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담
사람으로써 평생학습이이란 “요람에서 무덤까지” 란 옛 말이 있고 또한 “ 교육이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 -칸트-의 말과 같이 사람답게 살려면 평생학습의 소중함을 깨닫는다. 2011년 이천에서 “평생학습 축제” 봉사 활동을 통해서 보고 느낌 봐가 크다.
옥녀봉 산기슭에 자리 잡은 산골에 태어나 여자란 이유로 교육적인 혜택을 별로 받지 못 했다. 초등학교을 졸업하고 공부가 하고 싶어서 신문보고 나이 17세때 집을 나와 대구에서 고시학원을 다니다가 인천에서 회사다니는 오빠에게 편지 하여 소개 해준 야간 동인자립 중학교 3학년 편입 했다. 교복을 입고 학교 다니는 것이 행복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서는 논 밭이 좀 있다 보니 부모님 두분이 농사 짓기가 벅찼던 것이다.
아버지께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하시면 내려 오라는 편지가 자주 왔었다. 마지 못해 큰 아쉬움을 접고 부모님 농사일을 도와 드렸다.
몇 년 후에 구미 대한전자 다니면서 야간학교에 다닐수 있는 기회가 왔지만 중학교 졸업장이 없으니 다시 중학교을 다닌다는 것이 수치심이 앞서 기회을 놓치고 말았다. 그것이 평생 한으로 남는다.
결혼을 하고 큰 애가 중학교 들어 갈 무렵 불현듯 자녀교육에 도움을 주기 위해 나도 배워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이천 공판장내에서 한 코너을 얻어 문구 완구 작은가게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날 신문광고을 보니 독학으로 검정고시을 보는 곳을 알았다.
일단 중학 교과서을 사서 가게을 하면서 틈틈이 공부하여 고입 검정고시에 한번에 9과목을 학격하고 바로 대입 교과서 전과목을 사서 공부를 하였다. 나이는 사십이 넘었고 늦갂이 공부에 신나게 한것 같다. 혼자서 영어 단어 외우는것 수학 풀고하는 재미는 나만의 기쁨이었다. 마음속으로 환희의 아우성을 지르면 했었다.
물론 대입도 독학으로 했다. 가게 일을 보면서 공판장 안에는 음악과 반짝세일 시간이나 기간때에는 소음공해가 엄청 심했다. 하지만 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방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대입도 한번에 통과하여 온 식구가 축하해 주어 보람을 느꼈다.
남편이 방송대을 가라고 원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독학으로 학사학위의 자격증을 따겠다고 하여 거금 주고 독학 대학과정 교과서 세트을 샀다. 성남에 있는 사무실이 책만 팔고 문을 닫은 것이다. 대입까지는 혼자 힘으로 공부 할 수 있지만 대학에서는 정보와 자료가 필요 한것 같다. 사이트가 있었지만 연회비가 있었다. 관리를 전혀 못 받고 혼자공부하여 그 당시에는 방송대 (서울성수지역대학) 교실에서 첫 번째 시험을 보았다. 시험에 어려움을 겪고 나중을 기약하고 가게도 그만두고 자유직업을 택해 큰 돈 벌어 보겠다는 매력에 빚 내어 많은 돈을 투자하여 된 서리를 맞고 시린 가슴을 부여잡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몇 년동안 회사다니면서 힘든 노동으로 번 월급을 고스란히 빚 갚는데 희생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 대학공부의 미련을 남겨둔채 세월은 하염없이 흐르고 오십이란 나이을 훌쩍 넘기고 이천 방송대 학습관 간판을 보고 문을 두드리지만 이제와서 할 수 있을까 하는 망설임에 잊고 몇 년 지나고 보니 자신에 대한 회한이 젖어 든다.
많은 돈을 빚 갚는데 희생하다 보니 내 인생이 불쌍한 생각이 든다.
이제는 나에게 투자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방송대 사이트을 둘러보고 마음이 돌변하여 도전하는 마음으로 갑자기 방송대(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 국문학과에 등록을 하고 늦게 아슬하게 학격을 하고 늦갂이 대학생이 되었다.
직장과 공부를 병행하다가 너무 힘이 들어 직장을 그만두고 나의꿈을 키우기위해 공부와 알바를 병행하면서 모자란 시력, 청력, 기억력으로 힘들었지만 그래도 즐기면서 공부를 한것 같다.
그런 가운데 대학생활을 향유 하기위해 행사인 O.T, M.T,동아리,체육대회,단합야유회, 한마음학술대회등을 참여 하였다.
전국에서 모인 학술대회와 여러행사는 끼와개성이 넘치는 방송대의 문화인모습 한 마당 잔치였다. 볼거리가 많고 즐겁고 너무 멋이 있었다. 방송대에서 즐기고 누리는 행복이었다.
처음 일학기 출석수업에는 여러 계층이 모여 수업 받는 것이 행복해서 새벽에 일어나 이천에서 서울성수지역대학까지 제일 먼저 교실에 들어가 조명을 밝혔다. 출석수업이 끝나고 책걸이 할때 낭만적인 지도교수님과 국문과의 학우들과 건대 근처에 와야 대학다니는 기분이난다고 하여 호프집에서 분위기있게 향유 하면서 대학생활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것을 느꼈었다. 교수님 말씀 방송대는 졸업을 못하면 동문인이 될 수 없다고 하여 항상염두에 두고 공부을 하지만 습관화 하기까지 힘들었던 것 같다. 어릴때 왼쪽은 실명 오른쪽 시력만 사용하고 있다.
습관화 되기 위하여 백일정성의 기간이 필요 하다고 누가 그러더군. 경제적인 문제와 시간적인 문제가 항상 압력을 가했다. 이것을 병행을 하면서 자신을 위하여 항상 긍정적인 사고로 위안을 해본다. 방송대 일 학년때에는 행사에 참여하다보니 돈과 시간이 많이 들어간다. 이 학년 부터는 행사 가는 것을 자제을 하고 공부와 아르바이트을 하면서 빚을 조금씩 갚고 했다. 어느듯 4학년이 되어서는 1~2학기때는 장학생이 되어 보람을 느꼈다.
배우면 아는 만큼 보이니까? 허락한 시간내에서 평생의 학습에 도전을 하는 것이다.
방송대 슬로건는 “꿈과 열정이 있고 공부하는 사람은 언제나 청춘이다” 라는 말과 같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고 마음은 젊다. 하지만 어려움이 없지는 않다. 첫째 눈이 침침하여 책 보기가 힘이 들고 깜박깜박하는 건만증도 있다. 녹슨머리 나이 만큼 반복을 해야 하는 기억력을 극복을 해야 한다. 학습도 훈련이다. 거듭 훈련하면서 자신감이 얻어 지는것 같다.
졸업여행을 동해바다로 다녀오고 이제 방송대 졸업이 몇 일 안남았다. 일과 시 습작도 해보고 한다. 꿈이 시인이 되는 것이다. 학교생활은 옥성초등학교와 국립 한국방송통신대학교가 나의 영원한 모교가 되는 것이다. 이제 지천명을 넘어 이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한 마리 파랑새가 되어 비상을 꿈꾼다.
첫댓글 선배님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학업에 열중하시는모습 존경합니다......그동안 힘들게 공부하셨네요...드립니다 멀리서......... 요을 보냅니다.......
고생끝에 낙이온다는 단어가 떠오르네요
방통대 졸업
선배님 열정에
후배님 응원해 주시니 너무 고맙고 감사 하네요. 따뜻한 마음 항상 축복이 있길 빕니다.
향숙아 수고했다 지금이나이에 배움이란 내자신의 만족감인것같다 누가알아주지않아도 내가행복하고 내가즐겁고 ...너의발자국을따라 나도가고 있네 그동안한이었던 공부가 이제와서 나에게 큰행복을 주고있네 숨쉬고 산다는 그자체로서 행복하다 나를위해 뭔가할수있다는것 향숙아 건강하고 파이팅하자
폰으로 올렸더니 뛰어쓰기 엉망이네요
인숙아 고맙다. 인숙이도 건강과 즐거운 인생 엮어 가길 바라면서 우리 아자! 아자! 파이팅!!!!!!
가슴이 찡해오네요 친구지만 존경스럽네요
하고자하는 용기에 감탄하고 힘든시절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뭐라말할수없는 뭉클함이 그대를 아름답게 하네
졸업식은 언제인고 축전띄울께
윤철아 고맙다. 졸업 했어 사진 올릴께 항상 건강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