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관한 시모음 83)
여름은 죽어 가는데 /강선기
살갖을 떠도는 바람의 흔들림 앞에
시간은 물 흐르듯 멈춤을 잃어버리고
익숙하지 못한 반소매 티에
가을은 내려앉아 풀잎마다 눈물자국 남겨 놓았네
눈치없는 가을 햇살은 반짝거리며
가을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창 틈새로 기어 들어오는 가을 냄새에
잔뜩 웅크린 모기새끼들은
하얀 벽 에다 대가리를 처박고 윙윙 거린다
땅 바닥에 피를 토하며 다음 생을 약속하는 아침
가을이 점점 깊어갈즈음
가을 이야기 하나를 만들고 나니
여름을 노래한다 /염인덕
바람이 불어와
하얀 물거품 일렁이더니
저 멀리서 푸르름이 손짓한다
비릿한 냄새 향기로 우는데
갈매기 구름 사이에 다정하게
사랑 노래 불어 주는데
뜨거운 햇살 아래 앉아
황금빛 모래 위에서
청춘에 아름다움도 그려보고
이 순간 하얀 파도 위에
그리움에 젖어 희망을 띄워놓고
옛사랑 노래 불어 본다.
그 여름 /이원문
부푼 꿈 즐거움
뒷산 길로 멀어지던 날
매미울음에 묻은 꿈
다시 내년이 되어야 했고
아침저녁이 다른 바람
그 아쉬움 잊어라 한다
누가 이 여름을
그 바다에서 즐겼을까
해마다 가겠다는 곳
그렇게 벼르고 벼르던 곳인데
또 꿈 깨어진 한해가 되어야 하나
차라리 그 말을 듣지나 않았더라면
가보고 싶었던 그곳
처음의 여름이었으니
얼마나 가고 싶었나
자랑에 들었으니 더 그랬었고
내려놓아야 하는 실망과 절망
뒷산 길 그 노을에 올려놓았다
산 개울에 여름 스케치 /김재진
햇살 깃든 푸른 숲에 여름 향기 짙고
쪽빛 하늘 뭉게구름 두리둥실 떠가고
익어가는 밤나무 그늘 가지 찌르레기
구성지게 노래하는 한낮의 콘서트네
영지 따려다 줄무늬 모기한테 쫓기고
땀범벅 따끔따끔 개울물에 잠수하네
바위 옆 개똥쑥 으깨어 귀 틀어막고
피라미 송사리 꼬륵꼬륵 인사 나누네
멱 바위 휘두른 숭덩 여울에 첨벙첨벙
찔레꽃 버들강아지 귀엣말 간질이고
갓 푸른 억새밭 어깨 춤사위 덩실덩실
가을 전령 고추잠자리 시찰 비행하네
길섶에 고운 아가씨 쑥부쟁이 산나리
더위에 지쳤는지 꾸벅꾸벅 졸다가는
아닌 척 뭇 남정네 힐끔힐끔 쳐다보다
삼복더위가 시원한 계곡물에 씻기네
속옷 벗어 너럭바위 난간에 걸어 두고
붉은 저녁놀 산들바람에 젖은 몸 말리니
세상 시름 설움은 왜가리가 물고 떠나고
호랑나비 고운 날갯짓에 행복이 파닥이네.
여름 이후 /이종형
남아 있는 생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받고 싶은 일들이 하나둘 떠오르고
뱉어내는 말보다 주워 삼키는 말들이 많아졌다
삶이 낡았다는 생각이 들자 내 몸에 새겨진 흉터가
몇 개인지 세어보는 일이 잦아졌다
반성할 기억의 목록이었다
뼈에 든 바람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두려웠고
계절이 몇 차례 지나도록 아직 이겨내지 못했다
사소한 서러움 같은 것이 자꾸 눈에 밟히지만
아무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했다
바싹 여윈
등뼈가 아름다웠던 사랑이 떠난
여름 이후
여름 /조연호
낭떠러지의 여름이다
여름마다 여름을 뒤돌아보는 것이 피곤했다
나를 그네라고 부르는 그 사람은 머리를
사슬로 감아주자
여름마다 자기를 흔들어도 좋다고 말했다
추락하는 여름이다
팔다리가 달린 검정과 놀았지만 혼자서 했던 연애
나도 허공이었던 것을 너만큼 변심으로
내 발등에 엎지를 줄 안다
천박한 짓을, 자아보다 못한 짓을
땀샘과 모공으로 채우며
지금은 덩굴손이 붙잡는 것을 윤회의 크기라고 생각하며
네가 흔든 것을 내가 흔들렸던 것으로
비교하는 멍청한 짓을 하며
너를 잊고 있다
논 /오세영
모자라지 않게 짤박 짤박
물을 채우고
입김으로 솔솔 봄바람을 피운다
확
일어나는 그 여름의
파아란 불길,
태풍과 폭염으로 한동안 끓어 넘치던
물이 증발하자
마침내 솥단지는 잘 익은
벼 이삭들로 가득하다
여름 /이상현
산 위에 오르면
내 생각이 산처럼 커진다
바다에 나가면
내 가슴이 바다처럼 열린다
파아란 산 위에서
바다에서
내 키가 자란다.
내 생각이 자란다.
여름 /이시영
압구정동 한양아파트 앞길
아카시아꽃이 활짝 피어
노오란 꽃잎들을 와르르 포도 위에 쏟아놓는다
그 위를 아무것도 모르는 계집년 둘이
허연 다리를 허벅지까지 드러낸 채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걸어간다
어디서 훅 풀 비린내가 스쳐온다
매미네 마을 /정현정
매미는
소리로
집을 짓는다.
머물 때 펼치고
떠날 때 거두는
천막 같은 집
매미들은
소리로
마을을 이룬다.
참매미, 쓰름매미, 말매미 모여
온 여름
들고나며
마을을 이룬다.
여름에는
사람도
매미네 마을에 산다.
여름 /유승도
옥수수도 수술을 늘어뜨린 채
한껏 고개를 들었다
오이도 하늘로 치솟고 고구마도 줄기를
뻗어 땅을 덮었다
풀과의 싸움에 지친 농부의 모습 뒤로
작물들이 팔을 뻗어가는 계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것도 알수 없는
세월 속에서
바람은 불어라
비는 내려라
내 마음속의 자그마한
꿈틀거림조차 쓸어가
진정 태양의 기운으로
가득 차게 하라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안희연
온전히 나를 잃어버리기 위해 걸어갔다
언덕이라 쓰고 그것을 믿으면
예상치 못한 언덕이 펼쳐졌다
그날도 언덕을 걷고 있었다
비교적 완만한 기울기
적당한 햇살
가호를 받고 있다는 기쁨 속에서
한참 걷다보니 움푹 파인 곳이 나타났다
고개를 들자 사방이 물웅덩이였다
나는 언덕의 기분을 살폈다
이렇게 많은 물웅덩이를 거느린 삶이라니
발이 푹푹 빠지는 여름이라니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든 거니
언덕은 울상을 하고서
얼마 전부터 흰토끼 한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했다
그뒤론 계속 내리막이었다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밤이 왔다
언덕은 자신에게
아직 토끼가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지만
고요 다음은 반드시 폭풍우라는 사실
여름은 모든 것을 불태우기 위해 존재하는 계절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토끼일까
쫓기듯 쫓으며
나는 무수한 언덕 가운데
왜 하필 이곳이어야 했는지를 생각했다
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떤 시간은 반으로 접힌다
펼쳐보면 다른 풍경이 되어 있다
끝나가는 여름의 자태 /정찬열
저수지 옆 등산로길
커다란 나무 몸체에 붙은
7년의 자국을 남긴 연황색 허물
모성의 자태가 뚜렷하다
수년을 참았던 한여름의 울음
귀청이 떠나갈 듯
발악하는 목쉰 소리가 섧다
매미 허물은 그대로인데
생각해 보면 삭정이 허물처럼
불쌍한 마음 걷는 걸음 더뎌진다.
칠월 백중을 사랑하는
지겹고 무덥던 여름의 자태
한반도를 다 덮는다는 태풍 ‘마이삭’
풍속과 돌풍이 사십 m을 넘나든 다며
십칠 년 전 ‘매미’보다 더 큰 위력으로
사찰 앞 터널
숲속에 꽃무릇은
속절없이 축포를 터뜨린다.
잎도 없는데 궁창(穹蒼)에 꽃대 내밀고
발악하던 매미의 위선도 서러운 심연(深淵)
끝나는 여름, 아쉬움을 삼키며 속울음 토한다
여름 /안계종
찔레꽃 향기
구비 휘돌아 아롱진 너울로
여름을 재촉한다.
몸도 마음도
시원한 여름이길 바란다.
아름다운 삶의 열매로
여름이길 바란다.
아름다운 관계로
추억 만드는 여름이길 바란다.
하얀 찔레꽃 향기로
분홍빛 여름이 되리라
완강한 여름 /정운희
집 나간 언니는 소식이 없다
열흘도 훌쩍 넘기면서
폭염은 계속되고 있다
타들어가는 돌멩이들
옥상들
십자가들
소음과 함께 날아온 먼지를
뒤집어쓴 기념일
약속한 터미널
창틀에 놓인 화분에
초록이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초록이 전부인
초록을 뒤집어쓴 초록 손수건 같은 비밀만 키워가고 있다
소음과 먼지에 대한 분쟁이 시작됐다
서랍 속, 밀봉된 언니는
흑백의 단발머리 사진으로 웃는다
완벽한 공휴일 같은
흠잡을 데 없는 영수증처럼
층층이 치솟은 창문들
현수막에 새긴 결심들
생물들은 빠르게 몸을 뒤섞고
우리는 생경한 단어를 피해 각자의 방으로 기어들었다
여름 하늘 /이재환
북쪽 하늘
무서운 검은 구름
바람 따라 흘러가고
하늘은
갑자기 어두워지고
발걸음은 빨라진다
번쩍번쩍 불 켜더니
우르르 쾅쾅
괴성을 지르더니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도로는 물로 가득하네
한참을 퍼붓던 비 그치고
하늘이 환하게 웃더니
일곱빛깔무지개가 반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