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회고록 3막18장 (6부)
지금은 대치동에 학원가가 밀집하여 있지만 1970년대에는 종로1가가 학원가의 성지였다.
전국적으로 그룹과외와 방문과외가 성행하였고
방과후 학원가는 재수생과 학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인기있는 강사님의 강의는 몇달전에 신청을 해야 들을수 있었다.
그래서 종로는 넘쳐나는 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나도 방과후 친구들과 어울려 몇몇과목의 수강을 들어보았다.
강의실은 천정에 빼곡히 매달린 형광등이 발광을 하여 대낮처럼 환하였고.지우개는 5~6개를 칠판에 놓고 분필로 수업한 내용을 수시로 지우고 있었다.
하얀 분필가루가 교단위에 수북이 쌓이고 에어콘 없는 한여름은 선풍기밑으로 수강생들이 몰리기도 하였다.
강의는 학생들이 하교하는 시간에 집중되였고, 10분거리에 있는 모교에서 종로1가의 학원 접근성이 유리한 나는 다른 학교의 학생들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학원강의를 수강할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우리 학교 학생들이 학원가를 점령하다 싶이 하여 학우들을 종로길에서 마주치는 것이 다반사 였다.
강사님들은 강의내용의 표준선이 높아 학습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한달치 강의료를 지불하고도 강의 수강을 포기하곤 하였다.
특히 재수생이나 삼수생들이 집중적으로 듣는 강의는 재학생들이 범적할수 없는 수위의 강의를 하여 차별적인 학원에 항의하곤 하였다.
재수생들의 성지인"종로학원"과 "대성학원" 종합반은 서울대및 연고대 입학대상으로 강의를 하니 별도의 시험을 치러야 들어갈수 있는 종합반학원이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만 충실히 이해해도 명문대에 입학한다고 선생님들이 훈시하면 그것을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예상 문제집을 풀어보고 틀린 문제를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혼자의 여력으로 가능한 이는 별로 없을 것이다.
역사책을 달달 볶아 외우고 ,영어 단어와 숙어를 메모지에 빼곡이 적고 다니며 외우고, 수학공식과 물리공식등 10여개의 과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깨우칠려면 무지막지한 인내와 고통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학원가는 치마열풍에 휩싸이진 않았으나 학생들은 눈썹까지 밀며 학업에 열중하니 소름이 돋기도 하였다.
내가 갑자기 학원가 이야기를 하는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유명한 물리참고서의 저서인 " 노 ○○"의 강의를 듣던 도중 넌지시 던진 말이 생각나서다.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이 생각나는 그말은 두고두고 나의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 젊은 청춘에 하루도 아까운 이시간에 왜 너희들은 이곳에 있냐?
지금 대우빌딩 스카이 라운지를 가보아라.
그곳에서 와인잔을들고 건배하는 이들이 수두룩하다.
너희들은 왜 그런곳에 있질 않고 이곳에서 공부를 하냐?
그들은 모두 바이어들이다.
수출신용장 체결만 되면 그 수출바이어들은 1%의 수수료를 보장받는다.
1억원 수출을 수주하면 100만원, 10억원 수출을 수주하면 1000만원, 100억원 수출을 수주하면 1억을 받는데 너희들은 이곳에서 무엇하고 있냐?
젊은 시절은 금새 지나간다.
너희들은
후회없는 미래를 살기 위해 대우빌딩 스카이 라운지에서 건배하는 바이어보다 더높은 곳에서 건배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