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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식, 그의 이름은 고구려사 어디에도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진주 강씨(晉州姜氏)의 족보에 의하면, 그들이 시조가 되시는 분이다. 또 신채호(申采浩)가 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 비교적 상세하게 쓰여 있는데, 《서곽잡록(西郭雜錄)》과 《대동운해(大東韻海)》에 실린 내용들을 신채호가 인용한 것이다. |
고구려의 유명한 장군 양만춘의 경우도 고구려사에 이름이 전해지지 않지만, 안시성에서 벌어졌던 전투상황은 고구려사에 전해지고 있어 후대의 고증을 통해 밝혀진 그의 이름을 틀림없는 사실로 간주되고 있다.
반면 강이식 장군의 경우 신채호의 고증을 토대로 본다면, 그는 수나라와 고구려의 전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무렵 요동성을 지켜낸 성주임이 분명하다. 물론 신채호의 경우 민족주의 사학을 표방하면서, 역사속의 인물에 대해 그 영웅성을 강조한면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강이식 장군은 진주 강씨의 시조로 모시는 분이기 때문에, 실존했던 역사속의 인물임이 분명하다. 물론 강이식 장군의 업적을 정확하게 고증하는데엔 한계가 있겠지만, 그의 역사를 되찾는 일은 우리 역사의 잊혀버렸던 한부분을 복원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서기 597년(영양왕 8)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국력을 과시하면서 고구려에 모욕적인 국서(國書)를 보내오자, 이에대해 강이식 장군은 무력으로 맞설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마침내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부분은 을지문덕을 비롯한 당시 강경파의 입장이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던 결과로 볼 수 있다.
이때 강이식은 병마원수(兵馬元帥)를 맡아 정병 5만 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였는데, 이듬해 대병력을 이끌고 요서(遼西)로 나아가 요서총관(遼西摠管) 위충과 접전하다가 임유관으로 거짓 후퇴하였다. 이에 수나라의 문제(文帝)는 한왕(漢王) 양양(楊諒)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30만 대군을 임유관으르 보내고, 주나후(周羅喉)를 수군총관(水軍摠管)으로 삼아 바다로 출행시키면서 평양으로 출전한다고 성언(聲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한왕 양양의 군대에게 군량을 대주려는 속셈임을 간파한 강이식 장군은 수군으로 바다에 나아가 주나후의 군량선을 격파하고 군중(軍中)에게는 벽루(壁壘)를 지키라고 명하여 출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기아와 질병으로 사기가 저하된 수나라 군사에게 총공격을 감행하여 큰 전과를 거두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일어난 제1차전쟁 당시 강이식 장군의 활약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상의 내용은 강이식 장군의 업적을 극대화 하기 위해 다소 과장한듯한 부분이 있다. 물론 강이식 장군이 수나라 한왕의 30만 주력군을 요동성에서 막아낸 후, 요택이란 습지에 몰아넣어 스스로 자멸하도록 만든것은 엄청난 전공이다. 그러나 이 주요 업적으로 볼 때 바다와 육지에서 한명의 인물이 동시에 두곳의 적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마도 주나후의 해상부대를 공략한 것은 고구려의 해군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단 5~6만의 병력으로 임유관 일대에서 대규모 야전을 전개하고, 또 30만이나 대는 대군이 고구려 요동성을 포위한 상황에서 성주가 그 성을 비워 해군을 따로 편성한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제왕 광개토에서도 살펴 보았지만, 고구려의 해군은 결코 약하지 않았다. 아니 당시 동아시아 해상을 재패하였던 백제를 공략할정도로 우수하였다. 따라서 강이식 장군은 해상에 대해서는 고구려 수군의 우수함을 믿고 자신은 요동성 사수에 총력을 기울였을 것이 거의 분명해 보인다.
그리고 적들과 직접 대치하기 보다는 요택이란 습지에 몰아 넣는 전법을 택하면서, 고구려군의 손실을 최소한으로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강이식 장군의 업적은 어디까지 였을까?
현재 분명한 자료는 어디에도 없지만, 2차 고구려 수나라 전쟁당시에도 요동성 성주로서 활약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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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수나라는 전투 병력만 110만에 이르는 단일전쟁으로서는 세계사에 그 유래가 없는 최대의 병력을 동원하였다. |
우선 전술중에는 허장성세란 말이 있다. 즉 실제로 보유한 병사들 보다 더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적진에 유포시킴으로써, 적을 기만하고 공포감을 주어 사기를 꺽는일을 주요 목적으로 하는 작전이다.
가령 조조의 적벽대전경우 실제 전투병력은 20만이었으면서도, 80만 대군으로 선전하여 손권의 부대를 크게 동요시킨일이 있다. 또 거란이 고려에 침입할 당시에도 15만 정도가 실제 병력이었으지만 80만 대군이라고 고구려 왕조를 압박한 사실도 있다.
하지만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경우는 그 경우가 다르다.
우선 그 병력의 규모가 113만 3800명으로 백자리 단위까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더구나 바로 그 다음 단락에 므릇 200만명이라 부른다고 분명하게 나와 있다. 즉 실제로는 110만여 명이나, 허장성세로 200만명이라고 선전하여, 고구려를 겁주고 압박하려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것은 사대주의 사관을 가진 김부식에 의해 썼기 때문에, 고구려의 업적을 과대포장하기 위해 실제보다 부풀려 표현했을 거란 주장은 타당하지가 않다.
거기에 그 군량 수송자는 배나 되었다는 표현이 있어, 110만의 전투병력 중에는 단순히 부역에 동원되었거나, 후방 보급로를 담당하였던 부대는 포함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 각 부대단위의 진격로가 구체적이고 , 출정모습과 규모역시 대단히 사실적인데 그 부대 대열의 총 길이가 총 960리 였다는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거기에 요동성이 백만 이상의 군대로도 돌파되지 않자, 무려 30만의 별동부대를 편성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이 부대가 정규군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당시 요동성에는, 고구려가 수나라 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약 10만명 정도의 병력을 배치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즉 요동성은 무려 11배나 많은 적의 공격을 무려 30일 이상 견디어 냈다. 그그렇다면 과연 10만 명의 고구려 군사들을 일사분란하게 지휘하게 몇번이나 성이 탈환될 위기를 맞이하면서도 끝까지 지켜냈던 장수는 누구일까?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은 분명 위대한 업적이지만 요동성의 전과역시 그에 못지 않다. 물론 공성측보다는 수성이 다소 유리한 면이 있다. 그러나 평지성은 그렇게 유리한 것도 아니다. 공성무기들을 잘 갖춘 적에게는 오히려 공략하기 좋은 하나의 타켓에 불과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성곽은 평지성을 피하고 산성을 지향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요동성은 평지성이다. 만약 지휘관이 조금만 무능하거나, 군사들의 대열이 조금만 흩어져도 그대로 성문은 파괴되고, 성위에는 적병들로 넘쳐 날것이다.
비록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모든 기적같은 승리를 일구어 낼 수 있었던 인물은 강의식 장군이었을 것이다.
물론 지휘관이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죽음조차 두려워 하지 않고 서로가 압장서 적에게 맞서 싸웠던 수만의 무명용사들 한명 한명의 공로로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다.
강이식장군은 요동성을 지키고 죽어갔던 수많은 무명용사들의 대변자이다. 비록 그들 한명한명의 이름을 열거 할 수는 없겠지만, 그들역시 강이식 이란 장군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것을 아마도 이해 할 것이다.
강이식 장군의묘는 옛 고구려 땅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고, 경상남도 진주에 그를 모신 사당이 있다.
출처http://blog.daum.net/qhdtjsghkduswjd/7013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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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을지문덕 장군과 강이식장군.. 그리고 바다의 지장이자 고구려의 이순신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영류태왕 고건무장군도 계시지요.. 옛날 연개소문이란 드라마에서 강이식장군이 요동성에서 수나라 군을 묵사발 내고 호탕하게 껄껄 웃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ㅋㅋ 임유관대첩의 장본인이자 고구려의 지장 용장 맹장의 이름을 다 갗추신 강이식 장군!!
부풀려진 전과라고 우기는 인간들은 뇌구조가 어떻게 생겼는지 심히 궁금할 따름입니다...
연개소문 드라마에서 나왔죠....
앞으로 우리 사학계에서 강이식 장군을 더 높게 평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