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향해 겨냥하다, 1회>
"아버지께서 위독하셔. 곧 있으면 돌아가실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따라 아버지께서 너만 찾으신다.
잠깐 집에 들러서 아버지께 얼굴만 보여주고 가면 안되겠냐..
미안하다. 자꾸 힘들게 해서.."
"아니요.. 갈게요. 지금 갈까요?"
"그래줄래?..."
"그럴게요. 한시간 후에 도착할거에요..
아버님께 말씀 드리세요.."
"고맙다.. 이따 보자."
".........."
끊긴 전화.
세연은 주하와의 통화가 끊겨졌음에도 불구하고 30초 동안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얼굴도 비치지 않고 이런 부탁을 하는 주하에게 서운한 마음이
들긴했지만 순순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사랑했으니까..
세연은 한시간 뒤에 간다고 말은 했으나 바로 가방을 챙겨
일 하던 것을 한 쪽으로 미뤄놓고 회사를 나왔다.
"세연씨, 어디가? 오늘 야간 아니었나?"
"아, 이사님.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가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대신 부사장님께 비밀로 한 걸 감사하게 생각하고
나중에 한 턱 쏘라구."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가볼게요."
"그래. 내일 봐."
회사 안에서 지위 차이가 많이 남에도 친하게 지내왔던
이 회사의 이사, 현민과 마주치고 세연은 서둘러 걸었다.
딩~동.
세연은 주하의 집 입구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언제나 크게만 느껴지는 이 집..
하지만 낯설지만은 않다.
덜컥.
대문이 열리고 세연은 집 마당안으로 들어갔다.
이 집안에 들어서면 생각나는 그와의 추억은 정말 세연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그냥 오지 말걸 그랬나..'
"아가 왔니?"
약간의 초조한 마음을 갖고 집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주하의 母가 문에서 뛰어나와 세연을 맞았다.
"어머니. 안녕하셨어요?"
"그래.. 세연이도 잘 있었니?"
"그럼요.. 저야 뭐 언제나 씩씩하잖아요."
애써 웃어 보이는 세연을 보며 주하의 母도 그리
편한 마음은 아닌가보다.
"들어가자. 이 집.. 정말 오랜만이지?"
"그렇네요."
주하의 母와 함께 세연은 집 안에 들어갔다.
신발을 벗고 거실안으로 발을 들이니 눈에 비치는 사람은
쇼파위에 앉아있는 주하.
"왔어?.."
주하는 세연을 발견하고 짧게 인사했다.
세연은 웃으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잘.. 지냈어요?"
"........"
세연의 말에 주하는 고개만 끄덕였다.
주하의 母는 둘의 공간에 어색함을 느끼고 마음이 쓰라려 오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 그렇게 사랑하던 둘이 어떻게 저렇게 변했는지...
주하의 母는 터져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 노력했다.
"자, 그럼 아버지께 가봐야지. 주하도 따라와라."
주하의 母의 말에 주하는 쇼파에서 일어났고 세연과 함께
나란히 안방에 들어갔다.
세연은 안방에 들어서자마자 예전보다 더 약하고 늙어보이는
주하의 父를 바라보았다.
주하와 주하의 母는 세연의 슬픈 눈빛을 알아채고 고개를 숙였다.
세연은 천천히 주하의 父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
"아버님.. 저 왔어요. 세연이요.."
"흠... 음...."
"저 너무 늦게왔죠.. 죄송해요. 옆에서 돌봐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세연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예전에 그렇게 자신을 이뻐해주고 마치 자식같이 아껴주었던
아버지와 다름없는 분이 힘없이 누워있었다.
주하의 母는 어깨를 떨고있는 세연의 어깨를 감싸고 함께
눈물을 흘렀다.
주하는 방 입구에 서서 표정없이 세연을 눈안에 담았다.
"세..연이니..."
그 때, 눈을 힘없이 감은 채 미동없이 누워있었던 주하의 父가
힘없이 입을 열었다.
"네.. 아버님. 저 세연이에요.."
"왔구나.. 왔어... 죽기전에 보고싶었는데.. 왔구나..."
"아버님께서 왜 돌아가세요.. 저희 곁에 더 있다 가셔야죠.."
"그래야.. 할텐데.... 쿨럭.."
"쉬세요, 아버님.. 무리하지 마시구요.."
"다시.. 갈거니?"
"..........."
주하의 父의 말에 또 마음이 메어져 오는 세연이었다.
"쉬세요, 아버님.. 건강하셔야 되요. 약도 꼭꼭 챙겨드시구요.
약하게 마음 먹으시면 안되요. 아시겠죠? 약속이에요.
다음에.. 또 올게요. 건강하세요."
"가지말거라.. 세연아.. 내 마지막 부탁이다..
부디.. 내가 죽는날 까지만.. 예전에 너희 둘이 행복했던
그 모습 보여주면 안되겠니..?"
"........."
"........."
주하의 父 말에 주하의 母의 눈에서 눈물 한줄기가 힘없이 뚝 떨어졌다.
세연은 마음이 아팠다.
"내 마지막 부탁이다.. 하늘에 가서.. 너희 둘 웃음 떠올릴 수 있도록.."
"아버님... 흐흑..."
세연은 누워있는 주하의 父의 몸을 껴안고 울었다.
"힘들다면.. 쿨럭... 안그래도 된다... 흐음.."
"죄송해요.. 아버님.. 정말 죄송해요... 흐흑..."
"..........."
주하의 父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해서 지친 것이었다.
"자.. 우린 이제 나가자."
주하의 母가 세연을 일으키고 주하와 방을 나왔다.
그리고 안방의 문을 조용히 닫았다.
잠깐의 잠적이 흘렀다.
쇼파에 앉은 세연은 아프고 슬픈 마음을 진정시켰다.
주하는 그런 세연에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고맙다.. 찾아와줘서."
"아니요.. 뭘요. 제 임무인데요."
"여기.. 눈물 닦아."
주하는 세연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세연은 웃어보이며 손수건을 받아들었다.
예전에도 세연이 우는 것을 싫어했던 주하.
그럴때면 꼭 손수건으로 세연의 눈물을 닦아주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직접 닦아줄 순 없으니 손수건만 떨리는 손으로
건네준다.
"세연아, 이것 좀 마셔."
주하의 母가 세연에게 직접 끓인 둥그레 차를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세연은 둥그레 차를 받아들고 호호 불어 식힌 다음
조심스럽게 마셨다.
"세연아. 아까 네가 본대로.. 주하 아버지 상태가 많이 안좋다..
여태까지 말 한마디 안하시던 분이셔.. 하지만 네가 오고
말 몇마디 하시는 것 보고 역시 주하 아버지한테는 너의 간호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어.."
"네.. 어머님...."
"내가.. 부탁 하나 해도 될까?"
"무슨.. 부탁을..."
"후우..."
주하의 母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세연이 너와 주하가 많이 힘들거라는 것 안다.
하지만 저리 슬프게 돌아가시는 모습보기 내가 안타까워서
도저히 저리는 못 보내겠다.."
"어머님.. 아버님 괜찮으실거에요.."
"그래.. 괜찮겠지.. 세연이 네가 있다면."
".........."
"죽어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불쌍한 날 봐서라도
아버지 돌아가실때까지만 이 집에 있으면 안될까?"
"어머니..."
세연은 주하의 母에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여
예전보다 많이 상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부탁이다, 세연아.. 우리가 많이 밉긴 하겠지만..
저 불쌍한 아버지를 봐서라도.. 내 부탁 들어주면 안되겠니?"
"............"
'전 괜찮아요.. 하지만.....'
세연은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힘들어할 것인 주하를
보기가 싫었다.
자신은 이 집에서 백날이건 천날이건 주하의 父의 병세를
돌봐도 상관없었다.
고아인 자신을 아버지처럼 받아들여주신 분이시니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버지니까.
"그렇게 해."
세연은 주하의 뜻밖의 말에 고개를 들어 주하를 쳐다보았다.
주하의 표정은 무표정이었다.
"아버지.. 돌아가실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까..
그때까지라도 웃는 모습 드려야지."
".........."
세연은 주하와 주하의 母사이에 앉아서 어떻게 대답해야 될지 몰랐다.
'그렇게 할게요..' 라고 하면 그동안 기다려왔다는 듯한 대답이 될까봐
주하가 싫어할 것 같아 두려웠고...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 주하의 父에 대한 죄송함이 너무나 컸다.
"세연아.. 잘 생각해보거라.. 너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신분이다.
부디.. 하늘로 떠나가시는 날까지만 웃음 짓게 해드리자. 응?"
"............"
"..........."
"............"
"네... 그렇게 할게요..."
세연은 힘없이 대답했다.
자신도 앞으로 주하를 마주하기 괴로울 것 같았다.
그리고.. 견뎌내기 힘들 것 같았다.
사랑했던 사이...
그리고 헤어진 사이...
행복하게 웃던 과거는 어디로 갔는지
둘 사이는 서먹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