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상황에서
성경본문 : 에스라 5:1-5
1. 선지자들 곧 선지자 학개와 잇도의 손자 스가랴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을 받들어 유다와 예루살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에게 예언하였더니
2. 이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가 일어나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매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함께 하여 돕더니
3. 그 때에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가 다 나아와 저희에게 이르되 누가 너희를 명하여 이 전을 건축하고 이 성곽을 마치게 하였느냐 하기로 4. 우리가 이 건축하는 자의 이름을 고하였으나
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아 보셨으므로 저희가 능히 역사를 폐하게 못하고 이 일을 다리오에게 고하고 그 답조가 오기를 기다렸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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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면서 화가 나고 당황스러운 때가 있습니다. - 여러 상황이 있지만 ...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때입니다.
분명히 확답을 받았기에 안심을 하고 있었는데 그만 그 약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자신에게 어려움이 다가올 때~ 그 때 화가 납니다.
예> 요즘은 카드서비스가 있어서 개개인간의 불화가 다소 줄어들었지만 예전에는 목돈이 필요할 때 어떻습니까? 이웃 친지를 찾아가서 사정사정해서 필요한 돈을 꾸어준다는 확답을 받습니다. “지금 당장은 돈이 없으니 언제 오면 내가 그때 해결해 줄게” 하루 이틀이 지나고 약속된 날짜에 필요한 돈을 꾸러 갑니다. 그런데 미안하다고 하면서 돈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급한 이 사람에게는 얼마나 당황스럽고 화가 나고, 배신감이 들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그렇겠습니까? 철석같이 믿었는데 말입니다.
약속된 부분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상대방에 대한 악한 감정이 먼저 앞섭니다. 그러면서 온갖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토록 사이가 좋았던 사람도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심과 분노로 얼룩져서 철저하게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을 하면서 상대에 대한 분노와 저주를 퍼붓는 생각으로 진행해 나갑니다.
“그래 저 인간이 나를 무시한 거야! 내가 돈이 없다고 무시한 거야! 아니, 예전부터 나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던 거야! 있으면서도 일부러 돈을 꾸어주지 않은 거야 나를 안심시켜 놓은 다음 곤란한 상황에 처하도록 일부러 그런 거야! 내 인생은 저 인간 때문에 망쳤어! 인정머리 없는 놈! 내가 복수하고 말거야 등등”.
이런 파괴적인 생각을 전개해 나갑니다.
이런 생각은 지극히 자신의 입장에서만 만들어낸 이기적이고 분노적인 감정들입니다. 잠시 한숨을 돌리고 긍정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자신이 지금 품고 있는 분노적이고 복수적이고 파괴적인 감정을 다스리면서 현실을 다시금 직시하는 마음의 평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자신이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을 때 ➜ 사탄은 그 마음을 틈타 더 충동질하면서 파괴적으로 끌고 갑니다.>
신앙인이라면 이런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을 주님 앞에 아뢰야 갰지요. 마음의 평정을 찾는 가장 중요한 힘은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진행되고 있다는 진리 앞에 순응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그래 지금 상황은 당장은 나에게 어려움이 오고 힘들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니야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나에게 주실 것을 나는 믿어! ”
“그래 저 사람도 돈이 없어 못 도와준다는데 내가 그 사람을 미워하고 증오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살전 5: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5:16 항상 기뻐하라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하셨지, 그래 기뻐하고 감사하자!”
[살후1:7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자기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에 나타나실 때에 1:8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내리시리니]
[히2:18]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약1:12]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고전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그래 나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어! 지금 상황은 어렵지만 언약의 하나님은 반드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내가 믿어! 믿습니다. 믿음을 도우소서! 힘을 주시옵소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으로부터 구원하옵소서! 내가 주님을 의심하지 않고 인내하며 신뢰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라고 고백하는 순간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까?
평안! 마음의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 자신도 모르게 확신이 섭니다. 전혀 두려움이나 불안함이나 패배감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그저 마음이 평안해지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신다는 확신이 딱 들어섭니다. “와~ 이런 뱃장과 믿음과 평안이 어디서 온 거지?” 라고 자신도 의심스러울정도로 평안과 확신이 임하게 됩니다.
이것이 성령하나님의 역사요. 믿음의 결과인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의 능력인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라고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어 내 입으로 시인하고 선포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의 능력으로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현실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믿음입니다.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입니다. 또 그렇게 말씀대로 순종하니까 하나님께서 평안과 함께 세상이 두렵지 않을 큰 믿음을 주시고 문제들을 하나하나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거룩한 이스라엘백성이 거룩성을 상실하고 온갖 죄악을 자행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우 상숭배와 윤리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상할 수 없는 죄악들을 제사장이나 자칭선지자라고 하는 거짓선지자들 모두가 일반백성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는 죄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 이르러 결국 이스라엘나라는 주변 강대국인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면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가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이었다는 것을 성경전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B.C 722년에 남유다는 B.C 586년에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B.C 539년에 바벨론은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하였습니다. 페르시아왕인 고레스는 B.C 536년에 칙령을 내려 포로로 잡혀간지 70여년 만에 선지자 스룹바벨과 약 42,000여명의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1차 귀환을 허락합니다.
이들이 본국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경위가 어떻다고 했습니까?
고레스왕의 정치는 포로들을 해방하고 그들의 신들과 신전을 정책적으로 회복시킴으로서 피지배국들이 반기를 들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펼쳤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걸은 더 나아가 고레스왕의 정치적 목적이 포로귀환정책이었지만 특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그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에 의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1~) 또한 역사적인 배경을 보면 다니엘은 바벨론 멸망당시 포로로 잡혀가서 궁중에서 신하로 있었고 바벨론 멸망이후 고레스는 다니엘을 자신이 신하로 두었습니다.
다니엘10:1에 보면 다니엘은 고레스3년까지 살았다고 했습니다. 고레스는 다니엘의 영향도 한목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백성들이 고향으로 귀환한 일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레스 왕을 비롯해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 자발적으로 움직였다고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수 있도록 많은 물자와 인력을 동원하는데 전적으로 고레스왕이 도왔습니다.
고레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고레스의 생명을 그렇게 보존하게 하시고 그를 통하여 예레미야의 입으로 한 말을 응하게 하였습니다. 고레스는 이방인이었지만 하나님은 그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본국에 돌아온 이스라엘백성은 스룹바벨을 위시하여 감동과 열정에 사로잡혀 성전건축을 재건을 시작하는데 주변의 이주민들(사마리아 사람들)이 교묘하고 끈질긴 방해공작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이주해 와서 이곳에서 정착해 기득권을 행사하려고 하는데 난데없이 4만 여명이 몰려와서 자신들의 옛 땅이며 이곳에 무너진 성전을 다시 짓는다고 하니 그동안 누렸던 정치적, 경제적 혜택을 잃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우려는 미움과 시기와 파괴로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이들은 자신들도 함께 돕겠다는 교묘한 술수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이들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개입하게 되면 이들이 갖고 있던 다원주의 혼합종교 등의 가치관으로 인해 이스라엘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흩트려 트릴 우려가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옛적에 그런 과오로 인해서 하나님께 혼쭐이 나, 이제 겨우 본국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은혜를 입었는데 그들이 개입한다면 또 예전과 같은 범죄의 나락으로 떨어질게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이처럼 간교하게 세상과 함께 벗하고 동고동락하자고 다가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갖고 있지 않으면 한순간에 사탄의 간교에 넘어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세상의 방법(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뭐), 이 정도는 애교로 봐줄 수 있는 거 아냐?(세상을 융통성 있게 살아야지, 너무 고지식하면 부러져) 라는 타협, 이런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갉아 먹는 것입니다.
신종플루가 왜 무서운지 아시죠, 공기 중에 떠다니다가 기관지로 들어가 폐를 망가트려 사망하게 만듭니다. 눈에 보이지 않은 아주 작은 바이러스를 우리 몸에 허용했다가는 목숨을 잃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방법을 쫓고 타협하다가는 우리영혼에 치명타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세상과 타협하기 시작하면서 시간이 지나 아예 흡수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떠나버린 결과 하나님의 책망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때로는 편협하고 독선적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가 생명인데 생명을 내놓은 사람은 없는 것처럼 진리를 떠나는 순간 우리 영혼은 죽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악한 대적자들은 자신들의 제안이 거절되자 이제는 본격적이고 직접적으로 위협을 가합니다.
성전을 재건하기 위해 돌아온 귀환공동체가 천신만고하여 그 어려운 여건을 무릅쓰고 성전을 건축하는데 그 일이 순탄치가 않았습니다. 즉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언제나 훼방 자가 있습니다.
그 어려운 중에 겨우 기공식을 하고 성전 지대를 놓고 나자 방백(페르시아에서 파견한 지방장관(총독)) 르훔과 서기관(왕이 각 지방의 소식을 직접 보고 받기 위해서 파견한 왕의 직속 부하) 심새라는 사람이 함께 방해공작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여러 사람의 이름으로 페르시아 왕에게 투서를 했는데 이 투서들은 페르시아의 신하들에게 들어가고 고레스왕은 이를 알지 못했습니다. 뇌물로 제국 관리들의 마음을 훔치고, 사실을 왜곡한 편지로 옛 이스라엘이 어떻게 강대국에게 반기를 들었고, 당시의 왕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했으므로 이들을 이대로 둔다면 또다시 반기를 들어 왕에게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할 것이라는 억측으로 궁정의 판단력을 흐려놓았습니다.
신하들은 뇌물을 받고 르훔과 심새의 주문대로 허가취소의 공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게 됨으로 결국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결국 고레스 칙령에도 불구하고 성전 재건은 그 이후로부터 16년이라는 세월 속에 2대 왕(고레스, 캄비세스)이 바뀌고 다리오가 왕위에 오르기까지 성전재건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망연자실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때가 아직 되지 않았어.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것 같아. 아마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아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걸게야.
#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아.
# 총독 스룹바벨이 무능하기 때문에 공사가 중단 된거야.
이러한 말들은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공사를 중단한 채 16여년이란 세월이 흘러갔기에 이런 일들에 대해서 학개 선지자는 백성들을 향해 꾸짖었습니다. 그들은 각기 자기 집을 짓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이러한 형편에 처해 있을 때 학개선지자는 백성들을 책망했습니다. 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깨닫지 못하고 방해하는 세력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포기하고 있느냐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포로 된 자신들을 이곳 예루살렘으로 귀환시킨 것이 자신들의 집을 짓고 생활터전을 먼저 잡으라고 하신 것이 아니잖으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기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곳으로 다시 돌려보내신 것이 아니냐? 는 것을 강조 한 것입니다.
그리고 소년 선지자 스가랴를 통해서는 성전 건축이라는 것이 힘으로나 능력이나 수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되어지는 것이며[슥4:6], 스룹바벨의 손이 그 전의 지대를 놓았으니 스룹바벨의 손으로 그 전의 공사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격려했습니다.
그러자 이곳을 관할하던 당담자가 바뀐 닷드내와 그의 서기관 스달보스내가 와서 누구의 명령에 이 성전을 건축하느냐하고 묻자 제사장들이 나서서 자초지정을 말했더니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임의적으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제제하지 못하게 하시고 조서를 꾸며서 왕에게 상소를 올리게 하였습니다. 결국 옛 왕의 조서를 발견한 후 예루살렘성전을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
결론>>>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신뢰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믿음이 생기지 않을 때 믿음을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제목들을 살아계시고,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간구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우리는 확신을 갖고 기도를 하고 기대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때로는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환경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것도 오랜 시간이 걸리면 우리는 당황하거나, 조바심을 내거나 의심과 믿음의 싸움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내곤 합니다.
늘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은 신실하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하나님의 작정하심은 언제나 이루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조바심을 내거나 의심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끝까지 믿음의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출처 한서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