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ra Turandot 푸치니 - 투란도트 (Turandot) Giacomo Puccini (1858∼1924 )
작품해설 - 이덕희, "세기의 걸작 오페라를 찾아서"에서... 오페라 "투란도트"는 작곡가의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겨지긴 했지만 푸치니의 완성된 어떤 오페라도 능가하는 일대 걸작에 속한다. 이 오페라는 단순히 푸치니의 마지막 작품일 뿐만 아니라 그의 창작세계의 정점을 이루는 유작으로서, 작곡가에게 새로운 변신의 길을 열어준 획기적인 산물이었다. 그가 좀 더 오래살아 이 "새로운 길"을 따라 계속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했다면 오페라의 영역에서 과연 어떤 종류의 유산이 덧붙여졌을까? "투란도트"의 위대성을 감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같은 상상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것이다. 당시의 많은 기록은 푸치니가 "투란도트"를 가지고 자신의 예술세계를 확장시키려고 노심초사했음을 역력히 보여준다. 이 오페라에 착수했을 무렵, 그는 리브레티스트중의 하나인 주세페 아다미에게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여태까지의 모든 나의 음악이 내겐 한 갓 농담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네, "투란도트" 를 작곡했을 때 푸치니는 이미 60대였다. 너무나 유명한 "토스카"와 "라 보엠", "나비부인"을 포함해서 이미 그는 11곡의 오페라를 작곡한 뒤였다. 그러나 1917년과 18년에 각각 초연을 가진 "제비 (La rondine)"와 "일 트리티코 (Il trittico)"는 그의 초기 오페라들이 누린 엄청난 성공엔 훨씬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젊은 작곡가와 비평가들로부터는 공격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의 오페라의 최고의 해석자였던 토스카니니와도 불화상태에 있었다. 또한 그는 꾸준히 지속되는 이상한 목의 통증을 포함해서 악화된 건강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다. 따라서 원래 그의 성격의 일부였던 염세주의와 의기소침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늙었으며 불안정한 상태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것이 60대를 맞이한 푸치니의 정확한 상태였다. 이제 예술가로서의 그의 삶은 중대한 전환점에 다다른 것이었다. 이같은 사면초가 한가운데서 그는 자신이 뚫고 나갈 "새로운 길"을 모색하면서 끊임없이 이 새로운 길에 합당한 새 리브레토를 찾아내기 위해 고심했다. 이전에 그의 성공한 오페라들에서 한 팀이 되었던 자코사, 일리카와의 제휴가 "성스런 삼위일체"란 소리까지 들었던 만큼 이번에도 그는 주세페 아다미와 레나토 시모니를 공동 리브레티스트로 끌어 들였다. 극작가인 아다미는 이미 푸치니의 "제비" 와 "일 트리티코"의 대본을 맡았었고, 역시 극작가인 시모니는 저명한 비평가이기도 했다.
푸치니는 특히 1917년에 발표된 부조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처럼 많은 작곡가의 영감을 자극한 고치의 희곡이 푸치니의 흥미를 끌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이 우화에서 고치는 모든 것을 정복하는 진실된 사랑의 힘을 보여주고 나아가 용기와 충성, 자기희생 및 고통에 굴하지 않는 꿋꿋한 힘 따위를 찬양하는 보편적 주제를 설정했는데, 바로 이 점이 푸치니의 마음에 강하게 호소했던 것이다. 그에게 "투란도테"는 "고치의 모든 희곡 가운데 가장 정상적이고 인간적인 것" 으로 생각되었다.또한 그의 지금까지의 모든 오페라와 같은 현실적인 차원의 감상적인 멜로드라마 대신 무언가 환상적인 것, 무언가 동화속의 인물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정서와 감동에 가득찬 주인공을 동경하고 있던 당시의 푸치니에겐 "투란도테"의 주제야말로 자신이 "새로운 길"로 진입할 수 있는 도약대가 되리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이미 다른 작곡가들이 손을 댔다는 사실은 그에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아니 반대로 "마농"이나 "라 보엠"의 경우에도 그랬듯이, 다른 음악가들이 이미 작곡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그를 움츠러들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더욱 부추겼다고 할 수 있다.
"우선 전 5막의 희곡을 단축해서 단순화시킬 것. 극의 내용을 다듬고 더욱 효과적으로 만들 것. 무엇보다 투란도트의 사랑의 열정 (그녀가 자신의 위대한 자존심의 잿더미 아래 그렇게도 오랫동안 질식시켜온 열정)을 강조할 것. 요컨대 현대적 마음을 지닌 투란도트를 창조할것" 고치의 5막 희곡을 3막으로 단축한 오페라의 내용은 단순히 오리지널의 압축이나 단순화에 그치지 않고, 순전히 푸치니 자신의 창조인물인 "류"를 삽입하는 등, 주인공의 성격이나 장면 묘사가 완전히 푸치니식으로 변화된 현대적 "투란도트"가 되었다. "투란도트"의 작업에서 푸치니는 자신이 보다 고원한 경지로 진입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즉 독창적이면서도 유니크한 작품을 창조하고 있다는 것을. 그러나 여태까지의 어떤 오페라도 푸치니에게 이와 같이 고심에 찬 노역의 대가를 치르게 하지는 않았다 (특히 제3막의 위대한 "사랑의 듀엣" 은 그의 진을 빠지게 했을 정도였다).
"나는 피아노의 건반을 만져보지만 내 두 손은 먼지로 더럽혀지지 않겠나! 나의 작업 책상은 편지의 바다일세, 음악은 흔적도 없네! 음악? 부질없는 일이야. 나는 나의 꼭두각시 수행자들이 무대 위에서 움직일 때만 작곡할 수 있는 중대한 약점을 가졌다네. 만약에 내가 순수한 교향곡 작곡가일 수 있다면 그때는 시간과 또 나의 관객들을 교묘하게 속이겠지만, 그러나 나는 그렇지않거든! 나는 오래전에, 너무나 오래전에, 거의 1세기도 전에 태어났네... 그리고 "전능하신 분"께선 그의 작은 손가락으로 나를 만지시며 말씀하셨지 "극장을 위해 작곡하라. 오직 극장을 위해서라는 걸 명심하도록!" 그래서 나는 이 절대자의 명령에 복종했던 걸세. 만약에 그가 날 다른 어떤 전문가로 만들 의도였다면... 글쎄 나는 필경 가장 필수적인 요소가 빠진 자신을 발견하치 않을 수 없을걸세. 아~ 그대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군... 그대는 자신의 발 아래 땅이 시시각각으로 기울어지고 있음을 느끼는 한 남자를 생각해야만 하네. 그리하여 절벽이 마치 그를 삼켜 버릴 것처럼 느끼는 한 남자를 말일세!" 작곡가에게뿐 아니라 리브레티스트들에게도 이 오페라는 대단한 노역을 치르게 했다. 대본이 다 완성되기전에 당연히 작곡을 시작하고 있던 푸치니는 끊임없이 대본가들에게 편지를 보내며 수 없이 내용의 변경을 지시하곤 했기 때문이다. 더욱이나 오페라에 착수한 지 1년이 넘은 1921년 9월에 푸치니는 갑자기 2막과 3막을 합쳐 오페라를 2막으로 단축해야겠다는 결심을 알려 대본가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그러나 한 달 뒤엔 다시 원래대로 3막으로 돌아왔다가 그해 겨울 마침내 오늘날의 형식으로 확정되었는데, 즉 1막을 1, 2막으로 분리하고 2막과 3막을 통합해서 3막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푸치니가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제3막의 피날레 부분인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사랑의 2중창"이었다. 이에 관련해서 그가 아다미에게 보낸 편지(1921년 10월 24일자)는 특기할 만한 것이다. "나는 우리가 위대한 파토스를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네. 그리고 그걸 달성하려면 칼라프가 투란도트에게 "키스"를 해서 차가운 여인에게 그의 위대한 사랑을 보여줘야만 한다고 보네 그녀에게 오랫동안 지속되는 긴 입맞춤을 한 뒤 그는 이렇게 말해야만 하네. "이제 난 아무래도 상관없소. 나 역시 죽을 것이오." 그리고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거지~ 그녀의 입술 위에서" 드라마의 극적 전환점이 되는 이 자기 폭로는 고치의 희곡에는 없는, 순전히 푸치니 자신의 영감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하나 고치와 다른 새로움은 공주가 칼라프의 이름을 알고나서도 그걸 밝히지 않는 점이다. "요컨대 이 듀엣에 의해 스토리는 고원한 단계로 올라서리라고 나는 믿네. 이런 식으로 우리는 현재 우리가 갖지 못한 감동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네..." 이것이 푸치니의 신념이었다.그러나 모든 것을 정복하는 진실한 사랑의 우주적 메시지를 선언하는 마지막 듀엣의 완성은 자꾸만 지연되었다. 푸치니가 오페라의 새로운 영역을 확장하려던 "투란도트"에서 이 듀엣은 클라이맥스가 될 것이었던 만큼 그에겐 일종의 시련이기도 했다. 이 듀엣을 위해 그는 유난히 많은 메모와 낙서들을 남겼는데, 그 중에는 단호하게 "독특하고 매력적이며 유별난 멜로디를 찾아낼 것"이라든가 "다음엔 트리스탄"이라는 것도 있다. 또한 리브레티스트들에게도 그는 누누이 이 듀엣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위대한 듀엣이 돼야만 해요. 세계의 바깥에서 있는 이 두 존재는 사랑을 통해 비로소 인간 존재로 변모하는데, 이 사랑은 무대 위의 모든 것을 점령해야만 해요." 푸치니는 "투란도트"의 작업 도중에 토레 델 라고에서 비아레기오로 거처를 옮겼는데 (1921년 12월), 이곳에서 그는 오페라의 제1막을 완성했지만, 건강 때문에 거의 7개월 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사실 1922년말쯤엔 출판업자에게 선불로 받은 돈을 반환할 생각까지 했다. 그러나 1923년 한 해 동안 줄곧 그는 3막에 주력해서 이 해 말경엔 사실상 "사랑의 듀엣"과 피날레만 제외하고 오페라의 전곡을 거의 다 (오케스트레이션까지) 완성했다. 그러나 푸치니 자신이 가장 고심하고 공을 들인 "사랑의 듀엣"이 끝내 완성을 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사실상 푸치니 생애의 마지막 몇 달 동안의 주된 관심은 이 듀엣의 가사와 음악에 집중돼 있었다. 1923년말쯤 그는 목의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는데, 이듬해 가을에 세 명의 전문의들이 후두암이란 진단을 내렸지만 그가 이 듀엣을 완성하지 못한 진짜 이유는 병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는 듀엣의 가사를 위해 대본가들에게 계속 편지를 퍼부어 댔으며 마침내 그가 만족할 때까지 가사는 적어도 네 번을 다시 써야 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음악은 후두암 증세가 뚜렷해지기 전, 적어도 2년 전에 이미 착상이 되었던 것이다. 푸치니의 권위자 모스코 카너를 포함한 많은 푸치니 학자들과 전기작가들은 "사랑의 듀엣"이 미완성으로 남은 이유를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즉 푸치니의 깊은 내면에는, 진실한 사랑의 적극적이고도 삶을 강화시키는 측면과 자신을 전적으로 동일시하기엔 거의 극복할 수 없는 어떤 장애요소가 있었다는 것이다. 푸치니는 본질적으로 비극의 작곡가였다. 그의 12편의 오페라 가운데 진정한 코미디는 오직 한 편뿐이며,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 역시 하나뿐이다. 그의 무의식적 환상은 자신의 상상력을 눈부시게 타오르도록 하기 위해 죽음의 장면에서 절정에 이르는 순수한 비극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투란도트"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것이다. 순전히 작곡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전형적인 푸치니식 여주인공 류의 비극적인 죽음에서 푸치니가 손을 놓았다는 사실은 그래서 퍽이나 상징적이다. 푸치니의 의도는 "사랑의 듀엣"을 자신의 이전의 어떤 오페라와도 전적으로 다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나비부인" 제1막의 결말이나 "라 보엠"의 1막에서 보여준 한 쌍의 아리아 같은 이전의 "사랑의 2중창"과는 정서적관점에서나 드라마 기법상으로나 전적으로 다르게 만들 생각이었고 또 그래야만 했다. 푸치니의 다른 오페라들에선 사랑은 "기정사실"이고 출발점이다. 즉, 사랑이 먼저오고 다음에 드라마가 전개되는 것이다. 그러나 "투란도트"에선 "사랑의 듀엣"이 드라마의 절정이며 카타르시스가 되어야 했다. 따라서 푸치니로선 완전히 자신의 정서적 영역 바깥에 있고 자신의 인격과는 조화되지 않는 이같은 듀엣을 작곡한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 이라는게 대부분의 푸치니 연구가들의 의견이다. 동감이다. 결국 듀엣을 완성하지 못한 채 푸치니는 1924년 11월, 아들을 동반하고 암 치료를 위해 브뤼셀로 떠났는데, 이 때 그가 친구 리카르도 슈나블에게 보낸 편지는 "투란도트"에 대한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나는 라듐 치료를 받기 위해 브뤼셀로 떠나네... 사태는 심각하다네. 자낸 내가 어떤 느낌인지를 상상할 수 있겠나? 그리고 "투란도트"는? 흠! 이 오페라를 끝내지 못한 것이 나를 슬프게 하는군. 나는 회복될까? 알맞는 때에 오페라를 완성할 수 있을까?" 그동안 푸치니는 토스카니니와 화해한 상태에 있었는데, "투란도트"의 세계 초연을 토스카니니에게 맡기고 싶어하는 작곡가의 소망에 따라 1924년 초가을에 이미 토스카니니는 비아레기오로 푸치니를 방문해서 "투란도트"의 음악을 들었으며, 이듬해 봄 라 스칼라에서 초연을 가질 계획까지 세운터였다. 브뤼셀로 떠나면서 푸치니는 밀라노 역으로 전송나온 토스카니니에게 "자신의 사랑하는 공주"를 잘 돌봐달라고 거듭 간청했다. 푸치니의 짐 속에는 "투란도트"의 리브레토와 문제의 듀엣을 위한 음악 스케치가 담긴 서류들이 들어 있었다. 이제 토스카니니는 이 미완성의 스코어를 지휘해서 푸치니의 마지막 작품에 왕관을 씌워줘야 할 막중한 임무를 지게 되었다. 그는 이 오페라의 장수를 위해 개막공연을 최고로 빼어난 것으로 만들어야 했을 뿐 아니라, 작곡가가 남겨둔 스케치 (푸치니는 마지막 두 장면을 위한 스케치를 모두 23페이지 (단편적이고 미완성) 정도 남겼다) 를 바탕으로 오페라를 마무리 지을 작곡가도 선택해야 했다. 처음에 토스카니니는 티토 리코르디 (유명한 음악출판업자로 푸치니를 베르디의 후계자로 선택했다)가 푸치니의 후계자로 선택한 리카르도 잔도나이를 생각했지만, 그 자신 너무나 성공적인 작곡가로서 이같은 과업을 거절할 것 같아 결국 모든 이탈리아 작곡가 중에서 푸치니의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프랑코 알파노에게 이 일을 맡겼다. 1926년 4월 25일(일요일)밤 라 스칼라에서 오페라는 드디어 막을 올렸는데, 토스카니니는 푸치니의 오케스트라가 멈춘 제3막 "류의 죽음"다음에 지휘봉을 내렸다. 그리고 관중에게 돌아서서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오페라는 끝납니다. 작곡가의 죽음으로 인해 미완성으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관객들은 말없이 일어서서 극장을 나갔다. 공연은 엄청난 성공이었다. 공연 도중 관객들은 깊은 감동 속에서 갈채를 보냈으며 "비바, 토스카니니!" 의 함성이 극장을 가득 채웠다. 또한 신문들도 대부분 열광적인 찬사를 보냈지만 푸치니 예술의 새로운 국면을 보여준 이 오페라가 대중들을 당혹케 한 것은 명백했다. 심지어 비평가들마저 이 새로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안달했을 정도였다. 사실 "투란도트"는 푸치니의 모든 작품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가장 복잡하며 그래서 가장 풍요한 소리의 향연이랄 수 있다. 이 오페라에서 달성한 하모니는 그가 이전에 쓴 어떤 작품보다도 진취적인 것이었다. 오케스트라는 징들과 그외 다른 진귀한 타악기를 포함해서 극대화시켰으며, 피트(pit)에뿐 아니라 무대 뒤에도 관악 밴드와 두 개의 알토 색소폰과 타악기 및 오르간을 배치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푸치니 자신 "투란도트"로써 예술가로서의 일대 변신을 시도했던 만큼 이 오페라 속에는 바그너, 스트라빈스키, 하물며 쇤베르크의 영향마저 뚜렷한 마크를 남기고 있다는게 정평이다. 푸치니의 전 작품세계에서 이 마지막 오페라가 유니크한 위치를 차지하는 진정한 이유, 그의 최고 걸작으로 인정되는 참다운 이유에 대한 모스코 카너의 견해는 "투란도트"의 예술적 평가에 대한 가장 명쾌한 결론이 되지 않을까 싶다.
투란도트 (S) - 베일에 싸인 고대중국의 공주
제 1 막 오페라의 무대는 전설적인 고대 중국의 수도 북경이다. 늙고 허약해진 알툼황제는 죽기 전에 자신의 딸 투란도트 공주가 결혼해서 남편과 더불어 나라를 통치할 준비를 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얼음같이 차가운 마음의 투란도트는 무서운 맹세를 한 몸이다. 즉 아득히 먼 옛날 그녀의 선조인 로우링 공주가 외국의 정복자에 의해 능욕당하고 살해되었는데, 이 끔찍한 사건을 회상하면서 투란도트는 어떤 남자도 자신을 소유하지 못할 것이라고 맹세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많은 왕자들이 그녀에게 구혼하러 왔지만, 하나같이 목숨을 잃었다. 왜냐하면 공주는 자신이 낸 세 가지 수수께끼를 푸는 남자만이 자기와 결혼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땐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선언했는데, 어떤 구혼자도 그녀의 수수께끼를 풀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페라는 왕궁 앞에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관리가 이같은 내용의 포고문을 낭독하는 데서 시작된다. 가장 최근의 구혼자인 페르시아의 왕자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곧 처형당할 운명이다. 피에 굶주린 군중들이 사형집행인을 소리쳐 부르는 소동속에서 군중을 제지하려는 왕궁의 수비병들에 떠밀려 한 눈먼 노인이 쓰러진다. 그는 최근 왕자를 잃고 망명중인 타타르의 티무르 왕이다. 그를 동반하고 있던 젊은 노예처녀 류는 소리쳐 도움을 청한다. 이 순간 잘생긴 청년 하나가 티무르 왕을 향해 달려오는데, 그는 전쟁과 망명의 변전하는소용돌이 속에서 서로 생사를 모르고 있던 티무르의 아들 칼라프 왕자이다. 부자가 상봉의 기쁨을 나눌 때 티무르는 아들에게 류의 헌신적인 충성에 대한 얘기를 한다. 실은 그녀는 오래전부터 단지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준 왕자에 대한 희망없는 사랑을 은밀히 간직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달이 떠오르고, 공포에 찬 침묵 속의 군중을 뚫고 페르시아의 왕자가 처형장에 나타난다. 군중들은 자비를 외치고 칼라프는 투란도트를 저주한다. 그러나 투란도트가 궁궐의 테라스에 모습을 나타내는 걸 본 순간 그는 공주에게 마음을 사로잡혀 버린다. 그는 맹세코 그녀를 정복하겠다면서 자신의 운을 시험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때 류의 간곡한 만류는 아리아 "나의 말을 들어주세요 (Signore ascolta)" 에 잘 드러나 있다. 주옥같은 아리아로서 듣는이로 하여금 눈물짓게 만드는 명 아리아이다. 하지만 칼라프는 아리아 "울지마오, 류 (Non piangere Liu)" 로 화답하고 아버지 티무르를 부탁한다는 말을 남긴 채 투란도트를 향한 마음을 굳힌다. 티무르와 왕궁의 세장관 핑, 팡, 퐁도 그를 붙잡지만 그의 결심은 요지 부동이다. 이제 그의 앞에는 오직 투란도트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는 대궐 앞에 있는 징으로 달려가 투란도트의 이름을 세 번 소리 쳐 부르며 징을 세 번 친다. 운명은 결정되었다. 제 2 막 핑, 팡, 퐁 세 장관이 투란도트의 무자비한 고집에 의해 야기된 일련의 무시무시하고 변함없는 사형집행에 지친 중국의 운명을 탄식하며 저마다 한결같이 전원의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 평화롭게 살고 싶다는 갈망을 털어놓는다. 중앙에 거대한 대리석 계단이 있는 넓은 궁전의 뜰에 여덟 명의 현자가 들어오는데, 그들은 모두 투란도트의 수수께끼 해답을 담고 있는 봉인된 두루마리들을 들고있다. 알툼 황제는 높은 옥좌에 앉아 칼라프 왕자에게 투란도트의 무서운 맹세가 결국 그의 죽음을 초래할 것이라면서 거듭 청혼을 포기하고 떠날 것을 종용한다. 그러나 칼라프의 마음은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드디어 투란도트가 나타나 자신의 맹세를 설명하면서 자신은 바로 로우링 공주의 환생이라 말하며 아리아 "옛날 이 궁전에서 (In questa Reggia)" 를 노래한다. 공주 역시 황제처럼 그에게 승산이 없을테니 포기하라고 권한다. "이방인이여, 수수께기는 세 개, 그러나 죽음은 하나! (Gli enigmi sono tre, la morte una!)"라고 말하는 투란도트 공주, "수수께기는 세 개, 삶은 하나! (Gli enigmi sono tre, una e la vita!)"라고 외치는 칼라프 왕자의 주고받는 노래속에 나팔이 울리면서 드디어 수수께기가 시작된다. "낯선이여 들으라! (Straniero, ascolta!)" 첫번째 수수께기 결국 그는 세 개의 수수께끼를 모두 풀게되고 승리한다. 환호하는 군중들, 이를 믿기지 않는듯 부정하는 투란도트, 사랑의 승리를 노래하는 칼라프 왕자, "맹세는 신성한 것"이라 말하며 결과에 승복하기를 권하는 황제. 이들의 각기 다른 심리상태는 "영광, 영광, 승리자에게 영광! (Gloria, gloria, o vincitore!)" 에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래도 그녀의 마음은 한치의 변화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마음을 정복하지 못한다면 그의 승리는 공허한 것일 뿐이기에, 이번엔 칼라프 왕자가 공주에게 기회를 준다. 즉, 공주는 자기 이름을 모를 것이니 내일 동이 틀 때까지 이름을 알아낸다면 자신은 기꺼이 죽겠노라고... 제 3 막 왕궁의 뜰이다. 칼라프 왕자의 이름을 알기 전에는 아무도 잠잘 수 없다는 공주의 명령을 되풀이하는 포고령이 거듭 들린다. 왕자 역시 홀로 잠 못 자는 공주를 상상하며 아침이 되면 공주는 자기 것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 (Nessun dorma)" 를 노래한다. 이 때 핑, 팡, 퐁이 나타나 아름다운 여인들과 금, 은, 보화 등 온갖 상상할 수도 없는 뇌물들을 제시하며 제발 그에게 떠나달라고 애원한다. 그러나 그가 거절하자 그들은 무섭게 화를 내고 군중들은 그를 협박한다. 바로 그 때 티무르와 류가 병사들에게 끌려오는데, 사람들은 이들이 왕자의 이름을 알고 있으리라 믿고 있다. 그들은 투란도트를 불러왔다. 투란도트가 티무르를 추궁하자 류는 자기만이 그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러나 아무도 자기 입을 열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공주는 그녀를 고문하지만 그녀의 완강한 저항은 공주에게마저 깊은 인상을 준다. 왕자를 배반하지 않으려는 그 같은 용기가 어디서 나오느냐는 공주의 물음에 류는 "그것은 사랑(Tu che di gel sei cinta)" 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는 병사의 단검을 낚아채 자신을 찔러 자살한다. "그의 이름은... "사랑" 이라고..." 두 연인은 서로 힘차게 포옹하고 군중들의 축복의 합창이 들리는 가운데 대 단원의 막이 내린다. 공주의 선언과 백성들의 환희의 합창 "만수무강하소서 황제폐하! (Diecimila anni al nostro Imperatore!)" 는 투란도트의 대미를 너무나 웅장하고 깨끗하게 장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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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빈 메타 (Zubin Mehta) 지휘 필자는 앞선 작품해설을 통해, 1970년대 이전까지의 거의 모든 "투란도트" 녹음들이 이 작품의 폴리포니적 구성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말미암아 관현악과 성악간의 밸런스 조절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했거니와, 실제로 많은 수의 "투란도트" 녹음들은 오케스트라를 단지 성악의 보조적인 역할에만 국한시킴으로써 작품해석의 핵심에 놓여져야 할 감성적인 오케스트레이션의 입체감 넘치는 음향효과를 제대로 부각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이런 경향은 이탈리아계 지휘자들, 그 중에서도 오페라만을 주레퍼토리로 삼는 오페라 전문 지휘자들의 녹음에서 두드러지는데, 분명 이탈리아는 오페라의 종주국이자 오랫동안 오페라 공연의 큰 흐름을 이끌어 온 오페라 강국이지만, 성악을 중시하는 이탈리아적 전통만이 최선이며 모든 이탈리아 오페라가 성악에 촛점을 맞춘 해석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식의 주장은 별 설득력이 없을 뿐더러, 실제로 성악만을 중시하는 해석 스타일은 단지 이탈리아 지방 특유의 개성 내지 악습일 뿐이지 결코 그것 자체가 오페라 해석의 규범이나 규준이 될 수는 없다. 게다가 푸치니의 경우, 동년배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무조적 경향까지는 수용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바그너의 오케스트레이션을 깊이있게 연구했고, 그의 라이트 모티브 기법을 제한적으로나마 수용하다보니, 그 자신이 의도하건 하지 않았건 저절로 성악과 오케스트라가 그 나름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내는 폴리포니적 구성의 상당부분을 작품 속에서 찾아볼 수 있고, 푸치니가 "투란도트"를 작곡할 당시의 오페라 개념 또한 과거 로시니 시대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현대적인 것이었으니, 요컨대 "투란도트"를 벨칸토 오페라마냥 성악 위주의 오페라로만 해석하는 것은 모차르트나 말러나 다같은 오스트리아 작곡가이니 별 다를 게 없다는 식의 생각만큼이나 위험스런 태도이다. 주빈 메타와 런던 필하모니가 1972년에 녹음한 "투란도트"는 이미 몇 번이나 강조한대로 관현악의 중요성을 성악과 비슷한 반열에 올려놓은 최초의 해석이다. 그러니까 단지 반주역할에 그쳤던 이전 녹음들과는 달리, 오케스트라가 비교적 자기 목소리를 뚜렷하게 내고 있으며 푸치니가 악보에서 지시해놓은 다양한 음향효과들이 지휘자의 손에 의해 장면마다 효과적으로 연출되고 있다. 메타의 지휘는 콤팩트한 프레이징과 보편타당한 범위 내의 빠른 템포에 기초하고 있으며, 특히 글로켄슈필 등 타악기군의 소리를 적극적으로 살려 중국적인 분위기를 강조한 것이 인상적이다. 1막 첫머리에 중국관리가 포고문을 읽는 장면부터 잘 나타나지만, 메타의 템포설정은 가수들의 집중력과 긴장을 적절하게 유지시키면서, 독창이 빠지는 매장면의 연결부에선 빠르고 느리게 변화를 자주 주고 있기 때문에 안정감이 넘치면서도 결코 단조롭게 들리지는 않는다.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찬란한 칼라프의 동기와 함께, "padre, mio padre"를 외치며 등장하는 주인공 칼라프 왕자역의 루치아노 파바로티는 당시 37세 절정의 나이로, 정확한 음정과 여유있는 호흡, 균질감 넘치는 발성으로 비교대상 중에서도 가장 깔끔한 자태를 자랑하는 왕자이다. 특히 음악적인 면 그러니까 소리 그 자체를 놓고 볼때, 도저히 흠 잡을 데 없을만큼 완벽한데다가 예의 초인적인 고음 도약력과 지속력 또한 이곳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어서, 저 유명한 소프라노와 테너의 하이 C 대결 장면인 2막 2장의 "Gli enigmi sono tre"는 전설적인 닐슨 - 코렐리 커플 못지않게 이 음반쪽도 스릴감이 넘치며, 그 이유는 역시 하이피치로 울리는 파바로티의 기적적인 흉성 고음 때문이다. 또한 파바로티로 인해 세계적인 히트곡이 되어버린 3막 아리아 "Nessun Dorma"는 마지막 B음의 마무리도 기막히지만, "Dilequa, o notte! tramontate stelle!"의 연속되는 A음을 아주 가볍게 처리하는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다. 그러니까 파바로티는 고음이 특별하게 많은 "투란도트"에 있어서 자신의 장기를 십분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음반에 선뜻 별 다섯의 만점을 주지 못하고 네 개 반의 평점을 부여한 이유도 결국은 파바로티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칼라프 왕자에게 요구되는 유창한 발성과 어떤 영혼의 울림을 표현하기에는 그의 표현력과 스케일에 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파바로티는 서정적인 테너로 분류되지만, 질리나 스키파 혹은 디 스테파노처럼 정교하고 델리킷한 감정표현력을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래서 흔히 파바로티를 가리켜 알맹이 없는 소리의 소유자라고도 부르며, 파바로티의 목소리는 전곡음반으로 듣기보다는 아리아집으로 즐기는 것이 훨씬 낫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편 파바로티의 이런 표현력 부재가 리릭, 드라마틱 가릴 것 없이 그의 모든 레퍼토리에 해당되는 공통적인 문제점이라면, 질리나 디 스테파노와는 달리 좀처럼 드라마틱한 배역을 '드라마틱하게' 해석해내지 못하는 파바로티의 약점은 그의 발성법이 갖고 있는 기술적인 특징에도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 파바로티는 성악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부터 소리의 완전한 울림에 대한 병적인 집착을 갖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좀처럼 목을 열려고 하지 않았고 그저 소리를 공명점에서 정확하게 울리는데만 관심을 뒀다. 따라서 그의 발성법은 피치가 떨어지거나 고음이 플랫되는 불상사가 일어날 확률이 매우 적은 대신, 드라마틱한 표현은 아예 불가능에 가까우며, 특히 중음역의 소리가 자주 납작하게 형성되기 때문에, 가령 파바로티보다 목소리가 크지도 않고 폭도 결코 넓지 않은 질리가 "아이다"나 "일 트로바토레" 등 무거운 배역을 척척 잘 불러내는 반면, 파바로티는 그저 깔끔하고 날카롭게 울리는 고음만이 있을 뿐, 감정의 진폭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해석이 상당수였고, 나이가 들어 목소리가 제법 무거워진 요즘도 그의 "오텔로" 따위가 별다른 매력이 없는 것은 표현력 부재와 아울러 그의 발성법이 지닌 이런 특징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어쨋든 이 음반의 파바로티의 연주 중에서도 가장 아쉬운 부분은 3막 마지막 2중창인데, 무거운 목소리와 격정적인 가창, 동시에 영혼의 고양된 희열을 요구하는 3막 2중창은, 파바로티 스스로도 인정했거니와, 그 당시의 파바로티에겐 너무나 버거운 과제여서, 푸치니의 죽음으로 미완의 메세지로 남겨진 이 오페라의 운명과도 같이 파바로티의 연주 또한 마지막에서 힘을 잃고 허무하게 미완결로 끝을 맺은 듯해, 그의 탁월함을 높게 여기는 필자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참고로 파바로티는 197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투란도트"를 처음 무대에서 불러 실전경험을 쌓기도 했지만, 그 스스로가 생각해도 자신의 장점과 이 오페라가 요구하는 목소리 사이의 접점을 찾기가 힘들었던지 그 이후로는 오랫동안 "투란도트"의 주역자리를 정중히 거절해왔으며, 최근에야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을 중심으로 칼라프 왕자역에 대한 도전을 시도하고 있는 중이다. 투란도트역의 조안 셔덜랜드는 결론적으로 대단히 성공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드라마틱 콜로라투라로 분류되는 셔덜랜드의 목소리는 "루치아"나 "노르마" 등의 벨칸토 오페라가 본령이지만, 그녀 특유의 거대하고 폭발적인 성량을 앞세워 부르는 "투란도트"는, 직선적인 분출력이 조금 부족하다는 것을 빼놓고는, 감정표현의 밀도나 스케일감에 있어서 여느 명 투란도트 못지않은 좋은 연주일 뿐만 아니라, 인물해석에 있어서도 시종 지나치게 차가운 면모를 보이기 보다, 망설이고 고민하는 공주의 인간적인 면모를 자연스레 드러내는 점이 특징이자 장점이다. 그러나 그녀의 연주를 들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느끼는 숙명적인 아쉬움이랄까. 그것은 바로 심각한 수준에 와있는 그녀의 어설픈 딕션이다. 셔덜랜드는 거의 모든 평순모음을 원순음화 시키는데 - 예를들어 '이' 모음을 '위'로, '에' 모음을 '외'로 발음하는 것 따위 - 그 때문에 도대체가 가사를 알아듣기 힘들다. 특히 피날레에서 칼라프 왕자의 이름을 '아모르 (사랑)'라고 외치지만 듣기에는 전혀 '아모르'로 들리지 않아 맥이 빠지기도 한다. 그녀가 이처럼 발음에 약점을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지나치게 아래로 발달한 턱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어쨋든 매번 이점을 아쉬워하면서도 필자가 그녀의 음반을 놓지 못하는 걸보면, 그런 발음상의 약점을 감춰줄만한 충분히 아름다운 목소리를 셔덜랜드가 들려주기 때문이리라. 몽세라 카바예는 알랑 롱바르 지휘의 EMI 음반과, 앞서 이야기한 1977년 샌프란시스코 공연 등에서 투란도트 공주를 노래했지만, 여자노예 류 역도 잘 어울리는 편이다. 이탈리아계 소프라노들이 자기주장이 확실한, 호소력이 강한 류를 들려줬다면, 카바예의 류는 수묵화톤의 회화적인 이미지로 가득찬 신비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인데, 특히 대단히 기교적인 가창을 전개하면서도 특별히 작위적이란 느낌을 던져주지 않는 것이 그녀의 독특한 매력이다. 카바예의 절창은 이미 1막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아리아 "Signore ascolta"의 마지막 B flat 음을 다른 여느 소프라노들은 감히 시도도 못해볼 ppp의 극단적인 약음 필라토 기법으로 처리하고 있어, 놀라움과 함께 충격적인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다만 그녀의 류는 전형적인 푸치니적 히로인을 그려내는 다른 소프라노들과는 달리 거의 여신에 가까운 카리스마를 띠고 있기 때문에, 3막 두 개의 아리아 장면에선 마치 투란도트역의 셔덜랜드와 한판 대결을 펼치는듯해, 나름대로 흥미는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크게 공감이 가지 않는다. 이 음반에서 발견하는 또 하나의, 그리고 어찌보면 가장 두드러지는 탁월함의 하나는 핑, 팡, 퐁 세 명의 관리들이 노래하는 우스꽝스런 앙상블의 묘미가 그 어느 음반보다도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것은 메타의 다이나믹한 지휘가 앙상블의 긴장감과 쾌감을 최대치로 끌어올려주기 때문인데, 특히 퐁 - 핑과 퐁 모두 테너역이지만, 퐁이 좀 더 중요한 배역이다 - 을 노래한 20세기 최고의 조역 전문테너 피에로 드 팔마는 피에르 프란체스코 폴리라는 최고의 팡을 파트너로 만나 통통튀는 글로켄슈필의 소리마냥 탄력넘치고 리드미컬한 모습을 선보이고 있으며, 이상적인 핑 보다는 약간 무거운 목소리를 가진 톰 크라우제는 3막 투란도트 공주가 등장하는 장면의 독창에서 신비감이 좀 덜한 편이지만, 두 명의 테너 팡과 퐁을 리드해나가는 1막과 2막 1장에서 보여준 노련하고 확신에 찬 해석으로 이를 상쇄시키고 있다. 티무르역의 니콜라이 갸로프는 카라얀 음반의 루제로 라이몬디와 함께, 비교대상 중에서 가장 표정이 풍부하고 개성적인 스타일의 티무르이다. 류의 죽음장면 뒤에 나오는 장엄한 독백에서 정확하게 구사되는 고음 E 플랫이 인상적이며, 전체적으로 라이몬디보다는 좀더 적극적이고 남성적이며 더욱 권위적인 티무르를 노래한다. 재미있는 것은 중국황제 알투움역을 왕년의 명테너 피터 피어스가 맡았다는 것인데, 데카는 피어스를 일종의 카메오 개념으로 모셔온 것이며, 실제로 "투란도트"의 오리지널 초판 Lp표지에는 피어스가 알투움으로 특별출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큼지막하게 써놓기도 했다. 메타의 음반은 출반당시에는 분명 획기적이었을 정도로 오케스트라에 대한 뚜렷한 역할부여가 돋보이며, 성악과 관현악의 균형잡힌 조화라는 묵은 난제를 명쾌하게 해결해낸 모범답안으로써 그 가치와 중요성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한가지 아쉬운 점은 말년의 푸치니가 그토록 집요하게 추구했던 '우주적 사랑의 메세지'를 확인하기에는 다이나믹함에 경도된 메타의 사운드가 지나치게 '현세적'으로만 들린다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사랑의 2중창을 풀어나가는 파바로티의 해석이 칼라프의 고원한 열망감을 모자람없이 표현해내지 못한 점도 못내 아쉽다. 그러나 적어도 악보에 담긴 작곡가의 객관적 의도를 이보다 충실히 재현해낸 연주는 지금까지 없었다는 점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임과 동시에 "투란도트"의 결정적인 명반임을 부인할 수 없다. 추천음반 자료제공: 황지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