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민 장로-성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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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맘 때면 영도 앞바다의 짙은 내음이 집 마당까지 밀려들어오곤 했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산 영도 봉래동. 주로 북에서 내려온 피 란민들이 많이 살던 동네다. 우리집 뒤로는 바다가,앞으로는 포도밭과 아름드리 무화과나무가 펼쳐져 있었다. 방 3칸에 어머니 아버 지 누나 둘과 여동생 나 이렇게 6식구가 살았다. 부모님은 피란민이었다. 아버지는 신의주 용천서,어머니는 평양서 1·4후퇴 때 남으로 내려오셨다. 혈혈단신으로 피란 온 아버지는 정이 많은 분이었다. 늘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전심으로 매달리셨다. 신앙도 남다르셨다. 아버지는 북에서 총각집사였고 할아버지가 장로였다고 어머니한테 들었다. 아버지는 내가 의사가 되길 원하셨다. 여느 부모님들처럼 내 아버지도 그러셨던 것 같다. 어머니는 2대 독자인 나를 끔찍이 아끼셨다 . 표는 내지 않아도 늘 내 밥을 먼저 퍼주셨던 기억이 난다. 어머니는 손재주가 유독 좋으셔서 우리들 옷을 손수 해 입히셨다. 자식 들을 위해 늘 기도와 묵상을 하셨다. 누이들과 나. 공부도 제법 하고 인사성도 밝아 동네 어른들이 예뻐했다. 아버지 밑에서 예절교육을 철저히 받아 유독 예의바른 탓도 있었겠다. 나는 어릴적부터 노래를 잘한다는 소릴 들었다. 노래 대회라면 1등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제4영도교회에서 찬송대회가 있을 때면 1등은 늘 내차지였다. 부활절 성탄절 추수감사절 찬양대회. 행사 때마다 나는 독창을 했다. 등교시간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도 내가 부른 노래였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었나. “민아 니 목소리 참 좋데이. 노래 하나 불러두고.” 싫다는 어린아이에게 노래를 강요하는 악취미가 어른들한테 있긴 하지만 만나는 사람마다 내 노래를 진심으로 듣고 싶어했다. 그러던 어느날 도시락을 먹는데 이상하게 밥이 맛도 없고 입안에 넣자마자 부스러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 도록 내가 먹는 밥은 씹히질 않았다. “어머니,내 밥이 이상하게 먹기 힘들고 부서지요. 어머니 이기 왜 이런기요.” 어머니는 대답 대신 눈물을 보이셨다. 지금 생각하면 부산 국제시장서 포목상이던 아버지 일이 예전 같지 않은 데다 빚도 지게 돼 형편이 나빠졌던 것 같다. 살림하시던 어 머니도 옷 만드는 회사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부스러지는 밥은 보리였고,나는 그렇게 쌀 한톨 없는 보리밥을 매일 먹어야 했다. 한 해가 지났다. 중 1때였다. 누이 둘과 집에 있는데 먹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난 교회로 갔다. 예배실은 텅 비어 있었다. “하 나님,우리 집만 왜 이리 어렵습니까. 왜 우리 집만요.” 눈물이 쏟아졌지만 큰 소리로 찬송을 시작했다. ‘캄캄한 밤 날 잠든 때 주 나 함께 계시고,사랑하는 우리 주님 자나깨나 늘 잊지 못 할 거룩하신 우리 주님.’ 다시 견딜 수 없는 눈물이 솟구쳤다. 이때였다. 그 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안민. 네 인생 내가 책임질게.” ◇안민 장로 약력
아버지 격분그날 밤. 나는 새벽 2시를 넘겨 귀가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었다. 주님을 처음 영접한 그날 이후 나는 달라졌다. 교회 지휘자, 주일학교 교사,토요 전도사로 쉼없이 움직였다. 찬양하는 순간마다,예배 드리는 순간마다 얼마나 은혜를 입었던가. 해 를 거듭할수록 ‘가난’은 내게 도리어 힘이 되어 나를 굳건히 지켜주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다닌 제4영도교회. 부모님의 사랑에 버금가는 사랑을 교회는 나에게 주었다. 조긍천 목사님. 나는 중2 때 이분께 세례를 받았다. 조 목사님은 아무 것도 없는 나에게 너무도 큰 사랑을 베풀어주었다. 나도 모르 던 음악적 재능은 교회 안에서 점점 커져만 갔다. “안민이는 성악가가 되면 좋겠다.” “안민이는 음대 가면 좋겠다.” 교회 사람들 은 내게 이런 말을 곧잘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 꿈은 의사였다. 교회에서는 찬양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합창반 반장에 애국가 제창 지휘도 하던 나는 여전히 노래로 유명했다. 하루는 교회 건물을 새로 짓는다고 해 중·고등부가 성가 발표회를 한 적이 있다. 표를 팔아 남은 돈을 헌금하기로 했다. 200여 좌석 은 물론이고 마당에까지 관중이 꽉 들어찼다. 흥행은 대성공이었다. 나는 지휘도 하고 독창도 했다.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다. ‘아 버지가 의사 되라켔는데. 내 마음이 왜 이럴까.’ 무슨 연유에서인지 내 마음에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고2 때였다. 반편성을 해야 한다며 담임선생님이 어느 대학에서 어떤 전공을 할지 정해 오라고 했다. 내겐 그때 사실 별 꿈이 없었다 . 그저 아버지 뜻대로 의대 가면 되지 싶었다. 나는 10년 뒤,20년 뒤 내 모습을 그려봤다. ‘멋지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 평생 즐겁게 그렇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머릿속엔 오로지 음악 찬양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성악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그때 처음 들었다. 그 길로 김경명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 분은 중학교 때 은사로 부산에서 아주 유명한 성악가였다. 시창을 했는데 선생님이 대단히 만족스러워 하셨다. “타고났구나. 천부적이야. 1년만 공부하면 니가 원하는 어느 대학 이라도 갈 수 있겠다. 다음주부터 레슨하자. 일단 어머니 모시고 오거라.” 기분이 날아갈 듯했다. 그런데 어머니를 왜 모시고 오라는 걸까. 그때만 해도 성악을 배우는 데 돈이 드는지 몰랐다. 레슨비는 한 달 에 4만원. 당시 국립대 등록금이 10만원 정도였으니까 요즘으로 따지면 40만∼50만원쯤 됐나보다. ‘돈도 없고 가난한데 아버지는 틀 림없이 반대할테고.’ 그래도 노래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아버지,노래하게 해주이소.” “머라고. 니 지금 뭐라했나.” 아버지는 격분한 나머지 내 따귀를 때렸다. 난 울며 불며 아버지 바 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니 노래하는 기 먼지 알기나 아는기가. 그기 ‘딴따라’ 되는 기다. 내 니를 고작 ‘딴따라’ 시키려고 이태껏 뒷바라지한기가.” 3일간을 매달렸건만 허사였다. 아버지는 공부도 곧잘 하고 리더십도 있던 아들에 대한 기대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 또한 꿈을 저버릴 수 없었다. 밤잠을 뒤척이고 뒤척이다 새벽이 밝아올 무렵. 나는 결심했다. ‘무슨 짓이라도 해야겠다.’
서울음대 합격어머니는 우리집이 어려워진 뒤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직장에 나갔다. 자식들이 곤히 잠든 새벽에 늘 출근하던 어머니. 그날도 어머니는 그렇게 출근길에 나서고 있었다. 깜깜한 새벽 나는 어머니 뒤를 따라갔다. “어무이.” 어머니는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계셨다. “민아,우리집에 노래가 웬 말이고. 아버지 반대하시고 이러는데. 그리고 민아,노래하는기 보통 일이 아닌기라. 계속 뒷바라지해야 할긴데 돈도 많이 들고 우리 형편에 할 수 있겠나? 부모 원망 말고 맘 다잡고 공부하그라.” “어무이 노래 안하면 콱 죽어삐릴깁니더.” 어머니한테 3일간 매달렸다. 며칠이 지난 뒤 어머니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셨다. “민아,선생님 만나서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긴데.” “어무이예,그냥 가 서예 ‘네 네’ 하고 오면 되는기라예. 무조건 ‘네’하고 오이소.”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나 때문에 일도 손에 안 잡히고 밤잠도 제대로 못 이루셨다고 한다. 그때부터 나는 정식으로 성악을 배우게 됐고 부모님의 고된 생활도 시작됐다. 퇴근하고 나서도 어머니는 새벽 2∼3시까지 무언가를 만드셨다. 아버지는 내가 노래하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는 데 낮엔 장사하시고 밤엔 경비일을 하셨던 걸 보면 알고도 모르는 체하셨던 것 같다. 그로부터 1년 뒤 난 서울음대 성악과에 그것도 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때 깨달았다. 맛있는 음식도 못 먹어보고 좋은 옷도 못 입어 봤지만 눈물의 기도가 담긴 밥을 먹은 자식은 결코 망하는 법이 없고,자식이 부모를 실망시키더라도 부모는 자식을 품에 안 는다는 사실을,그리고 하나님의 큰 사랑,은혜를 깨달았다. 1977년 2월. 부산역 대합실. 얼음처럼 찬기운이 안에까지 밀려들고 있었다. “민아,이 아버지가 입학식에 못 간다. 돈도 벌어야 하고,옷도 마땅찮고. 하지만 졸업식엔 내가 꼭 간다.” 아버지는 내 두 손을 꼭 붙잡고 기도를 하셨다. “하나님 아버지,하나밖에 없는 제 아들이 내 한번도 가보지 않은 서울땅에 갑니다. 제 아들을 잘 보살펴주시고 어떤 시련에도 견뎌 낼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난 아버지가 그토록 기도를 오래 하시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서울 가는 기차가 도착했는 데도 아버지 는 꼭 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기차가 떠나기 직전 아버지는 보따리 하나를 건네주셨다. “자주 못 사주니까 아껴 입거라.” 보따리 안에는 까만 기성복이 한 벌 들어 있었다. 아버지는 성악은 잘 모르셨지만 노래할 때 까만 정장을 입는다는 건 아셨던 것이다 . 어느새 주름이 깊게 패어 그늘진 아버지 얼굴이 자꾸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아버지,정말 열심히 살깁니다. 아버지 실망시키지 않게 꼭 성공할깁니더.’ 희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달려가는 기차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아버지는 플랫폼에 우두커니 서 계셨다.
대학 입학과 동시에 나는 서울 여의도 경향교회로 신앙의 둥지를 옮겼다. 난 예배 때마다 아버지가 사주신 검은 양복을 입고 나갔다. 그러던 8월 초순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 당시 찬양 연습실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한두어 시간 연습을 하자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 됐다. 찬양 지휘나 음악회 때 입어야 하는,하나밖에 없는 내 검은 양복이 땀에 절어 도저히 입을 수 없게 늘어져버렸다. 다음 주일. 나는 도저히 정장을 입고 갈 수가 없어 윗도리를 집에 둔 채 와이셔츠만 입고 갔다. 강병길 장로님이 나를 불렀다. “선생님,지휘자 옷을 입고 와야죠.” 그 다음 주일. 이번에는 넥타이 하나만 들고 갔다. 위에 가운을 걸쳐 가릴 생각이었다. 유년부 예배는 그럭저럭 넘어갔다. 하지만 저 녁 대학부 찬양이 문제였다. 가운을 벗어야 했기 때문이다. 밤에 강 장로님이 다시 나를 불렀다. ‘또 옷 얘길 하시겠구나’생각했다. 그러나 장로님은 옷 이야기를 꺼내시지 않고 내일 명동으 로 나오라고만 했다. 다음날 명동으로 나갔더니 강 장로님이 “안 선생,여름양복이 없지. 이 양복 받아. 우리 장로들이 해주는 거니까 부담갖지 말고”라 며 양복 2벌을 주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장로님이 사비를 털어 마련해준 것이었다. 내가 경향교회에 다니게 된 건 인생의 크나큰 축복이었다. 경향교회 석원태 담임목사님은 복음을 향한 열정,뜨거운 신앙을 가르쳐주신 분이었다. 석 목사님은 십자가와 예수님을 얘기하실 때마 다 눈물을 흘리셨다. 경향교회는 참으로 말씀이 충만한 교회였다. 국문학도였던 목사님의 설교는 내 마음을 울리는 ‘북’과 같았다. 내 신앙의 뼈와 살은 그때 다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나는 여의도 한양쇼핑센터 앞에서 교우들과 함께 노방전도를 하곤 했다. 라면만 먹고 때로는 끼니를 거르기도 했지만 우린 배고픈 줄 도 모르고 비신자들을 하나님에게 인도했다 . 새벽예배도 하루도 안 빠뜨릴 정도로 열심이었다. 새벽예배는 내가 가정교사로 입주한 가정의 어머니 때문에 나가게 됐지만. 내가 가 르친 학생의 어머니는 믿음이 없던 분이다. 그런 그분이 어느 날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안 선생은 새벽기도에 얼마 나 나가. 나도 가고 싶은 데 만약 내가 간다면 같이 가줄 수 있겠어?”라고 부탁해 새벽예배에 나가게 됐다. 그후 나는 새벽 4시30분 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야 했다. 한 6개월쯤 지났을까. 그날도 어김없이 눈물을 쏟아내며 새벽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제가 약자 아닙니까. 저도 대학원에도 가고 싶고,유학도 가고 싶습니다. 고향에서 아들 하나 바라보고 울고 기도하시는 어 머니가 계신데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안민아,너 기도할 때 불만이 너무 많아. 너도 가진 걸 좀 내놔야 하지 않겠니. 그래야 나도 내줄 거 아니냐.” 순간 화가 치밀었다.
“뭘 내놓으란 말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데 도대체 뭘. 내가 가난하지 않습니까?” 무언가를 내놓으란 하나님의 말씀을 나는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매번 하나님에게 갈구하기만 했던 나다. 가난하고 무기력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하나님께 부탁하고 매달리는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하나님에게 뭘 드릴 수 있을까?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신앙은 점점 메말라갔다. 설교를 들을 때마다 눈물을 흘렸는데 기도도 안되고 감 격도 없고 설렘도 없었다. 눈물은커녕 날이 갈수록 영적으로 피폐해져 갔다. ‘가난’이 ‘힘’이었다지만 사실 알고보면 깊이 파묻 힌 ‘상처’였던 것이다. 신앙이 흔들릴 무렵 아버지의 건강도 날로 악화됐다. 대학 1학년 때인 77년 12월말.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로시니의 오페라 ‘세 빌랴의 이발사’ 주인공 피가로역을 맡았던 나는 공연을 성황리에 끝내고도 마음이 무겁기만 했다. 몸져 누워계신 아버지 생각 때문 이었다. 나는 공연을 마치자마자 고향으로 서둘러 내려갔다. 어머니와 누이들의 표정은 침통하기만 했다. 미남이셨던 아버지의 얼굴은 깊게 팬 주름으로 일그러져 있었고 그토록 건장하시던 모습 도 뼈만 앙상히 남아 금새 사그러질 것만 같았다. “민아,내가 오래 못 살 것 같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내가 비록 힘들게 살아왔지만 감사하는 건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거다. 멋지게 살다와라. 우리 주님 앞에서 만나자꾸나. 내가 임종 때 만약 말을 못하더라도 찬송해다오. 기도해다오.”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이듬해 1월4일. 아버지는 5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셨다. 사인은 간경화. 술도 안 드셨고 담배도 안 피우셨던 아버지였지만 가난이 주 는 스트레스는 못 이겨내셨던 것 같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슬픔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버지 졸업식에 꼭 오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그 약속 지키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눈물과 콧물이 범벅이 되 어 밤새도록 목놓아 울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제4영도교회 목사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안 선생님,전화 받을 수 있갔어요. 얼마나 속상하요. 내일 주일인데 올 수 있겠소.올기요.” “가야지요.” “그럼 와서 특송 불러 주이소.” 특송이라고? 아버지를 잃은 슬픔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게 특송을 부르라니 얼마나 잔인한 부탁인가. 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멋지게 세상을 살다가신 아버지께,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던 아버지께 특송을 불러드리는 것 이상으로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것도 없 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교회에서 하늘나라에 계실 아버지께 특송을 바쳤다. “오 나는 약한 나그네요/이 슬픈 세상을 가며 수고도 병도 위험도 없는 내가 가는 그 밝은 곳/나는 가네 내 아버지께 더 이상 방황 없는 곳/나는 가네 십자가 앞에 주님 품에 돌아가네/나의 시련 모두 끝나리/나 주님 얼굴 뵈올 때/밝은 내일 내 앞에 있고 영원히 주 와 살리라….” 아버지는 졸업식에 오시겠다던 약속을 못 지킨 대신 내게 천국을 보여주셨다.
가난과 아버지의 죽음,황폐해진 신앙. 어디에도 내 편은 없는 것만 같았다.자포자기 상태로 기도하던 어느 날 나는 다시 하나님께 물 었다. “하나님,날더러 어떡하란 말입니까?” 아무것도 없는 내게 뭘 달라고 하시는 걸까. 곰곰 생각해봤다. 뭐가 있을까? 이대로 가다가는 무너져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밀려들었 다 . “하나님,제가 드릴 수 있는 건 내 몸뚱아리 하나뿐입니다. 정 원하신다면 내 몸을 바치겠습니다. 내 열정,젊음,그리고 그 다음엔…. ” 그렇다. 노래가 있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순간 주위가 환해졌다. 시름은 멀리 사라졌고 기쁨과 환희가 넘쳐났다. 나는 그날 이후 사정이 어렵고 딱한 분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부터 강원도 두메산골,소록도 한센병 환자촌까지. 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찬양으로 복음을 전파했다. 1980년 12월25일.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차오른다. 한센병 환자촌을 돕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려고 나와 교회 동기 넷은 서울 인사동 다방을 빌려 공연을 했다. 우리는 예수의 탄생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날까지 노래와 말씀으로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공연을 하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난 참 복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공부할 수 있게 해주셨고,학비가 없을 때 장학금을 받게 해주셨고,오페라 주인공도 하게 해주셨고,동아 콩쿠르 대회에도 입상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내 편이었습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우리는 모아진 기금을 들고 한센병 환자들에게 달려갔다. 첫번째로 들른 곳은 여수 ‘애양원’. 손양원 목사님이 사역하시던 곳이다. 흉터가 심하고 연로한 환센병 환자들 앞에서 우리는 2시 간 가량 공연을 했다. 찬양이 끝난 뒤 우리의 정성을 전달해드리는 데 김 선생님이란 분이 나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우리는 자네들에게 물 한 모금 주지 못했네. 그런데 자네들은 너무도 많은 은혜를 주었어. 이렇게 큰 은혜 받아본 적이 없다네.” 절절한 기도와 함께 찬송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 “세상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세상사람이 부럽지 않아. 하나님 아들이라 불러주시니 할렐루야 찬송이 저절로 나네. ” 손뼉 을 치며 찬양하는 환자들을 보며 우린 그 자리에 꿇어앉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소록도 중앙교회에서도 우리는 역시 놀라운 은혜를 경험했다. 고향과 가정을 떠나 아무런 소망이 없을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서 이 세 상 어느 빛보다 강렬한 영혼의 빛을 보았다. “주여,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내 노래를 주 앞에 드렸는 데 주님은 제게 갑절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세상에 돈이 전부가 아니 고 참으로 놀랍고 귀한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우린 수많은 장애우를 만나고 고아와 독거노인들을 찾아다니며 말씀과 찬양을 나누었다. 그때 같이 다니던 동기들은 지금 경향교회 목사인 석기현,미국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는 옥인석,옥인석의 부인이 된 김혜경,그리고 영원한 나의 짝 정진희였다.
정진희 난 처음에 그녀가 바보인 줄로만 알았다. 시계를 빼앗아가도 가만히 웃고만 있는, 아무리 나쁘게 얘기해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는 사람이 그녀였다. 대학에 입학해 한달쯤 지났을까. 서울대 성악과 77학번은 남자가 반,여자가 반 모두 30명이어서 저절로 짝이 지어지는 분위기였다. 엠티를 가면 항상 제비를 뽑아 남녀 커플을 만들곤 했다. 행사 뒤에는 남학생은 반드시 여학생을 집에까지 데려다줘야 했다. 첫번째 단합대회 때. 제비뽑기를 했는데 나는 정진희와 짝이 됐다. 그녀에게 호감은 있었지만 사랑을 느끼기 전이다. 쑥스러운 마음 에 집에도 데려다주지 않았으니까. 두번째 행사가 열렸다. 이때도 추첨을 했는데 또 정진희와 짝이 됐다. ‘참 이상도 하지. 저 여학 생과 나를 하나님께서 커플로 맺어주시려나.’ 가슴만 설레던 나는 그때부터 정진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그녀의 반응은 하지만 냉담했다. 혼자 속앓이를 하던중 이번엔 우리과에서 남이섬으로 엠티를 가게됐다. 아마 5월께였을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그 녀와 커플이 되게 해달라고 마음 속으로 기도했다. 그러나 이번엔 그녀와 짝이 되지 않았다. 풀이 죽은 나에게 한 친구가 다가와 번 호표를 내밀었다. “바꿔줄까?” 번호표를 본 나는 깜짝 놀랐다. 바로 그녀의 번호였던 것이다. 친구들도 이미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걸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와 추억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난 그녀에게 어떻해서든 잘 보이려고 없는 주머니를 털어 수없이 많은 문고판을 선물했다. 데카메론,에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 했다 등 고전이란 고전은 모두 그녀에게 권했다. 책에는 늘 그녀를 위한 시가 담겨 있었다. ‘그대가 있음으로 가을 하늘이 내게 의 미로 다가옵니다.’ 난 그녀 앞에서 시인이 되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음악회란 음악회는 모조리 가곤 했다. 비싼 표일 경우에는 한 장만 사 그녀를 들여보내고 나는 화장실 담을 넘어들 어가기도 했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국립극장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 공연을 봤던 적도 많았다. 그곳에서 공연을 많이 해봐 구조를 훤 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날 때마다 뭐든 주고 싶었고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은 늘 짧게만 느껴졌다. 그녀의 집은 망원동. 합정동 로터리에서 내려 그녀의 집 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그녀를 데려다주고 돌아서려면 그녀는 다시 로터리 정거장까지 따라왔다. 그러다보면 나는 신림동 가는 막차 에 올라타기 일쑤였다. 가난한 과부가 주 앞에 전재산인 두 렙돈을 바치는 이야기나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에 붓는 여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얼마나 믿음이 좋으면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생각했던 나에게 하나님은 그녀를 맺어줘 사랑과 믿음의 힘을 체험하게 해주셨다. 성당에 다니던 그녀를 하나님은 교회로 인도하셨고 그녀와 나는 함께 사역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그녀는 여성중창단의 일원이 되어 천사의 목소리를 들려줬고 나는 그 중창단을 지도했다. 우리는 같은 교회를 섬기면서 노방전도도 같이 하고 찬양투어도 함께 했다. 사람들은 “너희들은 학교에서도,교회에서도 그렇게 종일 같이 있으면 안 지겹냐”고 묻곤 했다. 첫사랑인 그녀와 나는 6년을 연애했고 결혼해 지금까지 18년을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지겨운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내 아내가 된 그녀 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어머니,저 결혼하겠습니다.” 꿈 같은 연애를 하며 6년을 그녀와 함께 했지만 연애만으론 만족할 수 없었다. 매일 붙어다녔지만 팔짱은커녕 손도 못잡고 다녔던 나 는 그녀와의 결혼이 너무도 간절했다. 절박한 심정으로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러나 반응은 차갑기만 했다. “그래? 축하하네. 근데 누구랑 하지?” 당신의 딸과 결혼하려는 걸 알고도 그렇게 반문하셨다. “물론 진희와 결혼하지요.” 대답은 ‘노’였다. “뭐? 너희는 친구야. 그냥 친구로 지내라 했지. 언제 결혼하랬나?” 어머니는 흥분한 나머지 나를 결국 쫓아내고 말았다. 다음날 또 가고 그 다음날 또 찾아가고 하루도 빠짐없이 찾아갔건만 대답은 한결같았다. “내가 진희를 어떻게 키웠는데,자네 같은 남자한테는 줄 수 없네. 내가 자네를 어떻게 믿겠는가.” 가족의 반대에 부딪쳐 나와 그녀의 결혼은 물거품이 될 위기였다. 그녀는 울기만 했고 나는 애만 탔다. 사실 그녀의 어머니가 나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정진희는 서울 사대문안 예장동에서 유복하게 자란 귀한 집 딸이었다. 아버지는 고려대 법대를 나와 교장선생님을 하셨다. 어머니는 교직원 출신으로 남다른 교육열을 갖고 계셨고 인텔리셨다. 그녀의 친고모는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하신 정광모(현 한국소비자연맹 회 장)씨로 유명인사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2 때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 자리를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메웠다. 2남1녀 중 장녀인 그녀는 어릴적부터 노래도 잘하고 공부도 잘했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그녀는 어머니의 자랑이요 희망 이었다. 난 그에 비하면 내세울 게 아무것도 없었다. 키도 작고,고작 47㎏의 몸무게에 비쩍 말랐다. 게다가 덥수룩한 장발이니 한 눈에 보기 에도 사윗감으로는 내키지 않았을 터였다. 한술 더 떠 홀어머니에 2대 독자 외아들이고 가난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잘하는 거라곤 노래 하나. 25세 젊은 나이에 고신대 교회음악과 전임대우 교수로 출강한다지만 그녀의 배우자감으로는 한참 부족했던 것이다. 그래도 난 포기할 수 없었다. 갖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난 그녀를 포기할 수 없었다. “어머니,대 학 교수가 굶어죽는 것 봤습니까? 제 미래를 봐주십시오”하고 큰소리치기를 수십번. 급기야 나는 어머니께 일방적으로 ‘통보’하기 에 이르렀다. “어머니,저 이번 7월15일에 결혼합니다.” 어머니는 “왜”라며 몸을 부르르 떠시더니 “왜 하필 그렇게 더운 여름에 하겠다는 건가 ?”라고 하셨다. 그날도 쫓겨났지만 내 기분은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제 결혼을 하느냐,마느냐가 아니라 언제 하느냐의 문제로 옮겨 간 것이다. 1주일 뒤 “어머니,여름이 안되면 겨울에 하겠습니다. 12월11일 어떻습니까.” “아니 도대체 좋은 계절 다 놔두고 또 웬 한겨울에 결혼을. 우리 진희가 내 희망이었는데 자네가 내 딸을 행복하게 해줄텐가. 우리 진희는 음악공부 계속해야 할 아인데 그 뒷바라지를 할 수 있는가?” “어머니,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끝까지 공부할 겁니다.” 그해 1982년 12월11일 나는 그녀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우리 학교에 와서 일 한 번 안해볼랍니까?” 대학 졸업 후 2대 독자 외아들로 방위를 마치고 한참 진로를 모색하고 있을 때다. 주머니는 날이 갈수록 가벼워지고 부산 영도에서 홀로 뒷바라지하시는 어머니 얼굴에 근심만 쌓여갈 무렵이다.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요?” “고신대 교회음악과 전임교수대우 자리가 비었는데 이력서랑 준비해서 넣어보이소.” “안 선생 어릴적 다녔던 교회 목사님을 통해 연락하는 겁니다.” “일단 알았고요. 어디로 연락하면 되는 겁니까?” 어슴푸레 옛 기억이 떠올랐다. ‘맞다. 그때 그랬었지.’ 그러니까 3년전 일이다. 대학 3학년 때 부산시민회관 대강당에서 부산 출신 서울음대 학생들이 귀향 연주회를 했다. 연주회가 끝난 뒤 고신대 학장과 교회음악과장은 무대 뒤로 찾아와서는 ‘공부 열심히 하라’ ‘나중에 기회가 되면 꼭 같이 일해보자’며 나를 추 켜세워줬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당시 그 두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학생을 보러 왔었는데 내 노래를 듣고는 마음이 바뀌어 나를 찾 았던 것이다. 행운도 이런 행운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무슨 배짱인지 ‘귀한’ 제안을 단칼에 베어버렸다. ‘내가 영도 촌에서 서울까지 얼마나 힘들게 왔는데 다시 내려가나. 부산에 내려가면 경향교회도 못 나가고 진희도 자주 못보고. 유 학이나 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내 마음엔 서울을 떠나기 싫은 마음 반, 유학 가고 싶은 마음 반이 뒤섞여 있었다. 하나님의 뜻은 그러나 달랐다.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은 찬양과 예배의 그림을 떠올리게 하시며 나에게 고신대로 갈 것을 권유하셨다. ‘그래,하나님이 세상의 많은 성악가 가운데 나를 교회에 쓰시려 하는구나. 기독교 대학인 고신대에서 그것도 교회음악과 교수로 쓰 시려 하는 데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사실 속된 말로 몇차례 ‘튕기는’ 사이 행운은 스쳐지나갈 뻔했다. 이탈리아로,프랑스로,미국으로 유학갔던 학생들이 학위를 갖고 한국에 들어올 무렵이었다. 난 달랑 서울대 졸업장 하나뿐이었다. 조금만 주저했더라면 나보다 나은 사람에게 기회가 넘어갈 뻔했다. 돈은 벌어야 하지만 공부는 계속하고 싶어했던 열망을 하나님은 아시고 나를 그들보다 먼저 보내주신 것이었다. 화려한 이력에도 고 신대의 교수 임용기준(반드시 기독교인이어야만 한다 등)에 맞지 않아 추풍잎 떨어지듯 고배를 마시는 이들도 있었다. 나에게 향한 그 은혜를 이루 말할 수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나는 1982년 3월 고신대 교회음악과 전임교수대우로 강단에 섰다. 어머니는 한시름을 덜었고 나는 가르치는 기쁨에 하루 하루가 충만했다.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어떻게 하면 교회와 학교에 충실히 사 역할 수 있을지 고심했다. 나보다 나이 많은 학생들,나처럼 형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학생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등. 때론 어려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하나님은 나에게 좌절하지 않는 용기와 희망을 주셨다. 주중에는 강단에서,주말에는 가정에 봉 사하고 경향교회에서 찬양대를 지휘하기를 2년. 84년 여름. 행복하기만 하던 나에게 시련이 닥쳤다. 10 아들 놈이 태어난 지 백일이 안됐을 때다.세 살던 나는 집주인과 대판 싸움이 붙었다. 어렵사리 500만원을 대출받아 얻은 집이었는데 집주인이 1년만에 세를 300만원 더 올리겠다는 것이다. “아니, 해도해도 너무 하네. 학교 선생이 돈을 얼마나 번다고 1년만에 300만 원을 올린다는 겁니까. 아무리 당신이 주인이지만 너무하는 것 아니오?” 주인도 막무가내였다 . 어떻게 해서든 300만원을 올려받아 야 한다고 고집했다. “내참, 더러워서. 당신 집에 안살고 만다.” 큰소리 치고 나니 속은 시원했지만 앞길이 막막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서울 여의도 경향교회에 갈 때마다 야속했다. ‘하나님,여의도에는 이렇게 아파트도 많은데 왜 저는 이 한 몸 눕힐 집이 없습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 불만이 싹트고 있었다. 며칠 뒤. 큰 수해가 났다. 84년 9월이었다. 사흘동안 폭우가 쏟아지면서 서울 망원동 유수지의 수문이 무너졌고 망원동 일대 4000여 가구가 물에 잠겼다. “아이구 얘야. 집이 잠겼다. 2층까지는 아직 물이 안들어왔는데 혹시나 해서 옥상에 쌀이랑 짐을 다 치워놨다. 위험하니 집엔 들어 오지 말고….” 아이는 어머니께 맡겨놓고 아내와 함께 교회에서 한창 찬양연습중이던 나는 수화기를 그만 놓쳐버렸다. 부랴부랴 콜택시를 잡아 탔다. 집으로 빨리 가야 하는데 택시는 합정동 로터리에서 멈춰섰다. 가슴까지 물이 찬 상태로 이불 보따리 를 짊어지고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다. 100m만 더 들어가면 우리 동네인데. 물 속으로 냅다 뛰어들려는데 경찰이 붙잡았다. “내 집에 아들하고 어머니가 있어요. 들어가야 합니다.” 경찰은 그러나 “도둑들이 보트 타고 다니면서 도둑질하기 때문에 위험하다”며 못들 어가게 막았다. “사람이 저 안에 있는데 도둑이 문젭니까?” 가까스로 집 앞까지 갔다. 물이 목까지 차 올랐다. 자칫 발이라도 잘못 디디면 한강으로 휩쓸려 들어갈 위험한 상황이었다. 올려다보 니 다행히 1층만 잠기고 2층에는 물이 들어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아들 성은이를 안고 계셨다. 장모님도 계셨다. ‘하나님 감사합니 다. 감사합니다.’ 1층에 살았더라면,지하에 살았더라면 목숨보다 귀한 가족을 잃을 뻔했다. 목욕통에 이불을 깔고 아이를 눕히고 저 금통장과 반바지를 챙기고는 두 어머니를 모시고 집 밖으로 나왔다. 한 2시간이 지났을까. 거친 물살에 수차례 넘어질 뻔했지만 모두 무사히 합정동 로터리에 도착했다. 어머니는 부산 집에,나와 아내는 교회 장로님댁에 대피한 뒤 물이 빠지기만 기다렸다. 일주일 뒤. 집에 들어가봤더니 1층 주인집은 무거운 장롱이며 에어컨이 다 엎어지고 방구들이 내려앉아 쑥대밭이 돼 있었다. 지하실에는 아직도 물이 가득했다. 집주인이 망연자 실한 사이 2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여니 먼지만 뽀얗게 쌓여 있었다. 내가 살던 집 10㎝ 밑에까지만 물이 찼던 것이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초가에 살더라도 감사하며 살라는 하나님 말씀이었다. 그날 이후로 나와 아내는 ‘우리집은 어쩌고 방이 어쩌고’ 하는 불평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10년 전 홀몸으로 여기 왔습니다. 여름 양복이 없을 때 선배님들이 제 양복을 해주셨습니다. 혼자왔던 제가 어느새 남편,아버지,교수 그리고 집사가 됐습니다. 지난 10년간 하나님과 여러분의 사랑을 갚지 못하고 떠납니다. 선배님들한테 배운 것처럼 남을 위해 나누는 자로,섬기는 자로 살아갈 것입니다.” 1985년 12월 마지막 주일. 나는 경향교회와 이별을 고해야 했다. 고신대 교수가 된 뒤에도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4년간 경향교회를 다녔다. 하지만 더 이상은 계속할 수 없었다. 이듬해 1월 나는 부 산 사직동교회에서 첫 주일을 맞이했다. 내가 사직동교회로 갑작스레 옮기게 된 까닭은 교회에 진 신세 때문이었다. 사직동교회에 등록하고 1월 첫주부터 나가려 했지만 서울 집주인이 세를 안 내줘 부산에 내려올 수 없을 때였다. “저도 가고 싶은데요. 집주인이 세를 돌려줘야 갈 수 있습니다. 쪼매만 기다려주이소.” “당장 얼마가 필요한대요? 500만원이면 되 겠습니까?” 교회 한 장로님이 아무 조건도 없이 나에게 500만원을 쥐어줬다. “대신 비밀로 하입시더.” 장로님의 도움 덕에 부산에 집도 구하고 약속대로 교회에도 나가게 됐지만 신앙적 열정을 이 곳에선 발견할 수 없어 걱정이 됐다. ‘ 경향교회에 계속 다닐 걸 그랬나. 어디가서 그때 그 기쁨을 느낄 수 있을까.’ 다행히 기우였다. 사직동교회는 참 좋은 교회였다. 경향교회 석원태 목사님이 신앙의 은인이라면 사직동교회 정판술 목사님은 아버지와 같았다. “안민 집사는 교회를 위해 참으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안민 집사가 와서 우리 찬양대가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했습니다.” 정 목사님은 어 디에서든 민망할 정도로 나를 칭찬했다. 난 경향교회에서 배운 경배와 찬양을 사직동교회에 적용했다. 좀더 활기있고 힘차게,사랑과 기쁨으로 충만하게,그렇게 분위기를 바꿔 나갔다. 처음엔 낯설어하던 성도들도 어느새 찬양대의 새로운 모습에 반하기 시작했다. 700명이던 성도수가 1000명으로 늘어나더니 어느새 2000명,3000명까지 불어났다. 울산 마산 대구 등 다른 지역에서도 나를 초청하기 시작했다. 각종세미나 전도집회 등 일년 365일이 모자랄 정도로 불려다녔고 감사 하게도 가는 곳마다 ‘열매’를 맺었다. 하루는 경산의 한 고속버스 운전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었습니다. 아주 싫어했지요. 그런데 말이죠. 종점에 서 차를 청소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테이프를 주웠어요. 처음엔 버리려고 했죠. 참 신기한 일이죠. 테이프 듣고 예수를 알게 됐어 요.” 기독실업인회가 주최하는 비기독실업인 초청 전도집회 때는 한 사업가가 간증을 들은 뒤 찾아왔다. “태어나서 이런 경험 처음입니다 . 가슴에 무슨 전율이 느껴지는데 이게 뭡니까.” 나는 그를 김해의 한 교회 집회에 다시 초청했다. 그는 그곳에서 예수를 영접했다. 나의 집회 테이프는 나도 모르는 채 녹음돼 강원도 산골짜기에서부터 미국 남미에까지 팔려나갔다. 급기야 외국 교회에서도 초청이 시작됐다. 미국 일본 중국 호주 뉴질랜드….
’외국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탈리아 유학 얘길 먼저 꺼내지 않을 수 없다. 19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나는 가족과 함께 이탈 리아로 떠났다. 학교에서 배려해준 덕분에 이탈리아에서 1년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다. 내 나이 서른한 살 때다. 내가 등록한 학교는 로마의 로시니 국립음악원. 걸출한 성악가들을 배출한 전통 있는 학교다. 나는 단기 집중 코스를 아내와 함께 등 록했다.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느니 힘들더라도 졸업장을 따자는 게 내 목표였다. 생각보다 유학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언어였다. 무슨 배짱으로 이탈리아어를 한 마디도 못하는 내가 이탈리아에 오려 고 했던가라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백번씩 들었다. ‘큰소리 치고 유학오긴 했는 데 졸업을 못하면 무슨 망신인가?’ 두려움이 앞섰다 . ‘일단 교회를 찾아가자.’ 내가 찾아간 교회는 로마한인교회였다. 지금은 로마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로 성장했지만 당시에는 무척 어려웠다. 수요 저녁예배 때 찾아갔는데 성도가 1명도 없었다. 한평우 목사님의 인도로 사모님과 나,아내가 예배를 드렸다. 교회는 이탈리아 대통령 관저 근처의 영국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예배를 마치면 한 목사님이 손수 예배실을 청소하고 문단속까지 했다. ‘한인교회들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고 있구나. 한국으로 돌아 갈 때까지 이 교회를 섬겨야겠다’고 결정했다. 목사님은 성도들을 사랑했지만 성도들은 목사님을 잘 따르지 않았다. 처음 집사로 임명된 나는 성도가 없는 탓에 어느새 교회 구역장 까지 맡게 됐다. 주중에는 학교,주말에는 교회에 충실하면서 이렇게 내 유학생활은 시작됐다. “하나님,학교가 주는 돈으로 공부하러 왔는 데 제대로 못 마치거나 졸업을 못하면 무슨 면목으로 학교에 돌아가겠습니까. 교회를 섬 기며 공부에만 충실할테니 도와주세요.” 나와 아내는 늘 이렇게 기도하곤 했다. 이탈리아에서 생활한지 3개월쯤 지났을 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로시니 국립음악원을 졸업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아르츠아카데미 라는 사립학교에도 다니고 있던 내게 현지인들도 하기 힘들다는 공연 기회가 찾아왔다. 이탈리아인들이 주최하는 멘델스존의 ‘천지창조’ 오라토리오 오디션이 있었는데 사립학교 선생님의 권유로 나갔다가 그만 덜컥 붙 어버린 것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텃세가 심해 외국인에게 좀처럼 공연 기회를 주지 않는데 기적 같은 일이 내 앞에 펼쳐진 것이다. 나는 천지창조의 테너 독창자가 되어 ‘테아토로 올림피코’라는 로마의 올림픽극장에서 공연을 했다. 오케스트라,지휘자 등 모든 출 연자가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고 나는 좋은 무대에 설 수 있는 영광과 함께 출연료까지 두둑이 받게 됐다. 시간은 흘러 어느새 국립음악원 졸업시험을 치르게 됐다. 매우 긴장되는 순간이었지만 나와 아내는 무난하게 시험을 치렀다. 며칠 뒤 게시판에 성적이 게시됐는데 놀랍게도 아내가 전체 학생 중에서 1등을 하고 나는 2등을 차지했다. 사립학교 졸업시험에도 동시에 합 격한 나는 2개의 졸업장을 안고 귀국하게 됐다. 1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놀라운 은혜를 무수히 경험한 나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뼛속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귀국해서는 고신대 합창단을 결성,본격적으로 문화선교에 나서기 시작했다. 1990년 ‘페로스’(Pharos)라는 이름의 합창단이 아드리아해에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페로스 등대처럼 어두운 세상을 밝히 는 등대가 되기 위해 첫발을 내디뎠다. 페로스 합창단 구성원은 모두 성악과 학생들이었다. 신앙이 깊은 학생이 있는가 하면 어리고 부족한 학생들도 많았다. 조금 모자라면 어떤가. 주님 손에 붙들려만 있으면 될 것을. 우리 공연은 일반 합창단 공연과는 달랐다. 1·2부는 전통적인 찬양에 말씀과 간증,3부는 경배와 찬양,4부는 솔리스트가 나와 마무리 하는 식이었다. 지휘자라고 연단에 따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학생들과 함께 노래하고 객석에 앉아있는 이를 무대 위로 불러 중창을 시도하는 등 교감하는 공연이었다. 특히 해외에서 진가를 알아줬다. 1992년 제자들과 자선음악회를 갖기 위해 일본 도쿄,히로시마에 갔을 때 일이다. 처음 외국에 초청을 받아 나가게 된 만큼 부담도 컸 다. 일본에서 복음을 전파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노방전도라도 하면 관심이라도 보이지만 일본인들은 눈길조 차 주지 않는다. 그런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우리는 공연을 해야 했다. “우리가 일본 히로시마에서 공연하는 건 원수를 갚는 일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억압으로 찾아왔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히 로시마 원폭의 상처를 치유해보자.” 결연해진 우리는 눈물로 찬양했다. “이키 데 이리 슈 이키 데 이리 슈”(살아계신 주 살아계신 주) ‘살아 계신 주’를 일본어로 바꿔 찬양하면서 단원들은 눈물을 쏟았다. 냉담하기만 하던 관중도 이내 뜨거운 눈물을 보였다 . 비신자 일본인을 인도하는 한 목사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커다란 망치가 내 가슴을 내리치는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 ”고 일본인들의 말을 전했다. 기립박수 속에 공연은 끝났다. 미국으로 무대를 옮겼다. 이때는 사탄이 장난을 쳤다. 비용을 아끼려고 일본을 경유해서 가는 미국 항공기를 탔는데 연착되는 바람에 48시간이 지나서야 미국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공연장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공연시간이 30분이나 지난 뒤였다. 교회가 생긴 뒤 가 장 많은 사람이 모였다는 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짐도 풀지 못하고 목 한번 풀어보지 못한 채 구겨진 성가복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무대에 올라야 했다. 관객 도 주최측도 불쾌한 표정이 역력했다. 지친 학생들을 모아놓고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는 전쟁하러 무대에 올라가는거야. 처음 세 곡을 찬양하는 동안 사탄을 물리치지 못하면 20일간의 미국 공연은 영적 패배의 공연이 된다. 기도하고 올라가자.” 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하며 기도를 시작했는데 그만 목이 메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학생들이 울며 통성으로 기도를 이어갔다. 그런데 무대 위에 올라선 학생들이 너무나도 힘있게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닌가. 성령은 관중의 마음을 움직이며 우리가 높게 들어올린 손끝에 임하셨다. 페로스는 첫 단추를 무사히 끼우고는 10여년간 숱한 해외 순회공연을 통해 세계적인 찬양단으로 거듭났다.
영도 촌에서 태어난 내가 세계를 누비며 찬양사역을 하게 되리라고는 꿈도 못꿨다.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이거였구나 생각하 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학교 찬양단 ‘페로스’와 함께 ‘코스타’는 빼놓을 수 없는 내 신앙의 동력이요 실천의 장이다. 코스타는 유학생에게 복음을 전하 고 예수님의 제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기 위한 대회로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참여해보고 싶은 행사 가운데 하나다. 처음 코스타에 참여한 때는 1996년.호산나교회 최홍준 목사님의 도움으로 ‘파리 코스타’에서 사역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교수 라고 하지만 빈털터리였던 내가 교통비,여비,사례비 등을 일절 주지 않는 코스타에 참여하는 것은 사실 무리였다. 그런데 무슨 은혜 인지 최목사님이 나타나 돈 걱정안하고 마음껏 사역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이다. 파리 코스타에서 나는 뜨거운 말씀과 하나님을 사모하는 젊은 영혼에 감동받아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는 내 가슴을 부여 잡느라 혼이 났다.놀라운 은혜와 감동 속에서 시작한 코스타.그때부터 나의 유학생 사역은 시작됐다. 1998년.캐나다 토론토에서 ‘이혼의 조건’으로 코스타에 온 한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이혼하고 싶어했다. 부인과 장인이 동의를 안 해 별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장인이 ‘코스타에 한 번 다녀오면 이혼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어려 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코스타에 와서는 복음을 나누고 찬양하는 다른 또래들을 비웃었다. 집회도 참석하는 둥 마는 둥하고 빈둥거 리기만 했다. 마지못해 집회에 참석해 제일 뒷자리에서 방관하던 그가 그런데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선생님, 참 이상합 니다. 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아닌데 내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습니다.” 나는 그에게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해줬다. 지나간 과오를 반성하고 하나님 품에 안기는 순간이었다. 그는 나를 얼싸안고 내년엔 꼭 처가집 식구들과 함께 오겠노라고 약속했다.이듬해 그는 사랑하는 부인과 장인,장모와 함께 코스타에 참석했다. 한 번은 고형원 형제를 만났었다. 99년 밴쿠버 코스타 때였다.고형제는 늘 자신을 ‘예배사역자’로 불러 달라고 하는 데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찬양은 화려하진 않지만 늘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철저히 의지하는 찬양이기 때문이다. 고형제와 3박 4일을 같이 보내며 우 리는 서로에게 너무 귀한 악기라는 생각을 했다. 한 곡 한 곡에 ‘진액’을 쏟아내는 그의 헌신된 모습에서 나는 큰 감화를 받았다. 코스타에 참여하기도 올해로 9년째. 북미, 남미, 중국, 호주, 뉴질랜드, 유럽, 일본 세계 각국을 돌며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남미코스타에서 친분을 쌓은 하덕규 집사님 등 CCM 찬양 사역자들 뿐 아니라 홍정길(남서울은혜교회) 목사, 김동호(높은 뜻 숭의교회 ) 목사, 김원기(워싱턴헬로십교회) 목사, 곽수광(코스타 국제본부 총무) 목사님 등 훌륭한 목사님들과의 만남을 가졌다. 그들과의 만 남은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됐고 편협했던 내 시야를 넓 혀줬다. ‘하나님이 나를 세계로 부르시고 평신도 찬양사로 힘을 주시는구나. 하나님 감사합니다.’
난 뭘 드렸을까? 돌이켜보면 내가 받은 축복은 어마어마한데.
가난하고 보잘것 없던 나를 서울에 ‘유학’보내주시고 25세 나이에 교수를 만들어주시고 세계 곳곳에서 찬양사역자로 쓰신 하나님.
이탈리아와 미국에 가서 공부할 기회 주신 하나님. 그 은혜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기적은 간절히 구하고 하나님 이끄는 대로 나아갈 때 현실이 되어 나타난다. 그런 믿음을 심어주는 일. 그 일이 내가 한 평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다. 내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일,그리고 하나님의 제자가 되게 하는 일에 내 모든 것을 걸었다.
1년 365일이 모자랄 정도로 여기저기 불려다니느라 심한 피로에 시달렸을 때도 있었지만 한번도 하나님께 불평해본 일이 없다. 불평
하고 불만을 갖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익히 경험했기 때문이다.
난 요즘 어딜 가든 평신도의 힘을 새삼 강조하곤 한다. 교회에선 목사님이 설교하지만 세상에 나가서는 우리 평신도들이 설교한다고
얘기한다. 물론 목사님의 설교를 폄하하거나 누구나 마이크를 잡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아니다. 다만 평신도들도 얼마든지 생활속에
서 말씀으로 영적으로 배고픈 자들을 인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분이 함께 하시면서 달라진 삶,은혜 받은 일 등을 얘기하며 자연스
레 복음을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나는 강의나 집회 때 종종 요한복음 11장 말씀을 인용하곤 한다. 하나님은 시골구석 베다니에 사는 병든 자 나사로와 그의 가족을 구
하셨다. 그 누구도 모른다. 많이 가진 자,배부른 자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지 않았다. 슬픔과 고통,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하
고 감싸주셨다. 소외된 이웃,장애인들에게서 도리어 큰 은혜를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장애인 사역을 하면서 오히려 그들로부터 너무도 큰 은혜를 받았던 나. 그들을 돕기 위해서라곤 하지만 실은 내가 도움을 받았기 때
문에 나는 그들과의 시간이 즐겁고 고맙다. 10년 이상 부산 장애인전도협회를 꾸려가면서 재정적인 문제로 어려움도 많이 겪었지만
장애인을 섬기고 나눔을 실천하는 일만은 계속하고 싶다.
하나 빠뜨린 얘기. 교회가 크든 작든 우리는 교회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
내가 다니는 부산 사직동교회는 10여년전만 해도 성도 수가 700여명인 중형교회였으나 지금은 3500여명 가까이 늘어나 부산에서 고신
교단을 대표하는 교회로 성장했다. 그 가운데 나 역시 성장했다.
코흘리개 시절 부산 제4영도교회를 꾸준히 다니며 찬양했고 그 가운데 나도 모르던 성악가로의 재능을 발견했다. 대학에 가서는 서울
경향교회에 다니며 고요한 수면 같던 내 신앙에 파도가 일었고 열정적인 찬양사역자로서 거듭날 수 있었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라
면 한 교회를 꾸준히 나갈 것,그리고 교회를 진심으로 섬기며 함께 성장할 때 진정한 기쁨이 찾아온다는 걸 내 체험을 증거로 보여주
고 싶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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