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문화지킴이
안동문화해설사 심화과정
퇴계가계의 가학전승과 퇴계학맥
-문화재와 관련하여-
혜명학술원 원장
류동학
퇴계가계의 가학전승과 퇴계학맥
1. 들어가며
2. 퇴계 이황의 가계와 사상
(1) 가계(家系)
①시조 이석=퇴계의 6대조
② 이자수(李子脩)=퇴계의 5대조=안동 입향조
③부정공파 李云侯(퇴계의 고조)
③-1 참의공계 이운구(李云具)의 후손
④ 4세 이정(李禎)=불천위. 퇴계의 증조부
⑤5세 우양(遇陽)․흥양(興陽)․계양(繼陽)
⑥-1. 6세 송재 이우(송당종파) ,, 녹동파, 서벽파
⑥ -2 온혜종파
⑥ -3. 대죽파
⑥-4. 온계파 이해
⑥-5. 이징의 신야정파
⑦퇴계 상계종파
⑦-1. 이준-이안도(상계파)
⑦-2. 이준-이순도(의인파)
⑧-1. 동암 이영도(하계파)
⑧-2. 동암 이영도(하계파)의 독립운동
(2) .진성이씨후손들의 활약상
3. 퇴계학의 전개
①학봉 김성일 계통
②서애 류성룡 계통
③한강 정구 계통
④월천 조목
⑤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
⑥기타 제자들
1. 들어가며
영남학파는 화담 서경덕, 우계 성혼과 율곡 이이로 대표되는 기호학파에 대립되는 말로, 유학자들의 모임인 철학 유파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 전기에 점필재 김종직(선산 장원방)이 영남학파를 열었고, 중기에 조식이 남명학파, 이황을 종주로 하는 퇴계학파, 장현광을 중심으로 하는 여현학파가 일어났다. 영남학파는 고려의 정몽주에서 시작하여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년~1419년), 강호(江湖) 김숙자(1389~1456), 김종직으로 학맥이 이어져 내려왔다. 영남학파는 실제적인 학문을 대상으로 삼는 한당류(漢唐類)의 학풍과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성리학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송학류(宋學類)의 학풍을 혼합하였다.
이 학파에서 일두 정여창 일두선생의 종택은 함양군 지곡면 개실마을에 있다. 개실마을의 일두종택에서 20여분 가면 남계서원이 있다.
, 한훤당 김굉필(1454~1504) 김굉필의 후손들은 현재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 지리와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김굉필은 문묘를 비롯하여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위치한 도동 서원(道東書院), 황해도 서흥군에 위치한 화곡 서원(花谷書院), 평안북도 희천군에 위치한 상현 서원(象賢書院), 전라남도 순천시 금곡동에 위치한 옥천 서원(玉川書院),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서원리에 위치한 인산 서원(仁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이 나와 도학에 정진하여 성리학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정여창은 중용을 연구하였고, 그에게서 주리설(主理說)이라는 말이 나왔다. 김굉필은 존양(存養)으로서 학문의 목표를 삼고 존양에 도달하는 수단으로 성경(誠敬)을 주로 하였다. 김굉필의 학통은 조광조와 모재 김안국(金安國, 1478∼1543),사재 김정국, 기준(奇遵)으로 계승되었고, 조광조의 학통은 청송 성수침(1493∼1564)과 우계 성혼(1535년 ~ 1598년) 부자에게 이어졌다.
김안국의 학통은 하서 김인후(1510 ~ 1560)에게 이어졌다. 하서는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고 문묘와 장성 필암서원에 배향되었다.
조선 중기에 영남우도에서 남명 조식을 따르는 남명학파가 생겼다. 이 학파에서 오건, 김우옹, 정구, 최영경, 김효원, 곽재우, 정인홍, 정탁, 각재 하항, 태계 하진 등이 나왔다. 이 학파는 반궁체험(反窮體驗), 지경거의(持敬居義), 충신진덕(忠信進德,) 독행수도(篤行修道)를 학풍으로 하였다. 이 학파는 조식의 영향을 받아 공리공담(空理空談)을 배척하고 실천궁행으로 학문과 덕행을 쌓아갔다. 기절(氣節)과 의리를 숭상하였다. 학식은 대학과 중용에 밝았다. 이 학파는 임란시 의병장을 많이 배출했다.
영남좌도에서 일어난 이황의 문하를 퇴계학파라고 하였다. 이 학파가 기호학파와 쌍벽을 이룬 학파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출사한 이가 많았다. 조목, 기대승, 김성일, 유성룡, 남치리, 이덕홍, 황준량, 권호문, 김륵, 홍가신, 정사성, 김사원, 유중엄, 조호맹, 박광전, 회곡 권춘란 등이 그들이다.
퇴계의 제자들은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사칠이기분대설四七理氣分對說>, <물격설物格說>을 지지하고 옹호하다가 주리설主理說로 발전하였다. 이황의 철학은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이와 기는 불상리不相離, 불상잡不相雜(서로 떨어지지 않고, 서로 섞이지 않음)인데 , 이를 이물二物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는 이일 뿐이고, 기는 기일 뿐이라는 이자이기자기(理自理氣自氣)를 내세웠다. 이황은 이와 기에 실질적인 작용이 있다고 보았다. 이를 이발이동(理發理動)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理인 태극에 스스로 동정動靜이 있다고 본 것입니다. 이황은 이에 가치를 부여하여, 理에는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고, 氣에는 상대적 가치를 부여하였다.
장현광(1554년 ~ 1637년)을 중심으로 여헌학파가 생겨났다. 그는 한강 정구의 조카사위로 정구(鄭逑)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는 이황(李滉)의 학설과 상이한 점이 많다. 장현광은 이황의 이기호발설을 배척하고, <기발이본설氣發理本說>을 내세웠다. 그는 이와 기를 이불이본(二物二本)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인 것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철학은 기(氣)를 떠난 이(理)는 없다 하여 이기일체론(理氣一體論)을 제창한 명나라의 정암 나흠순(羅欽順,1465년 ~ 1547년)과 이이(李珥)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계열의 학자들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인 학설이다. 저서로는 『여헌집』·『성리설(性理說)』·『역학도설(易學圖說)』·『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다.
이 학파에서 학사 김응조, 전식, 유진, 조임도, 노형필, 신적도, 정극후, 선우협 등이 나왔다. 1655년(효종 6) 의정부좌찬성, 1657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성주의 천곡서원(川谷書院), 서산의 여헌영당(旅軒影堂), 구미 인동의 동락서원(同洛書院), 청송의 송학서원(松鶴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의성의 빙계서원(氷溪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2. 퇴계 이황의 가계와 사상
(1) 가계(家系)
이황(李滉)의 초자(初字)는 계호(季浩), 후자(後字)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도수(陶叟), 퇴도(退陶), 본관은 진성(眞城=靑松 진보)이다.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신유년 신축월 기해일 병인시생)에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溫溪里: 지금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동)에서 아버지 진사 이식(李埴)과 어머니 춘천박씨 사이에서 넷째(漪․瀣․澄․滉)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식은 먼저 의성김씨 예조정랑 송호(松湖) 漢哲 김한철의 증조부는 의성김씨 안동 입향조 김거두이며 아버지는 현감을 지낸 영명(永命)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화산부원군(花山府院君) 전(專)의 딸이다. 김영명은 한계, 한철, 한석,한전이 있다. 김한계(1414~1461)는 내앞파인 청계 김진의 증조부이다. 한철은 아버지에게서 수학하였고, 1451년 장령을 지냈다. 1456년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이 단종복위를 꾀하다 처형되자, 세사에 뜻을 잃어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갔다. 청송,군위 행동에 세거한다. 『송호선생실적』은 김한철의 시문집이다.
(1430~1496, 학봉 고조부 한계의 동생)의 딸에게 장가를 들어 3남(潛․河․瑞麟) 1녀를 낳았는데 서린은 성년이 되기 전에 죽었고, 의성김씨도 29세의 젊은 나이로 일찍 죽었다. 그래서 춘천박씨를 재취로 얻어 퇴계를 낳은 것이다.
퇴계의 모친 춘천박씨는 예천 지보 대죽리 한대마을 출신인 박치(朴緇)의 딸인데 그는 박종린과 고종사이가 된다. 박종린은 퇴계 이황의 부친인 이식(李埴)(1463-1502)과는 처외사촌 지간이다.
박종린의 부친인 행정공 박눌은 안동의 보백당 김계행(1431-1517. 모친 예천권씨)의 사위가 된다. 김계행은 딸이 둘 있었는데 그 첫째사위는 다섯아들 모두를 문과급제 시킨 이로 유명한 금당실 입향조 박종린의 부친인 행정공 박눌이며, 둘째사위는 서애 류성룡의 조부이자 류중영의 부친인 류자온이다.
그런데 퇴계가 태어난 지 7개월만에 아버지 마저 돌아갔다.(1502년 6월) 아버지가 6남 1녀를 남기고 죽자 생계는 어머니 박씨가 책임져야 했다. 이 때 퇴계의 형인 잠(潛)만 장가를 갔을 뿐 나머지는 혼인 전이어서 박씨의 책임은 더욱 무거웠다. 박씨부인은 비록 배우지는 못했으나 식견이 넓고 총명해서 자식교육을 잘 시켰다. 뒤에 두 아들(瀣․滉)이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자 문예만 힘쓰지 말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며, 현감(縣監) 이상은 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이런 어머니의 고매한 인격 때문에 퇴계가 대학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진성이씨의 본관인 진보(眞寶)는 1895년(고종 32)에 군(郡)이 되었다. 1914년 군을 폐하고 동면과 북면은 영양군(英陽郡)에 병합되고 나머지는 청송군(靑松郡)에 편입되었는데 그 중심 지역은 진보면으로 남아있다.
①시조 이석=퇴계의 6대조
누대로 진보현(眞寶縣)에 토착해온 호족(豪族)의 후예로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진보현의 아전(衙前)으로 있다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했고, 그의 맏아들 자수(子修)가 충숙왕(忠肅王) 때 명서업에 급제하여 1362년(공민왕 11)에 일어난 홍건적(紅巾賊) 2차 침입때 총병관 정세운의 부장으로 전공을 크게 세워 안사공신(安社功臣)으로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으므로 그 귀(貴)로 인하여 시조 석(碩)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종2품 하의 품계명)로 밀직사(密直使)에 증직(贈職)되었다.
시조 이석(李碩)은 전후 부인을 두었는데 먼저 호장(戶長)인 김현(金玄)의 딸에게 장가들었고, 후취부인은 그 성씨(姓氏)를 알 수가 없다. 그의 윗대로는 조부와 부가 확인되었는데, 진보에서 대대로 호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1600년에 제작한《眞城李氏族譜》에서는 누락되고 이석을 시조로 한 족보를 만들었다. 족보를 제작한 이들은 벼슬을 한 이석을 진정한 진성이씨의 시조로 인식했다.
▲관련 유적- ㉠기곡재사(岐谷齋舍ㆍ경상북도 민속문화재 155호 '청송 기곡재사'로 승격지정)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 자리 ㉡시조 이석(李碩) 시조의 묘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명당으로 감람묘(甘藍墓)라고 부른다. ㉢만운정(萬雲亭);도산면 단천리에 관련 유적으로 인근에 월란정사(만취당 김사원)가 있다.
② 이자수(李子脩)=퇴계의 5대조=안동 입향조
이자수(李子脩)(5대조)는 고려 말에 1330년에 명서업(明書業)에 합격해 1382년에 정3품의 품계인 통훈대부 판전의사(判典儀使)에 올라 50년 가까이 관직생활을 했으며, 정세운(鄭世雲)을 따라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워 송안공(松安君)에 봉해졌다. 이자수를 통하여 진성이씨는 영남지방에서 명문가로 발판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후손들은 1764년에 可倉山에 송안군묘를 건립 지금까지 봉사하고 있다. 이자수는 본관지를 떠나 보다 넓은 안동 마라촌(磨羅村: 풍산읍 하리) 현재 하리리는 예안이씨(禮安李氏) 동성마을이다. 마을 서쪽으로 국도 34호선이, 서쪽과 북쪽 끝을 따라 지방도가 지나간다. 문화 유적으로 보물 제553호인 예안이씨 충효당(禮安李氏忠孝堂), 중요민속자료 제178호인 하리동 일성당(下里洞日省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인 안동 하리동 모전삼층석탑(安東下里洞模塼三層石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08호인 안동 하리동 삼층석탑(安東下里洞三層石塔),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8호인 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禮安李氏司直公派舊宅) 등이 있다. 하리리에 거주하는 총 120여 가구 가운데 전의이씨는 약 40가구가 살고 있다. 관련 유적으로 이웅(李雄)과 이화(李樺)를 배향하는 존경사(尊景祠), 이화가 세운 침류정(枕流亭), 이산두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 등이 있다. 이산두는 불천위로 추대되어 있다. 예안이씨는 풍산읍 하리리에 대성을 이루고 살고 있다. 이화의 후예들은 하리리 마을 중간의 작은 골짜기 안쪽 골마에 세거해 오고 있다. 한편 이웅의 후손들은 하리리에 약 20호를 비롯하여 영주시 장수면 화지리, 청송군 파천면, 영해 등지에 수십 호가 살고 있다고 한다.
으로 이주했다. 이자방계열의 선호(善浩)의 후손이 현재 청송군 진보의 후평파를 형성하고 있다.
▲ 관련 유적- 작산정사(鵲山精舍)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1480년 퇴계의 조부 3형제가 창건한 경북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에 1715년에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송안군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을 세웠는데 내부에는 6대손 기암(企庵) 완(完), 7대손 송계(松溪) 형남(亨男), 8대손 송간(松澗) 정회(庭檜) 등 세 사람이 배향되어 있다.
③부정공파 李云侯(퇴계의 고조)
이자수의 차남 李云侯(퇴계의 고조)는 그곳의 토착세력인 안동권씨 希正의 딸과 혼인하였다. 이운후의 처남은 좌의정을 지낸 권진(權軫)이었다. 당시 권희정은 7남 3녀가 다 이름 있었는데 세 사위는 흥해배씨 안동입향조인 배상지(裵尙志), 진성이씨 안동 입향조인 송안군 이자수의 차남 이운후(李云候), 세째가 안동김씨 김득우의 아들 김혁이다. 이운후는 안동의 유력가문인 안동권씨, 흥해배씨, 안동김씨와 혼맥으로 연결된다.
이운후는 아버지의 덕으로 음직(蔭職)으로 군기시[軍器寺) 부정(副正:종3품)·을 지냈으며, 풍산(豊山)을 떠나 다시 주촌(周村)으로 이주했다. 이운후는 주촌에서 종가를 중심으로 가문의 기반을 구축하고 문중의 결속을 다져나갔다. 진성이씨의 종가는 현재도 와룡면 주하리에 있다. 인근의 사람들은 순 우리말로 두루마을로 부른다.
▲관련 유적-주촌종택=주하동 경류정 종택= 진성 이씨 대종택(경북민속자료 제72호).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가 지었다고 전하는 경북 안동시 와룡면 주하리 진성 이씨 대종택(경북민속자료 제72호). 별당(別堂)인 경류정(慶流亭)은 1492년(성종 23)에 이연(李演:1492~1561)선생이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경류정은 퇴계 선생이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③-1 참의공계 이운구(李云具)의 후손
한편 이운후의 형인 이운구(李云具)의 후손은 언재부터 인지는 모르나 풍기에 살았다. 조선 초기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역임했던 운구(云具)는 슬하에 아들 3형제를 두었다. 이양공, 이양검, 이양호가 그들이다. 군수를 역임했던 차남 양검(養儉)과 주부(主簿)를 지낸 막내 양호(養浩)가 유명했다. 현재 참의공파, 동막파(삼척시근덕면),은풍파(에천군 하리면 은산리),생현파(영주 안정면), 병방파(의성 단촌면), 국란파(6세 이윤영의 후손, 안동시 임동면),답곡파(9세조 이만향의 후손, 영양군 석보면)로 분파하여 있다. 동막파(삼척시 근덕면 동막리)는 이운구의 장남 이양공의 차남 이희담-이덕수계열의 후손들이다. 1976년까지는 상대의 기록이 실전되어 의성 이씨라는 별개성씨로 살아왔으나, 1976년 묘지의 석비에서 윗대의 기록이 확인됨에 따라 진성이씨로 복관하였다. 동막파는 14세조에서 다시 양리파,월계파,향리파로 분화된다.
은풍종파(예천군 하리면 탑동 거주)는 이운구의 차남 합천군수 이양검의 차남 예조정랑 이여담과 이윤형의 후손들이다. 생현파(영주 안정면)는 이여담의 3남 이윤정의 후손들의 세파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병방파(의성군 단촌면 병방동 세거)는 이양검의 삼남 이종담과 이윤지의 후손들이다. 종담의 후손이 국란파(6세 이윤영의 후손, 안동시 임동면)이다.
한편, 이황도 고조부대에 인물이라, 형제의 선후를 몰랐으나, 1564년 종가댁에서 분재기가 발견됨으로써 새롭게 알게 되어 이정회가 주도한 1600년 족보를 제작할 시 자세하게 기재할 수 있었다. 1520년 퇴계의 나이 20살 대 족숙인 풍기인 이윤정(李允貞)이 제보하여 퇴계는 윗대의 내막을 알게 되었다. 즉 이자수와 이자방(李子芳)형제가 있었다는 사실과 이자수가 고려말 공신에 책봉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이자방계열의 선호(善浩)의 후손이 현재 청송군 진보의 후평파를 형성하고 있다.
진성이씨는 기본적으로 아주 크게 참의공계(이자수-이운구),부정공계(이자수-이운후),후평파(이자방)의 3대종파로 나뉘며 여기에서 5세조를 기준으로 6개의 종파를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며, 이 6개 종파에서 세파들이 다시 갈라진다. 단 1976년 복관한 동막파 때문에 지금은 5세조를 기준으로 7개 종파로 나뉜다. 흔히 파보를 수단할때는 이 7개 종파 기준으로 파보를 수단한다.
㉠동막파(이운구의 장남 이양공의 차남 이희담의 후손들), ㉡은풍종파( 이운구의 차남 이양검의 차남 이여담의 후손들), ㉢주촌종파(이정의 장남 이우양의 후손들), ㉣온혜종파(이정의 삼남 이계양의 장자 이식의 차자 이하의 후손들), ㉤송당종파(이계양의 차자 이우), ㉥백당종파(이식의 4자 이해),㉦상계종파(이식의 6자 이황)
④ 4세 이정(李禎)=불천위. 퇴계의 증조부
이운후의 외동아들은 이정(李禎)이다. 그는 훈구파로서 세종시 4군(여연, 무창, 자성,우예)을 개척한 최윤덕 장군(1376∼1445)과 교류하고 세종 때 영변판관(寧邊判官)으로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영변진(寧邊鎭)을 쌓았으며, 선산도호부사를 지냈다. 1465년(세조 12)에 좌익원종공신( 2,187명) 3등으로 녹훈되어 불천위(不遷位)로 모셔졌다. 그의 사적이 여지승람 명환록에 실렸다. 그런 이유로 1600년(선조 33)에 나온 『진성이씨족보』 초간본은 이정의 후손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진성이씨가 안동 지역사회에 확고한 기반을 가지게 되었다. 이정은 세종으로부터 훈민정음 해례본을 직접받아 보관하다가 1940년 후손 이한걸과 이용준이 간송 전형필에게 전달되었다.
관련 유적과 유물 -
▲안동 주하동 경류정 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72호로 지정)
▲안동 주하리 뚝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4호)
▲가창재사(可倉齋舍). 경북도민속자료 제21호.
이자수(李子脩)의 손자인 이정(李禎)의 묘제를 위해 1480년 작산정사의 뒷편에 별 도로 건립한 가창재사(可倉齋舍).
▲훈민정음 해례본(세계문화유산)
안동 주하동 경류정 종택은 진성이씨 주촌파(周村派) 종택이며, 불천위로 모셔진 이정(李禎)의 종택이다. 이정은 이황(李滉)의 증조부로, 진성이씨가 안동 풍산 마애(磨厓)에서 이곳 주하, 즉 주촌(周村)으로 옮겨온 것은 이정의 부친인 이운후(李云候)에 의해서였다. 이운후는 진성이씨 안동 입향조이자 부친인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와 함께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종택은 이정의 현손인 이연(李演, 1492~1561)이 16세기 중엽에 건축했다고 한다. 경류정의 현판 글씨는 미수 허목이 썼다. 경류정 앞에 이정이 심었다는 안동 주하리 뚝향나무(천연기념물 제314호)가 운치를 돋우고 있다.
⑤5세 우양(遇陽)․흥양(興陽)․계양(繼陽)
이정은 우양(遇陽)․흥양(興陽)․계양(繼陽) 세 아들을 두었다.
⑤-1. 우양 계열은 주촌(周村)에 그대로 살았고, 우양-철손-훈-연으로 내려오면서 이우양의 증손 이연(李演)은 훈도를 지냈으며 경류정(慶流亭)을 지었다. 주촌종파이다. 이연의 손자이자 현감 이희안(학봉의 고모부)의 아들 송간(松間) 이정회(李庭檜, 1542~1612)는 종손으로서 어려서 권대기에게 배웠으며 커서 퇴계 이황의 문인이 되었다. 정탁, 구봉령의 천거로 수의부위에 임명되었다. 류운룡과 함께 퇴계 문하에서 공부하며 도의로 사귀었다.
1600년 진성이씨 족보 초간본을 간행할 때 주도적으로 참여했고, 임진왜란 때 의흥현감을 지냈다. 가계를 정리한 「세전유록(世傳遺錄)」과 문중의 합의를 적은 「족계완의(族契完議)」가 있다. 송간문집(松澗文集)이 1948년 12대손 한걸(漢杰)·진걸(晋杰)·명걸(明杰)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정회의 손자 증효는 학행이 있다. 정회의 후손에 승걸, 한걸 등 선비들이 나왔다. 현대인물로는 변호사 이동욱, 교수 재엽 등이 있다.
이연의 손자이자 통정대부 이희옹의 아들 낙금헌 이정백(1543∼1600)은 4촌형인 이정회, 김성일, 남치리(南致利), 권우(權宇) 등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학문을 토론하고 연구하는 한편, 이황의 『이학통록(理學通錄)』을 정서하는 등 가학을 계승하였다. 임란시 김해(金垓, 1555~1593), 진사 배용길(裵龍吉, 1556~1609), 류복기(柳復起, 1555~1617)와 더불어 의병장을 역임했다. 당시 이정백의 행적은 명나라 장수 양호(楊鎬)의 『남정록(南征錄)』과 오유격(吳遊擊)의 『유충행정기(惟忠行程記)』에도 기록되어 있다. 대구 망우당공원 임란호국충의단에 봉안되어있다.
문집으로 2권 1책의 『낙금헌집(樂琴軒集)』이 전한다. 1761년(영조 37)에 사림의 공의로 이정백(李庭栢)을 제향하기 위해 북후면 도진리와 와룡면 주하리의 경계인 ‘유암(流巖)’ 위에 류암서원(流巖書院)이 세워져 제향되었다. 정백의 후손에 글 잘하는 선비로 조형, 시혐, 효석, 유백, 현정, 형진 등이 있다.
이연의 아들 희윤 후손에 조영,조성 형제가 학행이 있고 상기, 현유 부자가 학행이 있다. 이상기는 1747년에 태어나 호는 묵와이다. 177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두문불출, 글을 읽었다. 경서와 성리서를 베낀 것이 100여 권에 이르렀다. 이현유는 1776년에 태어났으며 호는 국계이다. 류규의 문인이다 어릴 때부터 문장에 능했으며 궁리실천에 힘썼다. 수정재 유정문, 김희수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⑤ -2. 일직파
이연의 동생 이한(李漢)의 후손은 일직면 송리리로 이거하여 일직파를 형성하였다. 이파는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 직강을 역임한 학천(學川) 이봉춘(李逢春, 1542~1625), 개곡 이송(1598∼ 1665년), 이환, 경옥(景玉) 이보(李簠, 1629~1700), 후산(後山) 이종수(李宗洙, 1722~1797) 등을 배출하였다. 이한의 손자이자 이희성의 아들인 이봉춘은 처음에 권대기(權大器)에게 배우고 뒤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청계 김진의 사위로 학봉의 매부이다.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고 문집으로 『학천집(鶴川集)』 1책이 있다. 일직면에 있는 용암사(龍巖寺)에 제향되었다. 봉춘의 장남 석남 경준이 학행이 있다. 이경준(1574~1654)의 아들인 이이장(1594~1650)은 사마시에 합격했다.
이봉춘의 증손자이자 경준의 손자 이환과 이보(1629∼1710)가 학행이 있다. 경옥 이보는 학사 김응조의 문인이다.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하고 의약, 복서, 병학, 지리까지 밝았으며 문장에 뛰어났다. 봉춘의 종손자이자 이득춘의 손자인 개곡 이송(1598∼ 1665년)은 학사 김응조의 문인이다. 문과에 장원하여 진성이씨 두루파의 명성을 날렸다. 풍기군수를 지냈다. 일직 용암사에 제향되었다.
이환과 이보 형제 후손에 선비가 많다. 그들은 정영, 정일, 정신, 기삼, 종수, 종학, 장곤 등이다. 그 중에서 종수가 뛰어났다.
후산(後山) 이종수(李宗洙, 1722~1797)는소퇴계로 불리는 대산 이상정의 제자들인 호문삼로(湖門三老)로 유명한 유학자로 현재 불천위로 모셔져 있다. 이종수는 19세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의 문하에 들어가 43년 동안 돈독한 사제지의를 맺었다. 대·소산의 후란 뜻으로 이상정이 후산(后山)이라는 호를 지어주었고 이종수도 평생 스스로 이상정과 이광정의 후배로 자처하였다. 일직면 송리리에 후산정사(后山精舍, 경북문화재자료 제586호)를 짓고 독서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당대의 학자인 권구(權榘)·권덕수(權德秀)·김낙행(金樂行)·권상일(權相一) 등과 교유하였다. 이종수는 호문삼종(湖門三宗:이종수·김종덕(金宗德)·정종로(鄭宗魯))과 호문삼로(湖門三老: 이종수·류장원(柳長源)·김종덕)의 한 사람으로 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문집으로 『후산집(后山集)』이 있다.
한의 아들 이희정은 퇴계 문인이다. 희정은 희성의 동생이며 봉춘의 숙부이다. 이희정의 후손인 이필곤은 병신년에 창의하여 의병대장을 지냈으며 건국공로 훈장이 수여되었다.
경옥(景玉) 이보(李簠, 1629~1710)는 퇴계의 학문을 가학으로 계승한 개곡 이이송(1598∼1665)에게 학문을 익혔다. 약관에 개곡의 외숙인 학사 김응조(1587∼1667)에게 학문을 익혔다. 김방걸, 이유장, 류정휘, 김태기 등과 종유하였다. 대곡파이다.
관련 유적과 유물
▲후산정사(后山精舍, 경북문화재자료 제586호)
⑤-3 이흥양과 망천파
이정의 둘째 아들 이흥양은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참군을 지내고 주촌에서 다시 마애로 환거하였다. 현재 진성이씨 망천파를 형성하고 있다. 흥양-은-희동-추는 망천종파이다. 흥양-은-희복-문풍은 항곡파로, 은의 동생 호는 희천-원회로 이어지며 망천파를 형성했다. 이흥양의 현손이자 이원회의 아들인 호봉(壺峰) 이돈(李燉, 1568~1624)은 눌원 이공(李珙,1533년 ~ 1612년)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헌납으로 있을 때 정인홍(鄭仁弘)을 논척하다가 경상도 영해부사로 좌천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돌아가 형 이혁(李爀), 동생 이환(李煥)과 한방에서 동거하면서 화락(和樂)하게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성균관직강이 되었고, 부모를 봉양하기 위하여 영천군수에 재직 중 병사하였다.
이돈의 아들 석병(石屛) 이회보(李回寶, 1594~1669)는 1629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호종하면서 쓴『산성일기(山城日記)』를 남겼으며 남인들의 견해와 달리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묘배향을 주장하였다. 남인의 백졸암 류지와 류세철이 소두가 되어 우율문묘배향과 반대견해를 제시했다.
풍산 마래파 진성이씨는 노론 가문으로 그 독특함이 있으며 글하는 선비들이 많이 나왔다. 그들은 이희동, 이문태, 이문두, 이문괴, 이문규, 이예강, 이문정, 이의강, 이계강, 이선강, 이종강, 이학원, 이부표, 이선장 등이다. 이국필 이동암 이동수 등은 호군을 지냈고 이추는 교수, 이영은 동추, 이호 교위, 이광진과 이휘진 이종률 등은 첨추를 지냈다.
관련 유적과 유물
안동 이로당(安東怡老堂)경북문화재 자료512호
이돈(李燉)이 후손들과 지역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위하여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마애리에 지은 정사이다.
산수정[山水亭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22호
호봉(壺峰) 이돈(李燉:1568∼1624)이 관직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학문에 전념하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1610년(광해군 2) 경에 지은 것으로 전한다.
⑤-4. 온혜종파 5세 이계양, 퇴계의 조부
이정의 셋째 아들 이계양(1424~1488)은 진성이씨 예안시대를 연 중흥조이다. 계양 계열은 예안 온혜(溫惠)로 이주했다. 이계양이 퇴계의 할아버지이다. 그는 1453년(단종 1)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온혜에 정착해 문호를 열었다. 이계양의 장자 이식(李埴)은 진사이다.
관련 유적과 유물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0호
노송정종택(퇴계생가,태실)
⑥-1. 6세 송재 이우(송당종파) ,, 녹동파, 서벽파
차자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는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판, 강원도관찰사, 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송재는 수령-빙-일도-지형-천익으로 내려오는 계보가 송당종파이다. 송재-수령-결은 도연파로 송재-수령-충은 고산파로 분화되었다.
이우의 5세손인 11세 반초당 이명익(1617∼1687)은 증조부가 이빙, 조부는 이일도, 부는 이지형이다. 처부는 권상충이다. 1649년 별시문과에 병과9위로 급제했다.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불천위이다. 녹전면 원천마을에 반초당 종가가 있다. 류운룡의 현손인 류후창이 반초당의 사위이다. 아들이 이단표와 이학표이다. 이단표가 일직 죽자 열녀 박씨도 죽었다. 송당종파는 봉화 춘양읍 의양리, 서벽리, 법전면 어저리 녹동(노루골), 문경시 영순면 의곡3리 도연, 예천 호명면 종산리 고산, 안동 녹전면 원천리에 세거하고 있다.
이우의 6세손이며 반초당의 조카이자 이운익의 아들인 나은(懶隱) 이동표(李東標, 1654~1700)는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참의, 삼척부사 등을 역임하고 춘양 노룻골로 이거하였다. 종숙인 이지온에게 출계하였다. 30세 때 안동과 예안의 류세명(柳世鳴), 김명기, 이선, 권성구, 권두인(權斗寅) 등 36명과 함께 학계(學契)를 조직하여 학문과 도의를 연마하였다. 1741년(영조 17)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또 영남 사림들의 상소에 힘입어 충간(忠簡)의 시호가 내려졌다. 1779년(정조 3) 지방 유림의 공의로 이동표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예천에 고산서원(古山書院)이 창건되어 위패가 모셔졌으며, 1845년(현종 11) 예천의 원산서원(元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봉화 충간공 이동표 신도비가 법전면 어지리에 있다.
나은의 아들이 두릉(杜陵)이제겸(李濟兼 1683~1742)이다. 1724년(경종 4) 문과에 급제한 후 동몽교관, 승문원정자를 역임했고 1727년(영조 3) 율봉도찰방(栗峯道察訪)이 되었다. 법전면 소천리에 창랑정사(滄浪精舍)를 짓고 초야에 묻혀 소요하였으며, 이광정(李光庭), 권강(權江)과 도의로 친교하였다. 문집으로 4권 2책의 『두릉집(杜陵集)』이 있다.
송재 이우 - 이수령- 이빙- 이일도-이지형-이운익-이동표-13세 이제겸
창애 이중광은 나은의 손자이며 두릉[이제겸]의 장조카이다. 창애는 경술(經術)로 천거(薦擧)되어 여러 벼슬이 내렸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연구에 전심(專心)했다.
누실 이중연은 두릉의 아들로 시문에 능하여 격조 높은 시가를 많이 남겼으며 채제공, 이상정 등과 교유했다.
녹문 이한중은 누실의 손자로 경학(經學)과 시문(詩文)에 뛰어나 여러 번 어사(御使)의 천거를 받았으나 나가지 않고 서책과 시주(詩酒)와 거문고를 벗 삼아 물외(物外)에 초연(超然)하였다. 당대에 명성이 있는 시인으로 시문이 호건(豪健) 장쾌(壯快)하였다.
경암 이한응은 두릉의 증손으로 학업에 30년간 정진(精進)하여 덕행(德行)과 경학(經學)으로 사우의 추앙(推仰)을 받았으며 당세의 도학군자(道學君子)로 사림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다.
⑥ -2 온혜종파
㉠이식-이하-이완-이종도의 온혜종파
한편 이식의 맏아들 이인(李寅)은 후사가 없어 차자 이하(李河)와 기암(企菴) 이완(1512~1596)의 후손인 이종도가 온혜종파를 이어받게 되었다. 이하(李河, 1482~1544)는 의인 함양박씨와의 사이에 이완(李完), 이굉(李宏), 이성(李宬) 세 아들을 두었다. 이완은 자가 자고(子固)이고, 호가 기암(企庵)이다. 관련유적이 요산정이다. 묘는 수곡에 있다. 배위 의인 초계변씨와의 사이에 아들은 진사 宗道, 주부 守道·주부 善道·信道등 네 아들을 두었다. 온혜종파는 이종도 계열로 이어진다. 이종도의 증손자 인재 이희무(1617∼1683)는 인조26년 대과급제했다. 이식- 이하-이종도-이원적-이홍정-(이희영, 이희무)
㉡이식-이하-이굉-이열종도의 백송파
이하의 차자 이굉(李汯,1515~1573)의 후손은 예천 호명면에 세거하면서 백송파를 형성했다. 이하(李河)공이 처가 함양박씨 세거지인 용문 금당실에 우거(寓居)하다가 이굉이 백송마을로 입향하게 된 것이다. 백송마을은 퇴계 이황의 조카인 이굉의 후손들이 뿌리를 내린 만큼 학자들이 많이 배출됐다. 60가구 남짓한 마을에서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백송 출신 박사들이 60여 명에 이를 정도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백송에서는 '다른 것은 못 내놓아도 박사 하나씩은 내놓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여서 '박사촌' '박사마을'로도 불린다. 진성이씨 백송파 시사는 백송 입향조인 이굉과 아들 이열도를 비롯해 후손들을 모시는 의례로, 내성천과 우암산이 맞닿은 선몽대(仙夢臺)에서 제사를 올린 뒤 난산의 입향조 무덤에서 또 묘사를 지내고 있다.
관련 유적과 유물 -예천의 선몽대(仙夢臺`명승 제19호)
예천의 선몽대(仙夢臺`명승 제19호)는 이굉의 아들인 이열도(1538∼1591)가 세운 것이다. 석학인 이황과 약포 정탁(1526~1605), 서애 류성룡, 김상헌(1570~1652), 이덕형(1566~1645) 등의 친필시가 걸려 있다.
㉢ 이식-이하-이성계열의 원고종파
이하의 3자 이성(李宬)의 후손은 영해 원구리로 이거하여 원고종파를 형성했다.
⑥ -3. 대죽파
이식의 3자 이의(李漪, 1494~1532))의 후손은 예천 대죽리로 이거하여 대죽파를 형성했다. 외가인 박씨가문의 제사를 모셨다. 이선(李宣), 이헌(李憲), 이재(李宰) 세 아들을 두었다. 이의의 아들 이헌은 대죽파로 이헌의 아우 이재는 진걸파로 분화되었다. 이헌의 증손자 이찬한(1610∼1680)이 인조26년 갑과 2등으로 대과에 합격했다.
이식-이의 -이헌-이주도-이명-이찬한
계동(溪東) 이찬한은 1648년(인조 26)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에 갑과(甲科) 2위로 급제하였다. 1668년(현종 9) 삼척부사(三陟府使)로 있을 때 청도군수(淸道郡守)로 있을 때로 탄핵받았고 1676년(숙종 2)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
⑥-4. 온계파 이해
이식의 4자 온계(溫溪) 이해(李瀣, 1496~1550)는 문과에 올라 대사헌을 지냈는데 권신인 이기의 부하인 이무강의 탄핵으로 갑산으로 유배 가던 길에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영주 삼봉서원(三峰書院)에 김이음(金爾音)·이해(李瀣)·김개국(金蓋國)·김융(金隆)등과 봉향(奉享)되었다. 예안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567년 관작이 회복되고, 1691년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1784년에 시호를 받았다. 정민(貞愍)이다.
관련 유적과 유물 -
▲온계종택(삼백당종택)
▲ 청계서원현판
▲영주 삼봉서원(三峰書院)
삼백당 종택은 온계 이해(1496~1550)선생의 종택으로 원래 노송정종택 옆에 있었으나 구한말 의병전쟁당시 온계 12종손 이의화의 동생 이인화(1859~1929,건국훈장 애국장)가 예안의병장으로 활약함에 앙심품은 일본군이 방화로 소실되었고 종가는 탄압을 피해 청송,에천.문경등지로 전전하다 해방후 온혜온천 부근 산자락에 취미헌(聚微軒)이란 정자를 종택으로 사용하다가2010 복원하였으며 온계의 손자 이유도의 당호를 따라 '삼백당'이라고도 한다.
온계선생은 1528년 문과에 급제하여 1544년 대사헌이 되어 윤원형 일파인 이기를 탄핵한다. 그 여파로 1550년 갑산으로 유배가다가 양주에서 별세한다. 정부인 연안김씨와의 사이에 이복(李宓), 이영(李寗),이교, 이치, 이혜 등의 아들을 두었다. 이복은 예천 신당동에 살았으며, 자손이 없다. 이영은 자가 노경(魯卿)이고 호가 만랑(漫浪)이며, 1527년에 태어나서 1588년에 죽었다. 진사인데 음사로 현감을 지냈다. 묘는 연곡에 있다. 배위 경주이씨와의 사이에 유도(有道)가 있다. 유도의 계열은 유도-봉-빈한-재광-민정으로 이어졌다. 이해의 아들 이영은 백당종파, 이교는 원암파, 이혜는 감천파로 분화되면서 온계파를 형성한다.
한편 이해- 이헌-이미도로 이어져 오다가 이양이 인조대에 문과급제하여 사헌부 장령을 역임했다. 이미도(李味道 : 1564년(명종 19)-?)는 호명면 사월리(沙月里) 신당동(神堂洞) 진성 이씨 입향조이다.
이동순(李同淳; 1779 ~1860)은 이해(李瀣)의 후손. 구천(龜天)의 자이다. 1807년(순조 7)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모관(禮貌官)으로 통정계(通政階)에 올라 호조참의(戶曹參議)ㆍ승정원둥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ㆍ우승지(右承旨)ㆍ한성좌윤(漢城左尹)ㆍ형조(刑曹)ㆍ병조참판(兵曹參判)을 역임했다.
⑥-5. 이징의 신야정파
이식의 5자 신야 이징(李澄, 1498~1582)의 아들 이주는 옥천파, 이건은 동간정파로 분화하면서 신야정파를 형성했다. 칩와당 고택(도산면 온혜리 310)은 칩와당 이장형(李長亨, 1597~1671)의 가옥으로 퇴계선생의 숙형인 이징을 봉제사하는 실질적인 종택건물이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36호로 지정되었다.
5세
6세
7세
이계양
이식
이인
이하
이완
이완도
안동 온혜종파
이굉
이열도
예천 백송파
이성
영덕 원고종파
이의
예천 대죽파
이헌
용궁파
이재
진걸파
온계 이해
이녕
백당종파
이교
원암파
이혜
감천파
이징 신야정파
이주
옥천파
이건
동간정파
⑦퇴계 상계종파
⑦-1. 이준-이안도
이식의 막내인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은 퇴계는 21세에 허원보의 손녀이자 허찬의 따님과 혼인하여 준과 채를 두었다. 그러나 27세 때 부인이 둘째 아들채를 낳고 한 달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장남 이준(李寯, 1523년 - 1583년)은 61세까지 살았으나, 차남 채는 태어나자마자 모친을 여읜 탓인지 22세로 요절했다.
이후 퇴계는 30세에 안동에 귀양와 있던 권질(權礩, 1483-1545)로부터 딸을 거두어달라는 간곡한 부탁을 받고 재혼하였다. 후처인 안동권씨(權氏, 1502년? - 1547년)는 권항-권이-화산 권주로 이어지는 복야공파 가일마을 출신이다. 권주는 권질(1483~1535), 권전(1490∼1521) , 권굉(1494~?) 등의 아들을 두었는데 권질의 따님이 퇴계에게 시집왔다. 가일종택은 입향조 정랑 권항에 이어 손자 화산 권주(1457~1505), 아들 사락정 권질(1483~1535)로 이어졌으나 온가족이 참혹한 화를 당하여 화산의 넷째아들 권굉(1494~?)이 가통을 계승하여 화산의 7대손 병곡 권구(1672~1749)가 학행으로 불천위로 모셔지면서 병곡종택이라고 한다. 이 가문은 갑자사화, 신사무옥, 이인좌의 난때 큰 화를 당했다.
한편, 허찬의 동생 허권의 손자 허언심은 망우당의 매부이다. 이준은 상계종파, 이채는 남해파, 이적은 울진파로 분화되면서 상계파를 구성한다. 후처인 안동권씨는 권환-권이-화산 권주로 이어지는 가일마을 출신이다.
한편, 이준은 금척의 현손인 금재의 따님과 결혼했다. 이준의 처남들은 금응협, 금응훈이다. 퇴계의 손자인 안도와 순도는 부친상을 당한 다음 해에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
몽재 이안도李安道(1541-1584)가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열녀 권씨 부인은 양자 이억의 혼례를 치루고 난 후에 자진하였다. 그녀가 말하기를 “내가 죽지 못하고 명을 이어 가는 것은 다만 후사 때문이다. 만일 후사를 세우지 못하고 죽으면 저승에서 무슨 낯으로 그이를 대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결국 후사는 조카 억으로 결정되었고 권씨는 23세의 나이에 자결하였다. 1616년(광해군 8)에 일이 알려져 정려가 내려졌으며 『삼강행실도』에 보인다.
이안도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이황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이덕홍(李德弘), 금난수(琴蘭秀), 김전, 금응훈(琴應壎) 등과 교유하였다. 문집으로 『몽재집(蒙齋集)』 3권 1책이 있다. 동계서원(東溪書院)에 배향되었다. 동계서원은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부포리에 있었는데,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이수연은 호는 청벽(靑壁)·후촌(後村).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6세손이다. 고조부는 이안도(李安道), 증조부는 이억, 아버지는 이실(李宲),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금옹 김학배(金學培)의 딸이다. 김학배는 김윤(金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시경이고, 아버지는 김암(金黯)이며, 어머니는 이의준(李義遵)의 딸이다. 이수연은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집으로 『청벽집(靑壁集)』 4권 2책이 있다. 또 선조인 이황의 글과 행적을 수집하여 『퇴계일집(退溪逸集)』, 『퇴계시주해(退溪詩註解)』, 『도산제자록(陶山弟子錄)』 등을 저술하였다.
진성이씨 상계파는 다음과 같다.
(1代)八世-(諱)준寯(1523-1583):字-정수廷秀,첨정(僉正),봉화현감(奉化縣監)
(2代)九世-(諱)안도安道(1541-1584):字-봉원逢原,號-몽재蒙齋,進직장(直長)
(3代)十世-(諱)억:[系后] 참봉(參奉) (4代)十一世-(諱)명철命哲:참봉(參奉)
(5代)十二世-(諱)고:[系后] 군수(郡守) 예천공 (6代)十三世-(諱)수겸守謙:현령(縣令) (7代)十四世-(諱)세덕世德:현감(縣監) (8代)十五世-(諱)귀응龜應:십매헌十梅軒,군수(郡守) 백천공(9代)十六世-(諱)지순志淳:성류정省流亭,군수(郡守) 익산공
(10代)十七世-(諱)휘령彙寧(1788-1861):[系后] 字-군목君睦,號-古溪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동복현감(同福縣監),동래부사(東萊府使),進별총관(別摠管) (11代)十八世-(諱)만희晩憙:[系后] 지하芝下,진사(進士)
(12代)十九世-(諱)중경中慶:참봉(參奉) (13代)二十世-(諱)충호忠鎬:하정霞汀,참봉(參奉)
(14代)二十一世-(諱)원각源慤 (15代)二十二世-동은東恩(1909~2009),기유 경오 무진생 翁 (16代)二十三世-돈환惇煥:戶名-근필 (17代)二十四世-치억致億 철학박사(18代)二十五世 -이석怡錫
관련 유적과 유물 -
▲퇴계 종택(退溪宗宅) 경북 기념물 제42호,
▲추월 한수정(秋月寒水亭),
봉화 닭실마을의 안동권씨 집안 창설재 권두경(1654-1725)이 1715년 퇴계문인 후예의 도움을 받아 지었으나 일제에 의해 1907년 불타 없어졌고, 1926년 상주 도남서원에서 도회(道會)를 열고 전국에서 400여 유림과 문중에 비용을 부담하여 새로 세운 것이다.
▲안동권씨 열녀정려각
▲계상서당(溪上書堂)
퇴계선생께서 풍기군수를 사직하고 1551년 지은 후 독서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퇴거계상이라하여 거처한 곳이 한서암과 계상서당이다. 겸재의 계상정거도는 퇴계의 주자서절요를 집필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그렸다고 한다.
⑦-2. 이준-이순도(의인파)
이순도의 후손들은 번남댁의 종가를 이어온 사람들은 의인파(宜仁派)에 속한다. 의인파는 의인마을(도산면 의촌리,도산서원 건너편))을 중심으로 하여 번성한 분파이다. 의인마을은 의인촌, 의인리라 부른다. 퇴계선생도 태평연화 의인지촌이라 하여 여유롭고 아늑한 풍경을 시로 묘사할 만큼 의인마을의 풍경음 아름답다. 이황의 큰 아들 이준(李準)의 세 아들 중 둘째인 이순도(李純道,1554~1584))로부터 이 계열은 흘러 내려온다. 이순도는 자가 순보(醇甫)이고 1554년(명종 9)에 출생하여 1584년(선조 17) 31살에 선친상에 여묘살이하다가 병을 얻어 타계하였다. 선산김씨와의 사이에서 난 아들 이율(李嵂,1583~1615)은 )은 겨우 한 살이었다.
이율은 외롭게 선장하다가.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16세의 나이에 숙부인 동암을 따라 곽재우 장군이 지휘하는 창녕 화왕산성에 출전할 만큼 용감했다. 30세에 퇴계의 증손자의 특전으로 천거되어 관직에 나아갔으나 갑자기 33세의 나이에 별세하고 말았다. 이 당시 이율의 아들인 이영철(1607~1681)은 겨우 8살이었다.
이영철은 조부와 부친이 일찍 별세하여 혼자서 의인파를 책임지는 막중함을 가졌다. 이후 그는 3대째 독자로 나려오던 의인파를 부흥시키고자 하회의 겸암 류운룡의 손녀인 풍산 류씨(1605~1666)와 결혼하여 4남2녀를 두었으나 모두 성혼하기 전에 요절하고 말았다. 할 수 없이 11촌 질자인 이재건(1644~1664)을 입양하여 의인파의 대를 이어갔다. 그러나 이재건도 겨우 21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런 일련의 가문의 요절을 경험한 이영철은 환갑이 되던 해에 35살이나 어린 26세의 권씨부인(1642~1721)을 재취로 맞이하여 3남 1녀를 둔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그의 장남인 이량(1668~1685)은 18세에 요절하고 말았다. 차남인 이경(李檠, 1670~1688)도 19세에 요절했다. 대를 이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 지를 의인파의 주손인 이영철은 처절하게 경험한다.
이순도 계열이 의인에 기지를 잡아 의인파를 형성하는 데에는 이영철(李英哲)의 넷째 아들 이집(李集) 때부터이다.(퇴계-1대손 이준- 2자 순도 -이율-이영철-이량-6대손 이수증(생부는 이집)
이영철은 자가 명숙(明叔)이고 1607년에 태어나 1681년에 타계하였다. 그는 의인마을에 터를 잡았고, 처음 부인인 풍산류씨(류운룡의 로부터 낳은 자식들이 다 일찍 죽었으므로 이재건(在建)을 양자로 들였으나, 그가 또 자식 없이 죽음에, 후 부인으로 안동권씨를 맞아 3남 1녀를 둔다. 그 중 3남인 이집이 8남2녀를 두어 의인파는 재건의 토대를 마련했다. 수홍, 수항, 수증, 수굉, 수흠, 수괄, 수방, 수정 등의 8형제는 이 후 의인파의 중흥의 발판을 마련하는 퇴계의 6세손들이다.
진성이씨 의인파의 중흥의 기틀은 수월헌 이집(1672~1747)과 그 아들 8형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영철이 66세에 얻은 귀한 아들인 이집은 강정을 창건하고, 관료로 나가서는 의금부 도사와 삼가현감과 화순현감을 역임하고, 도산서원 산장으로 퇴계선생문집을 교정하여 간행하기도 하였다. 1728년의 무신란(이인좌의 난)때에는 퇴계종손 수겸과 함께 의병을 창의하기도 하였다.
수월헌은 현종조에 태어나 숙종, 경종, 영조시대를 살다간 인물로 그의 노력과 의지로 의인파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순도-이율-이영철-이집강정 마루에는 그의 아호인 수월헌의 현판이 있다.
이집의 8형제 중 장남인 이수홍(1693~1760)은 백부 이량의 후사가 되어 봉사손으로서의 역할을 다한다. 그는 호를 은졸재(隱拙齋)라 지어 의인마을을 지키면서 조부와 부의 유지를 받들었다. 아들 이세술(1711~1790)은 생원으로 음성현감을 역임하였다. 후손 가운데 귀석(1740~1807)은 신령현감, 사손 귀붕의 장자 병순(1751~1818)은 청안현감을 역임하였다. 귀붕의 차자 민순(1754~1822)은 도산별시 때 배상유사와 연빈을 맡아 접빈에 힘썼다. 대순(1766~1844)은 생원, 휘정(1781~1838)은 진사로 의금부 도사를 역임했다.
19세기 세도기에 들어와서 희승(1807~1889)은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만기(1825~1888)도 문과에 급제하여 초산부사 재임시에 선정의 덕으로 백성들로부터 만인산을 받아 2013년에 국립민속박물과에 다른 유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만형(1825~1877)도 문과급제하여 퇴계의 성학십도 병풍을 재종재인 만기로 하여금 고종에게 진상토록 했다. 만승(1821~1885)과 중철(1852~1930)은 진사로 군수를 역임했다. 선호(1874~1936)는 진사로 군수를 역임하였고, 신호(1903~?)는 의성, 달성, 경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수월헌 이집의 차남 산후재 이수항(1695~1768)은 중부 이경의 후사가 되어 감역에 천거되어 역임하였다. 그는 퇴계의 6세손으로 평생 퇴계의 학문을 탐구하여 가학을 계승했다. 그는 『문순공실기』, 『도산급문록』, 『사칠통변연원록부주』 등의 저술을 남겼다.
장남인 세택(1716~1777)은 1753년 한림소시에 급제하여 1755년에 영조에게 퇴계의 저술인 『성현도학연원』을 올려 영조가 친히 서문을 지으셨다. 1773년에는 특별히 가자되어 대서헌이 되었다. 『청량지』도 편찬하여 그의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휘림(1805~1893)은 문과에 급제하여 의인파의 중흥에 일조했다.
삼남 성헌 이수증(1698~1758)은 계후조몰한 이재건의 후사가 되었다. 그러나 본인도 후사가 없어 수염의 아들 세학을 입후하여 대를 이어갔다. 이수증의 아들 이세학(李世學)의 둘째 아들 이구천(李龜天)으로 연결된다. 이구천의 장자는 이동순(李同淳, 1779~1860)이다. 번엄 이동순(1779~1860)은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치옹 휘부(1809~1869)와 좌산 만윤(1834~1906)은 생원으로 삼척부사와 상주목사를 역임했다. 도운 중태(1872~1916)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역임했다. 이들 모두 동순의 직계후손으로 4대가 벼슬길에 나가는 영광을 누렸다.
이휘부와 이만윤부자는 번남댁을 99칸으로 지었다.
관련유적과 유물
◆현재 번남댁은 국가 민속문화재 제 268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4남인 설헌 이수침(1700~1731)은 이집의 후사를 이어갔다. 부친을 따라 무신창의를 하다가 사망하였다. 아들은 세원(도산지 편찬), 세문(진사, 직산현감 역임), 세직(숙부 수흠의 후사)이다. 학산 이중운(1844~1895)은 『연계고증』을 저술하였다.
5남 이수흠은 은 27세에 별세하여 수침의 자 세직이 후사를 이었다.
6남 이수염(1703~1779)은 4형제를 두었다.
7남 이수방(1706~1770)은 벼슬을 하지 않고 세광이 대를 이어갔다.
8남 경담 이수정(1709~1795)은 영춘현감을 역임하고 수직으로 동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문장력이 출중하여 많은 묘비문과 기문을 찬술하였다. 아들은 이세유이다.
진성이씨 의인파는 23세까지 의인파 사손은 퇴계-이준-이순도-이율-이영철-이량-이수홍-이세술-이귀붕-이병순-이휘문-이만희-이중석-이달호-이원유-이동저-23세 이희춘(1964~)으로 이어졌다.
특히 은졸재고택를 중심으로 의인파의 가세를 확대해나갔다.
관련유적과 유물
◆은졸재고택
⑧-1. 동암 이영도(하계파)
동암 이영도(1559∼1637)기미 갑술 기묘일)는 장수했다. 이후로는 자손이 번성했다. 숙인(淑人) 권씨(權氏)는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손녀이다.
이황(李滉)의 장자인 이준(李寯)의 셋째 아들 이영도(李詠道)는 1559년에 출생하여 1637년에 타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는 안동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군과 싸웠으며, 명군의 군량미를 조달하여 수송하는 데 큰 공을 세워 호조좌랑과 정랑에 오르기도 하였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에는 익산군수와 원주목사 등을 역임하였고, 1636년(인조 14) 군기감정에 올랐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추록되었으며,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묘는 묘지동에 있다. 정부인 안동권씨와의 사이에 이기(李岐), 이억(李嶷), 이계 세 아들을 두었다. 둘째 이억은 형 이안도의 후사를 잇게 하였다.
이영도의 후손은 하계파를 이룬다. 상계 종가 역시 그의 둘째 아들이 후사를 이어, 이황의 가계는 이영도의 후손들에 의해 대표된다고 할 수 있겠다.
장자 이기는 자가 사숙(士夙)이고, 호가 수졸당(守拙堂)이다. 1591년에 출생하여 1654년에 죽었다. 묘는 재산에 있다. 풍양조씨와의 사이에서 이희철(李希哲), 이극철(李克哲)을 낳았다.
관련 유적과 유물 -
▲수졸당종택 및 재사(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0호)
수졸당(守拙堂)은 진성이씨 하계파의 종택이다. 퇴계 이황의 손자인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 1559~1637)선생이 분가 하실 때(17세기) 지어진 이 집은 '하계종택' 또는 '동암종택' 이라 하나 동암의 장자 수졸당(守拙堂) 이기(李技 1591~1654)선생의 호를 당호로 사용하여 수졸당으로 명명되었다.
▲동암 묘소
수졸당 뒤편 산에는 퇴계선생과 선생의 큰며느리 봉화금씨의 묘소가 있고 앞편 산에는 퇴계선생의 손자인 동암의 묘소가 있다.
이영도의 셋째 아들 이계는 자가 이사일(李士逸)인데, 통덕랑이다. 1610년에 출생하여 1675년에 죽었다. 영천이씨와의 사이에서 이후철(後哲)을 낳았다.
이영도의 맏손자이자 이기의 장자 이희철은 자가 이원명(李原明)이고, 찰방이며, 증직으로 이조참의를 받았다. 1622년에 출생하여 1693년에 타계하였다. 숙부인 풍천임씨와의 사이에 이괴, 이주(李柱), 이환(李桓) 세 아들을 두었다. 이희철의 묘소는 백운지에 있다.
이괴(1640∼1717)는 자가 자실(子實)이고, 인조 경진년(『하계파보』에는 효종 경진년이라 되어 있으나 동생인 이주가 계사년(1653년)생이고, 아들 이수약이 현종 경자년(1660년) 생인 것으로 보아 인조 경진년(1640년)의 오자로 보아야 한다.) 출생이고, 1717년에 사망하였다. 백운지에 묘소가 있다. 배위 광산김씨와의 사이에 아들 이수약(李守約)이 있다. 퇴계-이준-이영도-이희철-이괴-이수약
이괴로부터 『진성이씨하계파세보』는 역사를 조선 임금의 이름을 넣어서 표시한다. 효종시대부터 이런 특징이 나타나는 것인데, 효종의 북벌 의식, 명나라에 대한 숭정처사 의식, 청나라에 대한 복수설치 의식 같은 것들이 그 배경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수약(1660∼1735)은 자가 약증(若曾)이고, 정부인 진주강씨와의 사이에 이세진(李世震), 이세관(李世觀), 이세항(李世恒), 이세사(李世師), 이세형(李世亨), 이세정(李世貞), 이세영(李世榮) 등의 아들을 두었다. 후에 세사(世師)가 귀하게 됨으로써 증직으로 이조판서를 제수 받았다. 묘는 불모동(不暮洞)에 있다.
문과 급제한 이세사는 『만화헌일고』를 남겼다.
이세진(1680∼1715)은 자가 형백(亨伯)이고, 문과 출신으로 사서(司書) 직책을 역임하였다. 청주정씨와의 사이에 이귀범(李龜範), 이귀하(李龜夏) 두 아들을 두었다. 하계파의 종계는 동암 이영도-수졸당 이기-이희철-이괴-이수약-이세진-이귀범 -이양순(李養淳) - 이휘근(李彙謹)으로 이어진다. 휘근은 양자인데 이귀하의 장자인 이경순(李景淳)의 큰 아들로 종계로 들어가 이양순의 후사를 이었다. 이휘근의 후사는 이만우(李晩遇) - 이중성(李中誠) - 이종호(李宗鎬) - 이언구(李彦求) - 이동욱 - 이필화(李必華) - 이재녕(李載寧) - 이상원(李商源) 등으로 이어진다.
“선인은 내 나이 16세에 돌아가셨고, 조부는 14세에 돌아가셨어요. 밖으로 나돌다가 내 나이 62세가 돼서야 돌아왔지요.”
지금 수졸당종택의 주인인 진성이씨 24세 이재녕(李載寧)은 회한이 많다. 젊은 날을 낭비하고 이제 돌아와 혼자 종택을 지키고 앉아 있으니 조상님께 면목이 없다는 생각을 하는 모양이다. 이재녕의 자는 목여(睦汝)이고, 1935년 생이며, 배위는 의성김씨이다.
문과 급제한 이수약의 아들인 이세사는 『만화헌일고』를 남겼다. 전라도 출신의 매천 황현(梅泉 黃玹 : 1855~1910), 충청도 출신의 일완 홍범식(一阮 洪範植 : 1871~1910 : 벽초 홍명희의 부친)과 함께 1910년 순국한 향산 이만도(響山 李晩燾 : 1842~1910)의 고조할아버지가 이세사이다.
향산 이만도의 고조할아버지 이세사(李世師)는 문과에 급제한 학자·관인(官人)이었고, 증조부 이귀서(李龜書)도 학문이 높아 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나 출사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했던 학자였다. 할아버지 이가순(李家淳)은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응교에 이른 문신으로 하계(霞溪)라는 호로 널리 알려진 분이며, 아버지 이휘준(李彙濬)도 호가 복재(復齋)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오른 명망 높은 선비였다. 거기다가 자신이 문과에 장원급제했으니 이 집안은 대단했다.
이가순(李家淳,1768∼1844)은 호는 하계(霞溪). 이황(李滉)의 후손으로, 만화헌 이세사(李世師,1694∼1754)의 손자이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귀서(龜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정랑 오응(五應)의 딸이다. 성균관에서 수학할 때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참봉으로서 1813년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1831년 선전관에 이어 사간원정언·홍문관수찬·사헌부장령·응교·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데 노력하였다. 『주역』과 시, 고금의 역사공부에 힘을 기울였다. 저서로는 『하계문집』이 있다.
이휘준(李彙濬:1806 ~ 1867)은 호는 복재(復齋). 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가순(家淳)의 자. 이용석(李龍錫)의 문인. 1856년(철종 7)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대사간(大司諫)ㆍ호조참의(戶曹參議)ㆍ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1866년(고종 3) 대사성(大司成)에 올랐다. 저서로는 『복재집(復齋集)』이 있다.
동암 이영도-수졸당 이기-이희철-이괴-이수약-이세사(문과급제)-이귀서-이가순(문과급제)-이휘준(문과급제)-이만도(문과 장원급제)로 이어진다.
이세윤(李世胤)의 시문집으로 역와집 [櫟窩集]이 있다.
후계 이이순( 李頤淳 ; 1754∼1832)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9세손으로 아버지는 이구몽(李龜蒙)으로 8세 때 팔촌형 이세윤(李世胤)으로부터 『소학(小學)』을 배웠다. 1779년(정조 3)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6남 2녀 가운데 차남으로 6형제 중 유일하게 현감 벼슬을 했으며, 형제 중 문장이 가장 뛰어났다.
몽재(蒙齋) 이안도(李安道), 청벽(淸壁) 이수연(李守淵), 만호(晩湖) 이세정(李世靖) 등의 유문을 수습해 『계산세고(溪山世稿)』 3책을 만들었다. 이이순은 음양서와 농공 기술에도 두루 통달했으며 평소 절약하는 생활을 하였다. 문집으로 『후계집(後溪集)』 10권 6책이 있으며, 문집 중에는 「화왕전(花王傳)」과 「일락정기(一樂亭記)」가 포함되어 있다.
조은 이세택(1716∼1777)은 이황(李滉)의 8대손이며, 이영철(李英哲)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이경(李檠)이고, 아버지는 감역 이수항(李守恒)이며, 어머니는 안노석(安老石)의 딸이다. 1753년(영조 29) 정시문과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1762년에 우부승지에 오르고 그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다. 대사간을 제수받았을 때, 신임사화의 죄인인 이광사(李匡師)를 정계(停啓)하지 않았다 하여 유배되었었다.
1768년 인동부사로 있을 적에 살옥(殺獄)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였다고 탄핵을 받고 단양에 유배되었는데, 이 때부터 시파(時派)로서 벽파(僻派)의 탄압을 받았다. 그 뒤 정조가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벽파 정후겸(鄭厚謙) 등을 규탄하여 죄상을 밝혔다. 이어 『명의록』을 편찬할 때에 찬집당상이 되었다. 시문집으로 『조은유고(釣隱遺稿)』가 전한다.
이야순(李野淳)은 호는 광뢰(廣瀨). 증조부는 이수약(李守約), 할아버지는 이세관(李世觀), 아버지는 이구휴(李龜烋),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이약송(李若松)의 딸이다. 처는 두 명을 맞이하였다. 첫 번째 부인은 풍산류씨(豊山柳氏)로 류관춘(柳觀春)의 딸인데, 자식 없이 요절하였다. 두 번째 부인은 전주류씨(全州柳氏)로 류호문(柳虎文)의 딸인데, 두 딸만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막내 동생 이암순(李巖淳)의 둘째 아들 이휘정(李彙政)을 후사로 삼았다.
초년에 족부(族父)인 이구경(李龜敬)에게 글을 배웠으며, 후에 이상정(李象靖)과 김종덕(金宗德)에게 수학하였다. 문집《광뢰집》, 편저《도산연보보유》등이 있다.
이효순(1789 ~ 1878)은 이황(滉)의 후손. 세익(世翊)의 자. 1822년(순조 22) 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후 대사간(大司諫)ㆍ형조참의(刑曹參議)ㆍ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거쳐 1850년 좌승지(左承旨)로 특진관(特進官)을 겸하여 자주 경연(經筵)에 입시했다. 1855년(철종 6) 형조판서(刑曹判書)ㆍ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에 제수되고, 18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귀향했다.
이휘병(李彙炳;1790 ~ 1869)은 호는 소계(素溪). 황(滉)의 후손. 이순(頤淳)의 자. 1855년(철종 6) 경상도 유생의 경모궁(景慕宮 : 사도세자와 그의 비 헌경왕후의 사당)을 추숭(追崇)하는 전례(典禮)를 요구하는 상소의 소두(疏頭)로 활약했다.
이만운(李晩運;1815 ~ 1886)호는 쌍취(雙翠). 황(滉)의 후손. 참판(參判) 언순(彦淳)의 손자. 휘정(彙廷)의 자. 유치명(柳致明)의 문인으로 1843년(헌종 9)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은 경주부윤(慶州府尹)ㆍ병조참판(兵曹參判)을 역임했다.
⑧-2. 동암 이영도(하계파)의 독립운동
퇴계종가를 지나 얼마를 가다보면『하계마을독립운동기적비』가 나온다. 하계마을에서 이 기적비를 제외하면 진성이씨 하계파 문중의 450년 역사를 더듬어 내기는 정말 어렵다. 더구나 이 쇠락한 마을에서 근대 민족 문제에 맞서 자신들을 불살랐던 독립운동가가 25명이나 배출되었다는 사실은 이 기적비가 아니면 알 수 없을 것이다.
하계는 퇴계종가에서 다시 갈라져 나온 퇴계(退溪) 손자, 동암(東巖) 이영도(李詠道)의 후손들이 살았던 마을이다.
하계마을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인 향산 이만도(李晩燾)와 동은 이중언(李中彦)은 1895년 선성宣城(예안)의병에 나섰다. 이어 나라가 망하자 ‘단식’이라는 처절한 방법으로 잠시나마 나라의 녹을 먹었던 관리로서의 책임을 스스로에게 물었다. 이들의 죽음 앞에 하계마을의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걸음걸음을 민족 위해 내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영향으로 하계마을에서는 예안면과 도산면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한 이동봉(李東鳳)ㆍ김락(金洛)ㆍ이비호(李丕鎬)ㆍ이기호(李琦鎬)ㆍ이용호(李用鎬)ㆍ이극호(李極鎬)ㆍ이호준(李鎬俊), 유림단의거(파리장서운동)를 주도한 이중업(李中業),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렸던 이동흠(李棟欽)과 이종흠(李棕欽),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한 이원일(李源一), 창씨개명에 반대하여 자결한 이현구(李賢求) 등 20명이 넘는 독립운동 유공자가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는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향산 이만도 일가는 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안동의 정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예안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자정순국의 길을 걸은 향산 이만도에 이어 그의 아들 이중업은 독립청원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며느리 김락은 3ㆍ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고문으로 실명을 당한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또한 손자 이동흠과 이종흠은 대한광복회와 제2차 유림단 의거를 주도하였다.
관련 유적과 유물 -
▲안동 향산 고택 (安東 響山 古宅)- 국가민속문화재 제280호
1949년 이만도가 순국한 장소인 청구리에 유허비가 세워졌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1986년 3월 1일에는 한 집안 삼대의 독립 유공을 기려 이만도 집안이 ‘삼대 독립운동 가문’으로 지정되었다.
(2). 진성이씨후손들의 활약상
퇴계도 문과를 거쳐 관직에 나갔으나 벼슬보다는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써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지어 300여명의 인재를 배출하고 성리학의 태두가 되었다.
진성이씨는 송재 이우가 문과 급제한 이래 60명 문과급제 가운데 장원급제가 4명(이이송,이효순,이만덕,이만도)이고 당상관을 23명 배출했다. 그중에서도 퇴계의 후예가 가장 번성하여 32명을 배출하였다.
퇴계의 손자 이안도(李安道, 1541~1584), 이영도(李詠道, 1559~1637) 형제를 시작으로 이수연(李守淵), 이세진(1680∼1739), 만화헌 이세사(李世師,1694∼1754), 이세윤(李世胤), 동병 이세태(1698∼1760), 이세백, 조은 이세택(1716∼1777), 이귀운(李龜雲), 이야순(李野淳),농와 이언순(1774∼1845), 형조참판 이동순(1779∼1860), 이태순(李泰淳), 하계 이가순(李家淳,1768∼1844), 이효순(1789∼1878), 이휘령(李彙寧), 이만덕, 이만용(李晩容), 이중두(李中斗) 등으로 대를 이어 가학과 벼슬을 이어왔다.
한말 일제강점기에는 위정척사운동의 영남만인소의 소두 이만손과 경술국치를 당하여 단식 순국한 이만도(李晩燾, 1841~1910)를 비롯하여 이중언(李中彦), 이중업(中業), 이동봉(李東鳳), 이육사(李陸史, 1904~1944, 본명 이원록) 등 30여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였다.
안동의 진성이씨는 현재 풍산읍 마애리, 와룡면 주하리, 도산면 온계리·토계리·의촌리·원촌리 퇴계 이황의 8세손인 이귀성(李龜星)이 정착한 뒤로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하면서 진성이씨 집성촌을 이루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시인 이육사(李陸史, 이원록)와 그의 형인 이원조를 배출함으로써 명성이 높아졌다.
등에 살고 있다. 그 중 이연의 후손들은 주로 종가를 중심으로 와룡면 주하리에 살고 있으며, 이종수의 후손 50여 호가 일직면 내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또 이흥양의 후손들은 풍산읍 마애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거해 오고 있다.
북후면 물한리에 송안군 묘소와 사당, 작산정사(鵲山精舍), 가창재사(可倉齋舍), 강당 등이 있고, 와룡면 주하리에 안동 진성이씨 종택 및 경류정, 이정이 심은 향나무가 있다. 도산면 온혜리에 이계양의 종가 및 노송정(老松亭), 퇴계 태실(退溪胎室), 이해의 종가인 삼백당(三栢堂)이 있다.
토계리 상계에 퇴계 종택(退溪宗宅) 및 추월 한수정(秋月寒水亭), 계상서당(溪上書堂) 등이 있고, 하계에 퇴계 묘소와 퇴계의 손자 이영도의 종택 및 수졸당(守拙堂)이 있다. 이 밖에 도산면 원촌리와 의촌리 등 도산면 일원에 분가한 후손들의 고택이 산재하고, 안동시 옥정동에 송재 이우가 지은 애련정(愛戀亭)이 있으며, 풍산읍 마애리에 이돈이 지은 산수정(山水亭)이 있다.
진성이씨는 현재 주하리 두루마을의 부사공 이정과 온혜 노송정 이계양, 퇴계의 숙부 옥정동의 송재 이우와 퇴계의 형 온계 이해 및 상계마을의 퇴계 이황, 퇴계의 손자인 하계마을의 동암 이영도, 원천리의 반초당 이명익, 일직 송리 후산 이종수, 녹동 나은 이동표 등 9분이 진성이씨가를 중흥시킨 인물로 불천위로 모셔져 있다.
3.퇴계학의 전개
퇴계학맥은 스승의 사후에도 그 제자들에 의해 고향인 안동과 인근 고을을 물론 우리나라 곳곳으로 계속 이어져 내려갔다. 이황의 문인록을 처음으로 편찬한 이는 이현일의 문도인 권두경(權斗經, 1654~1726년)이다. 그는 100여명의 문도에 대한 간단한 사적을 수집한『계문제자록』을 편찬하였는데, 그 후 이황의 후손 이수연(李守淵)이 60여명을 추가하여『도산급문제현록』이라고 하였다. 이후에도 이수항(李守恒)과 이야순(李野淳) 등의 손을 거쳐 모두 309명의 문도들을 수록하였다.
퇴계의 학맥을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크게 분류해 보면,
학봉 김성일 계통
학봉 김성일 →경당 장흥효 →갈암 이현일 →밀암 이재 →대산 이상정 →손재 남한조 →정재 류치명→→서산 김흥락 →석주 이상룡
김성일의 학문은 장흥효, 최현, 김응조, 김용 김용 1557년(명종12)-1620년(광해군12) 본관은 의성.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숙부 김성일의 도학 계승하여 청렴·지조를 겸비한 조선의 선비로,안동시 임하면 천전리에 자리 잡고 있는 귀봉 종가의 주인인 귀봉 김수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7세에 퇴계의 손녀 진성 이씨와 혼인했고, 34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운천은 퇴계 사후 3년 뒤에 도산으로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직접 퇴계 선생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을 평생의 아쉬움으로 여겼다 한다. 운천이 급제한 선조23년(1590) 증광시의 합격자의 면면을 보면 역사적으로 알려진 여러 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방에서 의령 남씨의 남이공이 갑과 1등으로 급제했고, 후일 학봉 김성일의 종사관으로 의병활동을 했던 송암 이로가 갑과 3등에 올라 있다.
그리고 운천이 병과 1등인데, 조선 중기 4대문장가 중의 한분인 월사 이정구가 병 20등, 청백리에 녹선되고 판서에 이른 연안 이씨 해고 이광정이 병과 2등, 안동 김씨의 대표적인 인물인 선원 김상용(청음 김상헌의 형님)이 병과 8등, 선조의 장인이며 형조판서에 오른 봉주 박동량이 병과 13등, 판서를 지낸 한산 이씨의 석루 이경전이 병과 5등이다.
이들은 관직이나 정치적인 위상 면에 있어서 운천보다 혁혁함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우선은 당파적인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노론과 북인 세력 하에서 남인의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운천은 사후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유덕을 기려 유림에서 노림서원, 덕봉서원, 묵계서원, 임호서원 등에 모셔 향사했다. 문집 6권 4책과 속집 3권 외에 호종일기 등을 남겼다. 행장은 옥천 조덕린이 모지명은 조카인 표은 김시온이 각각 지었고, 신도비명은 이재 권연하가 찬했다.
등이 계승했다.
내앞 의성 김씨의 문한(文翰)은 운천을 거쳐 경와 김휴, 금옹 김학배, 적암 김태중, 제산 김성탁, 구사당 김낙행으로 면면히 계승되었다. 그리고 운천의 현손(玄孫)인 칠탄(七灘) 김세흠(金世欽), 월탄(月灘) 김창석(金昌錫), 귀주(龜洲) 김세호(金世鎬)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는데, 이들은 세상에서는 ‘천전삼문관(川前三文官)’이라 기렸다. 17세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아울러 적암(適庵) 김태중(金台重)과 밀암(密庵) 이재(李栽)에게도 배웠으며, 고재(顧齋) 이만(李槾)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안무사(按撫使) 박사수(朴師洙)의 초청을 받아 용와(慵窩) 류승현(柳升鉉), 강좌(江左) 권만(權萬) 등과 창의하여 토역문(討逆文)을 지어 각지 유문(儒門)에 보내 의병 가담을 적극 권하였다. 그 공로로 안핵사(按覈使)의 천거로 참봉이 되었다.
이현일의 학문은 이현일의 학문은 그의 아들 밀암(密庵) 이재(李裁, 1657∼1730)를 거쳐 외손인 일직의 한산이씨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1∼1781),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형제에게, 이상정의 학통은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 1744∼1810), 구와(龜窩) 김굉(金宏 1739∼1816)에게 전수되고, 남한조의 학통은 다시 전주류씨의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에게로 이어졌다.
이재는 이현일·이휘일·이숭일 등에게서 수학한 퇴계 학봉계 학파의 주요 전수자로서 김태중(金台重)·김세흠(金世欽)·김창석(金昌錫)·김세호(金世鎬)·신익황(申益愰)·이만부(李萬敷)·권두경(權斗經) 등 당시 영남 일대의 여러 학자들과 학문적인 교유를 하면서 주리론(主理論)적 입장에서 성리학(性理學)을 연구하여 영남학파를 이끌어갔다.
이상정은 퇴계학맥의 중요한 계승자인 이재(李栽)의 외손으로 일찍부터 그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여 이황(李滉)-이현일(李玄逸)-이재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남한조(南漢朝), 김종덕(金宗德), 류장원(柳長源), 후산 이종수 등에게 전수하였다. 이재의 문하에서는 김익한(金瀷漢), 권정택(權正宅), 김낙행(金樂行) 등과 교유하였다.
이종수(李宗洙,1722년(경종 2)∼미상)는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학보(學甫), 호는 후산(后山). 아버지는 이덕삼(李德三)이며, 백부 이기삼(李起三)에게 입양되었다. 이종수는 19세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의 문하에 들어가 43년 동안 돈독한 사제지의를 맺었다. 대·소산의 후란 뜻으로 이상정이 후산(后山)이라는 호를 지어주었고 이종수도 평생 스스로 이상정과 이광정의 후배로 자처하였다. 이상정 사후에는 안동 지역의 강회를 주도하였고 북부 지역 사림들의 문헌을 교정·간행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특히, 이상정이 주도했던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의 교정·보완에 적극 참여하여 간행을 주도하였다.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일직면 송리리에 후산정사(后山精舍)를 짓고 독서하며 후진을 양성하고, 당대의 학자인 권구(權榘)·권덕수(權德秀)·김낙행(金樂行)·권상일(權相一) 등과 교유하였다. 이종수는 호문삼종(湖門三宗: 이종수·김종덕(金宗德)·정종로(鄭宗魯))과 호문삼로(湖門三老: 이종수·류장원(柳長源)·김종덕)의 한 사람으로 퇴계학의 정맥을 계승하였다.
대산의 학맥을 19세기 정재 류치명에게 연결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인물이 남한조( 南漢朝: 1744 ~ 1810 )이다. 자는 종백(宗伯), 호는 손재(損齋),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상주. 함창 등지에서 9세에 부친을 잃고 30세에 모친의 상을 당했으나 37세부터 대산 이상정의 문하생이 되어 역학과 사서와 성리서를 익혔으며 정재 유치명에게 전수하였다. 대산 문하의 고제인 이종수, 유장원, 김종덕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자 영남 퇴계유문의 종사로서 입재 정종로와 함께 학통을 계승하였다. 특히 천주학을 배격하였고, 순암 안정복(順庵 安鼎福)과 교유하였으며 허균의 행실과 성호 이익의 천주실의발문을 비판하였다. 인격형성의 함양법으로 주체성의 확립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경(敬)과 성(誠)에는 선후가 없다는 논리를 폈다. 대표적 문인으로 정재 유치명, 호고와 유휘문, 일빙재 김종문,율원 김양휴, 석간 서효원 등이 있다.
유치명의 학통은 이재(頤齋) 권연하(權璉夏, 1813∼1896), 학봉의 후손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1827∼1899)과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1825∼1912)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안동권씨 권연하 문하에서 진성이씨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1842∼1910), 김흥락 문하에서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 1858∼1932),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 1878∼1937), 김도화 문하에서 동산(東山) 류인식(柳寅植, 1865∼1928)이 있다. 이들은 모두 항일투쟁을 전개하여 위정척사와 의병및 항일투쟁으로 연결되는 영남인의 기개를 보여준 인물들이다.
이들은 각기의 시대에 수십명에서 700여명의 문도를 양성하여 안동지방에서 퇴계학의 심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대체로 안동지방에서 김성일의 문파를 이황의 적전으로 보는 이유는 이런 학맥의 전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다.
서애학맥
이황의 후학들 가운데, 학문을 후학에게 전수하여 근대에까지 이른 이는 김성일과 유성룡, 정구 세 사람이다. 이황을 가까이 모시기는 조목이 가장 오래 되었고, 도산서원의 이황 신위에 배향되기는 조목 한 사람 뿐이지만, 조목은 광해조에 대북파 정권과 괘를 같이 하여 학문의 전수가 지속되지를 못했다. 이 중에 김성일과 유성룡은 안동에 뿌리를 둔 세족 출신으로 중앙에 진출하여 높은 직위에 올랐고,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하여 후학이 끊이지 않았다.
경상도 성주 출신 학자 정구는 이황과 조식 양 문하에 모두 출입했으나, 뒷날 조식의 문인 내암 정인홍과 불화하면서 이황의 연원에 더욱 친밀한 관계가 된다. 유성룡의 학문은 사계 김장생과 논변한 우복 정경세에게 전수되었고, 정경세의 학문은 유성룡의 아들인 수암 류진(柳袗)을 거쳐 류원지(柳元之)에게 전해졌다. 정경세(1563~1633)는 인조반정 이후 영남의 남인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을 만큼 정치적으로도 비중이 있는 학자로서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다.
그는 특이하게 서인의 동춘당 송준길을 사위로 두어서 서인들과도 교류가 있었다. 그는 상주에 도남서원을 창건하였다. 그는 특히 예론에 밝았고, 이러한 그의 학문은 유진을 거쳐 유원지에게 이어졌다. 다른 제자로는 전명룡(全命龍)·신석번(申碩蕃)·강진룡(姜震龍)·황뉴(黃紐)·홍호(洪鎬) 등이 있다. 저서로는 『우복집』·『상례참고(喪禮參考)』가 있다.
졸재(拙齋) 류원지(1598년 ~ 1674년)는 역학과 예학에 뛰어나 이른바 1659년 기해예송에 송시열의 예론을 반박하는 영남남인소(嶺南南人疎)가 있을 때, 그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학자였다. 그는 영의정 류성룡(柳成龍)의 손자로, 장령 류여(柳袽)의 아들이다. 17세에 김성일(金誠一)의 증손녀인 김시추의 딸과 혼인하였다. 그는 정칙(鄭侙)·홍여하(洪汝河)·류천지(柳千之)·류세철(柳世哲) 등과 교류하였다.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동 지방의 의병장인 외사촌 한산이씨 안동 입향조인 이홍조(李弘祚)를 도와 큰 활약을 하였다.
류원지의 학문은 다시 정경세의 손자인 무첨 정도응(1618년 ~ 1667년)에게 전해졌고, 무첨 정도응은《국조명신록(國朝名臣錄)》《소대명신행적(昭代名臣行蹟)》《소대수언(昭代粹言)》등을 남겼다. 정도응은 경주 부윤을 역임한 야촌 손만웅(1643∼1712)에게 학맥을 전수했다. 그는 1784년(정조 8)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관동리 구호서원(龜湖書院)에 배향되었다. 1866년(고종 3) 불천위(不遷位)재실인 추모재(追慕齋)가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율리에 세워졌다.
이 학맥에서는 조선후기와 근대에 강고 류심춘(1762년 ~ 1834년)과 류주목이 배출된다. 류심춘의 아들이 유명한 낙동대감인 좌의정 류후조(1798∼1876)이다. 계당 류주목(1813년 ~ 1872년)은 류후조의 아들이다. 유주목은 성리학·예학·역사학·보학에 두루 통달했으며, 문장과 서법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다. 『전례유집(全禮類輯)』은 사례(四禮)·오례(五禮)·사상례(士相禮)·거가잡의(居家雜儀)를 두루 참고해 완성한 예학의 집대성이다. 『사칠논변(四七論辨)』은 성리학에 대한 선유들의 견해를 취합하여 편찬한 것이다.『조야약전(朝野約全)』은 당쟁에 대한 글들을 시대 순으로 정리한 것이다.『해동보(海東譜)』는 씨족의 계보를 밝힌 40책 분량의 역작이다. 문집으로는 『계당집(溪堂集)』이 있다. 계당 류주목의 가학은 민산 류도수(柳道洙 ; 1820∼1889)가 이었다.
그들은 모두 류성룡의 후손들이었다. 대체로 유성룡의 학맥은 풍천의 하회와 상주를 중심으로 계승됐으며, 하회는 유성룡의 후손들의 집성을 이루고 있으며, 상주는 정경세와 유진의 후손들이 살았던 곳이다. 상주시 중동면 우물리는 수암 류진의 종택이 있다.
서애의 학통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 아들 수암(修巖) 류진(柳袗, 1582∼1635),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1587∼1667)에게 이어지고, 정경세의 학통은 무첨재(無忝齋) 정도응(鄭道應, 1618∼1667)을 거쳐 남야(南野) 박손경(朴孫慶, 1713∼1782)에게 전해져 다시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1738∼1816)을 거쳐 강호(江皐) 류심춘(柳尋春, 1762∼1834)과 성주이씨의 한계마을 출신인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2)에게로 전해졌다. 이원조의 학통은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1818∼1886)에게로 이어지고 다시 면우(俛宇) 곽종석(郭鐘錫, 1846∼1919)에게 전해져 항일운동가이자 해방후 유림과 성균관대를 복원한 의성김씨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1879∼1962)에게 전수되었다.
③한강 정구 계통
정구→ 장현광→ 허목→ 이익→ 안정복→ 황덕길→ 허전→ 허훈→장지연
정구(鄭逑)는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초에 걸쳐 살면서 조선시대 도학의 전개과정에 매우 독특한 자리를 잡고 있다. 정구는 전형적인 관인 학자로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고르게 이어 받았다. 특히 17세기 영남예학파의 종장(宗匠)으로 등장하여 예학의 영역에서 이황의 학통의 계승ㆍ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따라서 당시 경상좌우도의 학풍인 경(敬)과 의(義)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실천유학적인 사상은 뒷날 근기실학파의 연원이 되었다. 또한 정구는 남북 노선이 크게 갈리는 광해군대의 북인정권 시대에 조식문하의 동문이던 정인홍(鄭仁弘)과 갈라섬으로써 남인세력의 구심점이 되었으며, 퇴계학단을 수습하고 재건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한강 정구는 중종 38년(1543) 성주 사월리에서 충좌위 부사맹을 지낸 부친 청주 정씨 사중과 모친 성주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정구의 조부 정응상(鄭應詳)은 김종직의 문인인 김굉필의 사위이다. 이런 인연으로 정구의 학통은 영남사림파의 정통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정구의 부친 정은중(鄭恩中)이 현풍 솔예촌(率禮村)에 살다가 성주 이씨를 배필로 맞이하여 성주 사월촌(沙月村)에 정착하였다.
정구는 9세 때 아버지를 여의였다. 13세 때 남명 조식과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및 이황의 문인으로 영호남의 중요 학맥을 모두 접하고 있었던 성주향교 교수로 있던 덕계 오건(德溪 吳健)에게 나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그는 10세 전에 이미 『대학』과 『논어』를 독파하였는데, 오건에게 처음 배운 것은 『주역』의 건곤(乾坤) 양괘였다.
21세(1563년) 때 중형(仲兄) 정곤수(鄭崑壽)와 함께 이황의 문하에 급문하였다. 그리고 남명 조식(南冥 曺植)에 나아가 배운 시기는 24세(1566년) 때였다. 이로부터 불과 몇 해 후에 이황(1570년), 조식(1572년), 오건(1574년) 등 정구의 스승은 차례로 임종했으므로 정구의 수업시대는 사실상 28세에 막을 내리게 된다.
61세 때에 정구는 정인홍과 절교를 한다. 정인홍은 강편한 성질로 벗삼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을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이언적과 이황을 배척하였기 때문이다.「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과「심경발휘(心經發揮)」 등의 저술을 한 것은 바로 이 무렵이다.
이듬해에는 김굉필을 배향하던 쌍계서원(雙溪書院)이 임진왜란 때 불탔으므로, 묘소 아래로 이건 하도록 현풍 사림들에게 건의하였다. 이 서원이 뒤에 사액을 받으니 오늘날의 도동서원(道東書院)이다.
65세 때 정월에 안동대도호부사에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에 동문 선배인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의 묘에 제사지내고 예안의 도산서원과 역동서원에 들러서 알묘하였다.
한강은 퇴계의 학문을 이은 다수의 문인 가운데에서 학문이 가장 순수하고 심원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의 학통은 성주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그의 학통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을 거쳐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에게로 전해졌다. 허목의 학통은 기호지방의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거쳐 성호 우파의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에게 전수되어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 1750∼1827)에게 이어지고 이는 다시 성재(性齋) 허전(許傳, 1797∼1886)을 통해 다시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에게 다시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지은 언론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에 이어진다.
④월천 조목
15세 되던 가을에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이후 평상시에도 늘 모시고 있어 가르침을 가장 많이 받았던 인물이 월천 조목(月川 趙穆, 1524~1606)이다. 사제의 연은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년 넘게 계속되었다. 그가 80이 넘어서도 도산서원에서 머물며 숙식을 하거나, 그것마저 할 수 없으면 매년 정초마다 도산의 상덕사에 배알하였다. 이황의 훈도로 출발한 그는 83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황의 가르침을 받드는 자세로 일관했다. 조목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집을 월천서당(月川書堂)이라 불렀으며, 이황이 손수 쓴 네 글자를 액자로 받들어 걸었다.
조목의 존재가 중앙에 알려지게 된 것은 선조 6년 삼공(三公)과 이조가 같이 논의하여 당대의 은일(隱逸)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이라 하여 이지함ㆍ정인홍ㆍ최영경ㆍ김천일 등과 함께 그가 천거되면서였다. 그는 다섯 인물가운데 수천(首薦)이었으며 단번에 參上으로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81세 때에 종2품인 가선대부로 공조참판의 직을 받기까지 40여차례에 걸쳐 혹은 품계가 오르고 관직이 제수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 사직하고, 소명에 응한 것은 몇 차례에 불과했다. 그의 「문도록」에는 권춘란, 이산해, 이준, 금경ㆍ금업ㆍ금개ㆍ금각의 4형제가 돋보인다. 이황의 수 많은 제자 중 유일하게 도산서원에 종향되었다. 조목의 문하는 광해군의 대북정권과 뜻을 같이 하다가 1623년 인조반정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⑤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는 이황의 문인인 광산김씨의 김부인, 김부필, 김부신, 김부의, 김부륜, 금응협, 금응훈을 말하는데, 이들 7인은 형제ㆍ4촌ㆍ내외종간의 관계이다. 그 중에 가장 연장자가 산남 김부인(山南 金富仁, 1512~1584)이다. 그는 일찍이 이황의 문하에서 배웠으며, 문예로써 이름이 알려졌다.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늦게야 무과에 합격했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청렴하고 검소하여 선산의 송당 박영(松堂 朴英)과 비교됐다. 저서로는 『상례문목(喪禮問目)』11조가 있다.
후조당 김부필(後凋堂 金富弼, 1516~1577)은 가학을 계승한 위에 이황을 찾아 도학에 심취했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세 번이나 참봉을 제수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심경문목(心經問目)』이 있다.
양정당 김부신(養正堂 金富信, 1523~1566)은 김부인의 친동생으로 이황의 문하에서 배웠다. 이황은 김부신이 유학에 뜻을 돈독히 한 것을 칭찬하였다.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일찍이 죽었다.
읍청정 김부의(挹淸亭 金富儀, 1525~1582)는 김부필의 친동생이다. 그는 형보다 앞서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업을 닦는 가운데서도 생각과 행동이 성현의 법도에 맞으니 이황은 그점을 항상 칭찬하였다. 역동서원을 처음 창설할 때, 산장(山長)이 되었다.
설월당 김부륜(雪月堂 金富倫, 1531~1598)은 김부인의 막내 동생이다. 16세 때 글을 읽다가 중국의 정명도가 16세 나이로 주렴계와 더불어 도학을 논했다는 대목에 크게 깨우침을 받고 이황 문하에 입문하였다. 그가 동복현감(同福縣監)으로 제수되었을 때 김부륜은 녹봉으로 800여권의 책을 구입하여 가난한 지방선비들에게 대여하는 등 학문을 적극 권장하였다. 매년 농번기에는 몸소 들로 나가서 농사를 권면하기를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하였으므로, 선비와 백성들이 사모하였고, 풍속이 크게 변화하였다.
일휴당 금응협(日休堂 琴應夾, 1526~1596)은 일찍 이황 문하에서 배웠는데, 이황이 중히 여겼다. 그래서 손수 편지하기를 ‘일휴’로 그 당호를 삼으라고 하였다. 또 ‘야기잠(夜氣箴)’ 좌우명을 써 주어 공부의 바탕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사마시에 합격, 천거되어 익찬(翊贊) 조선 태조 때 설치되어 세자의 시위(侍衛)를 맡아본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정6품 관직으로 좌익찬(左翊贊)·우익찬(右翊贊) 각 1명의 정원을 두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좌·우익찬을 통합하여 익찬으로 하고, 칙임관(勅任官)으로 보(補)하였다가 1895년 폐지하였다.
에 이르렀다. 낙천사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심경질의(心經質疑)』가 있다.
면진재 금응훈(勉進齋 琴應壎, 1540~1616)은 금응협의 동생이다. 일찍이 이황의 문하에 올라 한서암 옆에 집을 짓고 독실하게 배움에 힘썼다. 이황은 손수 면진(勉進)이란 두 글자를 써서 그 집을 명명해 주었다. 사마시에 합격하자 정탁본관 청주(淸州). 자 자정(子精). 호 약포(藥圃) ·백곡(佰谷). 시호 정간(貞簡). 이황(李滉)과 조식(趙植)에게서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1552년(명종 7)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에 급제한 뒤 정언(正言) ·헌납(獻納)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좌찬성으로 왕을 호종(扈從)하여 의주(義州)로 피란하였다. 1594년 우의정이 되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노령으로 전장에 나가 독려하려는 것을 왕이 말렸다. 1599년 사퇴했다가 이듬해 좌의정이 되고,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를 거쳐 1603년(선조 36)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가 되고, 이듬해 호종공신(扈從功臣) 3등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지고,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 명장을 발탁하였다. 1597년 이순신이 전장에 나아가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한산도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어 목숨이 경각에 처했을 때 선조에게 이순신을 변호하는 1298자의 신구차(伸救箚) 상소문을 올렸다. 이 일로 이순신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예천(醴泉)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문집에 《약포문집》 저서에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이 있다.
의 천거로 품계를 뛰어넘어 제수하였다. 두번 현감을 맡았는데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있었다. 또 의흥현감에 제수하였는데, 이 때 퇴계문집 간행을 시작하였다. 류성룡과 조목 등이 공사의 감독이 금응훈이 아니면 안된다고 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이 일을 감독하였다. 이황의 『사서석의』를 교정 간행하였다.
정경세는 주역과 계몽편을 가지고 그와 더불어 토론한 후 그의 탁월한 식견에 탄복했다고 한다. 낙천사(洛川社)에 제향하였다. 오천 군자들의 학문은 근시재 김해를 통하여 외내 김씨 가학(家學)으로 진행되었는데, 그는 임난 때 예안의병장으로서 국난의 극복에 힘을 쏟은 의사(義士)였다. 김해의 따님이 석계 이시명에게 출가하여 상일을 낳았다.
⑥기타 제자들
성성재 금난수
성성재 금난수(惺惺齋 琴蘭秀, 1530~1604)는 임천서당(臨川書堂)에서 강학하던 청계 김진(靑溪 金璡)에게서 수학하였다. 금난수는 이곳에서 김극일(金克一), 김수일(金守一), 구봉령, 이국량(李國樑) 등과 교유를 맺고 이들과 함께 독서한 내용을 서로 강론하여 마침내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터득하였다. 21세에 이황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또한 동계(東溪) 위에다 성성재(惺惺齋)를 신축하였는데,
이황은 손수 성재라는 편액과 임경대(臨鏡臺), 풍호대(風乎臺), 총춘대(總春臺), 활원당(活源塘) 등의 이름을 직접 지어 주셨다. 사마시에 합격하고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참봉에 제수되었고, 벼슬이 익위(翊衛)에 이르렀다. 이덕홍, 남치리, 구찬록 등은 모두 그로부터 감화받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후에 전란의 공훈으로 좌부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동계서원(東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송암 권호문
송암 권호문(松巖 權好文, 1532~1587)은 약관의 나이에 이황의 제자가 되었다. 평생 청성산에 살면서 후학을 가르쳤다. 집의 남쪽에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있는데 송암(松巖)이라 하였다. 권호문은 이곳에 한서재(寒棲齋)를 지었다. 그 문하에 권기(權紀), 신의립(辛義立), 배용길(裵龍吉), 정연(鄭淵)과 안여옥(安汝沃)이 있으며, 저술은 『송암집(松巖集)』이 있다.
회곡 권춘란
회곡 권춘란(晦谷 權春蘭, 1539~1617)은 본관이 안동으로 안동의 동가구리에서 태어났다. 만년에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에 옮겨 살았다.14세 때 구봉령의 문하에서 배운 뒤에 이황에게 사사하였다. 그는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 등 구류백가(九流百家)의 서적을 두루 섭렵하여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주역에 능통했다.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지평 등의 내직과 1592년 임란시 안동에서 김윤명의 의병에 가담하여 활약하였고, 1601년 청송 부사 등 여러 고을의 수령직을 맡았다. 예문관 검열겸춘추관 기사관을 역임한 뒤에 옥당에 들어갔다. 류성룡, 정구 등과 교유하였고 저술로는 「진학도(進學圖)」, 「공자언인록(孔子言仁錄)」,《회곡문집(晦谷文集)》이 있다. 구봉령을 모시기 위해 주계서원(와룡면 주계리에 위치)을 건립하는데 앞장섰다.
뒷날 용산(龍山) 백담사(栢潭祠)에 배향 되었다. 동생인 권춘계(權春桂,1544~?)도 권춘란을 따라 도산에서 퇴계의 학문을 수학하였다. 약봉 김극일과 같이 영산서당에 추입되었고, 아들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 1569~1631) 구봉령과 정구의 문인으로,1599년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이후 홍문관 교리, 관찰사와 대사간,형조 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장곡집》(3권 1책, 목판본)이 있다. 중년에 청기면 기포리에 거주하였다.
의 출세로 인하여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584년(선조17년) 영양군 청기면 기포리로 옮겨 살았다.
현재 기포리에는 회곡고택과 사당이 있다.
안동 권씨 별장공파(別將公派)는 派祖 권영정(權英正)의 9세손 권직균(權直均)이 신녕감무(新寧監務)를 지냈고 권직균의 아들 권구서(權九叙)가 와룡 가구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순흥 안씨 文成公 安向의 8세손 안선손(安善孫)이 권구서의 사위가 되어 처향인 와룡 가구에 이거함으로써 두 집안이 중가구리와 태리에 계거하고 있다.
권구서의 현손 회곡(晦谷) 권춘란(1539-1617)과 권춘란의 양자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1569-1631)은 부자가 문과에 급제하여 각각 사간원 사간과 형조참판을 지냈는데, 권태일은 학봉 金誠一의 사위가 된다.
안선손의 아들 안처정(安處貞)은 유일재 김언기(金彦璣)의 외조부가 된다. 안처정의 아들 안수(安琇,1489-1546)와 안수의 아들 동고(東皐) 안제(安霽,1538-1602)도 문과에 급제, 각각 고성군수와 충청도사를 지냈다.
회곡 권춘란과 동고 안제는 함께 퇴계 문인으로 동문수학하여 유독히 친밀하게 지냈는데 둘 다 아들이 없어 동생의 아들을 양자로 들였다. 회곡과 동고는 평소 농담으로 먼저 죽은 사람의 묘비명을 살아 남은 자가 지어 주기로 약속하였는데 1602년 동고가 먼저 죽자 회곡이 동고의 묘비명을 지었다고 한다. 동고는 아들이 없어 조카 安景淹을 양자하였는데 안경엄은 장곡 권태일의 사위(권춘란의 손서)가 되었으니 선대의 친밀한 관계가 후대에 까지 좋은 인연으로 맺어져서 두 집안이 와룡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안경엄의 아들 안헌(安憲)은 김영조(金榮祖)의 사위가 되었고, 증손자 保晩齋 안연석(安鍊石,1662-1730)이 문과에 급제하여 양산군수를 지냈고, 그 아들 택헌(擇軒) 안복준(安復駿, 1698-1777)도 문과에 급제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안동권씨 별장공파 중 또 한 갈래는 안동 풍산 오미동에 參巖亭과 忠烈祠를 수호하며 계거하고 있다. 권직균의 아우 權乙均의 6대손 參巖 權希仁(1558-1593)의 후예들이다. 삼암 권희인은 柳成龍의 문인으로 임란 당시 沃川縣監으로 밀려오는 왜적을 맞아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하였는데 조선왕조실록에 좌의정 尹斗壽가 임금에게 변방장수로서 선전한 이로 권희인을 지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권태일(權泰一,1569 ~1631)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안동(安東). 자는 수지(守之). 호는 장곡(藏谷). 내시교관(內侍敎官) 춘계(春桂)의 자로 백부 춘란(春蘭)에게 출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사위. 구봉령(具鳳齡)의 문인. 1591년(선조 24)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99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였다.
와룡(臥龍) 이산사(尼山祠)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 『장곡집(藏谷集)』이 있다.
■國朝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간재 이덕홍
간재 이덕홍(艮齋 李德弘, 1541~1596)은 농암 이현보(聾巖 李賢輔, 1467~1555)의 종손(從孫)이다. 그의 나이 18세 되던 명종 13년(1558년) 가을에 금난수에게서 고문을 수업하기 시작하면서 학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가 이황에게 배우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인 명종14년이다. 이황은 그가 나이가 어리면서도 뜻이 두텁고 말씨와 행동이 온화함을 가상하게 여겨 이름을 덕홍이라 지어 주었다. 이후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여 년 동안 측근에서 늘 그와 함께 생활하였다.
이덕홍은 성리학 뿐 아니라 우주천체에 대한 자연과학 분야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30세때 이황의 명을 받아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측도하던 기구인 혼천의(渾天儀)와 선기옥형(璇璣玉衡)을 제작하였다. 특히 그가 임진왜란을 만나 거북선의 원설계도로 추측되고 있는 구갑선도(龜甲船圖)를 제작한 것은 놀랄만한 사실이다. 유림사회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덕홍이 제작한 거북선의 설계도는 류성룡에게 넘어가 이순신에게 보내졌다는 설과 이황의 문인이며 이순신의 형인 이요신을 통해 이순신에게 전해졌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세상을 떠난 뒤에 오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이덕홍의 제자에 오흡 [吳潝, 1576~1641]이 있는데, 경북 영양군 영양읍 대천리(大泉里) 출생의 조선시대 문인이다.
이덕홍(李德弘)의 문인으로 오흡이 있다. 본관은 함양 우리나라 모든 오씨는 중국 강소성 무석시 매촌(梅村)에서 발원한다. 오씨의 득성(得姓) 시조는 오태백(吳泰伯)으로 주나라 고공단보(古公單父)의 아들 3명이다. 첫째가 태백, 둘째가 중옹(仲雍), 셋째가 계력(季歷)이다. 계력의 아들이 문왕(文王)이며, 문왕의 아들이 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武王)이다. 일찍이 고공단보가 왕의 자리를 셋째 계력에 넘기려 하자, 동생 중옹과 함께 무석(無錫)에 내려와 구오(勾吳)라는 나라를 세웠다. 여기서부터 오씨들이 시작되었다. 오씨 대동보에 의하면 오씨의 도시조 오첨(吳瞻)은 신라 지증왕 때 중국에서 건너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 때 그의 둘째 아들 오응(吳膺)은 그대로 남아 함양에서 살았으며, 그 뒤 오응의 12세손 오광우(吳光佑)가 중국에 들어갔다. 그의 현손 오연총(吳延寵)이 문종 때 다시 고려에 건너와 정착했으므로 오연총은 오씨의 중시조가 된다. 그는 고려 예종 때 부원수로 북변의 여진을 토벌하고 이부 예부 병부의 판서를 역임한 명신이다. 본관은 해주, 동복, 보성, 나주, 함양, 고창, 군위, 낙안 등 모든 오씨가 한 뿌리이다. 함양오씨(咸陽吳氏) 시조 오광휘(吳光輝)는 도시조 오첨(吳瞻)의 24세손 오현필(吳賢弼: 보성오씨의 시조)의 셋째 아들로 고려시대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흥위위상장군(興威衛上將軍)으로서 거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추충정란광국일등공신(推忠靖亂匡國一等功臣)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랐으며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보성오씨에서 분적하여 함양을 관향으로 삼았다. 주요세거지는 경상북도 영양군 영양읍 대천동, 경상남도 진양군 미천면 상미리 ,황해도 송화군 운유면 다천리이다.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함양오씨는 8,270가구 총 26,339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출전 : 성씨와 본관 한국학중앙연구원편, 2009
으로 함양오씨는 함양부원군 오광휘(吳光輝)를 시조로 오흡은 12世에 이른다. 조부는 참봉 오민수(吳敏壽)이고 오민수는 극성(克成)․윤성(允成)․득성(得成)․응성(應成) 등 4자를 두었고, 오흡은 오민수의 손자로 황간현감을 지낸 문월당 오극성(吳克成, 1559~1641)함양오씨는 한양조씨, 재령이씨 등과 더불어 영양의 명가로 입향조인 9세 오필(吳滭)이 영양읍 원당리(현 상원리)에 입향한 이래 오극성,오윤성 형제와 같이 동반 무과급제하여 충신을 배출하였고, 문월당의 자제들이 오흡,오익,오연 등이 명현들이 나왔다. 이후로 손자대에 오이극(吳以極, 1640~1666)․ 오이진(吳以晋,1615~1681)․오이홍(吳以興,1626~1708) 등이 통정대부를 모두 제수받았고, 증손자인 오태걸(吳泰傑,1670~1691)․ 오태웅(吳泰雄, 1650~1725)․ 오태현(吳泰賢,1661~1749) 등이 가선대부 호조참판과 선무랑, 자헌대부를 제수받았고, 현손대에도 오학문(吳學文,1694~1774), 오학순(吳學舜,1683~1766) ,오학안(吳學顔, 1680~?) , 오학징(吳學澄, 1693~1766) 등이 동지중추부사등을 제수 받아서 함양오씨가 명문가로서 발돋움하는데 오극성의 임란시의 충절의 힘이 컸다.
의 장자이다. 함양오씨 용계공파(龍溪公派)의 파조이다. 형제로 우재(愚齋) 오익(吳瀷)과 취수당(醉睡堂) 오연(吳演)이 있다. 자는 선원(善源), 호는 용계(龍溪)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지고 고향으로 돌아와 후손들을 가르쳤다. 삼구정(三龜亭)을 세웠으나 후에 허물어지자 사명대(思明臺)를 다시 세웠다. 1639년(인조 17) 조정에서 승훈랑 호조좌랑(承訓郞戶曺佐郞)을 제수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저서로는《용계문집(龍溪文集)》이 있는데 이 책에서는 이이첨(李爾瞻, 1560~1623)의 잘못을 낱낱이 밝혔다. 취수당 오연은 포은 김시온, 석계 이시명, 석문 정영방, 창석 이준과 교류하면서 청기에서 보냈다. 《취수당일고》가 있다.
비지 남치리
비지 남치리(蕡趾 南致利, 1543~1580)는 16세에 유일재 김언기(惟一齋 金彦璣)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힌 다음, 21세에 이황의 문하에 입문하였다. 그가 28세 때 스승인 이황의 타계하는데, 이황의 문하 제현들이 그를 상례(相禮)로 추대하여, 20대의 젊은 나이에 남치리는 스승의 장례를 예법에 맞추어 이끌어 가는 일을 담당하였다. 38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효종 4년(1653)에 사림들은 그가 살던 고림촌(高林村)에 세운 노림서원(魯林書院)에 그의 위패를 모셨다. 『비지집(賁趾集)』이 있다.
송소 권우
송소 권우(松巢 權宇, 1552~1590)는 그 부친 인재 권대기(忍齋 權大器)와 함께 부자가 모두 이황의 문인이었다. 19세에 이황의 문하에 나아가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배우고, 위기지학에 힘썼으다. 권우는 태극도, 통서, 서명, 정주의 성리서에 융통하였고 논맹용학등의 경서에도 아주 밝았다. 나아가 의학, 산학, 사기에도 정통하였다. 이황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조목을 사사(師事)하였고, 남치리, 김해, 이덕홍 등과 교분이 있었다. 또한 류성룡, 김성일, 구봉령, 권호문등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하였다. 39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으며, 승지에 추증되었다. 『송소집(松巢集)』이 있고, 경광사(鏡光祠)에 제향되었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1520∼1588)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중온(仲溫), 호는 유일재(惟一齋). 아버지는 진사 김주(金籌), 어머니는 죽계안씨(竹溪安氏)로 안처정(安處貞)의 딸이다. 김언기는 현재의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구담리에서 태어났으며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백담(白潭) 구봉령(具鳳齡)과 함께 10년을 기한으로 하고 청량산(淸凉山)에 들어가 독서를 하였는데 집안의 유고로 1년을 채우지 못하고 구봉령보다 먼저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9년 독서 뒤 하산할 때 눈에 들어오는 산비탈의 초목들이 모두 자신이 읽은 문자들로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학문적 열정에 비하여 사회적 성취는 매우 늦었던 듯 누차의 응시에도 불구하고 48세에야 생원이 되었다.
이후 가야(佳野, 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에서 정착하여 인근의 광산김씨의 김부필(金富弼)의 여러 종형제, 구봉령, 권춘란(權春蘭), 권호문(權好文), 김팔원(金八元) 등 이황의 문도들과 교유하고 강학하였다.
1561년(명종 16) 가야에 서당을 짓고 수십 명의 문도들을 양성하였는데 그 중 남치리(南致利), 정사성(鄭士誠) 같은 이들은 김언기에게 수학한 뒤에 이황 문하에서 수학하여 저명한 학자가 되었다. 김언기는 성품이 돈후하며 진실하였으며 명리에 뜻을 두지 않았다. 몸가짐을 항상 신중하게 하였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다.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은거하여 뜻을 구하였는데 남긴 자취와 의론(議論)에 대한 기록은 많았다고 하나 임진왜란 중 소실되어 현재까지 거의 남은 것이 없다.
문집으로 『유일재선생실기(惟一齋先生實記)』 2권이 있다. 문집은 서문이 없고, 권1에는 「제모재(題茅齋)」를 비롯한 시(詩) 6제와 부 1편, 서(書) 2편, 지(識) 1편 등이 실려 있다. 「문인록(門人錄)」에는 192명의 문도들의 명호, 관향, 거주지, 생년 등이 실려 있어 평생에 걸친 강학 활동의 성과를 알려 주고 있다.
비지(蕡趾) 남치리(南致利, 1534∼1580),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 1545∼1607), 옥봉(玉蜂) 권위(權暐, 1552∼1616), 박의장(朴毅長, 1555∼1615), 오봉(梧峰) 신지제(申之悌, 1562∼1624), 장곡(藏谷) 권태일(權泰一, 1569∼1631) 등 이름난 제자들이 그의 문하에서 배출되어, 당시 안동(安東)의 학문 연구의 창도자(唱導者)로 알려졌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와룡산(臥龍山)에 있다. 용계서원(龍溪書院)과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참고문헌] • 『유일재선생실기(惟一齋先生實記)』
•『퇴계학자료총서』3(안동대학교 퇴계학연구소, 1993)
기타 제자들
이밖에 이황의 문인록과 개인문집에 이황과 사승 관계를 맺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안동ㆍ예안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 제자들은 다음과 같다.
눌재 김생명(訥齋 金生溟, 1504~1577)은 1543년 봄에 이황을 도산에서 배알하였으며, 재실을 짓고 이황의 뜻에 따라 눌재로 편액하였다. 『눌재집(訥齋集)』이 있다.
동호 변영청(東湖 邊永淸, 1516~1578)은 이황 문하에서 배웠다는 기록이 있다.
매암 이숙량(梅巖 李叔樑, 1519~1592)은 일찍 급문하였으며, 암서헌(巖棲軒) 가까이에 낙익정(樂益亭)을 짓고 살면서 『주자서절요』와 『심경』을 애독하였다. 『매암집(梅巖集)』이 있다.
청암 이원승(靑巖 李元承, 1518~1572)도 일찍 문하에 들어와 이황과 주고 받은 서찰이 있다. 『청암유고(靑巖遺稿)』가 있다.
약봉 김극일(藥峯 金克一, 1522~1585)은 약관의 나이에 등문하였다. 『약봉집』이 있다.
귀봉 김수일(龜峯 金守一, 1528~1583)은 김극일의 동생이다. 유문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천거로 찰방에 보임되었다. 『연방세고(聯芳世稿)』가 있다.
운암 김명일(雲巖 金明一, 1534~1570)은 김극일의 동생이다. 청교(請敎)와 질의했다는 기록이 있다.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37세에 세상을 떠났다. 『연방세고』가 있다.
매헌 금보(梅軒 琴輔, 1521~1584)는 퇴계 문인록에는 20세에, 개인 문집에는 26세에 각각 수업을 청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매헌집』이 있다.
춘당 오수영(春塘 吳守盈, 1521~1606)은 16세에 등문하였다. 이황이 손수 이정전서(二程全書)를 써 주었다.
지산 김팔원(芝山 金八元, 1524~1569)은 먼저 주세붕에게서 배웠다. 후에 이황에게 등문하였다. 1555년 생원과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같은 해에 문과에 붙었다. 벼슬은 현감에 이르렀다. 계모의 상에 너무 몸을 상하게 하여 회복하지 못하고 46세에 죽었다. 『지산집』이 있다.
약포 정탁(藥圃 鄭琢, 1526~1605)은 어려서 중부(仲父) 정이흥에게 배웠으며, 자라서는 이황과 남명을 스승으로 모셨다. 이황의 문하에 든 것은 그의 나이 16세(1542) 되던해 였다.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으며, 도정사(道正祠)에 향사하였다. 『약포집』이 있다.
창균 김기보(蒼筠 金箕報, 1531~1588)는 먼저 성수침(成守琛)에게 배웠다. 후에 이황에게 배웠다. 『창균일고』가 있다.
문봉 정유일(文峯 鄭惟一, 1533~1576)은 일찍 등문했으며, 류성룡, 김성일, 구봉령이 높이 평가 했다. 경연(經筵)에서 평하기를 역사상 진학사(眞學士)라 칭하였다. 벼슬은 대사간에 이르렀고, 『문봉집』이 있다.
임연재 배삼익(臨淵齋 裵三益, 1534~1588)은 이황 문하에서 『심경』,『시경』의 강의를 들었다.『임연재집』이 있다.
출처: 영남지리답사 원문보기 글쓴이: 松河 李翰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