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외 1편
신축년 추석이었다. 아들 며느리들이 여느 해처럼 추석 음식을 장만해서 진수성찬으로 추석 상을 차렸건만 왜 그리 허전하고 쓸쓸했는지 모르겠다. 임인년 추석이 다가오는데 올해는 활짝 웃는 추석이 되었으면 싶다.
추석을 대표하는 음식은 송편이다. 아내가 건강했을 때는 아들과 손자들이 둘러앉아 햅쌀로 송편을 빚고 한쪽에서는 며느리들이 고기도 재고 지지미도 붙이면서 막걸리도 한 잔씩 마시면서 가족이 모여 화기애애한 추석맞이를 했다. 아내는 쌀가루를 반죽해 치대어 놓고 송편 속에 넣을 햅콩이랑 동부 참깨 등 소를 준비해 두면 둘째 아들이 손자들이랑 송편을 빚었다. 나도 손자들 틈에 끼어 거든다. 손자들이 솜씨를 부려 빚어놓은 송편을 보면 크고 작고 모양도 가지가지다. 각자의 개성이 나타나는 것 같다. 이렇게 만든 송편을 조상님들도 드시면서 흐뭇해하셨을 것이다. 이렇게 아들 며느리 손자들이 둘러앉아 음식을 만들며 화기애애한 모습이 행복인 걸.
추석이 가까워지면 난 등산 갔다가 솔잎을 따온다. 아내가 원장인 유치원에서도 원아들이 추석 송편 빚기 실습을 하기 때문에 유치원에서 쓸 솔잎까지 넉넉히 따 와야 했다. 그런데 요 몇 년간은 코로나 때문에 유치원에서 송편 빚는 행사를 못 했다.
신축년 추석에는 송편을 큰아들이 사 왔다. 모양도 예쁘고 크기도 일정해 먹음직스러워 보이긴 하지만 아내가 반죽해 손자들이랑 빚은 송편 맛만 하랴?
차례상도 아내 유고 후 처음 차리는 상이라 아들 며느리들이 정성껏 만들어 차례상을 차렸건만 허례허식 같게만 느껴졌다. 전년 추석에도 아내는 아파 추석 음식을 만드는데 거들지도 못하고 아들과 며느리들이 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만 보았을 뿐이라 예년과 달라진 게 없는데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한지 모르겠다.
우리 부모님 차례는 조카가 고향에서 지낸다. 나는 명절에 제수 비용만 조금 보내고 참석을 못 하지만 집에서 명절 때면 부모님 차례상을 차린다. 7남매 중 자식이라고 나 하나 남았는데 내 생전에 부모님 차례라도 지내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그리했다. 상 차리는 김에 밥 한 그릇을 더 올려 먼저 간 아들도 추모했다. 그런데 이번 추석 상에는 밥 한 그릇을 더 추가했다. 그걸 보니 마음이 울적해지면서 눈물이 핑 돈다.
나는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명절이나 제사에 관해 내가 바라는 바를 이야기 했다. 너희들은 나한테는 아들딸 며느리 손자들이지만 손자들끼리는 사촌 간이다. 사촌 간이지만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동질감을 가지고 상호 협력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내 소원이다. 명절이나 제사 때 차례가 의미가 있는 것도 형제자매가 다 모여 일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절이나 제사에는 아무리 바빠도 형제가 모두 참석하기를 바란다. 나 사후라도 내 말을 명심하기를 바란다. 딸은 출가외인이라 그렇다손 치더라도 설과 추석 명절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은 내 집에 모여서 지내고 내가 죽은 후에는 설날과 아비 제사는 큰아들 집에서 지내고 추석과 어미 제사는 둘째 아들이 지내라. 우리 풍습에는 장손이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큰아들이 꼭 지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 사람이 계속 지내다 보면 형제간에라도 불평불만이 생길 수도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형제간에 의가 상할 수도 있다. 그래서 형제간에 왕래가 끊기고 멀어져 남남보다도 못하게 지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 부탁을 따르다 보면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해지고 화목해 질 것이다. 분담해서 제사를 지내다 보면 일 년에 몇 번씩이라도 형제간에 왕래하게 될 게 아닌가. 서로 바쁘게 살다 보면 일 년 내내 형제간 집에 한 번도 못 가보는 수가 허다한데 제사를 계기로 서로 왕래하다 보면 상부상조하게 될 것이다.
내 친구한테 들은 실화다. 사촌 간에 한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사촌인 줄 모르고 친구로만 알았다는 것이다. 어느 날 성도 같고 항렬자도 같아 가정사를 이야기하다 보니 사촌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집안도 형제간에 바쁘게 살다 보니 왕래가 없었다더구나. 형이 나와 고등학교 동창인데 군 중령으로 제대하고 건설회사에 취직했는데 국내외 건설 현장에 쫓아다니며 근무를 하다 보니 명절 때도 형제간에 만날 기회가 없었단다. 아우도 우리나라의 유명 인사다. 장관도 지냈지만, 우리나라의 굵직한 사업을 몇 군데 한 분이라서 이름을 대면 알만한 분이다. 서로 바쁘게 살다 보니 형제간에 함께 모일 기회가 없어 자식들도 만날 기회가 없었겠지. 학교 친구로만 알았다는 것은 왕래가 없었다는 증거라 이런 헤프닝이 벌어진 것이다.
7월에 아내 첫 제사를 둘째 아들 집에서 지냈다. 하계동에 살다 효창동으로 이사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아 형제간에 새로 이사한 집도 모르고 지내다가 이번 제사에 손자 손녀까지 다 참석했으니 집들이도 겸한 셈이 되었다. 직장에 다니느라 바쁜 둘째 며느리한테도 도움이 됐으리라 생각된다. 둘째가 직장과 아이들 통학 거리를 생각해서 하계동에서 효창동으로 이사를 했지만 집들이도 못 하고 있다가 가족이 다 모였으니 두 일을 한꺼번에 해결한 셈이다.
생각을 조금 바꾸니 일의 부담도 줄고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해지니 얼마나 좋은가? 임인년 추석이 다가온다. 옛날처럼 오손도손했던 추석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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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백야도 기행
9월 중순께 여수에서 고흥군 나로도를 잇는 연육교가 개통했다는 신문 기사를 보았다. 24일에 분당에 사는 친구랑 수내역에서 만나 점심을 먹으면서 그 이야길 했더니 그도 기사를 읽었다며 한 번 가보잔다. 그래서 말 나온 김에 점심 먹고 바로 서현역사에 있는 여행사로 가서 기차표를 예매했다.
9월 28일 8시 47분에 용산에서 출발하는 새마을호를 나는 탔고 그는 수원역에서 탔다. 더위도 한풀 꺾이고 여행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경기지방은 녹지대가 많이 줄었고 건물들을 짓거나 지어진 건물로 전망이 그리 좋지 않다. 여수역에서 택시를 타고 이순신 광장으로 갔다. 근처에 서대회 잘하는 식당이 많아 서대회 정식으로 점심을 든든히 먹었다.
서울에서 출발하기 전에 인터넷으로 연육교로 가는 버스 편을 찾아 핸드폰에 입력해 두었다. 백야도행 27번 버스를 기다리는데 차가 오질 않아 택시를 탔다. 여수시 화양면 관광단지 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서 택시로 갈아탔더라면 교통비가 많이 절약되었을 뻔했다. 택시비가 8만 원이 나왔다. 현지에 가서 알았지만 백야도까지 가는 버스가 27번이 아니라 28번이었다. 정보를 잘 못 알고 와 교통비와 시간을 많이 낭비했다.
여수에서 나로도로 가는 연육교는 섬과 섬을 이어 고흥반도까지 이어졌다. 화양에서 조발도를 이은 첫 다리가 화양조발대교다. 다음에 둔병도를 잇는 다리가 둔병대교고 낭도로 이어지는 다리는 낭도대교다. 적금도로 잇는 다리는 적금대교요 고흥군 나로도로 이어지는 다리가 팔영대교다. 이렇게 다섯 개 섬을 다리로 이어 여수에서 나로도를 잇는 연육교를 만든 것이다. 이 연육교가 생기기 전에는 나로도에 가려면 배를 타거나 차로 가려면 고흥군으로 돌아가야 했다. 구경하며 나로도로 가는 연육교가 개통되어 관광객이 많을 줄 알았는데 한가롭다. 택시기사가 둔병도 출생이라며 지형을 너무 잘 알아 섬들의 비경을 해설까지 해 주었다. 낭도까지 갔는데 숙박할 곳이 없을 거라며 백야도에 가서 자라며 돌아오는 차비는 안 받겠다고 한다. 백야도 팬션 앞에 내려주며 상하도 하하도를 구경하고 가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백야도에 숙박업소는 많은데 숙박업소마다 휴업이다. 다음 날 배로 상하도 하하도 꽃섬 길을 가보려고 백야도에서 내렸는데 숙박할 곳이 없으니 눈물을 머금고 여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렸다가 여수행 버스를 탔다. 백야도 선착장으로 가더니 종점이라며 15분 후에 출발한다고 한다. 민박이라도 알아볼 겸 차에서 내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한 식당에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 몇이서 소주 한 잔 마시려고 고가를 굽다가 내가 숙박할 곳을 찾는 걸 보고 딱해 보였는지 팬션하는 사장한테 방 하나 드리라 한다. 요즘 코로나 때문에 영업을 안 하는데 방을 하나 내주겠다며 따라오란다. 우린 버스에서 짐을 챙겨 들고 그분이 경영하는 팬션에서 하룻밤을 잤다. 마음씨 좋은 사장님이 배려로 백야도에서 1박을 한 것이다.
한 달 전에 우린 동해로 여행을 다녀온 일이 있다. 묵호항 인근의 J모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왔다. 묵호 등대 아래쪽 논골담길에 있는 모텔이다. 광활한 동해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방이었다. 수평선상의 잔잔해 보이는 바다가 뭍 가까이 오더니 성난 파도로 변해 바위를 사정없이 내리치는데 하얀 우윳빛 물보라가 함성을 지르며 산산조각이 난다. 그 소리와 모습이 장관이고 가슴이 툭 트인다. 그런데 밤이 깊어갈수록 그 파도 소리가 굉음으로 변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날 숙소는 남해 다도해라 섬으로 에워싸인 호수 같은 바다를 볼 수 있는 방이다.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섬들이 수석처럼 보이고 해변으로 밀려온 파도는 모래와 속삭이다가 미끄러지듯 빠진다. 고요하고 정적인 남해와 동해를 비교한다면 동해는 남성적이고 남해는 여성적이다. 우리는 풍경화를 감상하듯 바다를 바라보며 하룻밤을 잘 쉬었다.
다음 날 새벽 6시에 일어나 산책하러 갔다. 상하도 하하도로 가는 배편도 알아보고 섬 구경도 할 겸 생태 탐방로를 따라 걸었다. 면사무소며 초등학교 분교가 있는 것으로 봐 꽤 큰 섬 같다. 이른 아침이라 거리에 사람이 없어 마냥 길 따라 걷다 보니 산등성의 관망 좋은 곳은 팬션이다. 백야대교 밑에서 주민 한 사람을 만났는데 반갑다. 길도 묻고 이런저런 이야길 하다 보니 어제 우리가 택시에서 내렸던 장소다. 팬션이 많은 걸 보면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경치 좋은 섬인 듯한데 코로나 여파로 하나 같이 문을 닫아 잠자는 어촌이 되었다. 시간으로 보아 고기잡이 나갔던 배들도 귀항할 시간대인데 어항도 조용하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친구는 아직 자고 있다. 8시 반 배로 하하도에 가려면 서둘러야 할 시간이다. 친구는 걸음걸이가 느려 먼저 나가지 않으면 배를 놓칠 판이다. 나는 샤워를 대충 하고 숙소를 나오다 주인을 만났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선착장으로 가는 데 왜 그리 먼 지 내가 길을 잘못 들었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혹 건망증이나 치매의 시초가 아닌가 싶어 은근히 걱정이 된다.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데 경적을 울리며 여객선 한 척이 떠난다. 매표소로 가 표를 사려 했더니 배가 방금 떠났다고 한다. 나는 8시 40분에 떠나는 배로 알았는데 시간표를 내가 잘 못 본 것이다. 떠난 배가 8시 30분에 하하도로 가는 배였던 것이다.
이번 여행은 하는 일마다 차질이 생긴다. 할 수 없어 버스 정류장으로 가서 여수행 버스를 탔다. 백야도에서 여천을 거쳐 여수로 가는 버스다. 가다가 여천 서시장에서 하차를 하자 했다. 동작이 굼뜬 친구가 내리기도 전에 버스가 출발하는 바람에 이산이 되었다. 떠난 버스를 바라보며 멍청히 서 있는데 빗방울이 듣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소낙비로 변해 억수로 내려 시장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친구를 만났다. 우산은 준비했지만 장대비를 막기엔 턱없이 작은 우산이다. 식당을 찾아 늦은 식사를 하고 다시 여수행 버스를 탔다. 중앙시장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 시장 구경을 하며 한 바퀴 돌았다. 새 단장을 해서 옛날에 보던 시장이 아니다. 갓김치랑 꼬들베기 김치가 여수 특산품인데 시장 외곽에 빙 돌아 김치가게다. 시장 내부 생선가게들도 다 개조해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꼬들베기 김치를 사 택배로 부치고 여수역으로 갔다. 여수역에서 2시에 출발하는 KTX를 타고 귀경했다.
이번 여행을 다녀와서 크게 반성했다. 준비 없이 떠나는 여행은 고생이요 낭비다. 여수는 여러 번 가봤기에 준비 없이 떠났다가 낭패한 것이다. 낭도까지 가는 교통편 검색도 그렇고 숙박도 미리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서 예약을 했어야 했다. 둘째로 우리가 늙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버스 승하차도 그렇고 기억력을 믿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나이에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축복이다. 주변에 치매 판정으로, 허리 무릎이 아파서 거동을 못 하는 친구가 한둘이 아닌데 여행을 다닐 수 있으니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났어야 했다.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떠난 여행이라 볼 것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시간과 경비만 낭비한 여행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