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의 언어
(1) 언어의 시적 기능
시란 언어로 구성되는 미적 작품이다. 사람이 사용하는
언어에는 생활용어, 인식어, 산문어, 시어 등을 포함하고 있다. 일상어나 인식어가 사실전달의 매체라면 산문어나 시어는 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이 가운데서 산문어는 사실전달의 매체적 성격을 농후하게 지니고 있는 반면에 시의 언어는 정감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시의 미적 매개체가 된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라고 할 때, 그 언어는 시의 언어, 즉 시어(Poetic language)를 말한다. 정감전달의 언어가 사실전달의
언어와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는 시가 예술작품이기 때문에 시어는 예술성을 지녀야 한다. 그러므로 “언어가 미리 창작의 재료로서 발견되어 시가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 자체가 언어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라고 한 하이데거(Heidegger)의 이론을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언어와 문학은 상호보완의 긴장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언어는 모든 문학적 대상의 주거라 할 수 있다. 시인은 전달하는 언어의 표상을 보내는 데
그치고 독자(청중)의 공명을 직접 듣는 일도 없이 전달이 목적이었던 것도 잊고, 자기 만족을 위해 시 그것을 위해 창작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언어를 통하여 사물의 존재를 파악하게 되고 사물은 언어의 조명적 기능에 의하여 그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 시의
언어가 지니는 기능이 바로 조명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어의 유기적 건축이라고 하는 시에 있어서 그 조직이 내적인 사상적 윤리적 가치와
외적인 표현의 심미적 가치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예술의 기본적 본질을 감각(Sensation)에 둔다면 시어의 미적 매개로서의 속성은 우선
감각적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적 리얼리티를 표출하는 기능은 시적 심상의 생동감에서 비롯되며, 이 심상이란 정서 또는 사상적 내용을
가시적으로 프로젝트(Project)하는 것이다. 사상과 정서의 내용적 요소를 가시적 가치체계로 시상화(Visualization)하려면, 상상력이
발동되어야 하고 이 때 상상력은 언어표현의 심미적 가치를 달성하는데 유용한 것이다. 시적 상상력과 아울러 중요한 것은 상상적 내용을 실체화시키는
언어의 특수기능인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상상력이 있고 소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시적 구성이 가능할 수 없다. 시어를 인식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시인은 언어의 소리(sound)와 의미(meaning)를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냄새를 맡으며, 피부로 느끼면서 언어의 밸류로
시어를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일상어의 고정관념의 심벌(symbol)을 파괴하여 그것을 넓은 언어기능으로 심화 확대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엘리어트(Eliot, T.S)의 말처럼 “시에서 필요로 하는 것은 지속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인식과 평가의 인습적 양식을 깨뜨려 사람들로 하여금
세계를 새롭게 하고 그 새로운 면들을 보게 하는 언어기능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현대시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시의 자료이며 도구인 일상어를
어떻게 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생명력 있는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문제의 해결점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상어가 지니는
역사적 집단성과 유형성에서 탈피하여 강렬한 개성으로 시인의식을 발동하여 언어감각의 생성에 분투 노력해야 한다.
과거의 시가 일상어의
평면적인 배열로 정서의 안이한 표현에 머물고 만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대시에 있어서는 인습적 관념의 범주에서 벗어나 보다 치열한 시의식으로
현대감각을 담아서 생활의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
물론 평이한 정감을 단조롭게 향수하여 동양화의 분위기나 담담한 수채화의 기분을 내듯이
쓰는 시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날로 인간이 기계화되어 휴머니티를 상실해 가는 현대인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적인 위안이 필요하고
생활공간의 안주를 요청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시인의 사명은 크다. 그러므로 날카로운 판단과 비판력으로 역사의식에 투철하고 현실에 민감한
태도로 현실을 증언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인간성 옹호의 왕좌에서 생활해야 한다.
외계의 사물에서 받아들인 깊은 인상을 참된 시적
변용(變容, deformation)으로 생명화하고 육화(肉化)된 언어를 통해서만이 현대시는 가능한 것이므로 현대의 시어는 소극적인 관념의 유희나
언어의 희롱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시가 범했던 자연과 도시와 문명과 아울러 서구적 사물의 언어를 받아들이기에
바빴는가 하면 모방적인 실험에 급급했었다. 오늘날에는 내면적 흐름과 무의식의 발굴 관념어의 애용 등이 크게 범람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예로는
모국어 세계의 젊은 시인들이 한자어를 통한 추상화된 관념어를 남용으로 시의 의미를 손상시키고 있는 경우를 들 수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시어에서
오는 의미의 교란이 현대시는 될 수 없고, 무엇인가 새로운 가치 질서의 혁명을 유도할 때, 시어의 창조는 역동성을 갖게 될 것이다. 역시 새로
시를 형성하고 있는 것은 시어의 역동적 관계 기능인 것이며, 현대시는 시어의 구조적 특질을 구명함으로써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시의
구조분석에서 볼 때, 시어는 시라는 미적 작품의 최소단위이고 시어의 집합이 작품 전체 중에서 기능화되고 각각의 계기로 변모할 때, 그것들은 시의
내포나 운율성의 구성요소가 된다. 아울러서 운율성(metrequality)과 표성(imagery)을 매체의 근본으로 하는 시의 표현 수단인
시어는 그 표현 속성을 미적 감각성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2) 시어의 운율성
시어의 ‘소리’가 언어의 소리와
다른 점은 시인에 의하여 구성되어진 ‘소리’라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시어의 소리는 ‘구성된 소리’요, 인간내면의 표출은 ‘소리의 구성’으로써
이루어 진다. 이런 경우 ‘소리의 구성’은 시에서 운율(metre)로 형성되는 것이다. 운율이란 시에 나타나는 말소리 또는 말뜻을 배열하는
양식인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외면적 기계적 배열이 아니라 내면적 유기적 질서를 바탕으로 배열한다. 이런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시인이다. 시인은
“언어를 정복한 사람”(Verbalizer)이 되는 것이며, 또한 ‘이미지의 구성’에 뛰어난 ‘영상가’(Visualizer)가 되는 것이다.
[A] 머언 산 청운사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는
열두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박목월 <청노루> 전문
[B] 머언 산에 청운사는
낡은 기와집이다
산은 자하산인데
봄눈이 녹으면
느릅나무에
속잎이 피는 열두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구름이
돈다
[A]의 소리와 [B]의 소리가 내는 효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A]의 소리는 운율에 의한 음조(tonolity)와
음색(timbre)이 언어의 소리를 감각화(Sensing)시키고 있다. [B]가 언어의 소리라면 [A]의 소리는 ‘시어의 소리’ 즉 운율이다.
[A]에서 시어가 내는 ‘소리’가 지각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감각의 ‘소리’가 될 수 있는 것은 ‘소리의 구성’ 때문이라고 본다.
앞의
시에서 [A]와 [B]를 비교하면서 그 소리를 어떻게 구성했는가에 착안을 하게 되면 바로 운율을 손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시어의 구성은
다음과 같이 시도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ㄱ) 연속된 시어의 소리들은 교합되어 시의 형식구조를 가능케 한다.
ㄴ) 시어의
소리를 엄격하고 밀접하게 처리하여 감각적인 의식을 자극한다.
ㄷ) 음색과 의성어(Onomatpoeia)를 통하여
공감각(Synasthetesias)을 가능케 한다.
ㄹ) 음색이나 음조를 표정으로 연상시켜 정감의 표현을 시도한다
ㅁ) 음을 맑게
반복하여 본능적인 쾌락의 표현을 시도한다.
운율에는 음성율(평측법(平仄法)·Stress system),
음위율(압운법·Rhyme), 음수율(조구법(造句法)·Syllabic)의 세 가지가 있다. 이것을 합해서 보통 운율이라고 한다.
리듬은
반복성을 기능으로 하여 일회의 음절의 경과로서는 충분히 형태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반복에 의하여 성능도를 강하게 하고, 그로
인하여 안정성을 더한다. 운율의 형태법칙으로서의 ‘이중성’은 여기서 배태(胚胎)하여, 이 이중성에 의하여 음절의 동화와 종합이 이루어진다.
이것을 운율의 전개라고 한다.
음성율이란 강약, 장단, 고저, 음질 등 말소리의 여러 속성들이 한 단위가 되어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경우를 말한다. 주로 구미시(歐美詩)나 한시에서 발전된 것이며, 우리 시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우리 말에도
고저 장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음율의 양식으로는 현저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영시(英詩)의 경우는 약음과 강음의 교착적 반복으로 리듬이
발생한다. 즉 액센트나 스트레스(Stress)가 있는 음절과 없는 음절이 확연하기 때문에 음절의 강약에 따른 리듬의 발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 유형에는 약강조(Lambus), 강약조(Trochee) 약약강조(Anapaest), 강약약조(Dactle)등에다가
모노미터(Monometer)에서 억타미터(Octameter)에 이르는 음보의 종류를 곱하여 활용하는 삼사십 종류의 원형구조가 있고 두음과 요음의
다양한 효과 및 각운(Rhyme)의 조직들이 종횡으로 얽혀서 있다.
음위율이란 두운요운(頭韻腰韻)과 각운(脚韻)이 있는 운율형식을
말한다. 두운은 글의 머리 부분에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요운이란 글의 중간에 같은 소리를 배치하는 것을 말하며 각운이란 글의 끝부분에 같은
소리를 배치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리듬의 양식이 구미시나 한시에서는 발달되었으나 우리 시에서는 극히 부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는 우리 말의
특성 때문인 것 같다.
음수율이라 하는 것은 음절의 수를 단위로 하여 규칙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영시의 경우에는 2개
이상의 음절이 모여 리듬의 기본단위인 음보(foot)를 형성하고, 다시 몇 개의 음보가 모여 행(line)을, 또 몇 개의 행이 모여
연(stanza)을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지는 시의 여러 가지 리듬 형식을 운율(metre)이라고 부르는데 영시에서는 음성율과
음절의 수에 의존하는 음수율이 리듬의 다양성을 최대한으로 확보하고 있다. 이런 영시의 형식과는 달리 중국의 고시(古詩)에는 오언절구·칠음절구가
있으며 일본에는 와까(和歌 5·7·5·7·7음절) 하이꾸(5·7·5음절)가 있으며 우리 나라의 시조는 3·4조 가사는 4·4조 등의 음수율로
정형시라고 인식되고 있다.
황희영(黃希榮)은 우리 시가의 음수율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한국의 운문체에서 음수율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며 기본적이거나 특징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지금까지 음수율을 마치 특징적인 것처럼 역설해 온
분들의 서술을 살펴본다면 다음과 같은 오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실증을 위한 자료 선택의 제한성을 들을 수 있다.
그들이 열거한 문헌들을 보면 ① 한시나 일본 신체시를 모방한 운문시 ② 타령이나 노래 가락조의 민요 ③ 월령가(月令歌) ④ 시조의 일부분 ⑤
가사의 구송조(口誦調)로 다듬어진 부분을 주로 인용하였다.
그러나 시조나 가사나 악장의 사(詞)를 전반적이고도 면밀하게 분석해 본 결과에
의하면 어느 하나도 음절수가 규식적(規式的)으로 고정된(중국과 일본의 정형시와 같은) 음수율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뿐 아니라 더 많고
다양한 시가의 문장을 대상으로 그 단어와 어절의 음절수를 계산했을 때에는 음수율의 복잡성은 더욱 명백해진다.
둘째는 우리 말의 형태학적
내지는 구문록적 이론에 의한 단어나 성분의 특질을 잘못 파악한 데에서 오는 판단임을 들 수 있다.
역시 우리 시의 음수율은 불완전한
것이다.
살으리 살으리 랏다
청산에 살으리 랏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으리 랏다
-<靑山別曲> 에서
이 노래는 3·3·2의 음수율로 구성되어 있다. 3개의 음절을 기본 단위로 해서 두 개의
음보와 두 개의 음절을 기본 단위로 하는 한 개의 음보로 한 행을 이루고 있으며, 3·3·2를 리듬의 이차적인 단위로 하는 4개의 행이 한
연(聯)을 이루고 있다.
이런 경우와는 달리 시조는 3·4조의 기본 율격이 있을 뿐이지 중국의 한시(우리 나라 포함)나, 일본의
와까(和歌) 하이꾸(徘句)처럼 고정된 음수율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시어의 표상성
시어는 ‘소리’와 의미를
포괄하는 시의 최소한의 단위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산문작가는 도구로서 언어를 사용하며, 시인은 사물로서 언어를 사용한다. 도구로서의 언어와
사물로서의 언어는 발레리(Valery, Paul)의 표현에 따르면 보행, 무용(舞踊)에 해당된다. 전자에선 실제적 효용성,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강조된다. 그러나 후자에선 비실제적 효용성, 곧 심미성이 강조된다. 수단으로서의 기능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시인에게 있어서 시어는 추상적으로 약속된 기호(記號)가 아니라 하나의 매개체이다. 이 때 매체는 언어의 미적 속성을 간직하고 시인은 그 속성을
찾아서 시어라는 미적 매체를 가능케 한다. 시어는 그 표상성으로 해서 언어의 의미적 요소를 추상성에서 구상화시키고 진술성을 변용(變容)시킨다.
시어의 음율성이 직접적 감각이라면 표상성은 내면적인 감각인 셈이다. 시의 매개체로서 구성되는 시어의 표상성은 「추상」(abstract)과
「구상」(concrete)을 합하고 「사상」(thought)과 「감정」(feeling)을 합하여 「이성」(reason)과
「상상력」(imagination)을 화합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그리하여 표현이 지각작용을 자극하여 시어의 진술성을 감각적이면서도 연상적인
작용으로 심미감을 얻게 된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나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김광균 <雪夜>에서
시어의 표상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예리한
감각에 상상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런 표상은 심중에 담긴 감각의 요소이며 이 요소 때문에 미적 체험을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시의 주제를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매체인 언어로 표현할 뿐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金洙映 <풀>에서
이처럼 어떤
대상을 관조하면서 거기서 얻어진 공감적 매체를 통하여 시인은 시어로 이미지화시키는 것이다. 시적 이미지를 루이스(Lewis, C.D)는 “언어의
그림”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데, 이 경우 시적 이미지를 언어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어의 표상성은 묘사성을 공유한다고 볼 수
있다.
영시의 예를 들어 보더라도 그렇다.
O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
That's
newly sprung in June;
O my love is like the melodie,
That's sweetry
played in tune
아 내 사랑은
붉고 붉은 장미꽃 같아
유월에 갓 핀 장미꽃 같아
아 내사랑은
노래와 같아
감미롭게 퍼지는 노래와 같다
이 시에서 ‘장미’와 ‘노래’의 두 가지 사물이 ‘사랑’과 관련되어
공감각을 일으키게 한다. 사랑을 장미에 비유한다면 장미꽃의 속성에서 사랑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공식으로 표현한다면 사랑=장미와
사랑=노래의 두 가지로 나타난다. 이 경우 장미나 노래라는 시어로 사랑을 이해하기 위한 상상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장미나
노래가 여러 가지 이미지로 구성되어 마음속에 표상작용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이미지론은 다음 장에서 본격적으로 전개하기로 한다. 그러나
시어의 매체적인 속성을 그 표상성에서 살펴 보면 그 표상성에는 언어로서의 모사성(模寫性)을 이미지화시켜서 감각적 지각(知覺)을 가능케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지화의 형태에 있어서는 ‘심리적 이미지’ ‘구상적 이미지’ ‘상징적 이미지’로 유형을 구분할 수 있다. 그리하여 시어가
내포하고 있는 미적 표현을 최대한으로 발휘하여 시인은 시를 시어로 구성한다.
(4) 시어의 모호성
시가
정서의 응결(Condensation of emotion)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산문과 다른 바가 있다. 그러므로 시가 지니는
이해불가능성을 본질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시의 전달 면에서 볼 때 시는 시인의 내면세계를 언어라는 기호로 표현하게 된다. 그러므로 시에의 접근을
위해서는 기호화된 언어의 분석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언어의 분해가 명확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
모호성(模糊性;Obscurity)이라는 것이다.
梨花에 月白하고 銀漢이 三史인재
一枝春心을 子規야 알랴마는
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이 시조 전반에 흐르고 있는 모호성을 낱낱이 지적하는 것을 약하거니와 ‘多情도 병인 양하여’의 한
대목만 놓고 말해 보기로 하자.
‘多情도 병인 양하여’의 주체는 과연 어느 것일까? 자규일까? 작자일까? 자규도 될 수 있고 작자도 될
수 있다.
‘그 주체가 만약 자규라 한다면 일지춘심을 자규가 알까? 그렇지만 그것쯤은 알 테지. 그 춘심을 알기만 한다면 자규는 또한
다정다감한 주인공이 될 것이니, 그 다정다감이 도리어 병통이 되어서 저와 같이 청승스럽게 우는구나. 그리하여 그 우는 소리 때문에 나(作者)도
잠을 못 이루겠다.’
하는 의미가 될 것이요 만일 ‘多情도 병인 양하여’의 주체가 작자라면 일지춘심을 자규가 어떻게 알까? 그렇지만,
그것을 알기에 저렇게 구슬피 우는 게 아닌가. 배꽃이 난만하고 밝아서, 그렇지 않아도 심회(心懷)를 진정할 수가 없는데, 두견조차 저렇듯
우짖으니, 아! 나(作者)야말로 다정다감한 것이 참으로 병통이로구나.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구나!
이렇게 어떤 이해 불가능성과
만나게 되는 것을 모호성임을 다시 한 번 실증했다.
용어 면에서 본다면 모호성의 상대어는 명료성이다. 명료성에서는 상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손 쉽게 언어, 즉 기호의 지시와 접할 수 있다. 법조문, 신문기사, 광고문, 통지서 따위는 명료성을 생명으로 하지만 모호성은 베일 속의
신부처럼 신비성을 내포하는 가운데 고도한 정신 내부의 상상력을 자극시킨다. 뿐만 아니라 환상적 경지에까지 이르는 것이다.
이런 모호성은
압축과 생략의 방법에서 초래되는 현상이다. 과학적 문장에서는 오류를 범하는 일이지만 시에서는 오히려 의미를 풍부하게 하고 다양하게 해주는 복합적
효과를 동반한다.
(5) 시어의 애매성
시어의 애매성(Ambiguity)은 언어의 시적 기능을 살피면서
도출했던 자의성의 개념과 시적 언어의 구조성을 살피면서 도출하던 복합기호적 특징, 곧 웰렉(Welllek, R)과 워렌(Warren, A)이
지적한 의미의 애매모호성이라는 개념에 의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엠프슨(Empson William)의 비평용어 애매성은 일반적으로 둘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경우에 일컫는 말이지만, 엠프슨은 넓은 뜻에서 한 언어가 양자 택일의 반응을 줄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그 언어의 뉘앙스를
애매성이라고 부른다. 모호성이 미학적인 근거에서 설명된다면 애매성은 어학적인 근거에서 해명되어야 할 것이다. 애매성은 시어에 있어서의 장점이며
시어가 지니는 특징으로 나타난다. 엠프슨은 애매성을 일곱 타입으로 나누어 ‘曖昧의 7形’(Seven Types Ambiguity)라고 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① 한 단어, 또는 한 문법 구조가 동시에 다양하게 작용하는 경우
② 둘 이상의 의미가 한
단어 또는 한 구문 속에 용해되어 있는 경우
③ 두 개의 관념이 문맥상 어느 것에도 다 알맞기 때문에 결부되어, 한 단어로써 동시에
표현되어 있는 경우
④ 표현된 둘 이상의 뜻이 서로 모순되면서 결부되어, 작자의 한층 복잡한 정신상태가 드러난 경우
⑤ 어떤
관념을 작가가 써 나가면서 발견하거나 어떤 때는 부분적으로밖에는 나타날 수 없는 경우, 예를 들면 직유가 사용된 경우 어느 의미도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고 벌여 놓은 두 의미의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동하여 직유는 양자의 중간에 머물고 있는 경우.
⑥ 어떤 표현이
동의이어(同意異語)의 반복에 의하여. 모순에 의하여, 서로 어긋난 표현에 의하여, 어떤 의미도 나타내지 않는 경우, 이 경우 독자는 자기
나름대로 표현을 다시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나 대부분의 경우 모순을 내포하기 쉽다.
⑦ 한 단어가 가지는 두 의미가 문맥상 끝까지
대립되는 경우, 이 경우에는 작가의 정신에 분열이 있음을 보여 준다.
엠프슨은 리차드(Richad, G. P)의 제자로서 시어의
애매성을 중시하고 그것을 이론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애매성은 언어학적 견지에서 다음과 같이 음성, 문법, 어휘의 삼국면에서의
구명을 전제로 한다.
① 음성적 애매성 - 동음이의어(homonymy hear-here)
② 문법적 애매성 - 형태상의
다의성(desirable-eatable)
③ 하나의 소리에 여러 가지 의미가 결합되는 다의어(多疑語, polysemy),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낱말이 소리를 같이하는 동음이의어를 구분, 그 과정을 설명할 때.
이와 같은 세 가지 국면 중에서도 ③의 경우를 시에서는
중요시한다. 시는 시인의 심리적 면의 델리킷함과 그 복잡성 때문에 구문의 수용자세에 불확실성의 원초적 단계가 내재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특수성에서 애매성이 시작된다.
앞에 든 엠프슨의 일곱 가지 애매성의 유형에 따른 우리 나라 시의 예를 들어 살펴 가면서 애매성의 특질을
실증해 본다.
① 한 단어의 경우
동그라미 속에
하늘이 있고
그 하늘 속에
오순도순
모여 살데
동그라미 속에
옹달샘이 있고,
헤엄치는 구름 속에서
구슬이 알알이 맺히데
李基班의 시 ‘달래마을’의 일부이다. 여기서 ‘동그라미’는 1)원(圓), 2) 지구, 3) 평화, 4)화합 등을, ‘하늘’에서
1)천(天), 2)희망, 3) 특정 공간 등을 나타내고 있는 애매성을 볼 수 있다.
② 문법적 구조의 경우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徐廷柱의 문둥이 전문이다. ‘꽃처럼’ ‘붉은 울음’인지, 아니면 ‘꽃처럼 붉은’ ‘울음’인지 애매해진다. 그러나 울음의 주체가
‘문둥이’라고 볼 때에 ‘꽃처럼 붉은’ 으로 보아야 울음의 빛깔로서의 뜻이 통하게 된다.
③의 경우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韓龍雲의 ‘님’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속성은 이루 말할 수 없으나 1)조국 2) 사랑하는 임
3) 스승 4) 벗 등의 많은 애매성을 나타낸다.
미역국은 인생을 거꾸로 걷게 한다.
金洙暎의 ‘미역국’의
일부이다. 이 시에서 ‘미역국’은 1)실패 2) 좌절 3)한국적 특성 4) 전근대적인 인식 등의 애매성이 논리적 혼란으로 나타나고 있다.
④의 경우
한 一字로 껴안고
큰 大字로 드러누워
어머님께 無로
절로 그렇게 돌아간다
송욱의 ‘한일자를 껴안고’의 일부이다. ‘한일자’와 ‘큰대자’는 서로 모순된 두 개의 상황이 관련되어 다양한 사실을 추정케 하는
애매성을 볼 수 있다.
視覺의 이름을 節約하라
李箱의 ‘綠에 관한 覺書7’의 일부분이다. ‘시각의 이름’에서
사물관조 ‘나’ 凝視體의 多樣性을 볼 수 있고 ‘절약하라’에서는 ‘아껴라, 유효하게 사용하라’라고 해석할 때 그 애매성은 전혀 다른 형태로 이
시를 이해토록 한다.
⑤의 경우
물과 돌이 합창하는
개울 소리는
빗소리처럼
하늘에 어울리다
하늘에 찬다
수풀은 모여들어
오히려 기도처럼
넋을 잃는다
송욱의 <개울> 전문이다. 이
시에서 ‘물’과 ‘돌’의 합창을 ‘개울 소리’에서 찾고 다시 ‘개울 소리’는 ‘빗소리’처럼 하늘과 어울린다. 여기서 ‘오히려 기도처럼’ ‘넋을
잃는다’는 표현은 애매성을 보이고 있다.
⑥의 경우
죽어라 돈을 받기보다는
죽어라 돈을 받기 전에
김수영의 <네 얼굴은>의 일부이다. 한 단어가 가지는 두 의미가 대립되는 가운데 그 애매성은 작자의 정신에 분열을
준다.
언어의 뉘앙스가 다소 가벼운 것이라 하더라도 같은 언어에 이자택일적 반응을 줄 여지를 부여할 때, 그것을 애매라고 부른다.
(6) 시어의 신기성
현대시가 차츰 어려워짐에 따라 그 난해성에 대한 논의가 있어 온지 이미 오래다.
엘리어트(Eliot, T.S)는 첫째로 시인 자신이 모호한 표현이 아니고서는 표현할 수 없는 개인적 사정 때문이라고 말하고, 거기에다 난해성은
신기성 바로 그것에 의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고 신기성(novelty)을 설명한 바 있다. 신기성이란 새롭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훈련된 고정양식에
의해서 기호분해가 불가능할 때에 일어나는 난해를 일러 말한다.
현대시가 노래하는 시에서 생각하는 시로 바뀌면서 사실은 난해한 시가 되고
말았다. 시가 어려워야만 현대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차츰 난해해지고 있는 것은 시가 우리에게 설명해 주지 않는 시가 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시를 읽는 방법이 우리에게 없으며, 또한 비평의 방법도 없어 현대시를 우리에게 인도해 줄 만한 안내자나 안내서가 없는
실정이다.
인간은 습관을 통해서 고정관념이 생기게 마련이다. 일찍이 N, R, F Maier 박사가 쥐를 가지고 실험한 결과 동물은 일단
고정관념이 나타나면 상황이 바뀌어도 그 상황에 적합한 반응을 배울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물 뿐만이 아니라 인간도
<해결불능>과 관련시켜 S,I Hayskawa는 다음과 같이 5단계를 분류하였다.
제1단계로 그들은 어떤 일정한 문제에
직면하면, 일정한 선택을 관습적으로 하게끔 훈련된다. 제2단계는 상황이 바뀌는 경우, 그 선택이 기대했던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 것을 알고 크나큰
충격을 받는다. 제3단계에 와서 얼마간 그들은 처음의 선택을 고집하여 결과 여하에 불구하고 고정된 선택으로 행동을 되풀이한다. 제4단계에 이르러
기진맥진하여 행동을 포기한다. 마지막 제5단계로 밖으로부터 강제당하면 다시 처음에 훈련된 대로 반복된 행동을 하며 결국 냉소적으로 되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러므로 살고 있는 사회에 적응할 줄 알아야 함과 동시에 역사적 변천 속에서 항상 변모해 가고 있는
존재임을 의식할 때, 어떤 습관에 의해 고정된 반응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벗어날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인간에게 고정관념이나
제도적 타성에 사로잡혀 좀체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기 때문에 새로움으로 해서 발생되는 생소함이나 난해, 즉 신기성이라는 것은
독자들의 시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제도적 타성에서 빚어지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기성에 적응치 못하는 것은 새로운 가치체계에 무미한 소지이며,
변화에 대한 변화와 문화에 대한 공포로 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로 인하여 낙후되고 있는 우리의 현대시적 상황에서는 검토되어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대시의 이해불가능성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할 수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가장 비중이 큰 것은 이미 축적된 반응, 그것에
의하여 고정된 비평의식, 다시 말해서 선입감으로 시를 이해하려는 데서 오는 경우라 하겠다. 덧붙여 말하자면 특정의 시가 어떤 양식에 따라
구성되었을 때, 그 사실을 다른 시에까지 적응시키려는 데서 이해불가능성은 야기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시의 이해불가능이 지각의
과정에서 사물의 기호화(signadization)로부터 상징화(symbolie acuion)로 향한다면, 언어의 자각에서 상징에의 돌진, 그것은
현대시에 부여된 과제이다.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을 탐구하고 모색하여 언어의 상징적 수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에 새로움의 추구는
신기성으로 나타나는 데에 시적 효과는 고조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