 피상적으로 듣기만 해가지곤, 지난 초가을 이곳을 통과한 그 여섯 망명객이 과연 우리가 찾는 목표인지 아닌지 증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대로, 장차 북행을 택할 것인지 서행을 택할 것인지는 영감님께서 결정하실 일입니다.]
고령은 아무 말이 없다. 한참 동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씁쓰레한 웃음을 지었다.
[옛말에 '일을 꾸며보지 않고는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했네. 국경을 벗어나기 진까지만 해도, 나는 이 투르판에 와서 중국인 몇명쯤 알아내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일이랴 싶었네. 하지만 막상 와보니 한 끼니 먹고 하릇밤 자는 일조차 이토록 어렵고 땅이나 사람이나 모두 생소하기만 할 뿐이네. 중국 사람도 여기서 자리잡고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가 맞닥뜨리는 사람마다 모두 우리를 적대시하니 거기까지 가는 일도 만만치 않을 걸세. 이거야말로 바다 속에서 바늘 건지는 격이 아니고 뭔가? 그러나, 어쨌든 간에 우리는 털끝만한 단서도 놓치지말고 단단히 붙잡아야 하네. 북쭉과 서쪽, 어느 편이 가깝겠나?]
[남조기 지역은 여기서 북쪽으로 80리, 말을 타고갈 경우 반 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습니다. 울란망나이산은 우리 일행이 온 방향에서 40리 좀 못될 겁니다.]
[울린망나이산으로 가세!]
고령은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래도 시철은 미진한 듯 다시 믈었다.
[내일 양쪽 사람들이 모두 이리로 온다고 하던데,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세. 우리가 찾는 목표를 탐색할 만한 기회일듯 싶으니까,
아무 데나 섣불리 뛰어들지 말고 말일세.]
[
알아듣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더이상 협의할 일이 없자, 시철은 주인에게 인사치레를 겸해서 이 부근 지역풍토와 인정에 대해 조심스런 말씨로 물었다. 그 속에는 울란망나이산 사람들에 관한 상황 탐색도 들어 있었으나, 족장의 대답은 별로 신통치 않았다.
관례적인 주인의 인사를 곁들여, 푸짐한 잔치는 끝이 났다. 고령이나 두진랑은 결국 세 끼 굶고 잔치상에 말라빠진 꿩다리 뜯은 격이 되었지만, 더이상 먹을래야 먹을 것도 없어 입맛만 다신 채 매우 고맙다는 사례를 해야 했다. 상을 물리고 잠잘 시간이 되었다. 족장 타센은 이 왁살스런 불청객들의 잠자리를 참견할 처지가 못되므로, 형식상 놓아야 할 몽둥이조차 곁에 갖다 놓지 않았다. 천막 안의 사람들은 화덕을 중심으로 빙 둘러 누워서 제각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난방용 화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아궁이에 장작을 지펴댄다. 투르판족들은 그 온기만으로 이불도 없이 잠을 잔다. 기껏해야 가죽 외투자락을 당겨서 덮어쓰는 것이 전부다. 외투자락은 너비가 1,2척은 됨짓해서 머리통까지 뒤집어 쓸 수 있다. 옷을 벗거나 허리띠를 푸는 법도 없다. 돼지처럼 아무 데나 쓰러지기가 무섭게 단잠이 드는 것이다.
천막 안에는 등잔불 하나도 밝혀 놓지 않았다. 빛이라고는 화덕 아궁이에서 어슴푸레하게 비쳐나오는 검붉은 숯불빛이 고작이다. 바깥 세상은 폭설과 폭풍이 뒤섞여 악마구리 끓듯 휘몰아치는데, 천막 안에서는 어느덧 태평스레 코고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시철과 고령은 화덕 바깥쪽에다 잠자리를 잡았다. 가운데는 두진랑과 하부르 아가씨의 잠자리다. 결국 하부르는 왼쪽의 시철과 머리를 나란히 두고 함께 자게 되었다. 시철은 잠이 오지 않았다. 장막 안에 찌든 비린내도 그렇거니와 투르판 사람들의 몸에서 풍겨나는 노린내 때문에 골치가 터져나갈 것 같아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남들처럼 가죽 외투자락이라도 푹 뒤집어썼으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그나마도 시철에게는 사치였다. 바로 그 곁에는 하부르 아가씨가 방금 마지막으로 몸을 누이고 있었다. 눕기 직전, 그녀는 품 속에서 보자기를 꺼내 머리맡에 펼치고 나무그릇을 놓았다. 보자기는 바로 그녀가 낮에 쓰고 있던 것이었다. 품속을 더듬어 다시 꺼낸 것은 보살상이었다. 하부르는 한참 동안이나 경건한 자세로 웅얼웅얼 끊임없이 경문을 외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에 누웠다.
삼 경쯤 되었을까, 검은 그림자 하나가 유령처럼 소리도 없이 화덕 안쪽으로부터 기어나왔다. 시철과 마찬가지로 노린내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두진랑은 자기곁으로 다가오는 그림자가 족장의 딸 쑤쫑 챰푸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슬그머니 부아통이 터졌다. 그녀는 식사 때 미리 감춰두었던 자그만 양 뼈다귀를 꺼내 염치좋게 기어드는 쑤쫑 참푸를 향해 퉁겨 날렸다. 거리는 불과 8척, 어디를 얻어 맞았는지 챰푸 아가씨는 돌연 그 자리에 푹싹 엎드려 다시는 움직일 줄 모른다. 이와 동시에, 여태껏 곤하게 잠든 줄만 알았던 하부르의 거친 숨결이 문득 멎었다. 그것을 눈치챈 것은 시철이었다. 그는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이때껏 무겁게 감겨오는 눈꺼풀을 일으켜 세우느라 홀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두진랑이 쑤쫑 챰푸의 마혈을 찍어 넘어 뜨리는 것을 느낌으로 알아 차렸지만 제지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하부르가 아직도 잠들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두진랑의 신기한 타혈법에 놀라 숨결이 멎어지는 걸 알아챘을 때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도 시철은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 숨소리조차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얼마 안있어, 그는 천막 바닥을 뱀처럼 흔적없이 기어 나가는 인기척을 느꼈다.
그래도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기다렸다. 어둠 속에 공력을 끌어모아 경계태세를 취하면서, 그는 이내 덮쳐올 기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그것부터 계산하기 시작했다. 화덕 아궁이에서 비쳐나오는 불빛은 너무 어두웠다. 주인이나 손님이나 모두 비슷한 투르판 옷차림을 하고 누웠기 때문에, 문쪽을 향해 기어 나가는 사람의 어슴푸레한 윤곽만 보아선 누구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푸짐한 저녁 대접을 너무 탐식한 나머지, 급한 일을 보러 바깥에 나가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그림자는 천막 어구에 다다랐다. 세찬 황소바람을 막느라 잔뜩 여며놓은 출입문 장막이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사르르 열리는가 싶더니, 그림자는 살짝 벌어진 틈서리로 종잇장처럼 빠져나갔다. 그순간, 후딱 고개를 돌린 시철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저 놈이로구나....! 시철의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더이상 계산할 여지가 없어진 그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이때, 바로 3척 곁에서 누워 자는 척하던 하부르 아가씨가 느닷없이 몸을 굴려 덮쳐오더니, 시철의 몸뚱이를 덥썩 껴안고 애무하듯 뒹구는 것이 아닌가! 여느 사람 같으면 못된 잠버릇 탓으로 돌리겠지만, 이건 상황이 다르다. 허리를 껴안은 처녀 힘이 엄청나기도 하려니와 돌발적인 기습을 당한 끝이라, 범같은 시철도 그만 중심을 잃고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시철은 천장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몸뚱이가 땅바닥에 눕는 찰나, 그는 반사적으로 한 바쿼 더 뒹굴면서 하부르의 몸뚱이를 아래쪽으로 되눌러놓고 그 위에 올라탄 것이다. 그래도 허리를 껴안은 계집의 두 팔은 풀어지기는커녕 더욱 거세게 죄어 들더니, 이번에는 무릎을 꺾어 그 모서리로 남자의 하초를 걷어찼다.
이쯤 되면 시철도 다급해졌다. 더구나 전날 낮에 똑 같은 부위를 공격당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참을래야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만부득이 중수(重手)를 썼다. 숨 한모금 거세게 들이마신 그는 쌍수를 동시에 내리쳐, 거머리 같이 달라붙은 하부르의 양 어깻죽지에 퍽 소리가 나도록 호된 일격을 가했다. 그것으로 찰거머리의 저항은 끝이 났다. 집요한 속박에서 겨우 벗어난 시철은 용수철 퉁기듯 뛰어 일어났다.
암흑 속에서 천막 안은 일대 소동이 벌어졌다. 누가 먼저라고 할것 없이 고령과 두진랑이 거의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쑤쫑 쌍캅니다! 그놈이 튀었습니다. 쫓읍시다!]
시철이 고함치면서 장막 바깥으로 돌진했다. 세 사람이 천막 문을 뚫고 나왔을 때는 아득하니 눈보라만 흩날릴뿐, 몽롱한 눈빛 속에 쑤쫑 쌍카의 모습은 흔적도 없다. 시철은 두리번거리면서 급히 뒤쫓았다. 발자국이 끊긴 곳은 제법 멀찌감치 떨어진 또 다른 겨우살이 천막이었다. 이쯤 되면 주인의 체면어고 인사치레고 돌볼 여유가 없다. 그들 셋은 다짜고짜 천막 안을 덮쳤다. 또 한 차례 소동이 벌어져 아우성을 치는 가운데, 그리 멀지않은 곳에서 문득 말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바깥으로 뛰쳐나온 시철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말 탄 놈을 잡으십쇼! 놓치면 안됩니다!]
일행이 잠자던 천막에서 사람들이 쏟아져나왔다. 그중에는 손으로 한쪽 어깨를 가리운 하부르도 끼어 있었다.
[맨발로 뒤쫓아봤자 헛일이에요. 진작에 타고 갈 말을 준비해 두었는걸? 당신도 어서어서 말안장을 얹으시죠. 아마 올라탔을 때는 십 리밖으로 사라졌을걸? 이렇게 퍼붓는 눈보라 속에 발자국 찾을 생각일랑 아예 단념하시고.... 공연히 낯선 땅에서 고생을 사서 할 게 뭐예요?]
시철은 그녀에게 바짝 다가서서 으르렁거렸다.
[그놈은 도망쳤지만 너는 안 놓쳐!]
하부르가 방긋 웃었다.
[내가 도망치기로 작심했다면 진작에 사라졌을걸요?]
[네가 보냈구나!]
[그래요. 쑤쫑 쌍카는 우리와 평화스럽게 공존하기를 바라는 사람이죠!]
[어디로 뭘 하라고 보냈지?]
[내가 무슨 꼴을 당하고 있는지 알려주러 갔어요. 아마 그 편이 당신네들 신상에도 좋을 거예요.]
시철은 하부르와 더이상 말다툼할 여유가 없다. 그는 괘씸한 처녀에게 눈한번 흘겨주고나서, 고령을 돌아보았다.
[영감님, 여기 계시면서 제가 그놈을 잡아올 때까지 기다려주십쇼. 금방 뒤쫓는 길이니까, 말발굽도 눈에 파묻히지 않았을 겁니다. 그놈은 내 손에서 도망치지 못합니다. 저 계집, 조심해서 감시하십쇼!]
당부를 마치자, 그는 직접 타센에게 말을 준비시켰다. 안장도 얹지말고 그냥 대령하라고 호통쳤다. 시철은 일각 일초라도 지체할 수 없었다. 계곡 어구를 벗어난 그는 북쪽을 향해 치닫기 시작했다. 엄청난 폭풍설, 뼛속까지 에이는 추위도 그의 앞길을 가로막진 못했다. 타고가는 마필이 얼마를 달리다가 거꾸러질지 모르지만,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쉴새 없이 퍼붓는 채찍질에 말은 전속력으로 눈보라 속을 뚫고 미친듯이 질주해 나갔다.
대지를 뒤덮은 눈의 깊이만도 3척에 달한다. 제아무리 세차게 퍼붓는 눈보라도 쉽사리 말발굽 자국을 덮어 가리울 수는 없다. 하지만 추격자의 마필도 깊은 눈더미를 박차고 나가느라 아무리 채찍질을 당해도 제 속력이 나지 않는다. 4,5리쯤 달렸을까, 시철의 말은 벌써 기력이 떨어져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무정한 주인을 태운 짐승은 쉴새 없이 투레질을 하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한 겨울철인데도 전신이 땀에 흠뻑 젖어 무럭무럭 더운 김을 피우면서도, 채찍질이 무서운 짐승은 안간힘을 다끌어내어 한걸음 한걸음씩 보폭을 옮겨놓았으나,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시철은 지금 말이 달리든 죽든 아랑곳할 마음의 여유가 없다. 그의 눈길은 오직 앞쪽만을 향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윽고 시철의 집념어린 눈길에 서광이 비쳤다. 참으로 행운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그림자였다.
도망자는 이제 5리 앞을 허둥거리면서 북쪽을 향해 필사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평원지대는 들쑥날쑥 기복이 심한 구릉(丘陵)의 연속이어서, 도망자와 추격자는 숨박꼭질하듯 눈밭 위에 저편이 모습을 드러내는가하면 이편이 들어가고, 여기서 솟구치면 저쪽이 다시 사라졌다. 어스름한 설원이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진 가은데, 얼굴에 덮쳐오는 찬바람과 눈발을 훑어가며 시철은 상대방의 그림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지금 어느 쪽이 북쪽인지 방향조차 가려낼 수가 없다. 두드러진 산천지형도 없거니와 하늘엔 북두칠성도 보이지 않는다. 대지와 맞닿을 정도로 낮게 드리워진 구름장, 모진 삭풍만이 휘몰아치는 은빛 천지에 설광(雪光)이 몽롱하게 비칠 뿐이어서, 그는 풍향으로 어림잡을 수 밖에 딴 도리가 없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뒤쫓는 방향은 정북(正北)이 아니었다. 평원지대는 얼마 안 가서 끝나고 구릉이 점점 높아지더니 마침내 산악지대로 바뀌어, 풍향마저 산맥에 부딪쳐 이리 꺾이고 저리 감돌아 도무지 방향을 헤아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시철은 무턱대고 뒤쫓을 때보다 마음은 한결 놓였다. 이제는 쑤쫑쌍카란 놈이 남조기 부락에 닿기 전에, 그곳에 도착해서 주둥이를 놀려 벌집을 터뜨리기 전에 나꿔챌 궁리를 해야 한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설혹 남조기 부락이 아니더라도, 이 부근에 이웃한 투르판족들을 충돌질해 끌고라도 나오는 날엔 그것만으로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는 양 발뒤꿈치로 말배때기를 바짝 죄면서두어 차례 채찍질을 가했다. 다리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 속을 박차고 힘껏 도약하는 듯싶던 짐승이 갑작스레 앞다리를 툭 꺾더니, 꽈당! 고꾸라졌다.
시철은 눈보라와 함께 말머리 위를 날아서 3장 거리 앞에 떨어지고 말았다. 눈더미에 파묻히는 순간, 그는 추격이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절망했다.
그러나 얼어붙은 눈이 얼굴을 후려치자 따귀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해지면서 그는 다시 투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이대로 놓쳐서야 될 법이나 한 일인가? 두 발로 뛰자....! 그는 짐승의 투레질섞인 숨가쁜 비명소리를 등 뒤로 들으면서 경공술을 펼쳐 앞쪽만 바라보고 미친 사람처럼 내닫기 시작했다.
아득해 보이던 구릉이 점점 산악으로 확대되어 눈 앞에 나타나자, 시철의 마음은 더욱 다급해졌다. 그리 높지는 않아도 험악한 봉우리의 윤곽이 시철을 압도하면서 다가왔다. 머리에 새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나무숲, 음침한 그늘 아래로 이제 막 달려들어가는 기사의 뒷모습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일단 숲속으로 들어가면 놓치기 십상이다! 시철은 두 다리에 힘주어 날 듯 뒤쫓았다. 허나, 제아무리 날고 기는 경신술을 지녔기로소니 이토록 먼 거리를 무슨 수로 지탱한단 말인가? 무쇠인간도 아니고 진력(眞力)을 뽑아내는 데도 한계가 있다. 겨우 산 밑가까이 도달했을 때는 체력도 한계에 다다랐을 뿐 더러 줄곧 놓치지않으려 애쓴 보람도 없이 쌍카의 모습도 사라지고 난 다음이었다. 그저 남은 것이리곤 눈바닥에 깊숙이 패인 말발자국이 전부였다. 시철은 마음도 몸도 물먹온 솜덩이처럼 나른하게 풀어지고 말았다.
말발자국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숲 근처에 가까워지면서 그 속도가 한결 떨어진 것 같았다. 모이쪼는 병아리처럼 구부정한 자세로 한걸음 한걸음씩 뒤따르던 시철이 깜짝 놀라서 허리를 펴는 동시에 <히히잉!>하고 추적자를 비웃는 듯,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숲가에는 몸집이 우람한 준마 한 필이 눈바닥을 딛고 우뚝 서서 꼬리치며 더운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안장은 텅 빈 채 주인의 모습은 어디 가고 보이지 않는다.
'설마하니, 그 놈의 유령마(幽靈,馬)는 아니렷다....?'
그는 속으로 낭패감을 느끼면서, 말이 서 있는 5장 거리까지 접근하여 멈추어
섰다. 전설에 따르면, 대적석산(大積石山) 근처에 유령 같은 말 한 필이
출몰하는데, 이 부근 일대 목장주들은 이 괴상한 말이 부리는 신통력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놈의 모습이 나타나는 날에는 막대한 돈을
추렴해서 멀찌감치 떨어진 사원으로부터 일부러 활불(活佛) 몇 분을 초청해다
야단법석(野壇法席)을 차리고 액땜 굿을 벌여야만 무사하다고 한다. 만약 비용을
아끼느라 소재경(消災經) 한 권도 읽어주지 않으면, 이놈의 유령마는 목장에
가두어놓은 말떼를 단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귀신처럼 끌어갈 뿐만 아니라,
지독스런 전염병까지 퍼뜨려 사람이나 말이나 닥치는 대로 쓰러뜨린다고 했다.
재앙과 전염병을 몰아내는 데는 무변법력(無邊法力)을 구사하는 라마승조차도, 이 전설 속의 유령마에 대해서 만큼은 속수무책인 데다, 공력이 좀 떨어지는 라마승을 초빙해서 액땜 굿을 벌여놓았다가는 복주머니 대신 재앙 보따리가 줄줄이 터져나와 감당할 도리가 없다고 했다. 그 덕분에 제법 실력깨나 있는 라마승은 목장 액땜 굿 한 번 차릴 때마다 사뭇 적지 않은 수입이 생겨, 라마승에게는 도리어 이 유령마가 돈 보따리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철은 과거에 들은 소문도 있고 해서 섣불리 접근하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말의 동태를 살폈다. 그런데 아무리 보아도 그 무시무시한 유령마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놈은 안장을 걸치지 않았다고들하는데, 이 말은 안장에다 굴레, 고삐까지 어엿하니 매고 있는 것이다.
'쑤쫑 쌍카가 버린 말이다. 그놈은 추적자가 뒤따르는 걸 눈치채고, 여기다 말을 내버린 채 숲속으로 몸을 감춘 게 틀림없다....! 이런 숲이라면 찾아내기 여간 어렵지 않겠어.... 자칫하면 내가 역습당할 위험성도 다분하고....'
허나, 그는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숲이 넓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밖에 더
되겠는가. 아무리 다급하게 쫓기는 몸이지만, 성한 마필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숲속으로 도망쳐 숨다니, 어리석기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시철온 보이지 않는 상대에게 냉소를 던졌다. 그리고 말이 서 있는 곳까지 뚜벅뚜벅 걸어갔다. 말을 버린 부근에는 반드시 도망자의 흔적이 남아 있을 것이다. 제깐 놈이 무슨 나는 재주가 있다고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달아날소냐?
말 옆에까지 다가간 시철은 문득 불안해졌다. 사람의 발자국은 확실히 있었다. 있기는 한데, 한 사람의 발자국이 아니라 적어도 세 사람의 것이 발견된 것이다.
말 한 필에 기사가 셋씩이나 타다니,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은근히 경계심을 돋우던 시철은 결국 인기척을 느꼈다.
[이크....!]
시철은 자기도 모르게 낮은 비명을 질렀다. 그 다음, 숲속에서는 올빼미의
울음소리와 같은 광소(狂笑)가 한바탕 터져나왔다. 웃음소리에, 나뭇가지 줄기 위에 수북하니 쌓였던 눈더미가 소나기 퍼붓듯 와르르 쏟아져내렸다. 이윽고 나무 그늘을 박차고 세 사람이 그림자를 이끌면서 우람한 모습을 나타냈다. 백여우 가죽을 뒤집어 쓴 형국이, 만약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더라면 눈빛과 똑같아서 분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철이 그들의 형체가 이토록 가깝게 다가올 때까지 눈치 못 챈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웬 놈이냐?]
흰 그림자 하나가 유창한 투르판어로 물어왔다. 늑대가 울부짖는듯한 목소리에 귀청이 쩌렁쩌렁 울렸다.
[지나가던 사람이외다. 당신들은 뉘시오?]
시철도 지지 않고 목청껏 크게 투르판어로 외쳤다.
[별 놈 다보겠구나! 야밤 삼경에 눈 덮이고 꽝꽝 얼어붙은 산 속을 혼자서
헤매다니? 뭘 찾아 먹겠다고 이 밤중에 지나가는 나그네란 말이냐? 바른 대로 불어라. 어디서 뭣하러 온 놈이냐?]
[쑤쫑 부락에서 왔소.]
[어딜 가는 길이냐?]
[
내 발길 닿는 대로, 아무 데나....]
[남조기측과 내통하는 놈이지? 잡아 꿇려라!]
흰 그림자가 질타했다. 왼편에 섰던 또 하나의 그림자가 조금도 거리낌 없이성큼성큼 다가왔다. 시철은 3대 1의 처지에서 싸우자면 조금이라도 시간을벌어야 한다.
[잠깐!]
[무슨 할 말이 있느냐?]
다가서던 흰 그림자가 주춤하더니 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잡아 꿇린 다음, 변명할 기회는 얼마든지 주겠다. 우선, 몸이라도 성하게 고분고분 항복할 테냐, 아니면 절반쯤 죽도록 얻어맞고 꿇릴테냐?]
[난 어떤 자를 뒤쫓아 왔을 뿐이오....]
[에잇, 군소리 집어치워라!]
흰 그림자가 뒤말도 듣지 않고 다짜고짜 괴성을 지르면서 냅다 덮쳐들더니, 갈구리 같은 다섯 손가락으로 시철의 가슴팍을 움켜 훑었다.
[앗차....!]
시철은 부득불 자기방어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기세 사납게 발길질을 날려 발치 아래 쌓인 눈더미를 소나기처럼 걷어차 흩뿌렸다. 갈구리 손가락으로 덮쳐오던 그림자에 눈더미가 뒤집어 씌워지기 직전, 뒤따라서 통겨나간 시철은 대갈일성과 함께 철권을 날렸다. 눈더미를 퍼붓는 동시에 공격을 가한 솜씨는 실로 전광석화처럼 빠르고 대담했다.
시철이 하찮은 눈더미로 습격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던 그림자는 미처 방어자세를 취할 여지도 없이 고스린히 눈세례를 받고 말았다. 그는 몸뚱이 여기저기 할 것 없이 푹푹 소리가 나도록 세차게 부딪쳐오는 눈덩어리의 감촉을 느끼면서 그 기세가 너무 뜻밖이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 두 손으로 안면부터 가려 보호했다.
그림자가 2차 방어태세로 몸을 비트는 순간,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귀신처럼따라붙은 시철이 연속 세 차례의 공격을 퍼부었다.
[퍽! 퍽! 퍽....!]
무쇳덩어리 주먹이 육신을 치는 소리가, 마치 가죽 늘어진 북 두들기듯 둔탁한 소리를 냈다. 세 차례를 잇따라 내지른 철권은 그림자의 아랫배를 짓이겨 놓았다.
[으와앗!]
두터운 가죽옷을 입고서도, 그림자는 하반신에 천 근 무게의 쇳덩어리로 얻어맞는 듯한 충격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르면서 연거푸 너댓 걸음이나 밀려났다. 그리고도 후속타가 무서워 본농적으로 양 손을 하반신에 가져다 막았다. 보폭이 흐트러지고 몸뚱이가 중심을 잃자, 상반신에 당장 허점이 드러났다.
[다음은 이거요!]
시철의 통고는 부드러웠으나, 좌우개궁(左右開弓)으로 내지른 쌍철권만큼은 호되기 이를 데 없다. 두 주먹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림자의 양 볼따구니에 장작패는 소리를 내면서 정통으로 들이박혔다. <끄윽!>하고 숨막히는 소리, 고목 넘어가듯 <꽈당!>하는 소리.... 허깨비같던 그림자는 그제서야 비로소 육중한 무게를 느끼게 하면서 벌렁 나가떨어졌다.
첫 공세를 마친 시철은 재빨리 두어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다음 상대를 눈여겨 찾으면서 한 마디 싸느랗게 내뱉았다.
[조용히 말로 해결합시다! 서로 감정까지 해치진 말고....]
댓바람에 상대방을 깨끗이 거꾸러뜨린 그 솜씨는 나머지 두 허깨비의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러나 시철의 쾌속무비한 솜씨에 실감을 느낄 수 없었던지, 오른편 허깨비가 등에 메고 있던 번도(番刀)를 쏴악 빼어잡더니, 다급한 걸음걸이로 달려들면서 으르렁거 렸다.
[개 같은 놈, 그 머리통부터 찍어놓고 보자!]
시철의 칼집에서도 장검이 쓰윽 뽑혀나왔다.
[칼로 해볼 텐가? 당신네들 죽기로 작정했군!]
시철이 으름장을 놓으려고 하는 말은 결코 아니다. 상대방은 이제 시철의 살기찬 야성을 건드려놓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른다. 번도를 잡고 공세에 나선 그림자는 한 마디 대꾸도 없이 청룡입해(靑龍入海)로 시철의 아랫배를 냅다 찔러들었다.
문호를 지키던 시철은 장검으로 가볍게 내려막았다. <쩡!>하는 쇳소리와 함께 투르판식 강도(鋼刀)를 퉁겨낸 장검이 그대로 뻗어 나와 허깨비의 가슴 앞에서 어른거렸다. 허깨비는 과연 허깨비였다. 재빠른 발놀림으로 두 걸음 물러서서 장검의 공세를 벗어나기가 무섭게 몸을 틀어 재차 역습을 시도, 이번에는 상반신에 칼질을 날려갔다.
[챙그렁....!]
세찬 금속성이 길게 여운을 남기는 가운데, 시철은 불티를 사방으로 튕겨날리면서 상대방의 번도를 찍어누른 기세 그대로 칼끝을 미친 돌개바람처럼 휘감아 곧바로 내찔렀다. <확!>하는 칼바람 속에, 횐 무지개는 인정사정없이 허깨비의 오른편 어깻죽지를 파고들어갔다.
이 순간, 바깥쪽에 서 있던 나머지 하나가 길게 휘파람 소리를 토해냈다. 그것을 신호로, 좌우 눈더미 속에서 또 다른 허깨비떼가 한꺼번에 다섯이나 훌쩍 솟구쳐나오더니, 뱀처럼 땅바닥에 찰싹 엎드린 자세로 암기를 쏘아날리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하얀 위장복을 걸쳐 얼핏보아선 눈과 분별할 수 없었으나, 어른거리는 움직임의 윤곽에 따라서 그네들의 발사자세를 눈대중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듣기 거북스런 파공음, 시철 한 몸을 향해 집중되는 쇳조각, 이 암기들을 피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그중 우측에서 가냘픈 허깨비가 쏘아날린 세개의 암기는 다른 것과는 비할 데 없이 작고도 가늘어서, 기척도 파공음도 거의 분별할 수 없었다.
시철의 장검에 어깨를 찔린 허깨비는 휘파람 소리를 듣자마자, 아픔을 참아가며 힘껏 뒤판으로 넘어졌다. 칼끝이 저절로 쭉 빠지고, 허깨비의 몸뚱이가 꽈당 소리를 내며 눈바닥 깊숙이 나가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암기들이 허깨비의 몸뚱이 위를 훑듯 간발의 차이를 두고 시철을 표적으로 날아올랐다.
사방 주변의 눈더미 속에 이토록 많은 매복대가 설치되어 있으리라곤 전혀생각지도 않고, 무방비 상태로 지면의 적과 싸우는 데만 열중하던 시철이 암기의 습격을 알아차렸을 떼는 이미 피할 공간과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좌우에서, 그것도 지근(至近)거리에서 우박퍼붓듯 일제히 쏟아져나온 기습을 제아무리 반응이 빠른 사람이라도 피해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물론, 좌우편 눈더미가 꿈틀거리던 순간 동물적인 육감으로 재미없을 거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위쪽으로 몸을 솟구쳐 회피동작을 취하기는 했다. 그러나 빌어먹을 놈의 눈더미가 발 밑에 힘을 받쳐주지 않고 맥없이 가라앉는 바람에 그는 반탄력을 잃어버렸다. 도약을 하려면 양 다리에 무거운 힘을 주어야 한다. 시철은 눈바닥이 맥을 못 쓴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두 다리에 필사의 힘을 불어넣는 동시에 몸의 방향을 틀어 표적의 면적을 최소한으로 옴츠렸다. 도약 자세가 엉거주춤하고 기세를 잃기는 했으나 찰나적인 공간과 시간은 벌어주었다. 그것온 생사의 갈림길이었다. 시철은 암기의 습격을 피해내었다. 용수철을 장착한 대롱에서 발사된 단혼정(斷魂釘)까지도 피해낼 수는 있었다. 그러나 우측에서 가냘픈 허깨비가 쏘아날린 암기 셋 만큼은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8척 남짓한 상공에도달하는가 싶은 찰나, 그는 우측 대퇴부에 뜨끔한 느낌을 받았다. 아차, 당했구나....!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도저히 만회할 방법이없다. 이건 독을 바른 암기야....! 독침에 맞았구나....! 아냐, 이대론 안돼....! 그는 속으로 마구 비명을 질렀다.
시철의 몸뚱이가 허공에서 살맞은 기러기처럼 엄청난 무게로 다시 곤두박질쳐 떨어졌다. 추락한 지점은 방금 어깨를 찔려 넘어진 허깨비의 정면, 털썩 소리를 내며 지면에 닿기가 무섭게, 시철은 대뜸 허깨비의 덜미부터 움켜잡았다.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손에 들린 장검 날은 어느새 허깨비의 멱줄기를 겨누고 있었다.
[누가 덤빌 거냐? 여기 밑천은 확보해 놓았으니까, 아무라도 좋아!]
그는 이들 습격대가 투르판족이나 몽고인은 아닐 것이라고 단정했다. 중국인만이 이토록 다양한 암기를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흥정을 거는 언어도 이미 중국어였다. 허깨비 측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다. 시철은 독침의 약효가 혈관을 타고 치밀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면서, 지금 자기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드잡이질이 격렬하면 할수록 피의 순환도 빨라진다. 더구나 얻어맞은 독침의 효력은 예상외로 지독했다. 시철이 허장성세로 버틴 것도 잠시뿐, 그는 문득 현기증을 느꼈다. 어지럽다! 하지만 이대로 쓰러져선 안돼....! 맥이 풀린다!
안돼, 칼자루를 놓쳐선 안돼....! 그는 속으로 자신을 질책했다. 호통을 지른
직후부터 가물거리기 시작한 눈을 흡뜨면서 버텨보려 했지만, 이번에는 손아귀 힘이 나른하게 풀려 칼자루를 쥘 수가 없다. 두 다리도 맥이 빠지는 듯, 딛고 선 대지가 물렁물렁 흔들리기 시작했다. 스르르 손아귀에서 미끄러져 내린 장검 끝이 푹하고 지면의 눈바닥을 찔렀다. 이어서 몸뚱이가 한차례 휘청거렸다.
시철이 차마 살수를 쓰지 못하고 칼끝에 사정을 둔 덕분으로 치명상을 모면한 채 볼모로 잡혀 있던 허깨비가 갑작스레 몸부림을 쳤다. 그는 상대방이 훠청거리자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움켜잡힌 뒷덜미를 세차게 뿌리쳐 뽑아내면서 다시 반사적으로 거머오던 시철의 팔뚝을 부여잡고 어깨걸이로 있는 힘껏 넘겨뜨렸다. 펑퍼짐한 시철의 등판이 <꽈당!> 소리를 내면서 땅바닥에 나둥그러지더니, 2장 반이나 주르르 밀려내렸다. 시철은 눈더미 속에 늘어진 채,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마지막 정신이 가물거리는 찰나, 그는 샛된 목소리로 부르짖는 여인의 음성을 들었다.
[봐요, 이놈은 내 투골독침(透骨毒針)에 맞았어!]
얼마나 지났을까, 시철은 뼛속까지 시릴 정도로 차가운 한기를 느끼면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눈덩어리를 뭉쳐서 얼굴에 문질러 주고 있었다. 눈덩어리가 써억썩
얼굴을 훑어내릴 때마다, 그는 오한에 와들와들 몸이 떨렸다.
등불빛이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부셨지만, 그는 자신의 처지가 어떤 지경에 빠졌는지부터 알아내야만 했다. 무엇보다 먼저 눈에 뜨인것은 검정색 양가죽으로 엮은 천막이었다. 투르판 사람들이 곧잘 쓰는 얼개였다. 그러나 반 영구적인 겨우살이 화덕 대신에 얕으막한 임시화덕을 설치한 게 달랐다. 아궁이의 연기도 굴뚝을 놓지 않아 천막천장에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가고 있어서, 천막 안은 매캐한
연기내음으로 가득 찼다. 천막을 밝힌 것은 두 개의 양기름 등잔불이었다. 주인은 모두 여덟 명, 하나같이 투르판 복장을 했어도, 드러낸 얼굴 모습은 중국인들의 것이었다. 여덟 가운데 한 사람온 뜻밖에도 아리따운 여인이었다. 스물 남짓한 그 여인은 갸름한 얼굴 모습에 이마가 시원스레 탁 트이고 앵두처럼 조그만 입술이 사내의 애간장을 녹일 듯 매혹적인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시철 자신은 양 팔 두 다리가 단단히 묶인 채, 가죽 외투자락 위에 모로 뉘여 있었다. 결박지운 밧줄은 아마도 사슴 힘줄인 듯 싶은데 얼마나 세게 묶었는지 손발에 감각이 없다. 표범 대가리에 고리눈을 부릅뜬 사나이가 생김새만큼이나 왁살스런 솜씨로 얼굴과 목덜미를 문질러 주고 있었다. 시철은 뼛속까지 시린 눈덩어리 안마도 지겨웠지만, 이대로 마냥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숨 한모금 깊이 들이마시고서 불쑥 첫마디를 건넸다.
[이미 깨어났소, 노형! 이제 그만 힘을 아끼시구려.]
도대체 이들이 누구인지 정체는 알 수 없으나, 댓바람에 살수를 쓴것으로 보아, 여간한 비적(匪賊) 패거리가 아닌 듯하다. 통성명도 없이, 지나가는 나그네한테 눈 하나 깜짝 않고 다짜고짜 살인적인 기습을 가했다면 물어보나마나다. 이런 작자들 손에 떨어졌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새삼 애걸복걸 목숨을 빌어봤자 살려줄 리 만무하고, 또 완강하게 버텨도 죽기는 역시 매일반이다. 이래저래 죽을 판이라면, 옴병든 개처럼 비실비실 죽을 게 뭐냐? 죽을 때 죽더라도 영웅호걸 탯거리나 부리고 죽어보자꾸나....! 시철의 첫마디가 오만불손하게 호기를 부린 것은 이래서였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 포로에게 느닷없이 '노형!' 소리를 듣자, 표범대가리는 속에서 울화통이 확 터져올랐는지, 안마하던 손바닥으로 냅다 포로의 뺨따귀를 철썩철썩 후려갈기면서 으르렁거렸다.
[개 같은 놈! 어른 앞에서 함부로 노닥거리다니, 눈깔을 파버릴까보다!]
생각보다 힘은 엄청나게 세어 시철은 단 두 대에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그래도 오기를 못 버리겠어서, 그는 냉소어린 울음을 섞어 머리통을 절레절레 내둘렀다.
[그런다고 내가 노형한데 머리 처박고 '아이고, 잘못했소!' 사과할 줄 안다면 큰 오산이오. 어디 맘먹은 대로 내 눈알을 후벼보시지!]
표범 대가리가 다시 한번 주먹을 번쩍 쳐들었을 때, 동료 중 한 사람이 손을 저어 그를 제지했다. 얼굴에는 살점 하나없이 두 귀가 뒤로 뻗친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무릎을 틀고 앉은 채, 음산한 웃음기를 머금고 물어왔다.
[이것 봐, 꼬마야. 허세 부려서 공연히 매를 벌 게 뭐냐? 지금 네처지를 생각해 보려무나. 도마 위의 고기 신세가 아니냐? 잘난 체 하는 것도 때와 장소를 봐가며 해야지. 안그런가?]
[으하하핫!]
시철은 목청껏 웃음을 터뜨려 상대방의 비아냥거림을 막고서 버둥대며 상반신을 일으켜 앉아 맞대거리를 했다.
[당신, 내가 죽기를 무서워하는 줄 아시나보군? 내 한 몸 국경을 벗어나와 이 산설고 물설고 눈얼음이 꽝꽝 얼어붙은 투르판에 와서 반기는 것이라곤 온통 적대감밖에 없고, 맞닥뜨리는 것이라곤 우리 중국 사람을 원수처럼 여기는 몽고인이나 투르판족뿐이었는데, 하루하루를 구차스러운 목숨 따위에 매달리며 살아왔을 듯싶소? 오늘 목숨이붙어 있다가도 내일 눈얼음 속에 뼈를 묻어, 내년 봄철 땅이나 기름지게 만들지도 모르는 신세인데, 내가 뭣을 두려워하겠소? 어서 죽여들 보시오. 그래 봤자, 왼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리다. 칼날 아래 모가지를 떼여서 흠집 하나 크게 나기밖에 더하겠소? 내 나이 열여덟, 그 곱절 세월이 지나더라도 나는 역시 나요. 이 시씨 성을 가진 내가 무릎꿇고 목숨 구걸하는 꼬락서니는 영영 못 볼 거외다. 여보 형씨들도 내 앞에서 거들먹거릴 거 하나도 없소. 나 한 사람 놓고 비겁하게 여럿이서 개 패듯 뭇매질도 모자라 암기까지 썼으니 그래 가지고 날 잡아봤자, 나이값도 못하고 체통만 상했지 뭐요?]
[주둥아리가 매서은 놈이로구나!]
중년인이 야멸차게 응수했다. 허나 시철은 못 들은 척 이죽거렸다.
[부끄러울 게요, 화도 나고.... 안그렇소?]
[그래, 우리 쓸데없는 얘길랑 그만 두기로 하세. 자네 이름이 뭔가?]
[허허, 소인 녀석은 당신네들하고 영웅 놀음할 생각 없소. 보잘 것없는 이 몸, 성은 시가요, 이름은 철이오. 섬서성(陜西省) 토박이에다, 나이 겨우 열여덟, 장가는 아직 안 들어서 마누라는 없고 강호에 떠돌이로 밥술이나 얻어먹다가 성도에서 관청 사람을 죽이고 투르판까지 쫓겨온 망명객 신세가 되었소이다. 이만하면 됐소?]
[강호 떠돌이라고 했는데, 몇 년이나 굴러 다니셨는가?]
[일 년도 못되오.]
[강호에 이름난 인물 좀 알고 계시는가?]
[형씨도 딱한 말씀을.... 어느 미친 강호 명사께서 나 같은 무명졸개하고 교분을 텄겠소? 이 시가놈을 너무 추켜세우시는구려.]
[아까 자네 솜씨를 보아하니, 강호 무림계의 일류 고수급에 조금도 손색이 없던데, 무명졸개라니 천부당만부당한 겸손의 말씀....! 스승께서도 무림계의 대단하신 명숙(名宿)일 듯싶은데, 어디 함자나 일러주시겠는가?]
[제자된 몸으로 감히 사부 어르신의 함자는 입에 올리지 못하겠소. 양해바라오.]
[자네 동료 다섯 분 함자도 일러주실 수 없겠는가?]
[이크, 노형께선 우리 신세 내력을 다 알고 계시는 모양이로구먼!]
[자네가 아까 본 그 말은 쑤쫑 부족의 둘째가는 인물, 바로 쑤쫑쌍카 것일세. 그 사람, 지금은 우리 포로 신세가 되었지. 알고 있는건 깡그리 다 불었다네.]
[다 들었다면서, 뭘 또 물으시오?]
[그 친구는 훌리라 하부르의 소식을 전하러 가던 사람이니까, 자네측 일을 다야 모르겠지. 하부르도 뭘 알겠는가? 그래서 자네 입으로 좀더 설명해 달라는 걸세.]
[옳거니, 일이 그렇게 됐었군! 허나 그 동반자들에 대해선 나 역시 아는 게 별로 없소이다. 그저 아는 거라곤, 성이 고씨, 백씨, 두씨, 문씨, 그리고 또 한 사람은 성씨도 아주 고약스러워서 만리장풍(萬里長風)이라든가....? 그 사람들은 성도 토박이 번운수(飜雲手) 이가기(李家琪) 숙질과 친구 사이더군. 우리 여섯은 무주 노상에서 처음 만났고, 거기서부터 한패가 되었소. 이게 전부요.]
[번운수 이가기라? 그렇지, 내 그 사람은 좀 알지! 흑도의 인물치고 의리를 아주 무겁게 지키는 희한한 친구였어.... 그건 그렇다 치고, 자네는 지금 누굴 찾아다니고 있다든데, 무슨 일 때문인가?]
[소문에 듣자니까, 문향교(聞香敎) 안의 주요인물 두 분께서 이 투르판에 들어와 새 터전을 닦으신다고 하길래, 그분들한테 한 몸 의탁하러온 거외다. 이제 중원 땅에는 집도 절도 없고, 몸바쳐 나라 위할 처지도 못되고 해서, 나도 이 투르판에 들어와 근심 걱정 다 떨치고 편안히 살아볼까 마음먹은 거요.]
백련교(白蓮敎) 사람들은 자기네끼리 문향교도라고 부른다. 백련교라든가 명교(明敎)라는 명칭을 내세워서 공연히 관청의 주목을 받지않으려는 뜻에서였다.
명나라는 태조 주원장(朱元璋) 이 명교의 세력을 빌어 원(元) 제국을 타도하고 몽고인을 대막(大漠)으로 쫓아냈으면서도, 새 나라의 기틀이 잡히차 다시 명교를 마교(魔敎) 집단으로 몰아붙여 무자비한 탄압을 가했고, 그 전통은 2백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예외가 없어 명교, 즉 백련교도를 붙잡기만 하면 일체 참수형으로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신도들도 지하로 잠복해서 공공연히 자기 신앙내력을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네가 찾는 그 두 사람은 누구 누구인가?]
[사룡도와 김굉달이오.]
[그 두 사람을 어떻게 알게 됐지?]
[방금 말했지만, 나는 산서지방 토박이의다. 문향교의 근거지 소주(蘇州)땅과이웃했으니, 아는 것도 당연하지요.]
시침을 뚝 떼고 대꾸했지만, 중년 사나이의 반응은 싸느란 비웃음에 말소리조차 음산해졌다.
[세상에서는 그 두 사람이 대막 땅에 들어간 걸로 알고들 있을텐데? 이 투르판으로 도망쳐온 사실을 아는 작자는 손가락으로 꼽을만치 거의 없단 말일세. 흐흠, 자네가 주워들은 귀동냥치고 너무 신통한걸? 이것보게, 아무래도 순순히 실토해야 자네 신상에 좋을 듯싶네.]
[아, 그럼 노형께서도 그 두 분을 알고 계신 모양이로군요? 노형의 함자는 어떻게 되시는지....?]
[물론 알지! 3년 전부터 이 몸은 사룡도와 막역한 친구 사이가 되었거든. 내이름을 알고 싶나? 말해드리지. 여준국(呂俊國)일세.]
이건 뜻밖의 수확이다....!
시철은 속으로 펄쩍 뛸 듯이 기뻤다. 하지만 내색을 해선 안된다. 그는 얼굴표정이라도 번할까 두려워, 허물어지도록 커다란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아하, 이제 봤더니 그 두 분이 투르판 땅으로 오신 건 바로 여준국형씨가 불러 들였기 때문이로군요!]
[그렇지. 내가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 이리 오라고 불렀는데, 아직 도착을 안했다네.]
[거 참, 유감이로군요. 아무래도 난 그 두 분을 만나 뵐 연분이 없는 모양입니다그려!]
[자, 그만 하면 됐네. 이젠 자네가 바른 대로 실토할 차례일세. 무슨 꿍꿍이
속으로 그 사람들을 찾아 쏘다니는가?]
[난 이미 다 말씀드렸소. 내 말을 믿든 안 믿든, 그건 당신네 자유요.]
[투르판어하고 몽고어가 아주 유창하던데, 관부에서 보낸 앞잡이렷다?]
[세상에, 억지 말씀 마시구려. 아무려면 일국의 관청에서 떳떳치 못하게 겨우 열 몇 살짜리 젖먹이를 이 투르판 땅에 보냈겠소? 관청사람들을 얕잡아 봐도 너무 했소. 노형, 당신은 그 두 분과 친구 사이라면서 만나러 가는 길을 막으니, 그건 또 무슨 심보요? 그네들이 대단한 천하대장부로 소문이 난 것도 아니고, 나 역시 그분들한테 꼭 투신하기로 작심한 것도 아니니, 잘 좀 봐주시구려.]
[아무래도 이놈의 돌대가리는 맞아야 불겠군! 여보게들, 이 녀석한테 채찍맛을 단단히 먹여줘야겠는걸. 어디 몇 대나 맞아야 입을 열지 두고보세나!]
그러자 두 사람이 곁에 놓인 말채찍을 잡고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포로 앞으로 다가서면서 빙글빙글 헤픈 웃음기를 입 언저리에 질질 흘린다.
[꼬마야, 불 테냐, 안 불 테냐?]
어차피 고생길은 활짝 열린 판이다. 시철은 도리어 태연침착해졌다.
[할 말은 다 했소. 채찍 가지고 두들겨 봤자, 허튼 소리밖에 더 나올게 없으니까. 노형, 기왕 칠테면 힘껏 치쇼!]
[흠, 요 녀석 봐라!]
사내 하나가 비수를 쑥 빼들더니, 포로의 웃통 옷자락을 북북 찢어발기고 양다리를 발로 찍어눌렀다. 이윽고 말채찍이 가슴팍에 <철썩!>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시철은 채찍 날에 가슴 살이 한 근은 떨어져 나가는가 싶었다. 그래도 입심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허허! 시철이 허위단심 이 머나먼 투르판 땅까지 사롱도와 김굉달을 찾아 왔다가 투르판족과 원수를 맺더니, 이젠 동포까지도 불구대천지 원수가 됐구나! 사룡도, 김굉달이 도대체 누구길래, 내가 이 지경까지 미치고 빠졌을꼬? 에라, 재수 옴붙었구나! 이 한 세상 태어났으면 죽을 때도 있는 것, 운수대로 맡기자! 이보쇼들! 어디 재간있는대로 다 뽑아 힘껏 치시구려. 기왕지사 죽을 몸, 여러분 솜씨나 실컷 맛봅시다!]
채찍질은 흐트러짐이 없이 한대 한대 절도있게 힘차게 날아가 시철의 몸뚱이를 찢어발기려 들었다. 삽시간에 그는 핏덩어리로 뭉쳐진 사람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철의 입에서는 매질하는 사람만큼이나 독하게 외마디 비명도 고통스런 신음소리 하나 새어나오지 않았다. 너무나 혹독스런 매질이 차마 보기 안됐는지, 젊은 여인이 아리따운 눈썹을 찌푸리더니 여준국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여씨 어르신네, 더 닥달해봤자 헛수고예요! 산채로 끌고가서 채주님한데 맡기면 되지 않겠어요? 내일이면 남조기 사람들과 결전을 벌여야 할텐데, 시간이 없어요. 내일 싸움을 대비해서 힘을 좀 여축해 놓아야지, 밤새도록 이러고 있을 판이에요?]
여준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헛헛, 운소저 말씀이 옳소.... 잠시 멈추게들! 저 녀석도 회개할 여유는 가져야 할테니까.]
채찍질이 멎었다. 두 사내가 물러서는 기척을 느끼자, 포로는 그제서야 얼굴에 고통스런 기색을 떠올렸다. 그는 옴쭉달싹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몸 구석구석까지 파고드는 고통의 여파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 안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는 가운데, 그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은연중 호흡을 조절하여 조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겉으로 보아서는 혼절한 모습이었으나, 가슴 속에선 굽히지 않는 고집스러움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등불이 혹 꺼지고 사람들이 눕는 기척이 들렸으나, 시철은 여전히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방금 불어 끈 등잔보다도 화덕 아궁이에서 활활 비쳐나오는 숯불빛이 한결 밝아 보였다.
시철 곁에는 두 명의 감시꾼이 좌우로 나뉘어 누웠다.
'우선 여기를 빠져나가고 보자! 이 매질 값은 나중에 천천히 갚아줘도 좋을테니까....!'
그는 속으로 끊임없이 다짐을 두었다. 분노의 불덩이가 다짐의 외침에 옮겨 붙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러나 두뇌만큼은 냉정하고 침착하게 돌아갔다. 탈출하기로 결심을 세웠으면서도 그의 몸뚱이는 지금 휴식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선 잠부터 푹 자두고 보자....!
감시꾼은 한참 동안이나 그의 동정을 살피더니 포로가 정신을 잃어 당분간은 깨어나지 못하리라 판단을 내렸다. 경계심이 풀어지면 몸도 점점 나른하게 풀린다. 얼마 안 있어, 감시꾼도 하나씩 코를 골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무공을 연마한 사람이라면, 시각을 알리는 종소리, 해 그림자, 별빛, 달 기울기를 듣고 보지 않더라도 마음 속으로 시간의 흐름을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다. 한 시간쯤 단잠을 자기로 작정했다면 영락없이 그 시간에 맞춰서 누가 흔들어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어나게 마련이다.
시철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아직도 한밤중이었다. 천막 바깥에는 세찬 강풍이 휘몰아쳐 장막 전체가 당장에라도 허물어질 듯 전후좌우로 사납게 흔들리고 있었다. 화덕 숯불도 이제 사그러드는지 희미한 빛만 남았다. 시철은 눈꺼풀을 살그머니 열고 숯불빛에 천막 안의 상황을 비쳐보았다.
'잘들 자는구나....! 허깨비 여덟 마리가 아예 곯아 떨어졌어....'
시철의 손은 손대로, 발목은 발목대로 묶인 상태다. 그러니까 허리무릎 팔꿈치는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가 있다. 그는 두 다리를 슬그머니 끌어올려 옴츠리면서 뒷짐지워 묶인 양 손을 아래쪽으로 늘어뜨렸다. 손과 다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무릎까지 올라온 가죽장화 목 언저리에 손가락 끝이 닿자, 그는 가슴이 벌떡벌떡 뛰기 시작했다.
'있다, 있어....! 놈들도 이건 뒤져내지 못했어....!'
종아리 부분 장화 속에는 길이 네 치의 소형 철령전이 좌우 한 대씩 감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살그머니 쇠화살 한 개를 뽑아잡고 다시 원자세로 돌아갔다. 이제부터 할 일이 수월치는 않다. 화살촉의 날카로운 끄트머리로 결박을 풀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손목을 더듬더듬 비틀어 결박지워진 사슴힘줄에 살촉 끝을 갖다 붙였다. 그리고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천천히 힘주어 썰기 시작했다. 손목이 묶인 상태여서 힘을 쓰기가 어려위 여간 애를 먹는 게 아니었으나, 살기 위해선 짜증도 억누르고 참을성있게 톱질을 해야 한다. 사슴 힘줄온 보통 질긴 게 아니어서, 처음에는 자국이 나는지 안 나는지조차 모르겠더니, 생쥐 이빨 같은 예리한 살촉 끄트머리 날로 한참 공을 들인 끝에 그 질겨빠진 녹근삭(鹿筋索)이 느슨하게 풀려가는 감촉이 오기 시작했다. 머리터럭만한 여유가 생기면 그만큼 손목 놀림도 자유스러워진다. 또 톱질 역시 활발해지는 것이다. 한참, 또 한참, 드디어 결박 한 가닥이 끊어질 참에 왔다. 그는 조그맣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막판에 다다른 것이다.
시철이 마지막 톱질에 힘을 주려는 때였다. 돌연 천막 바깥에서 어렴풋이 인기척이 들려왔다.
'맙소사! 어떤 놈이 훼방을 놓는 거야....? 이 녀석들을 깨워선 안되는데.
큰일났다....'
첫댓글 시철이의 활약이 너무 재밌네요, 작가님... 두편씩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ㅎㅎㅎ
시철이의 활약이 너무 재밌네요, 작가님... 두편씩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