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사하모래톱 문학상 산문부문 당선작] 최석규 외
대상 소설 그림자의 그림자
최우수 소설 그리고, 남겨진 것 들- 섬 얘기
우수 소설 많고 큰바다
가작 수필 낙동강, 대지의 어머니
■대상
그림자의 그림자 / 최석규
전화를 받은 것은 목요일 오후였다. 모르는 번호가 사무실 전화기 액정화면에 찍혔다.
“거기, 상면인감?”
옴팡지게 늙은 목소리였다. 말투에서 기억이 묻어났다. 그는 볼일이 있어 대전 특허청에 왔다가 안내데스크에서 전화번호를 알려줘 이렇게 연락했다고 말했다. 데면데면한 안부가 오갔다. 전화상으로 할 만한 얘깃거리는 금세 떨어졌다.
“지하 카페에 있을 테니 시간 날 때 아무 때나 내려온나.”
노인은 구석 자리에 앉아 녹차를 마시고 있었다. 먼저 알아본 그가 손짓하며 이름을 불렀다. 거구의 몸집, 유난히 큰 목소리, 벗겨진 머리, 계곡의 깊은 골을 연상시키는 이마 주름에서 상면은 김복만의 옛 모습을 찾아냈다. 뜻밖의 재회는 갓 잡은 참붕어의 벌어진 선홍빛 아가미처럼 선명하고 생생한 추억을 떠올리게 했다.
김복만은 부산 출신으로 아버지와 같은 고향 사람이다. 한땐 부친과 둘도 없는 친구였지만 5년 전 서울에서 함께 무슨 사업을 벌이다 망하고 나서부터 연락이 뜸해졌다. 젊은 시절 김복만은 전당포, 오퍼상, 술집, 대부업, 나이트클럽까지 시골 장터 장사치처럼 생잡이로 일을 벌였다. 그는 무언가에 정신이 팔리면 거기에 푹 빠지는 부류였다. 고장 난 TV를 고쳐 주겠다면서 상면네 집 거실에서 반나절 동안 분해와 조립을 하기도 했고 삐걱거리던 현관문을 수리하다 버럭 성질을 내며 아예 새로 사가지고 온 적도 있었다.
김복만은 어린 상면을 예뻐했었다. 형과 다투기라도 하면 늘 동생인 상면 편을 들어주었다. 한쪽 벽에 주르르 도배된 상면의 초등학교 우등상장을 보곤 그 큰 목소리로 민망할 만큼 칭찬도 많이 했다. 이놈이 나중에 집안을 일으킬 놈이여. 그리곤 빳빳한 지폐 몇 장을 손에 쥐어 주었다. 상면이 고 2때 자기가 운영하는 성인 나이트클럽으로 초대를 한 적이 있었다. 물론 상면 아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눈알만 뒤룩뒤룩 굴리며 룸 구석 자리에 앉아 눈치만 살피고 있었는데 양주와 푸짐한 과일 안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남자 나이 열여덟이면 술과 여자를 알아야 하는 법이제. 난 열다섯에 처음으로 여자와 잤응께. 그가 말을 끝내자마자 거의 벌거벗은 여자들이 룸 안으로 들어 왔다.
김복만과 아버지, 상면 형제가 함께 근교 저수지로 낚시를 갔을 때 일이다. 무려 7대나 낚싯대를 펼치고 앉았음에도 입질이 전혀 없던 지루한 오후였다. 소소한 잡담거리도 다 떨어져 갈 무렵 김복만은 팔뚝만한 잉어를 건져 올렸다. 비늘에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고 살집도 튼실한 잘생긴 놈이었다. 김복만은 잉어대가리를 말없이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냥 다시 물속으로 던져 버렸다. 깜짝 놀라 풀어 준 이유를 묻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잉어 콧구멍이 사람 것을 닮았구먼. 코는 사람이나 물꽤기나 중요한 것이제.”
“왜?”
“면상 한복판에 있응께.”
그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시 낚싯줄을 드리웠다. 엉뚱한 생소리에 상면 형제는 폭소를 터트렸지만 아버지는 웃지도 않고 말했다.
“아이고, 지겹다. 저런 농지거리.”
김복만은 아버지 근황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별 다른 반응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양복 안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명함 뭉치였다. 모양과 색이 서로 달랐다. 그중 하나를 건넸다. ‘모텔 린포체’라는 간판이 걸린 사진 속 건물은 모텔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낡고 허름했다. 그 아래 전화번호와 홈페이지 주소가 보였다. 위치는 부산시 사하구였다. 다대포 해수욕장 지하철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했다.
“거기 지하철역이 들어섰어요?”
“얼마 안 됐어.”
평생 전국을 떠돌던 그도 늘그막에 돌아 간 곳은 결국 고향이었다.
“자네도 와 본지 꽤 됐지 않은감?”
“예. ……많이 변했겠네요.”
김복만은 옛 다대동 풍경을 시작으로 화력발전소와 가락타운이 조성될 당시에 어땠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을숙도, 감천항, 감천동 마을, 다대포 해수욕장과 근방 공원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는 말도 했다. 그 좋은 해변 모래사장에 예술이네 뭐네 하며 거대하고 요상한 사람 조각상을 세워 경광을 다 망쳤다는 불평도 늘어놨다. 상면은 명함을 만지작거리다 물었다.
“요즘은 숙박업 하시나 봐요.”
“고건 부업이고 본업은 따로 있지.”
건네받은 다른 명함에는 발명가라고 적혀 있었다. 뒷면에는 그동안 출원한 발명의 출원 번호와 명칭이 빼곡했다. 대부분의 개인 발명가처럼 발명 간에 어떠한 연관성도 없어 보였다. 치약 뚜껑 간편 개폐 장치와 지구 온난화 방지를 위한 이륜차 동력 공급 장치까지 발명은 아무렇게나 버려진 폐그물처럼 중구난방이었다. 다대1동 발전 번영 위원회 회장. 지역 복지 안녕 추진 및 홍보 협회장. 행복하게 살기 운동 본부 사하구 지부장. 정체성 모호한 직함이 가득한 명함들이 줄줄이 나왔다.
김복만은 자기 발명을 담당하는 심사관과 면담을 하기 위해 대전에 왔다고 했다. 전화상으로는 도통 말귀를 못 알아먹어 직접 발명품을 들고 새벽부터 올라왔다며 투덜댔다.
배낭 안에서 노트북만한 로봇을 꺼냈다. 조잡하게 생긴 플라스틱 등껍질을 등에 이고 밑에는 세 개의 고무바퀴를 가진 거북이처럼 생긴 것이었다. 손에 들고 요리조리 돌리며 구석구석 보여주었다. 엉덩이 위쪽에 작은 램프가, 아래쪽에는 금속 갈퀴가 있었고 건들건들 흔들리는 머리통에는 좁쌀만큼 작은 두 개의 눈과 커다란 코가 우스꽝스럽게 붙어 있었다. 코는 검은색의 금속 구체로 윤이 났다. 김복만은 거북이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시연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요놈 얼굴을 가치이 보게.”
상면은 거북이 머리통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거울처럼 반들거리는 새까만 코에 상면의 얼굴이 비쳤다. 주인을 바라보는 강아지 눈동자 속의 눈부처처럼 맑고 선명했다. 약한 전자음이 났다. 한가운데 빛이 들어왔다. LED가 뿜어내는 빛은 꽃 모양을 만들었다. 거북이 코에 피어난 붉은 꽃. 그 꽃을 중심으로 파란색과 노란색 원이 번갈아 나타나며 동심원을 그렸다. 뒤쪽의 작은 램프가 푸르게 깜빡였다.
“사람 얼굴을 인식하면 요로콤 동작하지.”
거북이를 뒤집어 들었다. 배 밑에 붙은 뒷바퀴가 회전하고 앞바퀴가 방향을 바꿨다. 금속 갈퀴도 좌우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햇강아지가 배를 뒤집고 바동대는 것만 같았다.
“이놈은 백사장을 기어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로봇이야.”
“바닷가 모래사장에요?”
“그러제.”
그제야 후방 모래 갈퀴의 용도가 보였다.
“무슨 그림을 그리는데요?”
김복만은 카페 안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만큼 커다란 소리로 폭소를 터트렸다. 어린 시절 들었던 웃음소리 그대로였다.
“이 사람아, 그걸 내 어찌 아나? 지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겠지.”
상면은 어이가 없어 그냥 따라 웃었다.
“다대포 해변에 앉아 한적한 새벽 바다를 바라보다가 불현듯 빡하고 대갈빡에 아이디어가 떠올랐어. 여길 도화지 삼아 그림을 그리면 좋겠다고 말이야. 발명의 효과를 묻는 담당 심사관에게 똑같은 이야기를 해줬는데 전혀 이해를 못하더라고. 모든 발명에는 목적, 구성, 효과가 뚜렷해야 한다나 뭐라나. 도대체 이 발명이 무슨 차별화된 효과를 가지냐고 반문하대? 게다가, 우리나라는 서면주의라 명세서와 청구항을 잘 써야 등록을 받을 수 있지 실물은 가져와도 참고만 할 뿐이다, 이러더라고. 사람 면상을 보면 깨어나 움직이고 알아서 그림 그려 주고. 아니, 이렇게 명명백백한 발명품이 어디 있어? 그런 것도 심사관이라고 앉아 있으니. 발명의 ㅂ자도 모르는 무식한 놈 같으니라고.”
상면은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특허 청구항, 인용발명들과의 차별성, 보정 등에 관한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설명을 하는 내내 김복만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묵묵히 듣기만 했다.
건물 출입구까지 배웅했다. 헤어질 때쯤 그가 말했다.
“날 좋을 때 아버지 모시고 바다 보러 한번 온나.”
걸어 나가는 김복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등에 멘 배낭의 열린 지퍼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거북이 머리통이 보였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대가리가 건들거렸다. 상면은 사무실로 향했다.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돌아봤다. 밖으로 나갔던 김복만이 어느새 다시 실내로 들어와 회전문 앞에 서 있었다. 그가 소리 쳤다.
“잘 가라!”
1층 로비가 쩌렁쩌렁 울렸다. 주변 사람들이 힐끔거리며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김복만은 아랑곳 않고 작별의 손짓을 해댔다. 흔드는 손이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들꽃처럼 보였다. 상면은 얼굴이 붉어졌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4동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다시 뒤를 봤다. 김복만은 여전히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압력밥솥이 하얀 김을 토해 냈다. 마치 급브레이크가 걸린 바퀴처럼 끼익, 비명을 질렀다. 뚜껑을 열고 공기에 잡곡밥을 담았다. 냉장고에서 오징어젓갈, 김치, 나물 무침을 꺼내 접시에 얹었다. 전자레인지에 데운 김칫국과 어젯밤 만들어 놓은 돼지고기볶음도 놓았다. 상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저녁 드세요. 아버지.”
백발노인이 침대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일 누워 있었음을 알려주기라도 하는 양 사방으로 뻗친 뒷머리가 부스스했다. 머리맡에는 사진첩이 산처럼 쌓여 있다. 아버지는 옆구리를 긁적거렸다. 내복 사이로 빨래판 같은 주름이 물결쳤다. 앨범 중 하나를 밥상 옆에 내려놓고 펼쳤다. 밥 한술 뜨고 한 번. 국 한 모금 마시고 한 번. 시선은 밥상과 사진 사이를 오갔다. 군데군데 사진이 빠져 있다. 말라비틀어진 접착제가 만들어 놓은 네모난 누런 자국이 허전했다.
“상적이는 언제 온다니?”
“글쎄요.”
“…….”
“어서 식사 하세요.”
상면은 앨범을 한쪽으로 치웠다. 아버지는 다른 앨범을 꺼내 펼쳤다. 이빨 빠진 사진첩이 한 장씩 넘어갔다. 수저와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 종이 넘기는 소리. 끙끙거리며 앉은 자세를 바꾸는 소리. 대나무로 만든 효도손이 등을 벅벅 긁는 소리. 트림 소리. 폐 속 깊숙이 끓어오르는 가래 소리. 익숙한 기척이 작은 방안에 흘렀다. 상면은 TV 리모컨을 찾아 전원버튼을 눌렀다. 주말 드라마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눈물범벅이 되어 헤어진 연인에게 하소연하는 장면을 잠시 보다 채널을 돌렸다. 걸어서 세상 속으로, 라는 여행 프로그램이 나왔다. 커다란 강을 따라 낡은 동력선을 타고 가는 여행자들이 화면에 비쳤다. 가이드는 이 강의 길이와 여기에 사는 물고기 종에 대해 설명했다. 카메라는 배 선미에 끓어오르는 물거품을 비췄다. 거품은 좌우로 갈라지며 지나간 배의 고된 흔적을 강물에 새겼다. 채널을 돌렸다. 네팔 지진에 관한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 위에 올라간 사람들이 맨손으로 잔해를 치웠다. 반쯤 쓰러진 오래된 사원과 먼지투성이 사내아이의 모습이 화면에 담겼다. 아이는 무너진 건물을 가리켰다. 안에 형이 갇혀 있다고 말했다. 아이는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가뭄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아스팔트 도로를 배경으로 리포터가 소식을 전했다.
“네팔에서 발생한 로이터 규모 7.8의 강력한 지진으로 최소 수천 명이 숨졌고 유네스코 문화유산 7곳 중 4곳이 파괴되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현재 수도 카트만두에 집중된 구조 작업은 점차 외곽으로 확대되고 있습니다. 조금 전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로 인기가 많은 카트만두 북쪽 라수와 지역 랑탕 계곡에서도 외국인을 포함해 51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오늘 3시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7,240명, 부상자는 14,122명으로 가파르게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앞으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희생자 수는 점점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됩니다.”
카메라는 어느 자원 봉사 단체의 모습을 비췄다. 티베트와 부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기자는 젊은 스님과 인터뷰를 했다. 그는 구조 활동의 어려움을 말하며 각국의 더 많은 동참을 호소했다.
아버지는 앨범에서 눈을 떼고 클로즈업된 TV속 스님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상적이가, 쟤가 왜 저기 있냐?”
눈매의 선이 닮았다. 갈색눈동자가 비슷하다. 납작한 콧등이, 들린 콧구멍이 빼박았다.
“……봉사 활동 갔어요.”
“저기가 어디냐?”
“네팔이래요.”
“밥은 잘 먹고 다니남?”
“그렇겠죠.”
상면은 빈 그릇을 켜켜이 포갰다. 상을 들고 부엌으로 갔다. 싱크대 물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아버지는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스님이 다시 화면에 나오길 기다렸다. 아버지가 부엌을 향해 소리쳤다.
“애야. 근데 저기가 어디냐?”
물소리 때문에 물음을 잘 듣지 못했다. 상면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안방을 향해 소리쳤다.
“뭐라고요?”
“저기가 어디냐?”
“네팔이요.”
“어디?”
“네팔.”
다시 물을 틀었다. 집안은 온통 달그락 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
김복만을 만난 지 보름 쯤 지난 어느 오후였다. PC 모니터에 노란 문자 메시지가 깜빡거렸다. 동기가 사내 메신저를 통해 메시지를 보내 왔다.
- 김복만이라는 출원인 알지?
- 그냥 조금.
- 너 잘 안다던데. 무슨 관계?
- 아버지 친구.
김복만은 그동안 대전에 세 번이나 왔었다. 담당 심사관과의 면담 때문이었다. 동기의 짜증 섞인 하소연은 계속 됐다. 심사지침서 규정, 관련 특허법 조항, 유사 참증과 판례 등을 하나씩 집어 가며 당신의 발명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특허 받을 수 없다고 수없이 설명했다. 인용발명으로 사용한 팸플릿과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동영상도 찾아 보여주었다. 화면 속에서는 미국 벤처 회사가 만든 ‘비치봇’이라는 두더지처럼 생긴 로봇이 꾸물꾸물 백사장을 기어 다니며 모래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캐릭터, 아름다운 성, 커다란 나무 같은 그림이 석양이 저무는 바닷가 해변에 만들어졌다. 비치봇은 김복만의 거북이 로봇과 모래밭에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흡사했다. 외견도 많이 닮아 있었다. 다른 점이라곤 우스꽝스럽게 생긴 반들거리는 검은 코뿐이었다. 김복만은 심사관의 어떠한 설명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발명품이 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인지, 발명의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지, 벽력같이 우렁찬 목소리로 주장할 뿐이었다.
상면은 서랍에 넣어 둔 김복만의 명함들을 꺼냈다. 다대1동 발전 번영 위원회 회장부터 모텔 린포체 대표까지 모두 책상 위에 늘어놓았다. 명함에 적혀 있는 홈페이지로 들어갔다. 석양이 비치는 해변 사진과 그 위에 조잡하게 합성한 모텔 건물이 나타났다.
린포체 오시는 길. 예약하는 방법. 감천문화마을, 몰운대, 을숙도 생태공원 같은 주변 관광 안내……. 하나씩 클릭해 대충 살펴보았다. 마지막 메뉴를 펼쳤다. 린포체의 뜻과 그것에 얽힌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린포체란 죽은 후 다시 인간의 몸을 받아 환생한 큰 스님을 지칭하는 것으로…….’
마우스 휠을 휙휙 돌려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1,900년 간 여섯 번 환생했다는 촉이 니마 린포체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라이돌지로 3살 때 린포체가 되었다. 라이돌지가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인 지금의 제6대 린포체로 성장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아버지는 라이돌지를 사원에 보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집안의 장손이고 자신의 가업을 이어야 된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들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그것은 혈육 보전에 대한 동물적 본능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데려가려는 큰 스님의 설득은 그보다 더 질겼다. 만일 고집을 부려서 린포체로 선택된 아이를 사원에 보내지 않고 계속 데리고 있으면 장차 크게 아프거나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했다. 오랜 고민 끝에 아버지는 아이를 사원에 보냈다. 그렇게 라이돌지는 린포체가 되었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차례 상봉을 허락했다. 하지만 점점 주기가 길어졌고 아이가 9살이 되면서부터는 만남조차 거부당했다. 십 년이 지났다. 이제 아이는 청년이 되었고 아버지와는 다른 세상에서 린포체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지금도 아버지는 여전히 사원에 간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를 올리는 것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긴 설명 끝에 사진이 한 장 붙어 있었다. 사원 담벼락에 머리를 대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늙은이의 모습이었다.
***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갔다. 환승 위치를 알려주는 초록색 노선만 따라 걸었다. 상면은 고속버스를 이용해 강남 고속터미널에 도착한 후 3호선을 타고 교대역에서 내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견딜 만했다. 선릉역까지는 겨우 세 정거장이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괜찮다. 괜찮다. 최면을 거는 것처럼 되뇌었다. 환승 통로를 걷는 내내 그랬다. 사람들은 길 잃은 레밍스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움직였다. 앞사람 등만 보며 걸었다. 시내버스를 타고 갔어야 하는데. 택시라도 잡아탈 걸. 애초에 서울에 오는 것이 아니었다. 이번 의무 미팅에는 꼭 나오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페널티 무셔야 돼요, 라며 반 협박을 하던 결혼정보업체 여직원이 원망스러웠다. 처음부터 그따위 업체에 동기들과 단체로 가입하는 것이 아니었다. 머릿속에서 후회의 너울이 커졌다 작아졌다, 모습을 바꾸며 일렁였다.
슬라이드 도어 앞에 두 줄로 서 있는 사람들 틈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앞에 선 여자 머리카락에서 풍기는 진한 린스 향. 점심에 무엇을 먹었는지 오래된 튀김기름 냄새를 입과 코로 뿜어 대는 양복 입은 남자. 일 분마다 쿨럭 거리는 노인의 쇳소리. 끈적거리는 손으로 과자를 집어 먹는 어린애의 쩝쩝 소리.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잠실행 전철이 들어옵니다. 승객 여러분들께서는 노란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바람이 불어왔다.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려오는 쇳덩어리가 몰고 오는 바람은 슬라이드 도어를 들썩거리게 했다. 규칙적인 굉음을 일으키며 전철이 눈앞을 지나갔다. 사람들은 조금씩 문 쪽으로 밀착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어떻게든 올라타야겠다는 표정이 얼굴마다 선명했다. 이마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등 뒤로부터 꾸물꾸물 다가오는 인파에 밀려 몸이 점점 전철과 가까워졌다. 슬라이딩 도어가 푸욱, 깊은 한숨을 쉬며 열렸다. 상면은 슬금슬금 물러났다. 막다른 골목에서 유령과 마주친 것처럼 두 다리가 뒤를 향해 저절로 움직였다.
“좀 들어갑시다!”
뒤에서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렸다. 상면의 흰자위는 붉게 충혈 되었고 얼굴은 밀가루를 뒤집어 쓴 듯 하얗게 질려 있었다. 누구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손을 좌우로 벌리며 뒷걸음질 쳤다. 뒤쪽 행렬은 뭉개지면서 뒤엉키기 시작했다. 열차 문 닫겠습니다. 안내 방송이 나오자 타려는 승객과 내리려는 승객, 그 사이에 버티고 선 상면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거친 욕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덩치 큰 남자의 손에 상면의 어깨가 잡혔다. 상면은 던져지듯 세차게 뒤로 밀렸다. 남자는 험악한 표정으로 상면을 노려봤다. 그는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가려 용을 썼다. 마지막으로 간신히 전철에 올라탔다. 출입문과 슬라이딩 도어가 악어 아가리처럼 쿵하며 닫혔다. 덩치 큰 남자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눈이 마주쳤다. 그가 상면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바짝 쳐들었다. 독 품은 중지는 전철과 함께 터널 속으로 사라져 갔다.
만남 장소는 선릉역 주변 2층 카페였다. 출입문이 벌컥벌컥 열릴 때마다 터진 물줄기처럼 드나드는 사람들. 음료수를 쟁반에 받치고 좁은 테이블 사이를 요리조리 비켜 가는 종업원들. 금주의 멜론 인기 가요 100을 무한 반복해 들려주는 스피커. 카페 안을 떠다니는 연인들의 밀어. 주말 저녁은 산만한 수런거림으로 가득했다.
앞에 앉아 있는 여자의 외모는 출중했다. 인기 걸 그룹의 리드 싱어를 닮았다. 그녀는 아이스 모카 라테를 한 모금 빨아 마시고 예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부산 분이라고 들었는데 사투리가 전혀 없네요?”
“어릴 적에만 살아서요.”
“이런 자리 처음 아니시죠?”
대답 대신 침묵을 택했다.
“어차피 그쪽도 분기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소개팅에 나오셔야 할 테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시간 보내다 가면 되겠지만, 그래도 지금 너무 티 나게 지루해 보여요. ……뭐, 결혼정보업체의 특별 관리 회원들이 다 그렇겠지만요.”
여자는 웨이브 진 긴 갈색 머리카락을 왼손 검지와 중지로 비비꼬면서 말을 이었다.
“소개팅 하러 온 남자들, 대개는 어떻게든 제 번호를 따려고 해요. 우리 집안이 어떻다는 것쯤은 미리 알고 왔을 테니 더욱 그렇겠죠. 그런데 상면 씨는 뭔가 좀 다른 것 같아요. 네, 아니요, 말고 대답을 들은 기억이 별로 없네요. 이런 경우는 처음이에요. 웃기는 말 같지만 그 덕에 오늘 그쪽이 좀 궁금해졌어요.”
“…….”
“서로 시간 낭비 할 필요는 없겠죠?”
연봉은 어느 정도신가요? 채무는 없으시죠? 집은 자택이신가요? 아파트 시세가 얼마나 되죠? 무슨 차를 가지고 계세요? 형이 있다고 들었는데 함께 사시나요? 형 직업은 뭔가요? 아버님께선 아직도 일을 하시나요? 건강은 좋으신지? 언제까지 함께 사실 계획인가요? 개인 재무 설계사처럼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싶어 했다. 상면은 친절한 미소를 내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궁금하신 게 참 많으시군요. 이제 더 질문 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에 관한 것을 다 말씀드리지요. 하나도 빠짐없이요.”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이 썼다. 끝에 살짝 단 맛이 따라왔다. 여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색이 푸른빛을 띠는 이유는 아마 칼라 렌즈 때문일 것이다.
“전 24평 공무원 임대 아파트에서 살아요. 5년간은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죠. 거기서 아버지와 함께 지냅니다. 아버지는 사회 활동은커녕 저 없으면 아무 일도 못하세요. 파킨스 병으로 거동이 불편할 뿐 아니라 정신도 온전치 못하니까요. 우리 가족도 한때는 평범했어요. 아버지가 사업으로 돈을 다 날려 버리기 전까지는요. 의자와 탁자, TV, 냉장고에 붙어 있는 붉은 딱지들. 밤마다 울리는 추심전화.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 빚쟁이들의 고함 소리. 웃통을 벗고 온종일 거실에 누워 있던 깍두기들. 살벌했죠. 20대의 기억은 온통 그런 것뿐이에요. 그래도 그 시절 견딜 만했던 이유는 형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덩치도 크고 싸움도 꽤 잘 했거든요. 참, 형 이름을 말했던가요? 상적이에요. 오상적. 저보다 세 살 많아요. 형은 공부 머리는 없지만 몸으로 하는 것은 다 잘했어요. 대학도 체대를 들어갔어요. 한때는 태권도 국가 대표를 꿈꾸기도 했고요. 가끔 툭탁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내 까칠한 성격을 다 받아 주는 착한 형이죠. 아버지께도 얼마나 잘하는지 주변 분들로부터 둘도 없는 효자라는 칭찬을 자주 들었어요. 타고난 성품이랄까. 남 돕는 일도 좋아했어요. 주말이면 복지 단체나 보육원 같은 곳으로 봉사활동을 종종 나갔으니까요. 형은 모든 면에서 나와 정반대에요. 내가 고시 준비하는 동안 형은 학교를 그만두고 취업을 택했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그게 그때 형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가족 중 적어도 한 명은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처음엔 이런 저런 폼 나는 직장도 알아봤지만, 체대 중퇴 학력에 토익점수나 공모전 수상 경력 같은 변변한 스펙도 없는 사람을 받아 주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어요. 그러다 선택한 곳이 지하철 스크린 도어를 유지 보수하는 중소업체였어요. 형은 하루 12시간, 주말도 없이 일을 했어요. 월급은 빚을 갚는 것으로, 동생 공부 뒷바라지 비용으로, 고스란히 들어갔어요. 그 시절 난 가슴 한구석에 늘 무거운 돌멩이 하나를 안고 살아갔어요. 학원에서도, 고시원에서도,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말이죠.”
상면은 에스프레소 잔의 밑바닥을 스푼으로 저었다. 바닥에 깔린 설탕 알갱이 하나하나의 질감이 손끝에 전해졌다. 스푼의 움직임을 그녀의 푸른 시선이 따라 갔다.
“날씨가 화창했던 토요일 오후였어요. 전화가 왔어요. 경찰은 다짜고짜 형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물었어요. 그날도 작동 오류 신고를 받고 지하철 플랫폼으로 갔던 형은 스크린 도어 좁은 틈에서 센서를 교체하다가 시속 80㎞로 달려온 전동차와 부딪혀 수 미터를 끌려가다가 죽었어요. 시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짓이겨지고 갈기갈기 찢어졌어요. 지하철역의 수많은 사람들은 형의 죽음을 실시간으로 목격했어요. 차량 맨 앞부터 맨 끝까지 붉은 피가 길게 이어졌고 형의 피부와 뼈와 근육과 지방과 내장과 뇌 조각이 서로 뒤엉킨 채 줄줄 바닥으로 흘러내렸죠. 시신 봉합을 하는 남자는 형 사진을 달라고 했습니다.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놓겠다고 하면서요. 살점을 주어모아 꿰매고 사람 모습으로 만드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어요. 아버지와 난 다시 태어난 형을 보러 영안실로 갔어요. 하얀 시트가 걷히자 얼굴이 나타났어요. 꿰맨 자국이 선명한 울퉁불퉁한 피부. 화장품으로 두껍게 칠을 한 플라스틱 조각 같은 얼굴. 허여멀겋게 변한 형을 아버진 말없이 바라보았죠. 어떠한 슬픔도, 감정의 동요도 없이 그저 무표정하게. 장례를 치르고 며칠이 지났어요. 저녁을 먹다가 문득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걘 코가 그렇게 오뚝하지 않지. ……어릴 적부터 들창코였거든.”
여자 얼굴이 형의 마지막 모습처럼 하얗게 질려 갔다.
“근로자 보험금, 지하철 공사 측의 위로금, 회사에서 걷어 준 자발적인 성금. 난 그 돈으로 학원을 다녔고 책을 샀고 밥을 사 먹고 고시원 월세를 냈어요. 또 아버지 약값으로도 쓰고요. 조만간 중고차도 한 대 구입할 생각이에요. 병원에 모시고 가려니 이젠 필요할 것 같아요. 아버지는 재작년 치매 판정을 받았어요. 의사 말론 최근 기억부터 점점 지워진대요. 하지만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은 죽을 때까지 남는다고 하더군요. 왜 슬픈지, 왜 기쁜지 그 이유도 모른 채로 계속이요. 아버진 지금도 형이 살아 있다고 믿어요. 가끔 정신이 맑은 때면 가족 앨범을 꺼내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에요. 난 그게 보기 싫어 형 사진을 모조리 버렸어요. 아까 언제까지 함께 살 거냐고 물으셨죠? 아버진 하루가 다르게 상태가 나빠지고 있어요. 조만간 제가 도저히 모실 수 없는 순간이 올 겁니다. 그땐 요양원으로 보내드릴 생각이에요. 대단하다, 보기 드문 효자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들을 해요. 하지만 아버지를 보살피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이 하는 거죠. 늘 그랬던 것처럼요.”
“…….”
“이제 저에 관해 모두 말씀드린 것 같네요. 또 궁금하신 것이 있습니까?”
여자는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히 나가느라 휴대폰도 떨어트렸고 하마터면 테이블 위의 컵도 쓰러트릴 뻔했다. 여자는 화장실을 향해 걷다가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카페 문을 열고 나갔다. 뒤도 안 돌아본 채 종종걸음을 쳤다. 모습은 주말 오후의 인파속으로 사라졌다. 상면의 시선은 그녀의 소실된 궤적을 따라갔다. 온기가 식어 가는 빈자리와 마주 앉은 채 에스프레소를 천천히 마셨다.
***
“여기가 네팔이냐?”
“네.”
“네팔에도 바다가 있니?”
“그럼요.”
“저기 있는 사람은 왜 반쪽만 있냐?”
상명은 아버지가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예전엔 없던 예술 조각상이 있었다. 수 미터가 훌쩍 넘는 사람 형상의 반쪽만 남은 하얀 몸뚱이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대포 해수욕장을 덮은 안개는 짙었다. 근처 해변공원의 표지판도 잘 보이지 않았다. 멀리 떨어진 아파트들은 안개 위에 떠 있는 신기루처럼 보였다. 지평선에 걸린 뿌연 배들은 미지의 바다로 떠날 차비를 차리고 있었다. 연무를 뚫고 솟아오르는 일출의 모습을 렌즈에 담으려는 사진 동호회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둘은 백사장 벤치에 앉아 안개 낀 새벽 해변을 오랜 시간 바라봤다. 상면은 담요를 펼쳐 산불이 집어삼킨 고사목처럼 앙상해진 아버지의 등과 어깨를 덮어 주었다. 안개 속에서 비릿한 냄새가 배어났다. 해초 조각, 깨진 조개껍질, 배를 뒤집은 채 해변에 밀려온 물고기, 해변을 들락거리는 잔물결에 따라 춤추는 해파리의 죽은 몸뚱이는 투명한 사멸의 흔적을 풍겼다. 짙은 안개에 놀란 동네 개가 허공을 향해 짖었다. 대기 중에 응결된 작은 물방울들이 만들어 낸 백색 벽 너머로 파도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 백사장을 침식하기 위해 부단히 넘실대는 바다가 있음을 상면은 새삼 깨달았다.
어젯밤 머물렀던 모텔 린포체 쪽을 바라보았다. 안개와 다른 건물들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유령 닮은 그림자 하나가 자동차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처럼 어룽더룽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이쪽을 향해 털레털레 걸어 나왔다. 김복만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윗도리 한복판에는 모텔 린포체라는 상호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조악하게 붙인 글자는 군데군데 떨어져 늙은 사자의 빠진 치아처럼 보였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그의 손에는 거북이 로봇이 들려 있었다.
김복만은 아버지 옆에 앉았다. 한참을 그리 있었지만 아버지는 오랜 고향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다. 김복만은 거북이 머리통을 아버지 눈앞에 불쑥 들이밀고는 이렇게 말했다.
“형씨. 얼릉 이놈 코 좀 보소.”
거북이의 맑고 검은 구체안에 아버지가 비쳤다. 삑 하는 전자음과 함께 불이 들어왔다. 빛은 거북이 코에 꽃 모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피어난 꽃을 중심으로 파란색과 노란색 원이 번갈아 동심원을 그렸다. 김복만은 로봇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녀석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조금씩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엉덩이 뒤로 모래 가루가 날렸다. 앞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천천히 회전했다. 이어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며 기어갔다. 모래바닥에는 일정한 깊이의 직선과 곡선이 만들어졌다. 로봇의 움직임을 빤히 바라보던 아버지가 물었다.
“저놈, 뭐라는 동물이요?”
김복만은 목소리를 낮추고 답했다.
“거북이요. 내가 키우는. 근데 쟈는 부끄럼이 많아 지 얘기를 하면 디게 싫어하지요. 게다가 귀까지 밝아 이리 쪼깐허게 말을 해야만 합죠.”
“허어, 거참 요망한 놈이구먼.”
“그러게요. 그래도 재주 하난 기가 막혀요. 저래 모래밭에 내려놓으면 슬슬 기어 다니며 그림을 그립니다.”
“무슨 그림을 그린단 말이요?”
“그거야 거북 맘이지, 사람인 내가 알 턱이 없지요. 하지만 혹시 누가 알겠소? 저놈 궁데이를 졸졸 쫓아가다 보믄 얄쌍스런 그림 하나 그려 줄지도. 그래, 형씬 뭐 보고 싶은 거라도 있소?”
아버지는 눈만 끔뻑였다. 무언가 기억해 내려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바닥을 한참동안 내려 보다 긴 한숨만을 남겼다.
“그냥 ……다 보고 싶소.”
김복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거북이는 부산스럽게 모래를 파헤쳤다. 짭짤한 습기를 움켜쥐고 있는 단단한 모래밭에 두 줄 바퀴 자국이 그어졌다. 그 사이로 갈퀴가 만들어 낸 좁은 고랑이 생겼다. 엉덩이 쪽 램프가 푸른빛을 내며 깜빡였다. 안개가 푸르렀다 하얘졌다 뜸지근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거북이는 윙윙 소리를 내며 느럭느럭 기어갔다. 가다가 멈추고 멈추다 다시 움직였다. 상면은 뒤를 따랐다. 발이 닫는 자리마다 모래가 파였다. 그 아래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안에서 바닷물이 조금 배어났다. 바람은 비렸고 파도소리는 가까웠다.
거북이는 거대한 조각상 주위를 맴돌았다. 상면은 조각상을 찬찬히 살폈다.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모습이 변했다. 홀로 선 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반 토막 난 몸뚱이로 변하기도 하고, 마주본 둘이 되거나, 서로 부둥켜안고 울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기도 했다. 작품명을 보았다.
그림자의 그림자.
작품 해설이 적힌 글을 읽어 내려갔다.
……4면이 모두가 정면인……
……늘 바라보는 면이 정면인……
……뒷면이 없는…….
뒤를 돌아봤다. 직선과 곡선이 어지러이 섞인 모래밭. 그것뿐이었다. 아직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이곳을 둘러싼 짙은 안개가 모두 걷히면 그땐 거북이가 그린 온전한 그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벤치에 앉아 있는 둘의 모습이 자우룩했다. 한 명이 이쪽을 향해 손을 들고 흔들었다. 하얀 실루엣 하나 들꽃처럼 한들거렸다.
■최우수
그리고, 남겨진 것들 -「섬 얘기」 / 곽환명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 노릇을 해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그의 젊은 홀어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살아오던 낙동강 하류의 어떤 외진 모래톱 ㅡ 이들에 관한 그 기막힌 사연들조차, 마치 지나가는 남의 땅 이야기나, 아득한 옛날이야기처럼 세상에서 버려져 있는 데 대해서까지는 차마 묵묵할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 김정한의 「모래톱 이야기」中
은사(恩師)가 세상을 떠났다. 조용한 죽음이었다. 너무 조용했던 나머지 그가 죽고도 며칠간은 그의 죽음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의 동생이 연락이 닿지 않는 것을 이상히 여겨 시 외곽의 아파트를 찾았다. 그는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의 동생은 무신경하게 잠을 청하고 있는 얼굴을 보고 신경질적으로 커튼을 걷었다. 바싹 마른 가을 햇살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얼굴이 상아처럼 하얗게 빛났다. 그의 동생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식어버린 손을 붙들었다. 창 너머로 강이 더디게 흐르고 있었다.
장례식장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으므로 그의 동생이 상주를 맡았다. 정물처럼 무표정한 얼굴이 그와 닮아 있었다. 문상객들의 나이는 천차만별이었다. 이미 숱한 죽음을 겪은 회한의 얼굴이 있는가하면, 자신이 무엇을 슬퍼하는지도 모르는 채 눈물로 얼룩진 얼굴도 있었다. 그들이 건너온 시간이 그들 사이를 구분 짓고 있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가 고통 없이 떠났을 거라고 의사는 전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생의 마지막에서 축복일까, 비극일까. 그는 무사하게 하루를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것이다. 잠을 청하면서 내일 읽을 책의 목록을 그려보거나, 연구 과제를 떠올려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아침밥은 무엇으로 할지 고민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죽음으로 수렴해버렸다. 어떠한 여지도 없이 말이다.
문상객들은 어째서 그가 불현듯 세상을 뜨게 되었는지 반추했다. 마치 그것이 죽은 자에 대한 예우라는 듯 집요했다. 그가 평소에 약을 복용했다는 목격에 이어, 그가 남긴 방대한 양의 논문을 보아 과로했음에 틀림이 없다는 둥, 누군가는 그가 연구에서 보였던 남다른 치밀함이 심장을 망가뜨리기 충분한 편집증의 증세였다고 나지막이 말했다. 마치 그의 업적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식의 결론이었다. 그 결론은 그의 죽음을 신화적으로 포장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의 죽음을 지나치게 간결하게 만든 것 같기도 했다.
영정사진과 그와 똑 닮은 동생 가운데서 문상객들은 향을 피웠다. 마치 살아있는 그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장례를 치르는 것 같았다. 문상객들은 영정과 그의 동생을 번갈아 힐끗거린 탓에 어색한 몸동작이 되었다. 나는 발인이 끝날 때 까지 자리를 지키며 문상객들의 삐걱거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영정 위로 향 연기가 구물거리며 몸을 풀어헤쳤다.
오랫동안 D대학의 강단에 섰던 그는 갑작스레 퇴임을 결정했다. 정년을 5년 앞두고서였다. 후배 교수들의 더 학교에 머물러 달라는, 으레 예의상의 부탁을 뒤로한 채 그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흔한 퇴임식도 마다하고, 그가 학교를 떠나던 날엔 대학원생 몇과 학부 학생회와 내가 그의 연구실에서 함께했다. 그마저 대학원생들은 수업이 있는지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학부생들은 내가 맡은 수업에서 유독 목소리가 큰 학생들이었다. 그들을 위해 끓는 커피의 향이 연구실을 가득 메웠다.
학부생들은 그와의 이별을 슬퍼했다. 고작 전공 수업을 2-3개 함께 했을 뿐일텐데도 육친과 헤어지는 것처럼 굴었다. 심지어 눈물을 훔치는 학생도 있었다. 그는 친밀하게 한 명씩 작별의 악수를 나눴다. 내 차례가 되어 몹시 멋쩍은 기분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는 내 손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세게 쥐며, 웃어보였다. 그의 미소는 귀퉁이가 깨진 접시처럼 일그러진 느낌을 주었는데, 16년 동안 그가 웃는 것을 처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반복된 휴학으로 8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다. 내세울만한 스펙도, 경험도 없었다. 끈덕지게 들러붙는 가난과 그것에서 벗어나보려는 일용직 노동이 쳇바퀴 구르듯 굴러갔다. 차라리 대학을 관두고 본격적으로 일선에 뛰어들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허락하지 않았다. 아들이 대학을 다닌다는 사실 자체가 자부심이었던 어머니는 졸업을 간절히 바랐다. 나는 긴 대학생활 끝에 복잡한 얼굴로 학사모를 썼다.
누구나 알만한 기업에, 정장을 빼입고 출근할 것을 어머니만 믿고 있었다. 믿음의 증거로 어머니는 정장을 선물했다. 나는 부담스런 선물을 받아들고 곧 취직해 호강시켜드리겠다는, 당시로써는 얼토당토않은 다짐을 했다. 과연 다짐은 쉬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지방대학의 사학과 졸업장은 무엇도 보장해주지 않았다.
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다짐이 있었는지도 가물가물할 때쯤이었다. 그가 전화로 이름을 밝혔을 때 나는 바로 그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가 D대학의 교수라 덧붙이고 나서야 나는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가 요즘 무얼 하냐고 물었다. 나는 당시에 자격지심을 무럭무럭 키우는 것이 일과였으므로, 꾸중 듣는 기분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노라고 내뱉었다. 그는 자신을 한 번 찾아오라 했다. 목소리에는 쉽게 거절하지 못할 어떤 강요가 스며있었다. 어쨌거나 8년 동안 다닌 대학의 담당 교수이기도 했고, 마땅히 거절할 이유도 찾지 못해 약속을 잡았다.
그때부터 내 인생에서 여러 차례 강요 아닌 강요와 약속이 이어졌다. 좋은 기회가 있으니 대학원에 입학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첫 권유에 이어 석사, 박사, 시간강사에 이르렀다. 정신없이 수업과 논문을 준비하다가 학기가 끝나 한산해지면 나는 늘 어리둥절한 기분이 되곤 했다. 한 번도 상상해 본 적 없는 곳에 내가 서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곳을 충분히 상상해본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다른 대학에서 출강하고 있는 선배들을 장례식장에서 만났다. 그들은 대학원에서 처럼 은근히 위계질서를 내포한 태도를 취했는데, 나는 그에 걸맞은 작위적인 예의를 차려주었다. 하지만 예의를 차리고 함께 있을 때면 어쩐지 내가 그들이 마음껏 회포를 풀 시간을 방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퇴임을 앞두고 학교에선 교수 임용을 했다. 임용 공고에 앞서 그가 날 불렀다. 그는 늘 해왔던 강요 같은 태도로 서류를 내밀었다. 교수임용추천서였다.
연구업적 목록의 작성은 조각이 부족한 퍼즐을 맞추는 것 같았다. 완성된 그림을 상상하며 아등바등 조각을 끌어 모아도 절대 완성되지 못할 모자람이 있었다. 교수 채용 심의회에 그가 참여한다는 소식에 기대감이 커질수록, 반대로 임용이 되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도 커졌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임용이 되었다는 기쁜 소식은 듣지 못했다. 대신에 L에게서 뜬구름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국문학 전공자인 L도 시간강사였다. 나이도 같고, 신세도 같아 종종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가 되었다. L은 스스럼이 없고, 속에 든 얘기를 거르지 않고 말하는 담백한 성격이었다. L은 어떤 가치판단 없이, 그저 들은 바를 전한다는 투로 내게 말했다.
“최 선생, 이번 임용에 돈 썼다던데 사실이야?”
홧홧한 술기운이 이마에 맴돌았다. L에 따르면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한 선배들이 임용 공고를 보고 그에게 연락했다 한다. 그는 탐탁지 않은 태도로 연락한 이들 중 한 명에게만 추천서를 써주고, 나머지는 단호히 거절했다. 태평하게 임용 준비를 하던 나는 자연스레 특혜를 받은 대상이 되어 있었다.
화장 후에 그는 유골함에 담겨 봉안되었다. 한 인간의 마지막 초상은 두 뼘이나 될까싶은 봉안실에 들어간 한 줌의 재였다. 며칠간 장례식을 지키며, 선배들에게 예의를 차리며 쌓인 피로가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나는 느린 걸음으로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을볕이 부쩍 높아진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볕을 피해 나무 벤치에 앉아있었다. 머리 위로 기둥을 타고 오른 덩굴이 그늘막을 만들어주었다. 대리석으로 된 봉안당 건물은 우두커니 서서 볕을 견디고 있었다. 건물 입구에서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가 누구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사내의 찌푸린 얼굴은 그였다. 그의 얼굴을 한 사내가 볕을 헤치며 내게 걸어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가 걸어오기까지를 기다렸다. 무더기로 자란 시퍼런 덩굴이 머리맡에서 대롱거렸다.
“최 선생 되십니까.”
그의 동생이 물었다. 장례식을 거치며 그의 동생은 영정의 그와 더 닮아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켓의 안쪽을 뒤졌다. 지친 듯 섬세하지 못한 동작이었다. 마침내 손에 잡힌 듯 천천히 꺼내 내게 건넸다.
“형님이 최 선생한테 맡겼습니다.”
나는 세상을 떠난 그와 분명 똑 닮았을 손에서 그것을 받아들었다.
강은 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강과 하늘은 데칼코마니처럼 세계를 양분하여 가득 메웠다. 하늘은 강에 얼굴을 들이밀고, 수선화처럼 핀 구름을 흘려보냈다. 나는 강 하류에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작은 섬을 앞두고 내비게이션을 살폈다. 내비게이션은 섬과 이어진 하굿둑 앞에서 좌회전을 가리켰다. 나는 차를 천천히 꺾었다. 비릿한 강바람이 창밖에서 스며들었다.
내비게이션이 도착을 알렸다. 나는 차를 세워두고 아파트 건물에 들어섰다. 주머니에서 지난번 받은 것을 손으로 굴려보았다. 묵직하고, 차가운 질감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의 동생이 전한 것은 열쇠였다. 열쇠는 책을 감싼 띠지처럼 가느다란 종이가 둘러져있고, 종이엔 깨알 같은 글씨로 주소가 새겨져있었다. 나는 14층에 도착해 현관문 손잡이에 열쇠를 꽂고 돌려보았다. 딸칵, 하며 문이 저절로 반쯤 열렸다.
몇 주 동안은 열쇠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학기가 마쳐 성적공시와 그에 맞춰 성적에 불만을 품은 학생들의 메일이 쏟아졌다. 정기학술세미나에 발표할 논문도 준비해야했다. 세미나에서는 논문의 진부함과 논리의 빈약함을 지적받았다. 녹초가 되어 진부함과 빈약함 사이를 성마르게 오갔지만, 대책은 떠오르지 않았다. 버릇 같은 자괴감도 귀찮아질 찰나, 책상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열쇠가 보였다. 나는 열쇠를 들고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아파트 실내는 아무도 찾지 않았는지 매캐한 먼지 냄새가 났다. 어둑한 현관엔 코가 닳은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거실 바닥에 베란다창을 통과한 햇살이 네모나게 새겨져 있었다. 1인용 가죽소파 맞은편으로 보통 가정집에 TV가 놓여있을 법한 자리에 철제캐비닛이 서있었다. 우뚝 솟은 캐비닛은 마을 입구에나 서있을 장승처럼 주술적 역할을 맡고 있는 듯 보였다. 베란다를 여니 흐르는 강이 내려다 보였다. 강은 물비늘을 번들거리며 모래톱 사이를 헤엄쳐 갔다.
나는 돌아와 캐비닛 앞에 섰다. 캐비닛은 숫자를 돌려 맞춰야하는 원형으로 된 잠금장치와 두터운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실내엔 방이 2개였는데, 침실로 쓰였을 방에는 침대와 목재 책장만 단출하게 있었다. 침대엔 무늬가 없는 하늘색 이불이 펼쳐져 있었다. 침대는 생전 그의 성격처럼 단정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다른 방은 침실에 비하면 이상하리만큼 넓은 방이었는데 거실에 있는 캐비닛과 똑같은 것이 두 대 서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거실의 것과 달리 살짝 속을 내비치고 있었다는 것이다.
캐비닛 안은 곧 터질 것처럼 여백이 없었다. 자료를 책 형태로 묶은 것들이 가득했는데, 책등에 제목을 붙여놔 꺼내보지 않아도 대강 내용을 알 수 있었다. 『조선후기 김해 김씨 향리 가문과 이들의 고문서』, 『식민지기 거제군 거제면의 파평 윤씨 가문과 이들의 문중 문서』,『조선후기 동래의 무임 가문과 이들의 고문서』같은 제목이었다. 책들은 그가 생전에 학계에서 주목받은 논문에 쓰였던 자료였다. 나는 늘 그의 논문을 살피면서 조금이라도 그것에 미칠 수 있길, 그것을 닮은 모조품이라도 만들 수 있길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노력할수록 그와 가까워지기는커녕, 그와의 먼 거리차를 실감할 뿐이었다. 자료가 곧장이라도 쏟아져 덮칠 것 같아 나는 한 발짝 물러났다.
나란히 서있던 옆 캐비닛을 열었다. 전의 캐비닛처럼 책으로 가득했지만 간격에 여유가 있었다. 맨 아래는 비어있었다. 책등에는 처음 보는 제목들이 붙어있었다. 『한국 근현대의 민족표상 재인식』, 『한국 근현대의 민중 운동사』의 제목으로 보아 그가 해온 연구와 묘하게 다른 방향성이었지만 그가 완성하지 못한 연구의 자료임이 분명했다. 나는 조금 웃었다. 앞으로 이 자료로 연구를 하면 된다. 문제가 생긴다면 그와 공동연구라 밝히면 될 일이었다. 오히려 그와 공동연구라 밝히는 게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그런데 아래로 향할수록 연구의 방향성이 종횡무진 하더니 끝에 다다라 책은『한국 근현대 문학의 리얼리즘』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이는 그가 해온 연구와 전혀 다른 주제였다.
그는 인류학을 바탕으로 민속, 미술사, 지역사를 연구했는데 특히 고문서와 구술사 연구로는 국내에서 따라올 이가 없었다. 대학원 입학 때 선배들이 어째서 그가 지방에만 머물러있는지 의아해 했는데, 나는 그저 선배들의 아첨으로 치부해버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나 역시 그에 대해 의아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말년에 이르러 자신이 더 연구할 것이 없다고 여겨 다른 분야까지 손을 뻗치기 시작한 것일까. 나는 마지막에 꽂힌 책을 뒤적이며 생각했다. 책의 내용은 근현대 문학에 담긴 이야기를 역사적으로 해석함을 넘어, 기록과 구술 자료로 이야기의 진위를 판단하는 것으로까지 나아가고 있었다. ‘리얼리즘’과는 별개로 이야기가 실화인지 상상의 산물인지 구분하고 있던 것이다. 나는 이야기를 해체하고 있는 그의 남다른 치밀함에서 어떤 성급한 집착을 느꼈다. 그는 퇴임과 맞닿아 침착함을 서서히 잃어버린 게 아닐까. 나는 비어있는 마지막 칸에 붙어있는 노란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24-90-45’
거실에 있는 캐비닛의 원형잠금장치에 번호를 맞춰보았다.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하지만 캐비닛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두터운 자물쇠가 자리에서 그대로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실내를 샅샅이 뒤졌다. 서랍이나 목재 책장의 아래를 뒤지다가 작은 다육식물이 심어진 화분도 들어보았다. 침대 밑은 먼지뭉치만 굴러다녔다. 혹시나 책안에 있나 싶어 하나씩 뒤져보다가 문득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카페가 떠올랐다. 카페는 밀실에서 탈출하는 것이 목표인데, 밀실에 있는 탈출의 힌트들을 하나씩 찾는 즐거움 때문에 인기라고 했다. 돈을 지불하고 스스로를 가두고, 탈출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는 게 우습게 느껴졌었는데 지금 내가 그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힌트도 없고, 무턱대고 구석진 곳을 뒤져볼 따름이었다. 모든 곳을 헤집고 땀범벅이 되고 나서야 침대가 보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누워있었다던 침대를 뒤적거리는 게 불손하게 느껴졌다. 나는 하늘색 이불을 천천히 걷어보았다. 그 아래에 은색으로 반짝이는 것이 천천히 드러났다. 나는 이불을 제쳐두고 캐비닛으로 달려갔다. 자물쇠와 열쇠는 딱 들어맞았다.
그와 함께 현지 조사를 나갔던 날이 있었다. 강바람이 쾌청한 하늘을 부드럽게 밀어내고, 하늘은 그에 맞춰 느릿하게 굴러갔다. 스치는 강바람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가혹했던 더위가 물러나고 비로소 가을이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곳곳마다 계절의 혜택을 뿌리 깊게 받은 갈대가 하얀 손을 하늘에 뻗고 있었다.
그는 늘 그렇듯 갑작스럽게 연락해왔다. 시간이 있나 물었고, 학교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했다. 조수석에 앉은 그는 행선지를 알리지 않고, 길안내를 했다. 강을 옆구리에 끼고 하굿둑을 내달리니 짙은 녹음으로 가득한 너른 평지가 나왔다. 그는 뒷짐을 지고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퇴임이 얼마 남지 않은 날이었다.
나는 그의 뒤를 쫓아 걸으며 보았던 그 날의 뒷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오래된 낡은 노트와 이야기가 프린트 된 A4용지 묶음을 앞둔 채였다. 낡은 노트는 물에 젖었다가 말랐는지 빳빳하게 굳어있었다. 종이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고, 안에 적힌 글은 잉크가 군데군데 번져있었다. 서투르게 만졌다가는 바스러져 먼지가 될 것 같았다. 그에 반해 A4묶음은 새하얗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모두 그의 아파트 거실에 있던 캐비닛에 들어있던 것이었다. 캐비닛에는 다른 것은 일체 들어있지 않고, 중앙에 덩그러니 노트와 A4묶음만 놓여있었다.
뒷모습을 따라 오래 걸었더니 멀리 ‘낙동강하구에코센터’라는 팻말을 붙인 건물이 보였다. 마침 다리가 아파올 참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그러나 그는 건물 옆으로 이어진 샛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좁은 길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으면서 한참 이어졌다. 걸을수록 길은 흐릿해지고 허리께 쯤 자란 갈대의 군락이 펼쳐졌다. 발자국 소리에 놀란 길게가 집게발을 쳐들고 좌우로 급히 달아났다. 흰 부나비 두 마리가 갈대 사이를 날고 있었다.
“교수님, 어디 가십니까.”
물기를 머금은 땅에 점차 걸음을 떼기 어려워져 참지 못한 내가 물었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정처 없이 걸었다.
강이 흐르는 대로 따라 걸으니, 온갖 풍경이 펼쳐졌다. 부리가 긴 이름 모를 흰 새가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올랐다. 갈대가 자랄 대로 자라 희게 빛났다. 강바람이 갈대 사이를 헤쳐 나가니 갈대는 간지럼을 타는 듯 몸을 뒤챘다. 한참 구경을 하고 있는데 그가 우뚝 멈춰 섰다. 강을 한 발 앞두고서였다. 나는 불현듯 그가 몸을 내던질 것 같은 근거 없는 예감에 휩싸였다. 그에게 손을 뻗으려는 찰나 강이 일렁이며 퐁당, 퐁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갈대를 헤치고 나타난 것은 한 척의 나룻배였다.
나룻배는 곧장 강에 고꾸라져도 이상하지 않게 군데군데 나무가 벗겨져있었다. 강의 느릿한 흐름에 나룻배는 휘청거리며 몸을 맡기는 듯 보였다. 나룻배에는 한 노인이 타고 있었다. 얼굴은 갯바람에 그을렸는지 강에 젖은 나룻배처럼 짙은 갈색 빛이었다. 노인은 얼굴과 대조적인 흰 적삼을 입고 부드럽게 노를 젓고 있었다. 나룻배는 그의 발치에서 멈춰 섰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나룻배에 올라섰다.
“뭐 허냐, 이놈아!”
멀뚱히 서 있던 내게 노인이 불호령을 내렸다.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나룻배에 올라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강 너머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쉬지 않고 노를 저었지만, 나룻배는 노의 추진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흐르는 대로 나아가는 모양새였다.
“이 얼빠진 놈은 누구냐.”
노인이 나를 가리키며 그에게 물었다.
“제가 데리고 있는 선생입니다.”
“흥, ‘데리고 있는’ 이라니. 그게 무어야.”
노인은 혀를 차며 나를 노려보았다.
“네 놈은 여기가 어딘지는 아느냐?”
“낙동강… 아닙니까.”
“얼빠진 얼굴 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구만.”
나는 정말로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낡은 노트를 읽어가면서 줄기차게 이어진 노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야기는 1905년 을사년 겨울로부터 시작되었다. 일본 군대의 포위 속에서 맺어진 매국조약을 계기로, ‘조선 토지사업’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던 일, 그리고 이태 후인 정미년에 가서 치욕적으로 실시된 ‘한일 신협약’… 온갖 해괴망측한 처사들로 삼림원야들을 모조리 국유로 편입시킨 일들. 해방이 오고 육이오를 지나서도 땅의 주인은 도깨비처럼 바뀔 뿐 고장 사람의 손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노인의 눈은 열기 띤 분노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옛적부터 여그 사람들은 낙동강 물이 맨들어주는 우리네 땅이라고 젖줄같이 믿었제.”
그는 노인이 이야기를 이어갈 동안 먼 강만 바라볼 뿐이었다. 나는 노인의 이야기가 구술사 연구와 관련한 것임이라 여기고, 휴대폰을 꺼내 녹음하려 했다. 노인은 휴대폰을 펼치는 나를 보자 또 역정을 냈다. 나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을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이야기 중 가장 끔찍한 것이라 여겨졌던 것을 나는 낡은 노트에서 발견했다.
낡은 노트는 책등에 「섬 얘기」라 잉크로 굵직하게 쓰여 있었다. 「섬 얘기」는 마치 노인의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놓은 듯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섬 얘기」는 중학생 쯤 되는 소년의 일기글이었다는 점이다. 끔찍이 여겼던 이야기는 소년의 눈으로 체화되어 서술되고 있었다.
소년이 살던 섬에 여름에서 가을로 이어질 무렵 많은 비가 쏟아졌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사흘째부터는 억수로 변해가더니 마침내 광풍까지 겹쳐 폭풍우로 바뀌었다. 라디오에서는 육십 년래 처음 보는 비라며 떠들어댔다. 시뻘건 뻘물이 개울을 넘고 길가로 닥쳐들었다. 소년은 제 할아버지를 따라 닥쳐드는 강물을 피해 둑을 올랐다. 둑 아래에서 보기에 그악스럽게 밀려 흐르는 것은 물굽이만이 아니었다. 강물은 얼마나 많은 들녘들을 휩쓸었는지, 보릿대랑 두엄더미들을 무더기로 품고 흘러갔다. 강물이 포악스럽게 흐르는 와중에, 그 옆에 끈덕지게 붙어 휩쓸린 참외나, 수박 따위를 건져내려는 장대를 든 마을 주민들이 있었다. 소년은 그 모습을 「섬 얘기」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었다.
‘……윗 고개 넘어 살던 최씨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물살에 휩쓸리지 않게 강물에 접한 습지에 발을 정강이까지 부러 처박고는 장대를 이리저리 휘둘러댔다. 강물과 씨름하는 모습에 누군가 박수를 치기보다 모두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누구에게도 보장 받아오지 못한 절박한 생활의 모습이었다.’
「섬 얘기」는 결코 미문이 아니었지만, 삶을 조망하는, 나이답지 않은 서늘한 노기가 실려 있었다.
노인의 이야기는 땅거미가 어스름하게 깔려올 쯤 끝이 났다. 이야기가 끝남과 동시에 나룻배는 강변에 닿았다. 강만 쳐다보고 있던 그가 일어나 노인에게 천천히 절을 올렸다. 노인은 늘 그래왔던 듯 태연하게 절을 받았다. 나도 절을 해야 하나 싶어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노인이 손을 저으며 냉큼 떠나라 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배에서 내리는 그를 뒤따랐다. 얼마가지 않아 차를 세워둔 곳이 나왔다.
「섬 얘기」는 한참 뒷이야기를 남기고 있었다. 나는 「섬 얘기」를 그가 늘 연구해온 지역사에 필요한 사적자료 쯤으로 여겼다. 그러나 「섬 얘기」를 제쳐두고, 비교적 적은 분량의 A4묶음을 읽어 내렸을 때 「섬 얘기」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A4묶음은 제목 없는 이야기 한편이 프린트 되어있었다. 이야기는 중학교 교사가 화자로 등장해, 한 소년과 만난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이야기는 중학교 교사가 매일 지각하는 한 소년을 꾸중하면서 시작한다. 소년은 강 하류에 있는 모래가 퇴적되어 생긴 섬에 살았다. 통학을 위해선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야했기에 평소 지각이 잦았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내가 만난 노인의 낡은 나룻배를 떠올렸다.) 교사는 가정방문차 섬을 방문하는데, 이에 섬의 내력을 알게 되는 내용이었다. 그 내력이 무엇인가 하니, 이는 내가 노인에게서 들은, 「섬 얘기」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막바지에 이르러 섬에 큰 홍수가 난다. 교사는 섬에서 한 발 물러난 곳에서 소년을 걱정한다. 그러다 강둑 앞에서 소년을 아는 노인과 만나 소년이 처한 상황을 전해 듣게 된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하구에 있는 엉터리로 쌓여있는 둑을 무너뜨린다. 실하지 않은 둑을 그대로 두었다가 물이 더 불었을 때 터진다면 큰 참사로 이어질 형국이었다. 둑을 무너뜨리고 있는데, 소위 땅주인의 앞잡이 같은 덩치들이 나타나 노발대발 소년의 할아버지를 막아섰다. 여기서 사건이 벌어진다. 소년의 할아버지가 앞잡이 중 하나를 냅다 물속에 던져버린 것이다. 물에 처박힌 사내는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세찬 흐름에 사라져버렸다. 사건은 소년의 할아버지의 기약 없는 감옥살이로 이어지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나는 A4묶음을 읽으면서 이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는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휴대폰을 켜 이야기의 첫 문장을 넣어 검색해보았다.
‘이십 년이 넘도록 내처 붓을 꺾어오던 내가 새삼 이런 글을 끼적거리게 된 건 별안간 무슨 기발한 생각이 떠올라서가 아니다. 오랫동안 교원 노릇을 해오던 탓으로 우연히 알게 된 한 소년과……’
예상한 바와 같이 A4묶음의 이야기는 교과서에도 실렸던 유명한 단편소설이었다. 그렇다면 「섬 얘기」는 단순히 누군가의 장난이거나, 유명 소설을 따라 쓴 모작에 불과했다. 고문서 연구나 구술사 연구를 할 때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연구의 첫 해결과제는 고문서나, 구술된 이야기의 신빙성을 검증하는 일이었다. 나는 그의 실수를 통해서 인간적인 면모를 엿본 것 같아 웃음이 났다. 캐비닛에 고이 모셔둔 자료의 결과를 알았다면 그도 웃어넘겼을까. 나는 조금 우월감에 취해, 유쾌한 마음으로 「섬 얘기」의 나머지 부분을 읽었다.
「섬 얘기」는 역시나 A4묶음과 짝을 이뤄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다만 교사가 보았던 것을 소년의 시선으로 서술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마을주민이 강에서 수박 한 덩이를 기어코 품에 안는 장면에서 다시 읽어갔다. 소년은 강물을 피해 할아버지와 둑을 내처 걸었다. 그러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강 하구에 다다라 비죽 튀어나온 조악한 둑을 보고 분기탱천했다. 소년의 할아버지는 근처에 두 손에 쥘만 한 돌을 찾아 둑을 헤집는다. 그리고 예상할 수 있다시피 유력자의 앞잡이가 등장한다. 그 대목은 A4묶음보다 상세히 그려지고 있었다.
‘서쪽 강둑길에 검정 지프차가 한 대 와닿았다. 지프차에서 우루루, 깡패같이 생긴 청년 둘이가 내리더니 불쑥 할아버지에게로 달려들었다. 할아버지가 그들을 일별하고, 둑을 계속 허물었더니 눈이 약간 치째진 청년 하나가 할아버지에게 후욕패설을 퍼부었다. 할아버지도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는지 청년에게 달려들었다. 허나 백발의 노인이 청년을 당할 순 없었다. 할아버지가 나자빠지더니 팔꿈치에서 깨나 많은 피가 빗물에 흘러내렸다. 나는 그랬으면 안 되었지만, 두고두고 후회할 행동을 하고 말았다. 나는 냅다 청년에게 달려가 몸을 부닥쳤다. 청년은 삐끗하며 휘청이더니 둑 아래로 굴렀다. 강물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내를 꿀꺽 삼켜버렸다. 청년 하나는 겁을 집어 먹었는지 지프차를 끌고 사라져버렸다.’
결과적으로 「섬 얘기」는 소년이 일을 벌이는 게 단편소설과 다른 점이었다. 뒷부분은 겁에 질린 소년을 끌어안는 할아버지라는 상투적인 장면이 이어졌다. 나는 장을 넘겨 뒷부분을 마저 읽었다.
‘할아버지는 순경에게 끌려갔다. 내가 순경에게 달려들며 청년을 강에 밀쳐버린 것은 나라고 붙들었지만 순경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내가 할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더니 할아버지가 세차게 뺨을 후려쳤다. 그러면서 화를 띤 얼굴로 내게 어서 집에 돌아가라고 소리쳤다. 할아버지의 친우가 금방 돌아올 거라고 안심시키며 나를 할아버지에게서 떼놓았다.’
이것이 잉크가 번지지 않아 알아볼 수 있는 「섬 얘기」의 마지막이었다. 뒤는 군데군데 단어만 읽어낼 수 있을 뿐 맥락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결국 「섬 얘기」는 단편소설과 짝을 맞춘 패러디였던 셈이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그의 캐비닛에 있었던 다른 연구 자료들을 떠올렸다. 다음 세미나에서는 쓸 만한 연구결과를 내놓자고 다짐했다. 「섬 얘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려는데, 지폐를 들어 보이면 드러나는 숨은 그림처럼, 잔상같이 무언가의 흔적이 드러났다. 나는 형광등에 그것을 비춰보고는 마지막 페이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마지막 페이지라고 여겼던 장은 물에 젖은 후에 말라 뒷장과 하나로 붙어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서로 붙어있는 두 장을 뜯어냈다. 뒷장에 새겨진 세 글자가 선연히 드러났다.
그와 이곳에 함께 왔을 때처럼 하늘은 맑고, 느긋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낙동강하구에코센터’를 찾아 그 옆의 샛길로 들어갔다. 그와 함께 보았던 ‘부리가 긴 이름 모를 흰 새’는 ‘노랑부리저어새’라는 부리처럼 긴 이름을 갖고 있었다. 새가 흰 날개를 펼치며 유유히 하늘을 가로질렀다. 길게는 여전히 발걸음에 놀라며 갈대 사이로 달아났다. 갈대는 나를 반기듯 넘실거리며 춤추고 있었다. 나는 도착한 곳에서, 그가 그랬던 것처럼 강을 한 발 앞두고 섰다. 기다림의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강이 일렁이며 퐁당, 퐁당하는 소리가 들렸다. 갈대를 헤치고 나타난 한 척의 나룻배였다.
나룻배는 강 하류를 향해 흘러갔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무슨 말을 듣고 싶은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참 흘러가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교수님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럴 나이가 됐지, 아마?”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땅거미가 깔리고 노인이 나룻배를 강변에 대주었다. 나룻배에서 내리려는 내게 노인이 한 마디 건넸다.
“그 놈이 네 놈을 각별히 여겼을 게야. 네 놈도 애비 없이 자랐다며?”
나는 그에 대해서 떠올렸다. 오래 같이 있었지만 그의 사소한 커피 취향도 떠오르지 않았다. 노인의 말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정도였다. 나는 노인을 향해 절을 올렸다. 노인은 늘 그래왔던 듯 태연하게 절을 받았다.
「섬 얘기」의 마지막 페이지에 새겨져 있던 것은 그의 이름이었다. 나는 끝이 번진 그의 이름을 보고, 처음엔 무슨 짓궂은 장난인가 싶어 웃었다. 그러다 나란히 놓인 「섬 얘기」와 단편소설을 보면서, 죽음 이후에 벌어질 장난을 계획하는 그를 쉽사리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확인해야할지도 모르면서, 무언가를 확인해야한다는 마음으로 그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동생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준비한 다음 세미나에서도 진부함과 빈약함 사이를 진자처럼 오갔다. 스스로의 무능에 대한 속상함과 억울함에 L과 술잔을 기울였다. 나는 유독 취한 채로 아무 말이나 뇌까렸다. 오랜만에 만난 L은 내게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최 선생, 임용 안 된 것 보니 돈 안 쓴 거야?”
L의 표정을 보아 소문을 믿고 있던 모양이었다. 나는 술기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대답대신 서류가방에서 구겨진 A4묶음을 꺼냈다.
“이게 뭔지 알아?”
L은 A4묶음을 손에 들고 골몰했다. 나는 그가 그것을 알아볼 것이라는 생각보다, 술기운에 그것이 지금 나를 얼마나 괴롭히는지 성토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예상을 깨고 말했다.
“그 모래톱 뭐시기지? 소설.”
“L, 네가 어떻게 알지?”
“내 전공이 허구헌 날 이런 거나 읽어대는 건데. 나를 너무 무시하고 있었구만.”
사실이었다. 나는 그를 완전히 얕보고 있었고, 그래서 더 아연했다.
“내가 놀랄만한 사실 알려주지. 이 작가, 우리 D대학에 있었다?”
L에 따르면 A4묶음의 단편소설을 쓴 유명작가는 D대학에서 강사를 맡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거, 확실한 거야?”
“당연하지. 우리 꼰대가, 아니, 우리 교수가 그 작가한테서 배운 걸 맨날 자랑했거든.”
나는 술기운 탓에, 아니 누군가 남겨 놓은 삶이, 남겨 놓은 세계가 중첩되며 마구 섞이는 것을 느끼며 어지러웠다.
“그럼 작가가 이 근방에 살았으니, 그 이야기가 사실일 수도 있다는 건가?”
물음에 L은 지나치게 이죽거리며, 자신이 아는 바를 떠벌릴 수 있어 기뻐보였다.
“사실이라, 그렇게 단순하게 정의내리면 내 전공이 섭하지, 이 사람아. 모든 이야기는 사실을 완전히 넘어선다고. 그래서 무서운 거고.”
그가 여러 이론을 차용하며, 줄기차게 말을 이어갔지만 술집의 음악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술집이 휘영청 뒤집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테이블에 얼굴을 파묻고, L의 말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생각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고.
■우수
많고 큰 바다 / 이수영
다대(多大) 바다는 변함이 없었다. 바다로 나아갈수록 많고 큰 바다였다. 사내는 배의 선실 유리로 드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이곳에 정착한 게 몇 해째인지 가늠해보았다. 늦가을 바다는 색바랜 청바지 빛으로 출렁이고 있었다. 해안이 가까워오자 쉰일곱 살 사내는 배의 엔진 속도를 줄였다. 때 묻은 행주 색깔 갈매기들이 갈급하게 울어대며 해안을 따라 돌았다. 해안 끄트머리엔 짙푸른 몰운대 솔숲이 바다거북마냥 길게 목을 빼고 엎드려 있었고, 바다를 마주하고 작고 허름한 횟집과 낚시점들이 갯바위에 붙은 따개비처럼 촘촘히 붙어 있었다.
선착장에 들어온 사내는 계선줄을 단단히 묶었다. 나무섬에서 태워 온 낚시꾼들은 배에서 내리자 말없이 삯을 치르고 선착장을 빠져나갔다. 별 재미를 못 본 모양이었다. 새벽 출조 때 감싱이를 낚겠다고 셋이서 입방아를 찧어쌓더니만. 혼잣말을 하면서 쉰일곱은 목장갑을 벗어 옷을 툴툴 털고는 담배를 빼 물었다. 새벽에 들어갔던 사람들을 다 데리고 나왔으니 네 시에 형제섬에 있는 사람만 나오면 한숨 돌리겠구만. 날씨가 추워지면 그나마 뜸하던 낚시꾼들의 발길도 끊길 것이다. 쉰일곱 살 사내는 연기를 내쉬며 무연히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다대포 바다는 강 하구에 위치해 있어서 강과 바다가 몸을 섞는 곳이었다. 오랜 세월 강에서 흘러온 흙과 모래가 쌓여 바다 가운데 작은 섬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원래 섬이었던 곳도 몰운대처럼 육지와 이어지기도 했다. 나도 섬이로구만. 바다로 흘러들어 땅에 발붙이기는 매한가지니. 사내는 새삼스런 눈길로 멀리 햇빛에 부옇게 흐려진 섬을 바라보았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쉰일곱은 얼른 점심을 먹고 수족관을 청소하고 전어를 다시 채워 넣어야 했다. 해수욕장 입구에 포장도 쳐야 하고 해가 지기 전에 다시 형제섬에 가서 금방 부려놓은 사람을 태워 와야 해서 마음이 바빴다. 쉰일곱은 담배꽁초를 양철 쓰레기통에 휙 던지고는 성큼성큼 횟집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일흔두 살 노파가 사내에게 무어라 말을 건네려고 했으나 쉰일곱은 노파를 보지도 못한 채 갯바람을 안고 사라져버렸다. 고년, 참 매정도 하지. 일흔둘은 짐짓 혀를 끌끌 차다가 순간 마음이 철렁했다. 내 정신 좀 보소. 또 망령이 도지네. 순간적으로 사내를 딸이라고 착각한 거였다. 알지도 못하는 사내를 오래 전의 딸년으로 겹쳐 보다니 뭐가 씌어도 한참 쓰였제. 세월도 훌쩍 뛰어 넘어불고……. 팔자도 내림이라고 딸이 재혼해서 살림을 난 곳이 다대포 바닷가라고 했다. 오래 전 먼 길을 물어물어 딸이 사는 이곳을 찾아왔을 때도 딸의 냉대는 여전했다. 정이 들 새도 없었지. 국민핵교도 가기 전에 시집에 내맡기고 한동안 연락도 끊고 살았응게. 마지막으로 얼굴을 봤을 때도 선착장 앞에서 겨우 몇 마디 주고받았을 뿐이었다. 그 후로 전화통화라도 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지만 햇빛이 다글거리는 수평선처럼 가물가물하기만 했다.
노파는 눈을 들어 잔물결이 이는 바닷물을 바라보았다. 바다 한가운데 어선 몇 척이 물에 붙잡힌 듯 멈춰 서 있다. 이 바다는 세월을 비껴가는 갑네. 달라진 기 없응께. 커다란 바다거북이 물길을 막기라도 한 듯 바윗돌 사이로 해감내가 밀려들었다. 파도에 떠밀려온 해초더미가 얕은 물속에 앙금처럼 깔려 있었다. 왜 또 왔소.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무소식이 희소식잉께. 딸은 궂은 물일에 뼈마디가 굵어진 손을 비틀 듯 주무르며 원망과 설움을 눌렀다. 영감이 자리보전하기 전이니까 벌써 십여 년 저쪽의 일이었다. 휴우, 일흔둘이 가쁜 숨을 내쉬었다. 뻘짓이제. 여적지 여기 있을 리 만무허고. 그게 언제적 야그라고. 노파의 눈길이 닿은 곳에 아낙네 하나가 함지를 이고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아낙네 뒤로 누렁개 두 마리가 어슬렁거리며 뒤를 따랐다. 일흔둘은 아낙네와 털이 성긴 누렁개가 횟집 샛길로 사라질 때까지 멍한 눈길로 좇아갔다.
열일곱 살 소녀는 해수욕장 입구에 서서 모래밭의 너비를 가늠해보고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 넓었었나. 오늘따라 백사장이 더욱 휑해 보였다. 길고 긴 백사장 끝에 바다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더 멀리 깊은 물속에 육중한 몸을 담그고 있는 바위섬이 보였다. 열일곱은 이제 막 바다에 도착했다. 등에 멘 가방에서 고무줄을 꺼내 긴 머리카락을 올려 묵었다. 차고 시원한 바람이 흰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두 시간이나 걸었더니 교복 블라우스 겨드랑이가 땀으로 축축하게 젖었다. 아침에 교문 앞까지 갔다가 나선 길이었다. 처음엔 무작정 거리를 헤매고 다녔지만 이른 오전에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고 노트에 낙서를 끼적이다가 중학교 때 사생대회를 왔던 이곳이 떠올랐다.
소녀는 정물화처럼 고정된 바다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발 한발 다가가자, 바다는 빛의 반짝임으로 되살아나고 파도의 겹들이 살아 움직였다. 머리에 함지를 인 아낙네가 스치고 지나가자 콧구멍으로 파래냄새가 훅 풍겨왔다. 누렁개 두 마리가 서로 희롱하며 모래사장을 지그재그로 뛰어다녔다. 한참을 신이 나서 겅중거리던 두 녀석은 슬그머니 멈춰서더니 머리를 맞대고 무언가 냄새를 맡았다. 무릎까지 오는 시커먼 고무장화 한 켤레가 모래밭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코를 킁킁대던 놈들은 먹을 것을 찾지 못하고 버려진 고무장화를 앞발로 툭툭 건드렸다. 한 녀석이 다리를 들어 백사장에 오줌을 갈겼다. 아낙네는 누렁개의 분탕질에 개의치 않고 분주히 길을 재촉했다. 혼자 모래밭에서 겅중거리던 한 놈이 저만치 앞서 가는 주인을 쫓아 다급히 달려가고, 오줌을 눈 녀석은 누런 꼬리를 슬슬 흔들며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따라갔다.
해안선의 한쪽 끝에 서 있는 서른다섯 살 청년이 파도소리에 귀를 팔고 있었다. 남자의 등 뒤쪽으로 뿌리가 드러난 좀보리사초들이 모래 위에서 을씨년스럽게 몸을 흔들어댔다. 바닷바람이 풀덤불처럼 더부룩한 남자의 머리카락을 들쑤셨다. 서른다섯이 점퍼 호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합격이면 오늘 쯤 연락이 올 텐데…….
열일곱은 교복치마를 무릎께에서 오므리고 백사장에 쭈그리고 앉았다. 잔잔한 수면이 햇빛에 빛을 튀기며 일렁거리고 있었다. 지금쯤 애들은 급식 먹고 모여앉아 햇빛을 받으며 수다를 떨고 있겠지. 수정이는 이마와 코 주위에 번들거리는 기름을 기름종이로 찍어내고 있을 거고. 카톡을 씹었다고 수정이가 지랄할 텐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답을 보낼까 하다가 관둬버렸다. 담탱이한텐 수정이가 알아서 둘러댔겠지, 뭐. 지금은 다 귀찮아. 바다의 은빛 비늘들이 친구들의 웃음소리마냥 타닥타닥 튀어 올랐다. 수정이가 울음을 터트리지만 않았어도 난 절대 울지 않았어. 걔는 착하긴 한데 가끔 청승을 떨어서 짜증나. 열일곱은 은빛 바다를 가만히 응시했다. 한참 물빛을 바라보고 있자, 눈 안쪽이 가볍게 떨리면서 은빛 비늘이 수천 마리의 나비 떼가 되어 팔랑거리며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가벼운 환희에 빠진 소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바다 한쪽 끝에 서른다섯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반짝이는 바다에서 치지직 소리가 나는 듯했다. 어린시절 텔레비전 화면에서 듣던 소리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가 출근하면서 차려놓은 밥을 먹고 해가 질 때까지 혼자 방에 있었다. 졸음이 밀려들면 밥상을 밀치고 텔레비전을 켰다. 정규방송이 아닌 채널을 아무데나 켜놓곤 했는데, 옅은 회색의 화면은 점점이 빛을 산란하며 가느다랗게 치직 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소년은 이내 잠이 들곤 했었다. 언젠가 바다 깊은 곳에 다이버들과 들어갔을 때, 심해에서 그 소리를 다시 들었고, 이대로 깊이깊이 잠들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파도소리가 사람의 수면파와 흡사하다는 걸 책에서 본 적은 있지만, 어쩌면 죽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심해에도 은밀하게 움직이는 파도가 있다고 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살아 꿈틀거리는 파도. 아주 깊은 바다에서는 파도의 파장이 백 킬로미터도 넘는다.
오후가 되자 파도가 거칠었다. 파도는 크르륵거리며 밀려와 형제섬 기암절벽에 부딪치고 깨졌다. 오늘은 포인트도 잘 확보하고 물때도 나쁘지 않아 수확이 괜찮을 듯했다. 마흔아홉 살 낚시꾼은 팔목에 힘을 주었다. 낚싯대를 잡은 것은 퇴직하고부터 사람들과 말을 섞기 싫어서였다. 하루 세끼 먹는 밥이 쳐다보기도 싫어지듯 일상적인 말조차도 회피하고 싶어졌다. 마흔아홉은 회사를 박차고 나온 후에야 비로소 이십 년 넘게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살았다는 걸 깨달았다. 낚싯대를 붙잡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바다 위 쓰레기 더미처럼 마음속에 떠다니는 것의 정체를 오랫동안 응시했다. 말들이었다, 모함과 모략과 아첨의 말들이었다. 경쟁에서 앞서려고 스스로가 뱉어낸 찌꺼기들이었다.
마흔아홉 살찐 낚시꾼이 아이스박스에 담긴 새우 한 움큼을 건져서 바다를 향해 던졌다. 모함과 모략을 한시라도 빨리 건져올리고픈 심정이었다. 멀리 공중을 떠돌던 갈매기들이 몸을 낮추며 찌 주위로 내려앉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나온 쉰일곱 사내는 해수욕장 입구에 포장을 치고 분주하게 손을 놀렸다. 안주거리로 씻어온 멍게와 성게, 조개들을 아이스박스에 챙겨 넣고, 어묵 국물과 우동 국물을 만들 요량으로 물을 따로 부어 무와 건새우를 한쪽에 넣고 멸치와 다시마를 다른 쪽에 다듬어 넣었다. 보잘것없는 장사지만 사내가 이곳에 정착하고 처음 벌인 일이었다. 낚시꾼에게 잔술을 팔고 쥐치포를 구워주고 커피나 불꽃놀이 화약 등속을 제법 쏠쏠하게 팔기도 했지만 요즘은 통 재미가 없었다. 여름 해수욕 철엔 정신없이 바쁘다가 이맘때가 되면 바닷물이 빠져나가듯 이곳도 썰렁해졌다. 십일월에 접어들면서 다른 포장마차들은 아예 장사가 되는 곳을 찾아 나서고 없었다.
쉰일곱은 구정물을 내다버리고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 말짱하더니 하늘이 야료를 부리는지 날이 꾸물꾸물한 게, 오늘 장사도 시원찮겠구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오늘따라 출썩이는 파도소리에 쉰일곱은 가슴속이 간질간질했다. 사실 조금 기다리기는 했지만 내놓고 기대를 내비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침에 마누라가 속이 부대낀다고 주방찬모에게 일을 맡기고 병원에 간다고 해도 그저 그런가보다 했다. 자신은 낼모레 육십 줄에 접어들지만, 마누라 역시 오십 바라보는 나이고 더구나 출산 경험이 없어 늘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생각해오던 터였다. 한곳에 마음 붙이고 일해서 돈 모으고 마누라 건사하고 새끼 낳고 사는 것. 이것이 남들처럼 사는 것이고, 몇 해 전 세상 버린 어머니가 늘 바라던 것이기도 했다.
오랫동안 쉰일곱은 가슴속에 들끓는 열을 식히기 위해 전국을 떠돌았다. 날품을 팔고 막노동판에서 징그럽게 일을 하고 나서도 밤이 되면 잠을 자기 위해 함바집에서 술을 퍼마셔야 했다. 밀려드는 울화 때문이었다. 안산 형님이 죽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그만 모든 게 허무해져서 정처 없이 떠돌다 이곳으로 흘러들어왔다. 흔해빠진 게 바다이고, 다대포 바다가 특별할 것도 없고, 외려 후줄근한 남쪽의 외진 곳임에도, 저 시퍼런 물을 보고 난 후론 막혔던 가슴이 툭 터지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밀려든 것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산소통을 등에 매달고 바다 깊숙이 들어갔다 나오면 머리가 개운해지고, 갓 잡은 고등어마냥 퍼덩퍼덩 살아 꿈틀대는 기분이랄까. 밤늦도록 포장마차에서 장사를 하고, 밤새 활어차를 운전해 수산물 경매시장에 가서 주인이 경매 받은 생선 박스들을 나르며 눈어림으로 경매에 대해 배웠고, 낚싯배를 모는 것도 눈치로 익혀 낚시꾼을 실어 날랐다. 몸은 고돼도 마음만은 편했다.
번개탄으로 연탄화덕을 피우려고 포장을 걷고 나갔다. 수평선 위로 회색구름이 축 늘어졌다. 먹장구름이 슬슬 밀려오고 파도가 일어서고 있었다. 소나기라도 퍼부을 기세로군. 저 할마시가 아까부터 저기 쭈그리고 앉아 있더니만 그 자리 그대로 있네.
해거름이 되면 돌아가야지. 버스를 타야 항께. 밭고랑 같은 물이랑을 밟고 앉은 일흔 둘은 축축한 모래밭에 생긴 이불바늘귀만한 구멍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모래구멍 옆에 게들이 영양분을 빨아먹고 뱉어낸, 환약 같이 생긴 모래알갱이가 자잘한 꽃을 피웠다. 죽기 몇 달 전부터 영감은 무시로 물똥을 쌌다. 괄약근을 조이는 힘이 약해져 미음만 먹어도 방귀가 새나오듯 물똥이 사타구니로 흘러내렸다. 똥이 나오는 구멍이 헐거워진 탓인 게지. 한평생 이눔의 구녕 때문에 안달복달 살아온 건지도 몰르제. 사람으 몸에 뚫린 구녕 아홉 개. 내가 매정하게 어린 년 팽개치고 재가를 한 것도 그렇고, 좋은 거 보고 듣고 먹고 싸니라고 한 세월 보내불고. 내가 지금 뭐라 중얼거렸으까이. 일흔 둘은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생각들이 어디서 밀려왔다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새나가듯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뜻 모를 소리를 중얼대고, 또 자기가 한 말을 금세 잊어버리는 스스로가 꿈에서 깰 때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열일곱은 휴대전화를 꺼내 모래구슬이 백사장에 만들어 놓은 무늬를 찍었다. 사진 속 모래구슬들은 두루마리휴지의 엠보싱 같이 올록볼록했다. 재미를 붙인 소녀는 백사장을 돌아다니며 부서진 조개껍질과 검은 고무장화와 좀보리사초를 찍었다. 열일곱이 생각에 잠긴 서른다섯 살 남자를 슬쩍 쳐다보았다. 서른다섯의 구두코에 모래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열일곱은 몰래 남자의 갈색 구두를 찍었다.
갈색 구두 서른다섯은 양손을 호주머니에 찔러 넣고 펑퍼짐한 구두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래 위에 하얗게 부수어진 조개껍데기가 죽은 사람의 뼛가루처럼 보였다. 더 이상 희망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난 이년 동안 백 번 넘게 입사지원서를 넣고 수십 번 면접을 봤다. 이제는 똑같은 질문에 똑같은 대답을 하는 것도 신물이 났다. 이 회사에 당신이 왜 필요한지 말해보세요, 상사가 본인보다 나이가 적어도 상사의 업무상 지시를 잘 따를 수 있겠습니까 …… . 올해 만난 면접관들은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해댔다. 나는 늘 기다리며 살았어.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인수합병을 거듭해도 언젠가 좋은 날이 있을 거라고, 남들처럼 연봉도 오르고 마음 편하게 일할 수 있을 거라고……. 서른다섯이 고개를 들어 바다 위 하늘을 쳐다보았다. 하늘이 낮게 가라앉아 마치 둥그런 뚜껑처럼 바다를 덮고 있는 듯했다.
바다는 청회색으로 물들었다. 형제섬의 마흔아홉 낚시꾼은 비옷을 꺼내 입었다. 비가 금방이라도 퍼부을 것처럼 공기가 무거웠다. 점심때까지 사각바위에 있던 젊은 치들이 날이 수상쩍다며 나갈 때 물살의 변화를 감지했던 것일까. 선착장 사무실로 전화를 넣어볼까 하다가 아무래도 지나가는 소나기이지 싶어 휴대전화를 도로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한기가 밀려들고 뱃속이 출출해져 휴대용버너에 불을 피워 홍합을 삶았다. 보온병에 담아온 커피를 마시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시원하게 물줄기가 하늘에 그물을 치는구만.”
쉰일곱은 국물을 우려내는 솥의 커다란 뚜껑을 닫으며 중얼거렸다. 포장 안의 사람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려 비닐막을 비껴놓은 만큼의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강한 비와 바람이 뒤엉켜서 바다와 하늘 사이 여백에 물 그물을 얽어매는 중이었다. 그들은 비에 젖은 채 입을 다물고 앉아 있었고, 후줄근한 바다는 거칠 것 없이 몰아치는 비바람에 숨을 죽이고 있었다.
백사장에 검은 점을 찍듯 간간이 듣던 빗방울은 사람들이 미처 몸을 피하기도 전에 퍼붓기 시작했고, 이내 빗줄기는 작살처럼 내리꽂혔다. 백사장은 순식간에 물이 고여 질퍽거렸다.
“요새는 비가 왔다 하면 폭우가 쏟아지니…….”
쉰일곱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서른다섯은 후줄근하게 젖었다. 일흔둘 역시 비에 젖어 몸을 떨고 있었다. 횟집 근처를 수소문했지만 역시나 딸의 행방을 알 수 없어서 기운이 쑥 빠졌다.
“어무이, 뜨거운 국물 좀 더 드릴까예. 참, 어제 팔다 남은 소주가 있는데, 딱 한잔만 하이소. 추울 때는 한잔 하는 것도 좋습니더.”
일흔둘은 말이 없었다. 쉰일곱은 플라스틱 그릇에 어묵과 국물을 퍼서 일흔둘에게 건넸다. 순순히 받은 일흔둘은 소주 한 모금을 마시고, 주름진 입을 내밀어 뜨거운 국물을 목구멍에 흘러 넣었다.
열일곱은 컵라면 종이뚜껑 위에 손을 얹고 바다를 향해 눈을 주었다. 스케치북만한 포장마차 비닐창으로 뿌연 파도가 내비쳤다. 중학교 때 사생대회를 왔을 때, 친구들은 수다를 떨고 모래장난을 하고 놀다가도 오후가 되자 골똘한 표정으로 파란 물감과 하얀 물감을 적당히 섞어 물결치는 바다를 그려냈다. 열일곱은 그럴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를 그린다는 게 왠지 엉터리 같았다. 파도는 왜 밀려오고 밀려가는 것일까. 학교에서 달과 태양이 지구를 끌어당기는 힘의 차이 때문이라고 배웠지만 소녀는 이상한 수수께끼를 푸는 심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너무 걱정들 하지 마이소. 소나기일 깁니다.”
침울한 표정으로 웅크리고 앉은 서른다섯은 입을 굳게 다물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어묵국물을 삼키고 있을 뿐이었다. 라면 면발을 후루룩 빨아당기던 열일곱은 서른다섯을 훔쳐보다가 문득 저 남자가 죽으려고 바다에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 상대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참, 어무이, 신발 이리 줘 보이소. 연탄불에라도 말리게. 어르신들은 다들 이런 거 신습디다. 우리 어무이도 이런 거 신었지예. 이거 효자신발이라 한다면서예. 저야 뭐 효도의 효자도 모르고 평생 애만 먹이고, 신발 하나도 못 사드려서 …….” 쉰일곱이 젖은 신발을 건네받아 연탄화덕 옆에 세워두었다.
뻘밭 물이랑 같은 일흔둘의 주름투성이 얼굴이 실룩이며 고맙다는 듯, 무어라 중얼대지만 들리지는 않았다. 형제섬에 너울이 제법 있겠는데, 동태처럼 뻣뻣한 양반 괜찮을라나……. 쉰일곱이 연탄화덕을 일흔둘에게로 당기며 혼잣소리를 했다. 연탄 냄새가 조금 났지만 연탄화덕이 포장 안의 썰렁한 기운을 덜어주었다.
멀리 형제섬의 마흔 아홉 낚시꾼은 바위 밑에 쭈그리고 앉아 비를 피했다. 얼굴로 들이치는 빗줄기는 어쩔 수 없었지만 바위가 옴팍하게 들어가 몸을 가릴 공간이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햇빛에 데워졌던 바위들이 전해주는 온기에 제법 아늑한 느낌도 들었다. 발치에 먹다버린 홍합껍데기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만 년 전 사람들은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는 둥글게 모여 앉아 서로의 맨몸을 감싸안으며 추위를 덜었으리라. 어두운 동굴이나 바위 밑에 앉아서 불을 피워 물고기나 조개를 구워먹고, 물고기 뼈로 작살을 만들고 조개껍데기를 갈아서 장신구를 만들었겠지. 조개더미 유적에서 출토되는 걸 보면 그랬다. 그래도 행복했을까. 행복이라니, 그때는 행복이라는 말도 없었을 거야. 그랬으니 행복했을지도 모르겠군. 마흔아홉이 발끝으로 홍합껍데기를 툭툭 건드렸다. 패총(貝塚). 이십 년 동안 잇새를 빠져나온 아첨과 모함의 말들은 썩지 않고 쌓였던 것일까. 결국 나는 똑같은 모략의 그물에 걸려들고 말았다. 말, 언어라는 것은 결코 썩지 않는 패총일지도 몰랐다.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시퍼런 격랑이 이빨을 허옇게 드러낸 채, 형제섬 바위들을 덮칠 듯 맹렬히 몰려들었다.
어묵국물이 닳고 국물 속에 든 무 덩어리는 어느새 물큰해져 있었다. 포장마차 안에까지 거센 파도소리가 들려왔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몰아치는 파도소리와 빗소리, 멋쩍은 듯 어묵국물을 홀짝이는 소리, 국물 끓는 소리만 들렸다. 아, 찌질하다, 정말. 엄마한테 들키지 않으려면 저녁까지 시간을 때우고 가야 하는데, 이제 어디로 가지. 모르겠다. 비가 그치면 생각해보지 뭐. 열일곱은 다이어리를 꺼내 괜히 낱장을 뒤적거렸다. 비바람이 포장을 후두둑후두둑 두드려댔다. 이 년 전에 아내는 희망을 가지라고 했었지. 희망이라 ……. 그런데 이제 내게 희망이 없다고 이혼해달라고 한다. 서른다섯은 소주를 털어 넣고 추위에 떨고 있는 포장 안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눈길을 보냈다. 모두들 희망에 속고 사는지도 모르지. 그래서 추운 나라의 어떤 시인이 희망을 창부라고 했던 것일까.
“…… 어묵국물 좀 더 하이소.” 쉰일곱은 어묵건더기와 국물을 큰 국자로 퍼서 세 사람의 그릇에 담았다.
“이래 다 퍼 주면 아자씨는 뭐 먹고 살라고 그라요?” 술기운에 정신이 든 일흔둘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저예, 저는 마 저 바다 파 묵고 산다 아입니꺼. 해수욕 철이 지나 모래사장을 갈쿠리로 뒤집고 물속에 잠수해서 반나절만 뒤비고 다니믄 금반지 하나는 건지거든예. 저 바위 틈새로 지폐도 몇 장 있습니더.” 쉰일곱의 너스레에 일흔둘의 주름진 얼굴에 웃음기가 번졌다. “말 나온 김에 좀 있다가, 비 그치면 제가 배 태워드릴게예. 저기 보이는 형제섬인데, 낚시꾼 하나 델꼬 나와야 하거든예. 가는데 십오 분이면 됩니다. 보통 때 일인당 만원씩 받는데, 비도 오고, 손님도 없고, 제가 오늘 공짜로 모십니더. 오늘 기분이 좋아서 기마이 쓰는 깁니다.” 일흔둘은 잔칫날 떡 받듯이 넙죽 호의를 받아들인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아, 니도 태워 줄게. 아저씬지 총각인지 모르겠지만 옆에 계신 분도 …….” 열일곱은 선뜻 대답하지 않았다. “걱정할 거 없다. 니를 섬에 팔아묵을라는 거 아니니까. 이 바다 위에 섬들은 다 무인도고, 할머니와 함께 갈 거고, 또 니 그렇게 많이 예쁘지는 않다는 거 알고 있제.” 열일곱은 피식 웃음이 새나왔다.
형제섬 기암절벽 위에 우거진 해송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하늘은 시침 뚝 떼고 말끔한 해를 내밀었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로 물색이 깊었다. 섬 어귀에 형제 5호가 출렁이는 물결에 뱃머리를 주억거리며 마흔아홉 살 낚시꾼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조금 일찍 왔으니까, 천천히 챙기소.” 쉰일곱이 소리를 지르자, 바위 위에 늘어놓은 낚시도구를 거두던 낚시꾼은 알았다는 표시로 손을 들어보였다. 뱃전에 선 열일곱은 멀리로, 조금 전까지 서 있었던 해안과 백사장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아저씨. 저 잠깐 내렸다 타면 안돼요?”
“안 되는 기 어딨노. 비가 와서 바위가 미끄러우니까 조심하고.”
쉰일곱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오래 전 혈육 같던 안산 형님이 하던 말이었다. 아우님, 안되는 게 어딨겠나. 우리가 젊었을 때 목숨 걸고 국가를 위해 한 일을 정당하게 인정받아야 하지 않겠나. 계란으로 바위 치기요, 형님. 아우님, 그러니까 우리 목숨 값이 계란 값이 되게 할 순 없지 않겠나. 형님도 참 답답하시오. 이제 와서 무슨 수로 보상을 받는단 말이오. 안산 형님은 죽기 직전까지 동지회에 나오라고 끊임없이 설득했다. 형님이 죽고 얼마 후 영화 한편이 뜨더니 북파공작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갑자기 일이 진척되고 집회가 늘더니 덜컥 일이 성사됐다. 그토록 오랜 세월 배신감에 이를 바득바득 갈고 살았는데, 파도가 굽이치듯 시대가 고개를 넘더니만, 바닷물 뒤집듯 판도가 달라지니……. 세상인심이라는 게, 흐르는 바닷물보다 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바닷물은 마치 배를 붙잡기라도 하려는 듯 검질기게 출렁이며 배의 옆구리를 물고 늘어졌다. 배 안에는 일흔둘이 앉아 있었다. 선체 측면에 때 묻은 구명조끼 대여섯 개가 걸려 있다. 바닥은 오래된 구들장처럼 두둑이 솟아 있고, 그 위에 붉은 담요가 깔려 있다. 일흔 둘은 담요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음전하게 앉아 있었다. 영감이 죽고 난 후 일흔둘은 바깥출입도 하지 않고 집 안에서만 맴돌았다. 하루 종일 낡은 빌라 작은방에 앉아서 째깍째깍,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는 세월의 소리를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가는 소리만 듣고 있으면 젓가락으로 게살을 파먹듯 날카로운 시계소리가 골을 쑤시고 파고들어 수많은 기억의 살을 헤집었다.
퉁퉁 퉁퉁, 요란한 모터소리에 겁 질린 일흔둘은 퍼뜩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낚싯배가 지나가는 소리였다. 빈 배를 몰고 지나가는 뱃사람이 마이크에 대고 쉰일곱에게 무어라 떠들어댔다. 모터소리와 파도소리가 뒤섞여 제대로 들리진 않았지만 무어라 농을 건네는 듯했다.
“거 참, 소문 한번 빠르네. 인자 억쑤로 놀리묵겠구나.” 쉰일곱은 배시시 웃으며 선체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무이 인제 신발 좀 말랐습니꺼.”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잠긴 일흔둘 노파는 답이 없었다.
낚시꾼이 타이어를 밟고 배에 올랐다.
“재미 좀 봤습니까?”
“예, 뭐, 별로…….” 쉰일곱은 이제 얼굴을 익힐 만도 한데, 말이 새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 마흔아홉 살 낚시꾼에게 입질하듯 말을 붙여볼 요량이었다.
“요 통 안에 든 놈들은 관등성명이 우찌 될란가.”
“게르치 몇 마리 구경했지요, 뭐.”
“형씨도 두 달 전에 저기 나무섬에서 낚시꾼 한 명 죽은 거 알지예.”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낚시꾼은 여전히 딱 할 말만 할 뿐이었다.
“죽어도 찾기 쉬운데서 죽어야지. 이런 데서는 시체 찾기도 힘들어요. 그 양반도 이박삼일 만에 우리가 찾았다 아입니까. 해경에서 수색하다가 안 되면 잠수부들을 부르거든예.”
“실족사입니까?” 잠자코 바다만 바라보고 있던 서른다섯이 끼어들었다.
“절벽에서 발을 헛디뎠는지, 자살인지 아무도 모르지요. 파도는 알란지 몰라도.”
“구명복 같은 거 입지 않습니까?”
“해경에서도 그라고, 우리도 낚시하는 사람들한테 그리 노래를 불러도, 지 죽을 날을 모르니까 당최 말을 안 듣는 사람들이 있지예.”
“학생아, 이제 배에 타라.” 쉰일곱이 마이크에 대고 열일곱을 불렀다.
배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 바위 뒤에서 담배를 피우던 열일곱은 치마를 털고 일어섰다. 머리가 핑 돌았다. 이런 몽롱한 느낌이 좋아. 수정이가 알면 또 난리치겠지만. 하긴 나도 중학교 때 친구들이 담배 피우면 키도 안 크고 땀구멍 넓어진다고 말렸으니까. 담배꽁초를 휴지에 싸서 가방에 넣었다. 바위 틈새로 빗물이 고였고, 먹다 버린 쌈장봉지와 일회용커피 봉지, 종이컵과 나무젓가락이 바위 구석에 널브려져 있었다. 빗물에 젖어 거무스레해진 바위 위에 화이트로 쓴 남자와 여자의 이름들과 하트 표시를 보자 열일곱은 한 달 전처럼 헛구역질이 다시 날 것 같았다.
열일곱이 폴짝 뛰어 배에 올랐다. 선실에 있던 쉰일곱이 모두 들으라는 듯 소리를 질렀다. “다들 오셨지예. 출발합니다.” 퉁퉁퉁, 신호와 함께 배는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다. “그런데, 아저씨. 이 섬 이름이 왜 형제섬이에요?”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 섬도 바다와 형제라고 사람들이 그리 부르는 게 아니겄나. 바다에서는 니도 형제고, 나도 형제거든. 우쨌든 매사에 꼬치꼬치 따지고 살아야한다. 잘몬하믄, 산다고 살아도 인생이 헛방이 되는 기라.” 쉰일곱이 뒤를 돌아 서른다섯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총각인지 아저씬지 모르겠지만, 다대포의 ‘다대’가 한자로 어찌 되는지 아는교? 나 같이 무식한 사람도 대번에 알 수 있는 글자데예. ‘많은 다, 클 대’ 얼마나 쉽고 좋습니까. 세상은 참 많고 큽니데이, 이 바다처럼. 나도 사실은 여기 사람 아닌데, 다대포 바다가 좋아서 여기서 못 나가고 산다카이, 하하” 쉰일곱의 말을 듣고만 있던 서른다섯은 가만히 ‘다대’를 중얼거렸다.
“바다 한가운데서 보니까 섬들이 참 멋지네요.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구요.” “학생 니가 뭐 볼 줄 아네.” 쉰일곱은 후후, 마이크에 바람을 넣고 선실 밖에 있는 두 사람도 들으라고 설명을 했다. “저기 좌측으로 보이는 것들을 여기 사람들은 ‘등’이라고 부릅니다. 강물이 흘러내린 퇴적물 때문에 계속 새로운 섬이 생겨나는데, 그 섬들을 ‘등’이라고 하는 거지예.” 고물에 서 있던 서른다섯은 쉰일곱이 말한 ‘등’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들은 섬이라기엔 작아서 울퉁불퉁한 바위가 바다에 박힌 듯했다. 배가 파도에 출렁이자 울퉁불퉁한 등이 살아있는 고래 등처럼 꿈틀대는 듯이 보였다. “참, 저기 우측으로 거북이 등처럼 생긴 몰운대 숲이 보이지예. 거기에 오르면 기암절벽이 끝내줍니다. 선착장에서 오르는 게 제일 가까우니까 시간나면 한번 올라보십시오. 길도 닦아놔서 수월하고, 오르는 데 이삼십 분이면 거뜬할 겁니다.”
열일곱은 가방을 선체 안 담요 위에 던져 놓고 이물로 나갔다. 거친 물살에 배가 위로 솟구쳤다 내려앉는 요동에 깔깔거리며 웃었다. 하얀 물거품이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야, 이 배신자, 나쁜 놈아. 열일곱은 다시 제풀에 깔깔대며 고함을 질러댔다.
퉁, 퉁, 퉁, 일흔둘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퉁퉁 퉁퉁’ 소리와 거센 파도소리에 일흔둘이 무어라 중얼대는 소리는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았다. 화냥질이라니, 천부당만부당 헌 소리요, 니년이 서방 앞세울라고 작정을 했제……. 영감, 이녁도 금방 가지 싶소……. 우리 일에 쓸데없이 간섭하지 말아요……. 찾아오지 마시오. 무소식이 희소식이니께……. 엄니, 어쩔 수가 없어요. 어쩔 수가……. 배는 물살을 가르며 흰 거품을 쏟아냈다.
서른다섯은 해안 끄트머리 솔숲에 올랐다. 소나기가 내린 후라 숲은 짙은 솔 향내를 내뿜었다. 뒤따라오던 일흔둘이 무릎을 두드리며 쉬는 것을 보았으나 어느 사이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날도 저물고 오르다 힘에 부쳐서 내려가셨겠지. 해질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에 다다른 서른다섯은 아래를 굽어보았다. 시야가 훤히 트이면서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보였다. ‘다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바다는 넓고도 깊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다, 바다’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곤 눈을 감고 바다의 소리와 냄새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붉고 동그란 해는 어둠이 내리는 하늘에 붉은 등이 되었다. 넓은 백사장에 소녀밖에 없었다. 열일곱은 축축한 모래밭에 맴을 돌듯이 몸을 한 바퀴 돌려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곤 해 아래 올망졸망한 바위섬과 파도치는 바다를 큼직하게 새겨 넣었다. 여기까진 파도가 밀려오진 않겠지. 눈어림으로 하얀 거품이 밀려오는 파도와 모래밭 사이를 어림해보았다.
기암절벽 위에서 서른다섯은 오랫동안 거친 물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파도는 밀려오고 또 밀려왔다. 당신만 힘든 게 아니야. 나도 힘들어. 이렇게 살 수는 없잖아. 아내의 목소리가 파도소리에 실려 왔다. 파도는 요란하지도 과장되지도 않으나 쉼 없이 물거품을 쏟아냈다. 수 만년의 세월을 끊임없이 이어져온 파도가 절벽에 부딪쳐 하얀 포말로 부서졌다. 오랜 시간 동안 바다의 물결은 한번도 멈추지 않았겠지. 그러면서 바다는 사람들이 뱉어내는 한숨과 눈물을 말없이 바라보았을 것이다. 모래알과 같은 무수한 사람들이 겪은 고통의 자리를 나 역시 거쳐 가고 있는 것일까, 거친 파도가 지나가듯이.
바람이 포장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며 쉰일곱 살 사내와 마흔아홉 살 낚시꾼은 얼큰하게 취해갔다. 작년 여름에 이곳도 태풍 피해가 많았지요. 마흔아홉이 쉰일곱의 잔에 소주를 부으며 물었다. 많다 뿐이겠소. 이 동네 횟집들은 그날 모두 한마디로 뻘밭이 됐다 아입니까. 깨진 유리조각들이 비바람에 미친 듯 날아다니고, 음식점에 있는 대형냉장고가 둥둥 떠내려갔으니, 태풍도 대형이었지예. 그래도 내가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는 냉장고를 용케 붙잡았잖소. 덕분에 팔자에 없던 마누라도 하나 건지고. 쉰일곱이 새로 병을 따서 마흔아홉의 잔에 부어주었다. 형씨가 하도 말이 없어서 말 붙이기가 어렵더만, 술 한 잔 걸치니 말씀도 곧잘 하시네. 내가 여기로 낚시하러 온 지 석 달 되지요. 한동안 입에 지퍼 달고 지냈는데, 오늘은 어째 입이 풀렸습니다. 본래 말수가 적은 사람이라기보다 사연이 있어서 입을 닫고 있는 사람 같기는 합디다. 역시 세상 풍파 많이 겪어서 보는 눈이 남다릅니다. 잘 아시겠지만, 말을 많이 하는 건 허무해서 그런 거잖아요. 우습게도 많은 말을 내뱉으면 또 허무를 쌓는 일이 되고. 안 그렇습니까. 마흔아홉은 온기를 채우려고 성급히 마신 소주 몇 잔에 취해 있었다. 그렇지예. 그게 피하려고 해도 살다보면 어쩔 수 없이 되풀이하게 되고. 그런데, 사람은 죽여봤소. 아따, 이제 그 얘긴 그만 합시다. 연탄불에 얼른 조개 몇 마리 구워 줄 테니 입이 심심하믄 노래나 한 자락 해보소. 까짓것 그럽시다. 쉰일곱은 마흔아홉의 잔에 다시 소주를 채웠다.
쉰일곱은 포장을 들치고 나와 연탄불에 철판을 올리고 그 위에 백합조개와 키조개를 얹었다. 불그레한 하늘에 철새들이 떼를 지어 창공을 날고 있었다. 붉은어깨도요의 무리였다.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술기운에 젖은 마흔아홉이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무이, 죄송합니다. 이제사 손주 보게 해드려서. 정식으로 식은 못 올렸어도 서로 물 한잔 떠 놓고 절도 했고, 내를 마음잡게 했으니 됐다 아입니꺼. 어무이같이 늙은 바다도 있고. 저는 이 바다를 어무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다대포 바다가 저를 안아줬으니까요. 조개가 익으면서 입이 벌어지고 짠물이 흘러나와 연탄을 적셨다. 매운 연기가 코를 찔렀다. 아아, 아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포장 안의 마흔아홉이 부러 큰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뭐 합니까. 술잔도 비었는데, 조개 잡으러 갔는가. 성질이 급해서 고기를 우째 잡는지 모르겄네. 마흔아홉의 성화에 쉰일곱은 괜히 퉁을 놓았다. 구운 조개를 접시에 담고 코를 한번 훌쩍이고는 내년 여름에 아기 아빠가 될 쉰일곱이 포장을 들치고 들어갔다.
하늘엔 낮은 구름떼가 느리게, 보일 듯 말 듯 이동하고 있었다. 열일곱은 젖빛 구름 덩어리가 몽글몽글 뭉쳤다 풀어지는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구불구불한 고수머리의 아기가 팔을 펴고 물속을 유영하듯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열일곱의 뱃속에 있던 아기가 어느 순간 열일곱에게 싱긋 웃어보였다. 눈가가 붉어진 열일곱은 휴대폰 액정에 커다란 글씨를 썼다. ‘미안해.. 사랑해.. 그리고 잊지 않을게.’ 어둠속에 글씨들이 형광빛으로 빛났다. 소녀는 액정의 글씨를 구름을 향해 들어올렸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낮게 중얼거렸다. 소녀의 눈가에 참았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아저씨에게 불꽃을 사야겠어. 천 원짜리 꽃불을 하늘에 쏘아올리는 거야. 눈물을 쏘아올려서 만유인력을 엿 먹이는 거지. 상기된 얼굴엔 장난기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열일곱 살 소녀가 어둠에 거뭇해진 모래밭을 달음박질쳤다.
축축한 모래 사이로 등딱지가 손톱만한 엽낭게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엽낭게는 구멍 둘레에 모아놓은 모래알갱이를 빨아먹고 이내 부지런히 발을 놀려 다른 구멍 속으로 들어갔다. 제 집을 지키던 집주인이 침입자를 밀어냈다. 두 놈은 구멍 앞에서 집게발을 들어올려 싸움을 시작했다. 한 놈이 갑자기 싸움을 멈추고 제 구멍 속으로 후다닥 들어가버렸다. 백사장을 달려오는 열일곱 살 소녀의 발소리에 놀란 엽낭게는 얼결에 검은 고무장화 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밤이 찾아온 바다에 파도가 거세게 출렁거렸다. 바닷가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파도는 열일곱이 모래밭에 새겨놓은 바위섬을 핥고 해를 삼켰다. 나무꼬챙이로 파 놓은 물결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검은 물결이 출렁이는 바다에 일흔둘의 모래색 효자 신발 한 짝이 뒤집힐 듯 위태롭게 넘실거렸다. 일흔둘을 등에 업은 서른다섯이 드넓은 백사장을 건너갔다. 해안가의 짙푸른 솔숲은 깊은 잠에 빠진 바다거북 마냥 미동도 하지 않았다. 바다 한가운데 울퉁불퉁한 바위섬들도 밤을 맞아들이고 있었다.
■가작
낙동강, 대지의 어머니 / 박하성
우렁우렁 흐르던 강이 도도해진다. 백두대간 모데미풀*을 적시고 오는 빗물이다. 청정 1급수에서 서식하는 참몰개가 햇살, 달빛을 어지럽게 풀며 놀던 물이다. 그 강물이 이번엔 다른 발원지, 바다를 향해 허위허위 달려오는 것이다. 천삼백 리 길을 오체투지로 흘러온다. 신神들의 문양紋樣인 땅의 지문指紋을 읽으면서 오로지 낮은 곳으로 임한다. 낮아질수록 웅숭깊어지고 사랑이 점점 늘어가는 넉넉한 강이다. 강을 품고 채워주는 산도 때론 강을 닮고 싶어 산그림자로 고즈넉이 눕는다. 강도 산을 닮고 싶을 때가 있어 하늘의 별이란 별은 모두 제 안에 담는다. 별을 담은 강물은 을숙도, 맹금머리등, 도요등의 환영을 받으며 가뭇없이 남해로 흘러든다.
수천, 수만 년을 그렇게 흘러오면서 사연도 우여곡절도 많았으리라. 강물이 크게 불어나 새 물길을 내기도 하고, 전쟁의 참화에 휩쓸려 새빨간 죽음의 피로 물든 적도 있었다. 때로는 난폭한 빗물에 떠밀려 큰 재앙을 초래했다. 생명을 잉태하고 키우기도 하지만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강의 속성이니 탓할 것은 아니다. 다만, 땅의 모든 자식들에게 젖을 물리리라, 강은 그 초심만은 잃지 않으려 한결같이 낮은 곳으로 향한다.
땅의 젖줄이 되는 강을 보면 어머니 생각이 난다. 난 일곱 살까지도 어머니 젖을 더듬었다. 위로 세 누님을 둔 귀한 이대독자여서 그랬을까. 어머니는 싫은 티를 안내셨다. 숱한 고생을 하시면서도 남에게는 추호라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하셨던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내 곁에 안 계신다. 체구는 무척 왜소했지만 낙동강보다 더 너른 품으로 나를 안아주셨던 어머니가 사무치게 그립다. 살아계실 때 조금이라도 잘해 드리지 못한 것, 말이나 행동으로 마음을 아프시게 한 것이 두고두고 후회스러워 어머니 생각만 하면 금세 눈물이 난다.
우리 집은 시골의 조그만 초가였다. 상수도는커녕 간이상수도도 없었을 때였다. 수백 미터 떨어진 동네우물에서 물동이로 식수를 길어오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다. 식수를 아끼려고 빨래는 자기 집과 가까운 개울가에서 했다. 손발도 대개 개울에서 씻었다. 그런데 우물 주변이 거의 분뇨거름을 주는 밭이었다. 더구나 우물 위치가 개울 하류 근처여서 가끔 우물물에서 비누 냄새나 이상한 냄새가 나기도 했는데 아직도 그때의 느낌이 살아있는 듯하다. 가끔 낙동강 취수원 수질이 어떻다거나 하는 뉴스를 접하면 그 우물물이 생각난다.
강은 생명의 젖줄이다. 지상뿐 아니라 제 안에 품고 있는 모든 생명, 바다의 환경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녹조라떼라는 신조어가 어학사전에까지 등재되었다. 4대강 사업으로 수질이 더 악화되었다고 목소리들을 높인다. 낙동강 하류의 고기 씨가 말라 어획량이 급감했다고 하소연이다. 물을 가두고 유속을 느리게 하는 보洑가 문제이니 해체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도 있다. 물론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만만하지 않다. 4대강 사업으로 홍수를 예방하게 되었고, 녹조 발생은 보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낙동강 유역, 특히 하구에 얼마나 많은 생명체가 이 강물을 의지하고 사는가. 부디 정확한 원인을 진단하고 분석하여 최적의 대책이 시행되기를 바란다.
눈을 감고 상상해본다. 그 옛날 황포돛배가 내륙에서 필요한 소금 같은 상품을 싣고 낙동강을 거슬러 오른다. 바람에 펄럭이는 돛과 삐걱삐걱 노 젖는 소리, 물살을 가르는 소리, 물새들의 울음소리가 어우러진다. 안동을 거쳐 상주에 도착할 때까지 강물은 제 깊은 속을 기꺼이 내어주며 자신의 나아감에 대한 거스름을 순순히 허용한다. 바다처럼 까탈스럽거나 광기나 변덕을 부리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뱃전을 쓰다듬어주며 아래로 몸을 낮춘다. 몇 천 년을 이어온 거룩한 수행정진의 모습이다.
낙동강 하구는 새들의 낙원이다. 을숙도와 그 주변 섬, 모래톱은 낙동강의 보물섬이다. 철새들은 먼 이국땅에서 수천 km를 날아와서 이 낙원 별장에서 월동하거나 번식을 하며 삶을 즐긴다. 이미 이곳에 뿌리를 박고 있는 텃새들은 그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공생한다. 새들에겐 국경도 이념도 신분도 그 어떤 차별도 없다. 먹이사슬의 하위에 있는 조류를 먹이로 삼는 맹금류가 삶을 위협하지만 그것은 필연적인 자연의 이치다. 일부 철새는 아예 철새이기를 포기하고 텃새로 눌러 앉는다. 이 경우 텃새와의 먹이다툼 문제가 생기겠지만 그것 또한 자연의 섭리다. 서로 크게 다투지 않고도 넉넉한 섭생을 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었으리라.
날이 갈수록 세태가 각박해진다. 부조화와 갈등이 흔하게 발생하고 배려하고 존중하는 모습도 줄어든다. 아파트로 대표되는 공동주택이라는 주거 문화 확산에 따라 실제로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이웃’임에도 이웃사촌이라는 말은 옛말이 되어 버렸다. 부부, 부모 자식, 형제 같은 가족 구성원의 해체도 급증하고 있다. 남녀나 세대, 계층 간의 갈등도 심각한 문제다. 다문화 가정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편견과 거부감도 증폭되고 있다. 사소한 사안에 쉽게 분노하고 과잉 반응하는 행동 장애도 자주 일어난다. 대부분의 현상이 물질만능주의 풍조에 따른 인성의 변질과 정서 결핍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늘 겸손하고 속 깊은 정을 베푸는 강물을 닮을 일이다. 풍요로운 낙원에서 평화롭게 어울려 살아가는 새들을 본받을 일이다. 강이 물고기나 배의 거스름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강이 아닐 것이고, 새들이 찾아오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지 않는다면 낙동강 하구는 낙원이 아닐 것이다.
낙동강 발원지는 강원도 태백시 황지다. 약 5억 년 전 고생대에 태백 지역은 삼엽충이 가득한 얕은 바다였다. 오랜 기간에 걸친 지각운동으로 인한 융기 현상 결과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한때 바다였던 태백에서 발원한 빗물이 낙동강을 이루어 술렁술렁 바다로 흘러들고, 그 바닷물이 수증기로 증발한 뒤 다시 태백에 비로 내려 발원한다. 당초의 성질뿐 아니라 장소까지도 일치하는 놀라운 자연의 순환 과정이다. 신들이 부호로 새겨놓은 땅의 지문을 읽었음이 틀림없다.
하늘의 도리는 땅을 살리는 것이다. 땅의 도리는 사람을 살리는 것이며, 사람의 도리는 이 셋을 다 살리는 것이다. 바다는 생명의 양수가 가득한 자궁이다. 바다에 이른 낙동강 물은 양수가 되어 생명을 기르는데 일조한다. 이윽고 바다는 땅의 젖이 될 비를 수증기로 낳아 향을 피우듯 하늘로 올려 보낸다. 낙동강 발원지 황지는 모데미풀을 적시고 오는 그 빗물을 고이 받아 을숙도로 맹금머리등으로 흘려보낸다.
그렇게 강물은 대지의 어머니로 다시 오신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애롭고 넉넉한 젖줄로 너울너울 흐르며 생명을 키우고 또 끊임없이 나를 것이다.
*모데미풀:국립공원 깃대종으로 국외반출 승인대상인 우리나라 고유종 보호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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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12.10 09:25
저도....소설을 투고했습니다만....아직 우수상은 안 읽어봤으나...대상작을 보니...제가 떨어짐이 충분히 납득이 갑니다. 아니, 당연히 떨어짐이 마땅했네요. 좋은 작품을 볼 수 있어 너무 행복했습니다. 다만, 린포체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역시 좋은 글들이군요!! 여러 작품을 읽고나니 각각 댓글 쓰기가 잘 안 되는 점이 아쉬워요!! 늦었지만 축하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