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의 부처님을 닮으려면 '삼공(三空) 사상'부터 이해하라고 설법한다.
-'삼공사상'이 무엇인가. 어떻게 자비와 연결되나.
▶'아공(我空) 법공(法空) 법구공(法俱空)'이라는 말은 내가 없고 현상이 없고 그 현상과 내가 관련돼 있다는 관계조차 없다는 뜻이다. 집착을 버리고 참으로 비운다는 뜻이다. 이것은 '고집멸도(苦集滅道)'와도 연결된다. 비우면 자기 욕심이 사라지고 자연히 자비심을 행할 수 있게 된다.
-최근 자비의 확장, '세상은 하나의 꽃'이라는 세계일화(世界一花) 정신을 강조하시는데.
▶고정된 실체가 없고 삼라만상은 인연에 따라 연결돼 있다. 자족함을 알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도 독한 마음을 품고 더 가난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국가 범위로 확대하면 지구촌은 하나라는 것이다. 스웨덴과 덴마크는 실질소득의 1%를 다른 나라를 돕는 데 쓴다. 한국은 0.05%에 불과하다. 30~40년 후에는 전 세계가 서로 도와야 하는 시기가 온다. 그때에는 그동안 자비심을 행한 나라가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불황의 시대, 부처의 리더십은 어떤 것인가.
▶부처님은 '삼계도사(三界導師) 사생자부(四生慈父)'라고 불린다. 자애로운 어버이로서 모든 사람을 어린아이처럼 사랑한다는 뜻이다. 이것이야말로 올해와 같은 위기의 시대에 맞는 리더십이라 할 수 있다. 사회의 리더는 대중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무조건 포용해야 한다. 불교에선 '사자처럼 지혜롭게, 코끼리처럼 묵묵하게'라는 비유를 즐겨 쓰기도 한다. 이는 모든 문제를 푸는 열쇠이기도 하다.
◆ 후반전 대통령을 말하다
= 한국 사회의 절대적 리더는 대통령이다. 스님조차도 한국 사회는 '절대 대통령 중심제'라고 표현했다. 그는 전두환 정권 시절, 10ㆍ27 법난을 겪었다. 당시 군사정권을 지지하지 않았다는 죄목을 얻었다. 1980년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끌려가 무려 23일 동안 조사를 받고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총무원장 자리에서 물러난다.
대통령에 대한 이미지가 안 좋을 법하지만 월주 스님은 이후 대통령과의 소통에 인색하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총무원장을 연임하면서 사회 원로로서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을 '온건ㆍ보수ㆍ중도'라고 정의한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가 한창이다. 전직 대통령에 대한 수사를 어떻게 보는가.
▶허물이 있으면 누구라도 수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일부에선 임기 후에 전직 대통령을 수사하는 관행에 대해 비판하는데 그것은 본질을 흐리는 일이다. 특히 노 전 대통령이 김해로 내려가면서 많은 비용을 들여 마을을 조성한 것은 잘못됐다고 본다. 영국 마거릿 대처 총리나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모두 원래 살던 곳으로 소박하게 돌아갔다. '아름다운 퇴장'이 필요한 때다.
-대통령에 대해 사회 원로가 할 수 있는 일은.
▶일단 자주 만나야 한다. 정치가들은 소통의 장을 마련하고, 원로는 사회적 경종을 울릴 수 있어야 한다.
◆ 그리고 연장전, 아버지를 추억하다
= 기자는 인터뷰 다음 날인 23일, 원로들과 점심 식사를 마친 월주 스님과 명동에서 다시 만났다. 횟수로 세 번의 총무원장 역임과 불교의 사회화 운동으로 유명하지만 정작 개인사는 알려진 바가 없다. '연장전'의 목적은 그가 출가한 당시 20세인 청년 월주를 만나기 위함이다.
-또 만났다. 이것도 인연이 아닌가. 스님 속세의 연을 알고 싶다.
▶뭘 그런 걸 묻는가(처음 본 웃음). 아버지(송영조 옹)는 부농에 학자셨다. 전북 정읍 지역 발전을 위해 힘쓰셨던 전형적 농촌 지도자였다. 속세 얘기지만 아버지의 영향력을 부인하지 않겠다. 좋은 부모와 엄한 스승이 내 밑거름이 된 것 같다.
-가톨릭 정진석 추기경은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발명가의 꿈을 키웠다가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스님도 출가 이전에 다른 꿈이 있었는가
▶나는 정치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현실에서 허무함을 느꼈고 그런 상황에서 극한의 정치 대립을 하는 한국 정치에 신물이 났다. 초등학교 동창인 김혜정 스님을 통해 20세에 법주사 금오 스님을 만나 출가했다.
-금오 스님의 어떤 화두에 깨달음을 얻었나.
▶사회현상에 집착하던 나에게 스님은 '마음 바깥에 진리가 따로 없고 부처가 따로 없다. 마음을 깨쳐라'는 화두를 던졌다. 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고 싶었다. 한국 불교는 지나치게 참선을 추구해 '소승적'이다. 이제는 대중을 포용하고 세계를 품에 안아야 한다. 내가 빈곤 국가인 미얀마나 캄보디아를 돕는 것도 이러한 연장선상에 있다.
■ 월주 스님은
월주 스님은 1935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54년 법주사에서 금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56년 화엄사에서 수선 이래 10차례 하안거를 했다.
1980년 조계종 제17대 총무원장을 맡았으나 군사정권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고초를 겪다가 7개월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94년 조계종 개혁 때 28대 총무원장을 지내면서 불교의 사회화와 대중화에 앞장섰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표 겸 이사장, '나눔의 집' 이사장, '지구촌공생회' 대표이사 등을 맡고 있다. 2000년 국민훈장 모란장과 2005년 조계종 포교대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보살사상' '인도성지순례기' 등이 있다.
자리를 잡은 조계종의 포교와 복지 사업은 월주 스님이 기반을 닦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주 스님은 걷기를 즐긴다. 소식(小食)하는 것을 자신의 건강 비결로 꼽는다. 그리고 자고 싶을 때 잠자는 것을 스트레스 해소 비법으로 친다. 마음 가는 대로 해도 지나침이 없는 원칙주의자의 조언이다.
[문일호 기자 / 사진 = 김성중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