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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신 장군 회고록 5
역사를 넘어 시대를 넘어
-86- 돌고 도는 인생 -94- 이한림 사령관의 출동중지 명령
-87- 장군으로 진급하다 -95- 매그루더와의 담판
-88- 운명의 장난
-89- 3·15 부정선거 -96- 5사단 이끌고 서울로 출동
-90- 가는 곳마다 싸우는 나날들 -97- 육사 5기·8기생 간의 갈등
-98- “채장군처럼 사심없는 군인이 필요해”
-91- 4.19와 격동기 -99- 소장 진급과 감찰위원장
-92- 박정희 장군과의 혁명 밀담 -100- 무소불위의 실세 중앙정보부
-93- 박정희 장군의 거사 친서 -101- 미 육군참모대학 시절
86. 돌고 도는 인생
나는 떨고 있는 이원장 사단장을 살펴보면서 어떤 연민을 느꼈다. 한때 권력을 휘두르던 그도 이젠 상황이 바뀐 데다 사건 하나를 앞에 두고 목이 달아날 것에 대한 두려움과 보복당할 것에 거의 산 사람 같지가 않은 것이다. “각하, 저는 어떻게든 이장군을 다치지 않게 하라는 지시를 받고 왔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렇게 둘러댔지만 그가 이 말을 곧이들을 리 만무했다. 하긴 지난날을 생각하면 어떻게 내 말을 믿을 것인가. 아마도 그는 내가 승자의 교만으로 그를 놀리고 있는 것으로 알았으리라. “이번 사건이 큰 사건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중대장 인사는 연대장 책임이고 감독은 대대장 책임인데 사단장까지 다치는 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단장 각하의 입장을 충분히 대변할 것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그제서야 이원장 사단장이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내 손을 잡았다. “내가 채대령을 구속까지시켰는데 뜻밖의 일이라, 어쨌든 고맙소. 난 사단의 책임자니 죄의 대가는 달게 받겠소.” 며칠 만에 조사는 끝났는데 하극상 내용은 중대장이 통솔력에 문제가 있고 평소 과격해서 소대장들이 술에 취해 충동적으로 저지른 사건이었다. 조사를 마친 나는 이원장 장군에게 감정이 남아 있는 양 군단장을 설득했다. 비교적 소심한 그는 양해했지만 송사령관에게 보고하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송사령관 각하의 생각은 달라. 그러니 채대령이 직접 송사령관을 만나 설득해보시오.” 나는 그 길로 원주 1군사령부로 달려갔다. 송사령관은 나를 보면 무조건 반기는 편이었지만 이날만은 달랐다. “뭐야? 그 형편없는 놈을 그냥 놔 둬?” 송사령관은 단호했다. 송사령관은 어떤 직무상 문제로 이원장 장군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각하, 이번 일로 이원장 장군은 죽은 시체라고 합니다. 죽은 시체를 더 쳐 봐야 얻을 것이 없습니다.” “군대란 엄하게 다스릴 필요가 있을 때 다스려야 해. 사감이 있어서가 아니야. 이건 중대한 일이다. 부임 하루를 했다 하더라도 책임질 일은 책임을 지는 것이 군인의 태도야. 그게 군인정신이야!”
“네, 알겠습니다. 각하. 하지만 이럴 때 관대함을 보이시면 더 좋은 효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령관 각하의 도량에도 맞고요. 부임 한 달 만에 일어난 일이어서 도의적 책임은 있겠지만 처벌은 좀 지나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래서 사단장에게는 주의를 환기하고 대대장은 사단 징계위원회에 회부하고, 연대장은 군단 징계위원회에 넘기고, 중대장 인사권이 있는 연대장은 보직해임시키는 일로 마무리 지으면 어떨까 합니다. 이렇게 나간다면 사령관 각하의 조치에 모두들 탄복할 것입니다.”
“이 사람아, 지금 도량을 시험할 땐가?” 그러면서도 송요찬 사령관이 이윽히 나를 바라보았다. 말인즉슨 틀린 것은 아닌 것 같고, 그 내용이 얄밉도록 뚜렷하고 분명하니 꼬투리를 잡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내 건의가 썩 내키지는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송사령관은 나를 신임하고 내 건의를 인정해 주는 장군이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나?” “물론입니다, 각하. 승자의 아량이 있는 법입니다.” “이 사람, 훈계하려 들지 마!” 그렇게 말해 놓고도 그는 결국 “조사반장이 하자는 대로 한번 해보자구” 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로 인해 이장군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87. 장군으로 진급하다
1958년 가을, 나는 마침내 별을 달았다. 사실은 장군이 되는 것을 꿈도 꾸지 않았다. 논산훈련소 밀가루 사건에 연루됐던 데다 군부 내 실력자를 많이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형근 참모총장 후임으로 백선엽 장군이 부임하면서 진급심사에 공정성과 투명성을 기한다는 방침 아래 심사 기준이 대폭 바뀌었다.
군 사령관급 이하의 소장급 이상 장성이 심사하고 무기명으로 투표한 후 위에서부터 순번대로 대상자를 끊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심사위원은 모두 22명이었다. 그중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심사위원은 김용배 ·이성가 · 양국진 · 민기식 장군 정도였다. 그래서 아예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때 이성가 장군으로부터 들은 것이지만 내가 오히려 밀가루 사건의 덕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성가 장군 옆에는 이준식 장군이 앉아 있었는데 대상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한 이장군이 “채명신이라, 채명신….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이름인데….”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장군이 “저번 논산훈련소 밀가루 사건의 핵심 인물 아니오.
사건을 제대로 수습하려다 덤터기를 썼지. 배짱도 있고 의리도 있는 장교요”하고 거들었다. 이준식 장군도 “그렇다면 이런 놈을 진급시켜야지”하며 내 이름을 써내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21명이 찬성했고, 단 한 명만 반대했다. 나와 함께 최고 점수를 받은 사람은 정희섭 의무병과 대령(전 보사부장관)이었다.
장군 진급과 함께 나는 송요찬 장군이 재임 중인 1군사령부 작전참모로 영전했다. 이때 참모장은 박정희 장군이었다. 박장군은 송요찬 사령관 못지않게 나를 이해하고 격려·지원해 준 장군이었다. 사리 분명한 내 성격을 좋아한 것인지, 일 처리하는 능력을 평가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늘 나를 곁에 두려고 했다. 그는 실권은 없어 업무상 도와준 것은 별로 없지만 대신 인간적으로 나를 지지하고 아꼈다.
내가 부임한 며칠 후 원주시내의 중국집 연광춘에서 환영 만찬이 열렸다. 1군사령관 이하 일반·특별참모 30여 명이 홀에 둘러앉아 연회를 하는 것이다. 송사령관이 늘 하던 방식대로 자장면 그릇에 배갈을 가득 부어 30여 명과 일대일 대작을 시작했다. 이날 첫 번째 대상은 나를 위해 자리를 마련했기 때문에 물론 나였다.
그러나 나는 3군단에서 송사령관과 함께 있을 때도 술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송사령관도 잘 알고 있었다. “자, 오늘은 새 작전참모를 위한 자리고, 작전참모는 장군으로 진급까지 했으니 한잔 해야지. 기쁜 일 아닌가.” 송사령관은 작정한 듯 배갈이 담긴 짜장면 그릇을 내 앞으로 내밀었다. “각하, 전 아시다시피 원래 술을 못해서….”
“여기 1군사령부 SOP(관례)가 장군은 한 잔 하게 돼 있어. 자, 받아. ”그러나 먹는 것에 관한 한 내 뜻대로 하고 싶었다. 그래서 끝까지 버텼다. 이렇게 버티면 대체로 연회의 흥을 깨는 일이어서 다른 일행들로부터 눈총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서로의 성격을 알고 있는지라 송사령관은 몇 번 권하다가 “아 그렇지. 완벽한 크리스찬이지”하고 다른 사람에게로 옮겼다.
송사령관은 한마디로 대단한 주량이었다. 1대30의 대작이었지만 다음날 오전 7시 30분이면 어김없이 맨 먼저 사령관실에 출근했다. 지금까지 그런 주량은 아직 만나지 못했다. 술에 정평이 나 있던 박정희 장군도 송사령관에 비하면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음날 깨끗한 몸으로 출근한다.
회의장에 들어서서는 “모두들 어디 갔나?”하고 득의만면한 웃음을 짓는다. 참모들 대신 참석한 차장들을 둘러보고 송사령관은 더욱 통쾌한 표정이었다. 참모장 박정희 장군을 비롯해 전 참모가 전멸상태니 장난기도 발동하는 모양이었다.
이때 내가 나서서 “여기 작전참모 있습니다”하면 “그래 그래, 채장군만이 술 먹을 자격 있어”하고 농담 겸 덕담을 주곤 했다. 송사령관은 군인정신에 투철한 박정희 장군을 신임했고, 또 술 때문에도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5·16 후 정치적 역정이 달라 정적이 된 것을 보면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88. 운명의 장난
송요찬 1군사령관, 박정희 참모장, 그리고 작전참모인 나 세 사람이 의기투합한 사건이 하나 있다. 송사령관이 어느날 군 내 부패·비리를 추방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각급 부대는 후생사업에 힘쓰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후생사업이지 군 트럭이나 자재를 동원해 도로를 닦거나 제방을 쌓는 등 민간업자의 일을 대행하면서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군 예산이 형편없던 때라 이런 변칙적인 일들이 많았는데 일부 비양심적인 지휘관과 장교들이 수익금을 빼돌리는 일이 많았다. 특히 부대가 큰 곳에서 이런 부정·비리가 심각했다. 큰 부대는 트럭과 장병·기구들이 많아 그만큼 수입을 많이 올렸는데 이것을 본 송사령관이나 박참모장은 대단히 불쾌하게 여겼다.
부정이 판을 치고 구린 돈이 생기니 냄새 맡고 달려든 군 수사기관과 언론인·정치인들. 이들의 입을 막느라 부패 고리가 얽히고 설켜 말 그대로 부대는 복마전이 되고 말았다.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사회 기강이 서지 않고, 너도나도 먹자판이 벌어지니 양심적인 군인으로서는 지켜보는 것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또 그것이 수치심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어느 날 송사령관이 지휘관 회의를 소집했다. “전쟁을 위해 사용해야 할 장비가 모두 후생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징발되고, 또 군의 본분을 잃어 가는 것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소. 다시 전쟁이라도 터지면 어떡하겠나. 오늘부로 당장 모두 후생사업을 중단시키시오.” 당시로서는 대단한 결단이었다. 송사령관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당장 일부 지휘관들로부터 반발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간 부대 운영에 상당한 도움이 됐고, 무엇보다 권력기관이나 육군본부·국방부 등과도 연결된 사업인데, 중단하면 부대에 타격이 큽니다. 마찰도 있을 것 같고요.” 이때 박참모장과 나는 송사령관 입장을 적극 지지했다. “지금 해야 합니다. 떳떳하지 못하면 끝내 그것에 끌려 다니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전군에 후생사업 중단 명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진짜 사건은 이때 터졌다. 후생사업 중지로 막대한 손해를 본 업자들로부터 온갖 모략과 음해가 상부로 올라간 것이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송사령관은 모포 실사도 실시했다. 장부상으로는 병사 한 명당 모포 6장을 보유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러나 한 장도 돌아가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그것도 선임자 모포를 대대로 물려받아 낡고 헤진 것을 뒤집어 쓰고 자는 형편이었다.
후생사업을 무색케 하는 병사 복지가 그 모양이었다. 송사령관은 없어진 모포를 밝혀내고 모포 수를 현실화시켰다. 비축된 모포 수십만 장이 하루 아침에 병사들에게 지급되니 창고가 텅 비고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됐다. 미 군원물자였기 때문에 갑자기 수십만 장이 창고에서 나간 것을 보고 미8군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냥 둬도 되는 일을 병사들을 생각해 주다가 국회감사반까지 들이닥치고 말았다. 물론 누군가의 음해와 모략 때문이었다. 1958년 말쯤인데 공교롭게도 이때 국회감사반원의 책임자는 6사단장으로 있다가 예편한 이원장 의원이었다. 그는 예편해 고향인 충남 보령에서 출마, 국회의원이 돼 송사령관을 치기 위해 내려온 것이었다. 돌고 도는 것이 세상사라지만 이건 너무한 인생 반전이었다.
죄란 없고 오히려 떳떳한 일이지만 추궁하는 입장은 얼마든지 귀찮게 닦달할 수 있고, 막강한 권력을 동원해 트집잡아 인사조치할 수도 있는 입장이었다. 그렇더라도 이형근 전 육참총장과 보령 출신 국회의원이 된 이원장 전 6사단장이 한 세트가 되고, 송요찬 · 양국진 라인이 또 다른 세트가 돼 해를 바꿔 가며 암투가 벌어지니 어찌 보면 운명의 장난처럼 비치기까지 했다.
89. 3·15 부정선거
감사반을 이끌고 원주로 온 이원장 의원도 조금은 야속한 인연에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예전 그를 봐 준 것을 되살리려고도 생각하지 않고 정중히 보고했다. “장부상의 모포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실제로 장병들을 따뜻하게 덮어 줄 모포가 필요한 것이지요. 장병들이 따뜻하게 잠을 자야 신체리듬상 활력이 생기고 자신감이 생겨 강군의 기초가 됩니다. 전력증강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이원장 의원은 처음 미심쩍게 생각하다가 진지한 내 말에 동의하는 빛을 띠었다. 누구의 책임을 묻기 전에 모포는 장병들에게 지급돼야 한다고 그 역시 동조하고 있었다. 감사는 그렇게 끝났고, 커다란 몸집에 어울리지 않게 긴장하고 있던 송사령관도 사건이 깨끗하게 해결되자 “전에 채장군이 이장군을 살려주자고 한 게 생각해 보니 잘한 것 같아”하고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송사령관의 정치적 지향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참군인이었고, 군부의 부패를 어떻게 도려내야 할까로 고심했던 대표적인 장군이었다. 1959년 나는 2군사령부 소속의 38사단장으로 영전했다. 송요찬 · 박정희 장군과 헤어지게 됐지만 38사단도 원주에 있어서 가족들이 이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과 송·박 장군을 여전히 만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60년 38사단장 시절 나는 3·15 부정선거(정부통령 선거)와 맞부닥치게 됐다. 당시 사령부에서는 야당선거인단의 출입을 철저히 통제했으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여당인 자유당에 문호를 개방하면 야당인 민주당에도 개방해야 하는 것이 형평상 맞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때 나는 아버지의 항일운동 동지이자 나의 보호자격인 이정규 성균관대 교수(후에 총장)의 영향도 많이 받았다.
이정규 교수는 4·19 학생의거 때 교수단을 이끌고 ‘젊은이의 피에 보답하라’며 이승만 정권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촉발시킨 결정적인 요인이 됐었다. “지휘관은 부하들의 신망을 받아야 하는데 정당에 편파적이면 통솔에 지장이 있다.” 그러자 육군본부에서까지 압력이 들어왔다. 우리 부대에 파견된 CIC 요원들도 불안해했다.
할당된 찬성표가 나오지 않으면 문책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소신껏 자유롭게 찍으라고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러나 우리 부대만큼은 공정했다고 믿었는데 어느날 CIC 요원이 나를 찾아와 말했다. “사실은 저희들이 불안해서 바꿔치기 하려고 별도의 투표함까지 준비했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80% 이상 찬성표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대로 올려 보냈습니다.”
“뭐야? 그럼 투표함을 미리 열어봤단 말이냐? 죽일 놈들!” 우리 부대가 이 정도였으니 다른 부대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우리 부대에서 이처럼 여당 지지표가 많이 나온 것은 장병들이 여당 표가 적게 나오면 사단장이 문책당할까봐 장병들이 나를 생각해서 찍어준 결과라는 것이었다.
3·15 부정선거가 끝나자 사회는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학생·교수·지식인 할 것 없이 연일 격렬한 시위가 전국에서 벌어졌다. 나는 이때 1군사령부 5군단 휘하의 5사단장으로 전보됐다. 야전군답게 비로소 전방 배치된 것이다. 5사단이 있는 연천지역에는 신문기자라는 자들이 40명이나 우글거렸다. 그 좁은 바닥에 기자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수첩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기자라고 할 정도였다.
예하부대 지휘관들은 한결같이 그들에게 용돈 쥐어 줘야지, 입막음 해야지, 골치아파 죽겠다고 하소연했다. 부대는 후생사업과 부정선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민심은 들끓고, 이때 기자들이 약점 캐겠다고 수첩 들고 달려들면 귀찮아서도 용돈을 쥐어 줘야 한다. 특히 상급 지휘관들이 기자들에게 약점 잡히지 말라고 했으니 기웃거리기만 하면 약점이 없어도 교통비 쥐어 주고 온갖 상전 대접을 하는 것이다.
거기에 입맛들인 기자들은 더 거드름 피우며 부대에 상주하다시피 했다. 나는 특단의 대책을 강구했다. 중대장급 이상 장교들을 소집해 놓고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만일 기자들에게 금품이나 식사를 제공한 지휘관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엄중문책하겠다. 돈을 요구하는 놈은 사기꾼이지 기자가 아니다. 그런 놈이 있으면 곧바로 나에게 끌고 와라.” 그러자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기자단 대표 4명이 항의차 나를 찾아온 것이다.
90. 가는 곳마다 싸우는 나날들
나의 집무실을 찾은 기자단 집행부는 처음에는 나에게 겁을 주듯 요란을 떨었지만 나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공갈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지 기자단 대표가 아예 속을 드러내 놓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기자들 중 회사로부터 월급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사에서 기자증 하나 발급받아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도 먹고 살기가 힘듭니다. 이런 것이 정당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먹고 살려니 도리가 없죠. 앞으로는 이러지 않겠습니다. 대신 사단에서도 우리를 위해 대책을 마련해 줬으면 고맙겠습니다.”
그들은 3·15 부정선거를 두고 부대장들을 찾아 물고 늘어지고 있었다. 서울과 부산·대구·광주 등지에서는 연일 부정선거 규탄 시위가 벌어지고, 신문기자들은 이를 등에 업고 여기저기 부대를 돌아다니며 공갈 협박으로 돈을 뜯어내고 있었다. 말하자면 눈감아 준다는 조건으로 얼마를 내놓으라는 수작이었다.
그들은 나의 깐깐한 성격을 모르고 신임이라고 찾아온 모양인데 나는 거리낄 것이 없었으므로 그들의 대응을 무시해 버렸다. 이러는 친구들에게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무대응이 최고의 대접인 것이다.
마침내 4·19 학생의거가 터지고 이기붕 일가가 자결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했다. 이때 참모총장은 송요찬 장군이었다. 경찰의 발포로 시민·학생들의 엄청난 희생이 있었지만 계엄령이 선포되고 송장군이 치안질서를 떠맡으면서 오히려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계엄군은 시민·학생들의 시위를 보호하고 사회 기강을 질서있게 잡아나가자 애국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장갑차에 환호하고 계엄군에게 박수를 보내는가 하면 물을 떠다 주고 먹을 것을 갖다 주는 장면이 도처에서 연출됐다.
나는 혼란기에 휴전선이 무너질까 걱정했지만 송사령관의 치밀한 임무수행으로 치안이 잡혀 나가자 안도하고 전방부대 생활을 즐겁게 펴 나갔다.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 물가는 나날이 폭등해 장교들의 월급으로는 생활이 어려웠다. 하사관과 장교들은 영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민간인들의 땔감이 워낙 비싸 박봉에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힘에 겨웠다. 그래서 나는 주말에 군용트럭을 동원해 부부 동반으로 땔감을 구하러 산속으로 들어갔다. 사단장 부부 이하 장교 부부들이 소풍가듯 도시락을 싸들고 산에 들어가 나무를 해 오면 1주일 분은 됐다.
그러나 이런 일이 사이비 기자들에게는 협박의 좋은 재료가 된다. 그러잖아도 나와 사이가 좋지 않은 기자들이니 기회만 있으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엄청난 비리나 있는 듯이 물고 늘어진다. 부대원들이 땔감을 채취해 팔아먹고 있다는 식으로 공갈이 들어왔다.
이것뿐만 아니다. 당시 부식은 사단별로 구입하고 있었는데 업자들이 소에게 잔뜩 물을 먹여 팔고 있었다. 장병들은 한 달에 2, 3회 쇠고기를 먹는데 그것을 물먹여 판다는 말에 나는 화가 나서 오전 10시에 하는 입찰시간을 한껏 늦춰서 오후 4시쯤 실시했다. 이러니 우시장 말뚝에 매어 둔 소들이 먹은 물들을 모두 배설해 버리니 배가 홀쭉해지고 무게가 줄어들었다. 이때 업자들이 앙심을 품고 서로 통하는 기자들에게 엉뚱한 모함을 해댔다. 그래서 이것 역시 협박의 소재가 된다. 이처럼 사회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쇠고기를 안 먹고 대신 다른 육류로 대체한다고 버티는데 이럴 때 응원군이 돼 줘야 할 상부인 1군사령부도 내게 협조적이지 않았다. 1군사령관 이한림 장군과 나는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사이가 좋지 못하니 사사건건 기자들과 부딪치고 있는 내가 혹 문제가 있지 않나 하고 보는 시각이 있었다. 기자들의 부당한 간섭과 협박을 이겨내는 용기를 가상하게 평가하지 않고 내게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나를 의심하는 것이다.
이장군은 두뇌가 명석하고 이론이 정연하며 강골의 무인다운 풍모를 갖고 있었지만 때로 독선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결국 이런 것이 이유가 돼 나와 부딪치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91. 4.19와 격동기
유재흥 장군 후임으로 1군사령관에 부임한 이한림 장군은 군대에서 빈발하는 교통사고로 골치를 앓았다. 사령부는 각 사단에서 교통사고가 나서 장병이나 민간인이 사망할 경우 또는 부상자가 3명 이상 발생할 경우 직접 사단장이 1군사령관에게 찾아와 보고토록 조치했다. 물론 이는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나로서는 불만이었다.
사단장이라면 전방에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데 헌병참모가 해야 할 일까지 하기 위해 원주 1군사령부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 불합리해보였다. 당시 비포장된 열악한 도로 사정으로 연천에서 원주까지 왕복하려면 꼬박 하루가 걸렸다.
이런 불만을 갖고 있을 때 우리 사단에서 교통사고가 나고 말았다. 나는 1군사령부 참모장한테 전화로 보고한 뒤 보고서를 보내는 것으로 끝냈다. 그러자 이한림 사령관이 직접 와서 사고 보고를 하라고 명령했다. 볼이 부은 채 사령부에 도착하니 이사령관은 대단히 격노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 입장을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령관 각하, 연천과 원주를 왕복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립니다. 이 길을 직접 사고 보고하러 온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분초도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것도 전력손실입니다. 사고보고는 지휘계통이나 헌병참모를 통해 보고되는데 사단장들이 오며 가며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이사령관이 얼굴을 붉히며 소리를 질렀다.
“뭐요? 귀관이 군사령관의 명령을 거부하는 거요? 그럴 바엔 아예 사고가 안 나도록 하든지!” “각하, 시간낭비도 낭비지만 이런 경우 허위보고가 만연하게 됩니다. 자기 살려고 별 짓을 다합니다.”
하지만 통용되지 않았다. 이런 이유 등으로 나는 이사령관의 미움을 샀다. 이 무렵 5사단은 자체적으로 채소를 자급하고 있었다. 부식비가 형편없어서 부대 옆 빈 땅에 채소를 가꿔 먹었다. 이를 보고 다른 부대에서도 채소를 가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누가 투서를 한 모양이었다. 재배한 채소를 팔아 수입을 올린다는 식으로 악의적으로 투서를 한 것이었다. 사령관에게 미운 털이 박혀 있던 나는 나를 닦달할 좋은 기회가 된 셈이었다. 1군사령부는 5사단에 대해 특별조사를 명했고, 1군 감찰참모가 감사를 나왔다. 감찰참모는 육사5기 동기생인 박영석 대령(소장 예편)이었다. 하지만 내용을 살핀 박대령은 내가 하는 일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반응을 보였다.
“채소를 재배해 장사를 해 먹는다는 말을 듣고 왔지만 허약한 병사들을 동원해 채소를 자급해 먹는 것은 권장할 만한데….”
딱 부러지는 강직한 성격으로 유명한 박대령은 1군사령부로 돌아가서 사실대로 보고하고는 대신 혼났다고 한다. 장병 급식도 좋고 부식 마련도 괜찮아 오히려 다른 부대에 권장해야 할 것 같다고 보고하자 이사령관은 “너 5사단장과 동기생이라고 봐주는 것 아냐?”하고 호되게 나무라더라는 것이다.
이 무렵 사회혼란상 못지않게 군 내부도 여러 가지로 혼탁했다. 송요찬 장군이 4·19가 수습되자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나고 뒤를 이어 최경록 장군이 후임 총장이 됐지만 미8군과의 불화로 금방 경질되고 장도영 장군이 그 뒤를 잇는 등 군 인사가 몹시 술렁거렸다. 이 와중에 박정희 군수기지사령관(소장)은 4·19 학생 시위를 선동 내지 방조했다는 이유로 한직인 대구 2군부사령관으로 좌천됐다.
나는 송요찬 · 박정희 장군 계열이었지만 이 중 송장군의 사심없는 국토방위 정신과 확고한 자유민주체제 옹호, 그리고 부패없는 국가 건설에 감화를 받고 그런 군인정신을 내 인생관으로 삼았다.
송장군은 4·19 계엄사령관 시절 철저하게 시민과 학생들 편에 서서 계엄업무를 수행했다. 대학생들의 자유민주정신을 높이 산 송장군은 시민과 학생을 보호하는 차원에서 치안을 유지했으며, 이로 인해 많은 청년학도와 애국시민들이 계엄군 탱크에 올라와 군인들을 격려했다. 탱크에 민주주의가 꽃피는 분위기였다.
92. 박정희 장군과의 혁명 밀담
4·19 직후 계엄이 선포되자 15사단이 치안 유지차 서울로 출동했다. 이때 조재미 사단장은 경찰 발포로 죽은 학생들의 시신이 안치된 서울시내 병원에 찾아가 철모를 벗고 엄숙하게 유해 앞에서 거수경례와 묵념으로 조의를 표했다.
이런 내용들은 외신을 타고 세계에 타전됐는데, 이때 외신들은 대한민국에 민주주의가 꽃핀다고 썼다. 이런 정신은 바로 송요찬 장군의 강철 같은 조국방위 정신과 확고부동한 자유민주주의 지향에서 나온 결과였다. 그런데 질서가 잡히는가 하는 때 군 장성급 인사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다.
그것도 자고 나면 바뀌곤 해서 헷갈렸다. 이때 학생 편에 섰던 박정희 장군도 송장군에 이어 한직으로 물러나니 도무지 속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새로 들어선 장면 정부는 민주주의를 한답시고 끝없는 무기력을 드러냈다. 별의별 시위가 전국 도처에서 일어났는데, 상이군경이 국회의사당을 점령하고 몇날 며칠 동안 농성해도 해산시킬 줄 모르고, 초등학생들까지 일어나 교사 거부, 과제를 없애 달라는 따위의 시위를 벌였다.
국가의 장래가 위태롭고 불안한 나날이었다. 이런 중 군 인원 감축안이 나왔다. 군의 정예화를 앞세운 나머지 질적인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는 것이 감축안의 골자였다. 군 내부에서 이러다 우리가 당하는 것 아니냐는 불안감이 팽배했다. 뜻있는 장교들은 나라의 장래를 걱정했다. 안개처럼 불확실한 어떤 것들이 암담하게 시야를 가리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나는 박장군이 서울에 올라오면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함께 만나 앞으로의 진로를 모색했다. 이때 모인 장군들이 장경순 · 김진위 장군 등이다. 1961년 2월,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어느날 L-19 경비행기가 5사단 비행장에 착륙했다. 곧이어 예의 까무잡잡하고 키가 작은 박장군이 비행기에서 내렸다. 박장군과 나는 그동안 많은 대화를 나눴고 이날도 밀담을 나누기 위해 만났다.
얼핏 보기에는 급유를 위해 경유해 가는 인상을 주지만 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 만난 것이었다. 박장군을 맞을 때마다 나는 장면 정부에 실망한 내용, 지금 개혁하지 않으면 북괴에 먹히고 만다는 우려를 강조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박장군은 동조세력을 규합하는 것 같았다. 이날도 나는 비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사단장실이 아닌 비행대장실로 박장군을 안내했는데 이때 비로소 박장군이 중대한 발언을 했다.
“8기생들 중에서 움직임이 있소. 청년 장교들은 거사 시기를 앞당기자고 하는데, 채장군 생각은 어떻소.” 나와 생사를 같이하겠다는 발언이었다. 또 그만큼 나를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시기가 거론되고 쿠데타가 구체적으로 모의되고 있는 것을 나는 알았다. 하지만 성급하다는 생각을 했다. 개혁은 좋지만 쿠데타까지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건 성급합니다. 북괴군의 전력이 우리보다 우위에 있고, 무엇보다 우리 군은 미군 지휘 하에 있습니다.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면 미국과 충돌할 우려가 있습니다.” 내가 또박또박 말하자 그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탄약 한 발까지도 미 군원에 의존하고 있는 우리 입장에서 미국의 묵인이나 양해가 없이는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시기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젊은 장교들은 혈기만 왕성하단 말이야.” 추종하는 영관급 장교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곧 4·19 1주년이 됩니다. 이때 전국적으로 시끄러워질 겁니다. 장면 정부가 수습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것 같아요. 저절로 시기가 무르익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좋아. 시기는 차후 다시 논의키로 하지.” 박장군은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다시 경비행기를 타고 사단을 떠났다.
93. 박정희 장군의 거사 친서
4·19 1주년을 목전에 두고 전국이 용광로처럼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라는 구호 아래 남북회담을 독려하는 시위에서부터 초등학생들이 플래카드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이념의 혼재에다 크고 작은 이익집단의 요구사항이 봇물처럼 쏟아지다 보니 약체정부는 버텨 낼 힘이 없는 것 같고, 이러다 빨갱이 세상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런 어느 날 박정희 장군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의 의지를 확인한 뒤 박장군은 도표를 그려 가며 거사 계획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거사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우리 계획이 성공하더라도 군이 정권에 눈이 어두워 결행했다는 인상을 주어선 안 됩니다. 군은 각 부처 장으로 임명하지 않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차관 이하라면 몰라도….” “그렇군. 그럼 두 명의 차관을 두어서 한 명을 군인으로 하면 어떨까.” 말하자면 장관 자리를 내주더라도 실권을 장악하자는 계산이었다.
“그런데 채장군, 5군단장 박임항 장군을 끌어들여야 하지 않겠소?” 이 대목에서 나와 박장군은 의견이 갈렸다. 나는 전 10군단장이자 미 육군 태평양사령관이었던 화이트 장군의 전역식 건으로 그와 감정이 별로 좋지 못했다. 그는 잡음이 많아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분을 거사에 가담시킨다면 혁명의 의의가 없을 것 같은데요.”
“나도 옛날 만주군 시절 박장군과 함께 있어 봐서 그 인간성을 잘 알아. 하지만 5군단이 서울에서 가장 가까이 있어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야. 6군단이나 미군이 우리를 방해한다면 5군단이 우리 편이라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될 거란 말이야.” 결국 나는 혁명을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지우기로 했다. 이윽고 4·19 첫돌이 되자 전국은 바람이 잔뜩 든 풍선처럼 금방 터질 것 같은 긴박감이 감돌았다.
5월 15일, 나는 다음날 열리는 사단장급 지휘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1군사령부가 있는 원주로 출발했다. 1군사령부에서 잡아 준 여관에 여장을 풀고 관례대로 1군 장교클럽에서 열리는 댄스 파티에 참석했다. 파티를 마치고 밤늦게 숙소로 돌아오니 조창대 중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육군대학 재학시절 교관이었던 그를 알고 가까이 지냈으며, 박장군이 아끼는 후배라는 것도 알았다. 그런 그가 한밤중에 나를 찾으니 나는 우선 놀랐다. “상황이 급합니다. 여기 박장군의 친서가 있습니다.” 편지 사연은 양면지 두 장에 빼곡히 적혀 있었다. 내용은 대충 이런 것이었다.
- 일부 젊은 장교들의 부주의로 기밀이 새 나갔으며, 밀고자가 나왔소. 도리 없이 날짜를 앞당겨 5월 16일 새벽 4시를 기해 거사하오. 새벽 4시 이후 중앙방송(KBS)을 계속 듣기 바라며, 문제는 야전군의 동향이오. 채장군은 서울에서 가까이 있는 5사단을 장악해 미 1군단이나 1군사령부에서 진압하러 올 때 곧바로 서울로 출동해 이들을 봉쇄 저지해야 하오.
동시에 주변 부대에도 합류할 수 있는 협력부대를 만들어 주시오. 혁명의 성패는 결단코 5사단에 달려 있으니 건투를 비오. 나는 편지를 다 읽고 나서 조중령에게 물었다. “어떤 놈이 기밀을 누설했단 말이오?” “네, 본래는 6관구, 30사단, 33사단 병력이 참여하기로 했는데 방첩부대가 미리 알아챘다는 겁니다. 채장군도 각별히 신변에 조심하십시오.”
나는 즉시 사단으로 전화를 걸었다. 부사단장은 나와 육사 동기이며 논산훈련소에 근무할 때 마음이 맞았던 유창훈 대령이었다. 그는 나와 박장군과의 관계를 잘 알고 또 우리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여서 당장 알아차리고 “걱정 마시고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라”는 답변이 왔다. 그래도 뒷일이 불안해 말했다. “내일 날이 밝을 때 비행기를 원주로 보내 대기시켜 주시오.” “넷, 알겠습니다. 아침 일찍 비행기를 보내겠습니다.”
잠을 청하지만 잠이 올리가 만무했다. 혁명이냐, 반역이냐. 겁 없이 하는 거사지만 목숨을 바쳐야 할 일이 아닌가. 새벽 4시까지 뒤척거리다 미리 준비해 둔 라디오를 켜는데 정규방송만 나올 뿐 아무 소식이 없다. 일이 잘못된 게 아닐까, 그 사이 5시가 지났다. 여전히 소식이 없다. 마음이 착잡해질 때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94. 이한림 사령관의 출동중지 명령
전화 벨소리는 이한림 1군사령관이 각 지휘관들을 긴급 소집하는 전화였다. 이사령관이 기미를 알아챘을까? 순간적으로 나는 재빨리 상황판단을 했다. 내가 회의에 참석한다면 이사령관은 나와 박정희 장군과의 관계를 알기 때문에 나를 체포할지 모른다.
이것은 오랜 야전군 시절에 익힌 본능적인 자기방어 태세였다. 그때 만약 내가 회의에 참석했다면? 지금 생각만 해도 전신이 오싹해진다. 나는 회의장으로 가는 대신 재빨리 1군사령부 비행장 콘트롤 타워로 전화를 걸었다. 계획대로 5사단 비행기가 와서 대기중이었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나는 비행장으로 달려가 비행기를 타고 5사단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역시 자기 집이라야 안심이다. 자기 집에서는 당할 리도 없고, 당할 이유도 없다. 나는 전 사단에 비상을 걸었다. 명령만 떨어지면 출동할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그런 다음 1군사령부 헌병참모인 박태원(육사7기) 대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긴 어떻게 돌아가오?” “넷, 정봉욱 포병부장(인민군 장교 출신으로 국군에 귀순) 등이 뭉쳐 있습니다.”
대쪽 같은 이사령관을 오히려 감시하고 있다는 뉘앙스로 그는 말했다. 답답한 건 서울의 상황이었다. 오후가 돼도 소식이 없었다. 이때 이 사령관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걸려왔다. “방송을 들으니 채명신 장군이 혁명5인위원회의 일원이던데, 어떻게 된 거야? 야전군은 내 명령이 아니고는 개미새끼 한 마리 움직일 수 없어! 서울로 출동할 수 없다고! 이 명령을 어기면 총살이다, 알았나?”
그러나 나도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기왕에 목숨을 걸고 나선 몸 아닌가. “군사령관 각하! 야전군은 사령관 각하 개인의 군대가 아닙니다. 우선 각하의 지휘 하에 있는 나부터 혁명을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군끼리 싸우는 사태가 오면 좋아할 사람은 김일성뿐입니다. 각하께서도 당장 혁명을 지지해야 합니다.” “뭐야? 당신 미쳤나? 이유 불문하고 내 명령을 거역하면 총살이야!”
그는 이렇게 소리 지르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찰칵 끊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긴 숨을 몰아쉬며 해볼 테면 해보자는 비장감을 다졌다. 만약에 이 사령관이 혁명을 반대하고 군사행동으로 나온다면? 이는 6·25보다 더한 비극이 초래될지도 모른다. 아군끼리 총을 겨누면 결국 북한의 김일성 집단을 불러들이는 꼴이 되고, 그렇다면 우리는 자멸을 자초하고 만다.
휴전 8년 만에 또다시 조국이 초토화될 수 있는 위기…. 그렇다고 대쪽 같은 이 사령관을 설득하기란 지난한 일이다….나는 다시 1군사령부 헌병참모 박대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만약 이사령관이 날 잡으려고 한다면 나도 실력으로 끝까지 부딪치겠소. ”그러자 박대령의 응답은 의외였다. “이사령관이 끝까지 혁명을 반대해서 서울에서도 이장군을 잡아 압송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저와 정봉욱 대령이 사령관을 잡으려고 대기중입니다.”
지금 같으면 도청을 우려해 그런 말이 나올 수도 없지만 엉성한 당시엔 이런 말도 전화를 타고 거침없이 나왔다. 박대령의 말을 그대로 믿는다면 이사령관은 중대한 오판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의 직속 부하 상당수가 혁명군에 가담해 있는 것을 그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여전히 야전군을 장악하고 있으며, 그래서 자신의 승인 여부에 따라 군사행동이 결정된다고 오판하고 있다. 나는 이때부터 자신감을 얻고 서울의 소식을 알아보기 위해 참모장인 최준명(육사8기) 대령을 서울로 보냈다. 5월 16일 하루가 대단히 길다고 느끼고 있을 때 미8군사령부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매그루더 사령관이 직접 나의 사단으로 오겠다는 보좌관의 전화였다.
매그루더 사령관의 보좌관은 방문 목적이나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 “지금 전용 헬기로 떠나시는 중입니다” 하고 일방적으로 말했다. 내 쪽도 다급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매그루더 사령관 역시 대단히 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매그루더 사령관은 점심때가 되어도 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원주의 1군사령부에서 이사령관과 협의하느라 시간이 지체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매그루더 사령관과 이사령관은 혁명을 반대하며, 6군단 병력으로 서울로 들어온 혁명군을 진압한다고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에게 통고했다. 이런 일련의 조치를 취한 다음 매그루더 사령관은 오후 3시가 지나 나의 사단으로 날아왔다.
95. 매그루더와의 담판
사단장실로 안내된 매그루더 사령관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채장군, 혁명에 가담하면 안 되오. 야전군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전방을 지키는 것이오. 군인이 혁명에 가담한다는 건 정치에 관여하는 것으로 좋은 선례가 되지 못하오.내가 신임하는 채장군에게 실망하지 않도록 지금 곧 혁명군에서 탈퇴하시오. 전쟁 때 자진해서 적 후방에 가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야전군이 정치적인 일에 휘말리면 불명예요. 이번 일로 영웅적인 전공들이 허사로 돌아가지 않을까 걱정이오. 나는 당신을 믿고, 아깝게 생각해서 하는 충고입니다.”
그는 진지하게 나를 설득했지만 나는 너무나 깊숙이 혁명군에 발을 들여 놓은 상태였다. 나는 결단코 나라에 변화가 와야 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이었다. 공산당에 나라를 헌납할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한 상황 아닌가. 나는 단호히 말했다.
“조국이 공산화되는 길을 막아야 합니다. 한국이 공산화돼도 매그루더 사령관 각하는 귀국하면 그만이지만 이곳에는 저처럼 공산당을 피해 남하한 사람이 600만 명이나 됩니다. 한국 국민의 절대다수는 공산주의를 싫어합니다. 만일 한국이 공산화되면 우린 어디로 가야 합니까.”
내 말에 비장감이 서리자 매그루더 사령관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장면 정부는 국가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혼란스럽고 학생들은 판문점을 거쳐 평양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이런 내부의 친공세력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도 일어서야 합니다. 군사혁명엔 이런 불가피한 이유와 정당성이 있습니다.”
긴 침묵이 흐른 뒤 매그루더 사령관이 결론삼아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전방을 막아야 할 야전군이 혁명에 가담하는 건 옳지 않아요. 더 큰 불행이 옵니다. 전방의 군대가 빠지면 적이 쉽게 당신네 땅을 접수해 버립니다.” “이미 우린 목숨을 걸었습니다. 어차피 공산화돼 죽으나 혁명이 실패해 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혁명을 막을 수 없습니다.”
두 시간 가까이 입씨름이 벌어졌지만 서로 설득당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와 내가 합의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끼리 싸우는 건 피하자는 것이었다. 매그루더 사령관이 떠났지만 우리 사단 상공에는 어느새 미군 헬기 두 대가 나타나 계속 선회하기 시작했다. 내 사단을 감시하는 것이다. 17일도 그렇게 길게 지나갔다.
서울의 상황도 뒤죽박죽이었다. 장도영 참모총장은 혁명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고, 이한림 1군사령관과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이 서울로 출동한 문재준 대령의 6군단 포병부대를 원대복귀시키려 하고 있었다. 문대령은 확실한 신분보장을 요구하며 복귀를 거부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황이 됐다. 이처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인데 밤늦게 돌아온 최준명 대령이 나에게 한 가닥 숨통을 열어 주었다.
“박정희 장군이 시간이 없어서 친서를 대신해 구두로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야전군과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이 반대하는 한 혁명이 성공할 수 없는데 이제 남은 길은 딱 하나밖에 없다면서 막강한 야전군의 전투부대가 하루빨리 서울로 진격해 줘야 한답니다. 혁명군의 힘을 실력으로 과시함으로써 저쪽의 무력 제압 기도를 봉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사단이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서울로 출동해 미1군단과 6군단의 서울 진입을 막아 줘야 한다고 요청하셨습니다.”
“미1군단과 6군단이 출동한다고?” “네. 5사단이 그들을 무력으로 제압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숨 막히는 상황. 성공이냐 반역이냐의 갈림길. 나는 결연히 출동 준비태세를 갖췄다. 그리고 직할부대 중대장 이상 장교들을 모두 집합시켰다.
96. 5사단 이끌고 서울로 출동
나는 장교들을 세워놓고 5·16 거사의 배경을 설명했다. 장교들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이미 내가 5인 혁명위원회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그루더 미8군사령관이 다녀갔다. 그는 혁명을 반대한다. 이한림 장군과 6군단을 동원해서라도 거사를 막겠다고 한다. 이것이 군 본연의 임무는 아니나 공산화를 막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 제관들이 나의 명령을 따를 필요는 없지만 나를 따르는 자만이 지금 곧 서울로 향할 것이다.”
지휘관들이 모두 나를 따르겠다고 외쳤다. 이미 그들은 나름대로 소신을 정리했던 것 같다. 나는 지휘관들의 결의를 듣고 박정희 장군의 뜻을 간명하게 전했다. “우리 5사단이 지금 서울로 출동해야 거사가 완수된다고 한다. 그래서 한시도 지체할 수가 없다. 즉시 출동 준비하라.”
이렇게 해서 1961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5사단 병력은 서울로 향했다. 사단 직할부대 병력과 이용성 대령의 36연대 전 병력, 35연대 일부 병력을 끌고 나갔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제지를 받고 말았다. 1군 후방검문소에 이르자 1군부사령관 윤춘근 소장이 나타나 나를 막아선 것이다.
“채장군 돌아가시오. 혁명은 성공할 수 없소. 매그루더 사령관과 참모총장, 1군사령관이 출동한 모든 병력을 진압하라고 명령했소. 죽지 않으려거든 빨리 원대복귀하시오.” “부사령관 각하! 우리에게 돌아가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과 같습니다. 공산 세력을 막는다는 일념으로 거사한 것입니다. 부사령관 각하께서도 지지성명을 내십시오.”
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의 부하 지휘관들이 윤부사령관을 에워쌌다. 상당히 위협적이고 살벌한 풍경이었다. 하긴 죽음을 각오하고 일어선 마당 아닌가. 윤부사령관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로 빠지더니 황급히 자리를 떴다. 망우리를 지나 중랑천 근처까지 진출하자 박정희 장군을 비롯한 몇몇 장교들이 마중나왔다.
“이제 야전군 대부대가 합류했으니 혁명은 성공했소!” 박장군이 나를 얼싸안자 병사들이 와! 하고 ‘혁명만세’를 외치며 환호했다. 나는 동대문까지 진출해 주력부대를 주변에 배치시키고 박장군과 함께 육군본부로 들어갔다. 육본은 문재준 대령이 이끈 6군단 포병들이 배치돼 있었다. 이렇게 병력이 출동했지만 아직 상황을 안심할 수 없었다.
장도영 참모총장의 지지성명을 받아 만천하에 공표해야 하는데 그의 태도가 모호한 것이다. 나는 박정희 장군에게 참모총장실로 가자고 독촉했다. 전쟁 중에도 철모를 쓰지 않았던 내가 철모를 쓰고 권총까지 차고 박정희 장군에 앞서 참모총장실 문을 발로 걷어차며 들어섰다.
“당신은 누구 편인가?” 완전무장한 내가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들이닥치자 장도영 총장은 불쾌해하면서도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총장 각하! 왜 혁명지지 방송을 하지 않습니까. 속히 해군과 공군·해병대 사령관을 소집해 지지 성명을 내십시오!” 그는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위협적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제 야전군 부대가 동대문에 집결해 있습니다. 또 무전연락을 하면 다른 야전군이 합류할 것입니다.” 야전군이 서울에 들어온 것이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내 말이 거칠기도 했지만 장총장은 그제서야 체념한 듯 곧 각군 총장을 소집했다. 야전군이 서울에 입성했다는 것은 상징적 의미가 컸다. 무엇보다 모호한 장도영 총장의 태도를 바꾼 결정적 계기가 됐다. 성공이냐 실패냐의 분수령을 내 부대가 분명하게 갈라놓은 셈이다.
이후 모든 포고령과 ‘혁명공약’은 장도영 총장의 이름으로 나갔다. 박정희 장군이 거사를 주도했지만 장도영 총장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1948년 숙군 시절, 사상문제로 박정희 장군이 치명적 위기에 몰렸을 때 철저히 그를 비호해 준 사람이 바로 장도영 장군이었다. 박장군은 또 전군이 거사를 지지하고 있다는 상징으로서도 참모총장을 내세우는 것이 필요했을 것이다.
97. 육사 5기·8기생 간의 갈등
나는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5·16을 성공시킨 뒤 20일 오후 부대를 이끌고 원대복귀했다. 정치를 모를 뿐만 아니라 군인은 국토를 지키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나는 박정희 장군에게 작별을 고하고 전선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혁명정부’의 일하는 방식이 엉망이었다. 지난날 박장군과 만나 거사 이후를 얘기했을 때 나는 분명히 각료는 가능한 한 군인을 쓰지 말고 유능한 민간인을 발탁하며, 군인을 쓸 경우 차관급 이하로 해야 한다고 주문했었다. 하지만 참모들의 건의 때문인지 각료 등 요직은 모두 군인이 독식했다. 시일이 지나자 서로 싸우고 비리도 불거져 나왔다.
게다가 장도영 참모총장을 따르는 세력과 박장군을 따르는 세력 간에 암투도 벌어지고 있었다. 거사 주체는 박장군이었지만 군부 내의 기반은 장총장이 쥐고 있었다. 장총장을 따르는 세력은 그의 고향(평안도) 후배들인 38선 이북 출신들이고 박장군 추종세력은 이남, 그것도 영남 세력이었다. 박치옥 · 김윤근 · 문재준 대령 등 주체 중의 주체는 한결 같이 이북 출신이었다.
이들 대부분이 함경도와 평안도 출신으로 예전부터 ‘알래스카’로 통해 온 사람들이다. 반면 박장군을 따르는 세력은 김종필 중령을 중심으로 한 주로 이남 출신의 육사8기생들이었다. 각 도의 기질이 세력 재편의 기준이 돼 버린 셈이다. 박장군과 함께 직접 병력을 이끌고 ‘혁명’을 주도한 이북 출신들인 나와 박치옥 · 문재준 대령은 성격이 괄괄하고 급한 야전형으로 단순하고 우직하며 원칙에 투철한 사람들이다.
반면 박장군을 따르는 김종필 중령 등은 거사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지만 유연하고 두뇌 회전이 빠른 사람들이다. 거사 주도권 싸움에서 육사5기생들로 계급이 높은 이북 출신은 두뇌 회전이 빠른 이남의 8기생들에게 판판이 깨지고 있었다. 단순하고 우직한 군인들은 전선에서 물불 안 가리고 잘 싸우지만 두뇌가 요구되는 정치판에서는 밀리게 돼 있었다.
결국 괄괄한 성격의 이북 출신 장교들이 정치장교들에 의해 ‘혁명정신’이 퇴색해졌다고 불만을 터뜨리자 8기 주체세력들은 5기생들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체포하기 시작했다. 거사 불과 한 달 전후의 일이다. 장총장을 비롯해 주체인 박치옥 · 문재준 · 김윤근 대령이 반혁명분자로 몰려 구속됐다. 곧이어 혁명5인위원회 위원인 김동하 · 송찬호· 윤태일 장군도 숙청됐다. 5인위원회 일원 중 남은 사람은 박장군과 나뿐이었다.
장총장이 구속되기 전 나는 장총장의 심복이자 5기 동기인 송인율 대령에게 이런 말을 했다.“ 장총장은 스스로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소. 혁명정부에서 그에게 감투를 준 것은 군내 충돌을 막고 단합해 있다는 상징적 인물로 내세운 것이지 적격자라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오. 장총장의 역할은 끝났으니 물러나는 게 어떨까요.” 송대령도 같은 의견이었다.
“나도 똑같은 생각인데 총장님이 예전 같지가 않아요. 자신을 실질적인 지도자로 착각하고 있어요. 건의를 드려도 자신이 박장군을 돕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래요. 그쪽 돌아가는 모양이 그게 아닌데 모르시는 것 같아 불안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최고회의 대변인을 맡은 원충연 대령, 주체의 한 사람이자 혁명정부감찰부장인 박창암 대령까지 숙청돼 버렸으니 주도권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원충연이나 박창암은 불의를 못참고 직언을 잘하는 전형적인 이북내기들인데 이들마저 체포되고 이 중 원대령은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이렇게 해서 8기생 세력은 5기생과 이북의 영향력 있는 군인들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런 와중에서 내가 살아남은 것은 정치적 야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8기생 세력이 나를 눈엣가시로 보고 있었다. 그들은 박장군을 시켜 나를 서울로 불러들이도록 보고했다.
98. “채장군처럼 사심없는 군인이 필요해”
1961년 7월, 박정희 장군이 나를 불렀다. 나는 그동안 서울의 소식은 듣고 있었으나 모든 걸 잊고 전방에만 박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정희 장군은 나를 불러 식사를 함께 하면서 말했다. “내가 정치엔 소질이 없으니 채장군이 날 도와야겠소.” 그것은 맞지 않는 어법이었다. 내가 정치에 소질이 없어서 군 본분에 충실하고 있는데 그런 나더러 도와 달라고 하다니….’
박장군이 말했다. “나를 따르는 젊은 장교들이 많이 있지만 아무래도 나는 채장군처럼 정치나 감투에 야심이 없는 군인이 필요해요.” “저는 정치는 싫습니다.” “아니야, 서울로 들어와요.” 박장군은 나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평소 내 성격을 잘 아는 박장군은 그 정도로 고사하면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이번의 경우는 특별했다.
그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제서야 박장군이 본심을 털어놓았다. “사실을 말하겠는데, 젊은 장교들이 채장군이 좀 불안한 모양이야. 야전군을 끌고 있으니 걱정되는 모양이오. 그러니 서울로 나와서 나를 도우라고.” 서울 근교에 막강한 야전군 5사단이 있으니 젊은 혁명주체들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나는 이북 출신에 잘 아는 장군들이 거의 체포된 상황이다. 그때서야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다시 군대를 이끌고 어떤 행동을 하지 않을까, 하는 오해를 받는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 보일 필요가 있었다. “그럼 뭘 맡는다는 겁니까.” “그래, 감찰위원장을 맡아 주시오.
지난날 부정부패가 만연해 우리가 얼마나 실망했소? 그것을 척결해 주시오. ”이렇게 해서 나는 감찰위원장을 맡았다. 감찰위원회는 법적으로 중앙정보부보다 상급 기관이었다. 감찰위원회는 대한민국의 입법·사법·행정 3부를 감사하고 적발된 기관장의 파면권도 갖고 있었다. 이때 내가 놀란 것은 중앙정보부의 횡포가 심하다는 것이었다.
권력과 돈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관. 특권과 탈법을 막아야 할 기관이 그것을 더 남용한다면 누가 ‘혁명정부’를 믿고 따를 것인가. 이런 이유로 나는 주체세력을 감찰 대상 1호로 삼았다. 맨 먼저 걸려든 주체는 모 국영기업체장으로 나간 이모 중령이었다. 그는 근무시간에 여비서를 데리고 산장에 가서 질퍽하게 노는 등 사생활이 문란했다.
최고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군인들 상당수가 이권에 개입하는 등 부패도 심했다. 이것을 때려잡으려는데 의외로 저항이 심해 때로 힘의 한계를 느낀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문교장관으로 있던 해병대 출신의 문희석 대령이 나를 찾아왔다. 군인답지 않게 박식하고 인격과 사려가 깊은 사람인데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말은 의외였다.
“위원장님, 저를 문교장관직에서 그만두게 해 주십시오.” “아니, 왜 그러세요?” “며칠 전 최고회의 손모 장군이 어느 대학총장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대학운영에 어려움이 많다고 나더러 도와주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 헤어졌는데 그 다음날 집으로 커다란 케이크가 하나 왔습니다.” “케이크 선물이야 늘 받는 것 아니오?”
“그게 아닙니다. 케이크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거액의 돈봉투가 있는 게 아닙니까. 나는 그 총장을 불러 혼내 주고 돌려주긴 했지만 이거 기분 나빠 장관 못해먹겠습니다. 이런 것도 신물이 납니다. 그러니 박정희 의장(최고회의 의장은 장도영 참모총장이었으나 반혁명 사건 혐의로 구속되고 대신 박정희 장군이 이어받았음)께 잘 말씀드려서 장관직을 그만두게 해 주십시오.”
99. 소장 진급과 감찰위원장
나는 이 하소연을 듣고 화가 났다. “거사한 지가 얼마나 됐다고, 미친놈들! 함께 일어선 동지들은 반혁명 혐의로 형무소에 들어가 있고, 남아 있는 놈들은 이런 미친 짓이나 하고 있으니….”
비리와 부정에 알게 모르게 개입된 군인들은 손모 장관뿐만이 아니었다. 항일독립투사로 내가 존경해마지 않던 유림 선생의 아들도 최고회의 재정위원을 맡으면서 부정한 돈을 받는 정도였으니 다른 경우는 말할 필요조차 없었다. 나는 그 길로 박정희 의장을 찾아가 흥분 상태로 항의했다.
부정부패 지적… 젊은 세력에 눈총
“혁명군이 부패하고 있으니 망국으로 가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자리에 연연하고 싶지 않습니다! 감찰위원장 자리를 당장 때려치우겠습니다!” “흥분하지 마시오. 다 절차가 있는 법이오.” “저는 이런 풍토에선 감찰위원장직을 못 하겠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가깝게 지낸 동지들은 감옥에 가 있다. 고립감도 그렇고 젊은 주체세력들과도 호흡이 맞지 않아 견딜 수 없었다.
박의장은 그 길로 나를 최고위원직에서 해임했다. 감찰위원장직은 유지됐으나 최고위원, 거기다 혁명 5인위원회 일원이라는 상징성도 떨어져 나간 셈이었다. 이후 젊은 주체들로부터 나는 따가운 눈총을 받는 신세가 됐다.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지만 이곳저곳에서 오는 시선이 사실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어느 날 정보부장이 나를 찾아왔다.
“선배님이 혁명동지들을 감싸주셔야지 자꾸 목을 치면 불안해서 어디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선배님의 비호 아래 우리가 일을 잘 수행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나도 한마디 쏘아 주었다. “우리가 거사한 것은 마적단처럼 약탈한 재물을 나눠 먹자고 한 게 아니오. 부패와 부정을 뿌리 뽑자고 나선 것이고, 사회 안녕질서를 지키자고 나선 것인데 우리가 먼저 타락을 해서 되겠소?”
“그 점에 대해선 저도 동감합니다. 하지만 동지들이 도무지 좌불안석이라서….” “정보부장과 나의 동지관은 다른 것 같소. 옳은 일을 하자고 우리가 거사했잖소. 그러니 못된 짓을 하는 자는 동지가 아니라 적이오. 듣기로는 당신들이 전방에 있는 나를 끌어냈다고 알고 있소. 전방에 있을 때도 불안하다고 하고, 감찰위원장으로 와도 불안하다고 하니 어쩌자는 것이오? 난 주어진 직책이니 부정부패 척결에 매진할 뿐이오. 그것이 혁명정신에 투철한 거요.”
그는 돌아갔지만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 무렵 수리조합 비리가 상당했다. 수리조합은 국회의원들이 돈을 뜯어먹는 구멍이었다. 하천도 없는 곳에 다리를 놓아준 것처럼 속여 국고를 뽑아먹고 없는 저수지도 있는 양 해서 예산을 착복했다. 어느 대학은 돈을 받고 졸업장을 팔아먹고 있었다. 생명을 다루는 의과대학 학생을 상당수 더 뽑아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었다. 이것을 막는 데 정작 해당 대학이 문제가 아니라 내부의 간섭이 더 심했다.
박정희 의장 강권으로 소장 진급
이러는 중에 나는 1961년 말 육군소장으로 진급했다. 나는 진급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래서 김종오 참모총장을 찾아가 이유를 설명했다. “총장 각하, 저를 진급 대상에서 제외해 주십시오. 혁명에 가담했기 때문에 진급한 걸로 오해할 수 있습니다. 군 내의 전통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건 곤란하오. 벌써 준장을 3년 이상 달고 있지 않소. 8기생들이 준장을 다는데 5기생이 준장으로 남아 있을 순 없소.” “8기생들이 진급하는 것은 이해합니다. 예편하려니 그렇게 되는 것 아닙니까. 저를 그들과 연관시키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나의 고사가 진지하자 박의장이 직접 나를 불렀다.
“혹 불만이 있어서 그러오? 이번 진급은 혁명과 관계없는 것이오. 고집 부리지 말고 8기생들도 편안하게 좀 해 주구려.” 나는 계속 준장으로 남아 있으면 군내 질서가 무너질 우려가 있다는 박의장의 강권으로 소장 진급을 했다. 그 길로 나는 중앙정보부 감찰에 나섰다.
100. 무소불위의 실세 중앙정보부
혁명정부의 권력 실세는 중앙정보부였다. 당시 지나가는 여자의 속옷까지 관여한다는 중앙정보부의 막강한 권력은 말 그대로 무소불위였다.
이때 정보부장은 정당(민주공화당) 창당을 계획하면서 창당자금을 모을 목적으로 주가를 조작한 증권파동을 비롯해 4대 의혹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나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중앙정보부에 감사통지서를 보냈다.
예상대로 정보부장이 나를 찾아왔다. “선배님, 그동안 혁명과업을 완수하려다 보니 무리하게 진도가 나가고, 그래서 비난을 받은 측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 달성을 위해서는 다소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때 감사를 하신다니 곤란합니다.” 나는 단호히 거부했다. 이미 밝힌 대로 그와 나는 동지관부터 달랐다.
“지금 대다수 국민들은 중앙정보부에 대해 많은 불만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소. 언론을 통제하니 신문에는 나지 않지만 감찰위원회로 들어오는 투서는 매일 수십 통이나 돼요. 당신들은 권력의 핵심부에 있다는 자만심에 빠져서 그런지 몰라도 과대망상증 환자 같은 생각도 드오. 사실 박정희 의장도 말이 많은 중정을 한번 짚어보라는 명령을 내렸소. 내가 정보부장한테 바라는 것은 감사받을 때 성의껏 받으라는 거요.”
박의장까지 나섰다고 하니 정보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정보부에 대한 감사를 해 보니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막강 권력기관의 위세대로 감사반원을 협박하기까지 했다. 화가 난 나는 정보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감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소. 그리고 이 내용을 최고회의에 보고하겠소. 초법적으로 경거망동하라는 것이 중앙정보부가 아니오!”
감사 결과 증권파동은 강모 소령과 통일증권. 일흥증권의 윤모 사장이 합작해 벌인 조작극이었다. 1962년 2월부터 5월까지 주가를 엄청나게 올려놓고는 개인투자자들이 몰려들자 상투에서 팔아 30억 환(화폐개혁 이전임)을 모았다는 것이다. 한국전력 주식을 1만5000여 환에 불하받아 6만 환에 되팔기도 했으며, 38전짜리 주식을 29배인 14환50전에 공모증자를 해 공화당 창당자금으로 조성한 것 등이다.
그해 12월 준공한 서울 광장동 워커힐호텔도 불법과 부조리 투성이었다. 60만 평방미터 부지에 호텔을 건립해 해외 관광객을 유치한다는 것인데 각군 공병대 병력 3만 명과 장비 4000대를 동원해 공사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시공업자와 발주자 사이에 거액의 커미션이 오가고 건설비 착복이 있었다. 새나라자동차, 빠찡꼬 사건도 터졌는데 재일교포 기업가에게 이권을 주고 돈을 챙긴 전형적인 권력형 부조리였다.
‘혁명공약’에도 있지만 ‘구악을 일소하겠다’는 혁명정신은 거사 1년도 못돼 권력 핵심부에 의해 난도질당하는 꼴이었다. 63년 3월 초 나는 이 같은 감사 내용을 박의장에게 보고했다. 물론 정보부장도 참석하도록 했다. “우리 손으로 적발해냈으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만일 이걸 밝혀내지 못했다면 다음 정부 아래서 우리 모두 형무소에 갈지도 모릅니다.”
내 보고를 듣고 박의장이 두 손을 부르르 떨더니 앞에 서 있던 정보부장에게 소리를 질렀다. “지금 당장 나가서 시정하시오!” 결국 그 일로 정보부장은 물러나고 나의 육사5기 동기생인 김재춘 소장이 후임에 올랐다. 이때 부조리와 비리에 연루된 자들은 모두 구속되는 등 엄중한 처벌을 받았다.
일을 마무리하기는 했지만 나는 뭔가 허전하고 외로웠다. 공이 돌아오기는커녕 알게 모르게 나를 경계하는 눈초리들이 예사롭지 않았다. 나의 애로를 알아줄 가깝게 지내던 장군들은 ‘반혁명’에 몰려 대부분 감옥에 갔거나 옷을 벗었다. 그래서 광야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 그길로 박의장을 찾아갔다.
“감찰위원장직을 소신대로 수행했으니 이제 부대로 원대복귀하고자 합니다.” “그래 잘 생각했소. 휴식도 필요하지.”박의장은 흔쾌히 내 요구를 받아주었다. 그길로 나는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유학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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