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수 없네, "물안뜰"의 여름 밤
기억과 추억 사이/수필·산문·에세이
2006-07-25 21:04:34
마음속으로 물안뜰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그 때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40여일 전, 연두빛 물이 뚝뚝 떨어지는 녹음을 배경으로 단풍나무 아래 평상에서 맛본 추억은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물안뜰이 주는 추억은 그 이름이 주는 어감만치 마음속에 오래 남았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7월의 들뫼풀 모임도 1박 2일 일정으로 물안뜰로 정했지만 그리 싫지는 않았습니다. 물안뜰의 추억이 그만큼 잊을 수 없는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있는 탓이기도 합니다. 물안뜰을 향해 찾아가는 길, 집에 볼일이 있어 들뫼풀 회원들과 동행하지 못하고 해거름 때 터벅터벅 물안뜰 마당에 발을 들여놓았더니 벌써 도착한 회원들 몇이 단풍나무 아래 평상에 둘러앉아 여흥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삼겹살과 텁텁한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한여름의 분위기에 젖어있었습니다. 물안뜰은 아직도 여전했습니다. 적막을 깔고 앉은 확 트인 마당과 상수리나무가 가득 들어찬 뒷산도 여전했습니다.
회원들 몇이 들뫼풀 모임에서 먹을 음식 준비에 바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듯 낡고 허름한 쓰레트집과 문짝도 없는 대문 양편에서 솟구쳐 오른 솟대도 여전했고 막걸리 한 잔 쭉 들이킬 때마다 간이 녹아날듯 흐느끼는 산비둘기 소리도 여전했습니다. 다만 변한 게 있다면 마당이 비좁도록 억센 줄기와 싱싱한 잎들을 살랑거렸던 감자나 채소는 흔적 없고 키가 훌쩍 커버린 고추대만 탱탱한 고추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습니다. 담장을 따라 손바닥만한 꽃잎을 활짝 펼친 호박꽃도 정겹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아무리 둘러봐도 물안뜰은 아득한 초등학교 시절, 한 때나마 정을 붙이고 살았던 내 고향집에 들른 기분이 들었습니다. 무조건 고급스럽고 편리한 것만 찾는 현실에서 비바람에 쓰러질듯한 이런 집에 더욱 눈길이 쏠리는 것은 아마도 그 시절의 삶이 그리운 탓이기도 했습니다.
감자를 익히려고 장작에 불을 지피는 떡갈나무님
먹고 살기 좋아졌다고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배는 부르지만 그만큼 정을 잃고 살았기에 그 아득한 시절의 고향 풍경이 살갑게 다가오는지도 모릅니다. 어둠이 깊어갈수록 산비둘기는 적막을 깨고 목이 쉬도록 흐느꼈습니다. 구욱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상수리나무 울창한 뒷산이 무너질듯 구슬펐습니다.
이제부터 내 이름을 대신한 풀꽃이름, 질경이
누구나 들뫼풀 회원이 되면 풀꽃이름을 지어주는데 오늘 이 자리에서 제비꽃이란 풀꽃이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름을 불러보니 제비꽃이 영 마뜩찮았습니다. 회원들이 ‘꽃제비님’ ‘제비님’ 하고 부를 때마다 부정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카바레에 나타나 현란한 춤으로 아녀자들을 홀리는 그런 몹쓸 제비로 생각되는 바람에 제비꽃은 자꾸만 내 마음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그래서 머리를 굴려 생각해 낸 것이 질경이입니다. 질경이, 참 근사했습니다.
담벽을 타고 오른 호박꽃이 샛노란 꽃잎을 펼치고 있다
길바닥이나 담장 옆에 있는 듯 없는 듯 꽃을 피워 한 해를 넘기는 질경이, 사람들에게도 짓밟히면서도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민초로 대접받는 질경이가 그래서 더욱 정감있게 다가왔습니다. 이제 나는 졸지에 질경이가 되었습니다. “질기다”라는 말은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긍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는 그것만큼 듣기 좋은 말도 없습니다. 앞으로 들뫼풀 회원들을 “질기게” 사랑할 것이며 시 또한 지쳐 쓰러질 때까지 “질기게” 쓸 것입니다. 회원들이 “질경이님” 하고 부를 때마다 길바닥에 납작 엎드린 질경이가 고개를 빳빳이 쳐들 듯이 불끈불끈 힘이 솟는 기분이었습니다.
단풍나무에 백열등을 켜고 깊어가는 어둠을 맞다
질경이란 풀꽃이름을 축하해주듯 물안뜰 주인인 백당나무님이 단풍나무에 백열전구를 매달고 불을 켰습니다. 어둠을 몰아낸 백열등은 부채살처럼 펴진 단풍나무가지들을 더욱 뚜렷이 드러내주었고 가지를 덮고 있는 단풍잎들이 백열등 빛깔로 붉게 불이 타올랐습니다. 활짝 부푼 우산이 황홀하게 평상을 덮고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평상위에서 잠시나마 오락을 즐겼습니다. 돌아가며 노래도 불렀고 삼행시도 지었습니다.
찌개를 끓이는 백당나무님
특히 삼행시를 지을 때 들뫼풀 회원들의 재치는 대단했습니다. 순식간에 머리를 짜내 짓는 삼행시는 그대로 한 편의 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내 차례가 돌아오자 문제가 생겼습니다. 내 옆에 앉은 진달래님이 제목을 던져준 “물안뜰”의 삼행시가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세 글자에 막힌 답답한 마음을 그 누가 알겠습니까. 명색이 시인인 사람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막걸리도 한 잔 쭉 들이켜고 안주로 삼겹살도 한 줌 집어넣고 시간을 벌려고 우물거려봤지만 꽉 막힌 머리는 터지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나를 더욱 미치게 한 것은 놀이가 파장분위기기 되었을 때 막혔던 삼행시가 방정맞게 술술 떠오르는 것이었습니다.
물: 물안뜰의 단풍나무 아래에는
안: 앉아서 술을 마실 수 있는 평상이 있고
뜰: 뜰 앞 담장에는 호박꽃이 피어 나를 맞아주었네
새벽에 올려다 본 밤하늘의 푸르른 별들
마지막까지 평상에 둘러앉은 회원은 백당나무님과 억새님, 오늘 처음 입회한 강선생, 그리고 나 이렇게 넷이었습니다. 달개비님과 진달래, 떡갈나무님 부부는 집으로 돌아갔고 늦게까지 자리를 지켰던 쑥부쟁이님과 오늘 입회한 강선생 부인은 잠을 못 이겨 먼저 옆방으로 돌아갔습니다. 물안뜰은 어둠이 고여 더욱 적막했습니다. 산비둘기 소리도 더욱 청승맞았습니다. 그때 단풍나무 위를 덮고 있던 감나무에서 손톱만한 땡감 하나가 평상에 뚝 떨어지는데 적막한 산중의 암자에서 스님들이 후려치는 죽비소리처럼 요란했습니다.
마을의 풍농과 평안을 비는 솟대가 더욱 적적한 기분을 자아낸다
아마 땡감은 무슨 메시지를 전해주는 듯했습니다. 밤이 깊었으니 내일을 위해 빨리 피곤한 몸을 눕히라고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백당나무님의 권유대로 평상에서 큰방으로 술자리를 옮겼습니다. 술이 몇 순배 돌았지만 억새님의 주량은 대단했습니다. 술이 더 들어갈수록 자세도 꼿꼿했고 험난하게 돌아가는 시국얘기와 나라를 망친 권력자들에게 퍼붓는 욕설은 더욱 꼬장꼬장했습니다. 오늘 입회한 강선생은 사근사근 대화를 하면서도 따라주는 술은 넙죽넙죽 잘 받아 마셨습니다. 술에 취한 백당나무님이 보기 좋게 쓰러져도 마지막 남은 세 사람은 여전했습니다. 그렇게 밤은 새벽을 향해 속절없이 달려갔습니다.
악보를 보고 기타칠 준비를 하는 억새님, 그의 기타솜씨는 수준급이다
시간을 보니 새벽 2시경, 이윽고 술판을 걷고 모두가 술이 취해 드러눕자 방안은 되레 시끄러웠습니다. 방바닥이 들썩일 듯 코를 고는 억새님과 가끔씩 소리를 지르며 잠꼬대를 하는 백당나무님 틈에 끼여 잠을 청하려니 여간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오줌이 마려워 바깥으로 나왔더니 초롱초롱 빛나는 밤하늘의 푸른 별과 담장 밖 외등이 쏟아내는 붉은 불빛에 물안뜰 마당이 환했습니다. 모두가 잠든 밤, 이웃집 개 짖는 소리가 가끔 들려오고 산비둘기 대신 뒷산의 소쩍새 소리가 내 마음을 녹일 듯 또 청승맞게 들려왔습니다.
저작자 표시컨텐츠변경비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