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산행의 목표가 되어 버린 100대 명산 완주 산행이 드디어 마지막을 향해 달려 가고 있다. 남은 산은 하나, 바로 천성산이다. 90번째의 산을 다녀오고부터 피날레가 누가 될까 하고 마음 졸였는데, 여러 번에 걸쳐 시도했으나 인연이 쉽게 닿지 않던 먼 경남의 산이 완주의 종결지가 되었다. 이번에도 결정이 쉽지 않았다. 천성산에 간다는 안내산악회는 기대하기 어렵고, 계절도 겨울을 향해 치닫고, 회사 일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그래도 일단 저지르기로 한다. 이번에는 동서울터미날에서 고소버스를 타고 간다. 하고픈 일이 있으면, 그것이 위법하거나 부도덕하지 않다면, 저지르고 보는 것이 이제나 저제나 하고 마음조리는 것보다 더 나음을 경험이 말해 주고 있다. 천성산은 경남 양산에 위치한 산으로 예로부터 깊은 계곡과
폭포가 많고 경치가 빼어나 소금강산이라 불리었으며,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당나라에서 건너온 1천명의 스님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여 모두 성인이 되었다는 것에서 이름이 명명되었다 한다. 봉우리 이름이 혼란스러워 과거에는 922m봉을 원효산, 812m봉을 천성산이라 불렀으나, 양산시에서 원효산을 천성산
주봉, 천성산을 천성산 제2봉으로 새롭게 이름을 정하여
주었다. 천성산 제일의 경관은 내원사 계곡과 화엄늪이라 한다. 넓은 암반을 하얗게 수놓으며 크고 작은 바위 사이를 흘러내리는 내원계곡은 절경이다. 특히 천성산 2봉 고스락에서 내원암 계곡으로 내려오는 산길 곳곳에 위치한 바위들과 성불암 계곡과 내원암 계곡 사이의 산등성이에 박혀 있는 바위들은 전망이 좋아 이곳에서 주위를 조망하는 것도 천성산 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라 한다. 화엄늪은 흔치 않은 고원 습지로 가을날의 억새가 그리 좋다 한다. 늘 천성산 하면 내원사-천성산 2봉 중심으로 코스 구상을 했는데 오늘은 아쉽게도 고속버스를 이용하는 관계로 양산터미날에서 상대적으로 가까운 홍룡사-화엄늪-원효암-홍룡사 원점회귀 코스를 택했다. 발 빠르게 움직인다면 산행을 마치고 오후 5시 귀경 고속버스를 타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
지도를 보며 산행 코스를 그려본다. 양산터미날에 내려 택시를 이용하면 12시 30분 전에 홍룡사 주차장 혹은 홍룡사 입구에 도착할 것이고, 홍룡폭포와 화엄늪 억새밭을 거쳐 천성산 정상 부근과 원효암을 지나 홍룡사로 돌아 올 작정이다. 순수산행 시간은 4시간, 택시가 홍룡사까지 올라 가고 쉼 없이 걷는다면 3시간30분의 산행도 가능할 것 같다.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지만 오늘은 놓치면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강행하기로 한다.
< 희망사항 >
오늘 산행은 오롯이 나와 내 꿈을 위한 산행이다. 고속버스를 타고 간다는 평소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방법까지 동원하며 무리를 해서라도 천성산에 올라야 하는 이유는, 등산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으며 부터 막연하게 꿈꾸었던 100대 명산 종주라는 희망을 올 해가 가기 전에 꼭 이루고 싶기 때문이다. 천성산 산행을 마치고 하산을 완료하면 ‘수고했다. 김 억 한’이라고 큰 소리로 외쳐 보고 싶다. 또 하나, 기회가 된다면 내가 나에게한 ‘100대 명산 완주’기념패를 만들어 주고 싶다. 아니 반드시 그렇게 할 것이다. 그 기념패에는 내가 그간 다녀온 산을 상징하는 사진도 넣고 싶다. 이곳 저곳에서 끌어다 모은 산행 정보를 요약하면 ‘천성산은 경남 양산에 위치한 900미터 급의 산으로, 원효대사의 전설이 서려있고, 꽃과 계곡과 암봉과 억새가 유명해 봄, 여름, 가을에 등산하기 좋은 산이다’라는 것이다. 설명은 장황하게 늘어 놓았으나 다른 산에 비해 여전히 낯설다. 머릿속에 코스에 대한 상(像)이 그려지지 않는다. 꽃과 계곡은 계절에 맞지 않고, 원효대사 이야기는 전설이니 실체가 없을 것이고, 이번에도 믿을 건 억새 평원과 유서 깊은 사찰과의 인연이다. ‘초겨울의 평원과 절’이라 언뜻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미지가 조화를 이룬다면 최고의 산행이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가능하면 발은 편하고 눈은 황홀할 것으로 추정되는 코스로 길을 잡았는데 현실은 어떨지 모르겠다. 천성산이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에 선정된 것은 ‘금강산의 축소판이라고 불릴 정도로 경관이 뛰어나고, 특히 산정상부에 드넓은 초원과 산지습지가 발달하여 희귀식물과 수서곤충이 서식하는 등 생태적 가치가 높은 점을 고려하여 선정’ 되었다 한다. 코스와 계절 관계로 철 지난 억새의 향연만은 머릿속으로만 그려야 할 것 같다. 완주의 성취감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의미 있는 산행을 하고 싶다. (이상은 산행 전 준비상황을 기록한 것이고 실제 산행은 이와는 달랐다.) < 양산 가는 길에 >
아들의 대학 합격으로 들뜬 밤을 보내고 맞는 새벽, 언제나 그렇듯이 망설임이 찾아 든다. 올 겨울 가장 춥다는 날씨 때문이다. 두터운 보온 겉옷과 내복을 만지작거리다 다시 집어 넣는다. 양산은 그리 춥지 않을 것이니 혹 짐이 될까 싶어서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클램폰은 챙겨 간다. 무거운 몸을 안고 동서울시외버스터미날로 향한다.
날이 차다. 표를 사고 아침을 먹는다. 몸이
무거웠던 이유는 배가 고파서였나 보다. 음식이 들어가니 몸이 한결 거벼워진다. 불과 9명의 승객을 싣고 버스는 양산을 향해 떠난다. 고속버스를 이용할 만큼 이번 산행을 꼭 가고 싶었다. 크고 작던
간에 무언가를 마무리한다는 것은 노력과 결단이 필요한가 보다.
< 홍룡사에서 화엄늪 >
톨게이트 부근에서의 정체로 인해 예상보다 25분 늦게 양산터미날에
도착했다. 지체된 시간을 만회하려고 서둘러 택시에 오른다. 15분만에
홍룡사 부근에 도착해 비탈을 오르는데 빙판에 차가 헛바퀴를 돈다. 편안함은 여기까지 이젠 내 발로 길을
가야 한다. < 홍룡사 전경 / 홍룡사 앞 대숲 > |
홍룡폭포로 향한다. 겨울 치고는 제법 많은 물이 내리 꽂히고 있다. 이 역시 시원하다. 주위를 둘러 보니 길이 없다. 다시 일주문 방향으로 내려간다. 가홍문 우측으로 길게 계단이 보인다. 고도 250미터 어름, 정상까지700미터 정도를 치고 올라야 한다. 말 없이 눈 덮인 계단에 발을 올려 놓는다. (여기에서 지도를 잘 살폈어야 했다. 지도를 두 개나 가지고 왔으면 출발 전 생각이 길에 자신이 없어서인데 막상 중요 포인트에서 배낭을 여는 수고가 싫어 그냥 그 알량한 감으로 길을 찾아 나서고 후에 후회했다. 홍룡사 대웅전 뒤로 화엄늪 초소로 향하는 길이 있었고 그 길로 올랐다면 예정대로 원효암을 거쳐 하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길은 계속되는 오르막이다. 은근하게 종아리와 허벅지를 옥죄는 오름이 계속된다. 저 봉우리만 넘으면 평지 길이 나오겠지 하고 힘을 다해 오르는 몇 발자국 못 가 다시 오름이 시작되고… 그렇게 30분 이상을 묵묵히 걸었다. 눈 덮인 긴 오름이 힘에 겹다. 주위에 풍경은 그리 감동적이지 못하다. 게다가 흐른 날씨는 간간이 눈까지 뿌린다. 허기가 찾아온다. 돌 무더기가 있는 공터에 주저 앉는다. 잠시의 쉼을 가져본다.
길에 이정표시가 전혀 없다. 혹시 길을 잘못 든 것 아닌지 지도를 펼친다. 길은 있다. 그런데 그 길 사정은 ‘을씨년스러움’ 그 자체다. 간간이 내려오는 산객에게 길을 물으니 화엄늪 까지는 한참을 가야한단다. 그들 얼굴에도 왠지 모를 피곤함이 묻어있다.
흔히 산을 혼자 가면 성찰행, 둘이 오르면 대화행, 셋이 가면 친교행. 등산에는 정원이 없다. 여럿이 가는 산행에서 감동을 동료와 나눌 수 있지만, 혼자만의 산행에선 산과 공명(共鳴)해야 한다. 인파에서 자유로운 호젓한 산길에서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10시 방향으로 흐르는 능선 끝에 누런 평원이 보인다. 직감적으로 화엄 늪임을 감지한다. 고도는 700미터 대로 올라선다. 이제 오름이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힘을 낸다. 고도가 높아감에 따라 눈이 많아진다. 길도 조금씩 험해진다. '화엄'은 사라져 버렸다.
< 홍룡폭포 전경 / 반가운 이정표 >
다시 터벅터벅 걷는데 이정이 나타난다. 홍룡사 1.4km, 화엄늪 1.4km, 원효암 0.4 km. 거의 한 시간을 걸었는데 1.4km밖에 오지 못한 것이
의아했고, 원효암이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음에 놀랬으나, 화엄늪이
가시권 안에 들어 온 것이 기뻤다. 눈 덮인 산 어깨 길을 걷는다. 고도는
이미 800이 넘었다. 잠시 평지 길이 이어지더니 바위 길이
나타나고 오르내리막이 반복된다. 바위 내리막에서는 위험을 느낀다. 화엄으로
가는 길이 왜 이리 험하단 말인가.
< 눈 덮인 조릿대 길 / 화엄벌 원경 >
바위지대를 벗어나자 조릿대 길이 이어진다. 흰
눈과 어우러진 조릿대 길은 내가 좋아하는 길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억새의 향연이 나를 부를 것이라는
희망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과 실제는 다른 법, 또다시 몇 번의 오르내림을 반복한 끝에 화엄의 세계에 도착했다. 시각은 2시 10분 무렵. 차가운
겨울 바람에 억새가 넘실거리다 눕는다. 장엄한 화엄세계가 내 눈 앞에서 펼쳐진다. 이 겨울에 이 높은 곳에서 색조를 느낄 수 있다니 감동이다. 지난 1시간 30분의 노력의 산물이려니 한다.
빨리듯 억새 밭으로 나아간다. 절정의
계절은 지났지만 억새는 하얀 눈 속에서도 그 황홀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갑고도 고마운 일이다. 여인네의 가르마 길을 따라 억새밭이 길게 이어진다. 평원의 끝에서
무언가가 나를 부르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 앞으로 나아간다. 뒤편 언덕 위가 홍룡의 정수리인가
보다. 철조망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군부대가 주둔해 있는 것 같다. 아스라한
것보다는 구체성울 띈 것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정상보다는 길게 이어지는 화엄벌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습지보호구역 입간판 앞에서 천성산에서 유일하게 내 얼굴이 들어간 사진을 찍었다. 바람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다. 털모자에 윗옷에 딸린 모자까지 덮어쓴다.
< 화엄벌 풍경 1 >
화엄벌을 바라보며 잠시 원효와 의상에 대해 생각에 잠긴다. 의상이 왕족 출신의 엘리트 승려라면, 원효는 귀족불교를 배척하고 스스로 저잣거리로 나와 포교의 씨를 뿌린 대중불교의 선각자였다. 천성산은 원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는 산이다. 화엄사상의 근본이 사물의 상호의존성과 조화이니 이 드넓은 평원은 무한한 조화의 상징일 것이다.
걷기에 그만인 길을 무념무상으로 나아간다. 이순간은 원효도 의상도 없다. 오직 화엄벌의 억새 길만이 있을 뿐이다. 습지보호초소 부근 캐른이 있다. 누군가의 소망이 쌓인 곳이 랜드마크가 되어 버렸다. 우측으로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억새밭 밑으로 늪의 기운을 느낀다. 좌측으로는 양산 시가지를 둘러싼 산야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아스라하다.
< 화엄벌에서 양주마을 >
고민에 빠진다. 돌아갈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돌아갈 길은 멀고 추워 보이고, 나아가는 방향의 길은 낮고 따스해 보인다. (큰 지도에는 화엄벌에서 정상 어름을 지나 원효암으로 가는 길의 표식이 분명하지도 않았다.) 천성의 눈 덮인 정수리에 눈 길을 한번 주고는 밝고 편안한 곳으로 발 길을 나아간다. (돌아와 생각해보니 여기서 작은 지도를 보았어야 한다. 작은 지도에는 선명하게 길이 안내되어 있었다.)
< 화엄벌 풍경 2 >
캐른을 지나 석계방향으로 하산 길에 나선다. 아쉽다, 이 멀리까지 왔는데. 그러나 상황을 알 수 없는 눈 길과 어둠의
기운이 감도는 흐린 날씨에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다. 나아가는 방향에는 억새밭도 길게 이어지지만 무엇보다 양주 시가지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와 안심이 되었다.
< 화엄벌 풍경 3 >
캐른에서 10여분 걷자 화엄벌은 흔적도 없어지고 대신 임도 길이 떡하니 나타났다. 직진하면 양주마을(4.4km), 좌측은 내원사(3.1km), 우측 길에는 차단기가 있다. 멀게만 인식되던 내원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니 놀랍다. 이제와 생각해 보니 천성산은 그 명성과는 다르게 등산 안내 표지판은 개판이었다. 화엄벌에서는 하나의 길 안내판도 없었다. 이왕 길을 냈으면 최소한의 길 안내는 해 주어야 맞지 않는가? 작은 배려가 아쉬웠다.
양주마을 향해 가는데 길의 흔적이 희미하다. 한참 헤매다 임도 길과 만나고 이후는 임도와 산 길을 반복하며 지루한 산행을 했다. 길을 걸으며 계속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이 가시지 않았다.
양주마을이 가까워지고 있다. 반대편 하늘 아래 커다란 산군(山群) 이 흐르고 있다. 아마도 멀리 있는 산은 재약산과 천황산일 것이고 그 우측에 있는 것은 신불산과 간월산일 것이다. 이 삭막한 임도 길에서 보물을 본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 천황산 재약산 능선 / 양동마을과 신불산 간월산 원경 >
< 에필로그 >
서울행 버스가 대구 어름을 지난다. 길 위 사위는 어둠에 덮였고, 멀리 도시는 불빛을 토해내고 있다. 귀경 길, 차 창으로 어둠이 덮인 도시를 바라보는 것은 늘 감상에 젓게 한다.
오늘 산행을 복기해 본다. 한마디로
아쉽다. 특히 하산 길이 그렇다. 화엄늪에서 눈에 보이는
편한 길을 버리고 당초 계획대로 다시 천성산으로 올라 원효암 방향으로 내려 왔어야 했다. 그랬으면 길은
더 험했을지 모르나 최소한 길고 단순한 임도 길 산행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고속버스에 택시에 요란을
떤 것 치고는 3시간 10분의 산행은 100명 명산 완결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창피하다. 이를 만회하자면
오늘을 새로운 시작의 기회로 삼아야겠다. 그간의 산행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미비했던 산 중심으로
제대로 된 산행을 다시 시작하리라.
아쉬운 완결,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그러나 비록 끝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해서 그간의 성취가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내가 나를 치하한다. '수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