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여행과 시집 『낯선 여행지의 몸무게』
‘책’과 ‘여행’
내가 살아오며 가장 관심을 두었던 것이다. 꽃잎처럼 떨어진 시간을 훑어보았을 때 ‘책’과 ‘여행’은 내가 꿈꾸고 바라던 문학의 폭과 깊이를 유별나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책’은 구입하든, 빌리든, 선물 받든 내 생활에서 밀접하고 소중했다. 어디를 가더라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습성은 스무 살 무렵 시작되어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는 오늘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책은 생각을 새롭게 하고, 시간을 보내는데 가장 좋은 도구며 친구란 생각에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도, 친구들도 이젠 책을 그만 사라고 지청구다. 다 읽지도 못하는 책을 구입해서 무엇에 쓰려고 하느냐고 말이다. 어떤 친구는 책살 돈으로 술이나 마시잖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친구의 말도 옳은 것 같기도 할 때가 있다. 갖고 있는 책도 제대로 못 읽으면서 때론 희귀본이라고 거금을 들여가면서 책을 구입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도 그 습성은 이어졌다. 여행지에서 책방이 눈에 띄면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직장 동료, 친인척 애경사가 먼 곳에 있을 때 가서도 서점이 보이면 짬을 내어 들어가 기념품 구입하듯 책을 샀다. 그 자체가 나에게는 기쁨이었다. 산 책 제목을 보면서 저자는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지었을까? 그렇게 들여온 책을 모아 서고(書庫)도 꾸몄다. 이름도 ‘시월서고(詩月書庫)’라고 지었다. 서고 책꽂이를 둘러보다 저 책은 광주에 갔을 때 구입한 것이고, 저것은 인천 배다리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당시를 상상할 때가 있다. 몇 년 전 한길사 김언호 사장의 『세계서점기행』이란 책을 구입해서 읽었다. 출판사를 경영하면서 세계 곳곳의 유명 서점을 찾아 그 서점의 경영자를 만나고, 운영 실태 등을 사진과 글로 역은 책이었다. 책을 넘기고 읽으며 나도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출판인과 다른 교사의 길을 걸은 사람으로 지금까지 서점을 기웃거렸던 경험도 만만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소장한 책의 권수가 장난이 아니다. 몇 만권이나 되는 책을 옮기고 정리하고, 아마 그 일은 내가 생을 마칠 때까지 이어질 것 같다. 소장한 책뿐만 아니라 직장 생활할 때 살던 포항에서 마지막 남아있던 헌책방까지 인수했었다. 사라져가는 헌책방이 아쉬워 내가 은퇴할 때까지 간판을 붙들고 있겠다는 맘에서다. 헌책방을 운영하지 않지만 포항에는 2022년 현재까지 ‘만물헌책백화점’이란 간판이 있다.
되돌아보면 고집스럽게 나의 길, 내 삶의 방식으로 살아온 느낌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가야할 길, 내가 좋은 문학인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방식의 생활도 나쁘지는 않은 것 같기 때문이었다. 유명인을 꿈꾸지 않으면서 내가 사는 지역의 작은 문인으로 존재하면 된다는 소신이었다. 어쩌면 그 자체가 좋은 문학인이 되는 최상의 길이란 생각도 했다. 거기에 체험의 중요성도 놓치지 않았기에 여행도 으레 곁에 두었는지 모른다. 특히 직장 생활할 때 내가 갈 수 있는 곳 중에서 가장 먼 곳에 가(체험하)고 그것을 작품으로 만들고 싶었다. 은퇴 후보다 직장 생활할 때가 보다 건강할 것이고, 다달이 들어오는 수입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퇴를 앞두고 실행에 옮길 방법을 찾았다. 한 달이란 방학기간을 잘 활용하면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2020년 8월이 정년이었다. 2019년 1월 남미, 2020년 1월 아프리카, 2021년 1월 중미 여행이란 3개년 계획을 짰다. 2019년 남미여행과 2020년 아프리카여행은 실행에 옮겼지만 중앙아메리카는 갈 수 없었다. 이유는 코로나 전염병 때문이었다. 예전처럼 여행이 자유로워진다면 멕시코에서 프리다 칼로(Frida Kahlo)의 그림을 보고, 쿠바에서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썼던 아바나 바닷가를 걷고 싶다.
길든 짧든 살아오면서 많은 여행은 아닌 게 아니라 나의 시야를 넓혔다. 여행지에서 만난 박물관, 미술관, 카페, 사람 등은 내가 책에서 읽었던 것들을 직접 눈으로 보는 기쁨과 즐거움을 주었다. 그런 여행 중에도 2019년 1월 남미 여행은 어떤 여행보다 나를 들뜨게 했다. 여행 코스 중 아르헨티나 우수아이아가 있었다. 지도를 펼쳐놓고 보며 그곳은 내가 살면서 가는 가장 먼 여행지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 여행 일정 안에 있는 여행지와 관련된 예술작품을 찾고 감상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체게바라(혁명가), 네루다, 보르헤스 등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작가들의 남미 관련 작품도 찾아서 읽었다. 칠레 산티아고 코스에서는 네루다 생가를 꼭 방문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런지 여행을 준비하며 잠이 부족해도 피곤하지 않았으며 일거리가 쌓여도 즐거웠다. 그것과 함께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있는 ‘엘 아테네오(El Ateneo Grand Splendid)’ 서점도 매력적인 곳으로 꼭 방문하고 싶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여행 내내 내 앞으로 시가 찾아왔다. 그것은 축복이었다. 피곤에 지쳐도 충만한 시심(詩心)은 여행의 거미줄에 걸린 언어를 포집하는 황홀이 따랐다. 페루, 볼리비아, 칠레, 아르헨티나, 브라질 5개국 29일간 내내 낯선 지명이 주는 새로운 생각은 한 줄 한 줄 문장으로 이어졌다. 가는 곳마다 성당도 있었다. 페루 리마 대성당, 쿠스크 산토 도밍고 대성당, 볼리비아 라파즈 성프란치스코대성당, 칠레 산티아고 대성당,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성당, 브라질 리우 대성당. 성당은 남미 여행지에서 도시 중심 광장과 붙어 있는 관광지로 빠뜨릴 수 없는 곳이다. 가톨릭 신자로서 성당을 찾을 때마다 나는 성호를 긋고 내게 찾아온 시에 감사기도를 드렸다.
『낯선 여행지의 몸무게』(푸른사상, 2020)은 그렇게 하여 탄생했다. 쓴 글에 이따금 사진을 덧붙였다. 기행 글은 글보다 사진이 먼저랄 수 있다. 일반 독자는 시보다 사진이 먼저다. 사진을 보면서 읽고 싶은 부분만 읽는 사람도 있고, 시를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는 사진 자체가 시 감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책을 발간하며 남미로 떠나는 사람이 시집 한 권 겨드랑이에 끼고 가면서 여행지에서 읽어보고 사색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했다. 그런데 코로나는 여행을 금지시켰다. 사진이 중간 중간 들어간 시집은 지금 내가 넘겨보아도 남미 여행의 핵심적인 곳이라 마치 보았던 영화를 회상하는 것처럼 아련한 아름다움을 끌고 온다.
남미는 넓은 땅이다. 수박겉핥기로 대표적 관광지만 찾는다고 하더라도 몇날 며칠 아니 몇 주가 걸린다. 찾은 곳곳이 역사적 명승지며 수려한 경관이 배턴을 주고받듯 이어진다. 감탄사를 뱉으며 수도 없이 찍은 사진 중에서 표지는 머추픽추, 이과수 폭포도 아니고,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Salar de Uyuni)에서 찍은 사진을 사용했다. 소금 사막의 환상적인 분위기가 영혼을 빼앗아갈 정도로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해발 고도 3,600미터 소금 사막 저 끝으로 물과 땅과 하늘의 합일로 만들어내는 지평선은 몽환의 세계를 넘어 이곳이 천국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자연이 주는 최상의 선물에 눈물이 빠질 정도로 감동을 받은 곳이기 때문이다.
여행 중 칠레 산티아고에서였다. 일행 18명 중 네루다 생가를 찾은 사람은 나 혼자였다. 긴 여정으로 피곤하기도 했지만 일행들은 네루다를 모르고 있었고, 네루다보다는 맛집에 관심이 많았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학인이 아닌 일반인에게는 네루다라는 시인은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혼자 생가를 찾았을 때의 기쁨은 20세기에 살던 파블로 네루다라는 시인의 초청장을 받고, 21세기에 방문한 느낌이었다. 머무는 시간은 네루다와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산티아고 네루다 생가는 칠레 수도 산티아고를 한 눈에 내려보면서 안데스 산맥을 동편으로 볼 수 있는 산크리스토발 공원 밑에 있기에 찾는 데는 어렵지 않았다.
여행 중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엘 아테네오’ 서점도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빠뜨릴 수 없는 곳이었다. 오페라 극장을 서점으로 개조한 곳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랭킹에 드는 곳이다. 타원형 형태의 서점 자체가 관광지로 세상의 모든 책이 있을 것 같은 곳이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묵는 동안 나는 연거푸 이틀이나 그곳에 가서 휴식을 취하듯 책 사이에 끼어있었다. 그리고 읽을 수 없는 스페인어 시집도 두 권 구입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곳곳 서점이 많은 도시다. 골목골목에 서점이 눈의 띈다. 어느 헌책방에서는 네루다의 스페인어 시집도 구입했다.
흔한 말로 ‘여행은 다리 떨릴 때가 아니라 마음 떨릴 때 가는 것’이라고 한다. 코로나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행을 잃었다. 코로나란 유행병으로 두려움이 앞서는 시간을 보내다 보니 마음도 다리도 굳어진 세상이 되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현상은 분명 후일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카뮈의 ‘페스트’를 비롯하여 전쟁을 겪은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과’를, 헤밍웨이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란 명작을 썼듯이 21세기 전반기 전 세계의 총체적 난국은 예술가들에게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게 하는, 창조주의 인간 질서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명작으로 재탄생할 것이다.
내가 남미여행이란 경험을 통해 시집 『낯선 여행지의 몸무게』를 발간한 것도 경험에 의해서다. 경험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것은 또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입구가 된다. 코비드 팬데믹의 긴 터널 안에서 나는 과거의 여행을 되새기며 새로운 여행을 꿈꾸고 있다. 그 여행은 내 문학의 영토를 확장하는 일이며, 내가 ‘책’과 ‘여행’을 사랑한 과거의 습성을 미래로 잇는 일이기에 나의 생존을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 2022년 7월 19일(화) 카페 ‘시월(詩月)’에서
첫댓글 하선생님은
내가 아는 남자 중에 제일 멋진 삶을 사시는 분이지요.
시와 책에 대한 사랑이 세계를 누비며 족적을 남기고
두 개의 창고를 채울만큼 많은 책들을 소장하셨으니 얼마나 행복하시겠어요.
시집 '낯선 여행지의 몸무게'를 읽을 때보다 더 진한 감동이 밴 글 읽고
너무도 부럽습니다.
멋진 삶을 살 수 있도록 내조하며 남편에게 무한한 자유를 준 훌륭한 아내에게도 존경을 표합니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다 덕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은 내일보다 오늘이란 것을 나이들수록 발견합니다.
코로나가 재유행할 것 같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좋은 작품 많이 쓰실 것으로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