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무기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허허."
사마무기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흘러 나왔다.
아무리 그라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다.
그래도 설마 했었다. 한데 금룡단주가 권왕 아운이란 것이 확인되자,
천하에 사마무기라도 당혹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대단한자다. 후후 무림맹 밖이라면 다른 힘을 이용해서라도 그 자의 입을 막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림맹 안이고 총사의 연인이라면 정말 어렵게 되었다.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안전한 곳을 택해 들어온 셈인가? 이게 우연인가 아니면 그 자의 심중인가?'
사마무기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우연이길 바랬지만, 그것은 자신의 마음일 뿐이다.
사실을 바로 직시 할 수 있어야 올바른 판단이 서고,
그래야 상대에 대한 올바른 대처 방안을 만들 수 있다.
마치 유령처럼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 곳이 무림맹 안이다.
어떻게 보면 호구 속으로 당당하게 들어온 셈이었다.
그러나 이 안에서라면 사마무기도 무림맹주도 함부로 권왕 아운을 죽일 수 없다.
이목이란 것이 있고, 숨은 힘을 쓰기에 가장 불편한 곳이 또한 무림맹이었다.
아마도 권왕 아운은 그 것도 감안했으리라.
"그럼 아운이 북경 하씨문중의 장남이란 것도 확실한가?"
"확인해 본 바로는 분명합니다."
"기가 막히군. 결국 천하가 다 속았다는 것인가?
하긴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명가의 아들이 가출해서
전혀 엉뚱한 무인이 되어 나타나리라 생각을 했겠는가?"
사마무기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은 승부욕이었다.
'그래 네가 권왕이라 주먹은 나보다 앞설지 모르지만,
그 보다 더 무서운 것이 사람의 심계라는 것을 알게 해주마.'
사마무기는 권왕 아운에 대한 무서운 승부욕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명예를 건 사내로서의 승부욕과 함께 수컷으로서의 본능과도 같은 승부욕이었다.
비록 흑룡과 북궁연을 중간에 두고 경쟁을 하였지만,
그는 한 번도 흑룡을 자신의 적수로 생각하지 않았다.
힘은 강하지만, 성격이 불같고 의외로 교활한 면이 있는 흑룡은 적수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권왕은 다르다.
무로만 따져도 그의 명성은 흑룡과 비교할 수 없고,
그가 아는 한 아운의 심계도 보통 이상은 훨씬 넘고 있었다.
그리고 아운은 태중 혼약이란 유리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무기는 나름대로 자신감을 지니고 있었다.
우선 아운의 머리가 아무리 뛰어나도
심계와 머리를 쓰는 부분에서 자신의 상대가 되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결국 이 승부는 자신의 머리와 아운의 주먹 중 더 강한 것이 이길 것이라 본 것이다.
그리고 북궁연의 나이 삼십이 내일모래다.
나이 어리고 툭하면 주먹질만 해대는 아운에게 쉽게 마음을 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제 처음 만난 것이나 마찬가지라 했으니 둘이 가까워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안에 자신이 먼저 아운을 죽이고 북궁연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아직 아운과 북궁연의 사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지는 못했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북궁연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조차 바로 이틀전에 알았다.
무엇을 조사하고 알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사마무기의 시선이 다시 밀영일호의 얼굴로 향했다.
"그런데 지금 아운의 행보가 명왕당을 거처서 봉황대로 향했다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철혈사자대의 일부가 금룡단으로 향했습니다."
"금룡단으로 말인가. 이유는?"
"우선 금룡단주가 금룡단원들 일부를 고문하고 있다는 말이 돌았습니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어차피 어제 네 명이나 되는 명문의 제자들이 처형당했습니다.
비록 그 정당성은 인정되었지만,
다른 금룡단마저 고문을 당하고 있다면 철혈사자대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현재 철혈사자대는 장로원의 승인을 받고 바로 금룡각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사마무기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감돌았다.
"후후 그 소문이 언제 났는지는 모르지만, 정말 속전속결이군.
아주 손발이 잘 맞아. 그렇다면 장로원의 누군가가 나섰다는 말인데. 누굴까?
그거야 금방 알 수 있는 사실이고, 금룡단주가 명왕당에 간 이유는 무엇인가?"
밀영일호는 조금 망설였다.
그는 자신의 주군이 총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대답을 안 할 수는 없었고, 거짓을 말할 수도 없었다.
"패도문의 노가 남매가 음약으로 총사를 욕보이려 했다고 합니다.
마침 금룡단주에게 걸렸고, 그 공모자들을 잡으려 한다고 합니다.
권왕은 명왕당주를 거의 불구로 만들어 놓고 공범으로 지목된 두 명의 향주를 잡아 갔습니다."
사마무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것이 사실인가?"
"다른 것은 모르겠지만, 노가 남매가 총사를 욕보이려 했던 것은 사실인 듯합니다."
"패노문의 노자춘 따위가 감히......"
사마무기의 표정에 살기가 감돌았다.
그로서도 이 일은 그냥 묵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패도문이란 말이지 결코 그냥 두지 않겠다."
이를 갈아 붙인 사마무기는 잠시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다행히 총사는 무사하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면 지금 흥분할 일이 아니었다.
'권왕 이번일은 정말 고맙게 생각한다. 대신 죽을 때는 편안히 죽게 해주마.'
사마무기는 진심으로 권왕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건 그렇고, 공범자인 두 사람의 향주가 누구누구인가?"
"사도룡과 허진걸이라고 합니다."
사마무기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걸렸다.
"그런가? 그렇군. 과연 만만한자가 아니다."
밀영일호가 무슨 뜻인지 몰라 사마무기를 바라본다.
"그 두 사람은 호연세가의 개들이다.
그 동안 북궁세가를 비방하고 다녔을지언정 이번 일을 공모할 만한 배짱은 없다.
아마도 권왕이란 자는 노가 남매의 일을 빌미로
평소 북궁세가에 위해를 가했던 자들 몇 명에게 본보기를 보일 작정인 것 같다.
그것으로 북궁연에게 잘 보이려 하는 것인가? 좋은 생각이군."
"그렇다고 해도 이번 일에 공범은 있을 것 같습니다.
우선 노가 남매가 구했다는 음약인 도화음정연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음약이 아닙니다."
"그건 분명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굴까?"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마무기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렇군. 누군지 알 것 같다.
설마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실 줄이야. 서둘러야겠군.
만약 내 생각이 옳다면 금룡단주인 권왕 아운을 잡을 수 있다. 허허,
그래도 혹시나 해서 준비를 해 놓았던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는 것인가?
그래도 그것만으로는 확실치 않다."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사마무기의 표정이 무거워진 것을 본 밀영일호는 의아했지만,
감히 더 묻지 않았다.
이미 자신의 주군은 이번일의 배후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자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생각보다 훨씬 더 거물일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와룡의 표정이 굳어질 정도로.
그리고 그 와중에도 그것을 이용해서 권왕이자,
금룡단주인 아운을 잡으려 하는 사마무기는 분명코 무서운 인물이었다.
풍룡백인대의 부대주는 패왕도(覇王刀) 가원희(可元熙)였다.
사라신교와의 대전당시에 보여 주었던 패왕도 가원희의 무공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될 정도로 그의 무공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현 무림맹에서도 가장 강한 무인들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무공이 얼마나 강한지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결코 다섯을 넘지 않았다.
대주인 조원의가 사실상 맹주를 대행하고 있는 지금
가원희는 풍룡백인대의 대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가원희는 풍룡백인대의 부대주로서 자부심이 강한 인물이었다.
실제 풍룡백인대의 평균 무공은 철혈사자대보다도 한 수 위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원희의 무공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최소 한 수 이상은 더 강했다.
그런 가원희의 얼굴이 조금 굳어 있었다.
가원희의 옆으로는 네 명의 조장들이 도열해 앉아 있었다.
풍룡백인대의 조장들은 무리맹에서 능히 백대 고수 안에 들어가는 자들이었다.
"금룡단주가 권왕 아운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가원희의 말에 조장들은 모두 얼굴이 굳어졌다.
"조금 전 대주님과 사마군사가 보내온 명령이다.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권왕을 죽여야 한다.
마침 고조장의 일로 인해 금룡단주와는 충돌이 불가피해졌다.
이것은 어쩌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그 자가 이리 오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삼조 조장이 어이없는 실수를 하였지만, 좋은 일 한 가지는 해 준 셈이다."
네 명의 조장들은 금룡단주가 권왕이란 사실에 충격을 받은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정말 아운이 권왕이라면 그들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수 없는 사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얼굴엔 경외감이 어려 있었다.
적아를 떠나 같은 무인으로서 아운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어떤지 충분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세상이 아는 것과 적인 그들이 아는 권왕 아운은 다르다.
그들은 아운에 대해서 많은 연구를 한 만큼 누구보다도 더 잘 알 수밖에 없었고,
누구보다도 아운에게 당한 광풍사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운이란 이름 앞에 더욱 경외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들은 전사의 본능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들의 표정엔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강자를 꺾고 싶다는 욕망의 표현이었다.
제이조 조장인 철궁파산(鐵弓破山) 곽윤이 물었다.
한 개의 화살로 산 하나를 파괴할 수 있다는 곽윤은
궁술 하나만 따진다면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절대 고수였다.
"금룡단주가 권왕이란 사실도 놀랍지만,
지금 부대주님의 말을 들어보면 고당군 조장이 무엇인가 큰일을 저지른 것 같습니다.
대체 고당군은 무슨 일로 금룡단주와 척을 진 것입니까?
권왕인 금룡단주가 고당군을 잡으러 오는 것이라면 무엇인가 일이 있었기 때문 아닙니까?
그리고 사마군사님과 대주님은 금룡단주가 고당군을 잡으러 온 다는 사실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가원희는 가볍게 한 숨을 몰아 쉰 다음 말을 하였다.
"패도문의 덜떨어진 녀석을 이용해서 총사를 욕보이려 했는데 그것이 발각 된 모양이다."
가원희는 태연하게 말을 했지만, 그 내용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제일조 조장인 태산철검(泰山鐵劍) 소적성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당군을 보면서 말했다.
중검의 고수인 소적성은 일검의 위력이 능히 태산과 같다고 알려진 인물로,
그의 패도적인 검법은 강호 일절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노자춘을 충동질해서 총사를 욕보이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할 생각이었단 말입니까?
대체 고조장은 정신이 있는 것입니까?"
소적성의 말에 가원희는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그 부분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묻지 않도록 해라! 차후에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가원희의 말에 조장들은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무엇인가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안이 있는 것이다.
소적성이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지금 고당군은 어디에 있습니까?"
"스스로 죄를 고백하고 백룡각의 지하에 자숙하고 있다."
백룡각은 백인대의 숙소이자, 거처였다.
"숨은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다. 고당군이 그 곳에 있는 것은 사마군사의 뜻이다.
그걸 빌미로 우리는 권왕을 자극해야 한다.
그리고 고조장에 대한 질문은 더 이상 언급을 금한다."
"충."
네 명의 조장들이 일제히 구호를 위치며 허리를 숙였다.
가원희는 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아도 조장들이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 정도의 눈치쯤은 지닌 자들이었다.
그러나 만약을 위해서 조금 더 보충 설명을 해 줄 생각이었다.
가원희는 조장들을 훑어보면서 말을 이었다.
"일단 우리는 지금의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서 권왕을 도발시켜야 한다.
그래서 그것을 빌미로 그를 죽일 수 있는 명분을 얻어야 한다.
그는 우리의 형제나 다름없는 광풍사를 혼자서 전멸시킨 자다.
다른 자들은 몰라도 우리는 그 과정과 상황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제 그분들의 복수를 할 기회가 생겼다. 모두 철저하게 준비하도록."
"충."
언제고 권왕과 결전할 것이란 예상아래, 그에 대해서 철저하게 연구하고 준비한 백인대였다.
비록 그들의 숫자가 광풍사보다 적었지만 자신 있었다.
광풍사는 권왕에 대해서 잘 모르고 싸웠지만,
그들은 철저하게 연구하고 준비되어 있었다.
광풍사는 자신들의 가장 무서운 무기라 할 수 있는
광풍멸사진(光風滅私陣)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아운의 계략에 말려 죽어갔다.
하지만 풍룡백인대는 다르다.
혹시 모를 이때를 준비하며 칼을 갈아 왔었다.
그들이 펼치는 백룡멸사진(白龍滅死陣)은
광풍멸사진을 백인대에 맞게 축소시킨 진법으로 능히 소림의 백팔나한진과 겨룰 수 있는 진법이었고
광풍멸사진에 비해서 그 위력이 별 차이가 없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백룡멸사진을 준비한 상태로 아운을 맞이할 것이다.
백룡멸사진이라면 설혹 신주오기나 칠사 중 한 명이라도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진법이었다.
가원희와 조장들은 권왕의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십사대고수보다 더 강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준비하고 지휘한 것이 바로 와룡 사마무기였다.
그는 아운에 대해서 나름대로 철저하게 준비를 해 놓고 있던 참이었다.
물론 광전사가 처리한다면 쉽고 빠르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무림맹안의 백룡대에도 준비를 시켰던 것이다.
가원희는 조장들을 둘러 본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마군사는 우리에게 일의 확실한 마무리를 위해 또 다른 안배를 하였다."
모두 궁금한 표정으로 가원희를 바라본다.
"들어오십시오."
가원희가 밀실의 문 쪽을 향해 말하자, 문이 열리며 세 명의 사십대 남자들이 걸어 들어 왔다.
모두 나이가 사십 전후로 보이는 그들의 모습은 그저 평범해 보였다.
복장 또한 백인대의 일반 무사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본다면 그들을 백인대의 일반무사들로 보았으리라.
그들의 허리에 찬 청강검조차도 백인대의 일반 무사들 검과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그저 평범한 자들이라면
가원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저렇게 정중하게 맞이하진 않았을 것이다.
가원희는 먼저 세 명의 대한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 조장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분들이 바로 삼호령(三虎令)이라 불리시는 분들이다. 모두 인사들 하도록."
삼호령이란 말을 들은 네 명의 조장들은 모두 안색이 일변하였다.
혈궁대전 당시 삼호령이란 이름은 수많은 전설 중 하나였다.
당시 맹주였던 조진양의 심복들로
그와 함께 혈궁 타도에 가장 많은 공을 세웠던 수하들이 있었다.
그들을 일컬어 정무십삼천(精武十三天)이라 불렀었다.
혈궁대전은 수많은 영웅들을 만들어 냈었고,
그들 중 상당수가 지금의 장로원에 있는 장로들이었다.
그들은 혈궁대전으로 인해 영웅이 되었고,
그 대가로 지금까지 부귀영화를 누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장로들 중에서도 나중에서야 무림맹의 장로가 된 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힘과 권력은 혈궁대전 이후부터 장로에 오른
이른바 대장로라 불리는 자들과는 비교할 바가 되지 못하였다.
세상에 있다 없다 말이 많은 동심맹은
바로 대장로들이 자신들의 권세를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심맹의 실체에 대해서는 있다 없다 말만 많을 뿐 확인 된 바는 전혀 없었다.
십사대고수와 장로원의 대장로들 외에 혈궁대전이 만들어 놓은
또 다른 영웅들이 있었다면, 정무 십삼 천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비록 대문파에 속하지는 않았지만,
조진양의 심복들로 당시에 이들의 활약은
지금 장로원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었다.
혈궁대전이 끝난 후 그들 중 대부분은 명예를 버리고 모두 맹주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맹주는 그들을 위해 맹주부 바로 뒤쪽에 은자림을 만들어 그들을 기거 하게 하였고,
그들은 몇 십 년 동안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또한 이들이 바로 무림맹 최고의 무력 단체라는 천룡수호대의 수뇌들이기도 하였다.
사라대전 당시에도 이들은 은자림에서 침묵하고 세상에 나오지 않았었다.
그들 개개인의 무공은 당시 신주 오기를 제외한다면 거의 적수가 없을 정도였고,
지금 장로원의 대장로들과 견주어도 중상위 이상의 실력을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그 중에서도 삼호령은 친형제들로 세 명이 힘을 합하면
십사대고수들이라고 해도 결코 이길 수 없을 거란 소문이 돌았던 자들이었다.
실제 혈궁대전 당시 삼호령은
칠사 중 한 명인 명왕수사(明王殊死) 고구와 백여초를 겨루고도 지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겨우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이들 세 명의 나이는 실제 팔십을 넘은 노인들이었다.
네 명의 조장들은 일제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그들의 표정엔 일종의 존경심이 우러나와 있었다.
말로만 듣던 전설의 고수들을 실제로 보았지만 잘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일조조장 태산철검 소적성이 삼호령님을 뵙습니다."
"이조조장 철궁파산 곽윤이 삼호령님을 뵙습니다."
두 조장 이외에도 사조조장인 소우쾌검(小牛快劍) 단자도와 제오조장인
잔혈독조(殘血毒爪) 고지산이 차래대로 인사를 하였다.
삼호령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기가 번졌다.
평범해 보이던 그들의 입가에 웃음기가 번지자 섬뜩한 살기가 감돌았다.
네 명의 조장은 그 웃음에 섬특한 기분을 느꼈다.
일호령이 그들의 기분을 안 듯 조금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제법 강단이 있어 보이는군. 좋아 잘 부탁한다. 후배들."
일호령의 말에 가원희가 얼른 허리를 죽이며 말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입니다."
"훗 좋아 이제 그런 공치례는 그만 넘어가지. 나이가 드니까 그런 것도 귀찮군.
그보다도 아운이란 아이가 그렇게 대단하다며."
"그렇습니다. 그는........"
이때 밖에서 누군가가 밀실의 문을 두드렸다.
가원희는 무엇인가를 느낀 듯 얼굴을 굳히고 물었다.
"무슨 일이냐?"
"금룡단 일행이 백룡각으로 오고 있다는 전갈입니다."
"알았다."
가원희의 대답과 함께 네 명의 조장들이 벌떡 일어섰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아운을 죽일듯한 기세였다.
그러나 삼호령은 침착하게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엔 언듯 긴장의 표정이 떠오른다.
아운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상대가 강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신중하게 마음을 가다듬은 것이다.
설혹 권왕이 약하다고 해도 그들은 결코 상대를 얕볼 생각은 없었다.
그 자세가 그들을 혈궁대전에서 살아남게 만들었었다.
그리고 아운이 후배라고 해서
결코 낮게 볼 수 있는 자가 아니란 것을 그들은 충분히 숙지하고 있었다.
백룡각 앞에 다가온 아운이 갑자기 제 자리에 섰다.
다른 금룡단원들 역시 모두 제자리에 선채 아운을 바라보았다.
"안으로 들어가면 너희들은 절대 흩어지지 말고 붙어 있어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일에 끼어들지 말아라!"
"충."
금룡단원들이 구호를 외치자, 아운은 고개를 끄덕이고 백룡각의 정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무사가 아운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안에서 이미 알고 있을 것이고 지시를 받았을 것이다.
나를 안으로 안내 하던지 금룡단주가 왔다고 전해라!"
두 문지기는 아운의 신분을 알고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어떤 지시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한 명의 건장한 장한과 서너명의 무사가 나타났다.
나타난 사람은 제일조 조장인 태산철검 소적성이었다.
소적성은 단번에 아운을 알아보고 포권지례를 하였다.
"백인대의 조장 소적성이 금룡단주님을 뵙습니다."
소적성을 본 아운은 속으로 은근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의 무공은 명왕당의 당주보다 높다.
일개 조장의 무공이 당주보다 높다니
과연 풍룡백인대가 무림맹의 삼대 무력 단체 중 하나란 말이 실감나는구나.'
조장인 소적성뿐이 아니었다.
그의 뒤에 있는 무사들의 무공도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백룡대 일개인 한 명의 무공 수준이 금룡단의 부단주 노릇을 하였던 사자명보다 위였다.
'이제 서야 무림맹의 힘이 느껴지는군.'
아운은 가볍게 긴장되는 것을 느꼈다.
그 긴장은 그의 기분을 상쾌하게 만든다.
아운은 그 느낌이 좋았다. 그리고 그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들과 일전을 벌여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알아야 할 사실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생각대로라면 그들은 오히려 그것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가 먼저 명분을 얻느냐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했다.
"금룡단주다. 백인대의 대주를 만나러 왔으니 안내해라."
아운의 당당한 말에 소적성의 조금 굳어졌지만 곧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따라 오십시오."
아운의 하대에 놀랐던 금룡단원들도 자연스런 아운의 하대와 더 자연스럽게
그 하대를 받아들이는 소적성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란다.
아무리 아운이 금룡단주지만, 소적성의 나이는 마흔이 넘은 나이다.
그리고 그의 무공은 능히 일파의 장로급 이상이었던 것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운은 묵묵히 소적성의 뒤를 따랐고, 금룡단원들은 다시 한 번 아운을 보면서 그의 뒤를 따랐다.
소적성과 아운 일행이 문 안으로 들어가서 백룡각 쪽으로 들어가자,
두 명의 문지기 무사는 백룡각의 대문을 굳건하게 닫았다.
밖에서 아무도 안을 들여다 볼 수 없도록 한 것이다.
백룡각은 넓고 컸다.
단순하게 각이라고 해서 하나의 건물만 달랑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서 약 이십여 장을 걸어가면 다시 한 번 큰 대문을 품고 있는 누각이 나온다.
그리고 누각 안을 통과해서 들어가면 거대한 연무장이 나오며,
그 연무장을 중심으로 세 개의 커다란 건물이 정면과 죄우로 들어선 형태였다.
그 세 개의 건물 중, 중앙에 있는 건물이 본청으로 실제 백룡각 건물이었다.
건물은 모두 삼층인데 그 크기는 무려 길이만 삼십 장은 넘어 보였고,
건물 안으로 드나드는 문만 다섯 개나 되었다.
백룡각 본청 건물은 연무장에서부터 약 삼십 개의 계단을 올라간 둔덕 위에 지어져 있었다.
지금까지 보아온 명왕당이나 봉황대와는 전혀 다른 위용이었다.
그리고 연무장의 넓이만 해도 약 삼천 평은 족히 되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무림맹안의 또 다른 세계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대체 무림맹의 넓이는 얼마나 되는 것인가? 과연 대단하구나.'
아운은 은근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얼굴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운이 정면을 바라보자, 연무장 본청 건물 계단 아래쪽엔 약 백여 명의 무사들이 도열해 있었고,
그 앞에는 네 명의 남자들이 서 있었다.
아운은 소적성의 뒤를 쫓아가면서 전음으로 이심방에게 물었다.
- 지금 서 있는 자들 중에 인자검 고당군이 있는가?
- 없습니다.
이심방의 말을 들은 아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모두 조심하도록. 그리고 내가 저들과 겨루게 되더라도 절대 끼어들지 말라. 이건 명령이다.
아운의 전음은 그의 뒤에 있는 금룡단원들에게 동시에 들리고 있었다.
한 번에 수십 명의 사람들에게 동시에 전음을 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금룡단원들은 아운이 자신들 모두에게 한꺼번에 전음을 보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한 번 놀란다.
아운 일행이 백인대가 도열해 있는 근처까지 다가오자, 대주인 가원희가 다가왔다.
가원희를 바라보는 금룡단원들의 얼굴엔 두려움이 어렸다가 사라졌다.
가원희의 명성은 그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무거웠던 것이다.
그러나 아운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하였다.
소적성이 옆으로 비켜서며 소개를 하였다.
"풍룡백인대의 부대주이신 패왕도 가원희님이십니다."
소적성의 소개를 들은 아운이 성큼 다가서며 말했다.
"새롭게 금룡단주가 된 하영운이오."
아운의 하대성 말에 가원희를 비롯해서
백인대 조장들은 물론이고 일반 무사들까지 분노의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금룡단원들의 얼굴마저 당황해서 굳어졌다.
조금전 조장이었던 소적성과 가원희는 다르다.
억지로 우겨서 단주인 아운의 지위가 조장인 소적성보다 위라고 할 수 있었기에
어떤 면에서는 이해가 갔지만, 풍룡백인대의 부대주인 가원희는
그 지위가 결코 금룡단주보다 아래가 아니었다.
풍룡백인대의 위상을 고려할 때 가원희는 금룡대주와 비슷하다고 보면 맞았다.
물론 총사 북궁연이 대주일 경우에는 조금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아운의 위치는 엄연히 금룡단주 대행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백인대 연무장은 일순간에 긴장으로 폭발할 것처럼 무거워졌다.
"나는 가원희라고 한다. 부족하지만 풍룡백인대의 부대주다.
대주님은 현재 맹주님 대신 일을 보시느라 이 자리에 오지 못하셨다.
여기에 온 용건이 무엇인가?
그리고 말을 조금 조심하는게 좋겠군.
어린 나이에 감투를 쓰더니 위아래를 몰라 봐서야 되겠는가?
네 놈은 단주일지 몰라도 총사가 아니다.
설마 금룡단이 풍룡백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가원희의 말을 들은 아운이 묘한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네 놈은 담도 크군.
이미 와룡인지, 지렁이인지 하는 놈에게 내 정체를 들어서 알 텐데,
내 앞에서 배분을 논하려 하는가? 죽고 싶어서 안달을 하는군.
그리고 용건을 모른다면 이 자리에 고당군이란 놈만 빠졌을 리가 없지.
그리고 지금처럼 살기가 짙은 진법을 형성하고 나를 맞이하진 않았겠지. 그렇지 않은가?"
아운은 완전히 하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운의 당찬 말에 가원희는 할 말이 없었다.
그래도 아운이 이렇게 대 놓고 나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정말 단순명쾌하게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아운의 말대로 권왕이라면 그의 배분은 함부로 따질 일이 아니었다.
나이를 떠나 그의 명성은 감히 가원희가 비교할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이란 것이 있기에 아운의 행동이 옳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서로 적임을 알고 있었다면 그것을 따질 수도 없는 것이고,
힘의 논리가 절대적인 무림에서 아운은 나이 이상의 지위를 가진 인물이었다.
하오체 정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운의 말에 놀란 것은 금룡단원들이었다.
아운의 말대로라면 지금 풍룡백인대의 정연한 모습이 어떤 기진을 형성한고 있다는 말인데,
그들 중에 그것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가원희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상대는 이미 자신들의 생각을 읽고 있는 것 같았다.
여기서 더 숨기면 치사해질 뿐이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끝까지 모른척해야 한다.
그건 상대가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결정을 내린 가원희가 가볍게 웃으면서 대답하였다.
"과연 권왕답소. 하지만 우리는 당신의 정체를 알고 있을 뿐,
그 외의 다른 일은 전혀 모르고 있소. 대체 무슨 일로 단주께서 여기까지 오신 것이오."
가원희의 입에서 권왕이란 말이 나왔지만 백인대는 동요가 없었다.
이미 아운의 정체를 모두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반대로 금룡단의 일부를 뺀 나머지 단원들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입이 턱 벌어졌다.
일부는 입에서 침이 질질 새는 자도 있었다.
권왕이라니 설마 자신들의 단주가 권왕일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던 그들이었다.
누군가가 우영과 이심방을 보고 물었다.
"저..... 정말 단주님이 권왕이시오. 그리고 당신들의 표정을 보니 이미 단주님의 신분을 알고 있었던 것 같은데......."
이심방이 눈을 부라리며 말했다.
"보면 몰라서 묻소? 지금까지 단주님이 한 일들을 생각해 보시오."
단원들은 술렁이고 있었다.
그들은 새삼 존경의 시선으로 아운을 보고 있었다.
권왕이라니.
꿈에서조차 한 번 보고 싶었던 상대가 바로 권왕 아운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운이 자신들의 단주일거란 생각은 해 보지도 못했다.
그들은 모두 경외감이 어린 시선으로 다시 아운을 바라본다.
금룡단원들의 그런 모습을 느낀 북궁명은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으쓱해지는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짜식들, 이왕 매형을 둘려면 이 정도는 돼야지.'하는 듯한 표정이다.
가원희의 말에 아운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나야 항상 나답지. 그런데 고당군이 이 자리에 없는 것으로 보아,
너도 이미 이 일을 알고 있었을 텐데 모르는 척 하는군.
그리고 그 개자식이 이 자리에 없다면,
이건 사마무기가 또 다시 잔머리를 굴리고 있다는 말이고.
한데 누가 고당군을 사주했는가? 사마무기가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았을 테고,
역시 부맹주인 신창 조원의인가?"
가원희는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