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족(훈족)의 역사 | |
흉노족의 역사는 매우 장구하여 그 시작은 기원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험윤(玁狁)이란 이름으로 중국을 위협하였다. 이들의 활약은 시경(詩經)에 ‘우리가 집을 잃게 된 이유도, 우리가 잠시도 한가로이 쉴 수 없게 된 원인도 험윤 때문이다’란 글귀가 실릴 정도로 중국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흉노의 중심부는 현재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오르혼-셀렝가 강변과 고대 투르크인들이 신성한 지역으로 여기던 외투겐 평원의 카라품 사막과 오르도스 지역 사이였다.기원전 4세기가 되자, 흉노는 역사에 그 이름이 강렬하게 부각된다. 흉노는 연(燕)을 크게 위협하였고, 특히 진(秦)의 중심부와 인접한 관계로 흉노와 진은 번번이 충돌하였다. 중원의 왕조들은 제각기 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공을 막아보려 했으나 그들 간의 내전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기원전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549년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자 흉노와 중원간의 관계는 급변하였다. 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 흉노를 공격했고 이 공세에 밀린 흉노는 오르도스를 버리고 고비 사막 이북으로 일시 후퇴하였다. 흉노를 몰아낸 시황제는 그들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전국 시대 각 나라들이 쌓았던 장성들을 새로이 보수하여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였다.그러나 시황제의 사후, 진승과 오광의 난을 필두로 하여 중국 각지는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때문에 흉노 문제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당시 흉노의 지배자인 두만선우(頭曼單于: 선우의 정식 명칭은 텡그리 쿠투 선우. 하늘의 아들 선우란 뜻)는 후궁의 아들을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장자인 모돈(冒頓: 묵특, 또는 묵돌이라고도 표기함. 몽골식 원명은 바토르)이 반발하였다. 부자간의 권력 다툼에서 두만은 모돈에게 살해되고 모돈은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모돈 선우는 국가를 정비하고 내정을 튼튼히 한 다음, 주변 부족들의 정복에 나서 동몽골과 만주 서부에서 강국으로 군림하던 동호(東胡)를 멸망시키고 예니세이 강과 바이칼 호 주변에 거주하던 정령족(丁零族)을 정복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천산 산맥과 감숙 지방에 할거하던 월지족(月氏族)을 격파해 멀리 중앙아시아로 쫓아내었다. 남침도 병행하여 시황제에게 상실하였던 하남의 오르도스 지방도 회복하고, 중국 북부의 도시들도 탈취하였다. 이때 흉노의 강병은 30만이 넘었으며 당시 중국은 항우와 유방의 내전으로 인해 흉노에 맞서 싸울 수 없었다.기원전 201~199년 사이에 벌어진 모돈 선우와 한고조 유방 간의 전쟁은 모돈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 특히 기원전 200년의 백등산 전투에서 모돈 선우는 흉노 대군과 항복한 한의 군대까지 합쳐 무려 40만 대군으로 한고조의 30만 대군을 7일 간이나 포위하였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한군은 8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결국 한고조는 모돈 선우에게 매년 조공으로 곡물과 비단을 바치고 한의 공주를 모돈 선우에게 출가시킨다는 실로 굴욕적인 조건으로 항복하였다.모돈 선우의 정복 전쟁은 더욱 확장되어 투르키스탄 북부의 월지와 오손을 복속시킴으로써 아시아 초원 지대의 거의 모든 민족이 흉노에 통일되었다. 흉노 제국의 경계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 북으로 바이칼 호와 이르티시 강, 서로는 아랄 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와 티벳 고원, 그리고 카라코람 산맥을 잇는 거대한 영토를 이루게 되었다.60년 간 계속된 흉노와 한의 종속 관계는 한무제의 즉위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기원전 133년, 한무제는 마읍에 10만의 병사를 매복시켜 흉노의 군신 선우를 유인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어 두 대국은 곧바로 전쟁에 돌입했다.흉노와 한의 전쟁은 43년간이나 이어졌다. 하남지전(河南之戰), 하서지전(河西之戰), 막남지전(漠南之戰), 막북지전(漠北之戰)이란 명칭까지 붙여지며 곳곳에서 벌어지는 극한 양상의 전쟁은 결국 양자의 파멸로 끝나고 말았다. 경제와 문제가 물려준 한의 국력은 대흉노전을 위해 모두 소모되었으며, 한무제는 군비의 각출에 혈안이 되었다. 이때 소금이나 쇠로 된 쟁기, 밥그릇에까지 세금을 매기려는 극악무도한 재정수탈정책이 등장했다. 이 염철론은 이후 국가전매제도의 효시 및 경전이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자 왠만한 범죄도 돈만 내면 해결될 정도로 한의 사회적 기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죽을 당시, 한의 인구는 초기의 4천만에서 2천만으로 감소해 있었다. 결국 무리한 대흉노전으로 인해 한은 멸망의 길을 밟게 되었다.흉노의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한과의 쉴 세 없는 전쟁으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고 20만 명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한으로 끌려갔으며 흉노의 돈줄이 되어주던 중앙아시아의 도시 국가들이 한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흉노의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흉노의 약점을 본 복속민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흉노에게 반란을 일으킨 복속민들은 바이칼호 주변의 정령족, 시라무렌 강변의 선비(흉노에게 멸망된 동호의 후손), 실크로드 북쪽의 오손 등이었다.흉노제국에 불어닥친 불운은 멈출 줄을 몰랐다. 오손을 정벌하러 간 원정군은 엄청난 눈보라에 휩싸여 전투도 하기 전에 스스로 자멸하는 낭패를 보았고, 더욱이 기원전 68년에는 최악의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백성과 가축 중 6~7할이 사망하는 극한상황까지 발생했다. 주변 속국들의 이탈과 거듭되는 자연 재해는 점차 흉노의 내부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이 내부갈등은 기원전 60년 허려권거 선우의 죽음을 기점으로 도기, 호게, 차려, 오차, 호한야 등 5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내란 상태로 확대되어 끝없는 혼란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56년에 네 선우가 차례로 패망하고 호한야 선우가 겨우 혼돈을 수습하였다.그러나 이번에는 도기의 사촌 동생인 서쪽의 휴순왕이 자립하여 규진 선우가 되고, 호한야의 형인 동쪽의 좌현왕 호도오사가 독립하여 질지 선우라 칭했다. 기원전 54년부터는 질지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규진을 격파한 뒤, 호한야를 공격하였다. 질지의 공격을 받은 호한야는 복속민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도망가 한의 선제에게 항복하고 그의 신하가 되었다. 그 대가로 호한야는 중국 북서쪽 오원군의 변경 지대를 통치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55년경 흉노의 세력은 완전히 양분되어 더욱 약화되었고, 중국에 대한 공격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이때 질지의 돌파구는 서쪽이었다. 우선 호한야를 물리치고 선우 왕정을 차지한 질지는, 기원전 51년 서진을 계속하여 실크로드의 오갈과 신장 위구르 지방의 견곤을 합병하였다. 이어 오손의 침공 위협에 시달리던 추강과 카자흐스탄 남부의 강거를 복속시킨 뒤, 오손을 공략하고 아랄 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41년, 새로운 흉노 제국의 수도를 추강과 탈라스 강변 사이의 견곤에 건설하고, 성을 쌓아 방어에 임했다. 이로써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인도, 동서 유럽을 잇는 투르키스탄 지역에 투르크계 인종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페르가나, 박트리아 지역까지 흉노에 속하였고, 질지는 남서 경계가 멀리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연결되는 파르티아 왕국까지 공략 준비를 하였다.그러나 질지 선우의 웅대한 꿈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광대한 정복지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 체제가 채 정비되기 전에, 한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강거와 오손의 지배권을 탈취한 한은 기원전 36년, 강거에 있던 질지 선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흉노와 다른 복속 국가에서 차출한 한의 군사 7만은 탈라스 강변의 흉노 도성을 에워싸고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결국 도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질지를 비롯한 흉노 지배층 1518인이 살해되었고, 다른 흉노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질지 선우의 죽음으로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분산되었던 흉노족은, 더욱 서진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자리를 잡고 소그디아나 동부와 드네프르 강변, 아랄 해 동부 초원 지대에서 국가를 형성하여 주변 유목민들을 병합하고, 서기 1세기에서 2세기 후반까지 동쪽에서 이동해온 북흉노 무리들을 흡수함으로써 강대한 세력을 이루었다.약 2세기 동안 주변 국가들과 큰 마찰 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흉노족은 자연 기후의 변화와 생태계의 고갈, 그리고 350년 경 북중국에서 쫓겨나 이동해온 동족 우아르 흉노족(에프탈 족)의 압력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더 서진해 유럽으로 들어갔다.유럽에 훈족이 처음 나타난 시기는 서기 374년으로 이때부터 흉노족은 훈족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훈족은 374년, 사령관 발라미르의 인솔하에 남러시아와 카프카스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치던 알란족을 정복하였고, 같은 해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을 공격하였다. 당시 동고트 국왕이던 아르마나리크는 자결하였고 훈족은 후리문트를 왕으로 임명하여 동고트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써 동고트족은 80년 동안 훈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동아시아의 최강대국 한을 위협하던 훈족의 놀라운 기동성과 뛰어난 기마 전술은 서쪽의 유럽 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훈족은 드네프르 강에서 서고트 군을 격퇴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 아타나리크는 375년에 잔존 세력과 함께 로마 제국에 보호를 구하여 돈 강을 건너 지금의 불가리아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훈족의 계속된 공격과 막강한 군사력은 당시 어떠한 게르만계 민족도 대항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무수한 게르만계 민족들은 공포심을 집어먹고 자기들의 영토에서 도망쳐 로마 제국 영내로 이주해 왔으니 이것이 역사상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 불린 민족 대이동의 효시가 된 것이다.이보다 먼저 로마 제국은 사실상 분열되어 있었고, 서고트족의 침입이 이를 더욱 촉진시켜 395년에 로마 제국은 드디어 동서로 나뉘어졌다. 훈족의 등장과 동유럽에서의 급격한 정복 전쟁은 유럽인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라틴 어나 그리스 어 문헌에 나타나는 훈족에 대한 과장된 묘사와 적개심이 이를 잘 반영해 준다.진격을 거듭한 훈족은 정복지에서 차출된 고트족, 알란족, 게르만계의 타이팔리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앞세우고 378년 봄에 투나 강을 건너 로마군의 저항 없이 트라키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영토에 첫발은 내디딘 훈족의 예비 부대는 정찰 전위 부대에 불과하였다. 같은 시기 훈의 또다른 부대는 헝가리 초원 지대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고 있었다.이즈음 훈족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 동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서서히 로마 영내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리아 경작지에 거주하던 마르코만니족과 쿠아드족, 이란계 유목민인 사르마티아족, 트란실바니아의 서고트족들이 각각 다른 경로로 381년 로마 영내로 침입해 들어갔다. 다른 한편에서는 게르만계 종족들과 이란계 바쉬타르나족이 헝가리 서부에서 알프스 산맥을 따라 남하해와 이탈리아를 위협하였다.훈족이 본격적인 로마 침공을 시작한 것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고 동서 로마가 분열되는 395년 봄이었다. 두 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한 훈족은 발칸 반도에서 트라키아 쪽으로, 또 다른 주력 부대는 카프카스에서 아나톨리아 고원 쪽으로 동로마를 압박해 들어갔다. 특히 아나톨리아원정은 돈 강 유역에 본부를 둔 훈 제국의 동부 군단이 주력이었으며 바시크와 쿠르시크라는 두 사령관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원정은 군대의 규모나 주변국의 정세 재편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게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훈족의 정예 부대는 에르주룸 지역에서 출발하여 카라수와 유프라테스 계곡을 지나 멜리테네(현재의 말라티아)와 킬리키아(현재의 추쿠로바)까지 진격했다. 그 곳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에데사(현 우르파)와 안타키아 성채를 한동안 점령한 후 시리아로 남하하여 티로스(현 수르)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훈의 군대는 395년 가을 다시 북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중앙 아나톨리아에 도착하여 카이세리와 앙카라 평원의 카파도키아와 갈라티아를 유린하고, 그 곳에서 아제르바이잔-바쿠의 길을 따라 북쪽의 본거지로 귀환했다. 398년에도 훈족의 군대가 재차 아나톨리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 1세는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훈족의 군대가 자국 영토를 유린하는 것을 방관해야만 했다.급속히 진행된 훈족의 아나톨리아 원정과 그에 따른 파괴와 살상은, 특히 그 지역의 동방 기독교 교회 성직자들에 의해 집필된 훈족에 대한 부정적인 설화와 무용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한편, 4백년 경 서부 진영에서 훈족의 원정은 사령관 울딘이 지휘하고 있었다. 발라미르의 자손인 울딘은 후일 아틸라의 시대까지 지속되는 훈족의 대외 정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의 정책의 기본은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면서 서로마와는 친선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서 로마 관계를 차단시켜 훈에 위협적인 정치 세력의 등장을 막고, 보다 강력한 동로마를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제 1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또, 서로마를 협공하는 주변 민족들이 훈과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훈은 서로마와 연합하여 그들을 공략하고자 했다.동유럽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민족들을 압박하던 울딘이 투나 강변에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제 2의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반달족과 훈족의 공격을 받아 서진한 서고트가 이탈리아 변경으로 몰려들었다. 반달족 출신 로마 장군 스틸리코는 402년 4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군을 힘겹게 패퇴시킴으로써 로마를 방어했으나, 계속되는 주변 민족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마침내 동고트의 라다가이수스 장군은 훈족에 쫓겨난 반달, 수에비, 쿠아드, 부르군트 등 여러 게르만계 민족들을 연합하여 로마에 대한 공략을 개시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이 유린당하고, 스틸리코 장군마저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자 훈족이 개입하였다.로마군과 울딘이 지휘하는 훈의 군대가 406년 가을 플로렌스 남부의 파에술레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라다가이수스를 처형함으로써 서로마는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이로써 훈족의 위세가 온 유럽에 진동하였다.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 사르마티아족들은 훈족의 위협을 피해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훈의 서부 유럽 경영은 이제 정치적, 군사적 장애 요소가 제거된 상태여서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울딘은 훈의 서부 지역을 통치한 왕이었다. 그는 404~405년, 그리고 409년에 투나 강을 건너 강 남부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비잔틴에 대한 훈의 위협을 계속하였다. 또 그리스 문헌에 따르면 울딘은 훈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파견된 트라키아 총독에게 태양이 뜨는 곳에서 태양이 지는 곳까지 모든 영토를 정복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훈 제국의 힘을 과시하였다.410넌 울딘의 사망으로 훈 제국의 통치는 카라톤에 위임되었다. 그는 412년에서 422년까지 약 10년 간 훈의 동부 지역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422년은 훈 제국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같은 해였다. 이 해에 훈 왕가의 네 형제인 루가, 문주크, 아이바르스, 옥타르가 서로 권력을 두고 쟁패하여 루가가 왕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문주크가 사망함으로써 다른 두 형제는 각각 지역의 엘리그(Elig, 번왕)에 봉해졌다.울딘의 정책을 계승한 루가는, 422년 비잔틴이 훈의 내분과 복속 민족의 반란을 획책하며 발칸 원정을 시도하자, 비잔틴군을 패퇴시켜 연간 금 350 리브레(1Libre= 약 450g)의 공납을 부과했다. 423년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가 네 살의 나이로 등극한 서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에 대항해 로마 침공을 개시했다. 동로마의 육해군이 이탈리아로 진격해 오자 서로마는 훈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루가는 6만의 기병을 이끌고 직접 이탈리아 전선에 참가하였다. 이 때, 로마 원로원은 어린 황제를 폐하고 요하네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당시 35세이던 서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는 서로마에서의 전쟁을 피해 재빨리 루가의 진영에 가담했다. 훈의 침공에 비잔틴 군대는 승산 없는 전쟁을 회피하고 퇴각함으로써, 로마의 폐허 대신 과중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아에티우스는 432년에도 아프리카의 반달 왕 게이세릭과 전쟁을 벌인 그의 정적 보니파시우스의 공격을 피해 훈 제국에 망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루가의 강력한 통치력과 함께 훈 제국이 로마의 내정과 대외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434년 봄, 루가는 사망하였고 아틸라와 블레다가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훈 제국의 왕으로 등극할 당시 40세였던 아틸라는, 부친인 문주크가 일찍 사망함으로써 숙부인 루가에게 양육되었다. 그와 함께 수많은 정복 전쟁에 참가하면서 주변의 여러 종족과 국가에 대한 정황을 파악할 기회를 가졌으며, 통치자로서의 덕목과 국가 경영에 관한 경륜을 쌓을 수 있었다.결국 아틸라는 그의 형 블레다와 함께 훈 제국의 통치권을 계승했다. 블레다는 낭만적이고 예술을 즐겼고, 군의 작전과 대외 관계 수립 등 통치권은 아틸라에 의해 행사되었다. 숙부인 아이바르스와 옥타르는 각각 동부 지역과 서부 지역의 번왕으로써 전왕 루가 시대의 지위를 계속 누렸다. 블레다는 아틸라의 협조자로서 11년 간 제국의 경영에 참가하다 445년경에 사망하였는데, 세간에는 아틸라의 암살이라는 설이 떠돌았다.434년 봄,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파견된 비잔틴 사절단이 훈 국경에 도착했을 때, 왕인 루가는 사망했으므로 아틸라가 그들을 맞았다. 아틸라는 비잔틴 영토의 마르구스 성채 맞은편에 있는 투나 북안의 콘스탄티아 성벽에서 비잔틴 사절을 말 위에서 사절단을 맞으며, 평화를 위한 훈의 요구 조건을 단호하게 전달하였다. 첫째, 비잔틴은 훈의 복속민들과의 접촉과 연대를 일체 중단할 것. 둘째, 훈에서 비잔틴으로 도망간 자들을 즉각 돌려보낼 것. 셋째, 양국의 무역 거래는 지정된 국경 마을에서만 행할 것. 넷째, 비잔틴의 훈에 대한 연간 공납액을 2배로 올려 금 700리브레 (약 315kg)으로 할 것 등이다. 이것은 콘스탄티아 평화 조약이라 불리웠다.테오도시우스 2세는 조건 없이 평화 협정을 수락했으며, 협정 이행의 첫 단계로 도망자들을 훈에 인계하였다. 아틸라는 그들을 비잔틴 영내에 있는 트라키아의 카르수스에서 처형함으로써, 비잔틴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게 그의 권위와 위세를 각인시켰다.그 후 아틸라는 제국 동부 지역을 원정하여, 435년 볼가 강변의 샤라구르 족의 반란을 분쇄하였다. 이즈음 동부 지역 중심지는 드네프르 강에, 서부 지역 중심지는 투나 지역에 있었다.훈 제국에 편입된 영토는 발칸 반도와 카프카스에서 발트 해안까지, 우랄 산맥에서 알프스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포괄하였으며, 예속된 종족의 수는 45개에 이르렀다. 복속민들은 단지 정치적 통합체로서 훈의 일원이었을 뿐 고유의 언어와 풍속을 유지하였으며, 종족이나 민족, 국가 단위로 동족의 부족장이나 총독, 왕의 통치를 받았다. 5세기 중엽까지 훈 제국 내에서는 비교적 정치적 안정이 지속되었다.이 때,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민족이 서로마 영내를 지나가며 유린과 약탈을 일삼았고, 도탄에 빠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곤경에 처했다. 이에 로마는 재차 아에티우스를 파견해 훈에 원병을 요청했다. 2년간에 걸친 농민 반란은 아에티우스와 아틸라가 보낸 원병의 도움으로 겨우 반란 주모자를 처형하고 소란을 평정하였다.그러나 이번에는 부르군트족의 군디카르 왕이 벨기에 지역을 침공하여 훈의 서부 지역을 위협하였다. 훈의 서부 지역 왕인 옥타르의 지휘 아래 네케르 강변에서 벌어진 훈과 부르군트족간의 대전투에서 군디카르 왕을 포함하여 2만 명의 부르군트 병사가 전멸함으로써 훈의 군대가 승리하였다. 이 전쟁은 중세 독일의 유명한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제가 되었다. 게르만족의 주력이 훈에 의해 패퇴된 전투 결과, 부르군트, 바야부르, 프랑크, 롱고바르드족 같은 많은 민족들이 새롭게 훈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440년 이후 아틸라의 비잔틴 공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콘스탄티아 협정을 철저히 준수하지 않고 훈으로부터의 도망자 송환을 거부한 것에 연유하였다. 테오도시우스는 훈의 포로 중 고트족 출신 아르네기실후스를 송환하지 않고 오히려 장군으로 임명해 훈 접경의 트라키아에 파견함으로써 훈을 자극하였다. 또, 국경 시장에서의 거래 원칙도 그리스 상인들에 의해 종종 위반되었다. 특히 마르고스 주교가 콘스탄티아 근교의 있는 훈의 무덤을 도굴하는 사건이 발생해 비잔틴에 대한 훈족의 악감정은 극에 달했다.이 때,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왕 게이세릭은 지중해 진출을 방해하는 비잔틴에 대항해 아틸라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틸라가 지휘하는 훈 군대는 마르고스의 점령을 시작으로 1차 발칸 원정에 나서 지금의 베오그라드인 싱기두눔과 나이수스를 점령했으며 트라키아에서 서로마의 중재로 진격을 멈추고 비잔틴과 다시 협정을 맺었다.서로마의 실권자 아에티우스는 테오도시우스의 평화 협정 준수를 확실히 약속하고, 그에 대한 보장으로 자신의 아들 카르필리오를 인질로 훈 궁정에 보냈다. 아에티우스의 제안을 수락한 아틸라는 투나 강변에 산재한 비잔틴 성채들을 접수하고, 훈에 대한 공격 거점이 될 수 있는 발칸 반도의 요새들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445년, 형 블레다의 사망으로 아틸라는 명실공히 권력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서아시아에서 중부 유럽에 이르는 지역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동서 로마를 비롯해 그에 대항할 세력은 없었다.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훈과의 협정을 또다시 어기자 아틸라는 447년, 제 2차 발칸 원정을 시도했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의 대군은 두 방향에서 비잔틴 영내를 공격해 사르디카, 필리포폴리스, 마르키아노폴리스, 아르카디오폴리스 등을 함락시키고 각 도시들을 약탈했다. 훈군은 계속해서 테살리아의 테르모필레까지 진군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 위해 아티라(현 이스탄불 외곽 부육 체크메제)에 포진하였다.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테오도시우스는 정무관 아나톨리우스를 아틸라에게 보내 휴전협상을 제의하였다. ‘아나톨리우스 협정’으로 알려진 이 휴전 조건은 투나 남쪽 5일 거리 공간에 비잔틴 군대를 주둔시키지 말 것이며, 양국 무역 시장은 훈의 변경 도시인 나이수스에 설치할 것, 비잔틴은 전쟁 배상금으로 훈에게 금 6천 리브레(약 2천 7백kg)를 지불하고, 그동안 바쳐오던 연공을 세 배로 늘려 금 2천 1백 리브레(약 945kg)으로 할 것 등을 명시하고 있다.비잔틴의 재정 상태로는 이렇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연공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는 아틸라 암살 음모를 획책하였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다.그러나 이 때 아틸라의 관심은 동로마(비잔틴)보다는 내분에 휩싸여 약화되고 있는 서로마에 더 쏠려 있었다. 서로마에 대한 아틸라의 군사적 원조는 439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서로마는 훈에 대한 공납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령관 아에티우스를 중심으로 훈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이에 아틸라는 신중하게 접근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매진했다. 448년, 2년간 계속된 군비 증강과 정치적 안정이 일단락 되자, 드디어 서로마에 대한 외교적 공세를 취했다. 우선 아틸라는 발렌티아누스 3세(425~455)황제의 여동생이자 한때 자신과의 혼인이 결정되어 약혼 반지를 보낸 바 있는 호노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결혼 선물의 지참금으로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을 달라고 요구했다.발렌티아누스와 아에티우스가 아틸라의 요구를 거절하자 아틸라는 이를 서로마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451년 초, 헝가리 중앙에서 서쪽으로 원정을 개시한 훈군은 8~10만의 규모였다. 훈군과 동일한 규모의 게르만과 슬라브 복속민 군대가 합류하여 그 규모가 20여 만으로 불어났다. 20여 만의 훈 연합군이 451년 3월 중순경 세 방향에서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에 진입할 무렵, 이탈리아에서도 아에티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훈에 적대적인 부르군트와 서고트, 프랑크족을 규합하여 훈과 동일한 규모의 대군을 형성하여 갈리아를 지나 북상하였다.마침내 훈군이 4월 7일 메티스와 두로코토룸을 정복하고 파리 근교의 아우엘리아눔(현 오를레앙)에서 그 곳에 진주하던 아에티우스와 맞부딪쳤다. 그러나 서로마와 훈, 서방 세계의 2대 강국의 결전은 451년 6월 20일 카탈라우눔에서 벌어졌다. 하루 종일 계속된 치열한 접전 끝에, 쌍방 모두 16만 5천명이란 전사자를 남기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났다.유럽의 역사가들은 19세기 이래 로마군이 궤멸되지 않고 훈이 퇴각한 이 전투를 로마의 승리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 결과, 전쟁 당일 밤 로마군의 지휘 계통이 붕괴되어 아에티우스 자신이 훈 진영에 포위, 고립되었다가 겨우 탈출한 사실이 밝혀졌고, 로마군에 소속되어있던 프랑크군과 테오도리크 왕이 전사한 서고트군도 극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결과적으로 훈의 서로마 침공은 로마 제국의 병참 기지 역할을 했던 갈리아를 폐허로 만들어 서로마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해 버렸다. 이 전쟁 후 명장 아에티우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도 전쟁의 승패와 관련하여 매우 시사적이다.아틸라의 훈군은 갈리아를 떠난 지 20여 일만에 수도인 판노니아의 세게드로 귀환했다. 그리고 1년 후에 또다시 대규모의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교황 레오 1세의 시종관이었던 프로스페르티로의 기록에 의하면, 무저항의 진격을 계속한 아틸라의 공세에 방어력을 상실한 아에티우스는 황제 발렌티아누스에게 이탈리아를 떠나 피신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452년 봄, 아틸라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베네치아 평원에 도착했다. 아퀼레이아 성을 함락시키고 또 다시 남쪽으로 진군하여 아에밀리아 지역을 정복하고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 근교에 이르렀다. 공포에 질린 민중의 소요와 적의 공격에 다급해진 서로마 황실은 교황과 원로원의 화평 건의를 받아들여 긴급히 사절단을 파견했다.교황 레오 1세로 이루어진 사절단은 452년 7월 중순경 민시오강과 포강이 만나는 강변에 진주해 있던 아틸라를 방문해 협상을 했다. 교황은 서로마 황제와 기독교 세계를 대표하여 로마의 파괴를 자제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아틸라는 5년 전 콘스탄티노플 근교까지 진격하여 비잔틴 수도 점령을 눈앞에 두고도 철수했던 전례를 상기시키면서, 문화 보호 차원에서 로마를 초토화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아틸라는 로마 교황의 방문을 이미 서로마가 비잔틴 제국처럼 자신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는 프리스쿠스가 448년 훈의 수도를 방문한 서로마 사신 로물루스의 전언을 기록한 대목에서 명백히 드러나는데, 아틸라는 다음의 공격 대상이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임을 밝힘으로써 동서 로마가 이미 자신의 통치하에 있음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계 제국은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아틸라는 게르만 제후의 딸인 에리카(일디코, 힐디코)와 결혼식을 치루던 날 밤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아틸라의 명성과 그에 대한 두려움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갈리아, 게르만, 영국,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를 소재로 한 수많은 소설과 전설, 그림, 연극, 오페라, 조각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후반 새로운 아틸라 연구는 그가 중세의 폐쇄된 기독교 사회에 의해 철저한 야만인, 약탈자로 폄하되고 있는 것에 반하여 훌륭한 덕목과 통치력, 뛰어난 국제 감각과 탁월한 지휘관의 재능을 가졌던 당대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아틸라의 사후 훈 제국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급격히 약화되었다. 아틸라의 아들인 엘락 왕자는 반란을 일으킨 게르만 연합군과 판노니아에서 벌인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뎅기지크는 비잔틴 제국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르네크는 훈족이 유럽에 정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쟁에 지친 훈족을 이끌고 흑해 서안으로 이주해갔다.이르네크의 영도하에 훈족은 당시 남러시아 평원에서 모습을 보이다가, 발칸 반도와 중부 유럽에 정착하여 국가를 건설한 불가르족과 마자르족(헝가리)족과 합류하여 그들에게 많은 정치, 군사, 문화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때문에 마자르인들을 인솔하여 헝가리 땅에 정착해 왕국을 세운 족장 아라파드는 자신을 아틸라의 후손이라 주장했으며 현재도 헝가리 인들은 아틸라를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참조문헌: 터키사 <대한교과서 주식회사>유라시아 대륙에 피어난 야망의 바람 <민속원>훈족의 왕 아틸라 <가람기획>
훈족의 왕 &정복왕 아틸라
힐데브란트의 노래, 니벨룽겐의 노래 등 게르만 신화를 장식하는 대정복자 아틸라. 4세기 초 집권해 훈족을 통합하고 유럽을 침공, 게르만 대이동을 촉발함으로써 마침내 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그의 대역사가 펼쳐진다.아버지를 잃고 부족장인 백부 밑에서 자란 아틸라는 세계 정복의 꿈을 품고 성장, 로마의 마지막 등불 아에티우스 장군과 대립한다. 백부를 살해한 형을 제거한 뒤 권좌에 오른 그는 형에게 빼앗긴 정복 노예 엔카라와의 사랑을 이루고 유민 민족다운 기동력과 궁술, 기마술로 로마를 위협한다. 저항 세력에 잔인하되 피정복민과 여성을 예우하는 전통적 정복 방식은 그에게 곧 대제국을 안겨 주지만, 그는 해산 중 사망한 엔카라를 잊지 못했다.아에티우스가 이끄는 서로마 군과 운명적 격전을 치른아틸라는 엔카라를 닮은 아에티우스의 첩자에게 독살당하고, 로마의 레오 1세는 더 이상 쓸모가 없게된 명장 아에티우스를 권모술수로 죽이고, 결국 자멸하여 암흑시대로 접어 들게 된다.
훈족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흉노(匈奴)와도 관계가 있다고 보나, 한(漢)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간 흉노(이주민들중 가장큰 비율을 차지함)의 일부가 곧 훈족이라는 설도 있고, 중앙 아시아(인도, 페르시아 포함) 몽고 지역의 유목민으로 3세기에 기후 변화로 인해 서쪽으로 이주해 가기 시작했더는 주장도 있다. 기마 민족이었던 이들은 창과 활을 사용한 기마 전투에 매우 능했고, 가족과 함께 많은 무리의 말과 가축을 이끌고 새로운 목초지를 찾아 이동했다. 이들은 잘 훈련된 막강한 병력을 가지고 거침없이 이동해 갔고 이주하는 경로에 있던 다른 종족들도 이주에 합류하여 훈족의 인구 수는 엄청나게 불어나게 되었다.동유럽의 헝가리 평야에 정착하여 티소강 유역의 세게드에 본거지를 만든 후, 말과 가축에게 먹이를 주기 위한 넓은 목초지가 필요했던 훈족은 동맹이나 점령을 통하여 러시아의 우랄 산맥과 프랑스의 론강에 이르는 지역까지 세력을 넓혀갔다.뛰어난 기마 민족이었던 훈족은 아주 어릴 때부터 훈련을 받았으며, 굽은 창을 가지고 싸우는 기사의 공격력을 높이기 위한 등자를 만들어 냈다는 설도 있다. 진격 속도를 높이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말을 갈아 타며 이동하였기 때문에 적군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훈족의 또 다른 강점은 서양에서 사용된 어떠한 무기 보다 뛰어난 합성궁을 사용했다는 점이었으며, 등자 위에 서서 네 방향으로 자유롭게 화살을 쏠 수 있었다. 전술로는 기습 공격과 무차별 살상을 주로 사용하였고, 경기병 부대였던 훈족은 군대를 단결시킬 수 있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다.4세기에는 유럽으로 이동하여, 375년 흑해 북안(黑海北岸)의 동(東)고트족을 무찔러 그 대부분을 지배하에 두고, 이어서 다뉴브강 하류의 서(西)고트족에 육박했다. 서고트족의 일부는 훈족의 압박을 피하여 동(東)로마에 이주하였는데, 이것을 게르만 민족 대이동의 발단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4세기 말의 루아왕 때에는 오늘날의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배했고, 다음의 아틸라왕 때에는 전성기를 이루어, 주변의 게르만 제부족을 복속시켜 흑해 북안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일대제국(一大帝國)을 수립했으나, 대제국으로서의 내부적 기틀이 잡혀 있지 않았다.
아틸라
훈족의 전성기는 433년에 왕위에 오른 아틸라의 집권기로, 남쪽의 러시아와 페르시아 지역까지 침략했고, 이후 발칸 지역에 관심을 돌려 두 번의 기습으로 결국 이 지역을 차지했다. 5세기 전반의 민족대이동기에 지금의 헝가리인 트란실바니아를 본거(本據)로 하여 주변의 게르만 부족과 동고트족을 굴복시켜 동쪽은 카스피해에서 서쪽은 라인강에 이르는 지역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동로마를 위협하여 조공(朝貢)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450년에는 10만여명의 전사를 이끌고 라인강 북부의 마인츠를 지나 서로마 제국을 점령했고, 451년에는 오를레앙의 요새를 공성용 트레뷰트 투석기를 이용하여 함락 시켰다. 또한 그의 군대는 160킬로미터 앞에서부터 진격하는 방식으로 현재의 북부 프랑스 지역에 있는 대부분의 도시를 약탈했다.이에 로마의 아이티우스 장군은 갈리아-로마(서고트 및 프랑크포함) 연합군을 일으켜 오를레앙을 점령하고 있던 아틸라를 향해 진격했으며, 철군하던 아틸라는 마우리아쿠스(샬롱 쉬르마른의 남쪽)의 벌판에서 연합군과의 전투(카탈라우눔 전투)에서 패하여 서유럽의 정복을 단념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샬롱 전투는 만약 아틸라가 승리했다면 서유럽의 기독교가 붕괴되고 그 지역을 아시아인들이 지배할 수도 있었던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전투였다.)이듬해 아틸라는 다시 북이탈리아를 침략하였고, 그의 침략을 피해 난민들은 해안 근처의 섬으로 도주하여 베니스라는 도시를 건설했다. 당시 로마군은 병력이 약화되었고, 주군이 갈리아에 남아 있었지만, 훈족과의 잦은 전투, 질병, 기근으로 인해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로마의 가까이 까지 육박해 갔던 아틸라는 레오 1세와의 밀담을 나눈 뒤, 설득을 받아들여 이탈리아에서 물러나기로 합의했다.453년 재차 동로마 침입을 계획하였으나, 아이티우스 장군이 보낸 첩자 여인과의 혼인 후 독살 당하게 된다. 훈제국은 아틸라가 사망한 후 그를 이어갈 강력한 통치자가 나타나지 않았고, 지배를 받고 있던 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으며 통치권을 놓고 내분이 일어났다. 무적의 대제국(大帝國)도 급격히 분열 ·쇠퇴하여 훈족은 결국 아바르족과 같은 새로운 침략자의 물결 속에 다뉴브강 하류지방으로 후퇴, 타민족과 혼혈 ·동화되어 소멸되었다.그의 이름은 "니벨룽겐의 노래"등의 전승문학(傳承文學)에는 에첼·아틀리 등으로 나타나며, 레오 1세와의 약속대로 아틸라를 제거한 로마의 명장 아이티우스는 레오 1세에게 이 소식을 기쁘게 전했지만, 더 이상 그가 필요 없다고 생각한 레오 1세는 아이티우스를 도리어 제거해 버리게 된다.결국, 로마를 떠 받들어 오던 명장 아이티우스가 죽임을 당하자, 로마제국은 휘청거리며 붕괴되기 시작하였고, 대부분의 유럽은 더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시대로 퇴보하여 암흑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즉위
1206년 봄 테무진은 오논 강변의 초원에서 거대한 집회(쿠릴타이)를 열었다. 황금씨족의 수호영령인 술데의 상징으로 아홉 개의 야크 꼬리를 가진 흰색 깃발 툭을 세우고 테무진은 지고의 칸(카간)으로 추대되었다. 카간은 5세기 유연이 처음으로 사용한 군장의 칭호로서 몽골고원의 군주들이 이를 사용하였으나 9세기 위구르의 몰락 이후 이 이름을 사용할 만한 계승자가 없었다. 대 샤먼인 코코추는 영원한 푸른 하늘이 모든 몽골과 투르크인의 카간, 칭기스칸으로 테무진을 선택했다고 선언하였다. 샤머니즘에서 텡그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신이었으며 칭기스는 땅을 다스리는 신이었다. "하늘에는 영원한 하늘의 신이 있고 땅에는 유일한 칭기스칸이 있다는 하늘의 소리가 있었다. 이 말을 말이 달릴 수 있는 곳까지, 배가 닿는 곳까지, 사자가 닿는 곳까지, 편지가 닿는 곳까지, 연락이 닿는 곳까지 들려주어라. 이 말을 들려주어도 따르지 않는 자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게 되고, 손이 있어도 잡을 수 없게되고, 다리가 있어도 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하늘의 명령이다."코코추가 칭기스칸의 권력에 종교적 권위를 주자 몽골인들은 칭기스칸이 세계정복의 천명을 받았다고 굳게 믿었다. 이어서 칭기스칸은 훈시를 하였다. "너희들은 타타르, 케레이트, 메르키트, 오이라트, 투르크등 여러 종족에 속하였으나 오늘부터는 하나의 몽골국민이다. 몽골국은 몽골고원에 속한 여러 종족들이 가진 충성심과 군률로 다져질 것이다. 충성과 군률 이것만이 대 몽골국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위대한 비밀이 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칭기스칸은 자신의 승리를 추종자들의 복종, 충성, 희생으로 돌리고, 어려웠던 3년 전, 그와 함께 발주나 호까지 물러나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서약하였던 너케르 들에게 포상을 내렸다."보오르추와 무칼리는 나를 올바로 이끌고 그릇됨을 멈추도록 하여 이 자리에 이르게 하였다. 이제 뭇 사람의 윗자리에 앉아서 아홉 번 죄를 지어도 벌받지 않도록 할 것이다." 또 나머지 장군들에게도 "메르키트의 땅과 셀렝가 강에 원하는 대로 둔영을 치고 자자손손 활통을 매고 술잔을 비우며 다르한으로 행세하라. 너희들이 어떠한 잘못을 하여도 처벌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바라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아무에게나 시켜라. 너희는 직접 내게 생각한 바를 말하고 부족한 것을 말하라. 약탈물과 전리품을 마음대로 취하며, 짐승도 잡는 대로 가져라." 칭기스칸은 가족들 즉 황금씨족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보상을 주었다. 먼저 어머니 호엘룬과 막내동생 테무게-옷치긴에게 1만 명을 주었다. 양자 시기-쿠두쿠에게는 "모든 사람의 몫을 나누는 것과 재판을 하는 것을 푸른 글씨로 흰 종이에 기록하여 관리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기록된 법률은 후에 야사로 알려진 법전의 기초가 되었다. 또 벨구테이에게는 "모든 백성들에 대해서 도적을 징계하고 거짓을 자백시켜, 사형에 처할 만한 것은 사형시키고, 처벌할 만한 것은 처벌하라"고 하였다. 또한 그의 친척들과 동료들에게 수 천명씩의 유목민들을 분배하였다.
군사재편
즉위식이 끝나자 칭기스칸은 저항의 구심점이 될만한 구 경쟁귀족을 없애고 분열성향의 혈연적 충성심을 부수어 모든 유목민을 그의 가계에 충성하도록 몽골군과 사회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공식적으로 군사제도는 흉노의 것과 같이 10, 100, 1,000의 십진법으로 구성하여 마지막에는 가장 큰 전투단위인 10,000명으로 된 투멘으로 하였다. 이러한 십진법은 고원통합 이전의 타타르, 메르키트, 케레이트, 나이만 등에서도 시행되었지만 칭기스칸은 이전에 비해 그것을 좀더 조직화하고 지배계층을 완전히 재구성하였다. 즉 대부분의 구세대 귀족들을 없애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너케르를 중심으로 재편성하여 조직을 수중에 넣음으로서 몽골의 황금씨족만이 복종과 충성의 구심점이 되게 하려 하였다.칭기스칸은 먼저 15세에서 70세까지의 모든 남자들을 95개의 천호 주력군으로 나누고,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여 그에게 뛰어난 충성심을 보였거나 오랫동안 봉사한 가신 너케르 들을 95명의 천인대장(밍간)으로 임명하였다. 이중에는 유년기의 친구 보오르추와 케레이트와의 전쟁에서 칭기스칸의 목숨을 건져준 말치기 바다이와 키실릭, 양치기 데게이, 목수 퀴취귀르, 대장장이의 아들 젤메, 그리고 수베테이와 차우르칸 등 잘라이르, 수니트, 바야우트와 같은 예속 씨족출신이 많았다. 천호의 구성에서 부족이 유지된 것은 자발적으로 칭기스칸과 연합한 오이라트와 옹구트 등에만 한정되었고 나머지 적대 씨족은 분산되어 씨족적 충성심을 없애는 십진단위로 재배치되었다.칭기스칸은 양치기 데게이에게 무적민들로 천호를 구성하도록 하였고 목수 퀴취귀르에게는 사람을 여기저기서 모으도록 하였으며 제베와 수베테이는 본인이 규합한 사람들로 천호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나린-토오릴에게는 흩어진 네귀스일족을 다시 모으도록 하였으며 욍귀르에게도 흩어진 바야우트일족을 다시 모아 천호를 만들게 하였다. 한사람이 몇 개의 천호를 보유한 자도 있었다. 코르치는 3천명의 바아린족 이외에 특별히 주어진 아다르킨족의 치노스, 퇴욀뢰스, 텔렝귀드를 합쳐 만호(투멘)를 구성하였다. 이 만호는 오르콘(만인대장) 혹은 장군에게 통솔되는 독립된 작전 단위였다. 그러나 투멘의 실제 인력은 5,000명 이하인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1,000명 이하인 경우도 많았다. 95명의 천인대장들과 소수의 오르콘은 전통적인 씨족장 들을 대체하였으며 병사들과 가족들은 그들이 속한 단위를 떠날 수 없게 인력을 완전히 재배치하였다. 또 그는 모반을 막기 위하여 지휘관들을 서로 교체하였고, 감시를 위해 두 사람이 동시에 지휘권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칭기스칸은 이들이 기존의 씨족의 기능과 구조를 대신하도록 특정한 유목지를 분배하였다. 이렇게 천호로 편성된 몽골 울루스는 몽골제국의 바탕이 되었으며 이른바 순 몽골군이 되었다. 후에 여기에 유목 키타이 인들이 더해져 1227년 몽골군의 수는 약 13만이었다.천호의 밑에도 백호, 십호라는 방법으로 10진법체계로 조직화되었다. 백인대장(자운), 십호장(아르반)은 천인대장의 추천에 의해 노얀 가운데에서 임명되었다. 이들의 직위는 세습되었지만 자신의 임무를 잘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박탈되었다. "만약 십호장이 십호대를 통솔하지 못할 경우, 그의 처자식들과 함께 죄를 묻고, 십호대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십호장으로 임명할 것이다. 백인대장, 천인대장, 만인대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아래로 자유민(타르칸)이 군대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전쟁에서 전리품과 사냥에서 잡은 짐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몽골고원 통일 직후 전쟁 약탈물을 지휘관이 독식하는 유목민족의 관습을 폐지하고 모두에게 철저히 나누어주도록 지시했다. 칭기스칸은 "열 명을 통솔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천 명, 만 명을 맡길 수 있다"고 하였으며 실제로 몇몇 용감한 타르칸들은 노얀으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누구라도 사령관이 될 수 있다는 무한한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는 몽골 기마군단의 정신력과 전투력을 엄청나게 높여주었다.이들 전투단위는 평화시에도 유지되었다. 모든 젊은이는 각 단위에 소속되어야 하며 동원령을 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모든 남성은 평시에는 수렵의무, 그리고 전시에는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칭기스칸은 한 집에서 병사 한 명씩만을 차출, 군대를 구성했다. 이들 개개인은 5필의 말을 갖추고 있었다. 전쟁에 임하여 십호에서 이탈자가 하나나 둘 이상이 생기면 전원이 사형되었다. 그리고 만일 10명 전원이 도망친다면 백호를 이루는 나머지 집단 전부가 처형되었다. 마찬가지로 십호의 대원 중 한, 두 명 이상이 대담하게 싸우러 진격하는데 나머지 사람이 그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 또한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십호 중 한, 두 명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을 구하지 않을 때도 그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십호를 떠나는 어떤 대원도 그리고 전장에 부상자들을 버린 어떤 십호 대원들도 사형에 처해졌다. 또 군기가 휘날리는데 전투를 피하는 자들도 사형에 처해졌다.이제 몽골 군은 새로운 형태를 갖추었으며 사소한 부족간의 분쟁과 싸움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친숙한 부족과 씨족의 이름은 사라지고 여기에 속하였던 사람들은 분산 배치되었다. 칭기스칸 개인의 통합 몽골국이 탄생했으며 그의 야망은 초원을 뛰어넘었다. 새로운 국가는 전쟁을 위해 조직되었다. 십진법으로 나뉘어진 칭기스칸 군은 강인한 훈련을 받았으며 장비를 잘 갖추게 되었다. 칭기스칸의 군사재편으로 과거의 부족수령들은 오그라들었고 유목민들의 상시 징병으로 전통적인 생활방식은 파괴되었다. 이러한 전통사회의 와해로 광범위한 계충에서 불만과 저항이 싹트게 되었다.
케식텐
칭기스칸은 자무카와의 마지막 전쟁을 준비할 때부터 그의 추종자(너케르)로 구성된 친위대(케식텐)를 창설하였었다. 70명의 주간 친위대와 80명의 야간 친위대였다. 수많은 부족들의 집단적 이기주의를 누르고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만들기 위하여 칭기스칸은 지휘관들의 자제를 케식텐에 참여시켜 친위부대의 병력을 크게 늘렸다. 천인대장의 아들이 친위대에 선발되면 열 명의 추종자와 아우 한 명을 같이 오게 했다. 또 백인대장의 아들은 추종자 다섯 명과 한 아우를, 십호장의 아들과 평민의 아들이 들어올 때는 세 명과 아우 한 명을 각각 동반케 하여 만 명을 채웠다. 주간 친위와 야간 친위에 호르친 즉 궁사들이 추가되어 "야간 친위대가 800에서 1,000명, 궁사가 400에서 1,000명 그리고 주간 친위대는 8,000명으로 되어" 완전한 하나의 투멘이 되었다. 이후 몽골제국은 1330년대까지 이를 유지하였으며, 병력은 경우에 따라 1만2천에서 1만5천으로 증원되었다.이들은 칭기스칸 일족에게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각종 특권이 부여되었다. 케식텐의 구성원들은 정규군의 장들보다 우위에 두어졌다. "외부의 천인대장들이 나의 친위병에게 싸움을 건다면 나는 천인대장들을 벌하겠다." 주간친위와 궁사는 낮에 칭기즈칸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해가 지기직전 야간친위와 교대했다. 야간친위 근무는 엄격했다. 밤에는 야간친위를 제외하는 누구도 오르도 주위를 돌아다닐 수 없었다. 만약 야간친위의 허락 없이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목을 베게했다. 급한 보고가 있으면 궁궐의 북쪽에서 야간친위에게 말하도록 했다. 또 야간친위의 숫자는 비밀에 부쳤고 밤에는 야간친위가 전권을 행사토록 하여, 왕실의 안녕을 꾀했다.이들은 칸의 정책조언을 하였고 쿠릴타이나 칸이 결정한 일을 집행하였다. 결국 각 군의 지휘자들은 두 명의 자녀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중앙에 볼모로 보낸 셈이었으나 동시에 중앙과 이어지는 통로를 갖게 되었다. 또 이 조직은 군소 토후들의 전횡과 속민들의 소요를 막는 역할도 하였다. 이후 친위대는 수많은 장군과 대 제국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들을 배출하여 몽골 정부의 중추가 되었으며 그 역할은 칭기스칸의 아들과 손자에게서도 계속되었다.
야사
가족과 씨족 내부에도 안정과 질서가 뿌리내려야 했다. 군대를 재편한 칭기스칸은 지금까지 진행되던 약탈과 혈투를 없애고 통일국가수립과 새로운 사회질서에 맞추어 군률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하여 야사라는 칭기스칸 법령을 공표 하였다. 야사는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유목민에게도 적용되었다. 통일이전 몽골지역에는 지방별로 관습법이 있었는데 야사는 이러한 지방법을 국가안정과 지배체제확립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였다. 민사사건보다는 형사사건에 관한 사항이 월등히 많다든지, 도망간 노예를 잡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의무화한다든지, 유별나게 상하간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점등은 모두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지배체제를 염두에 두고 만든 법규들이다.야사는 명령 수행을 거부하거나 수행하지 못한 자 혹은 의무를 아주 태만히 하는 자에게는 사형을 하도록 하였다. 스파이 짓과 도적질, 강간행위, 추잡한 행위, 거짓 증언과 도적과 같은 행동에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이로서 살인, 절도, 음모, 간통, 비적, 저주, 장물취득 등은 사형에 처해 졌으며 불복종은 범죄로 다루어졌다. 야사는 또한 사회내 각계층간 상부상조를 강조하고 주변 사람들과 음식물을 나누어 먹으라고 하는 등 복지 문제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특히 야사는 군주가 사신을 파견하여 외지의 고관을 처벌하고자 할 때 그 사신이 최 하위직이고 그 처벌이 사형이라 할지라도 그 형의 집행을 달게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여 자신의 권위에 대한 일체의 도전을 불허하였다.그러나 유목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가능한 한 그 지방의 관습법에 맡겨주었고 피 정복지에도 그 나라 고유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다. 또한 야사를 지키면 어떤 민족이든 어떤 종교든 보호를 받게 되었고 야사를 어기면 가차없는 피의 응징이 뒤따랐다. 만일 한 부족이나 도시 그리고 국가 전체가 야사 법을 어기면 이들 주민 모두를 처단하였다. 칭기스칸은 젊은 처녀가 금붙이 자루를 가지고 은하에서 중국 해안에 무사히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항구적인 지배체제구축, 가정과 사회의 안정, 종교에 대한 관용이 들어있는 야사는 제국의 안정적 관리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그는 국가 판사인 자르구치가 위법사항을 심의, 판결하도록 하였다. 야사는 몽골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주었다. 야사로서 몽골인 들은 아주 순종적이 되었으며 서로 친근하게되어 헐뜯는 일이 없고, 강도와 절도, 그리고 살인은 물론이려니와, 말다툼이나 싸움질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또 칭기스칸은 문자로서만 야사를 아득한 후대에까지 변치 않고 전해질 수 있는 수단임을 알고 나이만의 옥새(금인) 관리자였던 위구르인 타타통가에게 이일을 맡겼다. 나이만은 이미 위구르문자에 기초한 문자를 가지고 있어 타타통가는 몽골사람들에게 이 문자를 소개하였으며 칭기스칸에게 성문법과 금인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이때부터 통치를 위하여 내려진 조칙, 훈령, 지시 등은 문자로 옮겨져 하나의 책에 모아졌고, 이것이 대법령(에케-야사)으로 되어 제국의 구성과 통치의 기초가 되었다.
군대양성
칭기스칸은 이후, 강력한 군대의 창설에 주력하였다. 보급으로부터 해방과 신속한 기동력이 유목민족의 특징이다. 비록 남루하고 각양각색의 통일되지 않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철저하고도 확실한 병기점검을 통해 외형상의 조직화된(획일적인) 군대보다 더 실질적이고 내실화 된 군대로 움직였다. 몽골군은 전부 기마병이었다. 말들은 같은 기후와 토양에서 자라났으며 똑같은 훈련으로 길들여져 작고 탄탄하였다. 몽골말은 조랑말로 흑마와 백마 두 종류가 있으며 체격에 비해 머리가 크고 눈이 둥글며 목은 굵다. 성질이 온순하고 아무 풀이나 먹고 견딜 만큼 거친 환경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였다. 힘센 목, 굵직한 다리에, 가죽은 털이 빽빽하였으며 지구력, 꾸준함, 그리고 인내심은 놀랄 만 하였다.몽골의 기병들은 둔영지에서 귀마개가 있는 털모자를 쓰고, 털 양말과 장화를 신으며,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외투를 입었다. 전투할 때 그들은 목덜미를 덮는 가죽투구를 쓰고, 검은 옻칠을 한 가죽끈으로 만든 강하고 유연성 있는 흉갑을 입었다. 그들의 공격용 무기는 두개의 활과 두개의 활통, 굽은 군도, 손도끼, 안장에 걸린 쇠로 만든 미늘 창, 적의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갈고리가 달린 창, 당기면 죄어드는 올가미가 있는 말 털로 짠 밧줄 등이었다.독자적으로 전략을 구사하면서 상대방 군대를 혼란에 빠뜨린 후 힘을 모아 생각지도 못한 반격을 가하는 끈질긴 투지가 몽골군에게는 몸에 배여 있었다. 또 싸우기 전 척후대를 보내 지형과 정세를 사전에 확보하여 일사분란한 작전을 펼치는 치밀함이 있었다. 또 몽골군은 일주일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말을 달려 적을 분쇄하기도 하였다. 1206년 칭기스칸의 즉위 후 군사훈련 중에는 6일간의 고비사막의 강행군이 들어 있었다. 행군동안 모든 음식물을 거두어들이고 물만을 배급받았다. 휴식은 첫날에는 6시간, 둘째 날에는 5시간씩으로 줄여나가 6일째에는 1시간으로 줄였다. 7일째에는 하루종일 공격과 포위훈련이 열리고 이에 견딜 수 있는 자들을 중심으로 천호대에 배속시켰다. 이로서 그들은 적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며 다른 군사에게는 공손한 송아지로서 부대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몽골군의 독특한 점은 단순히 개인의 용맹이나 기교에 의존하기 보다 대규모 작전을 전령을 사용하거나 특별한 신호화살을 통하여 조정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 군사적이기 보다 논리적인 이들의 능숙함은 연례 사냥대회 같은 대규모 훈련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때로는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때로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지게 되었다.칭기스칸은 일반 병사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서 병사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그는 장교들에게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도록 하는 등 평등한 생활을 요구하였다. 칭기스칸의 생활도 그의 병사들과 거의 같았다. "나는 야만적인 북쪽출신으로 소치기와 말치기와 같은 의복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 우리는 같이 희생하고 부를 같이 나눈다. 나는 이 나라를 신생아로 보고 병사들을 친형제처럼 돌본다." 이로서 칭기스칸의 군대는 철저하게 평등한 집단이 되었다. 칭기스칸의 지도력과 보호 하에서 무적의 몽골 기마병은 유라시아 대부분을 휩쓸었으며 그 절정기에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들 개개인은 중국이나 러시아, 페르시아, 그리고 서방 유럽이 소집한 적군에 비교하여 매우 우수하였다. 그들의 헌신, 목적의식과 인내는 인류사에 유래가 없는 것이었다. 몽골군은 후대들에게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양심, 능력, 헌신 그리고 빼어남의 높은 경지가 무엇인가를 잘 보여주었다. 이렇듯 1204년 나이만족에 대한 승리에서부터 1209년 탕구트에 대한 원정이 있을 때까지의 기간은 칭기스칸의 생애에서 전쟁대신 제국의 조직을 닦는 일에 몰두한 유일한 기간이었다. 그 동안 제국의 내적인 완성을 위한 기초와 대칸 일족의 권위가 확립되고 장군들에게는 전쟁 지휘권이 부여되었다.몽골에서는 매년 가을 소를 잡아 뼈를 발라낸 뒤 고기를 세로로 길게 자른다. 이 고기를 3i¡4개월 이상 건조한 창고 등에서 바싹 말린 뒤 가루로 빻은 것이 '보르츠'이다. 소 방광 하나에 소 한마리 분량의 고기가루가 다 들어가며 무게는 3i¡4 Kg에 불과하다. 몽골군은 병사 한 명이 보르츠를 가득넣은 소 방광을 두 개씩 휴대해 다니다가 더운물에 조금씩 풀어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해결하였다.
군단전개
천호의 재편과 천인대장의 임명 후 칭기스칸은 황금씨족에게 부민을 나누었다. 세 명의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데이에게 각각 4개의 천호를 나누어주고 제국의 서방 알타이산 방면에 배치하여 우익 울루스를 만들었으며, 또 세 명의 친동생, 조치-카사르, 카치운, 테무게-옷치긴에게는 각각 1개, 3개, 8개의 천호를 주어 고원동방의 경계인 흥안령 방면에 두어 좌익 울루스를 만들었다. 이 동서 여섯 왕가의 중앙에 칭기스칸과 그의 막내아들 톨루이가 있었는데 중앙의 칭기스칸 직속 천호군도 서쪽으로 보오르추, 동쪽으로 무칼리라는 2명의 노장을 중심으로 다시 우익, 좌익의 형태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중군은 바아린의 나야아가 지휘하였으며 입양아인 탕구트인 차가안이 선발된 1,000명을 지휘하였다.결국 칭기스칸은 남쪽을 향해 가장 바깥쪽에 좌우 3개씩의 일족왕가, 그의 안쪽에 또한 좌우의 천호군 그리고 정 중앙에 칭기스칸 자신과 4개의 오르도를 지키는 케식텐이 있어, 학이 좌우의 날개를 크게 벌린 것 같은 형태로 남쪽을 향하여 배치되었다. 이 대형은 왼쪽으로 중국, 가운데는 투르키스탄과 동부이란, 오른쪽으로 러시아 초원을 향했다. 칭기스칸이 사망했을 때 몽골군의 실제 병력은 12만 9,000명이었다. 이중 좌익에 6만 2,000명, 우익에 3만 8,000명이 배치되었으며, 나머지는 중군과 보충대였다.
잔당소탕
대 쿠릴타이가 끝난 1206년 가을 칭기스칸은 몽골고원의 나머지 잔당을 뿌리뽑기 위하여 부이룩-칸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다. 부이룩-칸은 토오릴과 칭기스칸(테무진)으로부터 고배를 마신뒤 카라-이르티쉬강 유역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친동생인 타양-칸이 칭기스칸(테무진)과 싸울 때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있는 곳은 이미 칭기스칸 적들의 집결지였다. 타양-칸의 아들 쿠출룩이 그에게 도피하였고, 메르키트족의 톡토아도 그에게 피신하였다. 몽골군이 그를 기습하였을 때 그는 매사냥을 하고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붙잡혀 처형당하였고, 처자식, 군대, 재산은 모두 약탈당하였다.그 뒤 1207년 예니세이 상류의 키르기즈족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다. 그들은 복속의 표시로 눈부신 흰색의 매들을 바쳤다. 1207년 주치의 원정으로 후에 부리야트로 알려진 오이라트족을 포함한 남부 시베리아의 많은 삼림민들을 복속시켰다. 오이라트족의 수령 쿠두카-베키는 몽골군의 향도 노릇을 하였다. 톡토아와 쿠출룩은 기습을 받고 이르티쉬 강가에서 전투를 벌였다. 톡토아가 활에 맞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자 나이만족과 메르키트족은 흩어져 도망쳤다. 이르티쉬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물에 빠져 죽었고, 거기서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멀리 도주하였다.쿠출룩은 이르티쉬강을 넘어 세미레치를 통하여 신강에 있는 카라키타이로 도망갔고, 메르키트 족은 톡토아의 아들들과 함께 킵착 족에게로 갔으나 톡토아의 막내아들 쿠툴란-메르겐은 주치에게 사로잡혔다. 쿠툴란은 활의 명사수였기 때문에 주치가 그의 목숨을 살려주려 했지만 칭기스칸은 "메르키트처럼 말썽 많은 부족은 없다.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자주 싸워야 했고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데, 그를 살려주어 반란을 다시 일으키게 한다는 말인가. 나라의 적에게는 묘지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하였다. 이로써 전 몽골고원이 평정되었다. 이후 쿠출룩은 카라키타이 왕 구르칸의 참모가 되었다가 1211년 스스로 권력을 잡고 1213년 카라키타이의 마지막 구르칸이 되었다.이제 칭기스칸의 명성과 위세는 내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칭기즈칸의 즉위 당시 실크로드는 이미 단순한 교역로 만은 아니었다. 실크로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경제문화권인 동시에 세계진출을 위한 관문이었다. 칭기스칸은 유목민 특유의 속도와 거리 개념을 갖고 북에서 남을 내려다보며 손을 펼쳤다. 실크로드는 모든 곳을 연결해주는 동맥이었다. 당시 위구르는 몽골 서방의 동서교통로에 있어서 사람이나 물자나 정보가 왕래하는 요지였다. 위구르족의 이디쿠트(군주)인 바르축 역시 칭기스칸의 등장과 성공에 관한 소식을 듣고 1209년 초 칭기스칸에게 사신을 보내 위구르인들의 주군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구름 걷히고 어머니같은 날을 보는 듯이, 얼음이 녹아 하천 물이 얻어지듯이, 칭기스칸의 명성을 듣고 매우 즐거웠습니다. 칸이 허락한다면 저는 다섯 번째의 아들이 되어 힘을 바치겠습니다." 그는 카라키타이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칭기스칸에게 복속하여 카라키타이의 동북부는 몽골의 속령이 되었다.1211년 칭기스칸이 탕구트에 대한 원정을 성공리에 끝내고 케룰렌 강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그는 금, 은, 진주, 비단 등을 갖고 찾아왔다. 몽골고원 바깥에 있는 민족가운데 위구르는 칭기스칸의 지배권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같은 해 이리강 하류 카를룩의 군주 아르슬란과, 알마릭의 군주 부자르도 카라키타이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칭기스칸의 신하가 되었다. 통일몽골은 타림분지와 발하쉬호 부근의 군소집단에게 그같은 흡인력을 발휘하였다.위구르와 카를룩은 몽골고원의 바깥쪽에서 칭기스칸에게 항복한 최초의 나라들로서 이들의 항복으로 몽골제국의 남서 국경이 안정되었다. 어렵지 않게 몽골제국은 그들의 선조인 흉노가 몇 세기 동안 장악해온 대 교역로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인 의미가 크지만, 군사적으로도 몽골족은 서남방을 확보하게 된 셈이었다. 이로서 투르판 일대에 몽골은 강력한 수비대를 주둔시키게 되었다. 이후 위구르왕국은 몽골과 일체화되었다. 오아시스 통상국가였던 위구르의 지혜와 정보가 몽골과 연결되었다.
조치-카사르
몽골인들의 세계에서 샤먼(무당)의 권위는 부족 수령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였다. 몽골인 들은 중요한 문제를 그들과 상의하고 그들의 충고를 따랐다. 그들이 퍼뜨리는 이야기는 부족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 몽릭의 아들 코코추가 샤먼으로 대단한 권위를 행사하였는데 평민들은 그가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영혼과 대화한다고 믿었다. 언젠가 그는 몽골고원에 흔히 찾아오는 매서운 추위에 벌거벗은 몸으로 황야와 산 속을 헤매다가 돌아와 "하늘이 나에게 말하기를 땅위의 모든 것을 테무진과 그의 자식들에게 주었으며 그를 칭기스칸이라 부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칭기스칸은 그러한 이야기가 샤머니즘적인 몽골인 들에게 큰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고 몽릭의 아들 코코추를 신임하였다.코코추의 아버지인 몽릭은 과부인 칭기스칸의 어머니 호엘룬-에케와 내연의 관계에 있었다. 코코추는 자신의 주술능력과 자기 아버지의 위치로 자신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겼다. 칭기스칸이 시행한 1206년의 여러 조치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코코추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하자 그는 초자연적인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 그는 우선 칭기스칸의 집안에 불화를 일으켰다. 그는 조치-카사르에 대한 칭기스칸의 의심을 부추겨 조치-카사르를 치게 함으로써 칸의 권위에 손상을 주려 하였다.칭기스칸과 카사르와의 불화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칭기스칸은 그를 의심할 만하였다. 일찍이 바야우트씨족 출신의 사람이 초원의 왕자가 될 만한 후보자로 사차-베키, 자무카, 그리고 타타르족의 알락-위드르 외에 카사르도 꼽았었다. 케레이트의 토오릴과 싸울때도 카사르는 자기 처자식을 토오릴에게 남겨두었었다. 또 카사르는 여러 번 형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 콩기라트족이 화친하려 왔을 때 카사르가 그들을 덮치는 바람에 그들이 자무카와 연합하게 된 일도 있었으며 타타르와 싸운 후 칭기스칸은 포로 1천명을 모두 죽이라고 하였음에도 그는 자기 타타르족 부인의 말대로 일부를 살려주었었다.어느 날 몽릭의 일곱 아들이 칭기스칸의 동생 조치-카사르와 다투며 그를 구타하자 그는 울면서 형에게 호소하였다. 칭기스칸은 "너는 지금까지 남에게 져본 일이 없었는데 어째서 졌다고 하는가"라고 조소하였다. 화가 난 카사르는 사흘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코코추는 칭기스칸에게 "영원한 하늘이 내게 말하기를, 한번은 테무진이 나라를 지배할 것이나, 그 뒤로는 조치-카사르다"라고 귀뜀하였다. 하늘이 코코추의 입을 통해 그의 의구심을 확인시켜주자 칭기스칸은 더 이상 카사르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칭기스칸은 그날 밤 말에 올라타 카사르를 체포하고 지휘권의 상징인 모자와 허리띠를 압수하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 호엘룬-에케는 해가 뜨자마자 집을 나섰으나 칭기스칸은 이미 카사르를 다그치고 있었다. 불시에 어머니와 마주친 칭기스칸은 떨었다. 그녀는 칭기스칸에게 젖가슴을 드러낸 채 "이것은 네가 빨던 젖가슴이다. 네 동생 카치운과 테무게-옷치긴은 이쪽 젖을 빨았다. 조치-카사르만은 두 젖을 모두 빨아 내 젖가슴을 풀어주었다. 카사르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네 혈육을 죽이려 하느냐? 테무진 너는 재능이 있으나 카사르는 힘이 있고 빼어난 궁수다. 부족들이 들고일어날 때마다 그의 활과 화살이 그들을 길들였다. 그러나 이제 적이 모두 없어지니 카사르가 필요 없게 되었단 말이냐?" 당황한 칭기스칸은 카사르에게 칭호와 명예를 되돌려주었지만 어머니 모르게 카사르에 속한 사람을 1,400명으로 대폭 줄였다.
샤먼 코코추
이 사건으로 칭기스칸의 영지를 떠나 코코추를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고, "아홉 종류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코코추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이중에는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옷치긴에 속한 예속민도 있었다. 테무게는 사람을 보내 그들을 돌아오게 하였으나, 코코추는 테무게가 보낸 자들을 때리고 걸려서 돌려보냈다. 그 다음날 테무게 자신이 코코추를 찾아갔지만, 몽릭의 일곱 아들들이 그를 에워싸며 무릎을 꿇고 빌라고 강요하였다. 이로서 코코추가 권력을 두고 칭기스칸과 겨룬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이때 아내 보르테가 칭기스칸에게 말하였다. "당신 생전에도 당신 아우들이 모욕을 받게 된다면, 당신의 사후에는 당신 아들들에게도 반역할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힘을 소유한 샤먼에 대한 공포심을 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권력문제가 걸린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칭기스칸은 결단을 내렸다. 칭기스칸은 테무게에게 샤먼의 처리를 맡겼다. 며칠 뒤 코코추가 그의 아버지 몽릭과 함께 칭기스칸을 방문하러 왔을 때 테무게가 그 샤먼의 멱살을 잡았다. 칭기스칸이 그들에게 문제는 밖에 나가서 해결하라고 명령하였다. 코코추가 대칸의 장막에서 나오자마자 미리 테무게가 배치해둔 세 사람의 힘센 호위병이 그의 등뼈를 분질러버렸다. 이렇게 코코추와 테무게 사이의 다툼은 씨름이라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해결되었다.칭기스칸이 다시 천막으로 들어갔을 때 몽릭과 그의 아들들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소매를 걷어올리면서 잡아죽일 듯 하자 칭기스칸은 황급히 호위병을 불러 그를 에워싸게 하여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칭기스칸은 "코코추가 나의 동생들에게 손을 대고 나의 동생들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에 하늘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그의 목숨이 몸과 함께 떠나 가버렸다"라고 말하고 신임하던 몽릭을 나무란 후 위기를 벗어났으므로 그를 용서하였다. "뛰어난 그대의 덕성을 지킨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코코추로 인하여 콩고탄 씨족의 체면은 사라졌다."칭기스칸은 코코추 대신에 바아린씨의 최 장로이며 조용한 우순을 흰말을 타고 흰옷을 입는 샤먼-베키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칭기스칸은 샤먼에 대한 군주권의 우위를 확보하였다. 이후에도 칭기스칸은 여전히 하늘(텡그리)를 믿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중국화 되었든, 이슬람화 되었든 모두 텡그리의 대리자임을 자처하여, 그들의 명령은 텡그리의 명령으로 되었고 그들에 대한 반역은 곧 텡그리에 대한 반역이었다.
송, 금의 대치
북 중국을 장악했던 반 유목국가 키타이는 오랫동안 여진족을 지배하였다. 원래 초원에서 일어난 키타이의 황족, 귀족들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소흥안령에서 장백산맥의 삼림지대에 사는 여진족을 지배하면서 지역 특산물인 사금과 사냥용 매의 헌납을 강요하고, 여진 미녀들을 기혼 미혼 구별 없이 잡아가 왕의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나 키타이 사람들은 평소 "여진인은 산산히 흩어져 모이는 일이 없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모인다면 대적할 수 없다"고 여진족을 경계하였다. 이윽고 여진족은 1114년 키타이에 반기를 들고 서진하여 키타이의 전방 지배거점인 영강주를 공격한 후, 1115년 하얼빈 동남쪽 50 km 지점 고향 땅 즉 상경회녕부에 금나라를 세우고 키타이 토벌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1120년에는 키타이의 수도 상경임횡부를 공격하여 함락시킴으로서 금나라는 건국 후 10년만에 북방의 대국 키타이를 멸망시켰다.이후 즉 1125년 12월 금나라 군사는 동과 서 둘로 나뉘어 동아시아 최대의 인구와 국력을 가진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향하여 대거 남하하였다. 금나라의 동군은 연경 즉 북경을 거쳐 내려와 죽 화북의 대평원을 남향 질주하고 서군은 태행산맥과 여양산맥사이의 분수협곡을 빠져 나와 개봉으로 향하였다. 화북평원의 군사거점이었던 하간, 중산의 수비군과 태원의 수비군은 농성으로 저항하였으나 금나라 군사가 곧바로 수도 개봉을 향하자 휘종은 남쪽으로 달아났다. 다음달, 금나라 군사가 송나라의 수도 개봉을 포위하자 송나라가 태원, 하간, 중산 3진의 할양을 약속하여 금나라 병사를 퇴각 시켰으나 금나라 군사는 그해 가을 다시 개봉을 포위한 후 휘종과 흠종 그리고 1200여명의 귀족을 북쪽으로 연행하였으며 송나라 재상 장방창을 황제로 하는 괴뢰정권 초 나라를 세운 후 북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금나라 군사력이 떠난 괴뢰정권은 휘종황제의 8번째 아들인 강왕에게 자발적으로 정권을 내주었다. 그러자 금나라는 다시 남진하였으며 강왕은 양자강을 건너 항주를 임시수도로 정하였다. 한편 화북에서 화중에 걸쳐 여러 자위집단이 이합집산하였으나 금나라 기마대에 거의 전멸 당하고 패잔병들은 삼림이 있던 태행산으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펼쳤으나 금나라 군사에 눌려 회하 이북의 넓은 들은 금나라 땅이 되었다.강남에서 송나라 재정비의 기초가 된 것은 패잔 정규군을 흡수한 지역자위대로서 회하에서 사천의 대산관까지 지방군벌에 의해 국경선이 확립되었다. 이 지방군벌은 동쪽부터 차례로 회남동부 한세충의 한가군, 회남서부 강동에 기반을 둔 장준의 장가군, 호북 악비의 악가군, 사천 오개, 오린의 오가군 이었다. 이들 민중은 남송 정권보다 강건한 규율과 왕성한 전투심을 과시한 군벌 악비를 더 따랐다. 악비는 화북의 농민출신이었으나 의용군에 몸을 던져 겨우 6, 7년 사이에 호북지방의 대군벌로 자랐다. 기반을 확립한 후 남송정권은 악비 중심의 군사집단이 화북 땅을 회복하면 악가군이 악가왕조로 변신할 수도 있었으며 반대로 전쟁이 길어지거나 패하면 남송정권이 몰락할 것이 예상되자 재상 진회는 먼저 악비를 체포하여 투옥하는 한편 금나라와 화의를 체결하였다. 이 화의는 1234년까지 거의 100년간 송-금관계의 기본을 결정하였다.화의는 먼저 동쪽의 회하에서 서쪽의 대산관까지의 선을 국경으로 확정하였다. 이것은 키타이가 차지하고있던 중국 땅이 연운 16주에 머문데 대하여 금나라는 송나라의 수도였던 개봉을 포함한 화북전체를 취하게 되었다. 또 송이 키타이를 형으로 삼은 것에 대하여 금에게는 신하의 예를 취하였으며, 송은 금에 대하여 매년 세폐로서 은, 비단 각 25만냥을 바치게 되었다. 이와같이 남송의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약하였으나 막대한 금력과 유화정책으로 외세의 위협을 무마하면서 중원의 실지회복을 노렸다.이리하여 중국지역은 서로 다른 민족이 지배하는 최소한 너 댓 개의 나라들로 나뉘어졌다. 크게는 여진의 금이 차지한 중원과 만주 일부, 중국 서북부의 감숙과 청해 일대의 탕구트, 그리고 한족의 송이 밀려 내려간 이른바 남송이 들어선 중원이남으로 구분된다. 그외 사천성 외곽의 광대한 티베트 및 운남지역 역시 정치, 외교적 권한을 지닌 독립국가였다. 이슬람 세계도 여러 제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유럽에서는 봉건영주들이 득세하여 국력이 분산되고 있었다. 칭기스칸 만이 전제적 왕권을 확립하여 초원의 에너지를 모으고 있었다. 정치적 통일이 우세한 군사력의 원천이 되었다.
탕구트와의 전쟁
칭기스칸은 테무진일 때부터 키타이인이나 여진인등 금 나라에서 이탈하여 온 사람들을 참모로 삼았다. 특히 키타이는 말도 몽골과 비슷한 유목민으로 웬만하면 중국어, 여진어등 여러 나라 말을 구사할 수 있는 선배였다. 테무진과 그의 몽골군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때부터 그들은 테무진을 따랐다. 몽골의 여러 부족들이 통합되고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이 하나의 군주권 아래에 편입되어 조직화와 내정정비가 일단 끝난 1206년 칭기스칸은 즉시 대외전쟁에 나섰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변국가로부터 와해공작이 시작될 것이었다. 게다가 칭기스칸은 자기 군대가 피복속 부족민들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들을 무조건 신임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원래의 거주지에 머물러 있는 한 그만큼 더 위험하였다. 대외전쟁으로 유목민들의 전리품획득의 기대에 부응하고 아울러 이제 막 통합된 국내를 전시체제하에서 완전히 통솔, 장악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하였다. 더구나 그 동안 끊임없는 전쟁과 기후변화로 가축의 수가 격감되어 몽골고원의 목축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었다.그는 금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먼저 탕구트 유목민들이 중국의 영하, 감숙, 오르도스, 신강 자치구 일부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탕구트를 공격하였다. 탕구트의 북쪽 경계는 고비사막의 남부에서 오아시스 도시인 하미에 이르기까지 몽골족이 살던 지역을 따라 그어져 있었다. 탕구트는 티베트계인 탕구트족의 지배를 받는 한족과 위구르족 등의 주민들로 구성, 한족의 정착성향과 위구르의 유목기질이 절충된 사회구조를 유지하였다. 그동안 탕구트는 사막과 초원, 그리고 농경지역을 바탕으로 키타이, 송, 금 사이에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며 발전해 왔지만 경계를 길게 맞댄 막북의 몽골과는 뚜렷한 충돌이 없었다. 또 그들은 수많은 가축을 치고 있었고 동서 교역로의 동쪽 끝에 있어 국가 재정의 대부분은 교역상의 이득 및 상거래에 부과되는 세에 의존하고 있었다. 탕구트는 중국의 서북방에 있어서 유목민들이 공략하기 힘든 견고한 성곽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칭기스칸은 내부적으로 제 국의 기본 틀을 조직화하면서 이 탕구트 왕국을 1205년, 1207년, 1209년의 세 차례에 걸쳐 침입하였다. 쿠릴타이가 열리기 전인 1205년 야율아해 지휘하의 몽골군이 탕구트 영토를 처음으로 공격하여 낙타를 비롯한 많은 가축을 빼앗아 돌아왔다. 두 번째는 1207년 가을로서 그들은 올로하이를 함락하여 많은 말, 낙타, 재물 등을 약탈하고 그곳의 직업적 기술자나 농민들을 잡아 유목지대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은 탕구트가 군사를 규합하자 1208년 초여름의 더위를 피하여 되돌아왔다. 이 두 번의 공격은 아직 본격적인 정복전쟁이라기보다는 약탈 정보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서방에는 카라키타이나 코라즘샤가 버티고 있고 남쪽에는 몽골족의 발전을 막아온 동아시아 제1의 강국 금이 있었다. 몽골국이 웅비하려면 이들과의 결전을 피할 수 없었고 이를 위해 탕구트를 제편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또 탕구트의 좋은 말과 낙타, 이름 높은 활과 검, 갑주 역시 탕구트의 기병만큼 몽골에 필요했다. 탕구트를 손에 넣으면 비단길을 통한 동서교역의 이익을 나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중원과 서역으로 진출하는 안전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두 번에 걸쳐 탕구트의 허실을 탐색한 몽골군은 1209년 4월 후방공격을 차단하고 금나라에 대한 원정로를 확보하는데 목적을 두고 탕구트를 침략하였다. 칭기스칸은 중국을 나누고있는 세 나라가운데 가장 약하고 이웃한 탕구트를 공격하여 정착민에 대한 몽골군의 전투력을 시험하였다.몽골군은 칭기스칸의 지휘하에 약 300 km의 고비사막 등 모두 950 km를 통과하여 탕구트 영내로 침입하였다. 몽골군은 처음 올로하이 공격에서 부원수 고령공이 지휘하는 탕구트 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탕구트 군은 두달 동안 몽골군과 대치함으로서 이 승리를 잘 이용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몽골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자 몽골군은 다시 공세에 나서 포위기습전을 벌여 탕구트군의 지휘관인 외명령공을 포로로 잡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올로하이를 점령한 후 남하한 몽골군은 중흥부 외곽의 최후보루 극이문을 격전 끝에 함락시켰다.이로써 수도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되어 몽골군은 오르도스 평원으로 진입하여 황하유역에 있는 탕구트수도 중흥부(영하)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탕구트인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황하가 가로놓여 있는 데다 중국식 방비가 되어있는 요새를 몽골기병으로는 달리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몽골군은 넓은 평원지역에서 적을 공격하는 데는 훌륭하였지만 견고한 성채를 공격하는 데는 미숙하였던 것이다. 10월에 들어와 칭기스칸은 거대한 둑을 쌓아 황하상류의 물길을 성안으로 향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몽골군에게는 너무나 복잡한 일이어서 공사 중 이 둑이 터지면서 몽골군의 진지를 덮치기도 했다.이러한 시행착오를 통해 여러 형태의 공성법을 익히면서 몽골군은 왕성한 전의와 전투수행으로 수도를 공격하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탕구트는 금나라에 급히 구원을 요청하였다. 더욱이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대륙 횡단의 요지를 차지하여 대상교역이 활발한 탕구트는 몽골군의 봉쇄로 교역이 중단됨으로서 이 왕국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금나라 대신들은 탕구트가 무너지면 몽골은 필시 금나라를 공격할 것으로 생각하여 탕구트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으나 금나라 황제는 "적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유리하다. 걱정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하고 방관하였다.탕구트왕 이안전은 별수 없이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딸 차카란을 바치고 다음과 같이 서약하였다. "우리들은 칭기스칸의 어명을 듣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칸 자신이 친히 출병하시니 위광에 감복하고 있습니다. 탕구트 사람들은 폐하의 오른손이 되어 원조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몽골족과 달리 정주의 토지를 가지고 성곽이 있는 도시에 살고있습니다. 따라서 날쌘 전투나 빠른 출정은 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만일 허락하신다면 많은 낙타와 최상의 직물과 우수한 수렵용 매를 헌상하겠습니다." 차카라는 이민족의 여인이었으므로 몽골의 여인에 비해 체격 얼굴 생김생김 등이 아름다웠다. 그밖에도 그들은 수많은 흰 낙타를 공물로 바쳤다. 그는 1210년 탕구트의 항복을 받아내고 공물을 약속받는 것으로 전쟁을 일단락 지었다.탕구트 공격은 몽골에게는 성곽도시를 공격하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칭기스칸은 탕구트를 굴복시킴으로서 중국에서 투르키스탄까지의 통행로를 장악하고 금의 영토를 서쪽에서 포위하였다. 한편 탕구트는 1165년 이후 맺어온 금나라와의 화친관계를 단절하고 금나라의 변경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이 양국간의 전쟁은 몽골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다시 연합한 1225년까지 계속되었다.
금나라 침공준비
12세기 중반 금나라는 수도를 중국동북부에서 중도(베이징)로 옮겼다. 금나라(여진족)의 병제는 300호를 모극(무게), 10모극을 맹안(밍간)으로 하는 맹안모극제로서 이들도 왕을 따라 중국내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편제는 성인 남성들은 평시에는 농업 등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나면 징집돼 종군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중국대륙으로 이주한 뒤 여진족은 태만하고 나약해졌으며 생활도 눈에 띄게 궁핍해졌다. 그러자 금나라 정부는 이런 처지에 빠진 여진인의 보호에만 치중한 결과 한인의 반발을 불러왔다. 이후 내부에 정착한 이들 무리는 중원의 풍요를 둘러싸고 내분과 부패를 낳게되어 만주 일대에 남은 무리들과는 이질감이 생기게 되었다.칭기스칸이 금나라를 치려는 생각은 이전 토오릴에게 파견된 금나라 사신 야율아해를 만나, 그가 금나라가 무방비 상태로 사기가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였다. 그는 칭기스칸과 의기가 투합하여 그곳에서 외교고문역을 맡았다. 야율아해는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에 능하였고 키타이어, 여진어, 중국어 그리고 몽골어에도 능하였다. 칭기스칸은 귀순자와 키타이인 망명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들로부터 중국사정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했지만 주로 금나라 안의 첩자들, 특히 무슬림 상인들이 가져다주는 정보에 무게를 두었다. 칭기스칸 자신도 정보수집에 참가하였다. 그는 공물을 인도한다는 명목으로 허실을 탐지하려 금나라에 갔다. 금나라 측도 이를 경계하여 칸을 국내에 들이지 않고 국경 밖에서 접대하였다. 금나라에 대한 또 하나의 정보원은 금의 바로 북쪽에 접하며 살고있는 몽골계 옹구트족이었다.역사적으로 중국은 무한한 물자와 권위 등으로 유목민들을 유혹하였지만 대개는 변경 약탈전으로 끝났다. 칭기스칸 역시 금나라(여진족)의 황제 알탄칸(장종)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신하노릇을 하였다. 1207년부터 칭기스칸은 금나라에 당당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208년 마침 금나라의 알탄칸이 사망하였다. 칭기스칸은 후계자의 즉위에 맞춰 주종관계를 청산하려 하였다. 그는 금나라 사신에게 새로운 군주가 누군가라고 묻고 사신이 위소왕이라고 하자 얼굴을 남쪽으로 돌리고 침을 뱉으며 "나는 중원의 황제는 천상의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들어왔는데, 이처럼 용렬한 자도 황제를 할 수 있다니 내 어찌 만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부터 몽골과 금나라 사이에는 본격적인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칭기스칸은 그 동안 중국에서 들어오던 물자를 직접 확보해야만 하였다.그렇지만 금나라와 싸운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황하유역을 모두 장악하고있는 세계 최강국 금나라는 무진장한 인적자원으로 엄청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몽골군과 똑같은 기병을 가지고 있었다. 금나라는 비록 중국화 되었어도 그들 선조들이 사냥하면서 생활하던 호전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연적인 요새인 황하와 인공적인 요새인 만리장성은 금나라 천험의 방위선이었다. 금나라의 광대한 영토에는 수도 북경은 물론 열하의 대정, 요양, 산서의 대동, 하남의 개봉 등 도시들이 즐비하였다. 칭기스칸이 1206년 몽골고원을 통일했을 때 몽골제국 인구는 1백만 명 정도였고 정규군은 10만 명 수준이었다. 반면 세계 인구는 3억 명 선이었고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던 중국 금나라 인구는 5천만 명이었다.
<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