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에 오후 3시 정도에 도착하여 집에 들어 왔다가 애견샵에 가서 맡긴 애완견 3마리를 찾아서 집에 돌아오니 이제는 집안의 큰 행사가 완전히 끝난것 같다. 작년 9월초 신촌 세브란스 병원 종양내과에서 폐암 말기이며 종양이 뇌까지 전이되어 더이상 아무런 조치도 불가능하며 남은 시간은 6개월 정도가 될 것 같다는 통고를 받았다. 몇년 전에 마른 기침이 끊이지 않아 동내 내과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당시 의사의 소견이 좀더 큰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는데 아버지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소년기에 앓았던 결핵의 흔적이거니 하고 무심히 지나쳤는데 작년 가을 기침을 하면 가래에 약간의 혈흔이 있어서 누나가 아버지를 억지로 모시고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흉부외과로 가서 진료를하고 흉부외과에서 종양내과로 가보라는 소견에 의해 종양내과에서 정밀검진을 한 결과가 예상외로 아주 나쁜 결과가 나왔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뇌로 전이된 종양이 뇌신경 중 통증을 감지하는 신경을 건드려 아버지 당신께서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결과를 아버지에게 알려야 하느냐 알리지 말아야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알려드린다면 그렇지 않아도 심약하신 아버지가 절망을 하고 금격히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알리지 않는다면 한평생을 살아온 본인의 인생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결과가 된다는 의견도 있어서 참 고민이 되었다. 11월 정도가 되자 스스로 의식이 있는 시간보다 거의 자리에 누워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고 주위 사람들도 잘 알아보지 못하시는것 같았다. 그러던 중에 11월 15일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누나가 먼저 세상을 등졌다. 이때도 누나의 죽음을 아버지에게 알려야 하느냐 숨겨야 하느냐를 두고 고민이 많았지만 고모님들과 작은 아버지가 오시고 그래도 다년간 임상간호사 경력이 있는 집사람이 온 다음에 누나의 죽음을 알리자고 했고 고모님들과 작은아버지 집사람이 걱정스럽게 지켜보는 가운데 조심스럽게 누나의 죽음을 알렸지만 의외로 굿굿하고 담담하게 누나의 죽음을 받아들이셨다. 정신이 온전하지 못하기도하고 누나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누나가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믿지 못하시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일간의 장례식을 이대 목동병원 장례식장에서 치루는 기간에도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의연하게 장례식을 치루고 마지막으로 평강교회에서 영결예배와 고창군 부안면 상등리 소재 선산에 누나를 안장할 때에도 굿굿하게 자리를 지키셨다. 하지만 누나의 죽음이 상당한 충격을 주었는지 그 이후로 병세가 눈에 띠게 나빠졌다. 이번 설이 다가 왔을때 어쩌면 아버지 당신 생애에 마지막으로 보내는 설이 될거라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가 설음식을 좀 장만해서 딸얘가 사는 오류동 집에서 설을 보내기로 하고 설 2일 전에 서울로 올라가 장을 보고 없는 솜씨나마 집사람과 딸아이들이 전도 부치고 기름냄새를 풍기며 설음식을 장만해서 조카 원이가 아버지를 모셔와서 나름 설을 보냈다. 그래도 맛있게 식사를 하시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위안이 되었다. 설 이후로 가끔씩 집사람이 서울에 올라가 집에 들려 아버지 건강을 보살폈고 덕분에 나는가끔씩 팔자에 없는 독립군 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54월말과 5월초에 모처럼 서울나들이를 하여(원래는 5월 8일 어버이날 집에 가야하지만 5월 8일에는 모처럼 고향나들이를 하여 누나 묘소를 한번 들리기 위해 한주일 앞당겨 집에 들리기로 했다. 집에 들리니 그즈음에는 거의 침대에 누워서 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시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내얼굴을 알아보시고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큰아들'이라고 또렷하게 말씀하셨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 둘이라 밖에 나가기가 어려워 중국집에 몇가지 요리를 배달시켜 점심을 먹었는데 탕수육을 아주 맛있게 드셔서 마음이 흡족하면서도 적이 안심이 되었다. 식사 후 작별인사를 드리고 집을 나와 지하철을 타고 고속터미널로 이동하여 삼척으로 돌아왔지만 이때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뵐줄은 상상도 못했다. 한달이 조금 더지난 6월 초(그래도 큰며느리라고 집사람이 자주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의 근황을 묻는데) 아버지의 상태가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6월 8일 경에 집사람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서 아버지의 근황을 묻는데 자주 딸꾹질을 하시고 미열이 있다고 하신다. 시기적으로도 의사가 예견한 시간이 훨씬 지났고 집사람이 겪어본 환자들도 거의 대부분이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폐렴 증상이 나타나고 폐렴에 의한 패혈증 증상으로 하직을 하시는 분이 많다고 한다. 그러니 빠른 시간안에 병원에 가시고 마땅한 차량수배가 어려우면 119 구급차라도 불러서 응급실로 가라고 하니 지그은 병원에 가봐야 내일부터 주말이니 의료진도 없고 하니 경과를 지켜보면서 주말을 보내고 다음주 초에 가보겠다고 하신다. 주말에 집사람이 서울에 올라가보려 했지만 토요일 강릉에서 집사람 친구 아들 결혼식 참석 때문에 서울에 가지 못하고 주말을 보내고 말았다. 화요일 저녁에 다시 집사람이 서울집으로 전화를하니 아버지가 거의 의식이 없으시고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요란하게 난다고 하신다. 다시 집사람이 119를 불러서 진단을 받은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라도 가라고하니 알았다고 하신다. 시간이 조금 지나 집사람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는데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직감적으로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는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방금 119 구급차가 와서 이송을 하려는데 살펴보니 아버지께서 이미 이승을 하직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얼마 전에 집사람이 가입한 예다함 상조에 연락을 해서 장례식장으로 운구를 하기로 했는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레식장을 알아보니 빈소는 빈자리가 없고 내일 오전이나 되어야 접객실이 나올거라고 한다. 대신 우선적으로 안치는 가능하다고해서 일단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레식장에 안치를 하고 내일 오전 접객실에 자리가 나는대로 빈소를 차리기로 했다. 그리고 나와 집사람은 이미 심야버스도 끊긴 상태라서 내일 첫차로 상경을 하기로 했다. 잠을 잘 시간을 놓치기도 했고 마음도 심란하여 거의 뜬눈으로 밤을 보내고 4시경에 일어나 세면을 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애견샵에 전화를 해서 애완견 3마리를 모두 맡기기로 하고 애견샵을 거쳐 고속버스 터미널로 가서 첫차인 6시 차를 타고 9시 반 경에 강남터미널에 도착하여 택시를 타고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레식장을 찾아가 1층로비에 설치된 안내 모니터를 보니 지하 2층에 위치한 13호 접객실에 빈소가 차려졌다는 안내가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층 13호 접객실을 찾아가니 전주 남동생과 예다함 상조에서 나온 직원이 장래절차 등을 상의하고 있었다. 오후 6시 경에 입관예절이 있고 내일인 16일 5시 30분에 발인하여 예다함 상조의 영구차를 이용하여 전북 고창군 부안면 상등리에 소재한 선산(원래는 똥뫼밭이라고 부르던 밭이다. 그 중 입구 부분을 가족묘로 조성하여 증조부모의 합장묘와 조부모의 합장묘, 그리고 내가 어릴적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무덤과 그리고 작년 11월 소천한 누나의 묘가 나란히 있는데 아버지의 시신은 어머니의 묘와 합장을 하기로 했다.) 우선은 아버지가 정교(아버지는 오래전부터 구세군교회에 출석하고 계셨는데 구세군교회는 군대식조직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교회의 장로에 해당하는 직책이 군대의 상사 정도에 해당하는계급인 정교다.)로 봉직하시던 서부영문(교회를 군대의 병영으로 간주하여 교회라는 호칭보다는 영문이라고 부른다.)에서 담임사관님(목사님에 해당.)과 교우(군대식조직답게 군우라고 부른다.)들이올거라고한다. 12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담임사관님과 사모님(구세군 신학교는 사관학교라고 부르고 부부가 동반하여 입학을 하고 졸업을 하고 임관을 할때도 부부가 같은 계급으로 임관을 한다.) 그리고 10여명의 교인이 오셨다. 유족 위로예배를 바로하시고 입관예절을 마치고 입관예배를 내일 새벽 발인직전인 5시에 발인에배를 드리고 운구하여 하관을 한 다음 하관예배까지를 드리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사실 아버지는 폭넓은 사교적인 성품을 갖지는 못하셨다. 친구분들도 별로 없고 아버지 장례식에 문상을 올만한 사람이 별로 없어서 장례식장이 너무 쓸쓸해질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게다가 나는 강원도 삼척이라는 산골에서 살고 있고 이미 현직을 떠난지 3년차에 접어들고 집사람도 나와 별반 다를 것이 없으며 남동생 경열이도 멀리 전주에 살고 있으니 우리 손님도 겨우 손가락을 헤아릴 정도에 불과하였다. 장례식장이 너무 쓸쓸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할까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오후시간이 되어서도 사촌 형제와 조카 등이 와서 그런대로 자리를 채웠고 일반손님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저녁무렵이 되자 그래도 조금씩 손님들이 오기 시작했다. 6시가 조금 지난 시간에 한무리의 조문객이 빈소를 가득 채울 정도가 되어 살펴보니 고창북중 11일 동창 친구들이었다. 참으로 반갑고 고마운 친구들이었다. 그동안 내가 교직에 몸담고또 멀리 강원도 산골에서 생활하다보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중학교 동창모임에도 별로 참석하지 않았고 특히 친구들 가내 경조사에 참석하기를 등한시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고 귀한 시간을 내어 찾아와 준 친구들이 눈물겹게 고맙고 한편으로 그동안의 나의 무성의가 반성되었다. 밤이 되자 내가 재직했던 학교 옛동료들과 나와 집사람이 출석했던 원주교구 삼척 사직동성당 형제자매님들이 봉고차를 한대 빌려서 문상을 와주셨다. 사실 솔직하게 고백을 하면 이번 아버지 초상을 치루며 장례식 비용이 걱정이 되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 우리나라 장례식장중 가장 비싼것 같았다. 시설면에서 별로 차이가 없는 이대목동병원 장례식장의 거의 갑절의 비용이었다. 정신없이 손님을 맞이 하느라 사실 조문온 친구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 인사도 제대로 못했고 저녁식사를 제대로 챙기지도 못했으며 기독교 예절에 의한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 문상온 친구에게 쓴 소주 한잔 따라주지도 못했다. 밤 10시가 조금 지나자 문상객의 발걸음이 조금씩 뜸해지기 시작했다. 어제밤에 부음을 듣고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상태라서 무척 피곤하기도 했다. 문상객이 줄어든 틈을 타서 가족실 소파에 누워 조금 눈을 붙이기로 했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이미 새벽 4시가 다 되었다.나도 모르게 새벽까지 빵 떨어진 것이 었다. 재빠르게 양치질과 고양이 세수를 하고아침을 먹는둥 마는둥 시늉만 내고 5시에 발인예배를 드리고 바로 예다함 운구차에 올라 장지로 향했다. 내 옆에 앉은 집사람도 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바로 떨어진다. 정안휴게소에서 잠간 휴식을 취하고 고창군 부안면 상등리 소재 선산에 도착한 시간은 9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 었다. 어제밤부터 일기예보에 비예보가 있어서 내심 걱정을 했는데 날만 흐려 땡볕을 가려주고 비는 전혀 오지 않았다. 장례를 치루기에는 최상의 날씨였다. 이곳에도 몇몇 동창친구들이 찾아와 주었다. 이래저래 친구들에게 큰 신세를 졌다. 하관을 마치고 하관예배를 드리고 개토까지 하고나니 유족으로서 장례절차는 모두 마친셈이었다. 산일을 맡아주신 심원고모부가 미리 예약해놓으신 만나회관으로 가서 참게장과 김치찌개로 아점(아침겸 점심)을 먹고 영구차에 올라 서울로 출발한 시간은 아직 12시가 되기 전이었다. 아버지의 장례는 어느 하나 잘못되거나 의견충돌이 발생하거나 일기가 방해가 되거나 교통이 문제가 되거나 하는 방해요소가 하나도 없이 물이 흐르듯 착착 맞아 들어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처음에 걱정했던 장례비용도 상조회사비용과 장례식장비용(식비포함) 산역비용 까지를 모두 포함해서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액수의 조위금이 들어와 아무런 문제가 없이 해결되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번 큰일을 당해 경황이 없는 와중에 그래도 친구들이 있어서큰 도움이 되었고 아직 건강이 완전하게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는 동창회 모임이나 동창친구들의 대소사에 적극 참여하기로 굳게 다짐하며 다시 한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첫댓글수고했다 무열친구. 어렷을적에 한번 뵌거 같은데 나도 정확한 기억이 안나네.......... 태어나서 모든사람 얘외없이 가시는길에 영면을 바랄뿐이네, 이제는 우리차례가 천천히 다가오지만 기운차리고 더 열심히 생활하는 친구가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네. 카페를 통해서라도 이렇게 소식을 받으니 친구들 모두가 고맙구먼.....
첫댓글 수고했다 무열친구.
어렷을적에 한번 뵌거 같은데 나도 정확한 기억이 안나네..........
태어나서 모든사람 얘외없이 가시는길에 영면을 바랄뿐이네, 이제는 우리차례가 천천히 다가오지만 기운차리고 더 열심히 생활하는 친구가 되길 바라는 마음뿐이네.
카페를 통해서라도 이렇게 소식을 받으니 친구들 모두가 고맙구먼.....
맏아들과 맏며느리의 책임을 다하느라 무열친구 부부가 수고 많았네~!
무열 친구와 형제들 덕분에 아버지께서 하늘나라로 가시는 길이 가벼우셨을 것 같네~!
향기로운 댓글 고마워 향기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