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수필문학관아카데미 21기-17강 자료(2023년 12월 11일)
수필창작의 실기
---------------------------
습작품 첨삭
1. 셋 중 하나 /이정열(5)
1 동네 도서관 열람실에 들어섰다. 평소보다 늦게 도착해서인지 이미 몇 명이 있다. 매번 일찍 오는 사람들이었다. 자주 드나들다 보니 종종 오는 사람이 누군지 눈에 익었다. 같은 반 친구처럼 어디에 함께 속한 건 아니지만 묘한 친밀감이 쌓였다. 최근에는 눈에 띄는 몇 명에게 별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별명을 부르며 인사 나눌 일은 없지만 특징을 찾고 적합한 묘사를 고민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2 도착 일, 이등을 다투는 사람 하나는 이미 자리에 앉아 소지품을 펼쳐놨다. 붙박이로 도서관에 오는 사람 중에는 한자리만 이용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나뉜다. 저 사람은 첫 번째 부류다. 특정 좌석을 선호하는 이유가 눈에 훤하게 보이는 사람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콘센트를 많이 사용할 수 있고 바깥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저 자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일찍 오는 거라 짐작했다. 늘 그래왔듯 문제집을 펼쳐놓은 채 그 위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자리에 있는 2구 콘센트에는 다른 스마트폰 두 개가 꽂혀있다. 옆자리에 붙은 콘센트 구멍에도 모조리 자신의 보조배터리가 깜빡거리고 있다. 열람실 복도가 보이는 자리를 고른 이유도 전기 때문이었다. 복도 벽에 붙은 공용 충전함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 안에 자신의 스마트폰 두 대가 더 있다. 이런 기행을 매번 봐와서 ‘전기도둑’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전기도둑이 휴대폰으로 뭘 하길래 충전이 많이 필요한지 항상 궁금했다. 이번에 그 궁금증을 해소하기로 마음먹었다. 책을 고르려고 자리에서 일어난 척 서가로 향했다. 지나치며 휴대폰 화면을 곁눈질하니 강의가 아닌 다른 영상을 보는 중이었다. 흘깃 보니 게임 영상을 보는 듯했다. 어색하지 않게 그대로 그를 지나쳐 책을 찾는 척했다.
3 서가로 향했으나 빈손으로 돌아가긴 좀 그랬다. 검색해서 책을 찾는 게 아니라 눈에 띈 책을 읽을 셈이었다. 언어 서가를 구경하다가 수필 이론서가 눈에 들어와 집어 들었다. 자리로 돌아오며 전기도둑을 다시 살피니 게임을 하고 있었다. 영상을 끊임없이 보고 게임을 계속하니 배터리가 빨리 닳을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의 이상행동을 납득했다.
4 자리에 앉아 고른 책을 이십분쯤 봤을까 잠이 몰려왔다. 슬슬 노곤한 걸 보니 정오쯤 됐겠지 추측했다. 새벽 세 네시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마치고 운동을 한 후 도서관에 오니 점심시간쯤 되면 졸리는 게 일상이었기 때문이었다. 책상 위 물건을 대충 정리하고 고개를 한쪽으로 돌려 엎드렸다. 꼭 본격적으로 자려는 폼을 잡으면 바로 잠들지 못한다. 자고 싶은데 잠이 들지는 않아 닫으려 했던 감각이 오히려 예민해졌다. 눈을 감고 있으니 종이 넘어가는 소리까지 구분할 정도였다. 그때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눈 밟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요즘 많이들 신고 다니는 전체가 한 종류의 고무로 이루어진 신발이 바닥과 마찰하며 내는 소리였다.
5 그 사람이 자주 신던 신발이었다. 실눈을 뜨고 보니 도서관 단골 한 사람이 또 왔다. 이 사람에게는 딱히 붙일 별명이 없었다. 도서관에 올 때도 편한 옷차림에 무난한 책가방이었다. ‘일반 청년’이라는 별명은 너무 심심하고 신선하지 않았다. ‘겨울 소리의 남자’는 평범한 그에게 너무 과분한 듯해 망설였다. 실눈을 뜨고 살폈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흠잡을 데 없이 일반적이었다. 지극히 일반적이라는 특징 외에는 없었다. 팔짱 낀 오른팔을 은폐물 삼아 그를 계속 관찰했다. 입구에 들어선 후, 자신이 줄곧 앉던 자리가 찼다는 걸 발견했다. 부채꼴 모양으로 여러 방향을 두리번거렸다. 한 바퀴 돌아보더니 금세 원위치로 돌아왔다. 도무지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던지 언짢아보였다. 그때였다. 그가 나지막이 속삭이듯 말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
“ㅅ-발”
지극히 평범한 이 사람에게 별명 붙일 계기였다. 이 남자를 지금부터 ‘ㅅ발 청년’이라 불러야겠다. 평범 청년에게 붙일 별명이 생겨서 기분이 좋았다. 묵은 고민을 해결한 기쁨에 잠이 달아났다.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6 내가 책을 읽는 좌석은 공간을 넓게 쓸 수 있는 곳이었다. 이 자리는 옆에 기둥을 두고 있어 한 사람이 앉으면 다른 사람이 옆에 앉기에 불편한 구조다. 줄곧 빈자리였지만 오늘은 한 분이 자리를 차지했다. 주말이라 도서관에 사람이 몰려서인지 마땅한 자리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엎드려 누웠을 때도, 책을 읽으며 졸 때도 이 분은 묵묵히 할 일에만 몰두했다. 그를 보며 부끄러움이 고개를 들었었다.
7 옆자리를 채운 우직한 분은 이때까지 두세 번쯤 봤었다. 언제나 헌팅캡을 쓰고 안경을 끼고 있던 노신사였다. 몇 번을 흘깃거려도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지 집중력이 좋은 듯했다. 아이들도 꽤 있어서 평소보다 소란스러운 편이었지만 흐트러지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선 나도 허리를 곧추세우곤 했다. 이 분을 조금만 더 톺아보다가 책에만 집중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8 좀체 책상에서 눈을 떼지 않는 그가 뭘 보는지 궁금했다. 스트레칭하는 척 두 손을 마주 잡고 위로 쭉 뻗으며 목을 이리저리 돌렸다. 동시에 그의 책상 위를 훔쳐봤다. 책상에 내려놓은 종이에는 이름이 여럿 쓰인 긴 목록이 보였다. 그 목록 맨 위에는 몇 번 본 적이 있는 글쓰기 공모전 이름이 쓰여있었다. 이 분이 붙잡고 있는 종이는 문제집도 아니고 책도 아니었다. 빨간펜을 들고 누군가의 작품 이곳저곳에 메모하는 중이었다.
9 순간 그의 외모가 익숙하게 느껴져서 머릿속을 더듬어봤다. 좀 전에 본 얼굴인 것만 같았다. 읽고 있던 수필 이론서의 앞날개를 펼쳐봤다. 저자의 사진과 약력이 있었다. 저자는` 헌팅캡을 쓰고 안경을 쓴 모습이었다. 문학계 중에서도 수필가 소개 사진에 유난히 모자를 쓴 작가가 많은 걸 고려했을 때, 헌팅캡만으로는 동일인이라 여기기 힘들었다.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는 그의 얼굴을 여러 번 번갈아 본 후에야 같은 사람임을 확신했다.
10 다짜고짜 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오늘은 책 속에만 있는 줄 알았던 사람이 현실에도 존재한다는 걸 확인한 것만으로 만족했다. 거리에 세 사람이 걸어가면 배울 점이 있는 사람 하나는 꼭 있다더니 그 말이 실감났다. 다음에 운 좋게 다시 이 분을 만나면 넌지시 인사라도 건네봐야겠다고 다짐했다.
2. 칠만 칠천 원/ 김병연(6)
1)아뿔사! 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머릿속은 걷잡을 수 없는 토네이도 그 자체였다.또 하나의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만 것이다
차가 인도 되어졌는데 고객은 한참이나 이리저리 상태를 살펴본 후 시 운전한다면서 나와 동승해서 10분정도 도로를 달렸다.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인지하고선 시승을 마쳤다
그런데 뒷 자리 시트를 유심히 쳐다보는 고객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몇번 시트를 조작하더니 잠시 나를 보자고 했다.
"이 차 잘 못 나온 것 같은데요. 옵션이 하나 빠져있어요. 시트가 제가 원하는 종류가 아니에요. 봐요. 앞 뒤로 움직이지 않잖아요." 맞았다. 엉뚱한 제품으로 장착 되어있었다.
2) 당초 이 차는 신형으로 처음부터 꽤나 낯설었지만 제품의 사전 지식을 완벽하게 획득하지 못한 것이 화근의 원인이 되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꼼꼼히 숙지한다고 하였지만 역부족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3)이제껏 내 인생은 곡예사가 외줄타기를 하듯 늘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다. 순간순간 용케도 고비를 잘 넘겨오기도 했다. 그 어떤 알 수없는 위험같은 것을 감지하면서 버텨왔다. 고단한 인생이 아니었던가. 잔인할 정도로 운명은 내 주위를 서성이며 빈 틈을 노려 단숨에 일격을 가할 태세로 일관해왔지 않았던가.
4)고객은 냉큼 키를 던져주면서 원래 주문했던 차를 가져오라고 했다. 평소 막역하게 지내온 사이였지만 이때만큼은 냉정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수긍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등록한 차를 취소해야만 하는 까다로운 절차가 눈 앞에 떡 버티고 있었다. 과거의 경험을 떠올려 우선 차등록사업소로 대책없이 정신없이 차를 내몰았다. 업무마감을 10여 분도 채 남겨놓지 않았다. 핸들을 쥔 손은 가늘게 떨고 있었고 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도착해서 일단 담당 공무원께 등록취소 사유를 설명하였다. 첫 말에 단호히 거절당하였다. 창구 앞 문구가 눈에 '확' 들어왔다. '등록후 어떤 사유에도 불구하고 등록 취소는 불가합니다.' 신중을 기해서 등록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적혀 있었다.하지만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자존싱 따위는다 내팽겨치고 애원에 애원을 거듭하는 수밖에 없었다. 무릅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담당자는 한참이나 고민을 하는 듯 하더니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면서 서류를 접수해 주었다. 고맙기 이를데 없었다.
5)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것이 결코 끝은 아니었다. 등록 취소는 운 좋게 되었다 하더라도 회사를 상대로 차 반납 절차를 거쳐야만 하는 골치 아픈 순서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다음날,차량 반납 담당 부서 직원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하였다. 답변은 제품 하자가 아닌 이상 영업직원 본인의 실수로 인한 그런 경우는 절대 반납은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고객을 설득해서 빠른 시일내에 원하는 시트를 주문해서 재 장착을 하는 일만 남아있었다. 일단 만나서 설득을 해보기로 하였다 . 회사의 방침을 예기한 뒤 , 심기가 몹씨 불편하시겠지만 완벽하게 시트를 장착해드릴테니까 시간적인 여유를 주시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비쳤다. "알았습니다. 일주일 시간을 줄테니 그때까지 완성되지 않으면 책임을 당신께 묻겠습니다."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6) 고민 끝에 서비스 센터 고충담당 실장과의 면담을 시도하였다. 답변은 신차이기 때문에 지금 신청해도 부품 도달하기까지는 족히 2개월은 소요된다고 하였다. 긴급 요청을 독촉해도 자기로서는 이렇다할 방법이 없다고 잘라 말하였다. 힘없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의 시도를 다시 해보기로 마음을 굳게 다졌다.
그만큼 절박한 심정이 되어있었다.
7)서울 본사 방문계획을 잡았다
불가능은 가능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걸림돌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그것을 제거하기엔 그리 쉬운 일은 아닐터이다.신념은 바위도 뚫는 법.'너는 이제껏 끈질기게 버티며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는가. 35여 년 영업인생에 이제와서 종지부를 찍을수야 없지않겠는가.'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비록 무신론자이지만 이때만큼은 신의 존재를 믿고 싶었다. 아니 믿어야만 했다.
마음으로 무언의 기도를 웅얼거렸다. 한 인간의 간사함이 배어있는 모습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8)이튿날, KTX에 몸을 실었다.,열차 창 밖에는 진눈께비가 이리저리 흩날리고 있었다. 심란한 내 마음을 마냥 대변하는 듯했다. 오후 2시경 본사 로비에 도착하였다. 경비원의 친절한 안내에 따라 10층에 위치해 있는 기획조정실장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자 한 직원이 맞이해 주었다. 방문한 이유를 묻자 며칠 전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소상히 알려주었다. 한참이나 듣고 있던 그 직원은 사전에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나타나 다짜고짜 윗 분을 면담요청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퉁명스럽게 말하였다. 또한 해외출장이어서 내일 출근한다고도 하였다. 직원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미리 연락한다고 해서 일개의 영업사원을 만나 줄리가 만무하기 때문에 무작정 대쉬한 것이었다.
9) 어쨌든 기필코 그 분을 만나지 않고서는 절대로 내려가지 않겠다고 목청껏 소리내어 주장하였다
직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그럼 내일 어렵지만 만남을 주선해 보겠노라고 하면서 돌아가라고 했다. 다시 내려가기도 어중간해서 인근 모텔에 숙박 하기로 했다. 그야말로 사생결단이었다.
드디어 오전 10시에 만남이 이루어졌다. 그간의 사정을 다시 소상히 뱕혔다. 다 듣고 난 후 그분은 어딘가로 전화를 하더니만 일주일 뒤에 부품이 도착하니 안심하고 내려가라고 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나의 저돌적인 뚝심이 통했던 사례였다
10) 드디어 거짓말같이 정확한 날짜에 부품이 도착하몄다. 시트 교체작업을 서둘러 한 후 고객에게 인도되었다. 그제서야 고객은 수고했다면서 악수를 청하였다. 물론 금전적인 손실이 크긴 했다..당초 고객에게 약속한데로 수억이 들더라도 내가 다 떠안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기꺼이 김수할 수밖에 없었다. 차 한잔 하면서 조심스럽게 고객에게 넌지시 한가지 의견을 전달하였다. "대표님, 꼭 이 말씀은 드리고 싶습니다. 디른 건 몰라도 발생한 제반 비용은 주셔야 될 것 같습니다. 여기 영수증이 있습니다.""
영수증엔 정확히 칠만 칠천원이 적혀있었다.
"아,예. 물론 드려야지요. 저희 집사람한테 얘기해 보겠습니다. 제가 이런 금젼적인 문제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다.그 자리에서 바로 줄 것으로 기대했는데 야박함이 절절히 묻어나 있었다.
어떤 경우에든 고객은 등륵비및제반 수수료는 등록사업소에 지불하게 되어있다. 편의상 내가 그것을 대납했을 뿐이지 무료서비스가 아닌 것이다.
11)사무실에 도착해서 있는데 왠 낯선 폰 번호가 떴다. 받아보니 고객의 부인이었다. 다짜고짜 칠만 칠천원 못 주겠다면서, 당신이 모든 것을 잘못했기 때문에 그것까지도 책임지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서로 경우가 다르기 때문에 주셔야 한다고 항변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혹자는 그까짓 칠만 칠천원이 무슨 대수냐고 할른지 모르겠지만 마지막 자존심이 걸려있는 중차대한 상황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거칠게 쏘아부치는 언사에 별 수 없이 수락하고 끊었다.아! 돈은 피보다 물보다 진한 것인가.
12) 15일 동안 그 일로 얼마나 많은 불면의 밤을 지새웠던가. 가슴을 짓누르는 엄청난 중압감으로 인한 지독한 스트레스는 당해보지 않은 이는 모를 것이다
식음도 전폐하다시피했다.체중도 2키로그램이나 빠졌다.사건은 비록 일단락 되었지만 씁쓸한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어 개운치 못하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귀한 교훈을 얻게되었음으로 위안을 삼기로 했다
실수는 다음의 현명함을 얻기 위한 또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음을...
칠만 칠천원.
주홍글씨로 새겨진 것처럼 스티그마(낙인)로 여전히 마음 속 깊이 박혀져있다.
|