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문절공은 영남 사림의 선구였다
1) 문절공의 시호
문절공(文節公)은 시호(諡號)이다. 시호를 아호(雅號)처럼 부른다. 매우 드문 현상이다.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외에 많지 않다. 일반사람은 모른다. ‘퇴계’는 만인이 알지만, 시호 ‘문순(文純}’은 만인이 모른다. 시호를 통용 이름으로 쓰지 않음이
사회적 관습이다. 그런데 왜 문절공은 그 아호 무송헌(撫松軒)을 쓰지 않고 ‘문절공’이라 통칭했을까? 『무송헌문집』년보(年譜)에 문절공의 시호가 내려진 기록은 이러하다.
“1464년 여름 중추원사(中樞院使)에 제수 되고, 7월 9일에 졸하니 향년 49세였다. 부음(訃音)이 들리자 주상(세조)께서 매우 슬퍼하시고, 조시(朝市)를 2일 동안 정지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고 부의(賻儀)를 더욱 후하게 하였으며, 아울러 ‘문절공’이라 시호를 내리셨다. 그 내용은 勤學好文曰 文, 好廉自克曰 節 이라 했다. 9월에 영주군 북쪽 빈동산에 매장했다. ”
위 연보로 보면, 문절공의 시호는 장례 가운데 내려졌다. 이런 ‘당년(當年) 시호’는 매우 의례적 결정이다. 시호는 여러 절차를 거쳐 결정되므로 빨라도 2년여의 시간이 소요된다. 가장(家狀)-행장(行狀)-시장(諡狀)으로 이어지는 글을 거쳐 봉상시(奉常寺)의 조사와 검토를 하는 최소한의 시간이 그렇다. 당년 시호는 이런 절차가 생략된 것으로, 왕명으로 바로 내려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문절공 시호가 초상(初喪) 중에 내려왔으니 아주 의례적이다. 퇴계의 ‘문순(文純)’ 시호를 보더라도 그렇다. 퇴계 죽음이 1570년 12월 8일인데, 시호는 1576년 11월 10일에 내려졌다. 6년이 걸렸다. 율곡 이이 죽음이 1584년인데 시호는 1624년에 내려졌다. 30년이 걸렸다. 빨랐다고 하는 농암 이현보의 시호가 2년이 걸렸다. 농암은 1555년 몰했는데 시호는 1557년 내려왔다.
참고로 조선전기 시호는 다음과 같은 절차에 의해 결정되었다. 우선 인물이 죽으면 후손들이 가장(家狀)을 짓는다. 가장은 가족차원에서 기록하는 고인의 일대기이다. 자료수집이다. 가장이 지어지면 이를 기초로 당대의 인물에게 요청하여 행장(行狀)을 받는다. 한 인물의 공적 일대기이다. 이를 예조에 제출한다. 예조에서는 검토한 뒤 봉상시에 보낸다. 여기서 합당한 시호를 평론해서 세 가지를 정하고, 그 이유를 글로 지어 홍문관에 보낸다. 이때 글이 시장(諡狀)이다. 국가공적 조서이다. 홍문관에서는 응교(應敎 )이하 3인이 삼망(三望)을 의논한 뒤, 여러 관원과 다시 의정한다. 의정부에서 이를 시장과 함께 이조에 넘긴다. 이조에서는 시호망단자(諡號望單子)를 작성해 국왕에게 올려 최종 낙점을 받는다. 확정된 시호는 교지가 내려지고, 이를 받는 집에는 교지를 받아들이는 행사 연시(延諡)를 거치면 모든 절차가 끝난다.
이처럼 시호 결정은 어려운 것이었고, 그에 따라 ‘악시(惡諡)’까지 내렸으므로 매우 엄격했다. 그렇지만 문절공의 시호 내림은 전례가 없었다. 1464년 영남북부 최초이며, 49세 젊은 나이의‘상중 시호’였으니, 문절공의 호칭은 그때의 영예가 그대로 굳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1558년 영주군수 안상(安瑺)이 학사를 건립하고 퇴계에게 향사할 인물을 의논하니, 퇴계 말씀이 “본 군에는 문절공이 있지 않은가”했다. 아마 문절공은 이때부터 문절공이었고, 다른 호칭은 존재하지 않은 것 같다.
호가 없다 . 왕조실록에 없다.
5대손 형조정랑 김우익이 지은 가장, 협천군수 권용(權鎔)이 지은 행장, 여헌 장현광(張顯光)이 지은 신도비명 역시 그렇다. 1644년 최초 발간된 문집 역시 『문절공일고文節公逸稿』로 되어 있다. 1707년 중간발문을 쓴 외손 영춘현감 권두인(權斗寅), 후손 강원도도사 김만주(金萬柱)의 글에도 없다. 1760년 발간된 선성김씨 족보(族譜)에도 없다. 1798년 저술된 『영남인물고』에도 없다. 모두 자(字 )거원(巨源)만 있다. 이를 보면 적어도 몰후 300여년까지 호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다만 1937년 발간한 『무송헌선생문집』연보 1840년(헌종6년) 조에 “무송헌 현판을 동루에 걸었는데, 이는 선생의 호이기 때문”이라 했다. 문집도『문절공일고』에서『무송헌선생문집』으로 되었다. 언제 어떤 연유로 지었는지 좀 더 상고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이번 행사도 모두 '무송헌 김담'으로 했다. 조심스럽지만 이번 기회에 문절공의 호에 대해서는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과거 선현들이 문절공으로 호칭 했듯이, ‘문절공이라는 호칭’은 독특하고 자연스러우며 한편으로는 거룩하다는 상념마저 일으키게 한다, 그 어느 선현도 흔한 사용이 아니었기에 문절공이란 호칭은 더욱 그러하다.
참고로 49세에 죽은 율곡 이이가 생전에 ‘율곡(栗谷)’이란 호가 지어지지 않았음과 같은 맥락이다. 율곡 행장은 김장생이 지었는데 역시 자(字 )숙헌(叔獻)만 있다. 율곡의 호는 사임당과 더불어 죽은 후 그 제자들이 지어 올린 이름이다. ‘율곡’, ‘사임당’ 이란 호는 노론 학맥의 인물들이 집단적으로 호칭함으로 인해 후대에 굳어진 이름이다.
2) 문절공의 환력
1435년 20세, 형 김증(金潧) 23세에 동방급제 했다. 예안김씨 최초 였다. 20세 급제는 조선 500년 거의 없다. 과거 평균 연령은 36세이고, 최소는 고종 때 신동 이건창(李建昌)이 15세 입격했다. 영남에는 1809년(순조9년) 응와 이원조가 18세에 합격했다. 20세 합격은 정말 어렵다. 나이도 그렇지만, 1435년은 영남 전체에서도 앞서는 것이었다. 영주에서는 외삼촌 황유정의 아들 황현이 1393년(태조2년) 최초 합격했고, 1420년 안숭선, 1432년 송인창이 있었다. 순흥에는 1405년 권희 한 명이 있을 정도였다. 영주에서 43년 동안 단 5명이 합격했다. 그 다섯 명 가운데 두 명이 문절공 형제이고, 다른 한명은 외4촌이었다. 한 고을 10년에 한 명 정도니 기적의 합격이라 할 수 있다.
1392년 조선개국 이후 1435년 까지 매3년마다 33명을 뽑는 정시와 부정기 별시를 통하여 이때까지 611명이 배출되었지만, 영남 북부 즉, 안동, 상주, 예안, 영주, 순흥, 문경, 예천, 봉화 등의 전체 문과급제는 21명에 불과했다. 문과급제 조사는 조사마다 조금 다르지만, 영남 지방의 급제자가 매우 적은 것은 분명하다. 그 가운데 영주의 황현은 대사성, 예천의 윤상이 예문관제학, 실세인 이조판서는 문절공이 처음이다. 형제급제 또한 안동의 배상지(裵尙志)의 아들뿐이었다. 집현전의 천문학 연구도 전후무후한 일이다. 영남북부 최초 시호이며, 절차를 거치지 않은 상중시호도 그러하다. 49세 나이에 문절공은 인생을 마감 했다. 모든 이력이 극적이고 선구적이었다. 이런 이력은 영주 일대의 세력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대감들이 연이어 태어난 집에서 생장했으니, 권력이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들 세력권에 들어온 예안김씨가 빠르게 뿌리를 내렸고, 문절공은 주춧돌을 놓았다. 그 주춧돌을 보다 크고 넓고 견고한 것이었다.
문절공의 환력이 ‘찬란하고 극적’이라 했다. 그 상징적 사건이 안견(安堅)의 ‘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에 당대 인물들과 나란히 하고 찬시를 쓴 장면이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꿈속에서 박팽년등과 함께 노닐었던 도원(桃源)의 풍광을 안견에게 그리게 하였는데, 안견이 3일 만에 완성하였다는 그 유명한 그림이다. 안평대군의 직접 발문을 쓰고,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23명의 문사들이 각각 자필로 찬시(讚詩)했다. 이때 함께 자필한 인물은 신숙주(申叔舟), 이개(李塏), 하연 (河演), 송처관(宋處寬), 고득종(高得宗),·강석덕(姜碩德), 정인지(鄭麟趾), 박연(朴堧),·김종서(金宗瑞), 이적(李迹),·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윤자운(尹子雲), 이예(李芮), 이현로(李賢老), 서거정(徐居正), 성삼문(成三問), 김수온(金守溫)·, 만우卍雨·, 최수(崔脩) 등이었다. 이 한 폭의 그림은 문절공의 위상을 상징하고 있고, 그때 지은 시는 학문과 인품의 깊이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시어(詩語)는 옥과 같고 시상(詩想)은 그림 같다. 시 전편은 이러하다.
푸른 옥 숲 사이 백옥 물 흐르고 碧玉叢間白玉流
꽃빛 길게 띄어 물빛에 떠 있네 花光長帶水光浮
맑은 하늘, 바람 이슬 인간세상이 아니며 淸冥風露非人世
뼛속 시원하고 정신 향기로와 꿈속에 노니는 듯 骨冷魂香夢裏遊
한 조각 도원을 한 폭 그림에 담았으니 一片桃源一幅圖
산 중 선경 비단 치수錙銖 같이 사뿐하네 山中綃上較錙銖
묻노니, 무릉에서 길 잃은 사람에게 試問武陵迷路者
눈 앞 풍경이 마치 꿈 속 같지 않는가 하고 眼中還似夢中無
빗장 걸고 속인 내왕 막았더니 關鏁曾慊俗子來
어부 한사람 들어오나 골짜기 사람들 의아하고 漁人一入洞人疑
선비 한 사람 찾아와 밤새도록 말을 하나 高人一夜搜來盡
골짜기 사람들 아는 둥 모르는 둥 爲報洞人知未知
비해당 속 매죽헌 匪懈堂中梅竹軒
매화 향기, 대나무 절개 이루 말로 할 수 없고 梅香竹節不堪言
대 보고 매화 보니 여기가 바로 선경인데 觀竹觀梅僊境是
골짜기 안에서 어느 세월 도원을 찾아 갈까 洞中何暇訪桃源
물외 선경에 신선처럼 황홀하고 物外尋幽怳若神
정령 꿈도 아니고 현실도 아닐진져 定知非夢亦非眞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설명한 들 누가 알까 說與癡人誰得識
그림 바라보며 다시 의관 바로잡네 對圖時復整烏巾
문절공은 1416년(태종 16) 영주에서 아버지 김소량과 어머니 평해황씨 사이 3남1녀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다. 외조부 판서 황유정은 정도전이 처남이고, 안축(安軸)은 외조부였다. 안축은 관동별곡, 죽계별곡을 지어 더욱 유명하다. 소수서원에 배향된 안향과 삼종(三從) 사이였던 순흥안씨들은 영주 일대의 최고 명문이었다. 그 판서가 딸의 집에 와서 외손자를 찬양한 시가 기적같이 남아 있는데, 어린 문절공을 ‘장미꽃 한 떨기’라 했다. ‘일람첩기(一覽輒記)’라고 했으니, 그 만큼 총명했던 모양이다. 시는 이러하다.
지팡이 짚고 사립문을 나서니 偶携藜丈出柴扉
4월 청화한 날씨에 제비들 날고 四月淸和燕燕飛
흥에 겨워 사위집을 찾았더니 乘興往尋金氏子
장미 꽃 한 떨기 울타리에 피어있네 薔薇一朶秀疎籬
문절공은 승승장구 했다. 발군의 제주는 환로를 열었다. 29세 이조좌랑, 32세에 요직중의 요직 이조정랑에 발탁되었는데, 유래 없는 일이었다. 그해 1447년(세종 2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 1등 3인중 제2인으로 합격했다. 첫째 수찬 성삼문, 둘째가 이조정랑 문절공, 셋째가 수찬 이개였다. 을과 2등 7인은 부교리 신숙주, 응교 최항, 교리 박팽년, 응교 이석형, 형조정랑 송처관, 박사 유성원, 박사 이극담이었고, 3등 9인은 학유 정종소, 부수찬 이승소, 봉상녹사 조변륭, 부수찬 이예, 교리 김증(문절공 형), 현감 이극효, 기주관 정창손, 교리 김예몽, 형조좌랑 김통이었다. 역사에 남은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시험발표 이튿날, 세종은 무슨 생각인지 합격자 19인 가운데서 8인을 뽑아 ‘어제팔준도(御製八駿圖’)로 다시 시험을 치르게 했는데, 여기서도 성삼문이 첫째, 문절공이 둘째, 이개가 셋째였다. 세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고, 성삼문, 신숙주, 정인지, 장영실 등과 함께하는 업적과 명성을 얻었다.
문과중시는 10년마다 병년(丙年)에 당하관 문관들이 치르는 승진고과 시험이다. 문절공은 두 번의 시험에서 선두 주자 입지를 굳혔다. 이때 형 김증도 함께하였고, 집현전 교리로 『홍무정운』을 번역하고, 신숙주, 박팽년 등과 함께 『동국정운』, 『역대병요』의 편찬을 편찬하였지만 불과 44세에 죽었다. 김증은 더 이상 이력을 남길 수 없었다.
문절공은 30여년 봉직했다. 전반 20여년은 주로 집현전에서, 후반 10여년은 지방에서 근무했다. 전자는 세종시대이고, 후자는 세조시대였다. 처신의 극명함을 보여주고 있다. 집현전은 20세 급제와 더불어 들어가, 24세 박사, 26세 부수찬, 35세 직제학에 승진했다. 여기서 또 한 명의 천재 천문학자 이순지(李純之)와 짝이 되어 민족문화를 한 단계 올리는 놀라운 학문적 성과를 이루었다. ‘놀라운 학문적 성과’라 했지만, 사실 필자에게 천문(天文), 역학(易學) 등은 생소한 분야이므로 전연 그 내용을 모른다. 그래서 쓰지 않는다. 다만 이번 기념 학술대회는 국책기관인 '고등과학원'에서 주관했는데, 13개국에서 18명의 천문학자가 참여하여 열띤 토론을 하고 있음을 밝혀둔다.
나는 한 달 전 영릉(英陵)에 다녀왔다. 혼자만이 아니다. 안동시장을 비롯한 안동 유림 100여명이 의관 衣冠(도포와 갓)을 갖추고 제단에 도열했다. 그 연유는 안동 반출 국내 단 1권의 책,『훈민정음해례본 (訓民正音解例本)』을 복각(復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동 식의 신고식, 고유(告由)를 했다. 나는 세종대왕을 모른다. 치적은 더욱 모른다. 그러나 단 하나, 세종이 성군(聖君)임은 안다. 제왕학(帝王學)을 통달했는데, 핵심은 ‘몰입(沒入)’의 통치력이었다. 본인이 몰입했고, 신하들이 몰입하도록 했다. 몰입은 경이적인 세계를 만든다. 몰입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든다. ‘정신일도(精神一到) 하사불성(何事不成)’ 도 같은 말이다. 그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간절한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을 비롯한 많은 발명은 몰입의 결과이다. 몰입은 밀실(密室)이 필요하다. 아니 필수적이다. 세종시대 밀실은 ‘집현전’이다. 밀실을 만들고 거기서 몰입하도록 해야 한다. 세종의 치적은 이런 환경을 마련하고, 거기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쏟아 부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간절한 마음’은 조국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이었다. 눈부신 성과는 바로 세종의 몰입에서, 임금을 따라 몰입한 집현전학자들의 몰입에서 나온 경이적 세계의 기적적 결과물이다. 문절공의 탁월한 학술성과는 자신의 출중한 재능에 한 탁월한 오너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우리 후손들이 세종대왕에게서 본받을 교훈이 있다면, 우리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에 감사하며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몰입 하라는 저 말없는 유훈이다.
문절공의 업적은 집현전 성과만이 아니다. 지방 고을 원의 봉직 때도 그러했다. 과학자답게 한 치 빈틈이 없었다. 사관은 ‘귀신같았다’ 했는데, 이 표현은 민초의 민생 고통을 아는 진정한 목민관에 대한 모습이고 평가이다. 『세조실록』1464년 7월 10일, 졸기卒記 한 구절은 이렇다.
“중추원사 김담이 죽었다. 김담은 예안사람이다. 정사가 밝고 송사를 잘 다스렸다. 그때 경내 도적이 많아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는데, 김담이 원수같이 여겨 모조리 소탕했다. 간교한 모리배를 적발함이 귀신같았고, 장물은 작더라도 용서하지 않았고, 완전 소탕될 때까지 그만두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경내에 들어오지 않아 백성들이 편안했다. 김담은 성질이 단아하고 행동이 청렴하고 근면하였다. 일찍이 어버이가 늙었다고 하여 몇 고을 수령 자리를 구하였다.”
세조가 집권하자 자청하며 충주, 안동, 상주, 경주 등을 돌며 10년을 보냈다. 경주에서는 임기가 끝나고도 3년 더 머물렀다. 세조의 정권에 참여 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유훈에 대한 우회적 보답일 수도 있다.
세조는 회유하고 협박했다. 회유는 벼슬이고, 협박은 나포, 압송으로 나타났다. 『세조실록』 1463년(세조9년) 8월29일 조에, 세조가 이조판서를 임명하면서 배경을 설명하는 부문이 나오는데, 거의 협박이다. 그 글은 이러하다.
“세조가 김담에게 이르기를, ‘경은 병든 어미가 있어 서울에 유임시킬 수가 없었다. 또 경이 지난번에 경주부윤이 되어서 죄도 아닌데 붙잡혀 왔기 때문에 지금 이조판서를 제수하여 애오라지 서로를 위로할 뿐이다. 오랫동안 경을 보지 못하였으니 경에게 술을 올리는 것이 옳다’하고, 신숙주로 하여금 술을 올리게 하였다.”
문절공은 병 핑계로 사직소를 올렸다. 그리고 나아가지 않았다. 화려한 이조판서도 사임했다. 세조는 집현전 학자를 끌어들여 찬탈정권을 합리화하고, 무도한 권력을 희석시키려 했지만 세종의 사랑받은 집현전 학자들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조국을 사랑하고 혼을 쏟아 붇는 몰입의 국정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세조가 세종만큼 될 수 없었음은 자명한 이치이며, 사육신과 생육신의 출현은 필연의 결과였다.
문절공은 무도 한 정권에 일생을 악전고투하며 저항한 방외인(方外人 )김시습, 23년이나 문형을 지녔던 사가 서거정과도 친밀했다. 경주부윤 재직시 금오산에 있던 김시습과 만나 동병상련의 정을 나누며 신라 고적을 중수하는데 힘쓰기도 했다. 이 무렵 봉명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서거정이 오자 감사와 함께 그를 환대하며 고적 정비에 나서는 것으로 시름을 달래기도 했다. 문절공은 1464년 몰했다 마지막 벼슬은 중추원사(中樞院使)였다. 문하에 이수형이 있었는데, 제자이며 곧 사위였다. 7월 10일이니 나이 향년 48세였다.
1737년 영남 유림이 문절공을 모시는 구강서원(龜江書院) 상소문을 올렸다. 거기 글에 “아아! 세상의 기미(幾微)를 살펴 몸을 보전하는 지혜가 있었고, 지조를 지키고 변치 않아 과격한 과오를 면했으며, 그 어려움에 당하여 처변處變함이 가히 중용(中庸)에 맞게 했다”고 했다. ‘중용에 맞게 했다’는 평가는 최고의 수사(修辭)로, 이 이상 높은 평가가 있지 않다. 왜냐하면 ‘중용의 처신’은 공자도 하지 못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문절공에게 이런 평가는 혼돈시대를 살아간 한 지성인의 고뇌에 찬 결단과 깊은 명철(明哲)의 처신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다.
3) 문절공종택과 무섬마을
안동에 하회가 있다면 영주에는 무섬이 있다. 낙동강과 내성천이 빚은 최고 걸작들이다. 물이 휘감아 돌아 물돌이 한 모습이 똑같다. 전자가 시원스러운 멋이 있다면 후자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전자에 나룻배가 있다면 후자에는 섶 다리가 있다. 하회는 배를 타는 풍류가 있고, 무섬은 섶 다리를 건너는 낭만이 있다. 다 같이 추억을 자극하고 향수를 제공한다. 전자가 상쾌함을 준다면 후자는 포근함이 있다.
부용대는 하회의 표상이고, 섶 다리는 무섬의 그림이다. 그래서 하회를 가는 자 부용대를 오르기를 권하고, 무섬을 가는 자 꼭 섶 다리를 건너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부용대에서 보는 하회는 마을 전체가 한 폭의 그림이고, 섶 다리가 걸려 있는 무섬 또한 그 모습 그대로가 그림이다.우리 마음에 고향이 있다면 바로 그런 마을이다. 하회와 무섬은 고향의 원형 같은 마을이다. 지금 비록 국가가 마을 전체를 국가문화재로 지정하고, 자치단체에서는 개방과 축제로 파천황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지만 우리들 마음속의 고향이야 어디 가겠는가. 명문이 없다면 명촌이라 할 수 없다. 하회가 풍산류씨 명촌 마을이라면, 무섬은 예안김씨와 반남박씨의 명촌 마을이다. 경주 양동에 경주손씨와 여강이씨가 함께 하듯이 무섬이 그렇다. 무섬에서 공식 소개한 ‘무섬의 역사’는 이러하다.
“무섬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朴檖 1642~1729)가 이 마을에 들어와 만죽재(晩竹齋)를 건립하고 터전을 개척하면서부터였다. 무섬의 서편 건너 마을인 머럼(遠岩)에 거주하던 박수가 현종 7년(1666)에 이곳으로 이주해온 후, 그의 증손서(曾孫壻)인 예안김씨 김대(金臺,1732~1809)가 영조 33년(1757)에 처가 마을인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예안김씨가 함께 두 집안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무섬은 예안김씨의 고향이다. 비록 반남박씨와 100여년의 시차를 두고 들어왔지만, 무섬을 어찌 예안김씨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 추모하고자 하는 선현,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1416-1464) 선생의 종택(宗宅)이 무섬에 소재해 있고, 19대 김광호(金光昊) 종손(宗孫) 내외분이 살고 있다. 놀라운 일은 김광호 종손의 처가가 지금 논의하는 반남박씨 영주의 현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6)의 종택이다.
소고는 동방급제 한 풍기의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1517-1563)과 더불어‘영유소고 풍유금계(榮有嘯皐 豊有錦溪’)라 불릴 만큼 영주 최고의 인물이다. 불천위에 옹립되었고, 15대 박찬우(朴贊佑) 종손은 바로 김광호 종손의 처남이다.
두 가문의 인연은 무섬을 공유하기 이전, 이미 소고의 아버지 진사 박형(朴珩)에서 부터였다. 진사는 원래 안동 사람이었지만, 예안김씨와 혼인함으로서 영주로 이사했다. 그러니까 소고의 어머니가 바로 문절공의 동생 김홍(金洪)의 손녀였다. 두 가문의 아름다운 동행은 600여년 대를 이어가며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예안김씨의 영주 입향이 문절공 아버지 현령 김소량(金小良)이 금계 5대 조부 평해황씨 공조판서 황유정(黃有定)과 따님과 혼인함으로서 들어왔으니, 아름다운 동행은 세 가문이 함께하고 있다 하겠다. 처향을 따라 들어온 영주는 이들 가문들의 새로운 전거지가 되고, 무섬은 그 가운데 하나의 고향이 되었다. 예안김씨는 물론 무섬과 비교할 수 없는 오랜 전통의 명문, 명가가 소재한 문단, 우금, 번계, 도탄 등의 집성 마을들이 존재하며, 문중문화 역시 이들 마을들이 주도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 무섬은 그 풍광으로 인해 집단적 주목을 받고 있고, 더욱은 문절공종택이 터전을 잡음으로 말미암아 문절공 가문의 새로운 중심으로 역할이 기대된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