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태국내의 선교 미개척지들 어떻게 할 것인가 ?
글쓴이 휴 테일러(Rev. Hugh Tayler,D.D.) 목사는 1862년 8월 9일 미국 아이오와주 아이오와 시티에서 태어났다. 1885년 파크 대학을 졸업하였고, 1888년에는 프린스톤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동년 7월에 도라 벨 마틴(Dora Belle Martin)양과 결혼하고 난후 그해 9월 태국으로 떠났다. 태국에 도착하여 테일러 부부는 람빵(1888-1908)과 난(1908-33)지역에서 사역하였다. 아내 도라는 1925년에 죽었고, 그는 1926년 11월에 헤치(julia A. Hatch)양과 재혼하였으며, 1933년 공식적으로 은퇴하였다. 줄리아는 1934년에 태국에서 죽었다.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테일러는 1952년에 미국에서 죽었는데 그는 특별히 건축 기술과 기계 기술로 명성을 떨쳤다.
아래의 글은 태국 치앙마이에서 고아원 사역을 하고 있는 권삼승 선교사에 의해 번역된 것입니다. -
혼자의 힘으로 태국의 선교의 미개척지를 찾는 일은 매우 흥미있는 일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묻지 말고 외국 선교부의 자료도 들여다 보지 말라. 당신 혼자서 지도와 통계와 사람들을 설정하여 스스로 찾아보라. 그것이 바로 우리 선교부가 한 방법이다.
인도와 중국의 대부분 선교지를 위와 같은 방법으로 조사해보았더니 대부분의 선교부의 숫자가 너무 적어서 50마일(약 80키로미터) 이내에는 두개 혹은 그 이상 있는 곳은 거의 없을 정도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와 같은 최소한의 룰을 선교지인 태국에도 적용시켜보면 좋을 것 같다. 태국에서는 같은 반경(80키로 이내) 안에 두개의 선교부가 있는 곳은 두 곳이 있었는데 나콘 파톰과 람빵이었다. 나콤 빠톰은 페차부리와 방콕을 포함하고 있는 센터로서 운영되고 있었고, 람빵은 치앙마이와 프레지역을 카바하고 있었다. 나콘 빠톰에는 46명의 선교사가 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람빵 지역에는 38명의 선교사가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이 점유하고 사역하고 있는 지역은 단지 2만 스쿼어 마일 정도로 태국의 나머지 175,000마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 그곳은 여전히 미개척지로 남아있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위에 적용한 지역에 따른 룰은 인구 밀집 지역보다는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 흩어져 사는 사람들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해도 인구밀도를 전혀고려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중국은 태국보다도 인구밀도가 4.75배 높다. 예를들면 중국의 한 개의 선교부가 관할하는 지역은 2천 입방 마일 안에 40만명이 거주하고 있는 반면에 태국의 한 선교부가 관할하고 있는 지역은 17,700 스쿼어 마일에 735,000명이 평균적으로 거주하고 있다.
태국과 매우 유사한 환경을 가진 이웃 국가인 미얀마로 눈을 돌려 보자. 미얀마는 태국보다는 인구가 더 많이 흩어져 살고 있고 태국보다는 조금 더 큰 나라이다. 당시 버마에는 700만명이 살고 있었고 50개주에 350명의 선교사가 거주하고 있었다. 반면 815만명의 인구를 가진 태국은 102명의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어서 미얀마의 1/4 정도 수준이었다.(역자주, 미얀마는 선교사 1인당 2만명이었으나 태국은 선교사 1명당 약 8만명이라는 의미, 국토는 미얀마가 676,577이고 태국은 512,000)
인구와 환경이 태국과 매우 유사한 프랑스령의 인도차이나(요즘의 비엔남을 말함)인 동부 지역으로 눈을 돌린다면 위에서 발견한 그런 일반적인 현상이 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나라의 경우에 있어서 국토는 태국보다 1.3배 크며 인구는 두배나 많은데 13개의 선교부에 33명의 선교사가 사역하고 있었다. 선교사 1명당 515,000명을 담당해야 했다. 프랑스령의 인도 차이나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하여 CMA를 비롯한 기독교 선교단체를 통해 우리는 57명의 선교사를 더 보내야 했다. 인구 비례에 따라 많은 이들이 태국으로 돌아오고 있어서 일부의 태국 지역은 복음에 접촉을 하고 있으나 일부는 아직도 복음을 접하지 못하는 미개척지로 여전히 남아있다.
우리는 위의 결론에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우리 자신을 비교함으로써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 스스로를 비교해보는 것이 좋겠다. 만일 북부지역에 있는 5개의 선교부(치앙마이, 람빵, 프레 난, 치앙라이)에 인원이 충분하다면 그들이 관할하고 있는 지역을 충분히 복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현재의 선교부 인력에 14명의 선교사를 더 충원한다면 중국과 인구 비율로 봐서 거의 같은 수준이 될 것이며 북부지역의 선교부는 북부지역 복음화를 위해 잘 구비되었고 북부지역은 이미 개척된 선교지라고 느낄 것이다.
이제 태국의 나머지 지역으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가 알이야 하는 것 한가지는 250마일의 넓이와 450마일의 길이의 색션안에는 단 한곳의 선교부가 있었는데 그곳은 핏사눌록이다. 그곳은 다른 한지역으로부터 50마일 이상 떨어져있으며 다른 지역 선교부로부터는 2백 마일이상 떨어져 있었고 또다른 선교부로부터는 125마일 이상 떨어진 완전히 고립된 미개척지였다. 여기에 새로운 6곳의 선교부를 마련하려고 하는데 여섯개의 선교부는 각기 1만 입방마일의 선교지를 관할하도록 되어 있다. 여섯개의 선교부는 그 지역의 센터로서 코랏, 우본, 로이 엣, 롭부리, 라행과 농카이에 세워질 것이다. 복음주의적이고 의료사역을 감당할 수 있는 사역을 시작하라. 가능한한 빨리 복음을 전도하여 가정을 얻으라. 그리고 가능한한 빨리 그들의 자녀를 가르칠 교육 사역자를 데리고 와라. 찬타분과 빠따니에 있는 두개의 다른 선교부는 방콕의 남동쪽과 반도의 최남단에 작은 미개척지를 위해여 잘 구비할 필요가 있는 곳이다. 8곳의 새로운 선교부와 80명의 새로운 선교사가 증원되었다. 이러한 것들은 기존의 선교부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해 줄 것이다. 놀랄만한 일인가 ? 이것은 대단하거나 놀랄만한 것이 아니라 초창기에 태국에 온 선교사들이 이미 보았던 비젼이었다.
이 장의 한부분은 루앙푸라방의 라오족과 카무족의 인구를 고려해야만 한다. 프랑스령의 라오스는 태국의 동부지역과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캄보디아와는 남부지역으로 국경을 접하고 있다.그 사람들은 북부 태국의 유안 라오스 사람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바나켓에서는 스위스 선교부가 그들 가운데서 사역하고 있다. 위엥짠에는 로만 케톨릭이 사역하고 있다. 북부 태국 선교부에 의해서 시작된 복음 전도는 수년동안에 걸처 다양한 경로를 통해 북부지역들과 루앙 푸라방에 전파되었다. 다니엘 멕길버리는 이 사역의 선구자였으며 도드(Dr.Dodd), 피플스(Dr. Peoples), 켐벨(Dr.Campbell)과 매케이(Mr.MaeKay)에 의해 지속되었다. 루앙푸라방의 북부지역에 있는 카무족들 가운데 성장하는 기독교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이 사역을 위해 차이마(Rev. Chaima) 목사가 파송되었다. 그리고는 20여년 동안 휴지기가 발생했다. 오랜 침묵끝에 알려지게 된 것은 회심자들의 공동체가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아직까지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람빵 선교부는 그들 가운데 부흥을 일으키기 위하여 동역자 가족을 그곳에 파송하였으며 지금은 믿음에 견고히 서가고 있다는 보고를 해오고 있다. 장로교 선교부와 미국 성서공회는 초기 선교사들에 의해서 루앙 푸라방에서 일어났었던 사역에 대한 고무적인 보고에 대해 확인도 하고 격려도 할겸하여 복음적인 선교여행을 주선하였다. 이러한 여행은 난 선교부의 현지인 사역자들에 의해서 몇번 계속되었다. 1925년 가을에 두번째 선교여행이 계획되었는데 이는 태국 현지인 지도자들에 의해서 이 사역을 감당하도록 난 선교부에 이 지역이 할당되었다. 새로운 필드를 개척하는 계획이 현지인 교회에 추천되었다. 북부 태국의 장로회는 이 계획을 수락하고 루앙 푸라방의 선교회를 견고히 하기 위하여 난 선교부에서 두 가정의 기독교 지도자를 루앙 푸라방에 파송하여 3년 동안 이 사역을 감당하도록 하였다. 이 사역은 원래 계획하였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발전하였으며 곧 더 많은 인원을 요청하였다. 그들의 소망은 교회가 활기를 되찾도록 하는 것이었다. 난 선교부는 그들 선교부와 인접 거리에 있는 외국 선교지의 필요에 기꺼이 부응하여 그들의 믿음에의 열정을 되살리는 방법으로 응답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 위해 최선의 가치있는 노력을 다한 선교지였다.
우리가 이 미개척지를 바라볼 때 우리는 주님께서 추수할 곡식은 많은 데 일꾼이 없어 일군을 보내달라고 기도한 것을 기억하게 된다. 바라기는 태국교회가 눈을 들어 복음이 없어 목말라 애닮아하며 추수를 기다리는 미개척지들을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바로 문 밖에 생명의 양식이 없어 굶주리고 있는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을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태국에 선한 사역을 시작한 미국의 교회들이 그들의 책임을 회피하지않고 주님이 다시 오실 그때까지 그 사역을 잘 감당하였으면 좋겠다. <끝> 태국치앙마이 카페에서 퍼온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