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밀이 출신 CEO… 고물 모아 떼돈 벌다
고철 주워 모은 돈으로 명품 입고 벤츠 타냐고?…'더 좋은 것'욕심 있어야 더 부지런해지니까요
고교 때 주먹쓰다 감방…그 후 4년간 목욕탕에…하루 종일 100명 민 적도
'때 돈' 모아 5000만원 빚도 갚고 땅도 사고…
고철 주워 팔았는데 쓰레기가 돈이 돼 이번엔 크레인 트럭으로…
그렇게 일군 고물장사가 年매출 4300억원…정직원 110명 기업으로
집은 가난했고, 공부엔 취미가 없었다.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라 공부하라고 채근하는 사람도 없었고, 뭐가 어떠냐 묻는 사람도 없었다. 주먹은 셌고, 부자만 보면 기분이 나빴다. 남의 자동차 백미러를 망가뜨리고, 주먹도 휘둘렀다. 대단한 조직원도 못 됐다. 그저 '논두렁 건달'. 고교 졸업 석 달 전, 주먹을 쓰다 잡혀가 소년원에 들어갔다. 후회스럽긴커녕 좀 우쭐했다.겨우 졸업장만 받고 주먹 쓰는 친구들과 몰려다니다가 또 잡혀들어갔다.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고" 주먹질하던 시기였다. 친구가 칼을 휘두르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집행유예로 나오기 전까지 두 달을 감방에 있었다. 면회 온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내가 못나서 그렇다." 교도소에 들어오는 사람들 꼴을 보니 그런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처음 들기 시작했다.
이런 시절을 보낸 손명익(40)은 이제 연매출 4000억원이 넘는 성호기업의 대표이사다. 그의 회사 성호기업은 철 스크랩(scrap) 가공 업체. 영어가 들어가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은 냄비, 프라이팬, 자전거 같은 생활 고물 수집으로 시작해 이제는 공장이나 건물에서 나오는 철 쓰레기를 모아, 자르거나 이물질을 제거해 대기업에 납품하는 회사다. 그의 경쟁사들은 여기까지만 하지만 그는 고급 철 쓰레기만 모아 전기로에서 녹여서 구슬(쇼트볼)로 만든다. 남들은 쓰레기를 주워서 쓰레기 값에 팔지만, 이 사람은 쓰레기를 가공해 새 물건으로 판다. 전후세대가 아닌 40대가, 그것도 머니게임이 아니라 '땀'으로 자수성가해 이런 회사를 갖고 있다는 건, 뭐가 있어도 있다는 얘기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주지만, 포항 쪽에 더 가까운 천북산업단지. 이 단지에 입주해 있는 성호기업에서 손명익 사장을 만났다.
- ▲ 손명익 성호기업 대표 / 이재우 기자 jw-lee@chosun.com
―고등학교 때 주먹 좀 썼다더라.
"경주 변두리 현곡면에서 부모님이 농사를 지었는데, 무척 가난했다. 학생 때 중장거리 육상과 유도를 했는데, 그렇다고 독기 품고 운동을 한 것도 아니었다. 두 번째 감방에 갔다 와서야 좀 달라져야겠다 생각했다. 내 폭행 합의금으로 진 빚도 갚아야 했다. 없었던 독기가 비로소 생기더라. 감옥에 들락거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하는."
―졸업하고 뭘 했나.
"전력이 있어서 어디 취직하기도 쉽지 않고, 집행유예라 다시 사고 치면 인생이 끝장나는 처지였다. 게다가 경주에는 특별히 취직할 곳도 없더라. 아는 분 중에 목욕탕 보일러 기사가 있었는데, 마침 때밀이 자리가 비어 있다더라. 90년 경주 남산장 목욕탕에 들어가서 때를 밀었다. 월급은 없이 손님 때 밀어 주고 받는 게 내 몫이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목욕탕 물 받고, 9시에 마치고 나서 한 시간 청소하고 거기서 잤다. 목욕탕에서 일하는 4년 동안 일 년에 이틀 쉬는 것 빼고는 거기서 먹고 잤다."
―때는 아무나 밀 수 있나.
"그것도 배워야 한다. 다른 목욕탕 가서 때 미는 거, 구두 닦는 것 좀 알려 달라고 했다. 밥을 사주기도 했지만, 공짜로 배운 게 더 많았다. 어린 나이에 찾아가 알려달라 하니까 다들 잘 알려주더라. 손님이 많았다. 때도 잘 밀었지만, 남자들은 마사지를 잘 해주는 것을 더 좋아한다. 정성껏 해주면 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때는 어떻게 해야 잘 미나.
"예를 들어 팔을 민다면, 안에 수건을 넣고 때 수건을 낀 다음, 아래에서 위로 계속 같은 방향으로 밀면서 올라가야 한다. 아래, 위로 왕복으로 밀면 피부가 건조해져서 아프고 때도 잘 안 밀린다. 그건 배운 게 아니라 혼자 터득한 거다."
―그렇게 해서 얼마를 벌었나.
"어른 5000원, 아이 3000원, 구두 닦아주면 500원이었다. 좀 이력이 붙으면서는 계란도 삶아서 팔고, 양말도 팔았다. 어느 해 추석 무렵엔 새벽 4시부터 밤 10시까지 100명을 넘게 민 적도 있다. 혼자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숫자인데, 나는 워낙 때를 빨리, 잘 미는 편이었다. 그날은 하루 종일 우유 6000㏄만 마시면서 때만 밀었다. 그날 밤, 손가락 발가락이 아파서 보니 물에 퉁퉁 불은 살이 터져 있더라."
―젊은 나이에 때밀이 하다 보면 울컥할 때도 있었겠다.
"가끔 '어이, 양말 좀 빨아와' '운동화 좀 빨아라' 하는 손님이 있었다. 처음엔 화가 나서 싸웠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다 해줬다. 친해지면 그런 말에 감정이 상하지 않는다. 1000원, 2000원씩 팁도 받았고.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친했던, 대학 간 친구의 아버지가 목욕탕에 오셨더라. 부끄러워서 화장실에 숨었다. 그분이 군청 다녔는데, 자꾸 오시는 거다. 그래서 나중엔 안되겠다 싶어 인사드렸더니,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주시더라. 그 일 빼고는 그때 마음은 편했다. 몸 쓰는 일을 하면, 마음은 정말 편해진다."
―그 일은 언제 그만뒀나.
"우리 목욕탕 앞에 새 목욕탕이 크게 들어서 앞으로 다른 일을 해야겠다 싶어 이것저것 알아봤다. 기계 사서 녹즙을 짜서 목욕탕에서 팔아봤는데, 그걸로 먹고 살 일을 생각하니 별로 답이 안 나오더라. 식품위생법에도 맞춰서 해야 하는 것도 많고. 식당도 만만치는 않겠더라. 어느 날 고물사업 하는 단골손님이 '젊은 사람이 계속 이 일만 하지 말고, 고물상을 해보라'고 하더라. 목욕탕 들어와 매달 172만원씩 적금을 부어, 4년 만에 5000만원을 만들었다. 그걸로 빚 갚고 고향에 땅도 샀다. 종자돈 안 잃어버리고 할 수 있는 걸로는 역시 고물상이 좋겠더라. 60만원 주고 포터(작은 용달차) 하나를 샀다. 94년엔 '전국 100만호 건설' 붐이 일던 때였다. 가정에서 나오는 고물도 모았지만 그걸로 될 일이 아니었다. 부산, 영덕, 울진으로 다니며 건설현장에서 부스러기 철 조각이나 반생(철사)을 줍거나 철거되는 공장에서 폐기계를 가져와서 그걸 다시 도매상에 팔았다. 회사 이름을 대호철강이라 지었다."
- ▲ 때 잘 미는 법?… 안에 수건 넣고 때 수건을 낀 다음 아래에서 위로 계속 같은 방향으로 밀고 올라가야
쓰레기 버리는 데도 돈을 내는 세상이 되고, 심지어 쓰레기가 돈이 되는 세상으로 바뀌며 그들이 주무르는 돈의 단위도 달라졌다. 영세 고물상은 2002년 2만4000개 수준에서 약 4만개 수준으로 증가했고, 고물상들이 정보를 주고받는 인터넷 카페 '고물연대'의 회원도 5만5000명이 넘는다. 해방 후 정말로 먹고살 게 없던 사람들이나 하던 일이 수십년 만에 새롭게 인기업종으로 뜨고 있는 셈이다. 예전보다는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더 젊어지고 학벌도 높아졌다.
―건설현장 쓰레기를 그냥 줍게 놔두던가.
"현장에 쓰레기와 자재가 섞여 있는데 그것 구분해 정리하는 것만도 큰일이다. 현장 싹 청소해주고, 자재도 정리하고 나면 쓰레기를 가져가라고 한다. 당시엔 할아버지들이나 고물을 줍던 때였고, 고물이 돈 된다는 생각도 없었다. '젊은 사람이 예쁘다'며 너그럽게 해줬다."
―그런 것들만 주워 돈이 벌리나.
"현장 쓰레기만으론 부족했다. 돈을 버는 사람들은 아예 공장과 계약하고 거기서 남은 자재 조각이나 폐기계를 가져와 큰 덩어리로 일을 하더라. 그래서 이른바 '영업'이란 게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만나고, 밥 먹고, 청소해주고, 그런 식으로 영업을 했다."
―그래서 좀 벌었나.
"다음 해인 95년부터 한 달에 300만~500만원쯤 벌게 되더라. 크레인 달린 트럭을 600만원 주고 샀다. 그랬더니 돈이 더 잘 벌리더라. 그래서 돈 벌면 새 차 사고 기사 붙이고, 또 돈 생기면 새 차 사서 기사 붙이는 식으로 계속 불려 나갔다. 집사람은 경리보고, 나는 수집하러 다녔다. 그러느라 첫 애 낳은 97년에도 보일러도 없는 사무실에서 아이를 키웠다."
―어려서 사고 많이 쳤는데, 인생이 잘 풀렸다.
"고등학교 때 죄를 졌을 때는 나이가 어리니까 경찰들이 많이 배려해줬다. 그래서 내 잘못에 비해 크게 인생이 망가지지 않고 잘 헤쳐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결국 족쇄가 되더라. 나중에 받는 벌은 훨씬 더 커져 있더라."
10대의 과오, 인생의 발목을 잡다
―무슨 얘기인가.
"사업을 한창 열심히 하던 97년이었다. 부도난 기업 물건을 돈 주고 샀다. 우리 물건을 가져오기로 했는데, 울산 깡패들이 와서 자기네 것이라고 가져가려고 한다더라. 조직에 몸담고 있던 친구한테 '와서 분위기만 좀 잡고 있으라'고 했다. 물건을 확보하고 나서 돈을 많이 벌어 5000만원을 줬다. 2년 후에 그걸 두고 내가 조직폭력배 배후세력이었고, 내 행위가 갈취였다 하더라. 경찰관 입회하에 물건 싣고 나왔고, 세금계산서도 다 줬는데. 감옥에 간 기록이 있었으니까. 후배와 관련이 있는 조폭들 다 잡힐 때까지 6개월을 감옥에 있었다. 6개월 징역 살고 벌금 300만원 선고받았는데, 6개월 일당 빼고 나니까 벌금 남은 게 30만원쯤 되더라. 밤에 작업하고 위협을 했다는 명목이었다. 과거가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럴 일이 아니었는데…. 스무 살 이후 그때 또 한 번 독기가 생기더라. 다행히 6개월 살고 나왔는데도 거래처가 한 군데도 끊기지 않았다."
―뭔가 있었으니까 조폭에게 그 정도 돈을 준 것 아닌가.
"고향 선후배들이라…. 그러나 물건만은 정말로 우리가 제대로 돈 주고 산 것이었다."
―'같이 좀 먹고 살자'고 하는 옛날 주먹 선후배도 있지 않았나.
"고향 후배 하나는 데려와 일을 주고 마음잡게 했다. 하지만 그런 부탁 들어주면 사업을 할 수가 없다. 그때 시달린 일로 정신 차려서 사람정리 많이 했다."
―그걸로 감옥은 끝이었나.
"그렇지 않다. 2005년 또 사건에 얽혔다. 장물취득 혐의였다. 오래 거래하던 A사에서 싸게 파는 재고 H빔이 있다고 해서 회사에서 세금계산서를 발행해주고 송금을 다했다. 그런데 그 물건은 A사가 B사에 가짜 어음을 발행해주고 가져온 것이었다. B가 A를 고소한 후 피해자 B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려고, 가해자 A는 합의 빨리하고 끝내려고 나를 끌고 들어갔다. 설령 그게 잘못됐다 하더라도 업무상 장물취득이지만, 검사는 끝까지 나 개인을 의심하더라. 내가 전과자였으니까. 만만하게 생각하고 변호사도 없이 대응하다가 결국 7억원을 물어줬다. 나중에 비싼 변호사 사서 대응했지만 대법원까지 갔다가 패소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가 불이익을 준다는 걸 또 깨달았다."
―시킨 건 아니지만, 그런 물건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 건 아닌가.
"그랬으면 세금계산서 끊고, 통장으로 돈 입금하고, 그거 그대로 야적장에 쌓아놓았을 리가 있겠나. 싼 물건 있다고 하면 달려드는 게 장사꾼 생리다."
―지금도 간혹 고물장수가 '버리는 건 줄 알았다'며 경찰서에 잡혀오는 경우가 있다. 하부에서 그런 일이 생기는 것도 이런 큰 공장 책임이 되는 건 아닌가.
"그건 일종의 생계형(범죄)인데, 그런 경우 때문에 힘들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어릴 적 그런 일을 겪었으면 후엔 겪지 않았을 것 같다. 현재 회사에 들어오는 고물이 연간 3000억원어치다. 그 물건 이력을 다 파악할 수는 없다. 100% 통장 송금, 100% 세금계산서 발행 같은 원칙을 세워서 일종의 방어 시스템을 만들어놨다. 요즘엔 꼭 그렇게 한다."
- ▲ '때'와 '쓰레기'는 어긋났던 그의 인생을 역전시켰다. 2012년 연매출 8000억원에 도전하겠다는 손명익 성호 기업 대표가 경북 경주 천북산업단지에 있는 자기 회사 야적장에서 포즈를 취했다. 쓰레기 속에서 속에서 금 맥을 찾아낸 건, 그의 눈이 아니라 땀이었다. / 이재우 기자 jw-lee@chosun.com
어렵게 돈 모았다. 그래도 자린고비는 싫다
이름은 컸지만 직원은 8명이 고작이었던 대호철강은 2002년 성호기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주식회사로 출범했다. 정직원은 110명. 이제는 직접 고물을 수집하러 다니지 않고, 중간상인들이 모은 스크랩을 가공해서 판다. 커다란 철재 규격대로 자르거나 분말로 만들기도 하고, 이물질을 제거하는 등 단순 가공을 거쳐 포항제철, 대한제강 등에 납품하는 물량이 75만t이다. 매출의 70%를 차지하는 철 스크랩(고철 리사이클링) 가공은 물론 자동차부품(엔진 변속기 바퀴 등에 쓰이는 철재류 가공), 건설 부문을 합치면 작은 업체가 12개가 된다. 최근에는 300억원 가깝게 투자해 철가공과 쇼트볼(선박도장, 녹 제거 등에 쓰이는 작은 구슬)생산 라인까지 갖춰 비교적 건실한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일본 신일본제철이나 JFE를 찾아가 철 스크랩 미래가 어떻게 될지 엿보고 온 결과였다. 올 매출 예상은 4300억원. 기업 공개도 염두에 두고 있다.
―회사 이름이 아들(13) 이름이다.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회사 이름을 이렇게 지은 건가.
"원래 어릴 적 집에서 부르던 이름을 따서 첫 회사이름을 대호철강이라 지었다. '호경 호(鎬)'의 '호경'은 큰 도시라는 의미인데, '성호(成鎬)'라는 뜻이 좋아 애 이름으로 먼저 짓고, 나중에 회사명을 개명할 때 또 썼다."
―부인은 자회사 성호스틸 사장이다. 이 대목도 영 껄끄럽다. 가족끼리 다 해먹는다는 느낌이 든다.
"중소기업이란 게 가족이 챙기지 않으면 어려운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내는 스무살에 만나 대호철강 시절부터 경리를 보면서 이 일을 많이 했다. 그 부분은 숙제인 것 같기는 하다. 외부 경영자를 모셔오는 것도 고려 중이고."
―자수성가한 사람들은 대개 월급쟁이 사장을 믿지 못하더라. 그런 불신은 왜 생기나.
"그건 대부분이 그럴 것이다. 그리고 그건 불신이라기보다는 '관리'라고 생각한다. 관리 감독은 기업을 책임지는 사람의 기본이다."
―자수성가한 CEO의 단점은 뭔가.
"자기 주장이 강한 점이다. 독단과 독선이 심하다고 하더라."
―당신도 그런가.
"직원들에게 물어봤다. 웃더라. 그 병이 없으면 자수성가 자체를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양복이 외제 양복 같다. 근사하다. 구두도 좋고. 요트도 있지 않은가. 자동차는 뭔가.
"양복이나 신발을 남들에게 빠지는 거 쓰지 않는다. 자동차는 벤츠이고, 요트는 팔았다. 술 먹는 접대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몇년 전 샀었는데, 유지비가 꽤 많이 들고 우리 정서에도 별로 맞지 않아서."
―어느 대기업 회장은 구두와 허리띠를 20년을 썼다고 하고, 구두가 닳지 않도록 징을 박아 신었다고도 하는데, 왜 그렇게 치장을 많이 하나.
"구두 하나를 20년 신은 게 아니라 20년 된 구두를 갖고 있는 거겠지. 20년을 허리띠 하나로 어떻게 버티나. 20년 전 벨트를 지금도 갖고 있는 거 아닌가. 예전 세대의 자수성가한 분들하고는 생각이 좀 다르다. 영업을 하다 보면 차가 작으면 무시당해서 큰 차를 탄 이유도 있다. 그런데 돈을 벌어서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마음이 나쁜 것일까. 더 좋은 것을 갖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일도 더 많이 하고, 더 부지런해지는 거 아닌가."
―이제 기업을 확장해 경주에 2000가구 아파트까지 짓고 있다. 이 정도면 사회적 기여나 기부를 생각할 때 아닌가.
"아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함께 오래 고생한 직원 5명에게 크지 않지만 작은 아파트도 회사에서 줬다. 먼저 다닐 만한 공장을 만드는 게 내 과제다."
최소한 고졸자는, 그리고 자존심 강한 청년들은 하지 않는 때밀이나 고철 줍는 일을 해서 손명익은 부자가 됐다. 남들이 안 하는 일을 하는 젊은이를 도와준 사람들 덕분이기도 했다. 그는 '과거 때문에 발목이 잡혔다'고 생각하겠지만, '뭔가 구린 구석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더군다나 바닥부터 올라온 CEO가 여전히 '자린고비' 정신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 '손명익 신화'를 완성하는 데는 결격사유다. 그러나 40대의 자수성가 법칙과 인생 행로가 반드시 전후 세대의 법칙을 따를 필요가 있을까. 논쟁적 자수성가 세대의 출현, 아마도 손명익의 의미는 그런 것이겠다.
경주시 천북면 천북지방산업단지 내 ㈜성호기업 대표 손명익(39ㆍ사진)씨가 때밀이 출신 CEO로 알려져 주목 받고 있다. 특히 맨주먹으로 30대에 철스크랩 수집ㆍ가공 업체와 건설, 자동차부품회사 등 6개 기업에 올해 예상 매출 4,000억원, 2012년 8,000억원을 목표로 하는 등 초고속 성장가도를 달려 눈길을 끌고 있다.
손씨의 첫 직업을 가진 것은 1990년. 목욕탕 때밀이였다.
그 이전만 해도 그는 문제아 중의 문제아였다. 2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진학은 꿈도 꾸기 어려웠고, 그 때문에 비행청소년의 길을 걷기도 했다"고 말했다. 가난으로 세상에 대한 증오심이 응어리졌고, 길을 가다 고급승용차 백미러를 부수는 등 사회에 분풀이를 하곤 했다. 동네 선후배들과 어울리다 소년원에 다녀온 적도 2번이나 있다.
어두운 과거를 잊기 위해서도 일에 몰두했고, 많을 때는 하루 12시간 동안 100명 이상 밀기도 했다. "안 먹고, 안 입고, 안 놀고 매달 172만원씩 적금을 붓는 등 죽어라 일했다"며 "우연히 고철수집을 권하는 고객의 말에 따라 목욕탕을 그만두고 그 동안 모은 6,000여만원으로 고향 부모님 집을 지어드리고 1톤 트럭을 구입해 전국을 돌기 시작했다"며 철스크랩 수집을 시작한 배경을 설명했다.
94년 설립한 고철수집회사가 현재 성호기업의 전신인 대호철강. 성실과 정직을 무기로 급성장했고, 이제 자동차부품업체와 건설회사 등 5개 기업을 인수해 어엿한 '그룹'으로 성장했다. 지난해는 경북도 지정 신성장기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온 가족이 한겨울에 사무실 바닥에 전기장판 한 장 깔고 살기도 하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99년에는 잘못 수거한 장물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최종 형은 벌금 30만원이었지만, 10대 비행청소년 출신이라는 낙인으로 6개월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천북단지에 번듯한 새 공장을 지은 뒤 얼마 안 돼 아들의 만류에도 회사 청소를 하고 귀가하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하는 슬픔도 겪었다.
이 같은 역경을 딛고 성공한 비결은 품질제일주의에 있다. "어느 수집상보다 고철의 때를 싹 벗기고 납품했고 불량률을 줄이고 품질관리에 용이한 제강업체들이 대만족했다"며 "목욕탕 때밀이에서 고철 때밀이까지 때와 인연이 많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인재 제일주의를 천명한 손씨는 연차적으로 전 직원들에게 사택을 제공할 계획이다. 현재 경주시내에 짓고 있는 100여가구 규모의 아파트 가운데 임원급부터 입주시키기 시작해 250여명의 직원 모두가 내집을 장만할 때까지 무상으로 회사 사택에서 살 수 있도록 할 방침이다.
"가난한 사람의 사정은 겪어 본 사람이 잘 알고, 기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만큼 전 직원들이 집 걱정 없이 신바람이 나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겠다"며 "고철로 강철을 만드는 전기로사업에도 진출할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