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결(修心訣)
고려(高麗) 21대 희종(熙宗) 때의 목우자 보조(普照) 국사(國師)가 지은 『수심결(修心訣)』을 조선(朝鮮) 시대(時代) 7대 세조(世祖) 때의 중 혜각존자(慧覺尊者) 신미(信眉)가 우리말로 옮긴 책. 10대 연산군(燕山君) 6(1500)년 합천 봉서사(鳳栖寺)에서 간행(刊行).
〈목우자수심결 牧牛子修心訣〉·〈보조국사수심결 普照國師修心訣〉라고도 한다. 40세 이후에 저술된 것으로 추정되며 분량이 많지 않고 문장이 간결·평이하여 참선(參禪)의 입문서로서 널리 읽혔다.
지눌은 이 책의 서두에서 〈법화경〉의 '화택비유'(火宅比喩)를 인용하여 삼계(三界)의 뜨거운 고뇌는 마치 불타는 집과 같으니 이처럼 괴로운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부처를 이루는 일이나, 사람들은 자기 마음이 곧 참 부처이고 자신의 성품이 곧 참다운 법(法)임을 알지 못하여 밖에서만 찾으니 마치 모래로 밥을 지으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본론은 마음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방법론을 9문9답을 통해 제시했다.
제1문답에서는 불성(佛性)은 모든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지만 스스로 보지 못할 뿐이며 우리가 보고 듣고 지각하는 것 자체가 곧 불성의 작용임을 설명했다. 제2문답에서는 불도(佛道)에 들어가는 문은 오직 돈오(頓悟:단박에 깨달음)와 점수(漸修:점차로 닦아나감)의 이문(二門)에 있음을 밝혔다. 제3문답에서는 돈오와 점수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돈오란 자기의 본성이 곧 제불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 것이고, 점수란 그 깨달음에 의지하여 무시 이래로 훈습(熏習:향기가 옷에 배는 것처럼 業力이 마음에 남아 있는 것)된 망념(妄念)을 점차로 걷어내는 것이라고 했다.
제4~6문답은 돈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깨달음에는 특별한 방법이 없으며 만약 방법을 써서 깨닫고자 한다면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의 눈을 보지 못하므로 눈이 없다고 하여 다시 보려는 것과 같으니, 눈을 잃지 않았음을 알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영지(靈知:신령스런 앎)도 이미 자신의 마음이므로 볼 수 없는 것임을 알면 그것이 곧 견성(見性:자신의 불성을 보고 깨달음)이다.
제7~9문답은 점수의 방법론에 대해 선정(禪定)과 지혜를 균등하게 유지하는 정혜등지(定慧等持)로 설명했다. 정혜(定慧)를 체(體)·용(用)의 관점에서 보면, 정은 곧 자성(自性:자기가 본래 갖춘 성품, 곧 佛性)의 본체이고 혜는 곧 자성의 작용이므로 체·용이 분리될 수 없듯이 정·혜도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따라서 점수의 방법론은 정과 혜를 동시에 골고루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이다. 정혜쌍수는 수행자의 근기(根機:敎法을 받아들이는 능력)에 따라 자성정혜(自性定慧)와 수상정혜(隨相定慧)로 나뉜다. 자성정혜를 닦는 자는 돈오문에서 '힘씀이 없는 힘씀'(無功之功)으로서 정과 혜를 아울러 부리고 스스로 자성을 닦아 부처를 이루는 사람이고, 수상정혜를 닦는 자는 깨닫기 전의 낮은 근기의 공부로서 마음마다 의혹과 번뇌를 끊고 고요함만을 취해 수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깨달은 관점에서 보면 양자는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즉, 비록 돈오 후에 점수라고는 하나, 망념은 본래 공(空)하고 심성은 본래 깨끗한 것임을 먼저 깨달았으므로 악을 끊어도 끊을 것이 없고 선을 닦아도 닦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지눌은 이 책에서 자신의 수심관(修心觀)을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로 체계화했고, 이는 곧 한국불교의 선수행(禪修行)의 지침이 되었다.→ 목우자수심결언해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 (1158∼1210)
보조국사의 휘는 지눌(知訥)이고, 호는 목우자(牧牛子)이며 속성은 정(鄭)씨이고, 시호가 불일보조(佛日普照)이다. 황해도 서흥(瑞興) 출생이다. 1165년(의종 19) 출가하여 종휘(宗暉)에게서 승려가 되었다. 1182년(명종12) 승과(僧科)에 급제했으나 출세를 단념하고 평양 보제사(普濟寺)의 담선법회(談禪法會)에 참여했다. 창평(昌平) 청원사(淸源寺)에서 6조(祖)의 《단경(壇經)》을 읽고 대각(大覺)한 뒤에 수도에 더욱 정진하였다. 1185년 하가산(下柯山) 보문사(普門寺)에서 《대장경》을 열독(閱讀)하고 선 ·교(禪敎) 통합의 필요성을 깨우쳤다.
공산(公山)의 거조사(居祖寺)에 머물면서 정혜사(定慧社)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을 발표, 독자적인 사상을 확립, 불교 쇄신운동에 눈떴다. 이어 지리산(智異山) 상무주암(上無住庵)에서 3년 동안의 참선 끝에 은둔생활을 탈피하고 적극적 보살행(菩薩行)의 현실 참여를 목표로 삼았다.
1200년(신종 3) 송광산(松廣山) 길상사(吉祥寺)로 옮겨 중생을 떠나서는 부처가 존재할 수 없다고 설파,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고 선(禪)으로써 체(體)를 삼고 교(敎)로써 용(用)을 삼아 선, 교의 합일점을 추구했다. 의천(義天)이 교로써 선 ·교의 합일점을 모색한 반면, 지눌은 종래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조계종에 통합, 종풍(宗風)을 떨쳐 의천의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고려 불교의 양대산맥의 내면적 통일을 기한 큰 업적을 이룩했다.
고려의 희종은 즉위하자 송악산 길상사를 조계산(曹溪山) 수선사라 고쳐 제방(題榜)을 친히 써주고 만수가사(滿繡袈裟)를 내렸다. 법복을 입고 당에 올라가 승도를 소집, 설법하다가 주장을 잡은 채 죽으니 탑을 세워 탑호를 감로(甘露)라 하고, 국사(國師)에 추증하였다. 저서로는 《진심직설(眞心直說)》 《목우자수심결(牧牛子修心訣)》 《계초심학입문(誡初心學入門)》 《원돈성불론(圓頓成佛論)》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 《염불요문(念佛要門)》 《상당록(上堂錄)》 《법어》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竝入私記)》 등이 있다.
수심결은 수행인들뿐만 아니라 일반 세인들에게도 널리 읽혀져야 할 마음 닦는 길의 지름길이다. 인간이 누려야할 행복은 모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며, 이 해방의 길은 외부가 아닌 자신의 마음에 있음을 극명하게 가르쳐주는 지침서이다. 마음은 바로 자신의 처소이다. 여기에 절을 짓고 등불을 내걸지 않는다면 고통의 그림자는 사라질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를 일깨워주고 있다.
수심결(修心訣)이란 ‘마음을 닦는 비결’이란 뜻이다. 팔공산 거조사에서 정혜결사를 시작한 보조국사(1158-1210)는 40세가 되던 해(1197년)에 지리산 상무주암으로 옮겨간다. 여기서 간화선을 창도한 <대혜어록>을 보고서 세 번째 마지막 깨달음을 얻었다. <수심결>은 대혜선사의 어록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상무주암에서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많은 어록이 출현하였지만, <수심결>은 현대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동북아시아를 대표하는 어록이라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서 간행한 대장경에도 등재가 되어 있고, 많은 선각자들이 <수심결>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사례가 보고 되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국내에서는 단일 저술 가운데 가장 많은 연구와 번역과 강의가 이루어졌고, 이웃국가인 대만에서도 역주작업이 진행되어 출간되었다. 뿐만 아니라 버스웰(Buswell)교수에 의해서 화와이 대학에서 영어로 번역되었고, 명상에 기초한 스트레스 완화(MBSR)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존 카밧진(Jon Kabat-Zinn) 같은 심리학자들도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 <수심결>의 어떤 점이, 무엇이 이런 역사적인 관심을 지속시켰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깨달음의 사상적 기초와 구체적인 방법의 핵심이 간명하면서도 쉽게 제시되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수심결>의 기본적인 방향은 대승불교의 불성과 간화선의 수행론을 채택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어가 다르고 시대가 달라진 까닭에 새롭게 연구하고 해석할 필요성이 있다. 기존의 많은 번역이나 연구의 방향과 대동소이하다면, 여기서 특별하게 강론해야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전체적인 기조나 관점이 달라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고민을 하면서 필자는 <수심결>을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설을 해야겠다고 판단을 하였다. 이렇게 하면 오랜 대승불교의 전통적 사상인 불성과 간화선이 보다 현실적인 담론이 되고, 오늘의 현장에서 응용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하지 않을까 생각을 한 것이다.
수심결(修心訣) <1>
-윤회고통 마치 불난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러 있는가-
三界熱惱 猶如火宅 其忍淹留
삼계열뇌 유여화택 기인엄류
甘受長苦 欲免輪廻 莫若求佛
감수장고 욕면윤회 막약구불
若欲求佛 佛卽是心 心何遠覓
약욕구불 불즉시심 심하원멱
不離身中 色身是假 有生有滅
불리신중 색신시가 유생유멸
眞心如空 不斷不變 故云百骸潰散
진심여공 부단불변 고운백해궤멸
歸火歸風 一物長靈 蓋天蓋地
귀화귀풍 일물장령 개천개지
삼계(三界:욕계·색계·무색계)를 윤회하는 고통은 마치 불난 집과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머물면서 그 오랜 고통을 받으려 하는가.
그 윤회를 벗어나려면 부처를 찾는 길밖에 없다.
만약 부처를 찾으려면 이 마음이 곧 부처이니, 마음을 어찌 멀리서 찾을 것인가.
바로 이 몸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몸은 무상하여 나기도 하고 죽기도 하지만 이 진심(眞心)은 허공과 같아서
끊어지지도 않고 변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육체는 죽으면 흩어져 불이나 바람의 자연으로 돌아가지만
한 물건(마음)은 영원히 신령하여 하늘과 땅을 덮는다.’ 하였다.
*낱자 공부
訣이별할 결, 비결 결, 熱더울 열, 惱뢰괴로워할 뇌, 猶마치 - 같다. 宅집 택,
淹 담글엄, 留머무를 유, 若같을 약, 너 약, 만약 약, 땅이름 야, 覓찾을 멱
潰무너질 궤, 假거짓 가, 遺끼칠 유, 産낳을 산, 壞 무너질 괴, 骸뼈 해, 盖덮을 개 ,
* 단어 공부
輪廻 ~ 무아와 윤회, 윤회와 해탈
* 해설
중생들이 있는 곳을 불타고 있는 집이라고 비유를 하였습니다.
눈에는 육안과 심안이 있습니다.
육안은 형상 있는 것을 보고 심안은 형상없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심안으로 보니 번뇌가 불로 보였습니다.
속이 타면서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을 끄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나요 ( 고해에서 벗어 나려면 - 해탈 )
불을 끌 때 소방수가 필요하듯이 해탈 하려면 부처님이 계셔야 한다.
그럼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요 (부처님은 마음 가운데 있으니 그 부처님을 찾아야)
마음 가운데 계시는 부처님을 발견 하여야 합니다.
마음 속에는 법신, 보신, 화신의 부처님이 계십니다.
색신을 비롯하여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잠시 있다 떠날거라면 내 것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모두가 생멸을 하는 것입니다. (직업, 의복, 집, 권력, 금은, 돈 등)
우리의 본래 마음(眞心)은 영원한 것이며 이를 일러 법신이라 합니다.
법신은 크고 작음이 없고 사람에 있어서는 개령, 우주에 있어서는 대령이라고 합니다.
이 법신을 발견 하여야 견성입니다.
嗟夫今之人 迷來久矣
차부금지인 미래구의
不識自心是眞佛 不識自性是眞法
불식자심시진불 불식자성시진법
欲求法而遠推諸聖 欲求佛而不觀己心
욕구법이원추제성 욕구불이불관기심
若言心外有佛 性外有法 堅執此情
약언심외유불 성외유법 견집차정
欲求佛道者 縱經塵劫 燒身燃臂
욕구불도자 종경진겁 소신연비
敲骨出髓 刺血寫經 長坐不臥
고골출수 자혈사경 장좌불와
一食卯齋 乃至轉讀一大藏敎
일식묘재 내지전독일대장교
修種種苦行 如蒸沙作飯
수종종고행 여증사작반
只益自勞爾 但識自心 恒沙法門
지익자로이 단식자심 항사법문
無量妙義 不求而得
무량묘의 불구이득
슬프다,
요즘 사람들은 미혹된 지가 오래되어 자기 마음이 참부처인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성품이 참진리인줄 알지 못해서 진리를 구하려고 하면 멀리 성인들만 추앙하고
부처를 찾고자 하면서도 자기의 마음을 관조(觀照)하지 않는다.
만약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성품 밖에 진리가 있다고 말하면서 이런 뜻에 집착하여
불도를 구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오랜 세월동안 몸을 불사르고 팔을 태우고,
뼈를 부수어 골수를 내고, 피를 내어 경전을 베끼며, 눕지 않고 오래 앉아 참선만 하며,
아침 한 끼만 먹으며 나아가 모든 대장경을 다 읽고, 온갖 고행을 닦는다 해도
이는 모래를 삶아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다만 스스로 수고로움만 더할 뿐이다.
그러나 자기의 마음을 알면 갠지스강의 모래알처럼 많은 법문과 한량없는 묘한 이치를 찾지 않아도 절로 얻게 될 것이다.
수심결(修心訣)(2)
-망령된 생각 여의면 그대로 부처-
-그대몸에 있는데도 보지 못할 뿐-
故世尊云 普觀一切衆生 具有如來
고세존운 보과일체중생 구유여래
智慧德相 叉云一切衆生 種種幻化
지혜덕상 차운일체중생 종종환화
皆生如來圓覺妙心 是知離
개생여래원각묘심 시지이
此心外 無佛可成 過去諸如來
차심외 무불가성 과거제여래
그러므로 세존께서 ‘널리 모든 중생을 관찰하니 다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갖추고 있다’ 하시고 또 이르시되 ‘가지가지의 허망된 생각들이 다 원만히 깨달은 여래의 묘심(妙心)에서 나온다’ 하셨다. 그러므로 이 마음을 떠나서 부처를 이룰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
只是明心底人 現在諸賢聖
지시명심저인 현재제현성
亦是修心底人 未來修學人
역시수심저인 미래수학인
當依如是法
당의여시법
願諸修道之人 切莫外求 心性無染
원제수도지인 절막외구 심성무염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
본자원성 단리망연 즉여여불
과거의 모든 여래도 오직 이 마음을 밝히신 분이며, 현재의 모든 성현들도 역시 마음을 닦은 사람들이다. 그러니 미래에 수행할 사람도 응당 이 진리에 의지해야 할 것이다. 바라건대 수행하는 모든 사람들은 밖에서 찾지말라. 마음의 성품은 깨끗하여 본래 스스로 원만한 것이라 단지 망령된 생각들만 여의면 곧 그대로가 부처일 것이다.
問若佛性 現在此身 旣在身中
문약불성 현재차신 기재신중
不離凡夫 因何我今 不見佛性
불리범부 인하아금 불견불성
更爲消釋 悉令開悟
갱위서석 실령개오
묻다. “만약 불성이 지금 이 몸에 있다고 한다면, 이미 이 몸 안에 있으므로 범부를 떠난 것이 아닌데 어째서 저는 지금 불성을 보지 못합니까. 다시 해석하여 속속들이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答在汝身中 汝自不見 汝於十二時中
답재여신중 여자불견 여어십이시중
知飢知渴 知寒知熱 或嗔或喜
지기지갈 지한지열 혹진혹희
竟是何物 且色身 是地水火
경시하물 차색신 시지수화
風四緣所集 其質頑而無情
풍사연소집 기질완이무정
豈能見聞覺知 能見聞覺知者
기능견문각지 능견문각지자
必是汝佛性 故臨濟云
필시여불성 고임제운
四大不解說法聽法 虛空不解說法聽法
사대불해설법청법 허공불해설법청법
只汝目前 歷歷孤明 勿形段者
지여목전 역역고명 물형단자
始解說法聽法
시해설법청법
所爲勿形段者 是諸佛之法印
소위물형단자 시제불지법인
亦是汝本來心也 則佛性 現在汝身
역시여본래심야 즉불성 현재여신
何假外求 汝若不信 略擧古聖
하가외구 여약불신 약거고성
入道因緣 令汝除疑 汝須諦信
입도인연 영여제의 여수체신
답하다. “그대 몸에 있는데도 그대 스스로가 보지 못할 뿐이다. 그대가 하루 가운데서 배고프다, 목마르다 하는 것을 알고, 춥다, 덥다 하는 것을 알고 혹 성내거나 기뻐할줄 아는데 이것이 결국 어떤 물건인가. 이 몸은 지·수·화·풍의 네 가지 요소가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서 그 바탕이 둔하여 감정이 없으니 어찌 보고, 듣고, 지각할 수 있겠는가. 능히 보고, 듣고, 지각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그대의 불성이다. 그러므로 임제 스님은 ‘이 몸뚱이는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도 못하며, 허공도 법을 설하거나 법을 듣지 못하고 단지 그대 눈 앞에 밝음이 역역하지만 형상이 없는 그것이 법을 설하고 법을 들을 줄 안다’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이 없는 그것’이란 바로 모든 부처님의 바탕이며 또한 그대의 본래 마음이다. 그러므로 불성이 지금 그대의 몸에 있는데 어째서 헛되이 밖에서 구하겠는가. 만약 그대가 믿을 수 없다면 간략하게 옛 성인들이 도를 깨친 인연을 들어 그대의 의심을 풀어줄테니 그대는 잘 듣고 믿기 바란다.
수심결 ( 修 心 訣 ) (3)
-“무엇을 부처라고 합니까”-
-“견성하는 것이 부처입니다”-
昔異見王 問婆羅提尊者曰 何者是佛
석이견왕 문바라제존자왈 하자시불
尊者曰 見性是佛 王曰 師見性否
존자왈 견성시불 왕왈 사견성부
尊者曰 我見佛性 王曰性
존자왈 아견불성 왕왈성
在何處 尊者曰 性在作用
재하처 존자왈 성재작용
王曰是何作用 我今不見 尊者曰
왕왈시하작용 아금불견 존자왈
今現作用 王自不見 王曰於我有否
금현작용 왕자불견 왕왈어아유부
尊者曰 王若作用 無有不是 王若不用
존자왈 왕약작용 무유불시 왕약불용
體亦難見 王曰若當用時 幾處出現
체역난견 왕왈약당용시 기처출현
尊者曰 若出現時 當有其八
존자왈 약출현시 당유기팔
王曰其八出現 當爲我說 尊者曰
왕왈기팔출현 당위아설 존자왈
在胎曰身 處世曰人 在眼曰見
재태왈신 처세왈인 재안왈견
在耳曰聞 在鼻辨香 在舌談論
재이왈문 재비변향 재설담론
在手執捉 在足運奔 現俱該沙界
재수집착 재족운분 현구해사계
收攝在一微塵 識者知是佛性
수섭재일미진 식자지시불성
不識者喚作精魂 王聞心卽開悟
불식자환작정혼 왕문심즉개오
옛날에 이견왕이 바라제 존자에게 물었다. “무엇을 부처라고 합니까?”
존자가 대답했다. “견성(見性)하는 것이 부처입니다.”
왕이 물었다. “스님은 견성했습니까”
존자가 말했다. “나는 불성(佛性)을 보았습니다.”
왕이 물었다. “ 그 불성은 어디에 있습니까.”
존자가 말했다. “불성은 작용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왕이 물었다. “그것은 어떤 작용이기에 나는 지금 보지 못합니까.”
존자가 말했다. “지금도 나타나서 작용하고 있습니다만 왕께서 스스로 보지 못할뿐입니다.”
왕이 물엇다. “나에게도 그것이 있다는 것입니까.”
존자가 말했다.
“만약 왕께서 작용하고 있다면 불성 아닌 것이 없지만
왕께서 만약 그것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몸도 또한 보기 어렵습니다.”
왕이 물었다. “만약 작용할 때는 몇 곳에서 나타납니까.”
존자가 말했다. “나타날 때는 여덟군데로 나타납니다.”
왕이 말했다. “그 나타나는 여덟군데를 나를 위해 설명해주십시오.”
존자가 말했다.
“태(胎) 안에 있으면 몸이라 하고, 세상에 나오면 사람이라 하며,
눈에 있으면 보는 놈이라 하고, 귀에 있으면 듣는 놈이라 하고,
코에 있으면 냄새를 맡고, 혀에 있을 땐 말을 하고, 손에 있으면 붙잡으며,
발에 있으면 부지런히 걷습니다.
두루 나타나면 온 세계를 다 감싸지만 거두어들이면 하나의 티끌 속에 있습니다.
아는 자는 이것이 곧 불성인줄을 알지만 모르는 자들은 정혼(情魂)이라 부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바로 열리었다.
又僧 問歸宗和尙 如何是佛 宗云
우승 문귀종화상 여하시불 종운
我今向汝道 恐汝不信 僧云 和尙誡言
아금향여도 공여불신 승운 화상계언
焉敢不信 師云 卽汝是
언감불신 사운 즉여시
또 어떤 스님이 귀종화상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귀종화상이 말했다. “내가 지금 그대에게 말하려 하나 그대가 믿지 않을까 두렵다.”
스님이 말했다. “화상의 지극한 말씀을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화상이 말했다. “그대가 바로 부처이니라.”
수 심 결 ( 修 心 訣 ) (4)
-입으로만 진리 말하고 사견에 빠지면-
-자신도 그르치고 남도 잘못되게 한다-
僧云 如何保任 師云 一 在眼
승운 여하보림 사운 일예재안
空花亂墜 其僧 言下有省
공화난추 기승 언하유성
上來所擧古聖 入道因緣 明白簡易
상래소거고성 입도인연 명백간이
不妨省力 因此公案 若有信解處
불방성력 인차공안 약유신해처
卽與古聖 把手共行
즉여고성 파수공행
스님이 말했다.
‘어떻게 보림(保任:깨달은 경지를 잘 보호하며 닦아가는 것)해야 합니까.’화상이 말했다.
‘하나의 티끌이 눈에 들어가면 허공의 꽃(空花:눈병이 생기면 때로는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 꽃무늬 같은 헛것이 보인다)이 어지러이 떨어지느니라.’그 스님은 이 말에 곧 깨달음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옛성현이 도에 들어간 이야기가 명백하고 간단하여, 수고로움을 덜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러한 공안(公案:즉 공부의 규범이 되는 것)을 의지해서 믿음과 이해가 있게 되면 바로 옛 성현들과 손을 잡고 함께 갈 것이다.
問汝言見性 若眞見性 卽是聖人
문여언견성 약진견성 즉시성인
應現神通變化 與人有殊
응현신통변화 여인유수
何故今時修心之輩 無有一人
하고금시수심지배 무유일인
發現神通 變化耶
발현신통 변화야
물었다. ‘스님은 성품을 보았다고 하시는데 만일 참으로 성품을 보았다면 바로 성인이시라 신통변화를 나타내어 보통 사람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요즈음 마음 닦는 사람들은 한 사람도 신통변화를 나타내는 사람이 없습니까.
答汝不得輕發狂言 不分邪正
답여부득경발광언 불분사정
是爲迷倒之人 今是學道之人
시위미도지인 금시학도지인
口談眞理 心生退屈 返墮無分之失者
구담진리 심생퇴굴 반타무분지실자
皆汝所疑 學道而不知先後
개여소의 학도이부지선후
說理而不分本末者 是名邪見
설리이불분본말자 시명사견
不名修學 非唯自誤 兼亦誤他
불명수학 비유자오 겸역오타
其可不愼歟
기가불신여
夫入道多門 以要言之
부입도다문 이요언지
不出頓悟漸修兩門耳 雖曰頓悟頓修
불출돈오점수양문이 수왈돈오돈수
是最上根機得入也 若推過去 已是
시최상근기득입야 약추과거 이시
多生 依悟而修 漸熏而來 至於今生
다생 의오이수 점훈이래 지어금생
聞卽發悟 一時頓畢 以實而論
문즉발오 일시돈필 이실이논
是亦先悟後修之機也 則而此
시역선오후수지기야 즉이차
대답하다.
‘그대는 함부로 미친소리를 하지 말라.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지 못하면, 이는 미혹에 빠진 사람이다.
요즘은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는 진리를 말하지만
마음은 포기상태여서 도리어 분수에 없다는 잘못(無分之失: 중생으로서는 성인의 경지에 들 수 없다는 착각)에 떨어진 자들은 다 그대가 의심하는 것과 같다. 도를 배우되 선후를 알지 못하고, 진리를 말하되 본말(本末)을 분간하지 못하면 이를 일컬어 사견(邪見)이라 하지 수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이는 자신만 그르칠 뿐만 아니라 겸하여 남도 잘못되게 만드는 것이니 삼가지 않아서 되겠는가. 대개 도에 들어가는 문은 많지만 요약해서 말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의 두 가지 문에 지나지 않는다. 비록 돈오와 점수는 최상의 근기(根機)를 가진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하지만, 과거를 미루어보면 이미 여러 생애에 걸쳐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왔으므로 금생에 이르러 진리를 들으면 즉시 깨닫게 되어 일시에 모든 것을 끝낸다. 하지만 사실 이것 역시 먼저 깨달고 뒤에 닦은 근기이다
수 심 결 ( 修 心 訣 ) (5)
-망상 사라지면 광명의 작용 생기니-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차츰 익혀야-
敦漸兩門 是千聖軌轍也
돈점양문 시천성궤철야
則從上諸聖 莫不先悟後修
즉종상제성 막불선오후수
因修乃證 所言神通變化
인수내증 소언신통변화
依悟而修 漸熏所現
의오이수 점훈소현
非謂悟時 卽發現也
비위오시 즉발현야
그러므로 이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은 모든 성인이 밟아온 길이다. 과거의 모든 성인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갔고, 그 닦음에 의해 증득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대가 말한 신통변화는 깨달음에 의지해서 닦고 차츰 익혀야 나타나는 것이지 깨달은 즉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如經云 理卽頓悟 乘悟倂消
여경운 이즉돈오 승오병소
事非頓除 因次第盡 故主峰
사비돈제 인차제진 고주봉
深明先悟後修之義曰 識氷池而全水
심명선오후수지의왈 식빙지이전수
借陽氣以鎔消 悟凡夫而卽佛
차양기이용소 오범부이즉불
資法力以薰修 氷消卽水流潤
자법력이훈수 빙소즉수유윤
方呈漑滌之功 妄盡則心靈通 應現通光
방정개척지공 망진즉심영통 응현통광
之用 是知事上神通變化
지용 시지사상신통변화
非一日之能成 乃漸熏而發現也
비일일지능성 내점훈이발현야
況事上神通 於達人分上
황사상신통 어달인분상
猶爲妖怪之事 亦是聖末邊事
유위요괴지사 역시성말변사
雖或現之 不可要用
수혹현지 불가요용
今時迷癡輩 妄謂一念悟時 卽隨現無
금시미치배 망위일념오시 즉수현무
量妙用 神通變化 若作是解
량묘용 신통변화 약작시해
所謂不知先後 亦不分本末也
소위부지선후 역불분본말야
旣不知先後本末 欲求佛道 如將方木
기부지선후본말 욕구불도 여장방목
逗圓孔也 豈非大錯 旣不知方便故
두원공야 기비대착 기부지방편고
作懸崖之想 自生退屈
작현애지상 자생퇴굴
斷佛種性者 不爲不多矣 旣自未明
단불종성자 불위불다의 기자미명
亦未信他人 有解悟處 見無神通者
역미신타인 유해오처 견무신통자
乃生輕慢 欺賢 聖 良可悲哉
내생경만 기현광성 양가비재
경에 이르기를 “이치로는 돈오(頓悟:단번에 뛰어서 깨달음에 이르는 것)하여 깨달음과 동시에 모든 번뇌가 사라지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일시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례차례로 없어진다”하였다.
그러므로 규봉 스님도, 먼저 깨닫고 뒤에 닦아나가는 뜻을 분명히 밝혀 말씀하시기를 “얼어 있는 연못이 순전히 물인줄 알지마는 햇빛을 받아야 녹고, 범부가 곧 부처인줄을 알지마는 법의 힘을 빌려서 익히고 닦아야 한다.
얼음이 녹아 물이 흘러야 바야흐로 그 물에 씻는 보람이 나타나고, 망상이 사라지면 마음이 신령하게 통하여 신통과 광명의 작용이 나타난다”하였다.
그러므로 사실상 신통변화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츰 익히고 닦아야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사실상의 신통이란 깨달은 사람의 경지에서는 오히려 요사하고 괴이한 일이고 또한 성인에게도 말단의 일이라서 혹 그것이 나타나더라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요즘 어리석은 무리들은 망령되이 말하기를 “한 생각 깨달으면 즉시 한량 없는 묘한 작용과 신통변화를 나타낸다”하고 있다. 만약 이런 견해를 가진다면 이른바 선후를 알지 못하고 본말을 분간하지 못한다는 것이요, 이미 선후와 본말을 알지 못하고 불도를 구하려 한다면 마치 모난 나무를 가지고 둥근 구멍에 끼는 것과 같으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이미 방편을 모르기 때문에 절벽을 바라보는 듯한 생각을 내어 스스로 포기하여 부처의 종성(種性)을 끊는 이가 적지 않다. 이미 스스로가 밝지 못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깨달음까지도 믿지 않고, 신통이 없는 이를 보고는 곧 업신여긴다. 이것은 성현을 속이는 일이니 참으로 슬프다.
수 심 결 ( 修 心 訣 ) (6)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점점 익혀서-
-성인의 자질을 길러가는 것이 점수-
問汝言頓悟漸修兩門 千聖軌轍也
문여언돈오점수양문 천성궤철야
悟旣頓悟 何假漸修 修若漸修
오기돈오 하가점수 수약점수
何言頓悟 頓漸二義 更爲宣說
하언돈오 점수이의 갱위선설
令絶餘疑
영절여의
물었다.
“스님께서는 돈오와 점수의 두 문이 모든 성인이 밟아온 길이라 하였습니다.
깨달았다면 이미 돈오한 것인데 어째서 점점 닦아야 하며,
그 닦음이 만약 점점 닦아야 할 것이라면 어째서 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돈오와 점수의 두 가지 뜻을 다시 설명하여 남은 의심을 끊게 해주십시오.”
答頓悟者 凡夫迷時 四大爲身
답돈오자 범부미시 사대위신
妄想爲心 不知自性 是眞法身
망상위심 부지자성 시진법신
不知自己靈知 是眞佛也 心外覓佛
부지자기영지 시진불야 심외멱불
波波浪走 忽被善知識 指示入路
파파낭주 홀피선지식 지시입로
一念廻光 見自本性 而此性地
일념회광 견자본성 이차성지
原無煩惱 無漏智性 本自具足
원무번뇌 무루지성 본자구족
卽與諸佛 分毫不殊 故云頓悟也
즉여제불 분호불수 고운돈오야
漸修者 雖悟本性 與佛無殊
점수자 수오본성 여불무수
無始習氣 卒難頓除故 依悟而修
무시습기 졸난돈제고 의오이수
漸熏功成 長養聖胎 久久成聖
점훈공성 장양성시 구구성성
故云漸修也 比如孩子 初生之日
고운점수야 비여해자 초생지일
諸根具足 與他無異 然其力未充
제근구족 여타무이 연기력미충
頗經歲月 方始成人
파경세월 방시성인
답하다.
“돈오라는 것은 범부가 미혹했을 때,
사대(四大)를 몸으로 삼고 망상을 마음이라 하여 자기의 성품이 참 법신(法身)임을 알지 못하고, 자기의 신령한 지혜가 참 부처인줄을 알지 못해서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아 물결치듯이 흘러다니다가 갑자기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바른 길로 들어가 한 생각에 심광(心光)을 돌이켜서 자기의 본성을 보면,
이 성품에는 본래 번뇌가 없고, 번뇌가 없는 지혜의 성품이
본래 스스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부처님과 더불어 털끝만큼도 다르지 않기 때문에
돈오라 하는 것이다.
점수라는 것은 비록 본래의 성품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랜 세월의 습기(習氣)는 갑자기 제거하기 어려우므로 그 깨달음에 의지해 닦고
점점 익혀서 공을 이루고, 또 오랜동안 성인의 자질을 잘 길러나가야
성인이 되는 것이므로 점수라 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어린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모든 기관이 갖추어져 어른과 다르지 않지만
그 힘은 충실하지 못하므로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야 비로소 성인(成人)이 되는 것과 같다.”
問作何方便 一念廻機 便悟自性
문작하방편 일념회기 변오자성
물었다. “어떤 방편을 써야 한 생각의 기틀을 돌려 자성(自性)을 깨달을 수 있겟습니까.”
答只汝自心 更作什 方便 若作方便
답지여자심 갱작십마방편 약작방편
更求解會 比如有人 不見自眼
갱구허회 비여유인 불견자안
以謂無眼 更欲求見 旣是自眼
이위무안 갱욕구견 기시자안
如何更見 若知不失 卽爲見眼
여하갱견 약지불실 즉위견안
更無求見之心 豈有不見之想
갱무구견지심 기유불견지상
自己靈知 亦復如是 旣是自心
자기영지 역부여시 기시자심
대답했다.
“오직 그대 자신의 마음인데, 다시 무슨 방편을 쓴다는 말인가.
만약 방편을 써서 다시 알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고
눈이 없다고 하면서 다시 보려고 하는 것과 같다.
이미 자신의 눈인데 어째서 다시 보려고 하는가. 만약 잃지 않았음을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보는 것이다. 다시 보려는 마음이 없다면 어찌 보지 못한다는 마음이 있겠는가. 자신의 신령스런 앎도 역시 그와 같아 이미 자신의 마음인데 어째서 알려고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